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3일 일요일

(상식과 달리)한국의 교육 불평등은 악화되지 않았다

출처    http://sovidence.tistory.com/m/987
논문 위치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7565420
최성수 이수빈 공동 연구


주요 내용

ㅇ 더이상 개천용은 없고 이제 금수저만 더더욱 고등 교육을 받는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를 증명할 만한 연구는 없었다.

ㅇ성균관대 최성수, 이수빈 두 사회학자가 서베이 자료 8개를 통합해서 1940년대 이전 출생자부터 1990년대 출생자까지 부모의 학력 수준에 따른 자녀의 교육 성취도를 연구

ㅇ부모의 교육 수준을 상위 20%, 하위 20%로도 나누어서 그에 따른 자녀의 교육 성취를 연구. (단순히 대졸로 하면 과거의 대졸과 현재의 대졸은 수준이 다르므로 직접 비교가 안된다)

ㅇ자녀의 교육 수준도 교육연수, 전문대 이상, 4년제 대학 이상, 명문대 졸업 등으로 나누어서 다층적으로 어떻게 역사적 변화를 거쳤는지 분석

논문의 결론: 한국에서 교육 기회 불평등은 커지지 않았다


아래 그래프는 부모가 대졸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자녀의 교육연수가 얼마나 다른지 자녀의 출생연도에 따른 변화를 나타낸 것. 보다시피 현재 70대인 전쟁 세대는 부모의 학력에 따른 자녀 학력 격차가 4년에 이르렀는데, 86세대인 60년대생에 오면 3년 이하로 줄어들고, 90년대 출생자에 이르면 1년 이하로 줄어듦.




아래 그래프는 학력 수준 상위 20%의 부모와 하위 20%의 부모 사이에 자녀가 명문대를 졸업할 확률의 격차를 측정한 것. 상층 부모를 두면 명문대 졸업 확률이 높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 차이가 늘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음. 위에 보여준 교육 연수처럼 부모의 배경에 따른 교육 격차가 지속적으로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1950년대 출생자 이후 현재까지 사실상 거의 변화가 없음.  






명문대 졸업자 중에서 '개천용'이 줄어들었다고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개천'이 줄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높음. 결과적으로 기회의 평등은 높아졌지만 실제 고용시장이나 체감적으로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다음의 이유 때문일 수 있다

1. 기회의 평등은 매우 높아졌지만 결과의 불평등은 여전하다
2. 기회의 평등을 넘어 결과의 평등까지 바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018년 12월 22일 토요일

미네르바의 부엉이와 갈리아의 수탉

미네르바(Minerva)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으로 그리스 신화의 아테나(Athena)에 상응한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로마신화에서 미네르바와 항상 함께 다니는 신조(神鳥)로서 지혜의 상징이다. 원래 미네르바의 신조는 까마귀였다. 오비디우스(Ovidius)의 <변신이야기>에 따르면 까마귀는 미네르바의 비밀을 누설한 죄를 짓고 신조의 자리를 부엉이에게 내주었다 한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헤겔(Friedrich Hegel)은 그의 저서 <법철학> 서문에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라는 경구를 남겼다. 철학은 앞날을 미리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뤄진 역사적 현상이 지나간 이후에야 그 뜻이 분명해진다는 의미이다. 헤겔의 경구는 인식이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 인간의 욕망은 변화의 속도 만큼이나 빨리 움직이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인식하고 학문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가능하다. 이와 같이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는 욕망과 인식의 속도 차이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가끔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서 ‘그때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왜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했을까? 그때 왜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라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바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날이 저물어야 날개를 편다’는 의미가 아닌가 한다.

역시 인간의 지혜는 변화의 속도와 욕망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가 보다. 그런데 그때 알지 못했던 것이 후회로 남기는 했지만 그때 알지 못해 낭패를 보았던 경험 때문에 지금 알게 됐으니 그것만으로도 소득이 아닌가?

헤겔의 말은 오늘날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다. 변화의 속도가 워낙 빨라 인간의 인식과 지식과 학문이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에 따라 지식과 학문이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뒷북만 치고 있다. 변화를 따라가기에도 숨이 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탉이 울면 새벽이 오고 얼마 안 있어 동이 트면서 태양이 떠오른다. 시계가 없었던 시절 수탉은 새벽의 전령사였다. 어둠의 공포에서 벗어나 밝은 낮으로 가는 길목에서 수탉은 항상 밝은 아침이 멀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신비한 존재였다. 동양의 옛날이야기에도 귀신이 쫓아오다가 닭 울음소리를 듣고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스토리가 제법 많이 있다. 새벽에 울음을 우는 수탉을 신성시하는 경우도 생겨난 것 같다.

서양인들은 갈리아지역(지금의 프랑스)이 닭의 원산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닭을 ‘갈리아의 새’라고도 불렀다. 갈리아인들은 고대부터 수탉을 새벽의 신으로 신성시했다. 수탉은 갈리아의 신으로 숭상되기도 하고 갈리아 군대의 기장(旗章)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프랑스를 상징하는 동물은 수탉이다.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 개념에 맞서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제기한 개념이 ‘갈리아의 수탉(Gallia Rooster)’이다.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수탉이 새벽에 울어 세상을 깨우듯이 철학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이 뒷북이나 치고 앉아 있다면 그건 죽은 학문이라는 것이다. 헤겔이 말한 것처럼 철학이 현실이 다 지나간 다음에야 겨우 이론을 정립하는 늙은이 학문이 아니라 현실이 오기 전에 그것들을 인식하고 설명하는 선도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하 테제>의 11번째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말한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 논리에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철학자의 사명은 시간이 지난 다음 뒤늦게 세상을 해석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 앞서 이론을 정립해 현실을 바꾸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성연 애터미 경제연구소장 nexteconomy@nexteconomy.co.kr

http://m.nexteconom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