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4일 금요일
과거나 미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
우리는 시간을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흘러 가는” 강물이라 생각합니다. 그 경우 죽음은 강가에 우리를 내려놓는 것이 될겁니다. 어쨌든 시간은 흘러갑니다. 영원히 앞으로 흘러가지요. 그런데 정말 시간이 그런 것일까요? 시인들은 때로 시간을 주춤거리고, 기어가고, 느려지며 심지어 멈추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합니다. 또 과거는 피할 수 없는 것이며 물건이나 사람, 장소에 새겨져있다고 표현하지요. 줄리엣이 로미오를 기다릴때 시간은 더디게 흘렀을겁니다. 아마 태양신의 아들 파에톤이 다시 한 번 아버지의 전차를 빠르게 몰아 “밤을 즉시 몰고오기를” 바랬겠지요. 우리는 너무나 현실같은 꿈에서 깨어났을때도 평소 느끼던 시간이라는 개념이 환상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카를로 로벨리는 일반인을 위한 물리학 책을 쓰는 이탈리아의 이론물리학자입니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Seven Brief Lessons on Physics)”은 블록홀에서 양자에 이르는 주제를 단순하고 참신하게 설명해 세계적으로 130만권이 팔렸습니다. 그의 신작 “시간의 순서(The Order of Time)”는 시간에 대한 시적이면서도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으로 그저 “흐르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내가 시간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개념을 모든 면에서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로벨리가 수학했던 볼로냐의 산 페트로니오 교회 앞에서 만났습니다. (“나는 코페르니쿠스처럼 볼로냐에서 학부를, 파두아에서 대학원을 나왔다고 말하기 좋아합니다.” 그의 말입니다.) 60대 초반의 작은 체구를 가진 그는 약간 들뜬 모습으로 추억에 잠긴듯 했습니다. 그는 지난 2010년 부터 마르세이유의 이론물리센터에서 양자중력센터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미국 피츠버그 대학에서 10년 정도 지냈습니다.
그는 볼로냐를 거의 방문하지 않는 듯, 볼로냐의 오랜 친구들과 연락 했습니다. 우리는 대학가를 거닐었습니다. 베르디 광장은 학생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깃발과 낙서, 플랭카드 등이 파시스트에 대한 반대와 쿠르드 족 지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고, 2016년 이집트에서 살해당한 캠브리지의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지울리오 레제니를 기억하자는 팻말도 있었습니다.
“내가 학생일때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찰과 대치하곤 했지요.” 그는 당시 운동권이었습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무엇을 주장했을까요? “별것 아니었어요. 우리는 국경이 없어지고, 국가가 존재하지 않으며, 전쟁이 사라진, 종교가 없고, 가족이 없고, 학교가 없고, 사유재산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죠.”
이제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이 너무 급진적이었다고 말하며, 사유재산을 없애는 것이나 질투 없이 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LSD가 있습니다. 그는 LSD를 몇 번 해 보았습니다. 그 경험은 후에 그가 물리학에 관심을 가지는데, 특히 시간이라는 개념에 의문을 가지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LSD는 감정적으로만이 아니라 지적으로도 매우 강력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는 회상합니다. “여러 이상한 느낌 중 가장 특별한 것은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입니다. 무언가가 내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었지만 시계는 움직이지 않았죠. 시간은 전혀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실재의 구조가 완전히 전복되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물건들이 번쩍이며 이상한 형태를 취하는 환상을 보았고, 또한 그 경험 중에도 스스로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내 뇌 속의 화학물질 조성이 변하고 있군. 하지만 평소의 인식이 옳고 지금의 인식이 틀렸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지? 세상을 인식하는 두 가지 방법이 이렇게 다르다면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누가 알 수 있을까?” 그가 LSD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할때와 자신이 학생일때 칼라브리안 해변에 누워 아인슈타인의 책을 읽으며 이 세상이 사실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니라 그 위대한 물리학자가 설명하는 것처럼 물결치는 시공간 속에 놓여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할때의 느낌은 매우 비슷했습니다.
그는 보수적인 베로나 출신의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쳐 드렸었다고 말합니다. 이제 90대인 그의 아버지는 카를로가 어렸을때 그의 선생님이 카를로는 그런대로 잘하고 있다고 말하며, 단지 머리가 좀 길고, 급진적이며, 종종 경찰과 부딪힐 뿐이라고 말했을때 크게 놀랐습니다. 한때 이탈리아에서 학생운동은 긍정적인 분위기였지만 1978년 한 급진파가 전직 수상인 알도 모로를 납치해 살해하면서 분위기는 크게 바뀌었고, 로벨리는 물리학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학계 경력은 남들과 다릅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일자리가 없다고 고민이지요. 우리가 어렸을때는 어떻게 해야 직장인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고민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생산적인 시스템’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았죠.”
학계는 일반적인 직장에서 하는 일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보였고 그는 몇 년 동안 직장을 잡기 보다는 자신의 호기심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는 북부 이탈리아 토렌토의 한 연구팀으로 가서 몇 달 동안 자신의 차에서 잠을 자며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몸을 씻기 위해 학교 샤워실을 이용했지요.”) 그는 크리스 이샴과 같이 연구하기 위해 런던으로 갔고, 앱해이 아쉬테카와 리 스몰린과 같이 연구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습니다. “나는 다른 학생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늦게 첫 논문을 썼습니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았고, 더 많은 시간을 들였기 때문에 꼭 손해만은 아니었죠.”
그의 책이 인기를 끈 것도 다른 이들에 비해 좀 늦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양자중력 공부를 끝내고 나서 2004년 첫 책을 썼습니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이 입문서에 해당한다면, “시간의 순서”는 조금 더 어렵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내가 과학을 위해 하는 일, 내가 깊게 생각하는 것, 내게 중요한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로벨리가 물리학자로서 남긴 업적은 크게 보아 아인슈타인과 양자 이론이 채우지 못한 영역입니다. 일반상대론은 모든 것이 연속적이면서 휘어진 시공간을 다룬다면, 양자이론은 불연속적인 에너지가 상호작용하는 세계를 다룹니다. 로벨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양자역학은 휘어진 시공간을 다루지 못하는 반면, 일반상대론은 양자를 다루지 못한다.”
이 두 이론은 모두 성공적이었지만 이들을 연결하는 문제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이론 물리학에서 이루어지는 주요한 작업 중 하나는 이 두 이론을 모두 설명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시공간이 그 자체로 미세한 구조로 꼬여 있는 알갱이라고 말하는 로벨리의 루프 이론, 혹은 루프 양자 중력은 그 문제의 가능한 답 중 하나입니다.
끈이론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또다른 방식의 답입니다. 내가 그에게 그의 양자중력이론이 틀렸을 가능성을 묻자 그는 맞고 틀리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논쟁을 진행시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역사상 가장 충격적이면서, 가장 오래 남아있을 이론을 만든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아인슈타인입니다. 하지만 가장 실수를 많이 저지른 과학자가 누구냐는 질문에도 나는 아인슈타인을 말할겁니다.”
그의 이론에서 시간은 어떤 역할을 할까요? 아인슈타인이 오래전에 보인 것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가기 때문에 시간은 상대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대적인 세상에서 절대적인 “지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즉 시간은 그저 다른 것과 무관하게 흘러가는 그런 독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로벨리는 시간을 “기하학적 공간에 대해 더 복잡하게 기하학적으로 얽혀있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특히 로벨리의 이론에서 가장 근본적인 수준으로 가면 시간이 사라집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시간은 그저 인간의 “모호한”인식의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는 침침한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혹은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비유에서처럼 그림자의 연극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로벨리에 따르면, 우리가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은 열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시간의 순서”에서 그는 왜 우리가 과거만을 알 수 있고 미래는 알 수 없는지 묻습니다. 그는 그 답이 열은 따듯한 물체에서 차가운 물체로만 흐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뜨거운 커피에 떨어진 얼음은 커피를 차갑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 반대 현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열역학 2법칙이 말하는 것처럼, 열은 한 방향으로만 흐릅니다.
시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이를 무질서한 정도를 나타내는 개념인 엔트로피를 이용해 설명합니다. 과거의 엔트로피는 더 낮았습니다. 미래의 엔트로피는 더 높아집니다. 미래는 더 무질서하며, 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과거의 카드 한 팩은 깔끔하게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지만 미래의 카드 한 팩은 더 섞여있고 불확실합니다. 하지만 엔트로피, 열, 과거와 미래는 우주의 근본적인 특성이 아니라 우리의 관찰 결과 때문에 나타나는 개념입니다. “극미의 세계를 관찰해보면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사라집니다. 가장 근본적인 법칙에서 ‘원인’과 ‘결과’의 차이는 없습니다.”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로벨리의 책을 읽어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물리를 처음 접하자 마자 포기해버린 나같은 사람의 요약은 빨리 잊어야합니다. 그러나 나는 로벨리와 이야기하면서 내가 그의 완벽한 독자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또한 내가 그에게 처음으로 엔트로피라는 개념을 배웠다는 사실을 기뻐하는듯 했습니다. (“시험에 통과했어요.” 그가 한 말입니다.)
“나는 다양한 수준의 사람들에게 맞게 글을 쓰기위해 노력했습니다. 물리학을 전혀 모를 뿐더러 물리학에 관심도 없는 사람을 상상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부였던 할머니에게 설명하듯이 글을 썼지요. 그리고 물리학을 배우는 학생들을 상상했고, 나와 같이 물리학을 연구하는 동료들 또한 내 책의 대상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수준의 사람들을 생각했지요. 하지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역시 물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이입니다.”
그의 책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처럼 물리학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의 동료들 역시 그의 책을 좋아합니다. 그의 책을 비판적으로 보는 이들은 그 중간에 있는, “물리학을 조금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물리를 비판합니다. (“떨어지는 공의 속도를 계산하라? 누가 그런 걸 신경쓰나요? 나는 다음 생에는 물리학 교과서를 쓰고 싶어요.”) 그는 세상이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두 문화”로 나뉜 것을 “바보같은 일이죠, 마치 영국의 학생들을 둘로 나눈뒤 한 쪽에는 음악을, 다른 쪽에는 문학을 가르치고 음악을 배운 학생들은 소설을 못 읽게 하고 문학을 배운 학생들은 음악을 못듣게 하는 식입니다.”
그의 글이 즐거운 이유는 그가 매우 넓은 문화적 식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역사 지식은 그의 책을 처음 읽는 이들로 하여금 책을 손에서 떼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는 과학과 인문학 학생들이 모두 들을 수 있는 과학사 과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인슈타인, 루드비히 볼츠만, 로저 펜로즈가 프루스트, 단테, 베토벤, 그리고 호레이스 – 각 장은 로마시대 시인의 시를 인용하며 시작합니다 – 와 함께 등장하며 마치 블랙홀과 스핀, 확률 구름의 세계로 떠나기 전에 인간의 감정과 정서를 한껏 느끼게 만드는 듯 합니다.
“호레이스는 친밀하면서 서정적이고, 또 극도로 강렬하지요. 그는 가장 위대한 시인입니다.” 로벨리의 말입니다. “그의 시에는 향수가 나타나는데 – 괴로움이나 슬픔이 아닌 – 바로 ‘이번 세상을 열정적으로 살아보자’는 느낌이지요. 어렸을때 세상을 떠난 나의 친구 어네스토가 준 이 호레이스 시집을 나는 평생 가지고 다녔습니다.”
로벨리는 인간의 삶을 사소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우주적 관점과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슬픔과 즐거움이 전혀 모순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차가운 과학”과 인간의 내적, 영적인 삶 사이에도 모순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즉, 우리가 느끼는 즐거움과 슬픔 또한 자연의 본성인 것이지요. 자연은 그저 원자들의 집합이 아닙니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에는 물리학과 시를 비교하며, 두 학문은 모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묘사하려 애쓰는 공통점이 있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에 물리학은 수학이라는 본래의 언어 외에도 비유와 은유를 사용해 설명한다는 특징이 있을겁니다. 로벨리는 인상적인 비유를 만들어내는 재능을 타고났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시간이 부드럽게 “흐른다”는 것은 환상이며, “이세상의 사건들은 영국인들이 하듯이 순서를 지켜가며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탈리아인처럼 난리북새통을 만들며 일어납니다.” 시간 개념에 대해서는 “시간에 대한 환상은 하나씩 하나씩 벗겨졌습니다.” 우리는 “시간성에 대한 모든 흔적이 사라진 텅빈, 아쉬운 아름다움만으로 반짝이는 본질만이 남은 세상”에 버려졌습니다.
내가 읽은 모든 책들 중에서 로벨리는 BC 1세기 경 로마의 시인이었고,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장대한 서사시를 썼던 루크레티우스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로벨리는 실제로 루크레티우스의 팬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상한 생각은 아닐겁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원자의 존재를 예견했고 이는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서야 이를 증명했으며, 189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틀린 주장으로 여겨졌습니다.
로벨리와 루크레티우스의 공통점은 뛰어난 언어능력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연 속 인간의 위치에 대해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은 이 우주를 구성하는 자연의 일부인 동시에 한편으로 놀라운 아름다움을 가진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주를 더 잘 이해할수록 가지게 되는, 잘못된 믿음이나 미신을 버리고 일종의 담담한 마음을 즐기면서 얻게되는 이성적인 관점입니다. 동시에 로벨리는 인간의 본질이 사랑, 공포, 욕망, 열정이며 이들이 바로 우리의 덧없는 삶, 곧 우리에게 할당된 매우 짧은 시간을 비로소 의미있게 만들어준다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출처: 뉴스 페퍼민트
http://newspeppermint.com/2018/05/01/m-rovelli1/
2018년 3월 31일 토요일
국가별 행복의 시각화
Visualizing The Relationship Between Money & Happiness
국가별 행복의 시각화 아래 링크 참조
http://www.visualcapitalist.com/relationship-money-happiness/
https://www.zerohedge.com/news/2018-03-30/visualizing-relationship-between-money-happiness
소득 수준 대비 행복의 정도를 나타냄
남미 국가들이 소득 대비 행복도가 상당히 높아
북유럽이나 선진국들은 소득 대비 행복도가 평균 수준이다
중동국가나 도시국가(홍콩, 싱가폴, 룩셈) 등은 소득 대비 행복도가 낮은 편이다
아시아 국가중 소득이 낮은 국가는 행복이 높고 소득이 높아질 수록 행복이 낮아진다
2018년 2월 4일 일요일
한국의 애널리스트는 전반적으로 쓰레기?
https://papers.ssrn.com/sol3/papers.cfm?abstract_id=2943146
2017년 4월에 발표된 논문인데 충격적이다. 한국 애널리스트의 기업 수익 예측력은 선진국은 물론이고 신흥국 중에서도 이례적으로 낮다. 게다가 엄청나게 낙관편향되어 있다. 대체 왜? 이 분석의 방법론에 문제가 없다면 한국 애널리스트에게 쓰레기 소리를 했을 때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다.
가설
ㅇ한국 기업들의 재무재표에 문제가 있다
다른 신흥국은 재무재표에 더 문제가 있다. 한국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ㅇ업무를 위한 인맥유지를 위해서는 기업에 낙관적으로 추정해야 한다
이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ㅇ다른 나라에서는 기업이 미리 실적 가이던스를 주기도 하고 실적은 슬쩍 흘리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실적 흘리기는 국내에서도 크게 문제된 적이 있었고 실적을 먼저 받아다가 매니저에게 알려주면서 애널리스트 순위를 잘 찍어달라는 영업도 많이 했었다. 특히 선진국의 주가는 실적발표일에 급등락하는데 이건 실적에 대한 보안이 잘 지켜진다는 의미다. 오히려 보안이 잘 유지되는 선진국 기업의 실적이 더 맞추기 어려울 수도 있다.
ㅇ애널과 영업(IB부서, 법인 브로커)의 이해관계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신흥국과 선진국도 마찬가지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업계에 있는 내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다. MifidII 규제가 이러한 유착을 근절시키기 위한 노력임을 고려하면 전세계에 만연한 문제점이다.
ㅇ예측이 애널리스트 개인의 영역이고 시스템화되지 않았다
개발도상국은 더더욱 시스템화 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이유를 잘 모르겠다. 어쩌다 이리되었는가...
2017년 11월 6일 월요일
20세기 엘리트 예술
20세기 엘리트 예술이나 비평의 이론들은 인간 본성을 강하게 부정하면서 출발했다
그로 인한 첫번째 유산은 추하고 혼란스럽고 모욕적으로 느껴지는 예술이고 두번째 유산은 위선적이고 난해한 학문이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수준높은 예술에 다가오지 않는다고 놀라워한다.
스티븐 핑커 - 빈 서판 -
내 생각에 예술은 일반 인간들의 공통적인 속성이다. 엘리트 예술은 이러한 공통적인 속성을 부정하고 자신의 신분을 범인(凡人)들과 차별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난해하게 만들어놓은 것인 듯 하다.
사람들이 현대 엘리트 예술을 거부하는 것은 사람들이 천박하게 타락했기 때문이 아니라 현대 엘리트 예술이 인간 본성에 호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한 첫번째 유산은 추하고 혼란스럽고 모욕적으로 느껴지는 예술이고 두번째 유산은 위선적이고 난해한 학문이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수준높은 예술에 다가오지 않는다고 놀라워한다.
스티븐 핑커 - 빈 서판 -
내 생각에 예술은 일반 인간들의 공통적인 속성이다. 엘리트 예술은 이러한 공통적인 속성을 부정하고 자신의 신분을 범인(凡人)들과 차별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난해하게 만들어놓은 것인 듯 하다.
사람들이 현대 엘리트 예술을 거부하는 것은 사람들이 천박하게 타락했기 때문이 아니라 현대 엘리트 예술이 인간 본성에 호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017년 10월 15일 일요일
나를 모르는 이유
나를 모르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존감이 낮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낮으면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한다.
가령, 나랑 비슷한 사람이 어느정도 사람과 결혼했다. 나랑 비슷한 사람이 어느정도 직장에 다닌다. 나랑 비슷한 사람이 이런 사람들을 만나서 연애를 한다. 나랑 비슷한 사람들 애들은 이정도 공부를 한다. 나랑 비슷한 사람들은 일년에 몇번 해외여행을 가더라 등등....
이들은 늘 자기 친구나 지인이 이렇게 말을 했다. 그게 정답이라고 했다. 하는 말들을 듣는다. 그리고는 이런 말들을 끊임없이 듣다가 결국 거기에 자기 자신을 때려 맞춘다.
특히 정서적 공감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다.
가령 우리 엄마, 내 여자친구와 같이 자기와 정서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말은 이치가 맞는지, 윤리적으로 옳은지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진리라고 여긴다. 그러면 결국 자신의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고 타인의 인식과 행동에 자신을 맞추게 된다. 결국 자기 자신을 모르게 된다. 분수를 모르고 행동하게 된다.
- 미친연애
자존감이 낮으면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한다.
가령, 나랑 비슷한 사람이 어느정도 사람과 결혼했다. 나랑 비슷한 사람이 어느정도 직장에 다닌다. 나랑 비슷한 사람이 이런 사람들을 만나서 연애를 한다. 나랑 비슷한 사람들 애들은 이정도 공부를 한다. 나랑 비슷한 사람들은 일년에 몇번 해외여행을 가더라 등등....
이들은 늘 자기 친구나 지인이 이렇게 말을 했다. 그게 정답이라고 했다. 하는 말들을 듣는다. 그리고는 이런 말들을 끊임없이 듣다가 결국 거기에 자기 자신을 때려 맞춘다.
특히 정서적 공감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다.
가령 우리 엄마, 내 여자친구와 같이 자기와 정서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말은 이치가 맞는지, 윤리적으로 옳은지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진리라고 여긴다. 그러면 결국 자신의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고 타인의 인식과 행동에 자신을 맞추게 된다. 결국 자기 자신을 모르게 된다. 분수를 모르고 행동하게 된다.
- 미친연애
2017년 10월 9일 월요일
붓다, "신은 있습니까?"
어느날 부처가 신이 있느냐는 질문에 유신론자에게는 '없다'고 답변했으며 무신론자에게는 '있다'고 답했다. 그리고 구도자에게는 침묵으로 답했다. 이를 지켜본 제자 아난다가 혼란스러워 미칠 지경이라며 그 이유를 물었다.
붓다는 이렇게 답한다.
유신론자는 신의 존재를 믿고 이미 주어진 대답을 가지고 왔으며 주변사람들에게 ‘내가 옳다. 붓다도 신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려 나의 협조를 청하러 왔을 뿐이다. 나는 그의 믿음을 깨트리기 위해서 신이 없다고 말해야만 했다. 믿음은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신론자 역시 ‘신은 없다’는 주어진 대답을 들고 왔고, 내가 그의 불신을 강화시켜주길 원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신은 존재한다’고 대답해야만 했다. 두 경우 모두 의도는 같았다. 유신론자에겐 선입견적인 믿음을 깨트려주었고, 무신론자에겐 선입견적인 불신도 깨뜨려주었다. 신앙은 긍정이고 불신은 부정적이지만 양쪽 다 같다. 둘 다 아는 자도 아니고, 둘 다 경험한 구도자도 아니다. 그들은 이미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선입견이 없는 구도자는 ‘믿는 사람들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자신은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지 못합니다. 도와주십시오’ 라고 물었던 것이고 나는 침묵했다. 이에 구도자는 “선생님의 자비는 한량없습니다. 선생님은 제게 대답해 주셨습니다”라며 감사해 했다. 나는 그에게 말이 필요 없었다. 그는 분명히 지성적이고 열려 있는 민감한 사람이었다. 내가 침묵 속으로 들어가자 구도자는 나의 침묵과 현존의 일부가 되었다. 그는 침묵 속으로 각성 속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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