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3일 수요일

언어적 상대성 - 사피어-워프 가설


언어적 상대성 - 사피어-워프 가설
Linguistic Relativity.

흔히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으로 불리며, 혹은 Whorfian hypothesis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언어학자들은 이것이 잘못 명명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워프와 그의 멘토였던 사피어는 실제적으로 검증 가능한 가설을 세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는 뉴스피크라는 언어를 통한 구성원들의 사고 통제를 다룬 바가 있다. 또한 로지반이라는 인공어는 이 가설을 시험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피어는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고 사고가 언어를 만든다고까지 얘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제자인 워프는 사피어의 생각을 발전시켜 대담한 가설을 세웠고 이것은 피쉬먼을 비롯한 많은 사회언어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이런 류의 생각은 조지 오웰의 1984등에서 직접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워프는 생업이 화재예방기사였고 부업이 언어학자였는데 주변인들이 가스통을 묘사할 때 full과 empty라는 형용사만 사용하는 것을 발견했다. 결국 그들은 가스통의 상태와는 별개로 그들이 쓰는 형용사 때문에 '가득찬' 가스통과 '빈' 가스통 근처에서만 담배를 피우는 것이었다.

워프는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증거를 수집하여 이 가설의 신빙성을 높였는데 그에 의해 제시된 유명한 예는 이누이트어의 눈(snow)에 관한 것이다. 이누이트어에서는 눈(snow)을 ‘내리는 눈(falling snow), 바람에 휩쓸려온 눈(wind-driven snow), 녹기 시작한 눈(slushy snow), 땅 위에 있는 눈(snow on the ground), 단단하게 뭉쳐진 눈(hard-packed snow)’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한다. 이는 눈을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인식한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반면 이누이트어와 다르게 영어에서는 '눈(snow)'이라는 한 가지 표현밖에 없다.

워프는 이와 같은 각 집단의 어휘의 차이뿐만 아니라 문법적 차이가 각 언어의 차이를 더 두드러지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미국 인디언 언어에 대한 연구를 통해 입증하고자 하였다. 그는 영어, 불어, 독일어 등 인도유럽어와 같은 언어구조와 Hopi어의 구조를 대조하였는데, 대조 결과 SAE(Standard Average European)의 범주들은 화자들에게 시간과 공간을 향한 고정된 방향을 주는 반면 Hopi어의 문법범주는 세계에 대한 ‘과정’ 방향을 제공해 준다는 것을 발견해 내었고 이러한 차이들이 Hopi어와 SAE의 화자들이 세계를 서로 다르게 보도록 해준다고 믿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워프 가설에 대해 언어가 미치는 통제의 정도 차이에 따라 ‘강한(strong)' 해석과 ’약한 (weak)' 해석으로 나눈다.

전자는 linguistic determinism으로, 언어가 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생각의 폭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워프 외에도 비트겐슈타인 등이 이 버전의 창시자라는 설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이 구분은 워프나 사피어가 한 것은 아니고 스튜어트 체이스라는 후대의 학자가 만들어낸 개념이다.

강한 해석에 의하면, 사람들의 인지 범주는 그들이 말하는 언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고 약한 해석에 의하면 사람들의 행위는 상황에 따라 그들이 사용하게 되는 언어의 언어 범주에 의해 지배받기 쉬울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과 더불어 워프의 가설과 그를 입증하는 증거에 대해 학자들 간에 많은 논쟁이 있었다. 학자들은 유럽언어와 워프가 인용한 북미 토착 언어 사이에는 실질적인 차이성이 있으나, 이러한 차이성이 반드시 각 언어 화자들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에 깊은 차이성을 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사피어 워프 가설에 대한 가장 타당한 주장은 이 가설이 기본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음의 말은 현재의 학계의 입장을 대변해 준다.


"오늘날 우리는 사피어-워프 가설을 전적으로 수용하지도, 그렇다고 전적으로 거부하지도 않는다"
 
- 맥코맥


현재 강력한 버전의 언어적 상대성은 틀렸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나, 약한 버전에 대해서는 연구가 이어지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언어와 생각 사이에는 실증적 상관관계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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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언어학자나 인지과학자의 주류는 언어결정론(강한 사이어 워프 가설)을 부정한다. 심지어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사람의 생각은 그가 쓰는 자연언어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라고까지 판단하는 이론가도 있다.

캐나다 출신의 미국인 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가 그 예다. 핑커에 따르면, 사람은 영어나 중국어나 아파치어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언어’(language of thought)로 생각한다. 그 ‘사고의 언어’는 모든 자연언어들에 선행하는 메타언어다. 핑커는 자연언어들로부터 독립적인 이 추상언어를 ‘멘털리즈'(mentalese)라 불렀다.

핑커의 이런 견해는 모든 자연언어가 심층구조에서는 동일한 문법을 지녔다는 촘스키 이후 언어학자들의 생각과 통한다. 이런 보편문법이나 ’멘털리즈‘를 상정하는 한, 지각의 근본적 범주와 인식작용은 인류에게 종(種)보편적이고, 따라서 자연언어들의 다양하고 변덕스러운 표면구조로부터 독립적일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의 견해가 아니더라도, 언어결정론은 경험적, 직관적으로도 많은 의심을 받는다. 사람의 사고와 인식이 모국어와 어느 정도 상호작용을 하는 듯 보이긴 하지만, 더 큰 결정력을 행사하는 것은 사고와 인식 쪽이지 언어 쪽은 아니다. 이를테면 한국어는 그 고유어에 빛깔의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는 어휘들이 매우 많다. ‘빨갛다’ 계통의 형용사만 해도 한국어 사전에 올라있는 것이 예순 개 가까이 된다.

(빨그스레하다, 빨그스름하다, 뻘겋다, 뻘그스레하다, 뻘그스름하다, 뻘그죽죽하다, 발갛다, 발그레하다, 발그무레하다, 발그스레하다, 발그스름하다, 벌겋다, 벌그레하다, 벌그스레하다, 벌그스름하다, 벌그죽죽하다, 새빨갛다, 시뻘겋다, 붉다, 불그데데하다, 불그레하다, 불그름하다, 불그무레하다, 불그스레하다, 불그스름하다, 불그죽죽하다, 불긋하다, 불긋불긋하다, 검붉다 등)

그런데 자음이나 모음을 교체하고 이런저런 접사를 붙여가며 한국어가 제 어휘장 안에 마련한 이 섬세한 색채어휘 덕분에 한국인들의 색채 감각은 다른 자연언어 사용자보다 섬세한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대(색 인식이 오히려 단순)인 것 같기도 하다.

조형예술사 책에서 한국인들의 이름을 찾기 어려운 걸 보면 그건 아닌 듯하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육안으로 변별할 수 있는 무지개 빛깔의 수는 제 모국어가 구별하는 무지개 빛깔의 수보다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다.

영어나 한국어에 눈(snow)을 가리키는 말이 이누이트 족같이 네 개가 아니라 하나뿐이라 해서 영어화자나 한국어화자가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땅에) 쌓인 눈을 구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누이트 이외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그 눈들을 구별하지 않는 것은 구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그들이 쓰는 언어 때문이 아니다. 셋 이상의 수를 헤아리는 데 서툴다는 브라질의 피라하족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수 계산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언어에 수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수렵 채취 활동에 수 계산이 그리 필요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영어의 to be에 해당하는 동사가 스페인어에는 둘이 있다. ser와 estar가 그것이다. ser는 불변적 본질적 속성과 관련이 있고, estar는 가변적 상태나 존재를 나타낸다. 예컨대 영어의 good에 해당하는 형용사 bueno를 ser 동사와 함께 쓰면 ‘선량하다’는 뜻이 되고 estar 동사와 함께 쓰면 ‘건강하다’는 뜻이 된다.

또 영어의 pretty에 해당하는 여성형 형용사 guapa를 ser 뒤에 붙이면 원래부터 예쁘다는 뜻이지만 estar 뒤에 붙이면 일시적으로 예뻐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스페인어화자가 영어화자보다 존재와 상태에 대한 인식이 더 섬세하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원칙적으로, 스페인어는 영어로 충분히 번역될 수 있고, 영어도 스페인어로 충분히 번역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관사를 사용하지 않는 한국어화자들이라 해서 “He loves a girl”과 “He loves the girl”의 차이를 분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고나 인식보다, 더 나아가 세계보다 언어가 우위에 있다는 생각은 언뜻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것은 언어라는 것에 어떤 위광을 드리우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생각은 사피어-워프 가설이라는 이름으로 20세기에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지적 논쟁의 흥미로운 주제였다. 언어결정론은, 유구한 반-이성주의 전통 속에서, 고대 인도의 언어학자들로부터 근대 독일의 낭만주의 문필가들에 이르는 강력한 지지자들을 얻었다.

이런 전통과는 이질적인 기반 위에 선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도 “내 언어의 한계들은 내 세계의 한계들을 뜻한다”는 멋진 정식으로 다른 방향에서 언어결정론을 거들었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결정론은 자연언어들의 세계 분절 방식 차이에 바탕을 둔 워프의 언어결정론과 층위를 달리 하는 관점이다.)

그런데 이런 견해를 속화하며 기계적으로 밀고 나가다 보면, 기이한 언어신비주의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일본어에는 특별한 주술적 힘이 있어서 그것이 일본에 복을 가져다 준다고 여기는 이른바 고토다마(言靈) 신앙은 이런 언어신비주의의 극단적 예다. 또 자연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이댄다면, 실어증 환자는 생각이라는 것 자체를 할 수 없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를 것이다.

분명히, 언어는 사고나 세계관에 일정한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언어가 사고나 세계관을 ‘결정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언어의 도움을 받아 세계를 인식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언어의 도움 없이도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적어도 일반적 수준에서는, 언어가 사고의 흔적이고 세계관의 흔적인 것이지, 그 거꾸로가 아니다. 다시 말해, 사고나 세계관이 언어의 흔적인 것은 아니다. 영어화자에게도, 한국어화자에게도, 스와힐리어화자에게도, 사고와 인식의 가능성은 똑같이, 무한히 열려있다. 그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인 한, 그에겐 보편문법으로 운용되는 ‘멘털리즈’가 있기 때문이다.



2016년 12월 2일 금요일

여자의 마음 쉽게 정리

여자는 그 남자의 얼굴을 보고 만날지 안만날지 결정을 하고

그 남자의 가치관과 생각을 보고 사귈지 안사귈지 결정을 하고

그 남자의 능력을 보고 결혼할지, 안할지 결정을 한다.



어떤 여자가 너를 만나고 나서 그 다음부터 네가 연락을 하면

받아주는데 만나자는 말을 하면 계속 시간이 없다

안된다, 힘들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너의 얼굴이 마음에 안드는 것이고

너랑 만나고 연락도 자주하는데 사귀지 않는 것은

너의 가치관이나 생각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고

너랑 사귀었는데 결혼하자고 하는데 싫다고 하거나 생각이 없다고 하는 것은

너의 능력이나 집안이 마음에 안들기 때문인 것이다.

- 미친연애 -

2016년 10월 29일 토요일

일찍 퇴근하는데 왜 놀 시간이 없지?(주간동아)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이 드디어 시행됐다. 뉴스통신사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김영란법 덕에 남편 회식이 없어 좋다’는 누리꾼 글이 인터넷 여성 커뮤니티에 올라온단다. ‘조선일보’는 김영란법 시행 후 외식을 자제하고 집에서 ‘혼술’하는 공무원이 늘었다고 보도했고, ‘동아일보’는 ‘김영란법은 가족과 함께 ‘저녁이 있는 삶’을 만들어가는 데 기여할 것’(황호택 칼럼)이라고 했다.

저녁이 있는 삶.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지난 대통령선거에 출사표를 내며 제시했던 슬로건이다. 정치인이 내세운 구호 가운데 이보다 더 직장인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도 없을 테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저녁이 있는 삶을 반기지는 않는가 보다.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는 국회 기자간담회에서 “김영란법 시행으로 저녁이 있는 삶이 실현됐다”고 주장하며 “부인들이 남편 밥 해줘야 한다고 짜증낸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MBC 뉴스도 김영란법 시행 후 남편이 일찍 퇴근해 아이들과 놀아줘 좋기는 한데 부인들의 일이 2~3배 늘었다고 보도했다.

아마도 대다수 직장인이 꿈꾸는 저녁이 있는 삶은 노동시간과 회식이 줄어 친구와 더 많이 교류하고, 취미생활을 하며, 더 많은 여가를 즐기는 삶일 것이다. 한국 직장인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손학규 전 대표는 저녁이 있는 삶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안으로 정시 퇴근과 노동시간 상한제 등의 공약을 내걸었다. 하지만 저녁이 있는 삶을 즐기는 많은 선진국의 모습은 한국 직장인, 특히 남성 직장인이 그리는 모습과 다를 것이다.

일찍 퇴근해 집안일 하는 남자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성에게 저녁이 있는 삶은 여가시간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일터에서 보내는 시간이 줄어드는 대신 가사노동이 늘어나는 삶을 의미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 성인 남성이 하루 중 가사노동으로 보내는 시간은 45분으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짧다. 복지국가인 덴마크 남성의 하루 평균 가사노동시간은 3시간 6분으로 한국 남성보다 4배 이상 길다. OECD 평균은 2시간 18분으로 대다수 국가의 남성이 한국 남성보다 3배 이상 가사노동에 시간을 쓴다. 한국 남성이 노동시장에서 일하는 시간은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긴 편에 속하지만, 가사노동시간이 워낙 짧아 직장에서 노동시간과 가사노동시간을 합친 총 노동시간은 OECD 회원국 중 중간 정도에 불과하다. 미국, 캐나다, 오스트리아, 스웨덴 남성이 한국 남성보다 업무노동과 가사노동을 합친 총 노동시간이 더 길다. 

저녁이 있는 삶으로 가사노동이 늘어나리란 점은 다른 나라의 역사적 변화를 살펴봐도 명확하다. ‘그래프’는 20세기 이후 미국인의 주간 평균 가사노동시간 변화를 보여준다. 20세기 초 미국 남성의 평균 가사노동시간은 일주일에 4시간, 하루 34분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1920년대 이후부터 21세기 초까지 꾸준히 증가해 지금은 일주일에 16시간 40분, 하루 2시간 20분이 됐다. 지난 한 세기 동안 4배 늘어난 것이다. 현재 한국 남성의 평균 가사노동시간은 미국 남성의 30년대 가사노동시간과 비슷하다.

다시 미국 사례를 살펴보자. 남성의 가사노동시간이 늘어난 반면, 노동시장에서 소득을 올리는 노동시간은 줄었다. 업무노동과 가사노동을 합친 전체 노동시간은 어떻게 변했을까. 놀랍게도 전체 노동시간은 1930년대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즉 30년대에는 일주일에 40시간을 밖에서 일하고, 4시간 가사노동을 해서 총 44시간 일했다. 지금은 일주일에 27시간 30분을 밖에서 일하고, 16시간 30분을 가사노동에 써 역시 총 44시간 일한다. 소득이 있는 노동이 업무가사노동으로 바뀌었을 뿐 총 노동시간에는 변화가 없다. 총 노동시간에 변화가 없다 보니 여가에 쓸 수 있는 시간의 양 변화도 미미하다. 지난 한 세기 동안 미국 남성의 업무 노동시간은 40% 넘게 감소했지만 여가시간은 단지 30분 늘었을 뿐이다.

남성과 달리 미국에서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은 1960년대 이후 90년대까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 기간은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증대한 기간과 일치한다. 그렇다고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이 남성과 같아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여성이 남성보다 가사노동에 더 많은 시간을 쓴다. 2005년 현재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은 남성보다 일주일에 11시간, 하루에 1시간 30분 정도 더 길다(그래프 참조). 하지만 이 격차는 30년대 하루 5시간 이상 차이가 나던 것에 비하면 3분의 1 이하로 줄어든 것이다.

한국 남녀 가사노동 격차, 미국 1940년대 수준

현재 한국의 남녀 가사노동시간 격차는 하루 3시간이다. 남성이 하루 평균 45분 가사노동을 하는 것에 비해 여성은 하루 평균 3시간 50분 가사노동을 한다. 여성이 남성보다 5배 길다. 미국의 1940년대와 비슷한 수준이다. 성별 노동시간 격차 감소를 선진국을 판정하는 지표로 삼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긍정적 발전 방향으로 삼는 국가는 대부분 성별 노동시간 격차가 우리나라보다 현저히 적다. 저녁이 있는 삶을 온전히 누리는 복지국가에서 가사노동시간의 성별 격차는 1.5배 정도에 불과하다.

다만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한국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이 다른 OECD 회원국에 비해 길지 않다는 사실이다. 남성의 가사노동시간이 현저히 짧아 성별 격차가 큰 것이지, 여성 가사노동의 절대 시간이 길지는 않다. 오히려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OECD 회원국들과 비교해 한국 여성의 업무 노동시간이 길다. 장시간 노동이 남성뿐 아니라 일하는 여성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저녁이 있는 삶이 여가시간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업무노동을 가사노동으로 전환할 뿐이라니! 뭔가 배신당한 느낌이 들지 않으면 이상하다. 이런 삶을 추구할 가치가 있을까.

답은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의 변화가 아니라 시간을 함께 보내는 대상의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 소득 수준이 비슷한 다른 국가에 비해 우리나라 사람의 행복감이 떨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사회적 관계의 밀도가 낮기 때문이다. 저녁이 있는 삶은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대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회식 대신 가족, 친구와 함께 저녁식사를 할 기회가 많아지는 삶이다. 이러한 변화는 가족관계를 공고히 하고 사회적 관계의 확장을 가져올 것이다. 

우리나라 남성이 순수하게 여가에 보내는 시간은 하루 5시간 14분으로 OECD 회원국 평균보다 5분 적을 뿐이다(반면 한국 여성의 여가시간은 OECD 회원국 평균보다 45분 적다). 아마 이 시간이 더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함께 집안일을 하는 저녁이 있는 삶은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


입력 2016-10-21 17:22:33
  • 미국 캔자스대 사회학과 교수 chkim.ku@gmail.com

2016년 5월 23일 월요일

국가의 성장, 내수/수출, 환율

몇가지 정리

1.1 내수는 서비스 업이다.
1.2 여기서 말하는 서비스 업은 제조업보다 임금을 더 많이 주는 서비스 업을 말한다(다만 그런 서비스업은 드물다).
1.3 세계적으로 단일 국가로서 1억명 이상의 시장을 갖은 선진국은 미국과 일본 뿐이다.
1.4 세계적으로 서비스 업으로 잘 넘어간 사회는, 미국, 유럽의 일부 국가 뿐이다(독일은 아직도 제조업 중심)

2. 자원의 저주
2.1 자원의 저주는 자원에 의존을 많이 해서, 다른 산업이 망가지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맞기는 하지만 원인은 환율이다
2.2 통화가치가 자원 수출로 균형보다 강해지면, 다른 수출산업 또는 제조업이 생산 단가가 상대적으로 비싸져 성장 어렵다.
2.3 자원의 저주(고평가된 환)에 빠진 국가는 지속적으로 제조업 기반을 잃는다.

3. 공장의 위치
3.1 산업화 초기에 공장은 수도에, 또는 대도시에만 설치가 된다.
3.2 발전으로 인하여 싼 토지와 각종 규제를 피해서 지방의 도시로 이전한다.
3.3 궁극적로는 지방의 공동화(일본화)로 인하여 지방에서 공장이 견디지 못하게 된다.
3.4 제조업을 키우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환율의 평가 절하가 필요한듯 하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대규모 흑자는 영원하게 지속될수는 없다.

4. 내수는 어떤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커질까
4.1 내수는(또는 서비스업은) 상대적으로 인구 밀집 지역에서 커진다
4.2 여성이 집적된 지역에서 잘 자라난다
4.3 여성을 집적 시키는 기능도 있다.
4.5 상대적으로 통화가치가 높은 상황에서 잘 자란다(구매력)

5. 제조업을 하면서 함께 서비스업의 발전이 가능한가
5.1 아직 그런 나라를 본적이 없다.
5.2 내수가(서비스업) 큰 나라중에 제조업으로 성공한 나라가 있던가?

6. 환을 자유화 시키면 어떤 상황이 버러질까
6.1 상황에 따라 자본의 이탈, 유입이 커진다. 이는 실업, 성장률, 유동성 등 모든 것에 거대한 영향을 준다.
6.2 계속 반복되면, 산업이 초토화

[출처] 정리 _20160524|작성자 봄날의 곰
http://blog.naver.com/rladudrl78/220717923272

2016년 5월 21일 토요일

오즈의 마법사, 뇌가 없는 허수아비


도로시: 뇌가 없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허수아비: 잘 모르겠는데...하지만 사람들도 생각 없이 말을 많이 하지 않니?

- 오즈의 마법사 영화판 (1939) -

2016년 4월 23일 토요일

자존감과 너그러움

수업에서 발표 한 번 망했다고 “내 인생은 이제 망했어. 아무도 이런 나를 채용하려 하지 않겠지”라며 난리법석이었던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발표뿐 아니라 작은 실수 하나에도 삶이 끝장난 것처럼 쉽게 좌절하고 기분이 오락가락하던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있는 반면 중요한 일에서 크게 미끄러지고 난 후에도 ‘그럴 수도 있지 뭐’, ‘다음에 더 잘 하면 돼’라며 잘 넘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작은 일에도 쉽게 좌절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덤덤하게 넘어갈 수 있는 걸까? 소위 ‘멘탈이 강하다’고도 하는 이들의 비결은 도대체 뭘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사람들은 흔히 ‘자존감’을 떠올린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좌절을 덜 하고 자신에게도 너그러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또 어느 정도는 틀린 말이기도 하다.

자존감이란
앞서 간간히 언급하기도 했지만, 우선 자존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조금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평소에 자존감이 낮아서 문제인 것 같다는 상담을 종종 듣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자존감을 높을 수 있겠냐는 질문도 자주 받는다. 많은 사람의 고민이 되는 이 자존감은 도대체 무엇일까? 자존감은 높을수록 반드시 좋을까?
자존감이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심리학에서 정의하는 자존감이란 ‘긍정적인 자기지각’이다. 내가 나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여기는지에 대한 것이다. ‘근거 없는 자존감’이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사실 어폐가 있는 게 원래 자존감이라는 게 보통 별로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자존감으 그냥 내가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연구에 의하면 각종 능력이나 성취 수준 등과 큰 상관이 없다.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지만 “그치만 나는 내가 싫어”라고 할 수 있고, 반대로 크게 내세울 건 없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좋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흔히들 이 자존감이 ‘높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도 많이 찾는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자존감이 높다고 해서 꼭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자존감에 대한 오해
심리학자 바우마이스터는 자존감이 만능키가 아님을 강조한다. 자존감을 실제로 높이는 처치를 했을 때 수행 성과가 좋아졌다거나 실제 어떤 유익이 있었음이 확인된 바가 별로 없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또한 리어리 등의 학자들은 자존감이란 ‘원인’이라기보다 이미 (주관적으로) 즐겁고 만족스럽게 잘 살고 있는 삶의 ‘결과’에 가깝다고 이야기한다. 자존감이 문제라고 느낀다면 자존감 자체보다 그 ‘인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자존감에 확실한 효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뿐만 아니라 ‘높은’ 자존감을 유지하는 데에는 상당한 비용(예컨대 그만큼 많은 주위의 인정을 바라는 등)이 들어간다는 점도 지적되곤 한다. 이런 맥락에서 심리학자 크로커는 자존감의 높낮이보다 자존감의 ‘안정성(단단함)’, 자존감의 원천과 유지 방식이 훨씬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일례로 높지만 건강하지 않은 자존감의 예들을 살펴보자. 자존감이 높아도 주변의 인정을 통해서만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는 등 자존감의 원천이 지나치게 ‘외부’에 있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경우 나가는 사람의 말 한 마디에 자존감이 솟아올랐다 추락하는 등 자존감이 불안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기도 한다. 심리학자 크로커의 연구에 의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쉽게 화를 내거나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아니라 자존감이 ‘불안한’ 사람이었다. 자존감이 낮지만 안정적인 사람이 자존감이 높지만 불안정한 사람보다 적은 공격성을 보였다. 높고 불안한 자존감보단 낮고 안정적인 자존감이 차라리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바우마이스터 등의 연구에 의하면 가정폭력범을 포함 타인에게 폭력적이거나 갑질하기 좋아하는 사람들도 자존감이 낮기보다(자신이 진심으로 가치 없는 인간이라고 여기기보다), 자신은 분명 엄청난 사람인데(이건 기정사실) 자신의 대단함을 충분히 ‘받들어’주지 않는 주변 인간들이 나쁜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추구하는 방법도 이상하고 연약하고 무너지기 쉬운 자존감이긴 하지만, 스스로를 보통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기는 등 높낮이를 따지면 분명 ‘높은’ 자존감이다.
이렇게 모래 위에 높이 쌓은 자존감들은 늘 불안하며 높더라도 별로 좋을 게 못 된다. 좌절을 맞이했을 때 매우 쉽게 꺾이며, 꺾였을 때의 모습 또한 보기 좋지 않다. 불안하고 높은 자존감을 지키려 조금이라도 누군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불같이 화를 내는 등 매우 ‘방어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기도 한다.

자존감의 높낮이 < 자존감의 원천과 안정성
따라서 앞서 살짝 언급했지만 학자들은 자존감의 높낮이보다 자존감을 ‘건강하게’ 추구하고 있는가의 여부가 훨씬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예컨대 굳이 누구랑 비교해서 우월감을 느끼지 않아도, 또는 애써 합리화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삶에 만족할 수 있게 살고 있게 되는 것 말이다. 무엇보다 실제로 즐거운 일을 하고 있는가, 좋은 친구들이 있는가의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자존감 이전에 자신에 대해 ‘현실적인 기대’를 갖는 게 우선이다. 만약 완벽주의자의 경우처럼 1등이 아니면, 뭐든지 한 방에 해내지 못하면 나는 쓰레기라는 말도 안 되는 기준을 갖고 있다면 (사회가 이런 기준을 들이밀 때도 역시) 어떻게 해도 ‘건강한’ 자존감을 갖긴 어렵다.
삶에 대한 겸손, 즉 삶이 항상 내 뜻대로 되는 건 아니며 그래도 괜찮다고 여길 줄 아는 것, 내가 늘 대단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할 줄 아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이런 겸허한 태도는 앞서 언급한 지혜로운 사람들의 특징이다. ‘성숙’해지기 위한 출발점으로 불리기도 하며 자존감을 이야기 하기 이전에 우선 살펴봐야 하는 부분이다.
정리하면,
자존감이 낮아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자존감 자체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그보다 자신에게 지나치게 높은 기준을 들이밀거나 과도한 통제욕을 갖고 있는 건 아닌지,가만히 있어도 내 삶이 좋을 수밖에 없는 재미 요소들이 나의 생활 속에 있는지, 나는 어떤 무엇을 통해(남들과의 비교?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 주로 뿌듯함을 느끼는지 등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계속해서 자존감 때문에 고민이라면 먼저 삶에 대한 기준과 태도들부터 점검해 보는 것도 좋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인간
다시 너그러워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텍사스 대학의 심리학자 Neff와 동료들은 사람마다 타인을 향해 이해심 있고 너그럽게 대하는 정도가 다 다르듯, ‘자신’을 향해서도 너그러운 정도 또한 사람마다 다르다는 점을 확인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심하게 굴지 않을 거면서 유독 자신의 실수에 대해 ‘어쩜 그렇게 못난 짓을’, ‘넌 이제 끝났어’라며 스스로에게 강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너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하나의 불완전한 인간일 뿐. 모두가 그렇듯 너도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고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괜찮아’라며 스스로를 다독일 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구자들은 이 너그러움이 삶의 좌절을 성공적으로 견디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신에 대해 친절하고 너그러운 사람들, 즉 자신도 인간임을 인정, 자신의 단점들에 대해 깊은 이해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같은 실패를 겪어도 훨씬 잘 견뎌내는 경향을 보였다. 같은 좌절을 겪어도 자신에 대해 너그러울 줄 아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부정적 정서를 덜 느끼고 더 빨리 극복했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은 자신에 대해 너그러워지는 것이 여기저기서 중요하게 강조되는 ‘높은 자존감’보다도 좌절을 막는 데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자존감보다 너그러움이 중요
앞서 말했듯 자존감은 ‘스스로가 얼마나 멋지고 가치 있다고 느껴지는가’와 관련된 주관적인 판단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뿌듯함’, ‘자랑스러움’ 등의 감정을 더 자주 느끼며 자기비하가 덜 하다.
하지만 자존감이 높은 경우 주변의 인정을 포함해서 높은 자존감에 부합하는 ‘증거’들을 끊임없이 갖다 대야 하는 등 유지비가 많이 든다는 이야기를 했다. 자존감이 추락하는 사건이 생기면 그만큼 더 큰 좌절을 맛보게 된다는 단점도 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존감의 추락을 막기 위해 실패 시 ‘내 잘못이 아니야’라는 책임 회피나 ‘애초에 그 일은 나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 같은 각종 합리화 전략을 더 많이 쓰기도 한다. 하지만 자존감은 낮을지언정 자신에 대해 너그러운 사람은 이런 류의 정신승리를 잘 보이지 않는다.
듀크 대학의 심리학자 Leary는 사람들에게 ‘인생 최대 실패’ 같은 걸 떠올리게 하고 스스로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라는 등 자존감을 높이는 처치를 하거나(자존감 조건), 애써 자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보다 자신도 한낱 인간이며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처치(너그러움 조건)를 했다.
그 결과 실패 후 자존감을 높인 사람들은 자신의 프라이드를 방어하는데 급급, 자신의 책임을 부인하는 반면, 자신에 대해 너그러워질 기회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전자에 비해 훨씬 부정적 정서를 덜 느끼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야! 나는 멋진 사람이야! 내가 그랬을리 없어!”라며 도망치기보다 자신의 실패를 바라 보고 “그때는 분명 내가 이런저런 잘못과 실수를 했어. 하지만 괜찮아.”라고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이들은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만큼 자신의 단점을 ‘개선’하겠다는 의지 또한 더 강하게 보였다. 예컨대 성적이 낮게 나왔을 경우 자존감을 높이는 처치를 한 사람들은 ‘나는 똑똑한 사람이야. 고로 내가 못한 게 아니라 시험문제가 유독 어려웠던 거야’ 같은 생각을 통해 위안을 얻고 넘어가는 반면, 자신에 대해 너그럽게 생각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미끄러질 수 있어. 다음에는 더 잘 하면 되지’라며 실제로 더 오랜 시간 공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패했어. 하지만 괜찮아. 다시 하면 돼”라는 게 이들의 사고방식 이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스스로를 심하게 몰아붙이고 채찍질하는 것보다, 또는 덮어놓고 나는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에 대해 깊은 이해심을 발휘할 줄 아는 것, 모두 그렇듯 자신도 인간이기에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현실적인 자기인식’을 갖는 것이 정신건강을 지켜주면서 자기발전적인 행동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것이다.

겸손
정확한 자기인식은 사실 ‘겸손’과도 맞닿아있는 것 같다. 앞서도 말했지만 사실 우리가 뭐 그렇게 위대하고 대단한 존재라고 늘 성공만 하는 게 당연하다며 그러지 못하면 ‘못난 나’라고 실망하나 싶기도 하다. 생기는 게 당연한 자잘한 실패에 늘 좌절하는 거야 말로 비현실적인 자기인식이자 엄청난 ‘오만’이 아닐까?’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로 자신에 대해 너그러울 줄 아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타인에게도’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자신에게 너그러울수록 타인에게도 더 좋은 평가를 내리며 심지어 자신에게 적대적인 대상에 대해서도 앙심을 품는 정도가 덜 하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었다. 진정한 겸손뿐 아니라 타인을 향한 너그러움 역시 우선 나 자신에 대해 현실적인 기준을 적용하는 것에서부터 온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늘 고군분투하느라 힘들었을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당신이나 나나 헛점 많은 인간일 뿐. 내가 때때로 실수하고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힐 수 있는 것처럼 당신도 그렇겠지요. 괜찮습니다.”라는 작은 너그러움을 선사하며 함께 좌절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져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더 자세한 내용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를 참고하라.

-ㅍㅍㅅㅅ-

참고문헌
Baumeister, R. F., Campbell, J. D., Krueger, J. I., & Vohs, K. D. (2003). Does high self-esteem cause better performance, interpersonal success, happiness, or healthier lifestyles?. Psychological Science in the Public Interest, 4, 1-44.Breines, J. G., & Chen, S. (2012). Self-compassion increases self-improvement motivation.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 38, 1133-1143.Crocker, J., & Park, L. E. (2004). The costly pursuit of self-esteem. Psychological Bulletin, 130, 392-414.Kross, E., & Grossmann, I. (2012). Boosting wisdom: distance from the self enhances wise reasoning, attitudes, and behavior. 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 General, 141, 43-48.Leary, M. R., Tate, E. B., Adams, C. E., Batts Allen, A., & Hancock, J. (2007). Self-compassion and reactions to unpleasant self-relevant events: The implications of treating oneself kindly.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92, 887-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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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5일 화요일

뉴골든 에이지

모든 문명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시대이행을 겪는다.
노동자 -> 군인 -> 지식인 -> 탐욕자 -> (사회혁명) -> 노동자 -> 군인 ....
이는 자연법칙이다.
       - 사회경제학자 사카르

인플레이션과 자금의 순환패턴은 30년마다 절정이다. 360도 회전하는 과정에서 4번의 순환기를 거친다. 7.5년의 소순환 주기다. 역사에 7년 전쟁이 많은 이유다. 대략 7~8년이 지나면 큰 문제의 변수가 전환점에 도달한다. 이후 속도를 더해 15년간 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