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위해서는 도덕적 가치판단이나 정치적 편향, 이해관계를 버릴 필요가 있다. 쉽지 않은 일이고 그러다 보니 인간의 본성에 대해 왜곡된 접근법과 이론이 넘쳐난다. 그런 면에서 인간행동을 밑바닥부터 이해하는 가장 현실적인 프레임은 대기업 인사과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삼성은 그 분야의 가장 최첨단을 달리는 회사다. 이 책이 전부는 아닐 지라도 인간의 조직행동론에 대한 상당한 실무 통찰을 담았을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주요 내용
ㅇ새로운 시도나 도전을 할 때, 기존의 사람은 바뀌지 않고 방식도 바꾸지 않는다. 마음 독하게 먹고 모두 갈아치우지 않는다면 도전과 개혁은 불가능하다. 기존의 인력을 교육해서 혁신의 방향으로 내부 분위기를 전환시킨 사례는 거의 없다.
ㅇ사업을 할 때는 업의 본질을 이해하고 접근해야 한다. 내수 서비스업은 상대방보다 조금만 나으면 된다는 상대적 가치, 제조업은 세계 최고를 노리는 절대적 가치 개념으로 접근한다
ㅇ실력은 있지만 봉건 영주와 같이 왕국(사일로)을 건설하려는 직원은 부지불식간에 다른 영주와 교체하여 돌린다. 그들의 왕국을 파괴하라. 그러면 영주는 겸손해지고 왕국간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해진다.
ㅇ새로운 사업에 도전할 때는 능력은 조금 부족해도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사람을 쓴다
ㅇ여유있게 건전한 가정에서 정상적으로 태어난 사람이 리더로 맞다. 그렇지 않으면 사리사욕을 포기할 줄 모르기에 리더에 부적합하다. 출생시 부모는 선택 불가능하므로 리더는 태어난다고 볼 수도 있다. 탁월한 리더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의 역사를 보고 얼마나 이기적인 선택을 자주 했는지에 주목하라. 그러한 선택을 하고도 책임지거나 비난받지 않는 환경에서 자라왔다면 그는 최악의 리더가 된다.
ㅇ최고의 리더는 나중에 리더 자리를 떠나도 그 조직이 스스로도 잘 굴러갈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게 한다. 이는 결국 인재 양성의 문제다.
ㅇ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 반드시 피해야 할 인재상부터 제거한다. 무례한 자, 부정적인 자, 뒷담화 하는 자
ㅇ긍정적 인재상 중 하나로 중요시하는 것은 호기심 많은 자
2019년 1월 3일 목요일
2018년 12월 23일 일요일
(상식과 달리)한국의 교육 불평등은 악화되지 않았다
출처 http://sovidence.tistory.com/m/987
논문 위치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7565420
최성수 이수빈 공동 연구
주요 내용
ㅇ 더이상 개천용은 없고 이제 금수저만 더더욱 고등 교육을 받는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를 증명할 만한 연구는 없었다.
ㅇ성균관대 최성수, 이수빈 두 사회학자가 서베이 자료 8개를 통합해서 1940년대 이전 출생자부터 1990년대 출생자까지 부모의 학력 수준에 따른 자녀의 교육 성취도를 연구
ㅇ부모의 교육 수준을 상위 20%, 하위 20%로도 나누어서 그에 따른 자녀의 교육 성취를 연구. (단순히 대졸로 하면 과거의 대졸과 현재의 대졸은 수준이 다르므로 직접 비교가 안된다)
ㅇ자녀의 교육 수준도 교육연수, 전문대 이상, 4년제 대학 이상, 명문대 졸업 등으로 나누어서 다층적으로 어떻게 역사적 변화를 거쳤는지 분석
논문의 결론: 한국에서 교육 기회 불평등은 커지지 않았다
아래 그래프는 부모가 대졸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자녀의 교육연수가 얼마나 다른지 자녀의 출생연도에 따른 변화를 나타낸 것. 보다시피 현재 70대인 전쟁 세대는 부모의 학력에 따른 자녀 학력 격차가 4년에 이르렀는데, 86세대인 60년대생에 오면 3년 이하로 줄어들고, 90년대 출생자에 이르면 1년 이하로 줄어듦.
논문 위치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7565420
최성수 이수빈 공동 연구
주요 내용
ㅇ 더이상 개천용은 없고 이제 금수저만 더더욱 고등 교육을 받는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를 증명할 만한 연구는 없었다.
ㅇ성균관대 최성수, 이수빈 두 사회학자가 서베이 자료 8개를 통합해서 1940년대 이전 출생자부터 1990년대 출생자까지 부모의 학력 수준에 따른 자녀의 교육 성취도를 연구
ㅇ부모의 교육 수준을 상위 20%, 하위 20%로도 나누어서 그에 따른 자녀의 교육 성취를 연구. (단순히 대졸로 하면 과거의 대졸과 현재의 대졸은 수준이 다르므로 직접 비교가 안된다)
ㅇ자녀의 교육 수준도 교육연수, 전문대 이상, 4년제 대학 이상, 명문대 졸업 등으로 나누어서 다층적으로 어떻게 역사적 변화를 거쳤는지 분석
논문의 결론: 한국에서 교육 기회 불평등은 커지지 않았다
아래 그래프는 부모가 대졸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자녀의 교육연수가 얼마나 다른지 자녀의 출생연도에 따른 변화를 나타낸 것. 보다시피 현재 70대인 전쟁 세대는 부모의 학력에 따른 자녀 학력 격차가 4년에 이르렀는데, 86세대인 60년대생에 오면 3년 이하로 줄어들고, 90년대 출생자에 이르면 1년 이하로 줄어듦.
아래 그래프는 학력 수준 상위 20%의 부모와 하위 20%의 부모 사이에 자녀가 명문대를 졸업할 확률의 격차를 측정한 것. 상층 부모를 두면 명문대 졸업 확률이 높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 차이가 늘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음. 위에 보여준 교육 연수처럼 부모의 배경에 따른 교육 격차가 지속적으로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1950년대 출생자 이후 현재까지 사실상 거의 변화가 없음.
명문대 졸업자 중에서 '개천용'이 줄어들었다고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개천'이 줄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높음. 결과적으로 기회의 평등은 높아졌지만 실제 고용시장이나 체감적으로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다음의 이유 때문일 수 있다
1. 기회의 평등은 매우 높아졌지만 결과의 불평등은 여전하다
2. 기회의 평등을 넘어 결과의 평등까지 바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018년 12월 22일 토요일
미네르바의 부엉이와 갈리아의 수탉
미네르바(Minerva)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으로 그리스 신화의 아테나(Athena)에 상응한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로마신화에서 미네르바와 항상 함께 다니는 신조(神鳥)로서 지혜의 상징이다. 원래 미네르바의 신조는 까마귀였다. 오비디우스(Ovidius)의 <변신이야기>에 따르면 까마귀는 미네르바의 비밀을 누설한 죄를 짓고 신조의 자리를 부엉이에게 내주었다 한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헤겔(Friedrich Hegel)은 그의 저서 <법철학> 서문에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라는 경구를 남겼다. 철학은 앞날을 미리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뤄진 역사적 현상이 지나간 이후에야 그 뜻이 분명해진다는 의미이다. 헤겔의 경구는 인식이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 인간의 욕망은 변화의 속도 만큼이나 빨리 움직이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인식하고 학문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가능하다. 이와 같이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는 욕망과 인식의 속도 차이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가끔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서 ‘그때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왜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했을까? 그때 왜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라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바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날이 저물어야 날개를 편다’는 의미가 아닌가 한다.
역시 인간의 지혜는 변화의 속도와 욕망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가 보다. 그런데 그때 알지 못했던 것이 후회로 남기는 했지만 그때 알지 못해 낭패를 보았던 경험 때문에 지금 알게 됐으니 그것만으로도 소득이 아닌가?
헤겔의 말은 오늘날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다. 변화의 속도가 워낙 빨라 인간의 인식과 지식과 학문이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에 따라 지식과 학문이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뒷북만 치고 있다. 변화를 따라가기에도 숨이 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탉이 울면 새벽이 오고 얼마 안 있어 동이 트면서 태양이 떠오른다. 시계가 없었던 시절 수탉은 새벽의 전령사였다. 어둠의 공포에서 벗어나 밝은 낮으로 가는 길목에서 수탉은 항상 밝은 아침이 멀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신비한 존재였다. 동양의 옛날이야기에도 귀신이 쫓아오다가 닭 울음소리를 듣고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스토리가 제법 많이 있다. 새벽에 울음을 우는 수탉을 신성시하는 경우도 생겨난 것 같다.
서양인들은 갈리아지역(지금의 프랑스)이 닭의 원산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닭을 ‘갈리아의 새’라고도 불렀다. 갈리아인들은 고대부터 수탉을 새벽의 신으로 신성시했다. 수탉은 갈리아의 신으로 숭상되기도 하고 갈리아 군대의 기장(旗章)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프랑스를 상징하는 동물은 수탉이다.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 개념에 맞서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제기한 개념이 ‘갈리아의 수탉(Gallia Rooster)’이다.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수탉이 새벽에 울어 세상을 깨우듯이 철학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이 뒷북이나 치고 앉아 있다면 그건 죽은 학문이라는 것이다. 헤겔이 말한 것처럼 철학이 현실이 다 지나간 다음에야 겨우 이론을 정립하는 늙은이 학문이 아니라 현실이 오기 전에 그것들을 인식하고 설명하는 선도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하 테제>의 11번째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말한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 논리에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철학자의 사명은 시간이 지난 다음 뒤늦게 세상을 해석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 앞서 이론을 정립해 현실을 바꾸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성연 애터미 경제연구소장 nexteconomy@nexteconomy.co.kr
http://m.nexteconom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38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헤겔(Friedrich Hegel)은 그의 저서 <법철학> 서문에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라는 경구를 남겼다. 철학은 앞날을 미리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뤄진 역사적 현상이 지나간 이후에야 그 뜻이 분명해진다는 의미이다. 헤겔의 경구는 인식이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 인간의 욕망은 변화의 속도 만큼이나 빨리 움직이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인식하고 학문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가능하다. 이와 같이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는 욕망과 인식의 속도 차이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가끔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서 ‘그때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왜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했을까? 그때 왜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라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바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날이 저물어야 날개를 편다’는 의미가 아닌가 한다.
역시 인간의 지혜는 변화의 속도와 욕망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가 보다. 그런데 그때 알지 못했던 것이 후회로 남기는 했지만 그때 알지 못해 낭패를 보았던 경험 때문에 지금 알게 됐으니 그것만으로도 소득이 아닌가?
헤겔의 말은 오늘날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다. 변화의 속도가 워낙 빨라 인간의 인식과 지식과 학문이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에 따라 지식과 학문이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뒷북만 치고 있다. 변화를 따라가기에도 숨이 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탉이 울면 새벽이 오고 얼마 안 있어 동이 트면서 태양이 떠오른다. 시계가 없었던 시절 수탉은 새벽의 전령사였다. 어둠의 공포에서 벗어나 밝은 낮으로 가는 길목에서 수탉은 항상 밝은 아침이 멀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신비한 존재였다. 동양의 옛날이야기에도 귀신이 쫓아오다가 닭 울음소리를 듣고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스토리가 제법 많이 있다. 새벽에 울음을 우는 수탉을 신성시하는 경우도 생겨난 것 같다.
서양인들은 갈리아지역(지금의 프랑스)이 닭의 원산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닭을 ‘갈리아의 새’라고도 불렀다. 갈리아인들은 고대부터 수탉을 새벽의 신으로 신성시했다. 수탉은 갈리아의 신으로 숭상되기도 하고 갈리아 군대의 기장(旗章)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프랑스를 상징하는 동물은 수탉이다.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 개념에 맞서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제기한 개념이 ‘갈리아의 수탉(Gallia Rooster)’이다.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수탉이 새벽에 울어 세상을 깨우듯이 철학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이 뒷북이나 치고 앉아 있다면 그건 죽은 학문이라는 것이다. 헤겔이 말한 것처럼 철학이 현실이 다 지나간 다음에야 겨우 이론을 정립하는 늙은이 학문이 아니라 현실이 오기 전에 그것들을 인식하고 설명하는 선도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하 테제>의 11번째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말한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 논리에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철학자의 사명은 시간이 지난 다음 뒤늦게 세상을 해석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 앞서 이론을 정립해 현실을 바꾸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성연 애터미 경제연구소장 nexteconomy@nexteconomy.co.kr
http://m.nexteconom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38
2018년 11월 18일 일요일
2018년 10월 21일 일요일
리처드 호프스태터-미국의 반지성주의
‘반지성주의’란 지식인과 지적 활동을 백안시·적대시하는 미국의 사회적 경향을 말한다. 미국에는 지식인이 허세에 차 있고 대중을 기만하며 남성적이지 못한데다 속물적이고, 나아가 비도덕적이고 위험하다는 고정관념이 존재한다. 이 고정관념에 따르면 평범한 사람이 살면서 몸으로 체득한 상식과 윤리야말로 전문가나 식자들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 즉 분석적이고 보편적인 ‘지성(intellect)’을 배격하고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슬기(intelligence)’를 중시하는 것이 미국의 풍토이다. 이를 가장 잘 구현한 인물이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이다.
1820년대 이후부터 서부 개척, 산업 발전, 평등주의 부상 등의 사회 경제적 변화로 인해 미국 건국 초기 성직자와 법률가 중심의 지식인 기반 전통 질서가 해체되었다. 맨손으로 자수성가한 기업가들이 시대를 호령하고 비즈니스 논리가 거침없이 통용된 19세기의 도금 시대(Gilded Age)는 ‘나약한’ 지식인과 ‘쓸데 없는’ 학교 교육에 대한 경멸이 최고조에 달한 때였다. 그러나 사회 복잡성이 증가하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전문가 집단이 정부 정책에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중들의 지식인에 대한 비웃음은 두려움과 분노로 전환된다. 또 이데올로그로서 지식인의 비판적, 진보적 특성 때문에 우익들은 전통적으로 지식인을 적대시했다.
하지만 동시에 20세기 이후 미국 반지성주의의 깊숙한 곳에는 모더니티 자체에 대한 반동이 숨어 있다. 1차대전 이후 미국에 몰아 닥친 변화에 대한 거부다. 즉, 세계시민주의와 다윈 진화론의 유입, 미국 고립주의의 종말, 대공황으로 전통 자본주의 붕괴와 중앙 집중화된 복지 국가로의 전환, 경찰국가로서, 그리고 냉전으로 인한 전쟁 부담 등이다. 이를 거부하고, 대륙으로 떨어져 고립된 채 촌락 사회가 온존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뒷받침하며 산업 자본주의가 제재 없이 활개 쳤던 19세기의 미국으로 회귀하려는 심리의 일환이 반지성주의로 나타났다.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은 반지성주의의 가장 강한 동력이었다. 초창기의 청교도 성직자들은 지식인 계층이었지만, 18세기 중반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면서 청교도 시대가 끝나고 복음주의 시대가 열린다. 이들은 세력확장을 위해 감성에 호소하면서 성령 대 부흥회와 같은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도입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요소는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고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파악하는 미국 우익 세계관의 기저를 이루게 된다. 복음주의와 쌍벽을 이루는 또 하나의 정신적 전통은, 학습된 인공적 이성보다도 신이 주신 직관적 “지혜”를 선호하는 원시주의(primitivism)다. 이는 애초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련되었지만 타락한’ 유럽 문명과 스스로를 구분하면서 세워졌다는 데서도 기인한다.
반지성주의가 미국인 의식의 전면으로 떠오른 것은 미국이 비즈니스 패권이 지배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개척지에서 맨손으로 사업을 일구는 과정에서 거칠고 공격적인 남성적 마인드와 과감한 의사결정, 기회를 놓치지 않는 순발력이 미덕이 되고, 지적이고 문화적인 것은 ‘유약하고 여성적’이라고 배척하는 풍토가 심화된 것이다. 이들 중 다수는 공식 교육 없이 맨손으로 자수성가하여 성공 신화를 양산한 장본인들이었는데, 이들의 이상을 잘 반영한 문헌이 19세기부터 출현한, 강한 종교색을 띤 자기계발(self-help) 서적들이다.
반지성주의적 신념이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겨진 분야가 바로 미국의 교육이다. 미국 학교 교육의 실패, 즉 교사의 저임금과 낮은 지위, 노후하고 게토화된 학교, 축구팀 주장이나 치어리더에 대한 과도한 숭배, 학업 성취도의 전반적 저하, 성적이 뛰어난 학생의 방치 내지는 따돌림은 대부분 여기에 기인한다. 특히 1870년대 이후 중등 의무 교육이 시행되고 쏟아져 들어오는 이민자의 자녀들까지 가세해 학생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공부에 관심 없는 대다수 평균 이하의 학생들에게 대학보다는 시민 의식 함양과 실용적 직업 교육에 집중해야 한다는 신념이 헤게모니를 쥐게 된다. 이 신념이 가장 극적으로 표현된 예가 1940-1950년대에 시행된 ‘Life Adjustment’ 운동으로, 외국어나 수학, 고전 같은 학구적 과목이 대거 폐지되고 운전이나 가사처럼 학생들의 흥미와 필요에 부응하는 실용적인 과목이 개설되었다. 이 운동은 너그럽고 민주적이며 진보적인 이상을 추구했지만, 매스미디어가 부추기는 소비문화에 순응하는 수동적 인간을 길러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기도 했다. 존 듀이의 교육 철학은 이런 새로운 교육 운동을 떠받친 지적 기둥 중 하나였으나, 현장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듀이의 의도와 달리 단순화되고 왜곡되었다.
출처: http://lectrice.co.kr/?p=436
1820년대 이후부터 서부 개척, 산업 발전, 평등주의 부상 등의 사회 경제적 변화로 인해 미국 건국 초기 성직자와 법률가 중심의 지식인 기반 전통 질서가 해체되었다. 맨손으로 자수성가한 기업가들이 시대를 호령하고 비즈니스 논리가 거침없이 통용된 19세기의 도금 시대(Gilded Age)는 ‘나약한’ 지식인과 ‘쓸데 없는’ 학교 교육에 대한 경멸이 최고조에 달한 때였다. 그러나 사회 복잡성이 증가하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전문가 집단이 정부 정책에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중들의 지식인에 대한 비웃음은 두려움과 분노로 전환된다. 또 이데올로그로서 지식인의 비판적, 진보적 특성 때문에 우익들은 전통적으로 지식인을 적대시했다.
하지만 동시에 20세기 이후 미국 반지성주의의 깊숙한 곳에는 모더니티 자체에 대한 반동이 숨어 있다. 1차대전 이후 미국에 몰아 닥친 변화에 대한 거부다. 즉, 세계시민주의와 다윈 진화론의 유입, 미국 고립주의의 종말, 대공황으로 전통 자본주의 붕괴와 중앙 집중화된 복지 국가로의 전환, 경찰국가로서, 그리고 냉전으로 인한 전쟁 부담 등이다. 이를 거부하고, 대륙으로 떨어져 고립된 채 촌락 사회가 온존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뒷받침하며 산업 자본주의가 제재 없이 활개 쳤던 19세기의 미국으로 회귀하려는 심리의 일환이 반지성주의로 나타났다.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은 반지성주의의 가장 강한 동력이었다. 초창기의 청교도 성직자들은 지식인 계층이었지만, 18세기 중반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면서 청교도 시대가 끝나고 복음주의 시대가 열린다. 이들은 세력확장을 위해 감성에 호소하면서 성령 대 부흥회와 같은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도입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요소는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고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파악하는 미국 우익 세계관의 기저를 이루게 된다. 복음주의와 쌍벽을 이루는 또 하나의 정신적 전통은, 학습된 인공적 이성보다도 신이 주신 직관적 “지혜”를 선호하는 원시주의(primitivism)다. 이는 애초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련되었지만 타락한’ 유럽 문명과 스스로를 구분하면서 세워졌다는 데서도 기인한다.
반지성주의가 미국인 의식의 전면으로 떠오른 것은 미국이 비즈니스 패권이 지배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개척지에서 맨손으로 사업을 일구는 과정에서 거칠고 공격적인 남성적 마인드와 과감한 의사결정, 기회를 놓치지 않는 순발력이 미덕이 되고, 지적이고 문화적인 것은 ‘유약하고 여성적’이라고 배척하는 풍토가 심화된 것이다. 이들 중 다수는 공식 교육 없이 맨손으로 자수성가하여 성공 신화를 양산한 장본인들이었는데, 이들의 이상을 잘 반영한 문헌이 19세기부터 출현한, 강한 종교색을 띤 자기계발(self-help) 서적들이다.
반지성주의적 신념이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겨진 분야가 바로 미국의 교육이다. 미국 학교 교육의 실패, 즉 교사의 저임금과 낮은 지위, 노후하고 게토화된 학교, 축구팀 주장이나 치어리더에 대한 과도한 숭배, 학업 성취도의 전반적 저하, 성적이 뛰어난 학생의 방치 내지는 따돌림은 대부분 여기에 기인한다. 특히 1870년대 이후 중등 의무 교육이 시행되고 쏟아져 들어오는 이민자의 자녀들까지 가세해 학생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공부에 관심 없는 대다수 평균 이하의 학생들에게 대학보다는 시민 의식 함양과 실용적 직업 교육에 집중해야 한다는 신념이 헤게모니를 쥐게 된다. 이 신념이 가장 극적으로 표현된 예가 1940-1950년대에 시행된 ‘Life Adjustment’ 운동으로, 외국어나 수학, 고전 같은 학구적 과목이 대거 폐지되고 운전이나 가사처럼 학생들의 흥미와 필요에 부응하는 실용적인 과목이 개설되었다. 이 운동은 너그럽고 민주적이며 진보적인 이상을 추구했지만, 매스미디어가 부추기는 소비문화에 순응하는 수동적 인간을 길러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기도 했다. 존 듀이의 교육 철학은 이런 새로운 교육 운동을 떠받친 지적 기둥 중 하나였으나, 현장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듀이의 의도와 달리 단순화되고 왜곡되었다.
출처: http://lectrice.co.kr/?p=436
2018년 7월 29일 일요일
의식의 기원 - 줄리언 제인스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오랫동안 인류는 의식(consciousness)을 갖지 않은 채 살아왔다. 의식이란 인류 역사의 특정 시점에 나타난 현상일 뿐이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오랫동안 심리학을 가르쳤던 줄리언 제인스 교수가 인간의 의식의 기원을 파헤치고 과학 연구에 내재한 종교적 특질을 분석한 책 '의식의 기원'(한길사)이 번역돼 나왔다.
그는 책에서 의식에 대한 기존의 견해, 즉 의식이 물질의 속성을 지녔다거나 경험, 학습, 추론, 판단의 다른 이름이라는 견해는 물론, 의식을 인과적 영향력이 없는 단순한 부수현상으로 보는 견해를 모두 부정한다.
대신 그는 인간의 옛 정신체계는 양원적(bicameral.兩院的)이었다는 주장과 함께 의식은 인류 역사의 한 특정 기점이었던 정신의 양원적 구조의 소멸시기와 연계돼 있다는 주장을 편다.
여기서 독특한 것이 바로 '양원성'이라는 저자 특유의 개념. "태초부터 인간은 언어를 관장하는 좌뇌와 신(神)과의 소통을 관장하는 우뇌를 통합적으로 사용해왔으나 어느 순간부터 우뇌의 기능이 퇴화됐다"는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양원 시대의 인류는 중요한 순간마다 들려오는 신의 소리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했다. 고대 그리스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전사들이 그렇게 했고 히브리 성서에 나오는 선지자들이 그렇게 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 우뇌의 기능이 급속히 상실되기 시작했다. 퇴화된 신과의 소통능력을 대체한 것이 바로 '의식'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살아있는 한 언제나 의식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역사적으로 장구한 세월에 옛 인류는 의식을 갖지 않은 채 삶을 성공적으로 영위했고 의식은 후천적이며 발명된 것이라는 주장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제인스는 의식없이 살던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문헌적으로 고증하기 위해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를 분석하고, 호메로스가 행동을 급박히 결정하기 위해 수많은 판단을 했을 전사들을 묘사할 때 '의식'에 해당하는 단어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문학적 문헌 뿐 아니라 저자는 '양원적 인류'가 살던 고대 문명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돌기둥에 새겨진 글ㆍ그림을 살피고 온갖 신상(神像)을 조사하며 허물어진 사원을 탐방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내린 결론이 양원 시대의 인간들 어떤 사적인 야심이나 탐욕, 갈등이나 포악성도 없었다는 것. 그는 인간들의 정치ㆍ윤리적 삶이 잔악해진 것은 "양원성이 파괴되고 신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결과"라고 지적한다.
그는 나아가 종교 유산이야말로 이전의 정신체계에서 물려받은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현대의 종교현상은 양원 정신 체계의 명백한 증거라는 것.
그런데 제인스가 종교에 각별한 관심을 둔 더 중요한 이유는 과학적 행위가 근본적으로 종교와 관련돼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즉 과학혁명의 배후에는 신성(神性)을 지속적으로 탐구하려는 동기가 있었다는 것. 제인스는 이를 '노스탤지어'라 표현했다.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나 마르크스의 '원시공산사회' 역시 같은 맥락이다.
양원적 구조의 소멸과 '의식'의 탄생이라는 그의 주장도 그렇지만, 결론에 이르는 지적 여정에서 심리학ㆍ문학ㆍ철학ㆍ인류학 등을 온갖 지적 유산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점이 흥미롭다. 이 책은 1978년 전미도서상을 수상했다. 줄리언 제인스의 저작이 국내에 소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원제 'The Origin of Consciousness in the Breakdown of the Bicameral Mind'
김득룡ㆍ박주용 옮김. 552쪽. 3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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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줄리언 제인스, 심리학 · 문학 · 인류학 · 철학 등을 넘나드는 통찰력 돋보여
일찍이 헤라클레스는 의식을 가리켜 “아무리 길을 걸어도 경계를 발견할 수 없는 광대한 공간과 같다”고 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셀 수 없이 많은 창고로 놀랍게 치장되어 있고 광활한 방들이 겹겹으로 들어차 있는 후미진 곳”이라 했다. 밀, 분트, 티치너는 “의식은 실험실에서 감각과 감정의 정확한 요소들로 분석될 수 있는 복합구조”라 했으며, 증기기관차가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칠 때 “잠재의식은 긴장을 유발하는 에너지의 발생기관인 보일러”라고 했다. 이처럼 의식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의식을 의식하게 된다.
저자 제인스(1920~97)는 하버드 대학을 거쳐 맥길 대학을 졸업했으며, 예일 대학에서 심리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66년부터 1990년까지 프린스턴 대학 심리학과에서 강의했다. 그의 저작들은 광범위한 영역을 다루는데, 초기에는 동물심리학에 초점을 두었으나 나중에는 인간의 의식문제에 집중하여 '의식의 기원'(The Origin of Consciousness in the Breakdown of the Bicameral Mind )을 집필하기에 이른다. 일생 동안 심혈을 기울인 이 책으로 1978년 그는 전미도서상(National Book Award)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이 책에서는 의식에 대한 기존의 여러 견해, 즉 의식이 물질의 속성이라거나 원형질의 속성이라거나, 혹은 경험 · 학습 · 추론 · 판단의 다른 이름이라는 견해는 물론, 의식을 인과적 영향력이 없는 단순한 부수현상으로 보는 견해가 모두 기각된다. 그 대신 인간의 옛 정신체계는 양원적(兩院的, Bicamaral)이었다는 주장과 함께, 의식은 인류 역사의 한 특정 기점이었던 정신의 양원적 구조의 소멸 시기와 연계되어 있다는 다소 파격적인 주장을 편다. 그는 심리학 · 문학 · 인류학 · 철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끌어낸 논거들을 유기적으로 연계함으로써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제시했다. 이 때문에 이 책은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근본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그 영향력은 프로이트에 비견되며 20세기가 산출한 가장 의미 있는 학문적 성과로 꼽힌다. 고대 문헌을 분석하고, 고고학적 성과물을 분석하며 이상심리학적 증거들을 제시함으로써 옛 인류의 양원적 정신 역량은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대목에 이르면, 학자들의 학문적 관심을 넘어 세인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옛 인류는 의식을 갖지 않았지만 성공적인 삶을 누렸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정신(마음)을 다루는 제1권은 “의식은 ~이 아니다”라는 도전적인 접근으로 시작한다. 살아 있는 한, 언제나 ‘의식’이 있는 것이라고 믿는 우리에게 그는 그것이 의식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장구한 세월 동안 역사 초기의 옛 인류는 의식을 갖지 않은 채 삶을 성공적으로 영위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정신적 기능에 의거해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의식과 지각, 반응성, 인지 등을 구별하는 저자는, 의식보다는 반응성이 우리의 행동을 유발하는 모든 자극들을 관장하는 정신기능이며, 이에 비해 의식은 훨씬 더 국소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우리가 반응하고 있는 것들을 단지 이따금씩만 의식할 뿐이라는 것이다. “당신을 보고 있는 나는 지금 당신을 의식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묻는 반론자에게 그는 “당신이 지금 의식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의 논증일 것이다”라고 답한다. 이로써 그는 “적어도 나에 대해서 말하는 한, 당신은 의식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때 당신의 정신기능은 ‘의식’이 아니라 ‘지각’일 것이다”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는 의식 없이 살던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문헌적으로 고증하기 위해 ??일리아스??를 분석한다. 행동을 급박하게 결정내리기 위해 수많은 판단을 해야 했을 일리아스 전사들을 묘사할 때 의식에 상당하는 단어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의식은 모두 언어는 아니지만 언어로 생성되고 언어로 접근된다
제인스에 따르면 의식은 언어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언어의 은유기능이다. 예를 들어 “그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우리는 그 경험이 독특한 것이어서 선뜻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때 “그것은 ~같은 거야”라고 답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에 새로운 어휘가 생성되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서로 잘 알고 있는 머리, 손, 가슴 등 자신들의 신체를 은유체로 사용하며 이러한 작업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런 작업은 신체감각으로 관찰될 수 없는 추상적 개념으로 확장된다.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려면 일단 인간의 마음속에서 ‘볼’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의 ‘눈’으로 이들을 ‘보는’ 것 자체가 은유일 수밖에 없다. 의식은 바로 이러한 언어발달 과정에서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증을 위해 그는 실제 나의 유추인 유사 ‘나’(analogue ‘I’), 그리고 그 유사 ‘나’가 수행하는 ‘이야기 엮기’(narratization) 등과 같은 중요한 개념을 소개한다.
양원시대의 인류는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제목이 ‘역사의 증언’인 제2권에서 제인스는 놀랍게도 제1권과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양원성에 역사적 · 고고학적 · 문화적 접근을 시도하는 박학을 과시한다. 여기서 관심 주제는 양원성과 신이다. 양원시대의 인류는 신의 소리를 들었다. 중요한 순간마다 들려오는 그 소리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했다. 고대 그리스 민족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전사들이 그렇게 했고, 히브리 민족의 성서에 나오는 선지자들이 그렇게 했다. 앞에서 문학적 문헌으로 고증하던 제인스는 이번에는 양원적 인류가 살던 고대 문명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돌기둥에 적힌 양각 · 음각의 글줄과 그림을 살피고 온갖 종류의 신상을 조사하며 허물어진 사원을 탐방한다. 신의 영향력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제인스의 주장은 신의 부재(신의 등돌림)의 원인이 인간 자신들의 죄악 때문이라고 믿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사뭇 다른 점인데, 그에 따르면 오히려 인간들의 정치적 · 윤리적 삶이 잔악해진 것은 양원성이 파괴되고 신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결과다. 그는 양원시대에는 어떤 사적인 야심이나 탐욕, 갈등이나 포악성도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양원적 인간은 사적으로 존재할 내적 ‘공간’도, 그런 공간에 있을 유사 ‘나’도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오늘날의 우리보다도 평화스러웠고 친절한 인간족이었다고 주장한다.
환청을 듣는 것은 고대 양원적 인간과 오늘날의 정신분열증 환자가 비슷하다
현대세계에서의 양원정신의 흔적을 논하는 제3권에서는 현대인에게서 관찰되는 정신분열증, 최면 등과 같은 정신현상을 다룬다. 이들에 대한 수많은 이론이 이 현상을 근원적으로 설명해내는 데 적절하지 못하다면서 제인스는 자신의 양원적 정신체계 이론의 설명력이 훨씬 낫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제인스는 우선 환청을 듣는 것을 고대 양원적 인간과 오늘날의 정신분열증 환자가 비슷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에게 양원적 정신체계가 원래의 모습이었으리라는 자신의 가설을 뒷받침하려 한다.
한편 제인스는 양원성과 종교적 신의 문제를 다룬 데 이어, 양원성과 정신병의 관련성을 논의한다. 그는 “정신병으로 심리적 변화를 일으키는, 신경계에 내재하는 태양숭배나 신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양자의 연관성을 부인한다. 양자 간에 때때로 환각이라는 공통 현상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그것은 교육과 종교적 역사에 대한 친숙함 때문이라고 본다.
과학적 행위는 근본적으로 종교와 관련이 있다
마지막으로 제인스는 현대의 종교현상을 양원정신 체계의 증거로 든다. 그는 종교 유산이야말로 이전의 정신체계에서 물려받은 것 가운데 가장 명백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인스가 종교에 각별한 관심을 둔 더 심각한 이유는 실은 이른바 과학적 행위가 근본적으로 종교와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과학혁명의 배후에는 신성을 지속적으로 탐구하려는 동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과학 탐구는 양원 정신이 와해된 직접적인 결과였다. 물리학 · 심리학과 생물학의 토대를 만든 사람들은 모두 17세기 말엽의 영국 프로테스탄트들로 이들은 경건했다. 그에 따르면 현대과학도 종교적인 형식이 있다. 예를 들어 그가 과학주의라 부르는 것 역시 이 시대에 과학과 종교와 분리되면서 남은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급격히 신앙적 신조로 굳은 과학적 신화다. 따라서 현대과학 역시 그것이 대신하려는 종교가 했던 것과 똑같은 특징이 있다.
“크게 보면 근대과학도 종교적 형식을 갖고 있다. 모든 것을 설명하는 합리적 우수성,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와 두드러져 비판받지 않는 지도자의 계승, 과학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경전 같은 일련의 틀, 특정한 사고방식과 해석, 그리고 완전한 헌신의 요구 등이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추종자들은 한때 종교가 제공했던 것을 그대로 받는다. 세계관, 중요성의 위계체계, 그가 무엇을 하고 생각할지를 알려줄 복점 치는 장소, 요컨대 인간에 대한 총체적 설명을 제공받는다.”
결국 과학 스스로가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주장할지라도 근원에서는 의사 종교의 발흥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제인스는 자신의 학문적 연구를 포함하여 모든 과학행위를 이렇게 일갈하며 방대한 글을 끝맺는다. “양원적 정신구조의 폐허 속에서 행동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점치던 일이 이제는 사실이라는 신화들 속에서 완전한 확실성(an innocense of certainty)을 추구하는 일이 되었을 뿐이다.”
지은이 소개
줄리언 제인스
매사추세츠 주 웨스트 뉴턴에서 태어났다. 하버드 대학을 거쳐 맥길 대학을 졸업했으며, 예일 대학에서 심리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6년부터 1990년까지 프린스턴 대학에서 심리학을 강의했다. 그의 저작들은 광범위한 영역을 다루는데, 초기에는 동물심리학에 초점을 두었으나 후에는 인간의 의식문제에 집중하여 [의식의 기원]을 집필하기에 이른다. 일생 동안 심혈을 기울인 책으로 19789년 전미도서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오랫동안 심리학을 가르쳤던 줄리언 제인스 교수가 인간의 의식의 기원을 파헤치고 과학 연구에 내재한 종교적 특질을 분석한 책 '의식의 기원'(한길사)이 번역돼 나왔다.
그는 책에서 의식에 대한 기존의 견해, 즉 의식이 물질의 속성을 지녔다거나 경험, 학습, 추론, 판단의 다른 이름이라는 견해는 물론, 의식을 인과적 영향력이 없는 단순한 부수현상으로 보는 견해를 모두 부정한다.
대신 그는 인간의 옛 정신체계는 양원적(bicameral.兩院的)이었다는 주장과 함께 의식은 인류 역사의 한 특정 기점이었던 정신의 양원적 구조의 소멸시기와 연계돼 있다는 주장을 편다.
여기서 독특한 것이 바로 '양원성'이라는 저자 특유의 개념. "태초부터 인간은 언어를 관장하는 좌뇌와 신(神)과의 소통을 관장하는 우뇌를 통합적으로 사용해왔으나 어느 순간부터 우뇌의 기능이 퇴화됐다"는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양원 시대의 인류는 중요한 순간마다 들려오는 신의 소리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했다. 고대 그리스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전사들이 그렇게 했고 히브리 성서에 나오는 선지자들이 그렇게 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 우뇌의 기능이 급속히 상실되기 시작했다. 퇴화된 신과의 소통능력을 대체한 것이 바로 '의식'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살아있는 한 언제나 의식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역사적으로 장구한 세월에 옛 인류는 의식을 갖지 않은 채 삶을 성공적으로 영위했고 의식은 후천적이며 발명된 것이라는 주장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제인스는 의식없이 살던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문헌적으로 고증하기 위해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를 분석하고, 호메로스가 행동을 급박히 결정하기 위해 수많은 판단을 했을 전사들을 묘사할 때 '의식'에 해당하는 단어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문학적 문헌 뿐 아니라 저자는 '양원적 인류'가 살던 고대 문명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돌기둥에 새겨진 글ㆍ그림을 살피고 온갖 신상(神像)을 조사하며 허물어진 사원을 탐방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내린 결론이 양원 시대의 인간들 어떤 사적인 야심이나 탐욕, 갈등이나 포악성도 없었다는 것. 그는 인간들의 정치ㆍ윤리적 삶이 잔악해진 것은 "양원성이 파괴되고 신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결과"라고 지적한다.
그는 나아가 종교 유산이야말로 이전의 정신체계에서 물려받은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현대의 종교현상은 양원 정신 체계의 명백한 증거라는 것.
그런데 제인스가 종교에 각별한 관심을 둔 더 중요한 이유는 과학적 행위가 근본적으로 종교와 관련돼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즉 과학혁명의 배후에는 신성(神性)을 지속적으로 탐구하려는 동기가 있었다는 것. 제인스는 이를 '노스탤지어'라 표현했다.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나 마르크스의 '원시공산사회' 역시 같은 맥락이다.
양원적 구조의 소멸과 '의식'의 탄생이라는 그의 주장도 그렇지만, 결론에 이르는 지적 여정에서 심리학ㆍ문학ㆍ철학ㆍ인류학 등을 온갖 지적 유산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점이 흥미롭다. 이 책은 1978년 전미도서상을 수상했다. 줄리언 제인스의 저작이 국내에 소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원제 'The Origin of Consciousness in the Breakdown of the Bicameral Mind'
김득룡ㆍ박주용 옮김. 552쪽. 3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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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줄리언 제인스, 심리학 · 문학 · 인류학 · 철학 등을 넘나드는 통찰력 돋보여
일찍이 헤라클레스는 의식을 가리켜 “아무리 길을 걸어도 경계를 발견할 수 없는 광대한 공간과 같다”고 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셀 수 없이 많은 창고로 놀랍게 치장되어 있고 광활한 방들이 겹겹으로 들어차 있는 후미진 곳”이라 했다. 밀, 분트, 티치너는 “의식은 실험실에서 감각과 감정의 정확한 요소들로 분석될 수 있는 복합구조”라 했으며, 증기기관차가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칠 때 “잠재의식은 긴장을 유발하는 에너지의 발생기관인 보일러”라고 했다. 이처럼 의식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의식을 의식하게 된다.
저자 제인스(1920~97)는 하버드 대학을 거쳐 맥길 대학을 졸업했으며, 예일 대학에서 심리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66년부터 1990년까지 프린스턴 대학 심리학과에서 강의했다. 그의 저작들은 광범위한 영역을 다루는데, 초기에는 동물심리학에 초점을 두었으나 나중에는 인간의 의식문제에 집중하여 '의식의 기원'(The Origin of Consciousness in the Breakdown of the Bicameral Mind )을 집필하기에 이른다. 일생 동안 심혈을 기울인 이 책으로 1978년 그는 전미도서상(National Book Award)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이 책에서는 의식에 대한 기존의 여러 견해, 즉 의식이 물질의 속성이라거나 원형질의 속성이라거나, 혹은 경험 · 학습 · 추론 · 판단의 다른 이름이라는 견해는 물론, 의식을 인과적 영향력이 없는 단순한 부수현상으로 보는 견해가 모두 기각된다. 그 대신 인간의 옛 정신체계는 양원적(兩院的, Bicamaral)이었다는 주장과 함께, 의식은 인류 역사의 한 특정 기점이었던 정신의 양원적 구조의 소멸 시기와 연계되어 있다는 다소 파격적인 주장을 편다. 그는 심리학 · 문학 · 인류학 · 철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끌어낸 논거들을 유기적으로 연계함으로써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제시했다. 이 때문에 이 책은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근본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그 영향력은 프로이트에 비견되며 20세기가 산출한 가장 의미 있는 학문적 성과로 꼽힌다. 고대 문헌을 분석하고, 고고학적 성과물을 분석하며 이상심리학적 증거들을 제시함으로써 옛 인류의 양원적 정신 역량은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대목에 이르면, 학자들의 학문적 관심을 넘어 세인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옛 인류는 의식을 갖지 않았지만 성공적인 삶을 누렸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정신(마음)을 다루는 제1권은 “의식은 ~이 아니다”라는 도전적인 접근으로 시작한다. 살아 있는 한, 언제나 ‘의식’이 있는 것이라고 믿는 우리에게 그는 그것이 의식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장구한 세월 동안 역사 초기의 옛 인류는 의식을 갖지 않은 채 삶을 성공적으로 영위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정신적 기능에 의거해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의식과 지각, 반응성, 인지 등을 구별하는 저자는, 의식보다는 반응성이 우리의 행동을 유발하는 모든 자극들을 관장하는 정신기능이며, 이에 비해 의식은 훨씬 더 국소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우리가 반응하고 있는 것들을 단지 이따금씩만 의식할 뿐이라는 것이다. “당신을 보고 있는 나는 지금 당신을 의식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묻는 반론자에게 그는 “당신이 지금 의식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의 논증일 것이다”라고 답한다. 이로써 그는 “적어도 나에 대해서 말하는 한, 당신은 의식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때 당신의 정신기능은 ‘의식’이 아니라 ‘지각’일 것이다”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는 의식 없이 살던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문헌적으로 고증하기 위해 ??일리아스??를 분석한다. 행동을 급박하게 결정내리기 위해 수많은 판단을 해야 했을 일리아스 전사들을 묘사할 때 의식에 상당하는 단어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의식은 모두 언어는 아니지만 언어로 생성되고 언어로 접근된다
제인스에 따르면 의식은 언어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언어의 은유기능이다. 예를 들어 “그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우리는 그 경험이 독특한 것이어서 선뜻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때 “그것은 ~같은 거야”라고 답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에 새로운 어휘가 생성되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서로 잘 알고 있는 머리, 손, 가슴 등 자신들의 신체를 은유체로 사용하며 이러한 작업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런 작업은 신체감각으로 관찰될 수 없는 추상적 개념으로 확장된다.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려면 일단 인간의 마음속에서 ‘볼’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의 ‘눈’으로 이들을 ‘보는’ 것 자체가 은유일 수밖에 없다. 의식은 바로 이러한 언어발달 과정에서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증을 위해 그는 실제 나의 유추인 유사 ‘나’(analogue ‘I’), 그리고 그 유사 ‘나’가 수행하는 ‘이야기 엮기’(narratization) 등과 같은 중요한 개념을 소개한다.
양원시대의 인류는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제목이 ‘역사의 증언’인 제2권에서 제인스는 놀랍게도 제1권과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양원성에 역사적 · 고고학적 · 문화적 접근을 시도하는 박학을 과시한다. 여기서 관심 주제는 양원성과 신이다. 양원시대의 인류는 신의 소리를 들었다. 중요한 순간마다 들려오는 그 소리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했다. 고대 그리스 민족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전사들이 그렇게 했고, 히브리 민족의 성서에 나오는 선지자들이 그렇게 했다. 앞에서 문학적 문헌으로 고증하던 제인스는 이번에는 양원적 인류가 살던 고대 문명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돌기둥에 적힌 양각 · 음각의 글줄과 그림을 살피고 온갖 종류의 신상을 조사하며 허물어진 사원을 탐방한다. 신의 영향력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제인스의 주장은 신의 부재(신의 등돌림)의 원인이 인간 자신들의 죄악 때문이라고 믿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사뭇 다른 점인데, 그에 따르면 오히려 인간들의 정치적 · 윤리적 삶이 잔악해진 것은 양원성이 파괴되고 신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결과다. 그는 양원시대에는 어떤 사적인 야심이나 탐욕, 갈등이나 포악성도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양원적 인간은 사적으로 존재할 내적 ‘공간’도, 그런 공간에 있을 유사 ‘나’도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오늘날의 우리보다도 평화스러웠고 친절한 인간족이었다고 주장한다.
환청을 듣는 것은 고대 양원적 인간과 오늘날의 정신분열증 환자가 비슷하다
현대세계에서의 양원정신의 흔적을 논하는 제3권에서는 현대인에게서 관찰되는 정신분열증, 최면 등과 같은 정신현상을 다룬다. 이들에 대한 수많은 이론이 이 현상을 근원적으로 설명해내는 데 적절하지 못하다면서 제인스는 자신의 양원적 정신체계 이론의 설명력이 훨씬 낫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제인스는 우선 환청을 듣는 것을 고대 양원적 인간과 오늘날의 정신분열증 환자가 비슷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에게 양원적 정신체계가 원래의 모습이었으리라는 자신의 가설을 뒷받침하려 한다.
한편 제인스는 양원성과 종교적 신의 문제를 다룬 데 이어, 양원성과 정신병의 관련성을 논의한다. 그는 “정신병으로 심리적 변화를 일으키는, 신경계에 내재하는 태양숭배나 신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양자의 연관성을 부인한다. 양자 간에 때때로 환각이라는 공통 현상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그것은 교육과 종교적 역사에 대한 친숙함 때문이라고 본다.
과학적 행위는 근본적으로 종교와 관련이 있다
마지막으로 제인스는 현대의 종교현상을 양원정신 체계의 증거로 든다. 그는 종교 유산이야말로 이전의 정신체계에서 물려받은 것 가운데 가장 명백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인스가 종교에 각별한 관심을 둔 더 심각한 이유는 실은 이른바 과학적 행위가 근본적으로 종교와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과학혁명의 배후에는 신성을 지속적으로 탐구하려는 동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과학 탐구는 양원 정신이 와해된 직접적인 결과였다. 물리학 · 심리학과 생물학의 토대를 만든 사람들은 모두 17세기 말엽의 영국 프로테스탄트들로 이들은 경건했다. 그에 따르면 현대과학도 종교적인 형식이 있다. 예를 들어 그가 과학주의라 부르는 것 역시 이 시대에 과학과 종교와 분리되면서 남은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급격히 신앙적 신조로 굳은 과학적 신화다. 따라서 현대과학 역시 그것이 대신하려는 종교가 했던 것과 똑같은 특징이 있다.
“크게 보면 근대과학도 종교적 형식을 갖고 있다. 모든 것을 설명하는 합리적 우수성,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와 두드러져 비판받지 않는 지도자의 계승, 과학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경전 같은 일련의 틀, 특정한 사고방식과 해석, 그리고 완전한 헌신의 요구 등이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추종자들은 한때 종교가 제공했던 것을 그대로 받는다. 세계관, 중요성의 위계체계, 그가 무엇을 하고 생각할지를 알려줄 복점 치는 장소, 요컨대 인간에 대한 총체적 설명을 제공받는다.”
결국 과학 스스로가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주장할지라도 근원에서는 의사 종교의 발흥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제인스는 자신의 학문적 연구를 포함하여 모든 과학행위를 이렇게 일갈하며 방대한 글을 끝맺는다. “양원적 정신구조의 폐허 속에서 행동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점치던 일이 이제는 사실이라는 신화들 속에서 완전한 확실성(an innocense of certainty)을 추구하는 일이 되었을 뿐이다.”
지은이 소개
줄리언 제인스
매사추세츠 주 웨스트 뉴턴에서 태어났다. 하버드 대학을 거쳐 맥길 대학을 졸업했으며, 예일 대학에서 심리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6년부터 1990년까지 프린스턴 대학에서 심리학을 강의했다. 그의 저작들은 광범위한 영역을 다루는데, 초기에는 동물심리학에 초점을 두었으나 후에는 인간의 의식문제에 집중하여 [의식의 기원]을 집필하기에 이른다. 일생 동안 심혈을 기울인 책으로 19789년 전미도서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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