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16일 토요일
인간 수명에 영향을 주는 것들(그래픽)
출처:
https://informationisbeautiful.net/visualizations/what-could-really-increase-life-expectancy-lifespan-and-longevity/
2019년 2월 25일 월요일
다니엘 카네만: 사람들은 행복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복을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인지심리학자 다니엘 카네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은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카네만은 행복(happiness)과 만족(satisfaction)을 구분합니다. 행복은 순간적인 경험이며 곧 사라지는 감정입니다. 하지만 만족은 긴 시간 동안 자신이 바라는 종류의 삶의 향해 노력하며 삶의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얻어지는 감정입니다. 지난 해 12월 19일, 경제학자 타일러 코웬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타일러와의 대화(Conversation with Tyler)”에서 카네만은 두 감정 중 하나만을 추구하는 것은 다른 하나를 누리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일상의 행복을 측정하는 연구에서 연구자들은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기분이 좋은지를 물었고, 그 결과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행복을 느끼는 매우 좋은 방법임이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만족감을 느끼기 위한 장기적 목표를 추구하는 이들은 자신의 더 큰 목표를 위해 평소 친구들을 만나는데 시간을 많이 쓰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사실이 카네만으로 하여금, 사람들은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행복을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만들었습니다. “여러가지 사실로 볼 때, 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행복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행복이 아니라 만족감을 원합니다. 이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만듭니다.”
지난 10월 하레츠와 가진 인터뷰에서, 카네만은 만족은 대부분 남과의 비교에 기인한다고 말했습니다. “만족감은 사회적 목표를 이루고,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것과 같은 사회적 지표와 크게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행복은 돈이 부족할때만 돈의 영향을 받지만, 만족감은 재산의 양에 매우 큰 영향을 받는 다고 덧붙였습니다. 가난은 고통을 만들지만, 최소한의 필요를 채우는 일정 수준 이상의 수입에서는 행복이 더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프는 놀라울 정도로 평평합니다.”
이는 배고픔이나 의복, 집 등의 기본적인 욕구가 만족될 경우 누구나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만큼이나 행복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일시적인 행복감은 삶에 대한 만족감에 더해지지 않습니다. 과거 행복했던 시간을 충분히 많이 가진 사람이라도 자신의 인생 전체에 대해 그만큼의 만족감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두 감정과 기억의 관계가 한 가지 이유입니다. 만족감은 지속적인 효과를 가지는 반면, 행복감은 일시적으로만 존재합니다. 카네만은 자신의 연구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자신의 이야기가 그 순간의 행복과는 크게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한 순간의 행복보다는 그들이 가진 더 큰 목표가 더 중요했습니다. 기억은 오래 가지만, 느낌은 지나갈 뿐입니다. 우리가 가장 행복해하는 순간들은 대부분 보존되지 않습니다. 사진도 이를 붙잡을 수 없으며, 그저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갈 뿐입니다.
예를 들어, 휴가를 생각해봅시다. 카네만은 만약 사람들이 휴가를 즐긴 뒤 그 기억이 모두 사라지고, 어떤 사진도 가져올 수 없다면 사람들은 그 여행을 가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즐거운 일을 하는 이유가 그 일을 만족스런 기억으로 남기기 위해서임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사실 어떤 한 순간에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가설은 오늘날의 소셜 미디어 문화를 어느 정도 설명해줍니다. 우리는 어떤 순간을 즐기기보다 그 순간을 남들앞에 자랑하기 바쁩니다. 또 우리가 좋아하는 이들과 시간을 보내기 보다는 친구와 팔로워 수에 더 집착합니다. 이런 행동은 결국 우리를 더 비참하게 만듭니다.
카네만은 우리가 다른 이들과 함께 있을 때 행복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카네만도 영향을 미친 긍정심리학 운동은 일시적 행복이나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대신 더 긴 관점에서 중요한, 카네만 자신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인생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카네만은 자신이 “충분히 행복한” 운좋은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이 좋아하는 동료들과 함께 보냈고, “흥미로운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반면 자신이 혼자 글을 써야 했던 시간이 “끔찍”했으며, 그때는 “비참함”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그는 또한, 자신이 충분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지만 자신의 존재가 의미있다고 생각치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는 감정을 경제적, 사회적 동력으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세상에 행복의 척도를 알린 사람이지만, 5년 전 이 분야를 떠나 지금은 다른 분야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현명한 의사 결정을 방해하는 “노이즈”, 곧 랜덤한 데이터에 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행복, 곧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기 원하는지, 아니면 그저 우리 자신과 다른 이에게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할 뿐 실제로 기쁨을 느끼는데는 관심이 없는지는 중요한 질문일 것입니다. 적어도 친구들과 함께 이 주제를 두고 이야기하는 동안은 아마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겁니다.
(쿼츠, Ephrat Livni)
번역문: http://newspeppermint.com/2019/02/20/m-happiness-2/
원문: https://qz.com/1503207/a-nobel-prize-winning-psychologist-defines-happiness-versus-satisfaction/
카네만은 행복(happiness)과 만족(satisfaction)을 구분합니다. 행복은 순간적인 경험이며 곧 사라지는 감정입니다. 하지만 만족은 긴 시간 동안 자신이 바라는 종류의 삶의 향해 노력하며 삶의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얻어지는 감정입니다. 지난 해 12월 19일, 경제학자 타일러 코웬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타일러와의 대화(Conversation with Tyler)”에서 카네만은 두 감정 중 하나만을 추구하는 것은 다른 하나를 누리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일상의 행복을 측정하는 연구에서 연구자들은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기분이 좋은지를 물었고, 그 결과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행복을 느끼는 매우 좋은 방법임이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만족감을 느끼기 위한 장기적 목표를 추구하는 이들은 자신의 더 큰 목표를 위해 평소 친구들을 만나는데 시간을 많이 쓰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사실이 카네만으로 하여금, 사람들은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행복을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만들었습니다. “여러가지 사실로 볼 때, 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행복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행복이 아니라 만족감을 원합니다. 이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만듭니다.”
지난 10월 하레츠와 가진 인터뷰에서, 카네만은 만족은 대부분 남과의 비교에 기인한다고 말했습니다. “만족감은 사회적 목표를 이루고,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것과 같은 사회적 지표와 크게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행복은 돈이 부족할때만 돈의 영향을 받지만, 만족감은 재산의 양에 매우 큰 영향을 받는 다고 덧붙였습니다. 가난은 고통을 만들지만, 최소한의 필요를 채우는 일정 수준 이상의 수입에서는 행복이 더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프는 놀라울 정도로 평평합니다.”
이는 배고픔이나 의복, 집 등의 기본적인 욕구가 만족될 경우 누구나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만큼이나 행복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일시적인 행복감은 삶에 대한 만족감에 더해지지 않습니다. 과거 행복했던 시간을 충분히 많이 가진 사람이라도 자신의 인생 전체에 대해 그만큼의 만족감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두 감정과 기억의 관계가 한 가지 이유입니다. 만족감은 지속적인 효과를 가지는 반면, 행복감은 일시적으로만 존재합니다. 카네만은 자신의 연구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자신의 이야기가 그 순간의 행복과는 크게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한 순간의 행복보다는 그들이 가진 더 큰 목표가 더 중요했습니다. 기억은 오래 가지만, 느낌은 지나갈 뿐입니다. 우리가 가장 행복해하는 순간들은 대부분 보존되지 않습니다. 사진도 이를 붙잡을 수 없으며, 그저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갈 뿐입니다.
예를 들어, 휴가를 생각해봅시다. 카네만은 만약 사람들이 휴가를 즐긴 뒤 그 기억이 모두 사라지고, 어떤 사진도 가져올 수 없다면 사람들은 그 여행을 가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즐거운 일을 하는 이유가 그 일을 만족스런 기억으로 남기기 위해서임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사실 어떤 한 순간에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가설은 오늘날의 소셜 미디어 문화를 어느 정도 설명해줍니다. 우리는 어떤 순간을 즐기기보다 그 순간을 남들앞에 자랑하기 바쁩니다. 또 우리가 좋아하는 이들과 시간을 보내기 보다는 친구와 팔로워 수에 더 집착합니다. 이런 행동은 결국 우리를 더 비참하게 만듭니다.
카네만은 우리가 다른 이들과 함께 있을 때 행복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카네만도 영향을 미친 긍정심리학 운동은 일시적 행복이나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대신 더 긴 관점에서 중요한, 카네만 자신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인생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카네만은 자신이 “충분히 행복한” 운좋은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이 좋아하는 동료들과 함께 보냈고, “흥미로운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반면 자신이 혼자 글을 써야 했던 시간이 “끔찍”했으며, 그때는 “비참함”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그는 또한, 자신이 충분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지만 자신의 존재가 의미있다고 생각치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는 감정을 경제적, 사회적 동력으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세상에 행복의 척도를 알린 사람이지만, 5년 전 이 분야를 떠나 지금은 다른 분야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현명한 의사 결정을 방해하는 “노이즈”, 곧 랜덤한 데이터에 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행복, 곧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기 원하는지, 아니면 그저 우리 자신과 다른 이에게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할 뿐 실제로 기쁨을 느끼는데는 관심이 없는지는 중요한 질문일 것입니다. 적어도 친구들과 함께 이 주제를 두고 이야기하는 동안은 아마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겁니다.
(쿼츠, Ephrat Livni)
번역문: http://newspeppermint.com/2019/02/20/m-happiness-2/
원문: https://qz.com/1503207/a-nobel-prize-winning-psychologist-defines-happiness-versus-satisfaction/
2019년 1월 6일 일요일
2019년 1월 3일 목요일
초격차(권오현)
인간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위해서는 도덕적 가치판단이나 정치적 편향, 이해관계를 버릴 필요가 있다. 쉽지 않은 일이고 그러다 보니 인간의 본성에 대해 왜곡된 접근법과 이론이 넘쳐난다. 그런 면에서 인간행동을 밑바닥부터 이해하는 가장 현실적인 프레임은 대기업 인사과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삼성은 그 분야의 가장 최첨단을 달리는 회사다. 이 책이 전부는 아닐 지라도 인간의 조직행동론에 대한 상당한 실무 통찰을 담았을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주요 내용
ㅇ새로운 시도나 도전을 할 때, 기존의 사람은 바뀌지 않고 방식도 바꾸지 않는다. 마음 독하게 먹고 모두 갈아치우지 않는다면 도전과 개혁은 불가능하다. 기존의 인력을 교육해서 혁신의 방향으로 내부 분위기를 전환시킨 사례는 거의 없다.
ㅇ사업을 할 때는 업의 본질을 이해하고 접근해야 한다. 내수 서비스업은 상대방보다 조금만 나으면 된다는 상대적 가치, 제조업은 세계 최고를 노리는 절대적 가치 개념으로 접근한다
ㅇ실력은 있지만 봉건 영주와 같이 왕국(사일로)을 건설하려는 직원은 부지불식간에 다른 영주와 교체하여 돌린다. 그들의 왕국을 파괴하라. 그러면 영주는 겸손해지고 왕국간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해진다.
ㅇ새로운 사업에 도전할 때는 능력은 조금 부족해도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사람을 쓴다
ㅇ여유있게 건전한 가정에서 정상적으로 태어난 사람이 리더로 맞다. 그렇지 않으면 사리사욕을 포기할 줄 모르기에 리더에 부적합하다. 출생시 부모는 선택 불가능하므로 리더는 태어난다고 볼 수도 있다. 탁월한 리더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의 역사를 보고 얼마나 이기적인 선택을 자주 했는지에 주목하라. 그러한 선택을 하고도 책임지거나 비난받지 않는 환경에서 자라왔다면 그는 최악의 리더가 된다.
ㅇ최고의 리더는 나중에 리더 자리를 떠나도 그 조직이 스스로도 잘 굴러갈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게 한다. 이는 결국 인재 양성의 문제다.
ㅇ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 반드시 피해야 할 인재상부터 제거한다. 무례한 자, 부정적인 자, 뒷담화 하는 자
ㅇ긍정적 인재상 중 하나로 중요시하는 것은 호기심 많은 자
아래는 주요 내용
ㅇ새로운 시도나 도전을 할 때, 기존의 사람은 바뀌지 않고 방식도 바꾸지 않는다. 마음 독하게 먹고 모두 갈아치우지 않는다면 도전과 개혁은 불가능하다. 기존의 인력을 교육해서 혁신의 방향으로 내부 분위기를 전환시킨 사례는 거의 없다.
ㅇ사업을 할 때는 업의 본질을 이해하고 접근해야 한다. 내수 서비스업은 상대방보다 조금만 나으면 된다는 상대적 가치, 제조업은 세계 최고를 노리는 절대적 가치 개념으로 접근한다
ㅇ실력은 있지만 봉건 영주와 같이 왕국(사일로)을 건설하려는 직원은 부지불식간에 다른 영주와 교체하여 돌린다. 그들의 왕국을 파괴하라. 그러면 영주는 겸손해지고 왕국간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해진다.
ㅇ새로운 사업에 도전할 때는 능력은 조금 부족해도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사람을 쓴다
ㅇ여유있게 건전한 가정에서 정상적으로 태어난 사람이 리더로 맞다. 그렇지 않으면 사리사욕을 포기할 줄 모르기에 리더에 부적합하다. 출생시 부모는 선택 불가능하므로 리더는 태어난다고 볼 수도 있다. 탁월한 리더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의 역사를 보고 얼마나 이기적인 선택을 자주 했는지에 주목하라. 그러한 선택을 하고도 책임지거나 비난받지 않는 환경에서 자라왔다면 그는 최악의 리더가 된다.
ㅇ최고의 리더는 나중에 리더 자리를 떠나도 그 조직이 스스로도 잘 굴러갈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게 한다. 이는 결국 인재 양성의 문제다.
ㅇ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 반드시 피해야 할 인재상부터 제거한다. 무례한 자, 부정적인 자, 뒷담화 하는 자
ㅇ긍정적 인재상 중 하나로 중요시하는 것은 호기심 많은 자
2018년 12월 23일 일요일
(상식과 달리)한국의 교육 불평등은 악화되지 않았다
출처 http://sovidence.tistory.com/m/987
논문 위치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7565420
최성수 이수빈 공동 연구
주요 내용
ㅇ 더이상 개천용은 없고 이제 금수저만 더더욱 고등 교육을 받는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를 증명할 만한 연구는 없었다.
ㅇ성균관대 최성수, 이수빈 두 사회학자가 서베이 자료 8개를 통합해서 1940년대 이전 출생자부터 1990년대 출생자까지 부모의 학력 수준에 따른 자녀의 교육 성취도를 연구
ㅇ부모의 교육 수준을 상위 20%, 하위 20%로도 나누어서 그에 따른 자녀의 교육 성취를 연구. (단순히 대졸로 하면 과거의 대졸과 현재의 대졸은 수준이 다르므로 직접 비교가 안된다)
ㅇ자녀의 교육 수준도 교육연수, 전문대 이상, 4년제 대학 이상, 명문대 졸업 등으로 나누어서 다층적으로 어떻게 역사적 변화를 거쳤는지 분석
논문의 결론: 한국에서 교육 기회 불평등은 커지지 않았다
아래 그래프는 부모가 대졸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자녀의 교육연수가 얼마나 다른지 자녀의 출생연도에 따른 변화를 나타낸 것. 보다시피 현재 70대인 전쟁 세대는 부모의 학력에 따른 자녀 학력 격차가 4년에 이르렀는데, 86세대인 60년대생에 오면 3년 이하로 줄어들고, 90년대 출생자에 이르면 1년 이하로 줄어듦.
논문 위치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7565420
최성수 이수빈 공동 연구
주요 내용
ㅇ 더이상 개천용은 없고 이제 금수저만 더더욱 고등 교육을 받는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를 증명할 만한 연구는 없었다.
ㅇ성균관대 최성수, 이수빈 두 사회학자가 서베이 자료 8개를 통합해서 1940년대 이전 출생자부터 1990년대 출생자까지 부모의 학력 수준에 따른 자녀의 교육 성취도를 연구
ㅇ부모의 교육 수준을 상위 20%, 하위 20%로도 나누어서 그에 따른 자녀의 교육 성취를 연구. (단순히 대졸로 하면 과거의 대졸과 현재의 대졸은 수준이 다르므로 직접 비교가 안된다)
ㅇ자녀의 교육 수준도 교육연수, 전문대 이상, 4년제 대학 이상, 명문대 졸업 등으로 나누어서 다층적으로 어떻게 역사적 변화를 거쳤는지 분석
논문의 결론: 한국에서 교육 기회 불평등은 커지지 않았다
아래 그래프는 부모가 대졸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자녀의 교육연수가 얼마나 다른지 자녀의 출생연도에 따른 변화를 나타낸 것. 보다시피 현재 70대인 전쟁 세대는 부모의 학력에 따른 자녀 학력 격차가 4년에 이르렀는데, 86세대인 60년대생에 오면 3년 이하로 줄어들고, 90년대 출생자에 이르면 1년 이하로 줄어듦.
아래 그래프는 학력 수준 상위 20%의 부모와 하위 20%의 부모 사이에 자녀가 명문대를 졸업할 확률의 격차를 측정한 것. 상층 부모를 두면 명문대 졸업 확률이 높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 차이가 늘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음. 위에 보여준 교육 연수처럼 부모의 배경에 따른 교육 격차가 지속적으로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1950년대 출생자 이후 현재까지 사실상 거의 변화가 없음.
명문대 졸업자 중에서 '개천용'이 줄어들었다고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개천'이 줄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높음. 결과적으로 기회의 평등은 높아졌지만 실제 고용시장이나 체감적으로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다음의 이유 때문일 수 있다
1. 기회의 평등은 매우 높아졌지만 결과의 불평등은 여전하다
2. 기회의 평등을 넘어 결과의 평등까지 바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018년 12월 22일 토요일
미네르바의 부엉이와 갈리아의 수탉
미네르바(Minerva)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으로 그리스 신화의 아테나(Athena)에 상응한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로마신화에서 미네르바와 항상 함께 다니는 신조(神鳥)로서 지혜의 상징이다. 원래 미네르바의 신조는 까마귀였다. 오비디우스(Ovidius)의 <변신이야기>에 따르면 까마귀는 미네르바의 비밀을 누설한 죄를 짓고 신조의 자리를 부엉이에게 내주었다 한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헤겔(Friedrich Hegel)은 그의 저서 <법철학> 서문에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라는 경구를 남겼다. 철학은 앞날을 미리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뤄진 역사적 현상이 지나간 이후에야 그 뜻이 분명해진다는 의미이다. 헤겔의 경구는 인식이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 인간의 욕망은 변화의 속도 만큼이나 빨리 움직이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인식하고 학문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가능하다. 이와 같이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는 욕망과 인식의 속도 차이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가끔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서 ‘그때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왜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했을까? 그때 왜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라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바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날이 저물어야 날개를 편다’는 의미가 아닌가 한다.
역시 인간의 지혜는 변화의 속도와 욕망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가 보다. 그런데 그때 알지 못했던 것이 후회로 남기는 했지만 그때 알지 못해 낭패를 보았던 경험 때문에 지금 알게 됐으니 그것만으로도 소득이 아닌가?
헤겔의 말은 오늘날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다. 변화의 속도가 워낙 빨라 인간의 인식과 지식과 학문이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에 따라 지식과 학문이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뒷북만 치고 있다. 변화를 따라가기에도 숨이 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탉이 울면 새벽이 오고 얼마 안 있어 동이 트면서 태양이 떠오른다. 시계가 없었던 시절 수탉은 새벽의 전령사였다. 어둠의 공포에서 벗어나 밝은 낮으로 가는 길목에서 수탉은 항상 밝은 아침이 멀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신비한 존재였다. 동양의 옛날이야기에도 귀신이 쫓아오다가 닭 울음소리를 듣고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스토리가 제법 많이 있다. 새벽에 울음을 우는 수탉을 신성시하는 경우도 생겨난 것 같다.
서양인들은 갈리아지역(지금의 프랑스)이 닭의 원산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닭을 ‘갈리아의 새’라고도 불렀다. 갈리아인들은 고대부터 수탉을 새벽의 신으로 신성시했다. 수탉은 갈리아의 신으로 숭상되기도 하고 갈리아 군대의 기장(旗章)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프랑스를 상징하는 동물은 수탉이다.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 개념에 맞서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제기한 개념이 ‘갈리아의 수탉(Gallia Rooster)’이다.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수탉이 새벽에 울어 세상을 깨우듯이 철학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이 뒷북이나 치고 앉아 있다면 그건 죽은 학문이라는 것이다. 헤겔이 말한 것처럼 철학이 현실이 다 지나간 다음에야 겨우 이론을 정립하는 늙은이 학문이 아니라 현실이 오기 전에 그것들을 인식하고 설명하는 선도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하 테제>의 11번째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말한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 논리에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철학자의 사명은 시간이 지난 다음 뒤늦게 세상을 해석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 앞서 이론을 정립해 현실을 바꾸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성연 애터미 경제연구소장 nexteconomy@nexteconomy.co.kr
http://m.nexteconom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38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헤겔(Friedrich Hegel)은 그의 저서 <법철학> 서문에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라는 경구를 남겼다. 철학은 앞날을 미리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뤄진 역사적 현상이 지나간 이후에야 그 뜻이 분명해진다는 의미이다. 헤겔의 경구는 인식이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 인간의 욕망은 변화의 속도 만큼이나 빨리 움직이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인식하고 학문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가능하다. 이와 같이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는 욕망과 인식의 속도 차이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가끔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서 ‘그때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왜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했을까? 그때 왜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라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바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날이 저물어야 날개를 편다’는 의미가 아닌가 한다.
역시 인간의 지혜는 변화의 속도와 욕망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가 보다. 그런데 그때 알지 못했던 것이 후회로 남기는 했지만 그때 알지 못해 낭패를 보았던 경험 때문에 지금 알게 됐으니 그것만으로도 소득이 아닌가?
헤겔의 말은 오늘날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다. 변화의 속도가 워낙 빨라 인간의 인식과 지식과 학문이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에 따라 지식과 학문이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뒷북만 치고 있다. 변화를 따라가기에도 숨이 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탉이 울면 새벽이 오고 얼마 안 있어 동이 트면서 태양이 떠오른다. 시계가 없었던 시절 수탉은 새벽의 전령사였다. 어둠의 공포에서 벗어나 밝은 낮으로 가는 길목에서 수탉은 항상 밝은 아침이 멀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신비한 존재였다. 동양의 옛날이야기에도 귀신이 쫓아오다가 닭 울음소리를 듣고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스토리가 제법 많이 있다. 새벽에 울음을 우는 수탉을 신성시하는 경우도 생겨난 것 같다.
서양인들은 갈리아지역(지금의 프랑스)이 닭의 원산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닭을 ‘갈리아의 새’라고도 불렀다. 갈리아인들은 고대부터 수탉을 새벽의 신으로 신성시했다. 수탉은 갈리아의 신으로 숭상되기도 하고 갈리아 군대의 기장(旗章)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프랑스를 상징하는 동물은 수탉이다.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 개념에 맞서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제기한 개념이 ‘갈리아의 수탉(Gallia Rooster)’이다.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수탉이 새벽에 울어 세상을 깨우듯이 철학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이 뒷북이나 치고 앉아 있다면 그건 죽은 학문이라는 것이다. 헤겔이 말한 것처럼 철학이 현실이 다 지나간 다음에야 겨우 이론을 정립하는 늙은이 학문이 아니라 현실이 오기 전에 그것들을 인식하고 설명하는 선도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하 테제>의 11번째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말한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 논리에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철학자의 사명은 시간이 지난 다음 뒤늦게 세상을 해석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 앞서 이론을 정립해 현실을 바꾸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성연 애터미 경제연구소장 nexteconomy@nexteconom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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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18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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