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1일 목요일

회피되어온 한국사 제1의 난제, '노비'




ㅇ 한국사 교과서에서 노비 이슈는 왜곡 회피되어 왔다


ㅇ 조선시대 노비인구의 비중이 40~70%라는데는 큰 의견의 차이가 없다

- 17세가 경상도 호적, 인구의 42~64%가 노비

- 1663년 한성부 북부 호적, 인구의 73%가 노비

- 15세기말 학자 성현 언급, "조선 인구의 거의 절반이 노비다"

- 14~15세기 노비인구가 모종의 이유로 폭발적 증가

- 16세기, 서울 경기 지방의 관인은 300명가량, 지방 품관이라도 70~80명의 노비를 소유. 왕족이나 왕의 측손은 수천~수만의 노비를 소유

- 미국 노예제 당시 대규모 플랜테이션도 흑인노예 숫자가 100명을 넘기기 어려웠음

- 조선의 노비인구수와 비중은 서양의 고대 노예제 사회와 비교해도 엄청나게 많은 수치, 노예제가 발달하고 전쟁노예가 많있던 로마시대 노예는 인구중 10~15٪ 가량, 아주 크게 늘었던 시기여도 40%를 넘지 않았다

- 이상할 수 있는데 고려와 달리 조선에서는 노예들이 자유를 얻겠다는 반란이 없었음 

- 노예의 이름이 인간적 개성과 사회적 인격을 말살하기 위해 붙여짐 (예, 개똥, 소똥, 말똥, 구월, 바위 등) 고려와 다르다


ㅇ 삼국~통일신라~고려시대의 노비는 매우 적고 형벌의 결과측면이었다

- 7세기 연좌제에 의해 형벌, 전쟁으로 노예 발생

- 7세기 말 신라 4개촌 노비인구비중은 6.1%

- 노비가 세습되지 않는 경향이 있음(형벌이므로)

- 삼국~고려시대 노비는 많지 않았다. 전체인구의 5%전후로 추정, 고려 귀족도 노예보유는 20인을 넘지 못했음

- 10세기 이후 고려는 노비법을 정비, 노비는 형벌의 결과여서 노비법이 엄격했다

- 이당시 노비는 자유민의 기억이 있으므로 반란이 있었음(예, 만적의 난, 고려시대만 10여차례)

- 고려시대 노비도 인간이므로 불교적 의미가 있는 이름이 붙여짐(예, 만적, 불광, 시광 등) 

- 고려의 노비는 원칙적으로 국가소유고 사재축적, 세습이 불가능

- 신분마다의 역할을 강조하는 유교와 달리 불교는 만인이 같음을 주장, 노예제를 뒷받침 하지 않는 사상


ㅇ 조선의 노예는 그 이전 시대보다 더 엄격하게 관리되었음

- 노예법 제정 1420년 세종, 노비는 주인을 고소할 수 없다(고려시대는 노비가 주인을 고소 가능)

- 조선시대 주인과 노비의 관계는 사적지배의 영역으로 법의 테두리 밖에 있었다. 주인이 마음대로 생사여탈권 보유

- 일부 조선의 왕이 노비들도 백성임을 들어 이들의 권리를 강화하려 하자, 신하들 "차라리 천명(왕)을 바꿀지언정 명분을 바꿀 수 없다"

- 조선의 노비는 그 이전 시대와 다르게 사유재산화, 상속, 증여, 매매의 대상


ㅇ 조선의 독특한 국가체제와 노비제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ㅇ 조선 노비 인구 폭증의 원인은 노비 인구 증가를 방관하는 제도가 작용

- 고려시대는 노비와 양민간의 결혼이 엄격히 금지, 그러나 조선시대는 사실상 허용(노비의 자식이 또 노비)

- 종부종천, 종모종천, 등으로 노비의 자식은 모두 노비

- deteriocondicio(종천법) = 부모중 한명만 노비여도 자식은 노비 = 전세계 노예제 중 가장 강력한 노예 증가책

- 조선시대는 노비간 결혼은 주인이 단속, 허가권가져, 이에 따라 60~70%의 결혼이 노인과 양인간의 결혼

- 반면 서양의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대부분은 부모중 한명이 자유인이면 자식도 자유인, 심지어 부모가 모두 노예여도 그 신분이 자식에게 세습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ㅇ 조선시대는 토지가 명목상 사유화되면서 국유제에서 재편됨, 이는 노비제의 주요 특징과 맞닿아 있음

- 토지 매매와 상속의 일반화, 농업생산성 증대 (이상은 조선시대가 그 이전과 차별되는 주요 특징)

- 조선 양반은 인당 수백~수천의 노비를 소유. 상당수는 납공을 받는 노비인데 국가의 군역, 노역이 개인(양반)에게 납공, 헌물되는 체제

- 국가를 대신해 국가의 지배체제를 할양해서 양반관료들이 백성의 절반, 그 이상을 사민으로 지배하는 체제 

- 조선은 노역과 토지간의 연결이 끊어짐, 즉, 재산이 없어도 국가에 대한(더 정확히는 소유 양반에 대한) 의무를 이행해야 함

- 양안(토지장부), 호적(인적장부), 이 두개간의 연관성이 없음, 재산과 의무간의 연결고리가 없는 단절이 발생

- 이러한 의무를 충족못하면 노비로 전락하므로 대규모 노비가 양산되기 쉬움, 의무 회피를 위해 일부러 노비가 되기도했다

- 이러한 재산(토지)와 노역(의무)간의 무관함은 적어도 한중일 중 한반도만이 유일


ㅇ 조선이 국방에 신경을 쓰지 못한데는 이유가 있다

- 군역과 재산이 분리되어 있으므로 군역을 제대로 이행하기 어렵다

- 노비는 군역을 지지 못한다(양인중 상당수가 군역을 피하기 위해 노비가 되었음)


ㅇ '우리 민족'이라는 개념은 현대에 들어 새로이 등장한 것으로 실체는 없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교과서에는 무비판적으로 언급


ㅇ 민족의 개념은 없고 종족의 개념이 있다. 가령 이 질문에 답해보자. '노비는 같은 민족? 종족인가?'

- 조선시대에 노비는 민족이나 종족 개념에서 하나라는 개념이 없이 다른 '존재'였다. 동물 같은 소유물, 재산 취급


ㅇ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며 토지와 인민에 대한 보편적 지배체제를 만드는데 이 과정에서 그동안 체제에 통합되지 않았던 존재가 드러난다. 이것이 노비의 기원

- 고려시대는 관리하는 지역외 빈공간이 많았는데 이 지역은 면적 기준 기존 관리 지역 대비 2.5배에 해당되는 큰 면적

- 이러한 비관리 지역에 살던 사람은 고려 사회에 편입되지 않았는데 '화척', '양수척(楊水尺)', '무자리'라 불리웠다

- 이들의 기원은 확실치 않다. 고려사에 따르면 왕건이 백제를 공격할 때 제압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있다

- 양수척은 호적이 없고 거처없이 옮겨다니며 사냥, 나무꾼, 유기(나무그릇) 등을 팔면서 살았다

- 고려시대 거란 침입시 양수척들이 거란의 길잡이 노릇을 한 적이 있다. 당시 무신정권의 세도가중 양수척에 대한 수탈을 했던 자가 있었고 그 복수 차원에서 거란에 협조한 것

- 조선 세종시기에 이들을 '재인', '화척'이라 불렀고 강제 정착을 추진, 이름도 신백정으로 개칭, 당시 이들은 사회의 주요 범죄 집단

- 세종당시 기록들은 '이들은 본시 우리 족속이 아니'라고 명시

- 성종 당시 기록에는 이들의 인구가 평민의 1/3~1/4에 이른다고 추정


ㅇ 조선시대 들어서 노비가 급증한 배경에는 원래 있던 소수의 노비(고려시대 인구의 5~10%)와 재인, 화척들이 결혼하여 발생한 것

- 조선초기 부모중 하나만 노비여도 자식은 노비이고 노비와 양인의 결혼을 방임했으므로 노비 인구가 급증(양천교혼)


ㅇ 이들 노비와 기생에 대해서 '같은 종족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다', '피가 검푸르다', '거란의 후손이다' 등으로 묘사하여 같은 종족, 민족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zg8dcCfF6Q

명분과 실리

현실에서 추진력을 얻고자 할 때 명분이 필요한 것이지, 명분으로 현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이념을 목적화 하는 집단일수록 내실은 없다. 외부에 보여줄 내실이 없다보니 이념에 기반한 공상을 내세우고 그러면서도 내면에 품은 인간의 욕망은 그대로인지라 안으로 기어드는 권력만 탐한다. 이런 자들일수록 응당 그러해야한다는 감정을 뒤흔드는 메시지와 당위론으로 치장하나 정작 속심은 사적 이해에 감추어져 있다. 행동이 아닌 말에 집중하는 대중의 특성상 이들은 대중 선동에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