2014년 1월 25일 토요일

[스크랩] 원자간 양자 원격이동 최초 성공

미국과 오스트리아 연구팀이 양자의 `얽힘 현상'(Entanglement)을 이용한 원자 간 양자 원격이동에 성공, `꿈의 컴퓨터'로 불리는 양자컴퓨터개발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게 됐다.

원자 사이의 `양자 상태'의 이전을 말하는 양자 원격이동은 이제까지 레이저 광선 사이에서는 성공을 거둔 적이 있으나 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원자 사이에서구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양자 원격이동에 대한 연구결과는 개별적으로 연구를 진행한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와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학 연구팀이 거둔 성과로 17일자 네이처 최신호에 동시에 게재됐다.
NIST는 베릴륨 원소를 이용해 양자 원격이동을 구현했으며 인스브루크대학 연구팀은 칼슘 원자를 이용했다.

양자 원격이동은 아인슈타인 박사조차도 기괴한 현상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불가사의한 현상인 이른바 `얽힘 현상'을 이용한 것으로 얽힘 현상은 두 입자가 거리와 무관하게 결합되어 영향을 미치는 상호작용을 말한다.

양자컴퓨터에서 양자의 원격이동은 컴퓨터의 0과 1처럼 2진수 디지털 값을 가질뿐 아니라 두 값을 동시에 가질 수도 있는 양자 비트(quantum bit)를 말하는 큐빗(qubit)의 형태로 사용될 수 있다.

캘리포니아공과대학의 H.J 킴블 박사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원자 간 양자 원격이동 성공은 "기념비적인 성과"라면서 대량의 분자 사이에서 양자 원격이동을 구현할수만 있다면 초고속 양자 컴퓨터 개발도 가능하며 공상과학 드라마 `스타 트랙'에서나온 공간이동도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평가해다.

양자컴퓨터는 원자 회전방향과 전자 위치 등을 수치로 표현해 계산할 수 있도록한 양자이론을 응용해 현존하는 컴퓨터와는 전혀 다른 작동원리를 사용하는 꿈의 컴퓨터로 미국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이 80년대 초 개념을 제시했다.

(뉴욕 AP/연합뉴스)
출처-한겨레

우주와 생명, 인간지능의 계층적 구성원리, 그리고 재현

당구장의 당구공이 정해진 규칙대로 정확히 움직이는데 반해, 놀랍게도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애매모호한 확률로 움직인다. 그 운동 하나하나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며, 운동을 정확히 측정하면 할수록 그 위치가 어디인지가 확률적으로 더 애매하게 되버린다.(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 이 현상은 관측상의 오류가 그 근본 원인이라는 추측을 깨고 소립자세계의 본질적인 현상으로
오래전에 결론이 지어졌다.

그럼 이런 애매모호한 특성을 갖는 소립자들이 구성하는 우주는 역시 측정 불가능의 애매 모호한 성격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것은 소립자만큼 작은단위의 세계에서만 적용되는 이야기이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 소립자들이 구성하는 우주는 그 소립자의 성질을 무력화 시키고 소립자들의 집합들에 의한 다른 군집의 지배를 받는다.

원자와 분자들의 세계에서는 소립자들의 애매모호한 특성을 거의 무마시키고 상당히 deterministic하게 행동한다. (deterministic하다는 것은 주어진 원인에 대해 정확히 정해진 행동을 한다는 뜻) 분자들의 브라운 운동 조차도 정확히 주변 분자들과의 충돌과 반발력에 의해서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는 컴퓨터상 구현으로 random한 요소를 전혀 넣지 않고서도 분자들의 브라운 운동을 재현할 수 있다는 것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대기를 구성하는 공기와 수증기 분자들역시 random한 요소 없이 100% deterministic automata로 재현된다. 물론 컴퓨터로 만들어서 돌려볼 수 있다. 세포내 분자들의 움직임조차도 컴퓨터상에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 이역시 random한 요소는 단 하나도 넣지 않고 오로지 A->B이라는 deterministic규칙으로만 코딩해서 만들어 낼 수 있다. 무작위해보이는 대기분자의 움직임, 브라운 운동, 세포내의 활동등을 전혀 무작위하지 않은 자동기계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이유는 determinstic한 논리안에 deterministic하지 않은 무작위한 논리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 논리가 바로 recursion안에 숨겨진 예측 불능성이다.

세포의 활동은 그 세포질안의 단백질과 효소들의 활동이 이미 예측 불가능한 무작위한 흐름을 타기 때문에 세포 자체가 deterministic하다고 말할 수 없다. 세포정도의 레벨로 올라오면 이미 deterministic한 성질은 없어지고 무작위한 성질이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세포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가 무작위한 것은 아니다. 분명 세포를 이루는 단백질과 효소, 아미노산 분자, 물분자들은 서로 완벽히 정해진 물리학적 규칙에 따라 상호작용을 하며 움직인다.

세포들이 수정체로 부터 세포분열하여 성장하는 과정은 거의 deterministic하다. 이는 DNA가 완벽한 determinism에 의해 동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포분열된 그 결과는 상당히 그 규칙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반면 같은 DNA로 만든 생명은 모양이 모두 같다는 점에서 똑같은 세포분열과정을 거쳤을 거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뇌의 경우는 그 뉴런세포 하나하나가 완벽한 determinism에 작동하는데도 불구하고 전체 뇌의 행동은 완전히 무작위, 즉 unpreditable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심장, 위, 간등의 기관은 상당히 주위한경에 대해 규칙적인 행동을 하는 determinism을 가지고 있다.

이런 기관들이 모인 사람의 경우에는 거의 제멋대로 움직이는 행동을 한다. 사람을 구성하는 하부구조의 determinism은 서로서로 얽혀서 무마되어 버린다. 따라서 사람은 기계적인 존재로 생각되지 않고 사람을 컴퓨터로 만들겠다는 시도는 대단히 무모한 것럼 보이고 나아가 불가능해 보이는게 사실이다.

사람들이 모인 군집은 어떨까? 한 도시의 사회활동과 문화활동 금융시장 나아가 국가간은 교류, 전쟁이러한 현상 등은 거의 예측불능한 모델이다. 주식시장의 동향이나 역사적인 사건들의 예측, 문화적인 발전, 유행의 흐름, 어느것 하나 기계적으로 움직인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없다.

시야를 넓혀서 사람이 사는 지구의 태양계내의 행동을 살펴보면 그 안의 작은 사람과 같은 생명이나 세세한 움직임은 거의 무마시켜버리고 태양과 주변 행성과의 만유인력법칙에 의해 상당히 deterministic하고 예측가능한 세계를 구성한다.

지구가 1년후 어떤 공전괘도에 있을 지, 주변 행성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거의 정확히 예측가능하고 따라서 컴퓨터위에 구현하는 것은 매우 쉽다.  그 이상의 태양계와 은하계, 은하집단, 그리고 우주의 행동등은 그 하부구조의 성격을 무마시키고 또다른 어떤 세계의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은 명확하다.

이렇듯 우주와 생명이 계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미시세계의 결정론이니 비결정론이 거시세계의 결정론이나 비결정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종종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두 세계간에 관련성이 없다고 보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컴퓨터상의 모델링을 생각해 보자. 모든 레벨에서 컴퓨터상의 구현이 직접가능한가의 여부를 알아볼 때, 만약 그 레벨이 불규칙하게 움직여서 도저히 컴퓨터로 모델링 하지 못하는 상태이면 그 하부구조의 determinism을 모델링해서 윗레벨로 올라가는 방법을 쓰면 가능할 것이다.(구현가능성은 현재 컴퓨터 수준에서...)

 레벨   determinism   predictability   컴퓨터상 구현 가능성
-----------------------------------------------------
  우주            x              x                    x
  은하계         x              x                    x
  태양계         o              o                    대략 불능
  지구            o              o                    대략 가능
  인간사회      x              x                    불능
  인간            x              x                    불능
  기관            x              x                    가능하기도
  세포            x              x                    불능
  DNA            o              o                    가능
  분자,원자     o              o                    대체로 가능
  소립자         x              x                    거의 불능

태양계 전체의 모델을 만드는데는 그 하부구조의 지구를 포함한 생성의 모델로 부터 쌓아올라가지 않는 한 컴퓨터안에 실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지구의 공전, 자전모델은 그 지구안의 하부레벨-생명과 구성물질의 모델링없이 같은 레벨의 행성과 태양만을 모델링함으로서 가능하다. 반대로 인간과 인간사회를 그 레벨의 현상만
모델링해서 구성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람의 기관, 세포까지도 거의 determinism을 보이지 않다가 거우 DNA까지 내려와서 컴퓨터로 실현가능한 성질을 갖게 된다. 하지만 DNA를 제외한 대부분의 분자집합체는 거의 determinsm을 찾아볼 수 없고 분자하나하나의 레벨가지 내려간 분자세계에 와서야 상당한 determinism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아래의 소립자의 세계는 거의 손대지 못할 정도로 직접 모델링한다는 것은 어려운 세계이다.

인간과 사고, 지능등의 부분만을 확대해서 다시 한번 같은 관점으로 생각해보자.

레벨     determinism   predictability       컴퓨터상 구현 가능성
--------------------------------------------------------
....
사고작용         x              x                    불가
뇌                  x              x                    불가
뉴런세포         o              o               거의 완벽히 구현 가능.
...

인간의 경우 그 하부구조를 찾아 내려들어가더라도 기관이나 세포등에 거의 determinism이 존재 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을 컴퓨터에 모델링하는 것은 DNA레벨 에서부터 분자레벨까지 모조리 구현하지 않는 이상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참으로 묘하게도 인간 기관중 거의 유일하게 뇌의 하부구조인 뉴런만은 거의 완벽한 determinism을 따르는 세계이다. 더구나 인간구현의 핵심인 뇌의 바로 아랫레벨이 determinism을 따르기 때문에 주변의 널리고 널린 복잡한 기관들을 모델링하지 않고서도 바로 뇌와 그 사고작용과 나아가 인간레벨까지 구현할 수 있는 길이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계층에 의존하는 모델링은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 계층만 혹은 그 아래 하부계층에서 쌓아올려 만든 모델링 방법은 원래 실세계에 존제하는 시스템과 다르다. 실세계에서는 상당히 아랫부분 소립자세계에서부터 여러 윗레벨을 관통하여 상항히 윗부분의 레벨에 직접영향을 주는 경우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소립자를 직접 관측하는 경우는 소립자 하나가 분자레벨의 시스템에 직접 영향을 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외부의 자외선이 직접 생명체레벨의 돌연변를 유발하기도 하며, 뇌의 뉴런의 신경전달물질의 이상에 의해 정신이상을 유발하거나 초신성 폭발에 의해 그 위아랫 구조 모두가 영향을 받기도 한다. 세포내의 분자들의 온도에 따른 행동변화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작용 구현을 목적으로 한다면 소립자레벨의 현상-예를 들면 우주방사선이 세포를 관통할때의 현상, 세포내 물분자의 온도에 따른 행동변화, 세포내의 갖가지 화학작용을 포함한 물리법칙등등 갖가지 하부구조를 모조리 모델링해야만 가능할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한레벨에서 윗레벨로 올라가며 구성되는 과정에서 갖가지 복잡한 상호작용은 거의 상쇄되어 거의 의미를 갖기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상호작용등이 거의 상쇄되지 않고 윗레벨로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그 레벨 자체가 위아래 구분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접근이 불가능하다.

인간 구성의 그 어느부분을 따져봐도 뇌의 뉴런 만큼 이러한 가정을 만족시켜주는 부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진화적인 관점으로 보면 어느정도 타당하다. 진화라는 느리고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뇌를 구성해서 그 생명체를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게 할 수 있으려면 그 뇌의 구성이 완벽한 digital로직으로 구성되어야 방대한 탐색공간상에 적합한 뇌구조로 변형시키며 진행하는 것이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약간의 계곡만 나타나도 local goal에 빠져서 앞으로 진행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버렸을 것이다. 지금의 뉴런에 의존한 뇌구조가 생명체가 가장 만들기 쉬운 구조임과 동시에 진화에 의한 실험을 대단히 쉽게 해주는 구조라는 것이다.

생명현상에서 어느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모든 레벨을 모델링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럼 어디까지 포함시켜서 모델링해야 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

실제로 어디까지가 생명이고 어디부터는 생명과 무관한가를 논하기 위해서는 그전에 또다른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과연 이런식으로 모델링한 생명체가 컴퓨터상에 구현된다하더라도 이것이 진정 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인가 하는 문제를 포함해서 다분히 철학적인 이야기를 끌고 와야 설명이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에 대한 정의를 다시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결정론적 예측불능성(deterministic,but unpredictable)

deterministic한것과 unpredictable(예측불능)한것의 개념은 무엇인가. deterministic하면 predictable(에측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사고였다. 이에 대한 반발은 역사가 꽤깊은데 그중 상당히 오래된것이 폰노이만이 도전한 random number generating(무작위수 만들기)였다. 그는 deterministic한 기계(컴퓨터 등)에서도 과연 random number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에 도전하여 현실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보였다. 이것이 deterministic하지만 unpredictable(예측불능) 할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였지만 사람들이 별 관심이 없어서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엑셀에서 랜던넘버 제레네이팅을 쓰고 있다. 이렇게 결정론적 컴퓨터로 뽑아낸 랜덤넘버가 정말 랜덤한지는 제한된 시간내에 검증불가능하고 검증불가능하다면 이것은 진정한 랜덤이라고도, 혹은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 이후에 non-linear방정식 연구에 매달린 수학자들이 linear한 세계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을 발견하고 굉장한 어려움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현상들에 명확한 이해와 관점을 제공한 것이 Fractal의 아버지 만델브로트가 만든 만델브로트 곡선이다.

이 만델브로트 곡선이 우리에게 부르짓고 있는 혁명적 사상이란 "deterministic하고 동시에 에측불능(unpredictable)하다는 것" 이다.

z_{n+1}=(z_n)^2+c 이 한줄짜리 간단한 공식이 예측불능성질을 갖는 이유는 "recursion" 즉, 자기회귀의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로 수학적인 방정식에 국한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자기회귀성질을 갖고있는 명제들은 본질적으로 예측불능과 같은- 단순논리에서는 전혀 보지 못한- 기묘한 성질을 갖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현대 수학, 철학 과학을 비롯한 많은 사건들이 이러한 자기회귀(recursion)성질에 대한 무지에 대해 조금씩 깨달으면서 상당한 발전을 이뤘다. 고대 수학의 무한의 개념에 의한 파라독스- 거북이와 토끼의 경주- , 참과거짓을 따질 수 없는 명제 "이 명제는 거짓이다"라는 명제, 증명가능한 완벽한 수학공리체계의 무모순성불가에 대한 증명 - 괴델의 불완전성정리는 recursion을 갖는 명제들 때문에 무모순의 불가를 이야기함을 증명한 셈이다. 이 모두 recursion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생명,인간.. 우주 이 모두는 결정론적 계산으로 이루어진 예측불가능적인 세계이다.

앨런 튜링과 우주 최대의 발명

영국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

27세에 이미 현대 컴퓨터의 모델이라고 할 ‘튜링 머신’을 고안했다.
연산컴퓨터 ‘콜로서스’를 만든 게 1943년. 우리가 세계 최초로 알려진 ‘에니악’보다 2년을 앞선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난공불락이었던 독일의 ‘애니그마 암호체계’를 해독한 것도 그다.

그러나 그는 단 한 가지, 자신의 성적(性的) 취향이 다수와 다르다는 이유로 쓰레기처럼 내동댕이쳐진다.

1952년 동성애 혐의로 체포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그에게 10년간 감옥생활을 할 것인지, 아니면 당시 시험적인 성사범 교화책이었던 에스트로겐(여성호르몬) 주사를 맞을 것인지 양자택일을 명령한다. 에스트로겐 주사는 일종의 ‘화학적 거세(去勢)’였다.

지속적인 여성호르몬의 투입으로 그는 치명적인 신체의 변화를 겪게 된다. 발기불능, 중추신경계 손상…. 부풀어 오르는 유방... 사람들의 멸시와 모욕 속에 그는 더는 견딜 수 없었다.

1954년 6월 7일. 튜링은 치사량을 정확히 계산한 뒤 시안화칼륨(청산가리)을 사과에 주사했다. 그리고 백설공주처럼 ‘독사과’를 베어 문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사회가 나를 여자로 변하도록 강요했으므로 순수한 여자가 할 만한 방식으로 죽음을 택한다!”

그것은 자신의 성 정체성에 사형선고를 내린 동시대에 대한 야유였다.

비운의 천재 튜링. 그는 인공지능 개념을 처음 생각해냈다. “답이 컴퓨터에서 나왔는지 사람의 뇌에서 나왔는지 분간할 수 없다면 기계는 이미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죽기 전 그는 생명체의 형상 생성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신의 비밀에 너무 가까이 다가갔던 것에 대한 재앙이었을까.

그 후 20여년이 흐른 뒤, 애플사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인류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었을 때 그 이름을 ‘애플(Apple)’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한 입 베어 먹은 사과모양을 로고로 택한다.

‘진정한 컴퓨터의 아버지’에 대한 경의(敬意)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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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링머신..... 그의 이름을 딴 이 매우 단순한 논리적 기계는 우주 전체의 비밀을 아우를 수 있는, 현대 컴퓨터 이론의 기념비적 창조물이다. 우주의 비밀을 풀 수 있기 때문에 우주 최대의 발명이라 여겨지는,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주문의 허구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주문의 허구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해라. 당신이 하는 일을 사랑해라.”
이 말은 액자에 넣어져 “잘 큐레이팅 됐다”는 말 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는 거실의 한 켠에 놓였다. 이 방의 사진은 유명한 디자인 블로그에 처음 올라왔고, 핀터레스트, 텀블러, 페이스북에 수천 번 공유됐다. 비록 이 방이 노동을 여가의 영역으로 가져왔지만,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거실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곳이 됐다.

오늘날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이 비공식적인 우리 시대의 직업 신조가 되었다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은 (우리를) 구제해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 노동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이 대부분의 노동자를 비인간화시킨다는 사실이다.

겉으로 보기에,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은 격려가 되는 조언이다. 이 조언은 우리가 가장 즐겨 하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하라고 촉구한다. 하지만 왜 우리의 즐거움이 돈벌이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이 말을 듣는 이들은 누구인가?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은 특권층과 엘리트주의를 고귀한 자기향상으로 위장한 세계관이 비밀스럽게 건네는 악수다. 이러한 방식의 생각에 따르면, 노동은 보상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행위가 된다. 만약 금전적 이익이 바로 따라오지 않으면, 그건 노동자의 열정과 결단력이 불충분하기 때문이라고 그럴듯하게 포장된다. 이 말이 실제로 해낸 일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노동을 시장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서 한다고 믿게 만든 것이다.

격언은 보통 수많은 기원을 갖고, 여러 가지 이야기에서 재탄생된다. 하지만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의 기원은 이 말의 정확한 특성을 혼란스럽게 한다. 옥스포드 레퍼런스는 이 말을 여러 사람들 중에 Martina Navratilova와 François Rabelais와 연관 짓는다. 인터넷은 종종 이 말이 과거 동양에서 공자가 한 얘기라고 하기도 한다. Ophrah Winfrey와 몇몇 긍정주의자들은 이 개념을 그들의 레퍼토리에 수십 년째 포함 시키기도 했다.

심지어는 금융계조차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개념을 받아들였다: 이번 주 CNBC에서 사모 펀드 회사인 Carlyle Group의 공동 CEO는 “만약 당신이 하는 일을 사랑한다면, 그건 더 이상 ’일’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최근 이 말의 가장 중요한 에반젤리스트는 전 애플 CEO인 Steve Jobs였다. 2005년 스탠포드 대학의 졸업 연설에서 Jobs는 이 개념을 넣어 애플을 만든 이야기를 했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으십시오. 당신이 연인을 찾을 때에도 그렇듯이 당신의 일에서도 이 말은 변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일은 당신 삶의 커다란 부분을 채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만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위대하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네 문장에서 “당신”과 “당신의”라는 말은 여덟번 나왔다. 개인에게 집중된 이 말을 Jobs가 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Jobs는 그 스스로에게 직업인으로서 특유의 이미지를 덧씌운 사람이다: 영감을 주고, 캐쥬얼하고, 열정적인 이미지 말이다 – 이 모든 이미지들은 이상적이고 로맨틱한 사랑과 잘 맞는다. Jobs는 그런 열정적인 직업인 이미지를 그의 회사와 매우 효과적으로 잘 융합시켰고, 그의 검은 터틀넥과 청바지는 애플과 애플의 직원들을 상징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애플을 그의 개인적 사랑의 노동으로 포장하면서, Jobs는 지구 반대편에 숨겨진 애플의 공장에 있는 수천명이 노동자들을 생략해버렸다 – Jobs가 그의 사랑을 실현시킬 수 있게 해준 바로 그 노동자들 말이다.

이러한 생략은 드러날 필요가 있다.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개념이 해롭지 않고, 소중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스스로 나르시즘에 초점을 맞춘 것일 뿐이다. Jobs의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공식은 Henry David Thoreau의 노동에 대한 유토피아적 시각에 반한 우울한 안티테제이다. Thoreau는 “원칙 없는 삶(Life Without Principle)”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어떤 마을이 노동자들에게 보수를 후하게 준 덕에 그들이 오직 생계 때문에 하급의 것들이 아닌, 과학적이고 도덕적인 것들을 위해 일한다고 느낀다면, 이는 좋은 경제라 할 만하다. 돈 때문에 일하는 사람을 고용하지 말고, 일을 사랑해서 하는 사람을 고용해라.

인정하자면, Thoreau가 노동자 계급을 위한 어떤 감정이 있었던 건 아니다. (누군가 “과학적이고, 심지어는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며” 기저귀 빨래를 한다는 상상을 하긴 힘들다. 그가 얼마나 돈을 받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회가 일정 부분 노동에 대해 잘 보상해줘야 하고, 노동이 의미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유지했다. 대조적으로 21세기에 Jobs 추종자들의 관점은 우리에게 시선을 내부로 돌리라고 요구한다. 그건 우리를 더 넓은 세상에 대한 어떤 의무나 인식으로부터 면제해준다.

이와 같이 개념을 분리하면서 발생하는 한 가지 결과는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계층에 따라 구분선을 긋는다는 것이다. 일은 두 가지 상반된 계급으로 나뉜다: 사랑할만한 일(창의적이고, 지적이며, 사회적으로 유망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반복적이고 다른 직업과 뚜렷한 구분이 없는 단순노동)로 말이다. 사랑할만한 일을 하는 쪽에 있는 사람은 노동인구에서 소수를 차지하면서도 부나 사회적인 위치, 교육, 사회적 인종 편견, 정치적 영향력에 있어 더 특권계급에 속한다.

사랑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된 사람들에게 이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신조 아래, 동기에서 벗어나서 행해지거나, 사랑 이외의 것들이 필요한 노동은 – 사실은 대부분의 노동이 그렇다 – 잊힌다. Jobs의 스탠포드 연설에서 그랬듯이, 사랑할 수 없지만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들은 우리의 의식에서 추방된다.

Jobs를 하루라도 CEO에 있게 해줄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일에 관해 생각해보자. 그가 먹는 음식은 농장에서 수확되어 아주 먼 곳으로부터 배송된다. 그의 회사 제품들은 조립되고, 포장되고, 배송된다. 애플의 광고 대본이 작성되고, 배역이 정해지고, 영상이 찍힌다. 사무실 휴지통이 비워지고, 잉크 카트리지가 채워진다. 일자리는 양쪽 모두에서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들이 사랑하는 일 때문에 바쁜 엘리트들에게 노동자의 상당수가 효과적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면, 오늘날의 노동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무거운 중압감이 – 쥐꼬리만한 봉급, 엄청난 보육 비용 등등 – 지배 계층의 진보적 당파 사이에서조차 정치적인 이슈로 거의 등록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놀랄 수 있겠는가?

대부분의 일을 무시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머지를 재분류하면서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은 가장 우아한 반-노동적인 이데올로기가 될 것이다. 만약 일과 같은 것이 없다면, 도대체 왜 노동자들이 모여서 그들의 계층적 이익을 주장해야 하는가?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은 직업을 개인적인 보상을 보고 선택할 수 있다는 게 특권이고, 동시에 이것이 사회경제적인 계층의 표시라는 사실을 속인다. 심지어 프리랜서 일을 하는 그래픽 디자이너조차도 예술학교의 등록금을 내주고, 멋진 브루클린 아파트를 임대해 줄 수 있는 부모를 가지고 있다면, 그녀와 같은 성공을 바라는 이들에게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고 커리어 조언을 해 줄 수 있다.

우리가 만약 실리콘 밸리 기업가나 박물관의 홍보담당자, 혹은 두뇌집단의 일원으로 일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에게 진실할 수 있는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믿는다면, 호텔 방을 청소하고 커다란 박스 가게에서 선반을 채워넣는 사람들의 소망과 내면의 삶에 대해선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답은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힘들고 낮은 봉급을 받는 일들을 그 어느 때보다 미국인들이 많이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할 것이다. 미국 노동부의 통계에 따르면, 2020년까지 가장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직업은 “사람을 돌보는 직업(personal care aide)”과 “가사도우미(home care aide)”이다. 각각 평균연봉이 19,640달러(한화 약 2090만 원)와 20,560달러(한화 약 2190만 원)인 직업들이다. 특정 종류의 전문적 직업들을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직업으로 격상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매력이 없는 일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낮게 평가하게 된다. 매력이 없는 이 일들이 – 특히 사람을 돌보는 직업은 더욱 그렇다 – 사회가 기능할 수 있도록 해주는데도 말이다.

만약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이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고, 사랑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궂은) 노동의 상당한 부분을 격하시키거나 안 보이도록 만든다면, 전문적인 직업들에게도 커다란 피해를 줄 것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주문은 그 어떤 곳보다도 대학에서 더욱 파괴적이다. 평균적인 2000년대 중반 박사 과정 학생들은 박봉에도 불구하고 고대 스칸디나비아 신화와 아프로-쿠바 음악의 역사에 대한 열정을 쫓기 위해 금융계와 법조계(지금은 좀 덜 쉽다)의 벌기 쉬운 돈들을 포기했다.

이러한 고상한 소명에 답한 보상은 대학 고용 시장에서 미국 학부 교수단의 41%가 겸임 교수라는 사실로 돌아왔다 – 이런 시간 강사들은 보통 더 낮은 봉급을 받고, 아무런 추가수당을 받지 못하며, 사무실도 없고, 직업 보장도 안 된다. 또한 그들이 일하는 학교에서 장기적인 지원을 받지도 못한다.

박사들이 그렇게 낮은 봉급에 매우 숙련된 노동을 제공하는 데는 많은 요인들이 있다. 경로 의존성이라든가 박사를 따는데 들었던 매몰비용에 대한 생각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은 대학내에 깊숙히 파고들어 있는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신조다. 몇가지 직업들은 근로자 개인의 정체성을 직업을 통해 만들어낸 것들과 매우 친밀하게 융합한다. 학술적인 연구는 순수한 사랑에 의해서 수행되기 때문에, 실제 노동의 상태와 보상에 대해선 뒤늦게 생각하게 된다. 노동의 상태와 보상이 고려된다면 말이다.

“Academic Labor, the Aesthetics of Management, and the Promise of Autonomous Work”에서 Sarah Brouillette은 대학 학부 교수단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우리의 일이 비물질적인 보상을 제공하고, 동시에 우리의 일의 우리의 정체성에 ‘보통의’ 직업보다 더 필수불가결하다는 믿음은 관리의 목적이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가치를 뽑아내는 것일 때, 우리를 이상적인 직원으로 만들어준다.”

많은 대학 교수들이 기업의 근로 환경과 그로 인한 부수적인 가치들을 피하고 있다고 생각하길 좋아한다. 하지만 Marc Bousquet은 그의 에세이 “We Work”에서 대학이 기업에게 실제로 관리 모델을 제공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어떻게 대학에서의 근무공간에 맞먹으면서, 똑똑하고 감성적인 사람들이 높은 수준의 강도로 50~60시간씩 바텐더의 봉급보다 적게 받으면서 일하게 할 수 있을까? 직원들이 엄청난 업무량과 적은 봉급을 보고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해”라고 중얼거리며 책상 위에서 기절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어떻게 우리가 근로자들을 대학의 교수단들과 같이 만들고 그들이 일을 하는게 아니라고 부정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가 우리 기업의 문화를 캠퍼스 문화와 비슷하게 만들어서, 모든 근로자가 그들의 일을 사랑하게 만들 수 있을까?

아무도 즐길 수 있는 일이 적어져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서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일도 여전히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렇게 인정한다고 해도 어떤 식으로든 그게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걸 거부하면, 착취를 향한 문을 열고 노동자들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은 사랑할만한 직종을 가진 근로자들에게조차 착취를 강화한다. 그 직업들에서 근로 시간을 지키지 않고, 정해진 봉급보다 적게 받으며, 무급으로 일하는 것들이 새로운 모범(norm)이 되면서 말이다: 리포터들은 임시 휴직한 사진가들의 일을 하라고 요구받고, 홍보 담당자들은 주말에도 트윗을 하거나 핀터레스트를 하길 기대된다. 전체 근로자의 46%가 몸이 안 좋아 쉬는 날에도 업무 이메일을 확인할 것으로 기대된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사랑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시켜 주는 것만큼 착취를 쉽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

자기만족으로 행복한 근로자들의 나라를 정교하게 만드는 대신, “사랑하는 일을 하라”의 시대는 겸임 교수들과 무급 인턴의 증가를 보여줬다: 사람들은 아주 싼 값이나 무료로, 혹은 재산을 깎아먹으면서까지 일을 하기를 재촉했다. 이러한 케이스들은 대학에서의 학점을 위한 인턴이나 경매에 부쳐지는 패션-하우스 인턴십 같은 모든 것들에서 볼 수 있다. (발렌티노와 발렌시아가가 한 달간 계속되는 인턴십을 경매에 부친다. 물론 자선 목적이라면서 말이다.) 진행 중인 ProPublica의 탐사보도가 밝힌 것처럼, 무급 인턴은 미국의 전체 노동인구에서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존재하고 있다.

무급 인턴이 패션, 미디어, 예술 같이 크게 사회적으로 선망되는 분야에 많이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 산업들은 근로자들이 실제 임금 대신에, 사랑의 이름 안에서 사회적인 통화를 위해 기꺼이 일한다는 사실에 익숙해져 왔다. 이런 기회들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은 물론 전체 인구의 압도적인 대다수이다: 임금을 위해 일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 말이다. 이러한 배제는 경제적, 직업적인 부동성을 더욱 경화시킬 뿐 아니라, 이러한 산업들을 사회가 제공하는 다양한 목소리들로부터 격리시킨다.

그리고 Madeleine Schwartz가 Dissent에 썼듯이, 인턴에게 많이 의존하는 이러한 산업들 – 패션, 미디어, 예술 – 이 여성화 되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의 또 다른 해로운 결과는 이것이 아무런 대가 없이 여성의 노동력을 착취하는데 무자비하게 쓰인다는 것이다. 여성은 낮은 봉급이나 무급 노동인구의 대다수를 구성한다; 베이비시터, 가사도우미, 겸임 교수, 무급 인턴에서 여성은 남성의 수를 넘어선다.

이 일을 고졸이 하든 박사가 하든 상관없이, 이 모든 일들을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은 그 일을 하는데 임금이 우선적인 동기가 되어선 안 된다는 믿음이다. 여성들은 그들이 선천적인 양육자이고, 남을 기쁘게 해주길 바라기 때문에 일을 해야만 한다고 간주한다; 무엇보다도 여성들은 무보수로 아이들과 노인들을 돌보며, 아주 먼 옛날부터 가사일을 해왔다. 그리고 돈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어찌됐든 여성스럽지 않은 것이었다.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면 당신은 인생에서 하루도 일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약속의 따뜻함에 들떠서 굴복하기 전에, 딴지를 걸어보자. “일을 마치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어서 정확히 누가 이득을 보는건가?” “왜 일하는 사람들이 일을 하면서도 일 하지 않는것처럼 느껴야 하는가?” 그 말이 힘을 실어주는 노동의 착취 메커니즘을 숨기는 동안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은 사실 자본주의의 가장 완벽한 이데올로기적 도구가 됐다.

우리가 만약 우리의 모든 일들을 일로서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말의 적절한 한계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공정한 보상,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 그리고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인간적인 근무시간을 요구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걸 해냈을때, 더 많은 사람들이 진정 사랑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찾게 될 것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주문의 허구 - ㅍㅍㅅ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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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16일 수요일

위대한 환상 - 미소금융(micro finance)

방글라데시 그라민 은행의 유누스 총재는 마이크로 파이낸스에 힘입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불행히도 마이크로 파이낸스를 둘러싼 소란이 점점 고조되고 있다. 비판자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그중에는 초기에 이 계획을 열렬히 지지했던 사람들도 많다. 마이크로 파이낸스를 오랫동안 지지했던 조너선 모두크(Jonathan Morduch)는 최근 데이비드 루드먼과 함께 발표한 논문에서 "놀랍게도 마이크로 파이낸스 운동이 시작된 지 30년 가까이 지났지만 이로 인해 빈민들의 생활이 개선되었다는 확고한 증거는 거의 없다"고 고백했다.

마이크로 파이낸스 사업 관계자들은 초기에 자리를 잡기 위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정부 보조금이나 해외 원조를 받지 않고도 마이크로 파이낸스 기관들이 흑자를 낼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자금을 빌려가는 사람에게 부과되는 이자율이 매우 높았다. 그라민 은행은 초기에는 적정 수준의 이자율을 적용했지만 이는 정부와 해외 원조 기관들의 보조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보조금 액수가 과도해지면서 1990년대 말 보조금을 포기하라는 압력을 받자 그라민 은행은 2001년에 회사를 재정비하고 40~50%의 이자율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라민의 대출자들은 대출금을 돌려막기용 자금으로 활용한다. 가령 딸의 지참금 지불, 가족의 의료비, 등이다. 본래 목적인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기업가 정신 발휘 자금의 정신이 서서히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요인이 있다. 실제 자영업 지원 자금에 사용되었던 자금마저도 실제 이들이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이크로 파이낸스를 빌려간 사람들은 동기부여가 확실하고 사업에 필요한 기술도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한가지 사례가 있다.

1997년 그라민 은행은 노르웨이 전화회사인 텔레노르와 손잡고 지역 여성들이 휴대전화 대여업을 할 수 있도록 자금을 대출했다. 텔레폰 레이디 라는 애칭으로 불린 이 여성들은 1인당 연평균 소득이 300달러인 나라에서 750달러 내지 1200달러까지 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경쟁이 치열해지자 수익은 떨어졌다. 텔레폰 레이디의 숫자는 급증해서 2005년이 되자 방글라데이 연평균 소득은 450달러로 올랐는데도 이들은 연간 70정도만 벌었다. 구성의 오류로 인해 한 사람이 사업에 성공해도 모든 사람은 실패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사업기회가 끊임없이 만들어진다면 문제는 해결된다. 그러나 방글라데시와 같은 개발도상국에서의 현재 기술이나 기술 개발은 한정되어 있고 따라서 사업기회가 다양화되기가 어렵다. 소액대출을 받은 한 크로아티아 목축업자는 근처 목축업자들도 대출로 소를 늘리면서 우유값 폭락을 경험했다. 다른 나라에 유제품을 수출하려고 해도 필요한 기술, 조직력, 자금이 부족하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이유는 이들이 자금이 부족하다거나 기업가 정신이 부족하거나 게으르거나 해서가 아니다. 개인적인 이유도 없진 않겠지만 사회적, 시스템적인 뒷받침이 없다면 이들이 부자나라가 되는데는 분명 한계가 존재한다.


-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2013년 8월 18일 일요일

희망, 꿈, 목표가 없으면 삶

희망, 꿈, 목표가 없으면 삶의 의미가 없을까...그것은 재미있는 삶을 위한 이벤트이나 삶의 본질은 아니다. 살아있다면 살아있음 그 자체가 삶을 이끌 것이다. 희망이 없어도 다시 바다로 나가는 산티아고처럼....

- 이종영 영상인문제작소 이닥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