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슬릿 실험이 감지장치가 있으면 입자성질이 되고 없으면 간섭무늬(파동)가 된다는건데
만약 현실이 컴퓨터 온라인 게임같은거라면 이 모든게 설명 가능함
온라인 게임도 내 캐릭을 이동시키면서 화면에 잡히는 부분만 존재하는거잖아
내 화면에 안잡힌 부분은 프로그램상 존재하기는 해도 구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없는거나 마찬가지지
그러니까 내 캐릭이 있는 곳에 몬스터나 나무같은게 보이면 컴터에 입력된 프로그램이 이미지로 변환되서 화면에 나타나는것이고
캐릭을 이동시켜서 화면에 안보이게 하면 존재하던 몬스터는 단순히 컴퓨터 프로그램상의 기호값으로만 남은채 사라져버리는거지
그리고 다른 사람도 동일한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어도 본질적으로 각자 독립된 컴터화면을 보고 있는거임
그러니까 현실이 온라인 게임같은거라면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거임
ㅋㅋ
- 물리갤
2014년 2월 28일 금요일
이중(二重) 슬릿(Slit) 실험, 의식의 영역
누구나 다 잘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잘 산다는 게 무엇인가요? 어떤 이는 재물이 많아야 한다고, 다른 이는 건강해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이름을 오래 남겨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사람에 따라 아주 많은, 제 각각의 잘 사는 방법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잘 사는 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에 따라 같지 않겠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느냐(?)에 앞서, 모든 것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아는 게 필수입니다. 돈이 많으면 잘 사는 것인지 알고 죽어라고 돈 벌기에 몰두했었는데, 뒤늦게 그게 아니란 걸 알고, 땅을 쳐가며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출세하고 명예롭게 사는 게 전부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고, 건강이 제일인 줄 알았는데, 그 역시 허망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 흔한 게 그런 사람들 아닙니까?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의 본질을 모르고, 그저 눈에 보이는 바에 따라, 그리고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만을 좇아 귀중한 삶을 허비하고 허탈해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든 것의 본질, 과연 물질과 비 물질(정신)이 별개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별개가 아닌 나눌 수 없는 것인가? 이 모든 것을 만든 어떤 별개의 존재(神)가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런 고민을 하는 나는 과연 누구, 아니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런 생각에 동조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근본적인 의문이 해소되지 않고, 돈, 건강, 출세,.... 이런 것들을 추구한다는 것은, 결국 사막에서 신기루를 보고 오아시스를 찾으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근본적인 답을 모르는 상태에서 마감하는 삶은 결코 평안한 임종(臨終)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참선(參禪)을 하고, 요가도 하고, 고행(苦行)도 하고, 기도(祈禱)를 하기도 하고,.... 아주 많은, 다양한 길들로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삶은 그 답을 찾는 순례(巡禮)인 것입니다. 물론 그걸 그렇다고 인식하는 삶은 극히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천만다행히도,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그것, 모든 것의 본질을 알 수 있는 절호의 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나간 역사를 살펴 볼 때, 지금처럼 누구나 잘 살 수 있었던 시절은 없었습니다. 이건 물론 우리가 역사를 기록한 연대(年代)의 범위 이내에서의 얘기입니다. 그 이전, 기록으로 남겨진 시대보다 앞선 시절,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는 모르기에 이렇게 밖에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모든 것의 본질을 탐구해서 잘 살았던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난 시절에는 영(靈)적으로 뛰어난 존재들만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이 시대에는 그런 특별한 존재가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그럴 마음만 낸다면, 잘 살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면 저 같은 존재라도 그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블로그에서 하는 얘기란 게 거의 다 그런 얘기니까 새삼스런 얘기가 아닙니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같은 얘기가 반복됩니다. 이 얘기는 저같이 이과(理科)를 전공한 이에게는 좀 더 쉽게 다가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뭐 복잡한 얘기도 아닙니다. 19세기 말, 그리고 20세기 초, 당시 첨단 물리학자들은 물질(物質)의 본성이 거의 다 규명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 미해결인 부분들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그걸 밝혀내는 건 그야말로 시간문제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런 사소한 미해결 문제점들 중의 하나가, 흑체복사(黑體輻射, blackbody radiation)란 게 있었습니다.
제 전공이 아니고, 또 저 또한 잘 모르는 부분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게 지금 얘기하고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고 넘어가겠습니다. 혹 궁금하신 분들은 인터넷을 검색해 보시면 쉽게 그 설명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의 막스 플랑크(Max Planck)는 이 미해결 부분을 연구하다가 그야말로 엄청난 사고를 치게 됩니다. 실험결과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양자물리학(量子物理學)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창시자가 된 것입니다. 그때까지 물리학을 지배해온 뉴턴(Issac Newton)의 고전물리학(古典物理學)과는 판이하게 상이한, 전혀 새로운 신경지를 인류에게 소개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자물리학의 역사는 이미 100년을 넘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들(비록 물질에 국한한 것이지만)의 내용에는 이 새로운 발견이 빠져있었습니다. 만약 그때, 학교 다닐 때, 양자물리학의 개념을 배울 수 있었더라면, 제 인생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요새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대학입시 논술고사에 양자물리학의 핵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EPR 역설(逆說, paradox)이 나올 정도니까, 아마 고등학교 과정에 양자물리학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가보다(?) 하고 짐작을 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양자물리학의 기본개념을 교과과정에 포함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게 틀림없습니다. 양자물리학이 밝혀낸 바를 받아들이는 존재라면, 그렇게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더 건강하려고, 더 출세하려고, 그밖에도 많은 것들을 더, 더, 더,.... 하는 비참한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온통 더, 더, 더,... 하는 열기가 더해만 가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이미 그런 내용이 교과과정에 포함된 지 오래인 구미 각국의 상황을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노벨상을 수상한 저명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이 토로한 것처럼, “"양자물리학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가 원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양자물리학이 시사해주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는 존재라면, 이 세상 삶을 이렇게 영위할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번에 얘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양자물리학 중에서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이중(二重) 슬릿(Slit) 실험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 실험 내용 역시 제 전공이 아니라서, 제가 설명하기에는 벅찹니다. 다행히 이중 슬릿 실험을 아주 잘 설명해 놓은 자료를 발견했습니다. 실험의 세부 내용에 대해서는 아래 자료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http://blog.naver.com/sherufa/120099653790
그럼 이중 슬릿 시험의 세부는 건너뛰고, 실험 내용을 가지고 얘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아래 설명은 실제 실험을 알기 쉽도록 다듬은 것입니다. 전자(電子, electron)를 한 개씩 발사할 수 있는 전자총 앞에 세로로 한 개의 틈(slit)이 난 가림판을 설치하고, 그 뒤에는 스크린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전자란 아주 조그만 입자, 알갱이 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스크린을 향해 전자를 발사하면 가림판에 맞고 튀어나오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 전자들은 세로로 난 틈을 통과해서 최종적으로 스크린에 도달합니다. 그렇게 스크린에 도달한 전자들의 흔적은 가림판에 있는 틈을 그대로 뒤로 평행 이동한 것처럼 세로로 난 기둥모양을 남깁니다.
그러니까 전자 대신에 조그만 당구공을 총으로 쓰는 것과 같은 결과라고 보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가림판에 한 개가 아닌 두 개, 평행으로 난 두 개의 틈(slit)을 만들고 전자 대신 조그만 당구공으로 같은 실험을 하면, 스크린에는 가림판에 있는 틈을 그대로 뒤로 평행 이동한 것처럼 세로로 난 기둥모양을 남기는데, 틈이 두 개이니까, 흔적도 두 개의 기둥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비슷한 실험을 당구공 같은 입자가 아닌 파동(波動)을 대상으로 실시하면, 틈이 한 개일 때는 입자로 실험했을 때와 차이가 없이 가림판에 있는 틈을 그대로 뒤로 이동한 것처럼 세로로 난 기둥모양을 남깁니다.
그렇지만 파동의 경우, 두 개의 틈을 가진 가람판으로 실험을 하면, 두 개의 세로로 난 기둥모양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 줄의 간섭무늬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번에는 조그만 당구공 대신 진짜 전자를 가지고 해 봅니다. 자 여기서 양자물리학의 가장 기이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배운 개념으로는 전자(電子)란 것은, 아주 작지만 당구공 같은 알갱이입니다.
그러니까 두 개의 틈을 가진 가림판 앞에서 전자총으로 전자를 쏘아 스크린에 나타나는 흔적은 당연히 당구공 같은 형태, 두 개의 기둥 모양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실제로 측정된 결과는 파동으로 실험한 것 같은 여러 줄의 간섭무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 개의 전자를 쏘기 때문에, 그들 간에 서로 간섭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반론도 고려하여, 전자를 하나씩 발사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유일한 합리적인 해석은 전자가 파동 상태를 유지하지 않고서는 그런 간섭이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자(電子)는 알갱이, 입자(粒子)가 아니라, 실체(實體)가 없는 파동(波動), 떨림이라는 얘기입니다. 그 후 계속된 연구에 의하면 전자(電子)만이 아니라, 물질을 구성하는 다른 아원자(亞原字)들 역시 전자와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이 결과를 토대로 한다면, 모든 것이 다 텅 비었다, 공(空)하다는 얘기가 성립됩니다. 이중 슬릿 실험은 여기가 다가 아닙니다. 전자총에서 발사된 전자가 두 개의 틈 중에서 어느 쪽을 통과했는지를 알기 위해, 틈 바로 뒤에다 측정장치를 설치하고 같은 실험을 했더니, 이번에는 간섭무늬가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전자는 누군가가 관찰을 하면 이번에는 파동 상태가 아니라, 입자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자가 의식(意識)을 갖고, 생각을 한다는, 그러니까 살아있는 존재라는 얘기가 아닙니까?
이걸 관찰자 효과(Observer Effect)라고 부릅니다.
그럼 과연 전자의 본질은 무엇인가, 입자인가 파동인가? 답은 파동, 그걸 양자파동(quantum wave function)이라고 부르며, 전자를 포함한 모든 아원자들이 다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걸 아주 멋들어지게 묘사한 글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계에서 익히 기대할 수 있는 종류의 행태라기보다는 마술에 더 가까워보인다. 당신이 지켜보고 있을 때만 볼링공으로 보이는 그런 공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볼링 레인에다 밀가루를 뿌려놓고 이 ‘양자’ 볼링공을 핀을 향해 굴리면, 당신이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동안에는 밀가루 위에 한 줄의 선을 남기면서 굴러갈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잠시만 눈을 깜빡이더라도 공을 지켜보지 않았던 그 짧은 시간 동안 공은 한 줄의 선이 아니라 마치 사막의 뱀이 모래언덕을 지나갈 때 남기는 물결모양의 흔적처럼 넓은 물결무늬를 남겨놓은 것을 발견할 것이다.
『홀로그램 우주』(마이클 탤보트 지음/이균형 옮김, 정신세계사)
여기까지는 양자물리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얘기입니다. 저도 이 정도로만 알았었는데, 최근 홀로그램 우주(holographic universe)를 공부하면서, 새로운 실험결과를 전해 듣게 됐습니다. 토머스 캠벨(Thomas Campbell)이라는 물리학자가 설명하는 내용인데, 제게는 마커스 드 사토이(Marcus du Sautoy) 교수가 소개한 두뇌 스캐닝 결과 못지않게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물론 이 설명 역시,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실험의 구체적 내용을 쉬운 말로 푼 것입니다. 이중 슬릿 실험을 진행하면서 별도의 장치를 하여 상이한 조건을 조성했습니다. 물론 슬릿에서 관측을 하지 않은 데이터는 예상대로 파동의 간섭무늬를 나타냅니다.
또한 관측 장치를 틈, 슬릿 바로 뒤에 설치하고 실험을 계속합니다. 그런데 관측을 하면서 실험을 하기는 하지만, 그 결과는 판독을 하지 않고, 그냥 컴퓨터가 기계적으로 기록만 했습니다. 실험결과는 두 개의 슬릿 바로 뒤에서의 관측 데이터와 최종적으로 스크린에 나타난 흔적을 개개의 전자마다 측정해서 컴퓨터에 보관했습니다. 그렇게 수집한 100개의 데이터를 무작위로 나누어 2개의 그룹으로 구분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의 데이터는 정상적으로 판독(그러니까 전자가 어느 쪽 슬릿을 통과했는지와 그 전자가 스크린에 남긴 흔적의 위치를 모두 판독)했는데, 결과는 예상대로 관찰자 효과가 반영된 입자(당구공 같은)로 실험한 것 같이, 두 개의 기둥으로 나타났습니다.
두 번째 그룹의 경우에는, 측정 데이터 중에서 전자가 어느 쪽 슬릿을 통과했는지를 관측한 것들은 모두 폐기처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50개의 실험에서는 전자의 슬릿 통과 과정에 대한 측정은 하였으되 그 데이터는 없애버리고, 스크린에 도달한 데이터만 판독했다는 얘기입니다.
자, 과연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까요?
분명 슬릿을 통과할 때, 측정 장치로 관측을 했으니까, 당연히 관찰자 효과가 적용돼서 입자로 실험한 것 같은 결과가 나왔을까요?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관찰자 효과가 없는, 즉 슬릿에서 관찰을 하지 않은 것과 같은, 간섭무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전자가 파동형태에서 입자(물질)로 전환하는 시점이 언제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일반적인 상식 수준으로 판단하면, 측정 장치로 관측하는 때일 것이니까, 그 시점에서 전자는 파동에서 입자로 전환하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고, 측정 행위 여부와는 상관없고, 그 데이터를 우리가, 다시 말해 의식(意識)이 인지함으로써 본질적인 파동형태로부터 붕괴하여(collapse) 입자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해 봅니다.
눈으로 볼 때는 공 모양을 취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풀어져서 파동 형태를 취하는 그런 공이 목표 스크린을 향해 던져집니다. 공이 날아가는 동안 중간 지점에 설치한 카메라가 모든 공을 촬영합니다. 스크린에도 역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서, 공이 스크린에 어떤 위치에 어떤 형태로 도달했는지를 촬영했습니다. 그렇게 100개의 공을 촬영했지만 실험하는 사람이 그걸 직접 한 것이 아닙니다. 전부 자동화 장비들이 그걸 해 냈습니다. 나중에 촬영된 100개의 데이터를 무작위로 두 무더기로 분류했습니다.
첫 무더기는 촬영된 모든 데이터를 읽고 그 자료를 통계분석 해 보았더니 모두 공 모양의 결과를 얻었습니다. 중간에 관측을 하였으니 당연히 그런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두 번째 무더기는, 중간의 촬영 데이터는 모두 폐기처분하고 최종 스크린 위치에서 촬영한 데이터만 남겨서 읽고 통계분석 했습니다. 그랬더니 결과는 모두 파동형태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전자가 본래의 상태인 파동(비물질)상태에서 입자(물질)상태로 바뀌었는데, 그 시점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같은 실험 과정을 거쳤는데도 말입니다.
이게 마술일까요, 아니면 본래가 그런 것일까요? 답은 본래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분석을 언제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즉 지금 실험을 하고 1주일 뒤, 혹은 1년 뒤, 심지어 10년 뒤에 분석을 하더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실험을 지연된 선택(Delayed Choice)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전자가 본래의 상태(파동, 비물질)에서 입자 상태(물질)로 전환하는 선택을 실험 시점보다 늦춘다는 것이지요. 정말 이게 과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실험의 세부 내용은 유튜브(www.toutube.com)에서 쉽게 검색해 볼 수 있습니다(Quantum Physics 101-Double Slit Experiment).
“만약 당신이 이중 슬릿 실험을 정말로 이해한다면, 양자 물리학 모두를 이해할 수 있다.”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이 한 얘기입니다.
“양자론을 처음 접하고서도 충격을 받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양자 물리학의 대부(代父)라고 할 수 있는 닐스 보어(Niels Bohr)의 얘기입니다.
이중 슬릿 실험에 대한 얘기를 읽고 나서, 그것이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를 주었는가요? 지난 번 얘기한 내용, 그것이 이중 슬릿 실험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거기 함유된 내용은, 제게는 대단한 것입니다. 지난 번 서술한 그 내용, 실험 결과는, 저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실험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해석한 바의 의미(意味)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지어온 바 그 모든 것의 총합(總合)인 나(我)라는 물방울이 느끼는 의미는 이와는 다른 이력(履歷)의 결과인, 즉 다른 물방울인 당신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글에서 얘기하는, 〔이중(二重) 슬릿(Slit) 실험의 의미〕는 어디까지나, 저 개인의 의미입니다. 만약 아직 〔이중(二重) 슬릿(Slit) 실험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그 의미를, 당신만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럼 제가 찾은 의미를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중 슬릿 실험이란 걸 처음 접해본 건 제법 오래 전이었습니다. 그건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물론 그 엄청난 충격으로 사물을 보는 안목이 크게 달라지고, 모든 일의 의미를 폭넓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글로 그 의미를 쓰려고 하니까, 이번엔 보다 깊은 사색이 필요했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사물을, 모든 것을 폭넓게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보다는, 좀 더 깊이 이 현상을 따져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블로그에 글을 쓴다는 게, 진리추구(眞理追求)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다시 깨우치게 됩니다. 문득 어렸을 때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반백년도 지난 일인데, 이 주제를 공부하면서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매년 설날이 되면, 집안 어르신에게 세배를 갔습니다. 그 어르신의 서재 한쪽 벽을 가득 도배한, 알 수 없는 기호들, 기하학적 도형들도 있었고 별자리 그림도 있는 가운데, 몇몇 알아볼 수 있는 문자들 중에 광년(光年)이란 것도 있었습니다.
대개 오래 전에 작성되었음을 알려주듯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그래서 누렇게 변색이 된 종이들로 언뜻 괴이한 분위기마저 가득했던 그 방에서 그 분은 과연 무얼 알고 싶어서 그런 공부들을 하셨을까? 지금도 그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 어르신에게 큰 의심(大疑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 역경(易經), 성리학(性理學)도 공부하고 천문(天文)도 바라보고, 그러셨을 것입니다. 그 어른이 모든 것의 이치(理致)를 깨우치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돌아가시는 길이 평온하지 못했다고 하니까, 아마 그걸 깨우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 어른의 절망(絶望)이 느껴집니다. 연전(年前)에 돌아가신 모친도 생각이 납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 “.....수보리 어의운하...(....須菩提 於意云何....)”, 그렇게 금강경(金剛經)을 독송(讀誦)하셨습니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 이렇게 외고 또 외셨지만, 과연 그 어른이 그 의미를 완전히 받아들이셨을지는 의문입니다.
아마 그러지는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그렇다고 가르치셨으니까 그런 줄 믿지만, 이렇게 눈앞에 사물들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데, 어떻게 모든 것이 텅 비었음(空)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믿을(believe) 수는 있지만, 알(know) 수는 없으셨을 것입니다. 어머님의 그 절망(絶望)이 피부로 느껴집니다. 그 분들의 절망을 제가 알 수 있는 건, 저 역시 한참 전에 그런 절망에 떨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단순히 양자 물리학, 이중 슬릿 실험 결과로 인한 것만은 아닙니다만, 양자 물리학이 밝혀준 사실(fact)들을 몰랐더라면, 어림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중 슬릿 실험 결과를 간단히 요약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 크기, 모양, 무게를 갖고 있다고 믿는 입자(粒子), 예를 들면 전자(電子)가 사실은 텅 비었다(空)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여기는 물질,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코로 냄새 맡을 수 있고, 혀로 맛볼 수 있으며, 감촉으로 느낄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은 근본적으로 확률 파동(wave function)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그 근본은 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여기에 관찰자(observer)가 개입하면, 그러니까 마음, 생각, 의식(意識)이 더해지면, 텅 빈 곳에서 돌연 알갱이가 출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의식, 마음이 사라자면, 그 알갱이는 다시 파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있다고, 존재한다고 여기는 그 모든 것, 여기에는 물질만이 아니라 생각, 느낌, 분위기, 사건,...... 이런 것들까지를 아우른,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이 텅 비었음을, 믿는(believe) 게 아니라 알(know)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별다른 해석, 분석이 필요 없는 있는 그대로의 과학적 사실(fact)입니다. 여기까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거나, 이걸 받아들이지 못 하겠다고는, 그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가톨릭신자, 개신교도, 불교도,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심지어 무신론자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밝혀진 사실(fact)을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과학의 힘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그렇게 나타난 실험결과의 의미가 무엇인가(?)는 아직 과학으로는 답을 주질 못합니다.
“당신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한 얘기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 물리학자였지만 이렇게 밝혀지는 사실들을 거부하지도 못하고, 흔쾌히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과학의 힘으로 그 의미, 답을 찾는다고 통일장이론(統一場理論, The Unified Field Theory) 개발에 말년의 노력을 다 경주했지만, 끝내 그 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양자물리학의 대부 닐스 보어는 연구실 문에 “지금 연구 중, 철학자 출입금지”란 팻말을 붙여 놓았다고 합니다.
그 역시 과학의 범주 내에서 답, 의미를 찾아내려고 했지만, 아직까지 과학의 힘 단독으로는 모든 것들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이건 아마도 영영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물리학자 얀(Robert G. Jahn)과 듄(Brenda J. Dunne)이 얘기한 것처럼, ‘어쩌면 물리학자들이 입자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입자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원자 입자인 아나말론(anamalon)이라는 입자의 성질은 실험실마다 다르게 관측되었다고 합니다. 즉, 어떤 성질을 지닌 입자가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연구자의 가설 및 기대에 부응하여 그런 성질의 입자가 만들어진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질의 입자로는 문제가 풀리질 않는다는, 그와는 다른 견해를 가진 연구자 역시 아나말론을 발견하는데, 그 발견 내용은 연구자가 예측한 것과 같다는, 즉 이전에 발견된 내용과는 다른 성질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이런 위대한 연구자들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게 오히려 더 유리한 조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양자 물리학자는 아니지만, 그래서 새로운 발견을 도모하지는 못하지만, 우리 평범한 존재도 확인된 내용까지는 과학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벗어나는 경지, 그 의미에 대해서는, 정신세계의 깨우친 이(覺者)들의 가르침에 의존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간, 지난 이천년 이상, 깨우친 분들이 가르침을 주었지만, 깨우치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큰 의심의 씨앗을 심기는 했지만, 꽃을 피운 존재는 극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과거 양자물리학 이전의 세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넘지 못할 경계가 분명 존재했습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집안어르신이나 제 모친 처럼 의심의 씨앗은 심어졌지만, 보통 사람이 모든 게 다 텅 비었다, 그러면서도 아무 것도 없는 건 아니다(眞空妙有)라는 걸 믿을(believe) 수는 있었지만, 알(know)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첨단 물리학자들 덕분으로 이 경계를 허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불자(佛子)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그리고 유명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으로 불자가 아닌 사람에게도 잘 알려진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이란 가르침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온(五蘊)이라 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다시말해 일체 모든 것을 다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만이 아니라 생각, 행동, 감정, 정신,....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한 것이 사실은 다 텅 비었다(空)는 것을 알면(照見五蘊皆空), 모든 괴로움, 고(苦)를 벗어날 수 있다(度一切苦厄)는, 어찌 보면 간단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분명 내 눈앞에 책상도 있고 의자도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이핑하는 손도 있고, 그걸 보는 눈도 있으며, 컴퓨터도 있고, 또 그걸 인식하는 뇌도 있는데, 모든 것이 텅 비었음을 어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道)에 목마른 이는,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머리도 깎고 먹물들인 옷을 입고 토굴 속에서 몇 년이나 고행을 하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게 텅 비었다는 걸 아는 이는 겨우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밖에는 되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양자 물리학의 실험 덕분으로, 보통의 존재라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지도 않고, 머리 깎지도 않고, 고행을 하지 않고도, 그걸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게 텅 비었음을 아는 것하고 모든 고(苦)에서 벗어나는 것하고 무슨 관계에 있느냐(?)는 질문이 뒤따를 것입니다. 그건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일단 모든 게 텅 비었다는, 양자 물리학의 이중 슬릿 실험에 대해서라도 직접 공부를 하고, 확인해 보시라는 말씀밖에는 드릴 게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얘기입니다. 비행기 타고 이집트 카이로에 가서, 꼭 내 두 눈으로 피라미드를 보고 스핑크스를 만져 보아야만, 그것들이 정말로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충분한 증거가 있다면, 그걸 믿는(believe) 게 아니라 그렇다는 것을 알(know)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걸 위해서는 반드시 본인 스스로 마음을 내서, 직접 의문을 풀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게 다 텅 비었음을 믿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출세하려고, 더 많은 돈을 벌고자, 좀 더 건강하려고, 더, 더, 더,.... 할 수가 있을까요? 제 경우이기는 하지만, 그럴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하기만 하면 저절로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은 따라올 수밖에는 없습니다. 금강경(金剛經)에도 핵심 가르침 내용은 다르지 않습니다. 크게 다르지 않은 많은 가르침 중에서도 지금 이 얘기와 관계 깊은 걸 찾아보면 이런 게 있습니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다 채울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칠보(七寶)로서 보시(布施)하는 것보다 사구게(四句偈) 하나라도 수지독송(修持讀誦)하는 복덕(福德)이 더 수승(殊勝)하다”라는 가르침이 있는데, 그게 당연함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런 보시를 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엄청난 부(富)를 소유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만 그런 상상할 수 없는 복 보다도 사구게(四句偈) 하나라도 제대로 아는 게 훨씬 더 낫다는 걸, 조금만치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사구게(四句偈)라는 게 별 게 아닙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응당히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응당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만약 색신으로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니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의 모든 것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같으며
이슬,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알 지니라
이렇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데, 그걸 그렇게 받아들이기가 쉽지가 않은가 봅니다.
물론 양자 물리학, 이중 슬릿 실험결과를 공부한다고 해서 즉시 이런 받아들임이 당연시되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천년 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당신 가르침이 잘못 전해지는 것을 바로 잡으시겠다고, 20세기 미국에, 헬렌 슈크만(Helen Schucman)이라는 심리학자에게 나타나셔서 무려 7년간이나 전수해 주셨다는 가르침, 『기적수업(A Course In Miracle)』, 수백만의 미국인들이 자발적으로 공부하고 있다는 그 가르침 역시 양자 물리학, 이중 슬릿 실험 결과와 다르지 않습니다.
당장에 그런 변화가 나오지는 않지만, 또 그게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에, 기적수업에서는 워크북(Workbook)이라는 수행지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수행지침(Workbook for Students)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Nothing I see in this room[on this street, from the window, in this place] means anything.
Now look slowly around you, and practice applying this idea very specifically to the whatever you see:
This table does not mean anything.
This chair does not mean anything.
This hand does not mean anything.
This foot does not mean anything.
This pen does not mean anything.
......
한 마디로 이 방에 보이는 것들, 길에 있는 것들, 창문을 통해 보이는 것들, 이 장소에 있는 것들이란 실재(實在)하는 게 아니란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탁자, 의자, 손, 발, 펜이 실재하는 게 아니란 걸 깨우치는 연습을 하라는 것으로 『기적수업(A Course In Miracle)』수행(修行)을 시작하라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들이 실재(實在)가 아니란 걸, 조금씩 연습을 통해 익혀간다면, 언젠가는 그런 인식이 당연한 게 될 것입니다. 물론 저 역시도 지금 그런 과정을 겪는 중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그게 익숙해지니까, 출세한다는 것이나, 큰 상을 탄다는 것이나, 많은 돈을 번다는 것이나, 건강이 좋아진다는 것이나, 그런 것들이 더 이상 탐(貪)할 것이 아니란 걸 지극히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더, 더, 더,... 할 건더기가 더는 없습니다. 이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 지, 아니 도무지 이게 설명이 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모든 게 다 텅 비었음을 아니까(믿는 게 아니라) 삶이 살아 볼만 한 게 됩니다. 과거 같으면 감히 꿈도 꾸지 못할, 그런 경지를 이제는 우리 스스로의 평범한 의지로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래서 이 시대를 새 시대(New Age), 황금 시대(Golden Age)라고 부르나 봅니다.
- 출처, http://blog.daum.net/mwldfi/13661148
사람에 따라 같지 않겠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느냐(?)에 앞서, 모든 것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아는 게 필수입니다. 돈이 많으면 잘 사는 것인지 알고 죽어라고 돈 벌기에 몰두했었는데, 뒤늦게 그게 아니란 걸 알고, 땅을 쳐가며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출세하고 명예롭게 사는 게 전부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고, 건강이 제일인 줄 알았는데, 그 역시 허망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 흔한 게 그런 사람들 아닙니까?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의 본질을 모르고, 그저 눈에 보이는 바에 따라, 그리고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만을 좇아 귀중한 삶을 허비하고 허탈해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든 것의 본질, 과연 물질과 비 물질(정신)이 별개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별개가 아닌 나눌 수 없는 것인가? 이 모든 것을 만든 어떤 별개의 존재(神)가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런 고민을 하는 나는 과연 누구, 아니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런 생각에 동조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근본적인 의문이 해소되지 않고, 돈, 건강, 출세,.... 이런 것들을 추구한다는 것은, 결국 사막에서 신기루를 보고 오아시스를 찾으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근본적인 답을 모르는 상태에서 마감하는 삶은 결코 평안한 임종(臨終)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참선(參禪)을 하고, 요가도 하고, 고행(苦行)도 하고, 기도(祈禱)를 하기도 하고,.... 아주 많은, 다양한 길들로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삶은 그 답을 찾는 순례(巡禮)인 것입니다. 물론 그걸 그렇다고 인식하는 삶은 극히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천만다행히도,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그것, 모든 것의 본질을 알 수 있는 절호의 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나간 역사를 살펴 볼 때, 지금처럼 누구나 잘 살 수 있었던 시절은 없었습니다. 이건 물론 우리가 역사를 기록한 연대(年代)의 범위 이내에서의 얘기입니다. 그 이전, 기록으로 남겨진 시대보다 앞선 시절,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는 모르기에 이렇게 밖에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모든 것의 본질을 탐구해서 잘 살았던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난 시절에는 영(靈)적으로 뛰어난 존재들만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이 시대에는 그런 특별한 존재가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그럴 마음만 낸다면, 잘 살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면 저 같은 존재라도 그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블로그에서 하는 얘기란 게 거의 다 그런 얘기니까 새삼스런 얘기가 아닙니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같은 얘기가 반복됩니다. 이 얘기는 저같이 이과(理科)를 전공한 이에게는 좀 더 쉽게 다가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뭐 복잡한 얘기도 아닙니다. 19세기 말, 그리고 20세기 초, 당시 첨단 물리학자들은 물질(物質)의 본성이 거의 다 규명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 미해결인 부분들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그걸 밝혀내는 건 그야말로 시간문제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런 사소한 미해결 문제점들 중의 하나가, 흑체복사(黑體輻射, blackbody radiation)란 게 있었습니다.
제 전공이 아니고, 또 저 또한 잘 모르는 부분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게 지금 얘기하고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고 넘어가겠습니다. 혹 궁금하신 분들은 인터넷을 검색해 보시면 쉽게 그 설명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의 막스 플랑크(Max Planck)는 이 미해결 부분을 연구하다가 그야말로 엄청난 사고를 치게 됩니다. 실험결과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양자물리학(量子物理學)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창시자가 된 것입니다. 그때까지 물리학을 지배해온 뉴턴(Issac Newton)의 고전물리학(古典物理學)과는 판이하게 상이한, 전혀 새로운 신경지를 인류에게 소개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자물리학의 역사는 이미 100년을 넘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들(비록 물질에 국한한 것이지만)의 내용에는 이 새로운 발견이 빠져있었습니다. 만약 그때, 학교 다닐 때, 양자물리학의 개념을 배울 수 있었더라면, 제 인생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요새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대학입시 논술고사에 양자물리학의 핵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EPR 역설(逆說, paradox)이 나올 정도니까, 아마 고등학교 과정에 양자물리학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가보다(?) 하고 짐작을 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양자물리학의 기본개념을 교과과정에 포함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게 틀림없습니다. 양자물리학이 밝혀낸 바를 받아들이는 존재라면, 그렇게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더 건강하려고, 더 출세하려고, 그밖에도 많은 것들을 더, 더, 더,.... 하는 비참한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온통 더, 더, 더,... 하는 열기가 더해만 가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이미 그런 내용이 교과과정에 포함된 지 오래인 구미 각국의 상황을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노벨상을 수상한 저명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이 토로한 것처럼, “"양자물리학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가 원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양자물리학이 시사해주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는 존재라면, 이 세상 삶을 이렇게 영위할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번에 얘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양자물리학 중에서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이중(二重) 슬릿(Slit) 실험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 실험 내용 역시 제 전공이 아니라서, 제가 설명하기에는 벅찹니다. 다행히 이중 슬릿 실험을 아주 잘 설명해 놓은 자료를 발견했습니다. 실험의 세부 내용에 대해서는 아래 자료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http://blog.naver.com/sherufa/120099653790
그럼 이중 슬릿 시험의 세부는 건너뛰고, 실험 내용을 가지고 얘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아래 설명은 실제 실험을 알기 쉽도록 다듬은 것입니다. 전자(電子, electron)를 한 개씩 발사할 수 있는 전자총 앞에 세로로 한 개의 틈(slit)이 난 가림판을 설치하고, 그 뒤에는 스크린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전자란 아주 조그만 입자, 알갱이 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스크린을 향해 전자를 발사하면 가림판에 맞고 튀어나오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 전자들은 세로로 난 틈을 통과해서 최종적으로 스크린에 도달합니다. 그렇게 스크린에 도달한 전자들의 흔적은 가림판에 있는 틈을 그대로 뒤로 평행 이동한 것처럼 세로로 난 기둥모양을 남깁니다.
그러니까 전자 대신에 조그만 당구공을 총으로 쓰는 것과 같은 결과라고 보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가림판에 한 개가 아닌 두 개, 평행으로 난 두 개의 틈(slit)을 만들고 전자 대신 조그만 당구공으로 같은 실험을 하면, 스크린에는 가림판에 있는 틈을 그대로 뒤로 평행 이동한 것처럼 세로로 난 기둥모양을 남기는데, 틈이 두 개이니까, 흔적도 두 개의 기둥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비슷한 실험을 당구공 같은 입자가 아닌 파동(波動)을 대상으로 실시하면, 틈이 한 개일 때는 입자로 실험했을 때와 차이가 없이 가림판에 있는 틈을 그대로 뒤로 이동한 것처럼 세로로 난 기둥모양을 남깁니다.
그렇지만 파동의 경우, 두 개의 틈을 가진 가람판으로 실험을 하면, 두 개의 세로로 난 기둥모양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 줄의 간섭무늬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번에는 조그만 당구공 대신 진짜 전자를 가지고 해 봅니다. 자 여기서 양자물리학의 가장 기이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배운 개념으로는 전자(電子)란 것은, 아주 작지만 당구공 같은 알갱이입니다.
그러니까 두 개의 틈을 가진 가림판 앞에서 전자총으로 전자를 쏘아 스크린에 나타나는 흔적은 당연히 당구공 같은 형태, 두 개의 기둥 모양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실제로 측정된 결과는 파동으로 실험한 것 같은 여러 줄의 간섭무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 개의 전자를 쏘기 때문에, 그들 간에 서로 간섭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반론도 고려하여, 전자를 하나씩 발사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유일한 합리적인 해석은 전자가 파동 상태를 유지하지 않고서는 그런 간섭이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자(電子)는 알갱이, 입자(粒子)가 아니라, 실체(實體)가 없는 파동(波動), 떨림이라는 얘기입니다. 그 후 계속된 연구에 의하면 전자(電子)만이 아니라, 물질을 구성하는 다른 아원자(亞原字)들 역시 전자와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이 결과를 토대로 한다면, 모든 것이 다 텅 비었다, 공(空)하다는 얘기가 성립됩니다. 이중 슬릿 실험은 여기가 다가 아닙니다. 전자총에서 발사된 전자가 두 개의 틈 중에서 어느 쪽을 통과했는지를 알기 위해, 틈 바로 뒤에다 측정장치를 설치하고 같은 실험을 했더니, 이번에는 간섭무늬가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전자는 누군가가 관찰을 하면 이번에는 파동 상태가 아니라, 입자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자가 의식(意識)을 갖고, 생각을 한다는, 그러니까 살아있는 존재라는 얘기가 아닙니까?
이걸 관찰자 효과(Observer Effect)라고 부릅니다.
그럼 과연 전자의 본질은 무엇인가, 입자인가 파동인가? 답은 파동, 그걸 양자파동(quantum wave function)이라고 부르며, 전자를 포함한 모든 아원자들이 다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걸 아주 멋들어지게 묘사한 글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계에서 익히 기대할 수 있는 종류의 행태라기보다는 마술에 더 가까워보인다. 당신이 지켜보고 있을 때만 볼링공으로 보이는 그런 공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볼링 레인에다 밀가루를 뿌려놓고 이 ‘양자’ 볼링공을 핀을 향해 굴리면, 당신이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동안에는 밀가루 위에 한 줄의 선을 남기면서 굴러갈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잠시만 눈을 깜빡이더라도 공을 지켜보지 않았던 그 짧은 시간 동안 공은 한 줄의 선이 아니라 마치 사막의 뱀이 모래언덕을 지나갈 때 남기는 물결모양의 흔적처럼 넓은 물결무늬를 남겨놓은 것을 발견할 것이다.
『홀로그램 우주』(마이클 탤보트 지음/이균형 옮김, 정신세계사)
여기까지는 양자물리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얘기입니다. 저도 이 정도로만 알았었는데, 최근 홀로그램 우주(holographic universe)를 공부하면서, 새로운 실험결과를 전해 듣게 됐습니다. 토머스 캠벨(Thomas Campbell)이라는 물리학자가 설명하는 내용인데, 제게는 마커스 드 사토이(Marcus du Sautoy) 교수가 소개한 두뇌 스캐닝 결과 못지않게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물론 이 설명 역시,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실험의 구체적 내용을 쉬운 말로 푼 것입니다. 이중 슬릿 실험을 진행하면서 별도의 장치를 하여 상이한 조건을 조성했습니다. 물론 슬릿에서 관측을 하지 않은 데이터는 예상대로 파동의 간섭무늬를 나타냅니다.
또한 관측 장치를 틈, 슬릿 바로 뒤에 설치하고 실험을 계속합니다. 그런데 관측을 하면서 실험을 하기는 하지만, 그 결과는 판독을 하지 않고, 그냥 컴퓨터가 기계적으로 기록만 했습니다. 실험결과는 두 개의 슬릿 바로 뒤에서의 관측 데이터와 최종적으로 스크린에 나타난 흔적을 개개의 전자마다 측정해서 컴퓨터에 보관했습니다. 그렇게 수집한 100개의 데이터를 무작위로 나누어 2개의 그룹으로 구분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의 데이터는 정상적으로 판독(그러니까 전자가 어느 쪽 슬릿을 통과했는지와 그 전자가 스크린에 남긴 흔적의 위치를 모두 판독)했는데, 결과는 예상대로 관찰자 효과가 반영된 입자(당구공 같은)로 실험한 것 같이, 두 개의 기둥으로 나타났습니다.
두 번째 그룹의 경우에는, 측정 데이터 중에서 전자가 어느 쪽 슬릿을 통과했는지를 관측한 것들은 모두 폐기처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50개의 실험에서는 전자의 슬릿 통과 과정에 대한 측정은 하였으되 그 데이터는 없애버리고, 스크린에 도달한 데이터만 판독했다는 얘기입니다.
자, 과연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까요?
분명 슬릿을 통과할 때, 측정 장치로 관측을 했으니까, 당연히 관찰자 효과가 적용돼서 입자로 실험한 것 같은 결과가 나왔을까요?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관찰자 효과가 없는, 즉 슬릿에서 관찰을 하지 않은 것과 같은, 간섭무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전자가 파동형태에서 입자(물질)로 전환하는 시점이 언제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일반적인 상식 수준으로 판단하면, 측정 장치로 관측하는 때일 것이니까, 그 시점에서 전자는 파동에서 입자로 전환하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고, 측정 행위 여부와는 상관없고, 그 데이터를 우리가, 다시 말해 의식(意識)이 인지함으로써 본질적인 파동형태로부터 붕괴하여(collapse) 입자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해 봅니다.
눈으로 볼 때는 공 모양을 취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풀어져서 파동 형태를 취하는 그런 공이 목표 스크린을 향해 던져집니다. 공이 날아가는 동안 중간 지점에 설치한 카메라가 모든 공을 촬영합니다. 스크린에도 역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서, 공이 스크린에 어떤 위치에 어떤 형태로 도달했는지를 촬영했습니다. 그렇게 100개의 공을 촬영했지만 실험하는 사람이 그걸 직접 한 것이 아닙니다. 전부 자동화 장비들이 그걸 해 냈습니다. 나중에 촬영된 100개의 데이터를 무작위로 두 무더기로 분류했습니다.
첫 무더기는 촬영된 모든 데이터를 읽고 그 자료를 통계분석 해 보았더니 모두 공 모양의 결과를 얻었습니다. 중간에 관측을 하였으니 당연히 그런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두 번째 무더기는, 중간의 촬영 데이터는 모두 폐기처분하고 최종 스크린 위치에서 촬영한 데이터만 남겨서 읽고 통계분석 했습니다. 그랬더니 결과는 모두 파동형태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전자가 본래의 상태인 파동(비물질)상태에서 입자(물질)상태로 바뀌었는데, 그 시점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같은 실험 과정을 거쳤는데도 말입니다.
이게 마술일까요, 아니면 본래가 그런 것일까요? 답은 본래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분석을 언제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즉 지금 실험을 하고 1주일 뒤, 혹은 1년 뒤, 심지어 10년 뒤에 분석을 하더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실험을 지연된 선택(Delayed Choice)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전자가 본래의 상태(파동, 비물질)에서 입자 상태(물질)로 전환하는 선택을 실험 시점보다 늦춘다는 것이지요. 정말 이게 과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실험의 세부 내용은 유튜브(www.toutube.com)에서 쉽게 검색해 볼 수 있습니다(Quantum Physics 101-Double Slit Experiment).
“만약 당신이 이중 슬릿 실험을 정말로 이해한다면, 양자 물리학 모두를 이해할 수 있다.”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이 한 얘기입니다.
“양자론을 처음 접하고서도 충격을 받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양자 물리학의 대부(代父)라고 할 수 있는 닐스 보어(Niels Bohr)의 얘기입니다.
이중 슬릿 실험에 대한 얘기를 읽고 나서, 그것이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를 주었는가요? 지난 번 얘기한 내용, 그것이 이중 슬릿 실험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거기 함유된 내용은, 제게는 대단한 것입니다. 지난 번 서술한 그 내용, 실험 결과는, 저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실험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해석한 바의 의미(意味)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지어온 바 그 모든 것의 총합(總合)인 나(我)라는 물방울이 느끼는 의미는 이와는 다른 이력(履歷)의 결과인, 즉 다른 물방울인 당신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글에서 얘기하는, 〔이중(二重) 슬릿(Slit) 실험의 의미〕는 어디까지나, 저 개인의 의미입니다. 만약 아직 〔이중(二重) 슬릿(Slit) 실험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그 의미를, 당신만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럼 제가 찾은 의미를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중 슬릿 실험이란 걸 처음 접해본 건 제법 오래 전이었습니다. 그건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물론 그 엄청난 충격으로 사물을 보는 안목이 크게 달라지고, 모든 일의 의미를 폭넓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글로 그 의미를 쓰려고 하니까, 이번엔 보다 깊은 사색이 필요했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사물을, 모든 것을 폭넓게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보다는, 좀 더 깊이 이 현상을 따져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블로그에 글을 쓴다는 게, 진리추구(眞理追求)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다시 깨우치게 됩니다. 문득 어렸을 때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반백년도 지난 일인데, 이 주제를 공부하면서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매년 설날이 되면, 집안 어르신에게 세배를 갔습니다. 그 어르신의 서재 한쪽 벽을 가득 도배한, 알 수 없는 기호들, 기하학적 도형들도 있었고 별자리 그림도 있는 가운데, 몇몇 알아볼 수 있는 문자들 중에 광년(光年)이란 것도 있었습니다.
대개 오래 전에 작성되었음을 알려주듯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그래서 누렇게 변색이 된 종이들로 언뜻 괴이한 분위기마저 가득했던 그 방에서 그 분은 과연 무얼 알고 싶어서 그런 공부들을 하셨을까? 지금도 그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 어르신에게 큰 의심(大疑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 역경(易經), 성리학(性理學)도 공부하고 천문(天文)도 바라보고, 그러셨을 것입니다. 그 어른이 모든 것의 이치(理致)를 깨우치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돌아가시는 길이 평온하지 못했다고 하니까, 아마 그걸 깨우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 어른의 절망(絶望)이 느껴집니다. 연전(年前)에 돌아가신 모친도 생각이 납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 “.....수보리 어의운하...(....須菩提 於意云何....)”, 그렇게 금강경(金剛經)을 독송(讀誦)하셨습니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 이렇게 외고 또 외셨지만, 과연 그 어른이 그 의미를 완전히 받아들이셨을지는 의문입니다.
아마 그러지는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그렇다고 가르치셨으니까 그런 줄 믿지만, 이렇게 눈앞에 사물들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데, 어떻게 모든 것이 텅 비었음(空)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믿을(believe) 수는 있지만, 알(know) 수는 없으셨을 것입니다. 어머님의 그 절망(絶望)이 피부로 느껴집니다. 그 분들의 절망을 제가 알 수 있는 건, 저 역시 한참 전에 그런 절망에 떨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단순히 양자 물리학, 이중 슬릿 실험 결과로 인한 것만은 아닙니다만, 양자 물리학이 밝혀준 사실(fact)들을 몰랐더라면, 어림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중 슬릿 실험 결과를 간단히 요약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 크기, 모양, 무게를 갖고 있다고 믿는 입자(粒子), 예를 들면 전자(電子)가 사실은 텅 비었다(空)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여기는 물질,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코로 냄새 맡을 수 있고, 혀로 맛볼 수 있으며, 감촉으로 느낄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은 근본적으로 확률 파동(wave function)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그 근본은 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여기에 관찰자(observer)가 개입하면, 그러니까 마음, 생각, 의식(意識)이 더해지면, 텅 빈 곳에서 돌연 알갱이가 출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의식, 마음이 사라자면, 그 알갱이는 다시 파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있다고, 존재한다고 여기는 그 모든 것, 여기에는 물질만이 아니라 생각, 느낌, 분위기, 사건,...... 이런 것들까지를 아우른,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이 텅 비었음을, 믿는(believe) 게 아니라 알(know)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별다른 해석, 분석이 필요 없는 있는 그대로의 과학적 사실(fact)입니다. 여기까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거나, 이걸 받아들이지 못 하겠다고는, 그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가톨릭신자, 개신교도, 불교도,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심지어 무신론자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밝혀진 사실(fact)을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과학의 힘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그렇게 나타난 실험결과의 의미가 무엇인가(?)는 아직 과학으로는 답을 주질 못합니다.
“당신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한 얘기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 물리학자였지만 이렇게 밝혀지는 사실들을 거부하지도 못하고, 흔쾌히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과학의 힘으로 그 의미, 답을 찾는다고 통일장이론(統一場理論, The Unified Field Theory) 개발에 말년의 노력을 다 경주했지만, 끝내 그 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양자물리학의 대부 닐스 보어는 연구실 문에 “지금 연구 중, 철학자 출입금지”란 팻말을 붙여 놓았다고 합니다.
그 역시 과학의 범주 내에서 답, 의미를 찾아내려고 했지만, 아직까지 과학의 힘 단독으로는 모든 것들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이건 아마도 영영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물리학자 얀(Robert G. Jahn)과 듄(Brenda J. Dunne)이 얘기한 것처럼, ‘어쩌면 물리학자들이 입자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입자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원자 입자인 아나말론(anamalon)이라는 입자의 성질은 실험실마다 다르게 관측되었다고 합니다. 즉, 어떤 성질을 지닌 입자가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연구자의 가설 및 기대에 부응하여 그런 성질의 입자가 만들어진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질의 입자로는 문제가 풀리질 않는다는, 그와는 다른 견해를 가진 연구자 역시 아나말론을 발견하는데, 그 발견 내용은 연구자가 예측한 것과 같다는, 즉 이전에 발견된 내용과는 다른 성질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이런 위대한 연구자들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게 오히려 더 유리한 조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양자 물리학자는 아니지만, 그래서 새로운 발견을 도모하지는 못하지만, 우리 평범한 존재도 확인된 내용까지는 과학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벗어나는 경지, 그 의미에 대해서는, 정신세계의 깨우친 이(覺者)들의 가르침에 의존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간, 지난 이천년 이상, 깨우친 분들이 가르침을 주었지만, 깨우치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큰 의심의 씨앗을 심기는 했지만, 꽃을 피운 존재는 극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과거 양자물리학 이전의 세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넘지 못할 경계가 분명 존재했습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집안어르신이나 제 모친 처럼 의심의 씨앗은 심어졌지만, 보통 사람이 모든 게 다 텅 비었다, 그러면서도 아무 것도 없는 건 아니다(眞空妙有)라는 걸 믿을(believe) 수는 있었지만, 알(know)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첨단 물리학자들 덕분으로 이 경계를 허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불자(佛子)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그리고 유명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으로 불자가 아닌 사람에게도 잘 알려진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이란 가르침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온(五蘊)이라 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다시말해 일체 모든 것을 다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만이 아니라 생각, 행동, 감정, 정신,....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한 것이 사실은 다 텅 비었다(空)는 것을 알면(照見五蘊皆空), 모든 괴로움, 고(苦)를 벗어날 수 있다(度一切苦厄)는, 어찌 보면 간단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분명 내 눈앞에 책상도 있고 의자도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이핑하는 손도 있고, 그걸 보는 눈도 있으며, 컴퓨터도 있고, 또 그걸 인식하는 뇌도 있는데, 모든 것이 텅 비었음을 어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道)에 목마른 이는,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머리도 깎고 먹물들인 옷을 입고 토굴 속에서 몇 년이나 고행을 하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게 텅 비었다는 걸 아는 이는 겨우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밖에는 되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양자 물리학의 실험 덕분으로, 보통의 존재라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지도 않고, 머리 깎지도 않고, 고행을 하지 않고도, 그걸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게 텅 비었음을 아는 것하고 모든 고(苦)에서 벗어나는 것하고 무슨 관계에 있느냐(?)는 질문이 뒤따를 것입니다. 그건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일단 모든 게 텅 비었다는, 양자 물리학의 이중 슬릿 실험에 대해서라도 직접 공부를 하고, 확인해 보시라는 말씀밖에는 드릴 게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얘기입니다. 비행기 타고 이집트 카이로에 가서, 꼭 내 두 눈으로 피라미드를 보고 스핑크스를 만져 보아야만, 그것들이 정말로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충분한 증거가 있다면, 그걸 믿는(believe) 게 아니라 그렇다는 것을 알(know)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걸 위해서는 반드시 본인 스스로 마음을 내서, 직접 의문을 풀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게 다 텅 비었음을 믿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출세하려고, 더 많은 돈을 벌고자, 좀 더 건강하려고, 더, 더, 더,.... 할 수가 있을까요? 제 경우이기는 하지만, 그럴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하기만 하면 저절로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은 따라올 수밖에는 없습니다. 금강경(金剛經)에도 핵심 가르침 내용은 다르지 않습니다. 크게 다르지 않은 많은 가르침 중에서도 지금 이 얘기와 관계 깊은 걸 찾아보면 이런 게 있습니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다 채울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칠보(七寶)로서 보시(布施)하는 것보다 사구게(四句偈) 하나라도 수지독송(修持讀誦)하는 복덕(福德)이 더 수승(殊勝)하다”라는 가르침이 있는데, 그게 당연함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런 보시를 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엄청난 부(富)를 소유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만 그런 상상할 수 없는 복 보다도 사구게(四句偈) 하나라도 제대로 아는 게 훨씬 더 낫다는 걸, 조금만치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사구게(四句偈)라는 게 별 게 아닙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응당히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응당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만약 색신으로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니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의 모든 것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같으며
이슬,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알 지니라
이렇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데, 그걸 그렇게 받아들이기가 쉽지가 않은가 봅니다.
물론 양자 물리학, 이중 슬릿 실험결과를 공부한다고 해서 즉시 이런 받아들임이 당연시되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천년 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당신 가르침이 잘못 전해지는 것을 바로 잡으시겠다고, 20세기 미국에, 헬렌 슈크만(Helen Schucman)이라는 심리학자에게 나타나셔서 무려 7년간이나 전수해 주셨다는 가르침, 『기적수업(A Course In Miracle)』, 수백만의 미국인들이 자발적으로 공부하고 있다는 그 가르침 역시 양자 물리학, 이중 슬릿 실험 결과와 다르지 않습니다.
당장에 그런 변화가 나오지는 않지만, 또 그게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에, 기적수업에서는 워크북(Workbook)이라는 수행지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수행지침(Workbook for Students)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Nothing I see in this room[on this street, from the window, in this place] means anything.
Now look slowly around you, and practice applying this idea very specifically to the whatever you see:
This table does not mean anything.
This chair does not mean anything.
This hand does not mean anything.
This foot does not mean anything.
This pen does not mean anything.
......
한 마디로 이 방에 보이는 것들, 길에 있는 것들, 창문을 통해 보이는 것들, 이 장소에 있는 것들이란 실재(實在)하는 게 아니란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탁자, 의자, 손, 발, 펜이 실재하는 게 아니란 걸 깨우치는 연습을 하라는 것으로 『기적수업(A Course In Miracle)』수행(修行)을 시작하라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들이 실재(實在)가 아니란 걸, 조금씩 연습을 통해 익혀간다면, 언젠가는 그런 인식이 당연한 게 될 것입니다. 물론 저 역시도 지금 그런 과정을 겪는 중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그게 익숙해지니까, 출세한다는 것이나, 큰 상을 탄다는 것이나, 많은 돈을 번다는 것이나, 건강이 좋아진다는 것이나, 그런 것들이 더 이상 탐(貪)할 것이 아니란 걸 지극히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더, 더, 더,... 할 건더기가 더는 없습니다. 이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 지, 아니 도무지 이게 설명이 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모든 게 다 텅 비었음을 아니까(믿는 게 아니라) 삶이 살아 볼만 한 게 됩니다. 과거 같으면 감히 꿈도 꾸지 못할, 그런 경지를 이제는 우리 스스로의 평범한 의지로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래서 이 시대를 새 시대(New Age), 황금 시대(Golden Age)라고 부르나 봅니다.
- 출처, http://blog.daum.net/mwldfi/13661148
리벳의 실험, 월터의 실험
커피 잔을 집을 때, 어떤 과정을 거쳐 손이 움직여 잔을 집어 드는 것일까?
길을 걸을 때 다리는 관절을 구부리고 펴는 동작을 반복한다. 어찌 보면 복잡하고도 정교한 동작이다. 그러나 걸을 때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정신을 팔고 걷는 것이 일반적이다. 걷는 동작 하나 하나를 제어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관절이 얼마 만큼 어떻게 구부려지는지도 모른다. 그저 자연스럽게 '걸어진다'.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가 서빙 하는 테니스 공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상대방의 코트를 향해 내려 꽂힌다. 일반인은 이 공을 제대로 받아 치지 못한다. 그러나 테스트 선수들은 이 초고속의 공을 순간적으로 받아 쳐낸다. 그 뿐인가. 그 짧은 순간에 상대방의 어느 곳이 취약한지를 파악하고 그 방향으로 공을 쳐 낸다. 그들은 얘기한다. "글쎄요, 판단은 정말 본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어디로 이동할 지, 언제 공을 칠지를 따로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어디로 공을 쳐낼지를 판단할 뿐이지요. 하지만 공이 올 때까지도 언제 공을 쳐야 할 지 모릅니다.<"브레인 스토리", 수전 그린필드 지음, 정병선 옮김>"
리벳의 실험 - 무엇이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는가?
벤자민 리벳(캘리포니아 대학)은 의지와 동작 사이의 두뇌 현상을 실험을 통해 연구했다. 그는 동작에 대한 의지(will)를 일으키는 시점과 운동중추가 운동명령을 하는 시점, 그리고 운동근육이 움직이는 시점을 측정하는 실험을 했다.
학계에는 의지적인 동작이 있기 전에 두뇌에는 "준비전위(readiness potential)"가 발생한다는 사실이 이미 알려져 있었다. 동작을 하기 위한 뇌세포 신호의 발생이다. 이를 일반적으로 RP라 축약 표기한다. 준비전위(RP)는 동작이 일어나기 약 1초나 그 이상의 시간 이전에 발생한다.
리벳은 준비전위(RP)가 움직임이 있기 1초(또는 그 이상) 이전과 같이 오래 전에 발생하는 점에 주목하였다. 1초 라는 시간은 긴 시간이다. 일반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일 때 움직이려는 의지가 있은 후 1초 이상이 경과한 후에 움직이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거의 동시에 움직이는 것으로 경험된다. 리벳은 움직이려는 의지를 의식하는 시점이 움직임이 실제 일어나는 시점으로부터 이렇게 긴 시간 이전에 있게 되는지에 대해 알아보려 했다. 그 시간을 실제로 측정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피실험자의 근육에 측정기를 달고, 두뇌에는 뇌파검사기를 통해 뇌파를 측정했다. 움직이려는 의지를 내는 시점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움직이는 광점(spot light)을 보여주는 스크린을 사용했다. 피실험자가 움직이려는 의지를 내는 시점에 광점의 위치를 나중에 말하도록 하여 광점의 위치에 해당하는 시간을 측정했다. 피실험자들은 자기가 움직이고 싶을 때 손가락을 구부렸다.
그의 실험결과는 많은 논란을 낳았다. 논란은 지금까지 20여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우선 실험결과 설명을 위해 두뇌 운동신경에서 준비전위(readiness potential)가 발생하는 시점을 RP으로 표시한다. 운동근육이 움직이는 시점을 M(movement)으로 표시한다. 사람이 움직이려는 의지를 내는 시점을 W(will)으로 표시한다.
일반적으로는 W -> RP -> M의 순서가 맞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움직이려는 의지에 의해 운동신경에서 신호가 발생하고, 이어서 근육이 움직이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리벳의 실험결과는 RP -> W -> M의 순서였다. 상식적 견지에서는 기괴한 결과이다.
일단 리벳의 실험결과를 인정한다면, 움직이려는 의지를 의식하는 시점 W은 이미 두뇌의 운동신경이 움직임을 개시하는 신호를 발생시킨 시점 RP 이후이다. 그리고 실제로 근육이 움직이는 시점 M의 이전이다.
이것은 의식적인 움직이겠다는 의지는 움직임을 유발하는, 움직임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움직임은 움직이려는 생각 또는 결정 이전에 이미 두뇌에서 시작되어 있었다. 움직이겠다는 의식적인 의지는 이미 움직임의 과정이 진행되고 있음을 '인지'하는 것에 불과하다.
의식에 의해 동작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작이 일어나는 가운데 그 중간 시점에서 "'움직이겠다'는 결정을 한 것처럼"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 실험결과는 '자유의지(free will)' 논쟁으로 번져 나갔다.
우리가 움직이려는 의지가 있을 때, 사실은 이미 움직임의 신호가 전달되고 있었다면, 누가 움직임을 유발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의 의식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선행하여 움직임을 결정하고 있는 것인가? 의식은 단지 움직임이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아는 것에 지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두뇌에 나타난 의식은 우리를 속이고 있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전적으로 모든 행동을 결정하고 실행하고 있는 것으로 느끼고 있지 않은가? 우리에게 의지가 없다는 말인가? '자유의지'는 없다는 말인가?
리벳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했다.
비록 운동을 유발하는 두뇌의 신호(RP)가 의식적인 의지 시점(W)보다 선행하지만, 실제 근육의 움직임 시점(M)보다는 앞선다. 우리의 의식적 의지는 이미 발생한 움직임을 중간 시점에 중단할 수 있는 자유를 갖는다. 곧 의식적 의지는 이미 진행되고 있는 움직임을 감지한 후에, 이를 지속하여 근육이 움직이게 할 것인지, 아니면 이를 중단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리벳은 의식적 의지라는 것은 반쪽 만의 자유를 갖는다는 것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거부(veto)할 수 있는 자유"이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시사하는 점은 우리가 명백하게 느끼고 있는 '내가 손을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실상은 거짓이라는 점이다. 다만, 그렇게 느껴질 뿐이다. 실제의 현상으로는 '움직이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것이 맞을 수 있다.
두뇌에 대한 연구에서 '두뇌가 하는 거짓말' 사례는 수 없이 많다. 리벳의 실험결과도 그런 사례를 보여주는 일례에 불과할 정도이다.
리벳의 실험에 대해 그 실험내용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다만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리벳의 실험방법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리벳의 실험이 처음 발표된 것은 1985년이었다.
월터의 실험 - 저절로 전환되는 슬라이드 화면
리벳의 실험 이외에 관련된 내용의 다른 사례도 있다.
1963년 영국의 뇌수술 의사인 윌리엄 그레이 월터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 바 있다.
이 환자들은 치료의 목적으로 두뇌의 운동중추신경 부위에 전극을 이식한 상태였다.
환자 앞에 환등기 슬라이드를 설치하고 환자가 원하는 아무 때나 환등기에 연결된 버튼을 눌러 다음 슬라이드 화면으로 전환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환자들이 모르게 환자의 버튼이 아니라, 환자의 뇌에 연결된 전극의 신호를 증폭하여 이 두뇌의 신호에 의해 슬라이드 화면이 다음으로 넘어가게 장치했다.
그 결과 환자들은 깜짝 놀랐다. 다음 슬라이드를 보려고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슬라이드가 저절로 다음으로 넘어갔다고 환자들은 말했다.
이 환자들에게 슬라이드가 마치 자신들의 의지를 미리 읽어서 미리 다음 슬라이드로 스스로 넘기는 것처럼 경험했을 것이다. 이 역시 환자가 의식적으로 슬라이드를 넘기려고 하기 이전에 이미 두뇌의 운동신경에서는 활동이 시작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이 실험에서는 이미 시작된 두뇌의 신호에 의해 손이 반응하기 이전에, 슬라이드 시스템이 먼저 반응하여 동작한 것이었다.
이 역시 리벳의 실험에서와 같은 사실을 드러내 준다. 사람이 의지를 내는 듯한 그 순간 이미 그것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사실이다.
의식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
"브레인 스토리"의 저자인 수잔 그린필드는 책에서 리벳의 실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P.303)
"이 발견은 놀라운 사실을 내포한다. 무언가를 하려는 의도가, 뇌가 이미 그것을 하기로 결정한 다음에 발현되다면, '당신'이 결정하기 전에 '뇌'가 결정을 한다면, 우리의 행위는 자유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잠재의식적 과정에 의해 인도되는 셈이다. '당신'이라는 관념, 다시 말해 당신 머릿속에 존재하는 개인은 어쩌면 뇌가 보여주는 가장 그럴듯한 속임수인지도 모른다. 진짜 지배세력은 잠재의식인데도 뇌는 의식적 자아가 행동을 지배한다는 환상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수잔의 말을 믿고, 진짜 지배세력이 잠재의식이라고 단정해버리는 것은 성급하다. 아직은 논쟁 중에 있으며, 더욱 밝혀야 할 사항들이 많이 남아 있다. 잠재의식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아직 그 실체가 없다. 두뇌에는 전체를 통제하는 어떠한 통제센터도 존재하지 않는다. 두뇌는 여기저기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뇌세포의 무수한 신호들만이 쉴 새 없이 깜박이고 있는 세계이다.
의식에 대한 과학자와 학자 중에는 '의식이나 자아는 허상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아직은 어떤 가설도 확증 된 것이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으로 결론짓게 하는 실험과 현상들은 분명 존재하고 있다.
의식에 대해 접근할 때, 수정하거나 버려야 할 개념이 너무 많다. 상식적으로 믿고 있던 개념들이 그 실상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방해가 되고 있는 것이라는 주장 또한 많다.
※ 이 글에서의 리벳 실험과 월터의 실험 내용은 <"Consciousness", Susan Blackmore>에서 참조했음.
[출처] 과학에서 말하는 의식 - 리벳의 실험, 월터의 실험|작성자 저스틴
길을 걸을 때 다리는 관절을 구부리고 펴는 동작을 반복한다. 어찌 보면 복잡하고도 정교한 동작이다. 그러나 걸을 때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정신을 팔고 걷는 것이 일반적이다. 걷는 동작 하나 하나를 제어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관절이 얼마 만큼 어떻게 구부려지는지도 모른다. 그저 자연스럽게 '걸어진다'.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가 서빙 하는 테니스 공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상대방의 코트를 향해 내려 꽂힌다. 일반인은 이 공을 제대로 받아 치지 못한다. 그러나 테스트 선수들은 이 초고속의 공을 순간적으로 받아 쳐낸다. 그 뿐인가. 그 짧은 순간에 상대방의 어느 곳이 취약한지를 파악하고 그 방향으로 공을 쳐 낸다. 그들은 얘기한다. "글쎄요, 판단은 정말 본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어디로 이동할 지, 언제 공을 칠지를 따로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어디로 공을 쳐낼지를 판단할 뿐이지요. 하지만 공이 올 때까지도 언제 공을 쳐야 할 지 모릅니다.<"브레인 스토리", 수전 그린필드 지음, 정병선 옮김>"
리벳의 실험 - 무엇이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는가?
벤자민 리벳(캘리포니아 대학)은 의지와 동작 사이의 두뇌 현상을 실험을 통해 연구했다. 그는 동작에 대한 의지(will)를 일으키는 시점과 운동중추가 운동명령을 하는 시점, 그리고 운동근육이 움직이는 시점을 측정하는 실험을 했다.
학계에는 의지적인 동작이 있기 전에 두뇌에는 "준비전위(readiness potential)"가 발생한다는 사실이 이미 알려져 있었다. 동작을 하기 위한 뇌세포 신호의 발생이다. 이를 일반적으로 RP라 축약 표기한다. 준비전위(RP)는 동작이 일어나기 약 1초나 그 이상의 시간 이전에 발생한다.
리벳은 준비전위(RP)가 움직임이 있기 1초(또는 그 이상) 이전과 같이 오래 전에 발생하는 점에 주목하였다. 1초 라는 시간은 긴 시간이다. 일반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일 때 움직이려는 의지가 있은 후 1초 이상이 경과한 후에 움직이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거의 동시에 움직이는 것으로 경험된다. 리벳은 움직이려는 의지를 의식하는 시점이 움직임이 실제 일어나는 시점으로부터 이렇게 긴 시간 이전에 있게 되는지에 대해 알아보려 했다. 그 시간을 실제로 측정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피실험자의 근육에 측정기를 달고, 두뇌에는 뇌파검사기를 통해 뇌파를 측정했다. 움직이려는 의지를 내는 시점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움직이는 광점(spot light)을 보여주는 스크린을 사용했다. 피실험자가 움직이려는 의지를 내는 시점에 광점의 위치를 나중에 말하도록 하여 광점의 위치에 해당하는 시간을 측정했다. 피실험자들은 자기가 움직이고 싶을 때 손가락을 구부렸다.
그의 실험결과는 많은 논란을 낳았다. 논란은 지금까지 20여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우선 실험결과 설명을 위해 두뇌 운동신경에서 준비전위(readiness potential)가 발생하는 시점을 RP으로 표시한다. 운동근육이 움직이는 시점을 M(movement)으로 표시한다. 사람이 움직이려는 의지를 내는 시점을 W(will)으로 표시한다.
일반적으로는 W -> RP -> M의 순서가 맞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움직이려는 의지에 의해 운동신경에서 신호가 발생하고, 이어서 근육이 움직이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리벳의 실험결과는 RP -> W -> M의 순서였다. 상식적 견지에서는 기괴한 결과이다.
일단 리벳의 실험결과를 인정한다면, 움직이려는 의지를 의식하는 시점 W은 이미 두뇌의 운동신경이 움직임을 개시하는 신호를 발생시킨 시점 RP 이후이다. 그리고 실제로 근육이 움직이는 시점 M의 이전이다.
이것은 의식적인 움직이겠다는 의지는 움직임을 유발하는, 움직임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움직임은 움직이려는 생각 또는 결정 이전에 이미 두뇌에서 시작되어 있었다. 움직이겠다는 의식적인 의지는 이미 움직임의 과정이 진행되고 있음을 '인지'하는 것에 불과하다.
의식에 의해 동작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작이 일어나는 가운데 그 중간 시점에서 "'움직이겠다'는 결정을 한 것처럼"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 실험결과는 '자유의지(free will)' 논쟁으로 번져 나갔다.
우리가 움직이려는 의지가 있을 때, 사실은 이미 움직임의 신호가 전달되고 있었다면, 누가 움직임을 유발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의 의식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선행하여 움직임을 결정하고 있는 것인가? 의식은 단지 움직임이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아는 것에 지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두뇌에 나타난 의식은 우리를 속이고 있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전적으로 모든 행동을 결정하고 실행하고 있는 것으로 느끼고 있지 않은가? 우리에게 의지가 없다는 말인가? '자유의지'는 없다는 말인가?
리벳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했다.
비록 운동을 유발하는 두뇌의 신호(RP)가 의식적인 의지 시점(W)보다 선행하지만, 실제 근육의 움직임 시점(M)보다는 앞선다. 우리의 의식적 의지는 이미 발생한 움직임을 중간 시점에 중단할 수 있는 자유를 갖는다. 곧 의식적 의지는 이미 진행되고 있는 움직임을 감지한 후에, 이를 지속하여 근육이 움직이게 할 것인지, 아니면 이를 중단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리벳은 의식적 의지라는 것은 반쪽 만의 자유를 갖는다는 것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거부(veto)할 수 있는 자유"이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시사하는 점은 우리가 명백하게 느끼고 있는 '내가 손을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실상은 거짓이라는 점이다. 다만, 그렇게 느껴질 뿐이다. 실제의 현상으로는 '움직이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것이 맞을 수 있다.
두뇌에 대한 연구에서 '두뇌가 하는 거짓말' 사례는 수 없이 많다. 리벳의 실험결과도 그런 사례를 보여주는 일례에 불과할 정도이다.
리벳의 실험에 대해 그 실험내용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다만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리벳의 실험방법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리벳의 실험이 처음 발표된 것은 1985년이었다.
월터의 실험 - 저절로 전환되는 슬라이드 화면
리벳의 실험 이외에 관련된 내용의 다른 사례도 있다.
1963년 영국의 뇌수술 의사인 윌리엄 그레이 월터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 바 있다.
이 환자들은 치료의 목적으로 두뇌의 운동중추신경 부위에 전극을 이식한 상태였다.
환자 앞에 환등기 슬라이드를 설치하고 환자가 원하는 아무 때나 환등기에 연결된 버튼을 눌러 다음 슬라이드 화면으로 전환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환자들이 모르게 환자의 버튼이 아니라, 환자의 뇌에 연결된 전극의 신호를 증폭하여 이 두뇌의 신호에 의해 슬라이드 화면이 다음으로 넘어가게 장치했다.
그 결과 환자들은 깜짝 놀랐다. 다음 슬라이드를 보려고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슬라이드가 저절로 다음으로 넘어갔다고 환자들은 말했다.
이 환자들에게 슬라이드가 마치 자신들의 의지를 미리 읽어서 미리 다음 슬라이드로 스스로 넘기는 것처럼 경험했을 것이다. 이 역시 환자가 의식적으로 슬라이드를 넘기려고 하기 이전에 이미 두뇌의 운동신경에서는 활동이 시작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이 실험에서는 이미 시작된 두뇌의 신호에 의해 손이 반응하기 이전에, 슬라이드 시스템이 먼저 반응하여 동작한 것이었다.
이 역시 리벳의 실험에서와 같은 사실을 드러내 준다. 사람이 의지를 내는 듯한 그 순간 이미 그것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사실이다.
의식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
"브레인 스토리"의 저자인 수잔 그린필드는 책에서 리벳의 실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P.303)
"이 발견은 놀라운 사실을 내포한다. 무언가를 하려는 의도가, 뇌가 이미 그것을 하기로 결정한 다음에 발현되다면, '당신'이 결정하기 전에 '뇌'가 결정을 한다면, 우리의 행위는 자유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잠재의식적 과정에 의해 인도되는 셈이다. '당신'이라는 관념, 다시 말해 당신 머릿속에 존재하는 개인은 어쩌면 뇌가 보여주는 가장 그럴듯한 속임수인지도 모른다. 진짜 지배세력은 잠재의식인데도 뇌는 의식적 자아가 행동을 지배한다는 환상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수잔의 말을 믿고, 진짜 지배세력이 잠재의식이라고 단정해버리는 것은 성급하다. 아직은 논쟁 중에 있으며, 더욱 밝혀야 할 사항들이 많이 남아 있다. 잠재의식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아직 그 실체가 없다. 두뇌에는 전체를 통제하는 어떠한 통제센터도 존재하지 않는다. 두뇌는 여기저기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뇌세포의 무수한 신호들만이 쉴 새 없이 깜박이고 있는 세계이다.
의식에 대한 과학자와 학자 중에는 '의식이나 자아는 허상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아직은 어떤 가설도 확증 된 것이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으로 결론짓게 하는 실험과 현상들은 분명 존재하고 있다.
의식에 대해 접근할 때, 수정하거나 버려야 할 개념이 너무 많다. 상식적으로 믿고 있던 개념들이 그 실상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방해가 되고 있는 것이라는 주장 또한 많다.
※ 이 글에서의 리벳 실험과 월터의 실험 내용은 <"Consciousness", Susan Blackmore>에서 참조했음.
[출처] 과학에서 말하는 의식 - 리벳의 실험, 월터의 실험|작성자 저스틴
2014년 2월 27일 목요일
왓츠 앱, 페이스 북
개인적으로는 처음 온라인 통신을 했던 것이 1995년이니까, 벌써 球歷이 얼추 20년은 되어간다. 가장 초기적인 SNS 형태부터 경험했던 셈이다. 한국만 놓고 보자면, 그 뒤로 온갖사이트들이 들불처럼 번지다 사라져갔다. 그 중에는 열렬한, 충성스러운 독자층을 가진 사이트들도 많았다. 그러나 모두의 공통점이라면,
(1) 어떤 형태로 발을 맞춰나가든지 간에 재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소통형태를 계속 포괄할 수는 없다. 이야기 방식은 너무 빨리 바뀌며, 늘 새로운 것이 등장한다. 인터넷 이후의 인간의 의식은 차별화에 목숨을 걸고 있기 때문에 불과 몇년 사이의 집중과 분산의 속도는 과거의 수백년에 해당할 만큼 빠르다.
(2) 한국에서는 어떤 사이트도 유료화로는 성공한 적이 없다. 아무리 열성적인, 중독된 독자라고 할지라도 유료화 앞에서는 모래알처럼 흩어진다. 특수한 경제 집단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한, 유료화는 불가능한 모델이며, 특히 무료화에서 유료화로의 전환은 자살행위에 속한다(I love school을 생각해보자). 따라서 인터넷에서의 소통 방식은 보편적 무료화와 특수적 유료화 사이에서 진동한다.
보편적 무료화의 가장 대표적 모델은 포탈 사이트다. 이들은 소비자(독자)에게서 이익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의)공급자에게서 매출을 얻는다(광고 방식). 반면 이 보편적 공간을 유료화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소비자들이 그것을 public channel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같은 반응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아무도 말할 공간을 얻기 위해 돈을 지불하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담화 행위의 근본적 성격에 위배된다). 물론 이같은 한국의 경험이 해외에서도 모두 통용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본다면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타겟 독자층, 수익 모델, 운영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FaceBook이 WhatsApp을 190억 달러에 인수한다고 발표했을 때, 시장의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엇보다도 도대체 190억 달러라는 인수가격 산정의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했었다. 왜냐하면 WhatsApp의 지난해 매출은 2000만 달러였기 때문이다. 고맙게도 Sterne Agee의 애널리스트인 아르빈드 바티아와 브렛 스트라우저가 WhatsApp의 사업성을 수치로 제시했다. 일단 이들이 추정한 사업전망부터 보자.
어...그러니까 오는 2023년에는 WhatsApp의 사용자 숫자는 올해는 7억 1900만명으로 늘어나고, 2023년에는 23억 2900만명에 달할 것이다(이들에 따르면). 일일 평균 신규 사용자 증가율은 올해는 0.8%씩 증가하며, 2023년에도 여전히 0.3%씩 증가한다. 전체 사용자들 가운데 유료 독자(paying users)는 올해는 20%에서 2023년에는 70%에 달할 것이며, 유료 독자의 1인당 매출은 올해는 연간 1달러에서 2023년에는 3달러로 증가할 것이다. 따라서 영업이익률은 무려, 올해는 50%, 그리고 10년 뒤에는 80%에 달한다. 총매출은 지난해에는 2천만 달러에 불과했지만, 올해는 1억 4400만 달러, 그리고 2023년에는 48억 9100만 달러가 된다. 이 쯤되면 누워서 떡먹기 장사다. 사업 전망에 비한다면야, 인수가격 190억 달러는 헐 값이다.
잠깐, 아직 유료화하지 않았잖아? 그렇다. 사용자는 가입 첫 해는 무료이며, 둘재 해(그게 올해다)부터 연간 99센트를 지불하게 되어 있다. Apple을 쓰면 10년간 무료다. 2023년에는 사용자수가 23억명이라고? 그렇다. 2023년에는 세계 인구가 80억명쯤에 달할 것이기 때문에 전세계 인구 네 명중의 한 명은 WhatsApp을 쓸 것이다. 유료화하면 독자들이 떨어져나가지 않을까? 연간 1달러인데, 뭐. 껌 값이다. 그 정도야 부담할 것이다. 통신사를 통해 문자 보내는 것보다야 싸지 않은가?
이걸 믿으라고? 주커버그가 믿고, 시장이 믿고 있지 않는가. WhatsApp은 기본적으로 과거 시대의 유물, 즉 유료 메시지 전송 시대의 산물이다. 유료화 계획을 제외하면, 그 운용 방식은 한국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카카오톡과 다르지 않다(기술적 차별성은 거의 없다). 만일 카카오톡을 유료화한다고 하면(예컨대 연간 회비 1000원), 그 결과는 어떨까? 카카오톡은 이 장래가 창창한 수익을 왜 아직 걷어들이지 않고 있을까?(더구나 WhatsApp에는 없는 voice 기능까지 있는데도)한국에서도 Naver의 Line이 (소프트뱅크로부터의) M&A설을 핑계로 건, 아니면 WhatsApp과 동일한 꿈을 꾸고 있어서 건 간에, 주가가 하늘 모르고 치솟고 있다. 인간들은 대화화기 위해 돈을 지불하게 될까? 그렇다면, 그것은 인류 역사에서 새로운 장일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지난 수천년 동안 공짜로 말하기 위해서(free speech) 목숨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 글로벌 모니터, 이공순 기자 -
스파게티 소스에 관하여(2004년)
저는 지금 어떤 분에 대해 말씀드릴려고 합니다. 제 생각에는 지난 20년동안 미국인을 이분만큼이나 행복하게 했던 분도 드물거예요. 하워드 모스코위츠 씨입니다. 스파게티 소스를 재발견하신 분이예요. 직업은 정신물리학자입니다. 그게 뭔지는 사실 저도 전혀 모릅니다. 제가 알기로는 정신물리학은 인간의 정신을 측정하는 학문이고, 하워드도 측정하는 데 아주 관심이 많았어요. 하버드에서 박사를 딴 그는 뉴욕 화이트 플레인즈 지역에 기업을 위한 작은 컨설팅 회사를 세웁니다.
70년대 초반에 그의 초창기 고객사 중 하나가 펩시였습니다. 펩시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스파탐'이라는 달콤하면서도 열량이 작은 물질이 있는데, 이걸로 다이어트 펩시를 만들까 합니다. 함량을 고민중이에요.' 굉장히 직설적이고 쉬운 질문이죠. 펩시는 아예 대놓고 '8~12%사이에서 고민중입니다. 8%이하는 싱겁고, 12%이상은 너무 달거든요'라고 물었습니다.
만약 제가 이질문을 여러분에게 한다면 모두들 간단하게 답하실 겁니다. 실험이죠. 아스파탐 함량을 8%에서부터 12%까지 등급별로 세분화하여 수천명에게 테스트한 후 선호도를 조사하고 그래프로 나타냅니다. 그중 삐쭉 튀어나온 가장 인기 있는 함량을 고르면 되죠. 정말 간단합니다. 하워드도 동일하게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삐쭉 튀어나올 것으로 예상한 종형곡선(bell curve)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과에는 전혀 일관성이 없었어요. 측정할때마다 값이 달랐습니다. 대부분의 식품업계 관계자들도 이 데이터를 보고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적정한 콜라 농도를 알 수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물론 실험이 잘못됐을 수도 있구요. 펩시는 그간의 경험으로 그량 10%중간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하워드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뭐가 잘못되었을까? 왜 이해할 수 없는 데이터가 나왔을까? 그러던 중 그는 어떤 식당에서 네스카페가 의뢰한 일을 생각하던 차에 번뜩이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질문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었죠, 즉, 완벽한 펩시(pepsi)가 아니라 결과는 말그대로 다양하게(pspsis)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못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결과적으로 엄청난 발견이었으며 이후 식품시장 마케팅을 변화시킨 엄청난 변혁의 시발점이었습니다.
하워드는 당장 펩시사에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완벽한 펩시를 찾으려고 했죠? 틀렸어요! 완벽한 펩시는 여러 개일수 있어요!” 여러분이 펩시의 임원이라면 뭐라고 했겠습니까? “그래서요? 어쩌자는 겁니까?” 하워드는 자신의 통찰을 사람들에게 말해주려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마침네 그와 이야기가 통한 블래식 피클이란 회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확히 펩시와 똑같이 물었죠 “하워드 씨 우리는 완벽한 피클을 만들고 싶습니다.” 하워드는 물론 “완벽한 피클은 하나가 아닙니다 여러 개예요. 지금 있는 피클을 개선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전혀 새로운 맛의 피클을 만들어야 해요”라고 답했습니다. 이것이 톡 쏘는 피클의 유래입니다.
다음 고객은 캠벨 스프 회사였습니다. 80년대 초반 캠벨 사는 라구에 대항할 프레고 라는 스프를 만들었습니다. 라구는 70~80년대를 주름잡던 스파게티 소스 브랜드인데 사실 품질로만 따지자면 프레고가 라구보다 좋은 토마토 소스입니다. 사용한 토마토 반죽도 훨씬 좋고, 양념의 혼합률도 뛰어나서 파스타와 잘 아울립니다. 두 회사의 소스를 스파게티가 담긴 그릇에 부었을 때 라구 소스는 바닥에 고였고 프레고는 스파게티 위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프레고는 고전을 면치 못했고 하워드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하워드는 캠벨의 요리사와 함께 45가지의 스파게티 소스를 만들었습니다. 상상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익숙한 것부터 말도 안되는 것까지 다양한 소스를 창조해냈습니다. 단맛, 짠맛, 톡쏘는 맛, 신맛, 토마토 덩어리의 크기 정도에 따라서 그리고 길거리로 나갔습니다. 뉴욕, LA, 잭슨빌, 등등 그리고 사람들에게 맛보고 평가하게 했습니다. 여러달에 걸친 실험결과 미국인의 스파게티 소스 선호도에 대한 광범위한 데이터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인기있는 소스를 찾았을까요? 아뇨! 하워드는 그런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죠. 대신에 그는 특징에 따라 사람들의 선호도 데이터를 그룹지어보고자 했습니다. 결과 세그룹으로 나눠졌습니다. 맵고 강한 맛을 좋아하는 그룹, 평범한 것을 선호하는 그룹, 그리고 과육 덩어리가 많은 것을 선호하는 그룹이었습니다. 그중 세번째 그룹이 가장 의미있었습니다. 왜냐면 1980년데 슈퍼마켓에는 과육덩어리가 많은 스파게티 소스는 없었거든요. 프레고는 하워드에게 “아니 덩어리가 많이 든 스파게티 소스를 원하는 사람이 1/3이나 되는데 이런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아직 없다는 건가요?” 프레고는 완전히 새로운 스파게티 소스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덩어리가 든 제품군을 출시했고 이 제품들은 순식간에 미국 스파게티 소스 시장을 평정하게 됩니다. 그 후 10년간 덩어리 소스는 60억 달러를 벌어들였습니다.
업계는 이 사건을 목격하고 뭔가를 깨닭게 됩니다. 이 사건이 7종의 식초과 14종의 머스터드, 71종이 올리브유에 대한 선택권이 생긴 발단입니다. 나중에는 경쟁사인 라구에서도 하워드를 고용했습니다. 오늘날 큰 슈퍼마켓에 가면 36개나 되는 라구 제품이 팔리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총 6개의 그룹으로 나뉩니다. 치즈맛, 가벼운 맛, 감칠맛, 기름진 맛, 전통적인 맛, 덩어리가 많은 제품(!)까지.
이게 하워드가 우리에게 준 선물입니다. 허워드는 기업이 고객에 대해 생각하는 생각 근본을 바꿨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뭘 먹고 싶어하는지 당연히 그 사람에게 물어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레고와 라구도 마찬가지로 생각했죠. 모니터 그룹을 모으고 “어떤 스파게티 소스를 원하시나요? 여러분이 선호하는 것을 알려주세요”, 20~30년동안 모니터 그룹 중에 덩어리가 많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실제 미국인의 1/3이 그걸 원했는데도 말이죠. 사람들은 사실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도 모른다는 겁니다. 이상하죠? 제가 만약 여기 계신 분들에게 어떤 커피를 원하시냐고 묻는다면 모든 사람들이 “깊고 진하며 풍부한 맛을 원한다”고 말할겁니다. 실제로 여러분 중 몇 퍼센트가 깊고 진하며 풍부한 맛의 커피를 원할까요? 하워드에 따르면 25%전후라고 합니다. 나머지 대부분은 우유가 든 연한커피를 좋아한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어떤 커피를 원하냐고 물었을 때 “우유가 든 연한 커피가 좋아요”라고 대답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워드의 또다른 업적은 우리가 고객 세그멘테이션이라는 특성을 일깨워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1980년대의 식품업계사고와는 상반된 것입니다. 당시 소스업계는 머스타드 소스에 사로잡혀있었습니다. 일반 머스터드는 8온스 병에 1.5달러를 받는 대신에 포장만 고급스럽게 바꾸고 먹으면 부유해진다는 느낌을 주는 광고를 하는 네덜란드 식은 4달러를 받기도 했죠. 식품업계는 당연히 사람들이 좀 더 비싸고 열망할만한 제품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만족하고 있는 현재의 제품을 떠나 더 비싼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죠. 좀 더 세련되고 교양있고 의미있는 머스터드 말입니다. 그런데 하워드는 이게 틀렸다고 말합니다. 머스터드나 토마토 소스 세계에 위계질서 따위는 없으며 모두 수평적인 군집(segmentation)으로 나눠져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위계가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없으며 사람들은 단지 서로 다른 입맛의 여러 머스터드를 원한다는 것이죠. 맛에 대한 사고를 민주화시킨 것입니다. 100명의 사람에게 한가지 커피를 주고 100점 만점에 점수를 메기라고 한다면 60점 넘기기가 힘듦니다. 그러나 4개의 유사한 선호를 가진 그룹으로 나눠서 그에 맞는 4가지 커피를 제공하면 점수가 78점까지 올라갑니다. 이는 커피를 먹고 나서 기분이 그저 그러하냐와 아주 괜찮느냐를 구분할 만한 수준입니다.
하워드의 마지막 업적은 이상한 음식이라는 개념에 맞섰다는 것입니다. 식품업게는 어떤 요리던 완벽한 하나의 요리법이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요리사의 조리법에 대해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요리사들은 완벽한 하나의 자신의 요리법에 병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이래야한다는 방식말입니다. 식품회사도 똑같습니다. 토마토 소스의 원조는 이태리입니다. 이태리 토마토 소스 보셨나요? 아주 묽어요. 원조는 묽습니다. 1970년대 라구 제품이 정확히 원조대로 만들었습니다. 스파게티에 부으면 바닥에 가라앉습니다. 원조를 제공하면 사람들이 행복해할거라고 생각한 것이죠. 보편성이라는 과학개념에 따른 이것은 19~20세기 모든 분야를 휩쓸었습니다. 심리학자, 의학자, 경제학자들도 인류의 행동을 다스릴 수 있는 규칙에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20~30년간 이러한 관념은 변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취향에 대한 존중에 그에 따른 소비자의 행복이 늘어난다는 것. 이것은 단순히 스파게티 소스를 개발하고 기업에 수익을 가져다주는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 말콤 글래드웰 -
본성을 바꿔버린 거야
안녕 제임스, 섬이 마음에 드나?
내 할머니께서 섬을 하나 가지고 계셨는데
뭐 별로 크지 않은 섬이었지, 걸어서 한 시간이면 다 둘러볼 수 있었어
하지만 나에게는 낙원같은 곳이었지
어느 여름날에 섬에 놀러갔었는데
아이구야, 섬 전체가 쥐들로 들끓지 뭐야?
정말 잡기 힘들었어 쥐덧도 놔보고 고양이에 쥐약에... 다 쓸모없었지
그런데 석달만에 쥐를 다 없애버린거야 어떻게 없앴는지 아나?
할머니가 내게 보여주셨지
텅빈 드럼통을 땅에 묻고 뚜껑을 제거한 후 안에 코코넛을 미끼로 넣어두었지
그럼 쥐들이 코코넛을 먹으러 와서 드럼통안에 빠져 수백마리가 바글바글하지
그러고 나서 그 통을 바다에 던져? 불태워? 뭍어버려? 아니 천만에, 그렇게 해봐야 몇달 뒤면 다시 쥐로 들끓는건 변함없어
드럼통을 그냥 내버려 두는거야 그럼 그놈들이 배가 고파져서 서로를 잡아먹는거야 암수 단 두 마리가 남을 때까지.....생존한 두 마리 그러고 나서 어찌되었을까? 그 두마리를 죽였을까? 아니야 쥐가 많은 숲에 풀어 놓는 거야 이제 그것들은 더이상 코코넛을 먹지않아...
쥐만 잡아먹을 뿐이지
본성을 바꿔버린 거야
- skyfall
내 할머니께서 섬을 하나 가지고 계셨는데
뭐 별로 크지 않은 섬이었지, 걸어서 한 시간이면 다 둘러볼 수 있었어
하지만 나에게는 낙원같은 곳이었지
어느 여름날에 섬에 놀러갔었는데
아이구야, 섬 전체가 쥐들로 들끓지 뭐야?
정말 잡기 힘들었어 쥐덧도 놔보고 고양이에 쥐약에... 다 쓸모없었지
그런데 석달만에 쥐를 다 없애버린거야 어떻게 없앴는지 아나?
할머니가 내게 보여주셨지
텅빈 드럼통을 땅에 묻고 뚜껑을 제거한 후 안에 코코넛을 미끼로 넣어두었지
그럼 쥐들이 코코넛을 먹으러 와서 드럼통안에 빠져 수백마리가 바글바글하지
그러고 나서 그 통을 바다에 던져? 불태워? 뭍어버려? 아니 천만에, 그렇게 해봐야 몇달 뒤면 다시 쥐로 들끓는건 변함없어
드럼통을 그냥 내버려 두는거야 그럼 그놈들이 배가 고파져서 서로를 잡아먹는거야 암수 단 두 마리가 남을 때까지.....생존한 두 마리 그러고 나서 어찌되었을까? 그 두마리를 죽였을까? 아니야 쥐가 많은 숲에 풀어 놓는 거야 이제 그것들은 더이상 코코넛을 먹지않아...
쥐만 잡아먹을 뿐이지
본성을 바꿔버린 거야
- skyfall
2014년 2월 25일 화요일
기나긴 시간과 우주의 시작
우주는 아주 거대합니다. 말할 것도 없죠. 왜 우주는 이렇게 생겼을까요? 우주는 팽창합니다. 과거에는 원자보다도 작은 점에 모여있었죠. 우주가 매우 균일했다는 것은 정말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균일했어요. 아주아주 균일하지 않았다면 바로 블랙홀로 압축되서 지금처럼 되지 않았을거에요. 아주 섬세하게 배치된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이렇게 섬세하게 배치한 것은 누가 그렇게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그 이유를 매우 궁금해했습니다. 다행히도 19세기 오스트리아 물라학자 루트비히 볼츠만이 '엔트로피' 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이 문제의 답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엔트로피는 무질서도를 의미합니다. 우주는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이유는 감소하는 것보다 증가하는 것이 훨씬 확률적으로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화살'이라는 시간의 흐름이 엔트로피의 증가에 의해 발생합니다. 그러나 그는 엔트로피가 우주 초기에 왜 작았는지를 말해주지 못했습니다. 19세기니까요.
이 문제를 처음 제기한 사람은 리처드 파인만 이었습니다. 그는 계속 질문했습니다. 왜 우주 초기의 엔트로피는 그렇게 작았을까? 파인만이 이 질문을 50년 전에 던졌지만 아직까지 그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어려워졌습니다. 1998년 허블 우주망원경을 통해 과학자들은 놀라운 사실을 밝혀냅니다. 즉, 우주의 팽창 속도가 느려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반대로 팽창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던 것이죠. 그 이후의 많은 관측을 통해서 과학자들은 우주의 빈 공간 자체가 우주를 서로 밀어내는 에너지를 내뿜는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것을 '암흑 에너지(dark energy)' 라고 이름붙였습니다.
만약 암흑에너지가 존재한다면 우주는 무한히 팽창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빈공간은 비어있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습니다(양자요동). 우주공간은 마치 가스가 스며나오는 거대한 상자같은 것입니다. 지금 이 교실에서 공기가 갑자가 한곳으로 몰리면 여러분은 질식하겠지만 그럴 확률은 매우 낮습니다. 그러나 그 확률이 0은 아니죠. 우주는 아주 크고 아주 오래됐으며 무한에 가깝게 존재할 것입니다. 빈공간의 양자적 요동이 우주의 한곳에 균일하게 모이는 사건이 발생할 확률 역시 0이 아닙니다.
볼츠만은 이러한 전 우주적 사건이 아주 가끔 일어난다고 생각했으며 생명현상도 그러한 과정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칼 세이건은 애플파이를 만들려면 먼저 우주를 만들어야한다고 했지만 볼츠만에 따르면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이러한 사건은 아마도 10^10^120년 의 기간동인 일어날 것입니다.
우주의 엔트로피가 왜 처음에 낮았고 우리는 왜 지금 여기에 있냐고요? 가능한 답 첫째는 그냥 그렇다고 받아들이고 묻지 않는것입니다. 두번째로 가능한 답은 빅뱅이 시작이 아니라는 것이죠. 우주라는 알은 우주 닭이 낳은 것일지 모릅니다. 우주가 매우 거대한 멀티버스의 하나라는 것이죠. 감사합니다.
- 션 캐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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