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6일 일요일
2019년 1월 3일 목요일
초격차(권오현)
인간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위해서는 도덕적 가치판단이나 정치적 편향, 이해관계를 버릴 필요가 있다. 쉽지 않은 일이고 그러다 보니 인간의 본성에 대해 왜곡된 접근법과 이론이 넘쳐난다. 그런 면에서 인간행동을 밑바닥부터 이해하는 가장 현실적인 프레임은 대기업 인사과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삼성은 그 분야의 가장 최첨단을 달리는 회사다. 이 책이 전부는 아닐 지라도 인간의 조직행동론에 대한 상당한 실무 통찰을 담았을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주요 내용
ㅇ새로운 시도나 도전을 할 때, 기존의 사람은 바뀌지 않고 방식도 바꾸지 않는다. 마음 독하게 먹고 모두 갈아치우지 않는다면 도전과 개혁은 불가능하다. 기존의 인력을 교육해서 혁신의 방향으로 내부 분위기를 전환시킨 사례는 거의 없다.
ㅇ사업을 할 때는 업의 본질을 이해하고 접근해야 한다. 내수 서비스업은 상대방보다 조금만 나으면 된다는 상대적 가치, 제조업은 세계 최고를 노리는 절대적 가치 개념으로 접근한다
ㅇ실력은 있지만 봉건 영주와 같이 왕국(사일로)을 건설하려는 직원은 부지불식간에 다른 영주와 교체하여 돌린다. 그들의 왕국을 파괴하라. 그러면 영주는 겸손해지고 왕국간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해진다.
ㅇ새로운 사업에 도전할 때는 능력은 조금 부족해도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사람을 쓴다
ㅇ여유있게 건전한 가정에서 정상적으로 태어난 사람이 리더로 맞다. 그렇지 않으면 사리사욕을 포기할 줄 모르기에 리더에 부적합하다. 출생시 부모는 선택 불가능하므로 리더는 태어난다고 볼 수도 있다. 탁월한 리더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의 역사를 보고 얼마나 이기적인 선택을 자주 했는지에 주목하라. 그러한 선택을 하고도 책임지거나 비난받지 않는 환경에서 자라왔다면 그는 최악의 리더가 된다.
ㅇ최고의 리더는 나중에 리더 자리를 떠나도 그 조직이 스스로도 잘 굴러갈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게 한다. 이는 결국 인재 양성의 문제다.
ㅇ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 반드시 피해야 할 인재상부터 제거한다. 무례한 자, 부정적인 자, 뒷담화 하는 자
ㅇ긍정적 인재상 중 하나로 중요시하는 것은 호기심 많은 자
아래는 주요 내용
ㅇ새로운 시도나 도전을 할 때, 기존의 사람은 바뀌지 않고 방식도 바꾸지 않는다. 마음 독하게 먹고 모두 갈아치우지 않는다면 도전과 개혁은 불가능하다. 기존의 인력을 교육해서 혁신의 방향으로 내부 분위기를 전환시킨 사례는 거의 없다.
ㅇ사업을 할 때는 업의 본질을 이해하고 접근해야 한다. 내수 서비스업은 상대방보다 조금만 나으면 된다는 상대적 가치, 제조업은 세계 최고를 노리는 절대적 가치 개념으로 접근한다
ㅇ실력은 있지만 봉건 영주와 같이 왕국(사일로)을 건설하려는 직원은 부지불식간에 다른 영주와 교체하여 돌린다. 그들의 왕국을 파괴하라. 그러면 영주는 겸손해지고 왕국간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해진다.
ㅇ새로운 사업에 도전할 때는 능력은 조금 부족해도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사람을 쓴다
ㅇ여유있게 건전한 가정에서 정상적으로 태어난 사람이 리더로 맞다. 그렇지 않으면 사리사욕을 포기할 줄 모르기에 리더에 부적합하다. 출생시 부모는 선택 불가능하므로 리더는 태어난다고 볼 수도 있다. 탁월한 리더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의 역사를 보고 얼마나 이기적인 선택을 자주 했는지에 주목하라. 그러한 선택을 하고도 책임지거나 비난받지 않는 환경에서 자라왔다면 그는 최악의 리더가 된다.
ㅇ최고의 리더는 나중에 리더 자리를 떠나도 그 조직이 스스로도 잘 굴러갈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게 한다. 이는 결국 인재 양성의 문제다.
ㅇ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 반드시 피해야 할 인재상부터 제거한다. 무례한 자, 부정적인 자, 뒷담화 하는 자
ㅇ긍정적 인재상 중 하나로 중요시하는 것은 호기심 많은 자
2018년 12월 23일 일요일
(상식과 달리)한국의 교육 불평등은 악화되지 않았다
출처 http://sovidence.tistory.com/m/987
논문 위치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7565420
최성수 이수빈 공동 연구
주요 내용
ㅇ 더이상 개천용은 없고 이제 금수저만 더더욱 고등 교육을 받는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를 증명할 만한 연구는 없었다.
ㅇ성균관대 최성수, 이수빈 두 사회학자가 서베이 자료 8개를 통합해서 1940년대 이전 출생자부터 1990년대 출생자까지 부모의 학력 수준에 따른 자녀의 교육 성취도를 연구
ㅇ부모의 교육 수준을 상위 20%, 하위 20%로도 나누어서 그에 따른 자녀의 교육 성취를 연구. (단순히 대졸로 하면 과거의 대졸과 현재의 대졸은 수준이 다르므로 직접 비교가 안된다)
ㅇ자녀의 교육 수준도 교육연수, 전문대 이상, 4년제 대학 이상, 명문대 졸업 등으로 나누어서 다층적으로 어떻게 역사적 변화를 거쳤는지 분석
논문의 결론: 한국에서 교육 기회 불평등은 커지지 않았다
아래 그래프는 부모가 대졸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자녀의 교육연수가 얼마나 다른지 자녀의 출생연도에 따른 변화를 나타낸 것. 보다시피 현재 70대인 전쟁 세대는 부모의 학력에 따른 자녀 학력 격차가 4년에 이르렀는데, 86세대인 60년대생에 오면 3년 이하로 줄어들고, 90년대 출생자에 이르면 1년 이하로 줄어듦.
논문 위치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7565420
최성수 이수빈 공동 연구
주요 내용
ㅇ 더이상 개천용은 없고 이제 금수저만 더더욱 고등 교육을 받는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를 증명할 만한 연구는 없었다.
ㅇ성균관대 최성수, 이수빈 두 사회학자가 서베이 자료 8개를 통합해서 1940년대 이전 출생자부터 1990년대 출생자까지 부모의 학력 수준에 따른 자녀의 교육 성취도를 연구
ㅇ부모의 교육 수준을 상위 20%, 하위 20%로도 나누어서 그에 따른 자녀의 교육 성취를 연구. (단순히 대졸로 하면 과거의 대졸과 현재의 대졸은 수준이 다르므로 직접 비교가 안된다)
ㅇ자녀의 교육 수준도 교육연수, 전문대 이상, 4년제 대학 이상, 명문대 졸업 등으로 나누어서 다층적으로 어떻게 역사적 변화를 거쳤는지 분석
논문의 결론: 한국에서 교육 기회 불평등은 커지지 않았다
아래 그래프는 부모가 대졸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자녀의 교육연수가 얼마나 다른지 자녀의 출생연도에 따른 변화를 나타낸 것. 보다시피 현재 70대인 전쟁 세대는 부모의 학력에 따른 자녀 학력 격차가 4년에 이르렀는데, 86세대인 60년대생에 오면 3년 이하로 줄어들고, 90년대 출생자에 이르면 1년 이하로 줄어듦.
아래 그래프는 학력 수준 상위 20%의 부모와 하위 20%의 부모 사이에 자녀가 명문대를 졸업할 확률의 격차를 측정한 것. 상층 부모를 두면 명문대 졸업 확률이 높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 차이가 늘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음. 위에 보여준 교육 연수처럼 부모의 배경에 따른 교육 격차가 지속적으로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1950년대 출생자 이후 현재까지 사실상 거의 변화가 없음.
명문대 졸업자 중에서 '개천용'이 줄어들었다고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개천'이 줄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높음. 결과적으로 기회의 평등은 높아졌지만 실제 고용시장이나 체감적으로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다음의 이유 때문일 수 있다
1. 기회의 평등은 매우 높아졌지만 결과의 불평등은 여전하다
2. 기회의 평등을 넘어 결과의 평등까지 바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018년 12월 22일 토요일
미네르바의 부엉이와 갈리아의 수탉
미네르바(Minerva)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으로 그리스 신화의 아테나(Athena)에 상응한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로마신화에서 미네르바와 항상 함께 다니는 신조(神鳥)로서 지혜의 상징이다. 원래 미네르바의 신조는 까마귀였다. 오비디우스(Ovidius)의 <변신이야기>에 따르면 까마귀는 미네르바의 비밀을 누설한 죄를 짓고 신조의 자리를 부엉이에게 내주었다 한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헤겔(Friedrich Hegel)은 그의 저서 <법철학> 서문에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라는 경구를 남겼다. 철학은 앞날을 미리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뤄진 역사적 현상이 지나간 이후에야 그 뜻이 분명해진다는 의미이다. 헤겔의 경구는 인식이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 인간의 욕망은 변화의 속도 만큼이나 빨리 움직이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인식하고 학문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가능하다. 이와 같이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는 욕망과 인식의 속도 차이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가끔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서 ‘그때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왜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했을까? 그때 왜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라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바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날이 저물어야 날개를 편다’는 의미가 아닌가 한다.
역시 인간의 지혜는 변화의 속도와 욕망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가 보다. 그런데 그때 알지 못했던 것이 후회로 남기는 했지만 그때 알지 못해 낭패를 보았던 경험 때문에 지금 알게 됐으니 그것만으로도 소득이 아닌가?
헤겔의 말은 오늘날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다. 변화의 속도가 워낙 빨라 인간의 인식과 지식과 학문이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에 따라 지식과 학문이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뒷북만 치고 있다. 변화를 따라가기에도 숨이 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탉이 울면 새벽이 오고 얼마 안 있어 동이 트면서 태양이 떠오른다. 시계가 없었던 시절 수탉은 새벽의 전령사였다. 어둠의 공포에서 벗어나 밝은 낮으로 가는 길목에서 수탉은 항상 밝은 아침이 멀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신비한 존재였다. 동양의 옛날이야기에도 귀신이 쫓아오다가 닭 울음소리를 듣고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스토리가 제법 많이 있다. 새벽에 울음을 우는 수탉을 신성시하는 경우도 생겨난 것 같다.
서양인들은 갈리아지역(지금의 프랑스)이 닭의 원산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닭을 ‘갈리아의 새’라고도 불렀다. 갈리아인들은 고대부터 수탉을 새벽의 신으로 신성시했다. 수탉은 갈리아의 신으로 숭상되기도 하고 갈리아 군대의 기장(旗章)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프랑스를 상징하는 동물은 수탉이다.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 개념에 맞서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제기한 개념이 ‘갈리아의 수탉(Gallia Rooster)’이다.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수탉이 새벽에 울어 세상을 깨우듯이 철학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이 뒷북이나 치고 앉아 있다면 그건 죽은 학문이라는 것이다. 헤겔이 말한 것처럼 철학이 현실이 다 지나간 다음에야 겨우 이론을 정립하는 늙은이 학문이 아니라 현실이 오기 전에 그것들을 인식하고 설명하는 선도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하 테제>의 11번째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말한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 논리에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철학자의 사명은 시간이 지난 다음 뒤늦게 세상을 해석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 앞서 이론을 정립해 현실을 바꾸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성연 애터미 경제연구소장 nexteconomy@nexteconomy.co.kr
http://m.nexteconom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38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헤겔(Friedrich Hegel)은 그의 저서 <법철학> 서문에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라는 경구를 남겼다. 철학은 앞날을 미리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뤄진 역사적 현상이 지나간 이후에야 그 뜻이 분명해진다는 의미이다. 헤겔의 경구는 인식이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 인간의 욕망은 변화의 속도 만큼이나 빨리 움직이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인식하고 학문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가능하다. 이와 같이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는 욕망과 인식의 속도 차이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가끔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서 ‘그때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왜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했을까? 그때 왜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라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바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날이 저물어야 날개를 편다’는 의미가 아닌가 한다.
역시 인간의 지혜는 변화의 속도와 욕망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가 보다. 그런데 그때 알지 못했던 것이 후회로 남기는 했지만 그때 알지 못해 낭패를 보았던 경험 때문에 지금 알게 됐으니 그것만으로도 소득이 아닌가?
헤겔의 말은 오늘날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다. 변화의 속도가 워낙 빨라 인간의 인식과 지식과 학문이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에 따라 지식과 학문이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뒷북만 치고 있다. 변화를 따라가기에도 숨이 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탉이 울면 새벽이 오고 얼마 안 있어 동이 트면서 태양이 떠오른다. 시계가 없었던 시절 수탉은 새벽의 전령사였다. 어둠의 공포에서 벗어나 밝은 낮으로 가는 길목에서 수탉은 항상 밝은 아침이 멀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신비한 존재였다. 동양의 옛날이야기에도 귀신이 쫓아오다가 닭 울음소리를 듣고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스토리가 제법 많이 있다. 새벽에 울음을 우는 수탉을 신성시하는 경우도 생겨난 것 같다.
서양인들은 갈리아지역(지금의 프랑스)이 닭의 원산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닭을 ‘갈리아의 새’라고도 불렀다. 갈리아인들은 고대부터 수탉을 새벽의 신으로 신성시했다. 수탉은 갈리아의 신으로 숭상되기도 하고 갈리아 군대의 기장(旗章)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프랑스를 상징하는 동물은 수탉이다.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 개념에 맞서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제기한 개념이 ‘갈리아의 수탉(Gallia Rooster)’이다.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수탉이 새벽에 울어 세상을 깨우듯이 철학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이 뒷북이나 치고 앉아 있다면 그건 죽은 학문이라는 것이다. 헤겔이 말한 것처럼 철학이 현실이 다 지나간 다음에야 겨우 이론을 정립하는 늙은이 학문이 아니라 현실이 오기 전에 그것들을 인식하고 설명하는 선도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하 테제>의 11번째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말한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 논리에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철학자의 사명은 시간이 지난 다음 뒤늦게 세상을 해석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 앞서 이론을 정립해 현실을 바꾸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성연 애터미 경제연구소장 nexteconomy@nexteconomy.co.kr
http://m.nexteconom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38
2018년 11월 18일 일요일
2018년 10월 21일 일요일
리처드 호프스태터-미국의 반지성주의
‘반지성주의’란 지식인과 지적 활동을 백안시·적대시하는 미국의 사회적 경향을 말한다. 미국에는 지식인이 허세에 차 있고 대중을 기만하며 남성적이지 못한데다 속물적이고, 나아가 비도덕적이고 위험하다는 고정관념이 존재한다. 이 고정관념에 따르면 평범한 사람이 살면서 몸으로 체득한 상식과 윤리야말로 전문가나 식자들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 즉 분석적이고 보편적인 ‘지성(intellect)’을 배격하고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슬기(intelligence)’를 중시하는 것이 미국의 풍토이다. 이를 가장 잘 구현한 인물이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이다.
1820년대 이후부터 서부 개척, 산업 발전, 평등주의 부상 등의 사회 경제적 변화로 인해 미국 건국 초기 성직자와 법률가 중심의 지식인 기반 전통 질서가 해체되었다. 맨손으로 자수성가한 기업가들이 시대를 호령하고 비즈니스 논리가 거침없이 통용된 19세기의 도금 시대(Gilded Age)는 ‘나약한’ 지식인과 ‘쓸데 없는’ 학교 교육에 대한 경멸이 최고조에 달한 때였다. 그러나 사회 복잡성이 증가하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전문가 집단이 정부 정책에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중들의 지식인에 대한 비웃음은 두려움과 분노로 전환된다. 또 이데올로그로서 지식인의 비판적, 진보적 특성 때문에 우익들은 전통적으로 지식인을 적대시했다.
하지만 동시에 20세기 이후 미국 반지성주의의 깊숙한 곳에는 모더니티 자체에 대한 반동이 숨어 있다. 1차대전 이후 미국에 몰아 닥친 변화에 대한 거부다. 즉, 세계시민주의와 다윈 진화론의 유입, 미국 고립주의의 종말, 대공황으로 전통 자본주의 붕괴와 중앙 집중화된 복지 국가로의 전환, 경찰국가로서, 그리고 냉전으로 인한 전쟁 부담 등이다. 이를 거부하고, 대륙으로 떨어져 고립된 채 촌락 사회가 온존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뒷받침하며 산업 자본주의가 제재 없이 활개 쳤던 19세기의 미국으로 회귀하려는 심리의 일환이 반지성주의로 나타났다.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은 반지성주의의 가장 강한 동력이었다. 초창기의 청교도 성직자들은 지식인 계층이었지만, 18세기 중반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면서 청교도 시대가 끝나고 복음주의 시대가 열린다. 이들은 세력확장을 위해 감성에 호소하면서 성령 대 부흥회와 같은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도입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요소는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고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파악하는 미국 우익 세계관의 기저를 이루게 된다. 복음주의와 쌍벽을 이루는 또 하나의 정신적 전통은, 학습된 인공적 이성보다도 신이 주신 직관적 “지혜”를 선호하는 원시주의(primitivism)다. 이는 애초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련되었지만 타락한’ 유럽 문명과 스스로를 구분하면서 세워졌다는 데서도 기인한다.
반지성주의가 미국인 의식의 전면으로 떠오른 것은 미국이 비즈니스 패권이 지배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개척지에서 맨손으로 사업을 일구는 과정에서 거칠고 공격적인 남성적 마인드와 과감한 의사결정, 기회를 놓치지 않는 순발력이 미덕이 되고, 지적이고 문화적인 것은 ‘유약하고 여성적’이라고 배척하는 풍토가 심화된 것이다. 이들 중 다수는 공식 교육 없이 맨손으로 자수성가하여 성공 신화를 양산한 장본인들이었는데, 이들의 이상을 잘 반영한 문헌이 19세기부터 출현한, 강한 종교색을 띤 자기계발(self-help) 서적들이다.
반지성주의적 신념이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겨진 분야가 바로 미국의 교육이다. 미국 학교 교육의 실패, 즉 교사의 저임금과 낮은 지위, 노후하고 게토화된 학교, 축구팀 주장이나 치어리더에 대한 과도한 숭배, 학업 성취도의 전반적 저하, 성적이 뛰어난 학생의 방치 내지는 따돌림은 대부분 여기에 기인한다. 특히 1870년대 이후 중등 의무 교육이 시행되고 쏟아져 들어오는 이민자의 자녀들까지 가세해 학생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공부에 관심 없는 대다수 평균 이하의 학생들에게 대학보다는 시민 의식 함양과 실용적 직업 교육에 집중해야 한다는 신념이 헤게모니를 쥐게 된다. 이 신념이 가장 극적으로 표현된 예가 1940-1950년대에 시행된 ‘Life Adjustment’ 운동으로, 외국어나 수학, 고전 같은 학구적 과목이 대거 폐지되고 운전이나 가사처럼 학생들의 흥미와 필요에 부응하는 실용적인 과목이 개설되었다. 이 운동은 너그럽고 민주적이며 진보적인 이상을 추구했지만, 매스미디어가 부추기는 소비문화에 순응하는 수동적 인간을 길러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기도 했다. 존 듀이의 교육 철학은 이런 새로운 교육 운동을 떠받친 지적 기둥 중 하나였으나, 현장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듀이의 의도와 달리 단순화되고 왜곡되었다.
출처: http://lectrice.co.kr/?p=436
1820년대 이후부터 서부 개척, 산업 발전, 평등주의 부상 등의 사회 경제적 변화로 인해 미국 건국 초기 성직자와 법률가 중심의 지식인 기반 전통 질서가 해체되었다. 맨손으로 자수성가한 기업가들이 시대를 호령하고 비즈니스 논리가 거침없이 통용된 19세기의 도금 시대(Gilded Age)는 ‘나약한’ 지식인과 ‘쓸데 없는’ 학교 교육에 대한 경멸이 최고조에 달한 때였다. 그러나 사회 복잡성이 증가하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전문가 집단이 정부 정책에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중들의 지식인에 대한 비웃음은 두려움과 분노로 전환된다. 또 이데올로그로서 지식인의 비판적, 진보적 특성 때문에 우익들은 전통적으로 지식인을 적대시했다.
하지만 동시에 20세기 이후 미국 반지성주의의 깊숙한 곳에는 모더니티 자체에 대한 반동이 숨어 있다. 1차대전 이후 미국에 몰아 닥친 변화에 대한 거부다. 즉, 세계시민주의와 다윈 진화론의 유입, 미국 고립주의의 종말, 대공황으로 전통 자본주의 붕괴와 중앙 집중화된 복지 국가로의 전환, 경찰국가로서, 그리고 냉전으로 인한 전쟁 부담 등이다. 이를 거부하고, 대륙으로 떨어져 고립된 채 촌락 사회가 온존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뒷받침하며 산업 자본주의가 제재 없이 활개 쳤던 19세기의 미국으로 회귀하려는 심리의 일환이 반지성주의로 나타났다.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은 반지성주의의 가장 강한 동력이었다. 초창기의 청교도 성직자들은 지식인 계층이었지만, 18세기 중반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면서 청교도 시대가 끝나고 복음주의 시대가 열린다. 이들은 세력확장을 위해 감성에 호소하면서 성령 대 부흥회와 같은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도입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요소는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고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파악하는 미국 우익 세계관의 기저를 이루게 된다. 복음주의와 쌍벽을 이루는 또 하나의 정신적 전통은, 학습된 인공적 이성보다도 신이 주신 직관적 “지혜”를 선호하는 원시주의(primitivism)다. 이는 애초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련되었지만 타락한’ 유럽 문명과 스스로를 구분하면서 세워졌다는 데서도 기인한다.
반지성주의가 미국인 의식의 전면으로 떠오른 것은 미국이 비즈니스 패권이 지배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개척지에서 맨손으로 사업을 일구는 과정에서 거칠고 공격적인 남성적 마인드와 과감한 의사결정, 기회를 놓치지 않는 순발력이 미덕이 되고, 지적이고 문화적인 것은 ‘유약하고 여성적’이라고 배척하는 풍토가 심화된 것이다. 이들 중 다수는 공식 교육 없이 맨손으로 자수성가하여 성공 신화를 양산한 장본인들이었는데, 이들의 이상을 잘 반영한 문헌이 19세기부터 출현한, 강한 종교색을 띤 자기계발(self-help) 서적들이다.
반지성주의적 신념이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겨진 분야가 바로 미국의 교육이다. 미국 학교 교육의 실패, 즉 교사의 저임금과 낮은 지위, 노후하고 게토화된 학교, 축구팀 주장이나 치어리더에 대한 과도한 숭배, 학업 성취도의 전반적 저하, 성적이 뛰어난 학생의 방치 내지는 따돌림은 대부분 여기에 기인한다. 특히 1870년대 이후 중등 의무 교육이 시행되고 쏟아져 들어오는 이민자의 자녀들까지 가세해 학생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공부에 관심 없는 대다수 평균 이하의 학생들에게 대학보다는 시민 의식 함양과 실용적 직업 교육에 집중해야 한다는 신념이 헤게모니를 쥐게 된다. 이 신념이 가장 극적으로 표현된 예가 1940-1950년대에 시행된 ‘Life Adjustment’ 운동으로, 외국어나 수학, 고전 같은 학구적 과목이 대거 폐지되고 운전이나 가사처럼 학생들의 흥미와 필요에 부응하는 실용적인 과목이 개설되었다. 이 운동은 너그럽고 민주적이며 진보적인 이상을 추구했지만, 매스미디어가 부추기는 소비문화에 순응하는 수동적 인간을 길러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기도 했다. 존 듀이의 교육 철학은 이런 새로운 교육 운동을 떠받친 지적 기둥 중 하나였으나, 현장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듀이의 의도와 달리 단순화되고 왜곡되었다.
출처: http://lectrice.co.kr/?p=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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