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8일 금요일

이중슬릿의 모순 해결

이중슬릿 실험이 감지장치가 있으면 입자성질이 되고 없으면 간섭무늬(파동)가 된다는건데
만약 현실이 컴퓨터 온라인 게임같은거라면 이 모든게 설명 가능함

온라인 게임도 내 캐릭을 이동시키면서 화면에 잡히는 부분만 존재하는거잖아

내 화면에 안잡힌 부분은 프로그램상 존재하기는 해도 구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없는거나 마찬가지지

그러니까 내 캐릭이 있는 곳에 몬스터나 나무같은게 보이면 컴터에 입력된 프로그램이 이미지로 변환되서 화면에 나타나는것이고

캐릭을 이동시켜서 화면에 안보이게 하면 존재하던 몬스터는 단순히 컴퓨터 프로그램상의 기호값으로만 남은채 사라져버리는거지

그리고 다른 사람도 동일한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어도 본질적으로 각자 독립된 컴터화면을 보고 있는거임

그러니까 현실이 온라인 게임같은거라면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거임

ㅋㅋ


- 물리갤

이중(二重) 슬릿(Slit) 실험, 의식의 영역

누구나 다 잘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잘 산다는 게 무엇인가요? 어떤 이는 재물이 많아야 한다고, 다른 이는 건강해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이름을 오래 남겨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사람에 따라 아주 많은, 제 각각의 잘 사는 방법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잘 사는 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에 따라 같지 않겠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느냐(?)에 앞서, 모든 것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아는 게 필수입니다. 돈이 많으면 잘 사는 것인지 알고 죽어라고 돈 벌기에 몰두했었는데, 뒤늦게 그게 아니란 걸 알고, 땅을 쳐가며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출세하고 명예롭게 사는 게 전부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고, 건강이 제일인 줄 알았는데, 그 역시 허망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 흔한 게 그런 사람들 아닙니까?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의 본질을 모르고, 그저 눈에 보이는 바에 따라, 그리고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만을 좇아 귀중한 삶을 허비하고 허탈해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든 것의 본질, 과연 물질과 비 물질(정신)이 별개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별개가 아닌 나눌 수 없는 것인가? 이 모든 것을 만든 어떤 별개의 존재(神)가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런 고민을 하는 나는 과연 누구, 아니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런 생각에 동조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근본적인 의문이 해소되지 않고, 돈, 건강, 출세,.... 이런 것들을 추구한다는 것은, 결국 사막에서 신기루를 보고 오아시스를 찾으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근본적인 답을 모르는 상태에서 마감하는 삶은 결코 평안한 임종(臨終)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참선(參禪)을 하고, 요가도 하고, 고행(苦行)도 하고, 기도(祈禱)를 하기도 하고,.... 아주 많은, 다양한 길들로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삶은 그 답을 찾는 순례(巡禮)인 것입니다. 물론 그걸 그렇다고 인식하는 삶은 극히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천만다행히도,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그것, 모든 것의 본질을 알 수 있는 절호의 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나간 역사를 살펴 볼 때, 지금처럼 누구나 잘 살 수 있었던 시절은 없었습니다. 이건 물론 우리가 역사를 기록한 연대(年代)의 범위 이내에서의 얘기입니다. 그 이전, 기록으로 남겨진 시대보다 앞선 시절,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는 모르기에 이렇게 밖에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모든 것의 본질을 탐구해서 잘 살았던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난 시절에는 영(靈)적으로 뛰어난 존재들만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이 시대에는 그런 특별한 존재가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그럴 마음만 낸다면, 잘 살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면 저 같은 존재라도 그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블로그에서 하는 얘기란 게 거의 다 그런 얘기니까 새삼스런 얘기가 아닙니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같은 얘기가 반복됩니다. 이 얘기는 저같이 이과(理科)를 전공한 이에게는 좀 더 쉽게 다가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뭐 복잡한 얘기도 아닙니다. 19세기 말, 그리고 20세기 초, 당시 첨단 물리학자들은 물질(物質)의 본성이 거의 다 규명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 미해결인 부분들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그걸 밝혀내는 건 그야말로 시간문제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런 사소한 미해결 문제점들 중의 하나가, 흑체복사(黑體輻射, blackbody radiation)란 게 있었습니다.

제 전공이 아니고, 또 저 또한 잘 모르는 부분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게 지금 얘기하고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고 넘어가겠습니다. 혹 궁금하신 분들은 인터넷을 검색해 보시면 쉽게 그 설명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의 막스 플랑크(Max Planck)는 이 미해결 부분을 연구하다가 그야말로 엄청난 사고를 치게 됩니다. 실험결과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양자물리학(量子物理學)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창시자가 된 것입니다. 그때까지 물리학을 지배해온 뉴턴(Issac Newton)의 고전물리학(古典物理學)과는 판이하게 상이한, 전혀 새로운 신경지를 인류에게 소개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자물리학의 역사는 이미 100년을 넘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들(비록 물질에 국한한 것이지만)의 내용에는 이 새로운 발견이 빠져있었습니다. 만약 그때, 학교 다닐 때, 양자물리학의 개념을 배울 수 있었더라면, 제 인생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요새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대학입시 논술고사에 양자물리학의 핵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EPR 역설(逆說, paradox)이 나올 정도니까, 아마 고등학교 과정에 양자물리학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가보다(?) 하고 짐작을 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양자물리학의 기본개념을 교과과정에 포함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게 틀림없습니다. 양자물리학이 밝혀낸 바를 받아들이는 존재라면, 그렇게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더 건강하려고, 더 출세하려고, 그밖에도 많은 것들을 더, 더, 더,.... 하는 비참한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온통 더, 더, 더,... 하는 열기가 더해만 가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이미 그런 내용이 교과과정에 포함된 지 오래인 구미 각국의 상황을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노벨상을 수상한 저명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이 토로한 것처럼, “"양자물리학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가 원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양자물리학이 시사해주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는 존재라면, 이 세상 삶을 이렇게 영위할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번에 얘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양자물리학 중에서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이중(二重) 슬릿(Slit) 실험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 실험 내용 역시 제 전공이 아니라서, 제가 설명하기에는 벅찹니다. 다행히 이중 슬릿 실험을 아주 잘 설명해 놓은 자료를 발견했습니다. 실험의 세부 내용에 대해서는 아래 자료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http://blog.naver.com/sherufa/120099653790

그럼 이중 슬릿 시험의 세부는 건너뛰고, 실험 내용을 가지고 얘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아래 설명은 실제 실험을 알기 쉽도록 다듬은 것입니다. 전자(電子, electron)를 한 개씩 발사할 수 있는 전자총 앞에 세로로 한 개의 틈(slit)이 난 가림판을 설치하고, 그 뒤에는 스크린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전자란 아주 조그만 입자, 알갱이 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스크린을 향해 전자를 발사하면 가림판에 맞고 튀어나오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 전자들은 세로로 난 틈을 통과해서 최종적으로 스크린에 도달합니다. 그렇게 스크린에 도달한 전자들의 흔적은 가림판에 있는 틈을 그대로 뒤로 평행 이동한 것처럼 세로로 난 기둥모양을 남깁니다.

그러니까 전자 대신에 조그만 당구공을 총으로 쓰는 것과 같은 결과라고 보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가림판에 한 개가 아닌 두 개, 평행으로 난 두 개의 틈(slit)을 만들고 전자 대신 조그만 당구공으로  같은 실험을 하면, 스크린에는 가림판에 있는 틈을 그대로 뒤로 평행 이동한 것처럼 세로로 난 기둥모양을 남기는데, 틈이 두 개이니까, 흔적도 두 개의 기둥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비슷한 실험을 당구공 같은 입자가 아닌 파동(波動)을 대상으로 실시하면, 틈이 한 개일 때는 입자로 실험했을 때와 차이가 없이 가림판에 있는 틈을 그대로 뒤로 이동한 것처럼 세로로 난 기둥모양을 남깁니다.

그렇지만 파동의 경우, 두 개의 틈을 가진 가람판으로 실험을 하면, 두 개의 세로로 난 기둥모양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 줄의 간섭무늬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번에는 조그만 당구공 대신 진짜 전자를 가지고 해 봅니다. 자 여기서 양자물리학의 가장 기이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배운 개념으로는 전자(電子)란 것은, 아주 작지만 당구공 같은 알갱이입니다.

그러니까 두 개의 틈을 가진 가림판 앞에서 전자총으로 전자를 쏘아 스크린에 나타나는 흔적은 당연히 당구공 같은 형태, 두 개의 기둥 모양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실제로 측정된 결과는 파동으로 실험한 것 같은 여러 줄의 간섭무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 개의 전자를 쏘기 때문에, 그들 간에 서로 간섭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반론도 고려하여, 전자를 하나씩 발사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유일한 합리적인 해석은 전자가 파동 상태를 유지하지 않고서는 그런 간섭이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자(電子)는 알갱이, 입자(粒子)가 아니라, 실체(實體)가 없는 파동(波動), 떨림이라는 얘기입니다. 그 후 계속된 연구에 의하면 전자(電子)만이 아니라, 물질을 구성하는 다른 아원자(亞原字)들 역시 전자와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이 결과를 토대로 한다면, 모든 것이 다 텅 비었다, 공(空)하다는 얘기가 성립됩니다. 이중 슬릿 실험은 여기가 다가 아닙니다. 전자총에서 발사된 전자가 두 개의 틈 중에서 어느 쪽을 통과했는지를 알기 위해, 틈 바로 뒤에다 측정장치를 설치하고 같은 실험을 했더니, 이번에는 간섭무늬가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전자는 누군가가 관찰을 하면 이번에는 파동 상태가 아니라, 입자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자가 의식(意識)을 갖고, 생각을 한다는, 그러니까 살아있는 존재라는 얘기가 아닙니까?

이걸 관찰자 효과(Observer Effect)라고 부릅니다.

그럼 과연 전자의 본질은 무엇인가, 입자인가 파동인가? 답은 파동, 그걸 양자파동(quantum wave function)이라고 부르며, 전자를 포함한 모든 아원자들이 다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걸 아주 멋들어지게 묘사한 글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계에서 익히 기대할 수 있는 종류의 행태라기보다는 마술에 더 가까워보인다. 당신이 지켜보고 있을 때만 볼링공으로 보이는 그런 공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볼링 레인에다 밀가루를 뿌려놓고 이 ‘양자’ 볼링공을 핀을 향해 굴리면, 당신이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동안에는 밀가루 위에 한 줄의 선을 남기면서 굴러갈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잠시만 눈을 깜빡이더라도 공을 지켜보지 않았던 그 짧은 시간 동안 공은 한 줄의 선이 아니라 마치 사막의 뱀이 모래언덕을 지나갈 때 남기는 물결모양의 흔적처럼 넓은 물결무늬를 남겨놓은 것을 발견할 것이다.

『홀로그램 우주』(마이클 탤보트 지음/이균형 옮김, 정신세계사)

여기까지는 양자물리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얘기입니다. 저도 이 정도로만 알았었는데, 최근 홀로그램 우주(holographic universe)를 공부하면서, 새로운 실험결과를 전해 듣게 됐습니다. 토머스 캠벨(Thomas Campbell)이라는 물리학자가 설명하는 내용인데, 제게는 마커스 드 사토이(Marcus du Sautoy) 교수가 소개한 두뇌 스캐닝 결과 못지않게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물론 이 설명 역시,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실험의 구체적 내용을 쉬운 말로 푼 것입니다. 이중 슬릿 실험을 진행하면서 별도의 장치를 하여 상이한 조건을 조성했습니다. 물론 슬릿에서 관측을 하지 않은 데이터는 예상대로 파동의 간섭무늬를 나타냅니다.

또한 관측 장치를 틈, 슬릿 바로 뒤에 설치하고 실험을 계속합니다. 그런데 관측을 하면서 실험을 하기는 하지만, 그 결과는 판독을 하지 않고, 그냥 컴퓨터가 기계적으로 기록만 했습니다. 실험결과는 두 개의 슬릿 바로 뒤에서의 관측 데이터와 최종적으로 스크린에 나타난 흔적을 개개의 전자마다 측정해서 컴퓨터에 보관했습니다. 그렇게 수집한 100개의 데이터를 무작위로 나누어 2개의 그룹으로 구분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의 데이터는 정상적으로 판독(그러니까 전자가 어느 쪽 슬릿을 통과했는지와 그 전자가 스크린에 남긴 흔적의 위치를 모두 판독)했는데, 결과는 예상대로 관찰자 효과가 반영된 입자(당구공 같은)로 실험한 것 같이, 두 개의 기둥으로 나타났습니다.

두 번째 그룹의 경우에는, 측정 데이터 중에서 전자가 어느 쪽 슬릿을 통과했는지를 관측한 것들은 모두 폐기처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50개의 실험에서는 전자의 슬릿 통과 과정에 대한 측정은 하였으되 그 데이터는 없애버리고, 스크린에 도달한 데이터만 판독했다는 얘기입니다.

자, 과연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까요?

분명 슬릿을 통과할 때, 측정 장치로 관측을 했으니까, 당연히 관찰자 효과가 적용돼서 입자로 실험한 것 같은 결과가 나왔을까요?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관찰자 효과가 없는, 즉 슬릿에서 관찰을 하지 않은 것과 같은, 간섭무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전자가 파동형태에서 입자(물질)로 전환하는 시점이 언제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일반적인 상식 수준으로 판단하면, 측정 장치로 관측하는 때일 것이니까, 그 시점에서 전자는 파동에서 입자로 전환하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고, 측정 행위 여부와는 상관없고, 그 데이터를 우리가, 다시 말해 의식(意識)이 인지함으로써 본질적인 파동형태로부터 붕괴하여(collapse) 입자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해 봅니다.

눈으로 볼 때는 공 모양을 취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풀어져서 파동 형태를 취하는 그런 공이 목표 스크린을 향해 던져집니다. 공이 날아가는 동안 중간 지점에 설치한 카메라가 모든 공을 촬영합니다. 스크린에도 역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서, 공이 스크린에 어떤 위치에 어떤 형태로 도달했는지를 촬영했습니다. 그렇게 100개의 공을 촬영했지만 실험하는 사람이 그걸 직접 한 것이 아닙니다. 전부 자동화 장비들이 그걸 해 냈습니다. 나중에 촬영된 100개의 데이터를 무작위로 두 무더기로 분류했습니다.

첫 무더기는 촬영된 모든 데이터를 읽고 그 자료를 통계분석 해 보았더니 모두 공 모양의 결과를 얻었습니다. 중간에 관측을 하였으니 당연히 그런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두 번째 무더기는, 중간의 촬영 데이터는 모두 폐기처분하고 최종 스크린 위치에서 촬영한 데이터만 남겨서 읽고 통계분석 했습니다. 그랬더니 결과는 모두 파동형태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전자가 본래의 상태인 파동(비물질)상태에서 입자(물질)상태로 바뀌었는데, 그 시점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같은 실험 과정을 거쳤는데도 말입니다.

이게 마술일까요, 아니면 본래가 그런 것일까요?  답은 본래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분석을 언제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즉 지금 실험을 하고 1주일 뒤, 혹은 1년 뒤, 심지어 10년 뒤에 분석을 하더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실험을 지연된 선택(Delayed Choice)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전자가 본래의 상태(파동, 비물질)에서 입자 상태(물질)로 전환하는 선택을 실험 시점보다 늦춘다는 것이지요. 정말 이게 과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실험의 세부 내용은 유튜브(www.toutube.com)에서 쉽게 검색해 볼 수 있습니다(Quantum Physics 101-Double Slit Experiment).

“만약 당신이 이중 슬릿 실험을 정말로 이해한다면, 양자 물리학 모두를 이해할 수 있다.”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이 한 얘기입니다.

“양자론을 처음 접하고서도 충격을 받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양자 물리학의 대부(代父)라고 할 수 있는 닐스 보어(Niels Bohr)의 얘기입니다.

이중 슬릿 실험에 대한 얘기를 읽고 나서, 그것이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를 주었는가요? 지난 번 얘기한 내용, 그것이 이중 슬릿 실험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거기 함유된 내용은, 제게는 대단한 것입니다. 지난 번 서술한 그 내용, 실험 결과는, 저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실험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해석한 바의 의미(意味)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지어온 바 그 모든 것의 총합(總合)인 나(我)라는 물방울이 느끼는 의미는 이와는 다른 이력(履歷)의 결과인, 즉 다른 물방울인 당신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글에서 얘기하는, 〔이중(二重) 슬릿(Slit) 실험의 의미〕는 어디까지나, 저 개인의 의미입니다. 만약 아직 〔이중(二重) 슬릿(Slit) 실험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그 의미를, 당신만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럼 제가 찾은 의미를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중 슬릿 실험이란 걸 처음 접해본 건 제법 오래 전이었습니다. 그건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물론 그 엄청난 충격으로 사물을 보는 안목이 크게 달라지고, 모든 일의 의미를 폭넓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글로 그 의미를 쓰려고 하니까, 이번엔 보다 깊은 사색이 필요했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사물을, 모든 것을 폭넓게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보다는, 좀 더 깊이 이 현상을 따져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블로그에 글을 쓴다는 게, 진리추구(眞理追求)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다시 깨우치게 됩니다. 문득 어렸을 때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반백년도 지난 일인데, 이 주제를 공부하면서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매년 설날이 되면, 집안 어르신에게 세배를 갔습니다. 그 어르신의 서재 한쪽 벽을 가득 도배한, 알 수 없는 기호들, 기하학적 도형들도 있었고 별자리 그림도 있는 가운데, 몇몇 알아볼 수 있는 문자들 중에 광년(光年)이란 것도 있었습니다.

대개 오래 전에 작성되었음을 알려주듯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그래서 누렇게 변색이 된 종이들로 언뜻 괴이한 분위기마저 가득했던 그 방에서 그 분은 과연 무얼 알고 싶어서 그런 공부들을 하셨을까? 지금도 그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 어르신에게 큰 의심(大疑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 역경(易經), 성리학(性理學)도 공부하고 천문(天文)도 바라보고, 그러셨을 것입니다. 그 어른이 모든 것의 이치(理致)를 깨우치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돌아가시는 길이 평온하지 못했다고 하니까, 아마 그걸 깨우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 어른의 절망(絶望)이 느껴집니다. 연전(年前)에 돌아가신 모친도 생각이 납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 “.....수보리 어의운하...(....須菩提 於意云何....)”, 그렇게 금강경(金剛經)을 독송(讀誦)하셨습니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 이렇게 외고 또 외셨지만, 과연 그 어른이 그 의미를 완전히 받아들이셨을지는 의문입니다.

아마 그러지는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그렇다고 가르치셨으니까 그런 줄 믿지만, 이렇게 눈앞에 사물들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데, 어떻게 모든 것이 텅 비었음(空)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믿을(believe) 수는 있지만, 알(know) 수는 없으셨을 것입니다. 어머님의 그 절망(絶望)이 피부로 느껴집니다. 그 분들의 절망을 제가 알 수 있는 건, 저 역시 한참 전에 그런 절망에 떨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단순히 양자 물리학, 이중 슬릿 실험 결과로 인한 것만은 아닙니다만, 양자 물리학이 밝혀준 사실(fact)들을 몰랐더라면, 어림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중 슬릿 실험 결과를 간단히 요약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 크기, 모양, 무게를 갖고 있다고 믿는 입자(粒子), 예를 들면 전자(電子)가 사실은 텅 비었다(空)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여기는 물질,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코로 냄새 맡을 수 있고, 혀로 맛볼 수 있으며, 감촉으로 느낄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은 근본적으로 확률 파동(wave function)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그 근본은 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여기에 관찰자(observer)가 개입하면, 그러니까 마음, 생각, 의식(意識)이 더해지면, 텅 빈 곳에서 돌연 알갱이가 출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의식, 마음이 사라자면, 그 알갱이는 다시 파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있다고, 존재한다고 여기는 그 모든 것, 여기에는 물질만이 아니라 생각, 느낌, 분위기, 사건,...... 이런 것들까지를 아우른,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이 텅 비었음을, 믿는(believe) 게 아니라 알(know)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별다른 해석, 분석이 필요 없는 있는 그대로의 과학적 사실(fact)입니다. 여기까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거나, 이걸 받아들이지 못 하겠다고는, 그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가톨릭신자, 개신교도, 불교도,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심지어 무신론자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밝혀진 사실(fact)을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과학의 힘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그렇게 나타난 실험결과의 의미가 무엇인가(?)는 아직 과학으로는 답을 주질 못합니다.

“당신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한 얘기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 물리학자였지만 이렇게 밝혀지는 사실들을 거부하지도 못하고, 흔쾌히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과학의 힘으로 그 의미, 답을 찾는다고 통일장이론(統一場理論, The Unified Field Theory) 개발에 말년의 노력을 다 경주했지만, 끝내 그 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양자물리학의 대부 닐스 보어는 연구실 문에 “지금 연구 중, 철학자 출입금지”란 팻말을 붙여 놓았다고 합니다.

그 역시 과학의 범주 내에서 답, 의미를 찾아내려고 했지만, 아직까지 과학의 힘 단독으로는 모든 것들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이건 아마도 영영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물리학자 얀(Robert G. Jahn)과 듄(Brenda J. Dunne)이 얘기한 것처럼, ‘어쩌면 물리학자들이 입자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입자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원자 입자인 아나말론(anamalon)이라는 입자의 성질은 실험실마다 다르게 관측되었다고 합니다. 즉, 어떤 성질을 지닌 입자가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연구자의 가설 및 기대에 부응하여 그런 성질의 입자가 만들어진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질의 입자로는 문제가 풀리질 않는다는, 그와는 다른 견해를 가진 연구자 역시 아나말론을 발견하는데, 그 발견 내용은 연구자가 예측한 것과 같다는, 즉 이전에 발견된 내용과는 다른 성질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이런 위대한 연구자들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게 오히려 더 유리한 조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양자 물리학자는 아니지만, 그래서 새로운 발견을 도모하지는 못하지만, 우리 평범한 존재도 확인된 내용까지는 과학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벗어나는 경지, 그 의미에 대해서는, 정신세계의 깨우친 이(覺者)들의 가르침에 의존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간, 지난 이천년 이상, 깨우친 분들이 가르침을 주었지만, 깨우치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큰 의심의 씨앗을 심기는 했지만, 꽃을 피운 존재는 극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과거 양자물리학 이전의 세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넘지 못할 경계가 분명 존재했습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집안어르신이나 제 모친 처럼 의심의 씨앗은 심어졌지만, 보통 사람이 모든 게 다 텅 비었다, 그러면서도 아무 것도 없는 건 아니다(眞空妙有)라는 걸 믿을(believe) 수는 있었지만, 알(know)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첨단 물리학자들 덕분으로 이 경계를 허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불자(佛子)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그리고 유명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으로 불자가 아닌 사람에게도 잘 알려진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이란 가르침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온(五蘊)이라 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다시말해 일체 모든 것을 다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만이 아니라 생각, 행동, 감정, 정신,....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한 것이 사실은 다 텅 비었다(空)는 것을 알면(照見五蘊皆空), 모든 괴로움, 고(苦)를 벗어날 수 있다(度一切苦厄)는, 어찌 보면 간단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분명 내 눈앞에 책상도 있고 의자도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이핑하는 손도 있고, 그걸 보는 눈도 있으며, 컴퓨터도 있고, 또 그걸 인식하는 뇌도 있는데, 모든 것이 텅 비었음을 어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道)에 목마른 이는,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머리도 깎고 먹물들인 옷을 입고 토굴 속에서 몇 년이나 고행을 하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게 텅 비었다는 걸 아는 이는 겨우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밖에는 되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양자 물리학의 실험 덕분으로, 보통의 존재라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지도 않고, 머리 깎지도 않고, 고행을 하지 않고도, 그걸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게 텅 비었음을 아는 것하고 모든 고(苦)에서 벗어나는 것하고 무슨 관계에 있느냐(?)는 질문이 뒤따를 것입니다. 그건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일단 모든 게 텅 비었다는, 양자 물리학의 이중 슬릿 실험에 대해서라도 직접 공부를 하고, 확인해 보시라는 말씀밖에는 드릴 게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얘기입니다. 비행기 타고 이집트 카이로에 가서, 꼭 내 두 눈으로 피라미드를 보고 스핑크스를 만져 보아야만, 그것들이 정말로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충분한 증거가 있다면, 그걸 믿는(believe) 게 아니라 그렇다는 것을 알(know)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걸 위해서는 반드시 본인 스스로 마음을 내서, 직접 의문을 풀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게 다 텅 비었음을 믿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출세하려고, 더 많은 돈을 벌고자, 좀 더 건강하려고, 더, 더, 더,.... 할 수가 있을까요? 제 경우이기는 하지만, 그럴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하기만 하면 저절로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은 따라올 수밖에는 없습니다. 금강경(金剛經)에도 핵심 가르침 내용은 다르지 않습니다. 크게 다르지 않은 많은 가르침 중에서도 지금 이 얘기와 관계 깊은 걸 찾아보면 이런 게 있습니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다 채울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칠보(七寶)로서 보시(布施)하는 것보다 사구게(四句偈) 하나라도 수지독송(修持讀誦)하는 복덕(福德)이 더 수승(殊勝)하다”라는 가르침이 있는데, 그게 당연함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런 보시를 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엄청난 부(富)를 소유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만 그런 상상할 수 없는 복 보다도 사구게(四句偈) 하나라도 제대로 아는 게 훨씬 더 낫다는 걸, 조금만치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사구게(四句偈)라는 게 별 게 아닙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응당히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응당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만약 색신으로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니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의 모든 것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같으며
이슬,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알 지니라

이렇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데, 그걸 그렇게 받아들이기가 쉽지가 않은가 봅니다.

물론 양자 물리학, 이중 슬릿 실험결과를 공부한다고 해서 즉시 이런 받아들임이 당연시되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천년 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당신 가르침이 잘못 전해지는 것을 바로 잡으시겠다고, 20세기 미국에, 헬렌 슈크만(Helen Schucman)이라는 심리학자에게 나타나셔서 무려 7년간이나 전수해 주셨다는 가르침, 『기적수업(A Course In Miracle)』, 수백만의 미국인들이 자발적으로 공부하고 있다는 그 가르침 역시 양자 물리학, 이중 슬릿 실험 결과와 다르지 않습니다.

당장에 그런 변화가 나오지는 않지만, 또 그게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에, 기적수업에서는 워크북(Workbook)이라는 수행지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수행지침(Workbook for Students)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Nothing I see in this room[on this street, from the window, in this place] means anything.

Now look slowly around you, and practice applying this idea very specifically to the whatever you see:

This table does not mean anything.
This chair does not mean anything.
This hand does not mean anything.
This foot does not mean anything.
This pen does not mean anything.
......

한 마디로 이 방에 보이는 것들, 길에 있는 것들, 창문을 통해 보이는 것들, 이 장소에 있는 것들이란 실재(實在)하는 게 아니란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탁자, 의자, 손, 발, 펜이 실재하는 게 아니란 걸 깨우치는 연습을 하라는 것으로 『기적수업(A Course In Miracle)』수행(修行)을 시작하라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들이 실재(實在)가 아니란 걸, 조금씩 연습을 통해 익혀간다면, 언젠가는 그런 인식이 당연한 게 될 것입니다. 물론 저 역시도 지금 그런 과정을 겪는 중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그게 익숙해지니까, 출세한다는 것이나, 큰 상을 탄다는 것이나, 많은 돈을 번다는 것이나, 건강이 좋아진다는 것이나, 그런 것들이 더 이상 탐(貪)할 것이 아니란 걸 지극히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더, 더, 더,... 할 건더기가 더는 없습니다. 이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 지, 아니 도무지 이게 설명이 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모든 게 다 텅 비었음을 아니까(믿는 게 아니라) 삶이 살아 볼만 한 게 됩니다. 과거 같으면 감히 꿈도 꾸지 못할, 그런 경지를 이제는 우리 스스로의 평범한 의지로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래서 이 시대를 새 시대(New Age), 황금 시대(Golden Age)라고 부르나 봅니다.

- 출처, http://blog.daum.net/mwldfi/13661148

리벳의 실험, 월터의 실험

커피 잔을 집을 때, 어떤 과정을 거쳐 손이 움직여 잔을 집어 드는 것일까?

길을 걸을 때 다리는 관절을 구부리고 펴는 동작을 반복한다. 어찌 보면 복잡하고도 정교한 동작이다. 그러나 걸을 때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정신을 팔고 걷는 것이 일반적이다. 걷는 동작 하나 하나를 제어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관절이 얼마 만큼 어떻게 구부려지는지도 모른다. 그저 자연스럽게 '걸어진다'.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가 서빙 하는 테니스 공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상대방의 코트를 향해 내려 꽂힌다. 일반인은 이 공을 제대로 받아 치지 못한다. 그러나 테스트 선수들은 이 초고속의 공을 순간적으로 받아 쳐낸다. 그 뿐인가. 그 짧은 순간에 상대방의 어느 곳이 취약한지를 파악하고 그 방향으로 공을 쳐 낸다. 그들은 얘기한다. "글쎄요, 판단은 정말 본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어디로 이동할 지, 언제 공을 칠지를 따로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어디로 공을 쳐낼지를 판단할 뿐이지요. 하지만 공이 올 때까지도 언제 공을 쳐야 할 지 모릅니다.<"브레인 스토리", 수전 그린필드 지음, 정병선 옮김>"

리벳의 실험 - 무엇이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는가?

벤자민 리벳(캘리포니아 대학)은 의지와 동작 사이의 두뇌 현상을 실험을 통해 연구했다. 그는 동작에 대한 의지(will)를 일으키는 시점과 운동중추가 운동명령을 하는 시점, 그리고 운동근육이 움직이는 시점을 측정하는 실험을 했다.

학계에는 의지적인 동작이 있기 전에 두뇌에는 "준비전위(readiness potential)"가 발생한다는 사실이 이미 알려져 있었다. 동작을 하기 위한 뇌세포 신호의 발생이다. 이를 일반적으로 RP라 축약 표기한다. 준비전위(RP)는 동작이 일어나기 약 1초나 그 이상의 시간 이전에 발생한다.

리벳은 준비전위(RP)가 움직임이 있기 1초(또는 그 이상) 이전과 같이 오래 전에 발생하는 점에 주목하였다. 1초 라는 시간은 긴 시간이다. 일반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일 때 움직이려는 의지가 있은 후 1초 이상이 경과한 후에 움직이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거의 동시에 움직이는 것으로 경험된다. 리벳은 움직이려는 의지를 의식하는 시점이 움직임이 실제 일어나는 시점으로부터 이렇게 긴 시간 이전에 있게 되는지에 대해 알아보려 했다. 그 시간을 실제로 측정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피실험자의 근육에 측정기를 달고, 두뇌에는 뇌파검사기를 통해 뇌파를 측정했다. 움직이려는 의지를 내는 시점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움직이는 광점(spot light)을 보여주는 스크린을 사용했다. 피실험자가 움직이려는 의지를 내는 시점에 광점의 위치를 나중에 말하도록 하여 광점의 위치에 해당하는 시간을 측정했다. 피실험자들은 자기가 움직이고 싶을 때 손가락을 구부렸다.

그의 실험결과는 많은 논란을 낳았다. 논란은 지금까지 20여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우선 실험결과 설명을 위해 두뇌 운동신경에서 준비전위(readiness potential)가 발생하는 시점을 RP으로 표시한다. 운동근육이 움직이는 시점을 M(movement)으로 표시한다. 사람이 움직이려는 의지를 내는 시점을 W(will)으로 표시한다.

일반적으로는 W -> RP -> M의 순서가 맞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움직이려는 의지에 의해 운동신경에서 신호가 발생하고, 이어서 근육이 움직이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리벳의 실험결과는 RP -> W -> M의 순서였다. 상식적 견지에서는 기괴한 결과이다.



일단 리벳의 실험결과를 인정한다면, 움직이려는 의지를 의식하는 시점 W은 이미 두뇌의 운동신경이 움직임을 개시하는 신호를 발생시킨 시점 RP 이후이다. 그리고 실제로 근육이 움직이는 시점 M의 이전이다.

이것은 의식적인 움직이겠다는 의지는 움직임을 유발하는, 움직임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움직임은 움직이려는 생각 또는 결정 이전에 이미 두뇌에서 시작되어 있었다. 움직이겠다는 의식적인 의지는 이미 움직임의 과정이 진행되고 있음을 '인지'하는 것에 불과하다.

의식에 의해 동작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작이 일어나는 가운데 그 중간 시점에서 "'움직이겠다'는 결정을 한 것처럼"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 실험결과는 '자유의지(free will)' 논쟁으로 번져 나갔다.

우리가 움직이려는 의지가 있을 때, 사실은 이미 움직임의 신호가 전달되고 있었다면, 누가 움직임을 유발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의 의식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선행하여 움직임을 결정하고 있는 것인가? 의식은 단지 움직임이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아는 것에 지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두뇌에 나타난 의식은 우리를 속이고 있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전적으로 모든 행동을 결정하고 실행하고 있는 것으로 느끼고 있지 않은가? 우리에게 의지가 없다는 말인가? '자유의지'는 없다는 말인가?

리벳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했다.

비록 운동을 유발하는 두뇌의 신호(RP)가 의식적인 의지 시점(W)보다 선행하지만, 실제 근육의 움직임 시점(M)보다는 앞선다. 우리의 의식적 의지는 이미 발생한 움직임을 중간 시점에 중단할 수 있는 자유를 갖는다. 곧 의식적 의지는 이미 진행되고 있는 움직임을 감지한 후에, 이를 지속하여 근육이 움직이게 할 것인지, 아니면 이를 중단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리벳은 의식적 의지라는 것은 반쪽 만의 자유를 갖는다는 것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거부(veto)할 수 있는 자유"이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시사하는 점은 우리가 명백하게 느끼고 있는 '내가 손을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실상은 거짓이라는 점이다. 다만, 그렇게 느껴질 뿐이다. 실제의 현상으로는 '움직이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것이 맞을 수 있다.

두뇌에 대한 연구에서 '두뇌가 하는 거짓말' 사례는 수 없이 많다. 리벳의 실험결과도 그런 사례를 보여주는 일례에 불과할 정도이다.

리벳의 실험에 대해 그 실험내용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다만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리벳의 실험방법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리벳의 실험이 처음 발표된 것은 1985년이었다.

월터의 실험 - 저절로 전환되는 슬라이드 화면

리벳의 실험 이외에 관련된 내용의 다른 사례도 있다.

1963년 영국의 뇌수술 의사인 윌리엄 그레이 월터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 바 있다.

이 환자들은 치료의 목적으로 두뇌의 운동중추신경 부위에 전극을 이식한 상태였다.

환자 앞에 환등기 슬라이드를 설치하고 환자가 원하는 아무 때나 환등기에 연결된 버튼을 눌러 다음 슬라이드 화면으로 전환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환자들이 모르게 환자의 버튼이 아니라, 환자의 뇌에 연결된 전극의 신호를 증폭하여 이 두뇌의 신호에 의해 슬라이드 화면이 다음으로 넘어가게 장치했다.

그 결과 환자들은 깜짝 놀랐다. 다음 슬라이드를 보려고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슬라이드가 저절로 다음으로 넘어갔다고 환자들은 말했다.

이 환자들에게 슬라이드가 마치 자신들의 의지를 미리 읽어서 미리 다음 슬라이드로 스스로 넘기는 것처럼 경험했을 것이다. 이 역시 환자가 의식적으로 슬라이드를 넘기려고 하기 이전에 이미 두뇌의 운동신경에서는 활동이 시작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이 실험에서는 이미 시작된 두뇌의 신호에 의해 손이 반응하기 이전에, 슬라이드 시스템이 먼저 반응하여 동작한 것이었다.

이 역시 리벳의 실험에서와 같은 사실을 드러내 준다. 사람이 의지를 내는 듯한 그 순간 이미 그것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사실이다.

의식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

"브레인 스토리"의 저자인 수잔 그린필드는 책에서 리벳의 실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P.303)

"이 발견은 놀라운 사실을 내포한다. 무언가를 하려는 의도가, 뇌가 이미 그것을 하기로 결정한 다음에 발현되다면, '당신'이 결정하기 전에 '뇌'가 결정을 한다면, 우리의 행위는 자유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잠재의식적 과정에 의해 인도되는 셈이다. '당신'이라는 관념, 다시 말해 당신 머릿속에 존재하는 개인은 어쩌면 뇌가 보여주는 가장 그럴듯한 속임수인지도 모른다. 진짜 지배세력은 잠재의식인데도 뇌는 의식적 자아가 행동을 지배한다는 환상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수잔의 말을 믿고, 진짜 지배세력이 잠재의식이라고 단정해버리는 것은 성급하다. 아직은 논쟁 중에 있으며, 더욱 밝혀야 할 사항들이 많이 남아 있다. 잠재의식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아직 그 실체가 없다. 두뇌에는 전체를 통제하는 어떠한 통제센터도 존재하지 않는다. 두뇌는 여기저기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뇌세포의 무수한 신호들만이 쉴 새 없이 깜박이고 있는 세계이다.

의식에 대한 과학자와 학자 중에는 '의식이나 자아는 허상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아직은 어떤 가설도 확증 된 것이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으로 결론짓게 하는 실험과 현상들은 분명 존재하고 있다.

의식에 대해 접근할 때, 수정하거나 버려야 할 개념이 너무 많다. 상식적으로 믿고 있던 개념들이 그 실상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방해가 되고 있는 것이라는 주장 또한 많다.

※ 이 글에서의 리벳 실험과 월터의 실험 내용은 <"Consciousness", Susan Blackmore>에서 참조했음.


[출처] 과학에서 말하는 의식 - 리벳의 실험, 월터의 실험|작성자 저스틴

2014년 2월 27일 목요일

왓츠 앱, 페이스 북

개인적으로는 처음 온라인 통신을 했던 것이 1995년이니까, 벌써 球歷이 얼추 20년은 되어간다. 가장 초기적인 SNS 형태부터 경험했던 셈이다. 한국만 놓고 보자면, 그 뒤로 온갖사이트들이 들불처럼 번지다 사라져갔다. 그 중에는 열렬한, 충성스러운 독자층을 가진 사이트들도 많았다. 그러나 모두의 공통점이라면,

(1) 어떤 형태로 발을 맞춰나가든지 간에 재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소통형태를 계속 포괄할 수는 없다. 이야기 방식은 너무 빨리 바뀌며, 늘 새로운 것이 등장한다. 인터넷 이후의 인간의 의식은 차별화에 목숨을 걸고 있기 때문에 불과 몇년 사이의 집중과 분산의 속도는 과거의 수백년에 해당할 만큼 빠르다.

(2) 한국에서는 어떤 사이트도 유료화로는 성공한 적이 없다. 아무리 열성적인, 중독된 독자라고 할지라도 유료화 앞에서는 모래알처럼 흩어진다. 특수한 경제 집단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한, 유료화는 불가능한 모델이며, 특히 무료화에서 유료화로의 전환은 자살행위에 속한다(I love school을 생각해보자). 따라서 인터넷에서의 소통 방식은 보편적 무료화와 특수적 유료화 사이에서 진동한다.

보편적 무료화의 가장 대표적 모델은 포탈 사이트다. 이들은 소비자(독자)에게서 이익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의)공급자에게서 매출을 얻는다(광고 방식). 반면 이 보편적 공간을 유료화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소비자들이 그것을 public channel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같은 반응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아무도 말할 공간을 얻기 위해 돈을 지불하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담화 행위의 근본적 성격에 위배된다). 물론 이같은 한국의 경험이 해외에서도 모두 통용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본다면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타겟 독자층, 수익 모델, 운영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FaceBook이 WhatsApp을 190억 달러에 인수한다고 발표했을 때, 시장의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엇보다도 도대체 190억 달러라는 인수가격 산정의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했었다. 왜냐하면 WhatsApp의 지난해 매출은 2000만 달러였기 때문이다. 고맙게도 Sterne Agee의 애널리스트인 아르빈드 바티아와 브렛 스트라우저가 WhatsApp의 사업성을 수치로 제시했다. 일단 이들이 추정한 사업전망부터 보자.

어...그러니까 오는 2023년에는 WhatsApp의 사용자 숫자는 올해는 7억 1900만명으로 늘어나고, 2023년에는 23억 2900만명에 달할 것이다(이들에 따르면). 일일 평균 신규 사용자 증가율은 올해는 0.8%씩 증가하며, 2023년에도 여전히 0.3%씩 증가한다. 전체 사용자들 가운데 유료 독자(paying users)는 올해는 20%에서 2023년에는 70%에 달할 것이며, 유료 독자의 1인당 매출은 올해는 연간 1달러에서 2023년에는 3달러로 증가할 것이다. 따라서 영업이익률은 무려, 올해는 50%, 그리고 10년 뒤에는 80%에 달한다. 총매출은 지난해에는 2천만 달러에 불과했지만, 올해는 1억 4400만 달러, 그리고 2023년에는 48억 9100만 달러가 된다. 이 쯤되면 누워서 떡먹기 장사다. 사업 전망에 비한다면야, 인수가격 190억 달러는 헐 값이다.

잠깐, 아직 유료화하지 않았잖아? 그렇다. 사용자는 가입 첫 해는 무료이며, 둘재 해(그게 올해다)부터 연간 99센트를 지불하게 되어 있다. Apple을 쓰면 10년간 무료다. 2023년에는 사용자수가 23억명이라고? 그렇다. 2023년에는 세계 인구가 80억명쯤에 달할 것이기 때문에 전세계 인구 네 명중의 한 명은 WhatsApp을 쓸 것이다. 유료화하면 독자들이 떨어져나가지 않을까? 연간 1달러인데, 뭐. 껌 값이다. 그 정도야 부담할 것이다. 통신사를 통해 문자 보내는 것보다야 싸지 않은가?

이걸 믿으라고? 주커버그가 믿고, 시장이 믿고 있지 않는가. WhatsApp은 기본적으로 과거 시대의 유물, 즉 유료 메시지 전송 시대의 산물이다. 유료화 계획을 제외하면, 그 운용 방식은 한국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카카오톡과 다르지 않다(기술적 차별성은 거의 없다). 만일 카카오톡을 유료화한다고 하면(예컨대 연간 회비 1000원), 그 결과는 어떨까? 카카오톡은 이 장래가 창창한 수익을 왜 아직 걷어들이지 않고 있을까?(더구나 WhatsApp에는 없는 voice 기능까지 있는데도)한국에서도 Naver의 Line이 (소프트뱅크로부터의) M&A설을 핑계로 건, 아니면 WhatsApp과 동일한 꿈을 꾸고 있어서 건 간에, 주가가 하늘 모르고 치솟고 있다. 인간들은 대화화기 위해 돈을 지불하게 될까? 그렇다면, 그것은 인류 역사에서 새로운 장일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지난 수천년 동안 공짜로 말하기 위해서(free speech) 목숨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 글로벌 모니터, 이공순 기자 - 

스파게티 소스에 관하여(2004년)


저는 지금 어떤 분에 대해 말씀드릴려고 합니다. 제 생각에는 지난 20년동안 미국인을 이분만큼이나 행복하게 했던 분도 드물거예요. 하워드 모스코위츠 씨입니다. 스파게티 소스를 재발견하신 분이예요. 직업은 정신물리학자입니다. 그게 뭔지는 사실 저도 전혀 모릅니다. 제가 알기로는 정신물리학은 인간의 정신을 측정하는 학문이고, 하워드도 측정하는 데 아주 관심이 많았어요. 하버드에서 박사를 딴 그는 뉴욕 화이트 플레인즈 지역에 기업을 위한 작은 컨설팅 회사를 세웁니다.

70년대 초반에 그의 초창기 고객사 중 하나가 펩시였습니다. 펩시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스파탐'이라는 달콤하면서도 열량이 작은 물질이 있는데, 이걸로 다이어트 펩시를 만들까 합니다. 함량을 고민중이에요.' 굉장히 직설적이고 쉬운 질문이죠. 펩시는 아예 대놓고 '8~12%사이에서 고민중입니다. 8%이하는 싱겁고, 12%이상은 너무 달거든요'라고 물었습니다.

만약 제가 이질문을 여러분에게 한다면 모두들 간단하게 답하실 겁니다. 실험이죠. 아스파탐 함량을 8%에서부터 12%까지 등급별로 세분화하여 수천명에게 테스트한 후 선호도를 조사하고 그래프로 나타냅니다. 그중 삐쭉 튀어나온 가장 인기 있는 함량을 고르면 되죠. 정말 간단합니다. 하워드도 동일하게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삐쭉 튀어나올 것으로 예상한 종형곡선(bell curve)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과에는 전혀 일관성이 없었어요. 측정할때마다 값이 달랐습니다. 대부분의 식품업계 관계자들도  이 데이터를 보고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적정한 콜라 농도를 알 수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물론 실험이 잘못됐을 수도 있구요. 펩시는 그간의 경험으로 그량 10%중간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하워드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뭐가 잘못되었을까? 왜 이해할 수 없는 데이터가 나왔을까? 그러던 중 그는 어떤 식당에서 네스카페가 의뢰한 일을 생각하던 차에 번뜩이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질문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었죠, 즉, 완벽한 펩시(pepsi)가 아니라 결과는 말그대로 다양하게(pspsis)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못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결과적으로 엄청난 발견이었으며 이후 식품시장 마케팅을 변화시킨 엄청난 변혁의 시발점이었습니다.

하워드는 당장 펩시사에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완벽한 펩시를 찾으려고 했죠? 틀렸어요! 완벽한 펩시는 여러 개일수 있어요!” 여러분이 펩시의 임원이라면 뭐라고 했겠습니까? “그래서요? 어쩌자는 겁니까?” 하워드는 자신의 통찰을 사람들에게 말해주려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마침네 그와 이야기가 통한 블래식 피클이란 회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확히 펩시와 똑같이 물었죠 “하워드 씨 우리는 완벽한 피클을 만들고 싶습니다.” 하워드는 물론 “완벽한 피클은 하나가 아닙니다 여러 개예요. 지금 있는 피클을 개선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전혀 새로운 맛의 피클을 만들어야 해요”라고 답했습니다. 이것이 톡 쏘는 피클의 유래입니다.

다음 고객은 캠벨 스프 회사였습니다. 80년대 초반 캠벨 사는 라구에 대항할 프레고 라는 스프를 만들었습니다. 라구는 70~80년대를 주름잡던 스파게티 소스 브랜드인데 사실 품질로만 따지자면 프레고가 라구보다 좋은 토마토 소스입니다. 사용한 토마토 반죽도 훨씬 좋고, 양념의 혼합률도 뛰어나서 파스타와 잘 아울립니다. 두 회사의 소스를 스파게티가 담긴 그릇에 부었을 때 라구 소스는 바닥에 고였고 프레고는 스파게티 위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프레고는 고전을 면치 못했고 하워드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하워드는 캠벨의 요리사와 함께 45가지의 스파게티 소스를 만들었습니다. 상상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익숙한 것부터 말도 안되는 것까지 다양한 소스를 창조해냈습니다. 단맛, 짠맛, 톡쏘는 맛, 신맛, 토마토 덩어리의 크기 정도에 따라서 그리고 길거리로 나갔습니다. 뉴욕, LA, 잭슨빌, 등등 그리고 사람들에게 맛보고 평가하게 했습니다. 여러달에 걸친 실험결과 미국인의 스파게티 소스 선호도에 대한 광범위한 데이터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인기있는 소스를 찾았을까요? 아뇨! 하워드는 그런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죠. 대신에 그는 특징에 따라 사람들의 선호도 데이터를 그룹지어보고자 했습니다. 결과 세그룹으로 나눠졌습니다. 맵고 강한 맛을 좋아하는 그룹, 평범한 것을 선호하는 그룹, 그리고 과육 덩어리가 많은 것을 선호하는 그룹이었습니다. 그중 세번째 그룹이 가장 의미있었습니다. 왜냐면 1980년데 슈퍼마켓에는 과육덩어리가 많은 스파게티 소스는 없었거든요. 프레고는 하워드에게 “아니 덩어리가 많이 든 스파게티 소스를 원하는 사람이 1/3이나 되는데 이런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아직 없다는 건가요?” 프레고는 완전히 새로운 스파게티 소스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덩어리가 든 제품군을 출시했고 이 제품들은 순식간에 미국 스파게티 소스 시장을 평정하게 됩니다. 그 후 10년간 덩어리 소스는 60억 달러를 벌어들였습니다.

업계는 이 사건을 목격하고 뭔가를 깨닭게 됩니다. 이 사건이 7종의 식초과 14종의 머스터드, 71종이 올리브유에 대한 선택권이 생긴 발단입니다. 나중에는 경쟁사인 라구에서도 하워드를 고용했습니다. 오늘날 큰 슈퍼마켓에 가면 36개나 되는 라구 제품이 팔리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총 6개의 그룹으로 나뉩니다. 치즈맛, 가벼운 맛, 감칠맛, 기름진 맛, 전통적인 맛, 덩어리가 많은 제품(!)까지.

이게 하워드가 우리에게 준 선물입니다. 허워드는 기업이 고객에 대해 생각하는 생각 근본을 바꿨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뭘 먹고 싶어하는지 당연히 그 사람에게 물어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레고와 라구도 마찬가지로 생각했죠. 모니터 그룹을 모으고 “어떤 스파게티 소스를 원하시나요? 여러분이 선호하는 것을 알려주세요”, 20~30년동안 모니터 그룹 중에 덩어리가 많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실제 미국인의 1/3이 그걸 원했는데도 말이죠. 사람들은 사실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도 모른다는 겁니다. 이상하죠? 제가 만약 여기 계신 분들에게 어떤 커피를 원하시냐고 묻는다면 모든 사람들이 “깊고 진하며 풍부한 맛을 원한다”고 말할겁니다. 실제로 여러분 중 몇 퍼센트가 깊고 진하며 풍부한 맛의 커피를 원할까요? 하워드에 따르면 25%전후라고 합니다. 나머지 대부분은 우유가 든 연한커피를 좋아한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어떤 커피를 원하냐고 물었을 때 “우유가 든 연한 커피가 좋아요”라고 대답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워드의 또다른 업적은 우리가 고객 세그멘테이션이라는 특성을 일깨워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1980년대의 식품업계사고와는 상반된 것입니다. 당시 소스업계는 머스타드 소스에 사로잡혀있었습니다. 일반 머스터드는 8온스 병에 1.5달러를 받는 대신에 포장만 고급스럽게 바꾸고 먹으면 부유해진다는 느낌을 주는 광고를 하는 네덜란드 식은 4달러를 받기도 했죠. 식품업계는 당연히 사람들이 좀 더 비싸고 열망할만한 제품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만족하고 있는 현재의 제품을 떠나 더 비싼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죠. 좀 더 세련되고 교양있고 의미있는 머스터드 말입니다. 그런데 하워드는 이게 틀렸다고 말합니다. 머스터드나 토마토 소스 세계에 위계질서 따위는 없으며 모두 수평적인 군집(segmentation)으로 나눠져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위계가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없으며 사람들은 단지 서로 다른 입맛의 여러 머스터드를 원한다는 것이죠. 맛에 대한 사고를 민주화시킨 것입니다. 100명의 사람에게 한가지 커피를 주고 100점 만점에 점수를 메기라고 한다면 60점 넘기기가 힘듦니다. 그러나 4개의 유사한 선호를 가진 그룹으로 나눠서 그에 맞는 4가지 커피를 제공하면 점수가 78점까지 올라갑니다. 이는 커피를 먹고 나서 기분이 그저 그러하냐와 아주 괜찮느냐를 구분할 만한 수준입니다.

하워드의 마지막 업적은 이상한 음식이라는 개념에 맞섰다는 것입니다. 식품업게는 어떤 요리던 완벽한 하나의 요리법이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요리사의 조리법에 대해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요리사들은 완벽한 하나의 자신의 요리법에 병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이래야한다는 방식말입니다. 식품회사도 똑같습니다. 토마토 소스의 원조는 이태리입니다. 이태리 토마토 소스 보셨나요? 아주 묽어요. 원조는 묽습니다. 1970년대 라구 제품이 정확히 원조대로 만들었습니다. 스파게티에 부으면 바닥에 가라앉습니다. 원조를 제공하면 사람들이 행복해할거라고 생각한 것이죠. 보편성이라는 과학개념에 따른 이것은 19~20세기 모든 분야를 휩쓸었습니다. 심리학자, 의학자, 경제학자들도 인류의 행동을 다스릴 수 있는 규칙에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20~30년간 이러한 관념은 변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취향에 대한 존중에 그에 따른 소비자의 행복이 늘어난다는 것. 이것은 단순히 스파게티 소스를 개발하고 기업에 수익을 가져다주는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 말콤 글래드웰 -

본성을 바꿔버린 거야

안녕 제임스, 섬이 마음에 드나?
내 할머니께서 섬을 하나 가지고 계셨는데
뭐 별로 크지 않은 섬이었지, 걸어서 한 시간이면 다 둘러볼 수 있었어
하지만 나에게는 낙원같은 곳이었지

어느 여름날에 섬에 놀러갔었는데
아이구야, 섬 전체가 쥐들로 들끓지 뭐야?
정말 잡기 힘들었어 쥐덧도 놔보고 고양이에 쥐약에... 다 쓸모없었지
그런데 석달만에 쥐를 다 없애버린거야 어떻게 없앴는지 아나?
할머니가 내게 보여주셨지

텅빈 드럼통을 땅에 묻고 뚜껑을 제거한 후 안에 코코넛을 미끼로 넣어두었지
그럼 쥐들이 코코넛을 먹으러 와서 드럼통안에 빠져 수백마리가 바글바글하지
그러고 나서 그 통을 바다에 던져? 불태워? 뭍어버려? 아니 천만에, 그렇게 해봐야 몇달 뒤면 다시 쥐로 들끓는건 변함없어

드럼통을 그냥 내버려 두는거야 그럼 그놈들이 배가 고파져서 서로를 잡아먹는거야 암수 단 두 마리가 남을 때까지.....생존한 두 마리 그러고 나서 어찌되었을까? 그 두마리를 죽였을까? 아니야 쥐가 많은 숲에 풀어 놓는 거야 이제 그것들은 더이상 코코넛을 먹지않아...

쥐만 잡아먹을 뿐이지
본성을 바꿔버린 거야

- skyfall

2014년 2월 25일 화요일

기나긴 시간과 우주의 시작



우주는 아주 거대합니다. 말할 것도 없죠. 왜 우주는 이렇게 생겼을까요? 우주는 팽창합니다. 과거에는 원자보다도 작은 점에 모여있었죠. 우주가 매우 균일했다는 것은 정말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균일했어요. 아주아주 균일하지 않았다면 바로 블랙홀로 압축되서 지금처럼 되지 않았을거에요. 아주 섬세하게 배치된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이렇게 섬세하게 배치한 것은 누가 그렇게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그 이유를 매우 궁금해했습니다. 다행히도 19세기 오스트리아 물라학자 루트비히 볼츠만이 '엔트로피' 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이 문제의 답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엔트로피는 무질서도를 의미합니다. 우주는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이유는 감소하는 것보다 증가하는 것이 훨씬 확률적으로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화살'이라는 시간의 흐름이 엔트로피의 증가에 의해 발생합니다. 그러나 그는 엔트로피가 우주 초기에 왜 작았는지를 말해주지 못했습니다. 19세기니까요.

이 문제를 처음 제기한 사람은 리처드 파인만 이었습니다. 그는 계속 질문했습니다. 왜 우주 초기의 엔트로피는 그렇게 작았을까? 파인만이 이 질문을 50년 전에 던졌지만 아직까지 그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어려워졌습니다. 1998년 허블 우주망원경을 통해 과학자들은 놀라운 사실을 밝혀냅니다. 즉, 우주의 팽창 속도가 느려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반대로 팽창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던 것이죠. 그 이후의 많은 관측을 통해서 과학자들은 우주의 빈 공간 자체가 우주를 서로 밀어내는 에너지를 내뿜는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것을 '암흑 에너지(dark energy)' 라고 이름붙였습니다.

만약 암흑에너지가 존재한다면 우주는 무한히 팽창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빈공간은 비어있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습니다(양자요동). 우주공간은 마치 가스가 스며나오는 거대한 상자같은 것입니다. 지금 이 교실에서 공기가 갑자가 한곳으로 몰리면 여러분은 질식하겠지만 그럴 확률은 매우 낮습니다. 그러나 그 확률이 0은 아니죠. 우주는 아주 크고 아주 오래됐으며 무한에 가깝게 존재할 것입니다. 빈공간의 양자적 요동이 우주의 한곳에 균일하게 모이는 사건이 발생할 확률 역시 0이 아닙니다.

볼츠만은 이러한 전 우주적 사건이 아주 가끔 일어난다고 생각했으며 생명현상도 그러한 과정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칼 세이건은 애플파이를 만들려면 먼저 우주를 만들어야한다고 했지만 볼츠만에 따르면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이러한 사건은 아마도 10^10^120년 의 기간동인 일어날 것입니다.

우주의 엔트로피가 왜 처음에 낮았고 우리는 왜 지금 여기에 있냐고요? 가능한 답 첫째는 그냥 그렇다고 받아들이고 묻지 않는것입니다. 두번째로 가능한 답은 빅뱅이 시작이 아니라는 것이죠. 우주라는 알은 우주 닭이 낳은 것일지 모릅니다. 우주가 매우 거대한 멀티버스의 하나라는 것이죠. 감사합니다.

- 션 캐롤 -

50이 넘어서야 이해되는 말들

1. 인생은 운칠기삼이고 여기서 운은 운명적인 만남.

2. 인생에서 제일 안 좋은 것이 초년성공, 중년상처(喪妻), 노년빈곤이라는 것.

3. 회사 다닐 때는 절대 그 이후를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

4. 만나는 사람마다 회사 명함을 뿌리지만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

5. 잘난 사람보다 약간 무능한 사람이 회사를 오래 다닌다는 사실.

6. 무엇이던 20년은 해야 겨우 전문가 소리를 듣는다는 것.

7. 회사나 업계의 인맥은 떠나면 3% 정도 밖에 안 남는다는 것.

8. 회사에 받는 월급은 내가 회사에 공헌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기회손실에 대한 보상으로 받는다는 것.

9. 인생은 생각대로 안되지만 그 맛도 괜찮다는 것.

10. 수십 년 만에 학교 졸업 모임을 나가보면 인생역전이 많다는 것.

11. 결국 남는 것은 사진, 자식, 자기가 만든 컨텐츠이며 아내는 아니라는 것.

12. 남자는 40대 초반에 착각과 자뻑이 제일 심하고 40대 후반부터 급속하게 비겁해진다는 것.

13. 사람들의 추억이이나 기억은 매우 부정학하다는 것. 그리고 조직(회사)은 기억력이 없다는 것.

14.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는 사람들의 관계에서 영양가를 따지는 것.

15. 인생에서 행복해지려면 두 가지를 해야 한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기대감을 낮추는 것. 두번째는 스스로 엉뚱하고 무모한 꿈으로 떠나는 것.

16. 다음의 5가지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입 밖에 낸 말, 쏴버린 화살, 흘러간 세월, 놓쳐버린 기회, 돌아가신 부모님.

2014년 2월 22일 토요일

On Liberty - J.S. 밀

1. 밀의 공리주의의 사상적 근간 - 자유


우리는 밀의 공리주의를,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와 구별하여 ‘질적 공리주의’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을 잘 드러내 주는 말이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라는 밀의 유명한 말이다. 그러나 공리주의에 대한 밀의 입장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그의 ‘공리주의’의 사상적 근간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공리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자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자유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합리적인 결과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밀의 생각은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런 점에서도 우리는 밀이 말하는 ‘자유’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자유론(On Liberty)>에서 밀이 주장하는 기본적인 자유는 양심의 자유 즉 사상과 감정의 자유, 취미와 직업의 자유, 단결의 자유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는 그 사회가 어떤 종류의 사회이건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다. 밀은 이와 같은 자유들이 ‘행복 추구의 자유’로 귀결된다고 보고, 자유라는 이름에 걸맞는 유일한 자유를 ‘우리들 자신의 방법으로 우리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유’ 라고 주장한다.


2. 사상과 토론의 자유


밀은 자유를 이와 같이 규정한 후에 <자유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사상과 토론의 자유’에 대해 제 2장에서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만일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같은 의견인데 단 한 사람이 그것에 반대하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류가 한 사람을 침묵케 하는 것이 부당한 일임은, 그 한사람이 힘을 가지고 있어서 인류를 침묵케 하는 것이 부당한 것과 완전히 같은 것이다.


이 말 속에는 다수결의 원칙이 항상 좋은 것이 아니라는 뜻도 담겨 있다. 아니, 더욱 정확히 말하면 밀은 절대자에 의한 언론 통제보다 모든 일을 다수결의 원칙으로 해결하려는 다수파의 언론 탄압이 더욱 나쁘다고 보고 있다. 왜냐 하면 그와 같은 행위는 창조적인 소수의 의견을 말살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상과 토론의 자유가 세론(世論)과 무관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밀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만일 다른 사람의 의견이 바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억압한다면 우리는 진리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된다. 그리고 그 의견이 틀린 것이라 하여 그것을 억압한다면 우리는 그 논쟁 속에서 얻을 수 있는 한층 더 명확한 진리를 알 수 없게 된다.


결국 의견 발표를 억압한다는 것은 전 인류에게서 행복을 빼앗는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누구의 의견이 옳던 그르건 토론을 통해 그 진리성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 밀의 기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3. 행복의 하나의 요소로서의 개성


<자유론>제 3장 ‘행복의 하나의 요소로서의 개성’ 에서 밀은 “독창성이 인간 사회에서 하나의 귀중한 요소임”을 지적하고 있다. 천재는 자유라는 분위기 속에서만 자유로이 호흡할 수 있기 때문에 밀은 독창성을 지닌 천재들을 확보하기 위한 토양 마련을 위해서라도 자유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천재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더 많은 개성을 지니고 있다. 자유가 없다면 천재는 개성을 발휘할 수가 없다. 천재가 사회에 기여하는 바를 생각한다면 사회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자유는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이 말에서도 우리는 자유가 행복을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 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본질적인 자유가 있다. 그러나 개인의 행복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행복을 위해 그러한 자유가 필요하다고 해도,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무조건적인 자유를 허용할 수는 없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자유는 엄청난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제약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우선 서로의 이해를 침해하지 않아야 하며 다음으로 사람들은 사회와 사회 구성원들을 외부의 위험이나 간섭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자기 몫의 일을 해야 하며, 자기 몫만큼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따라서 사회는 이 두 조건을 이행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이행을 강제할 수 있다. 밀은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다.”라고 말한다.


4. 개인에 대한 사회의 권위와 한계


<자유론> 제 4장 ‘개인에 대한 사회의 권위와 한계’에서 밀은 위와 같이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다음과 가은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리석은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의 말과 행동을 막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대로 두어야 하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어리석은 말이나 행동이라고 해도, 심지어는 그 자신이 엄청난 손해를 보는 말과 행동이라고 해도,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만 않는다면’ 그것을 허용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억제든 억제는 그것이 억제라는 점에서 하나의 악이다.” 따라서 사회 역시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의 이해를 침해하거나 사회의 존립을 해치는 행위가 아니라면 사회 구성원들을 억압하거나 탄압해서는 안 된다.


이런 생각을 밀고 나가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정부의 역할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 사회는 행복한 사회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개인은 자연권적 권리로서의 자유 및 소유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어떤 사람이나 집단도 그에 대해서 함부로 행할 수 없는 것이 있다.”라는 ‘소유권적 정의’를 주장하는 노직(R. Nozick)과 같은 자유주의자도 마찬가지이다. 현대의 자유주의자들도 밀이 ‘자유론’에서 말하는 기본적인 이념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밀의 자유주의에 대한 옹호가 그의 ‘공리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도 결국은 개인의 자유로운 결정을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5. 자유론의 의지


밀의 <자유론>은 사회와 집단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개인의 가치, 더 나아가 개인이 향유해야 할 자유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 주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이것은 밀이 개인보다 사회와 집단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꾸짖는 듯한 경고의 말로 <자유론>을 마무리하고 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 말을 밀의 <자유론>을 소개하는 이 글에서도 결론 대신 사용해도 좋을 듯하다.


한 국가의 가치는 궁극적으로는 그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들의 가치이다. 개인들의 정신적 확충과 향상이라는 이익을 무시하고 세세한 사무를 처리하는 능력, 혹은 경험에서 얻게 되는 사이비 재능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를 원하는 국가, 또는 국민을 위축시켜 국민을 자기 손으로 좌우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국민이 위축되어 있다면 어떠한 위대한 일도 성취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국가가 모든 것을 희생시켜 이룩해 놓은 완전한 관료 기구도, 그 기구의 원활한 운행을 기하기 위해 배제해 버린 바로 그 활력의 결여 때문에 결국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금융투기의 역사 - 에드워드 챈슬러

1장. 거품으로 만들어진 세계 : 금융버블의 기원

로마는 국가기능 가운데 조세징수에서 신전건립까지 상당부분을 퍼블리카니(Publicani)라는 조직에 아웃소싱하였다. 퍼블리카니는 현재의 주식회사처럼 파르테스(partes, 주식)를 통해 소유권이 다수에게 분산된 법인체였다. 집행임원들이 이 조직의 업무를 수행하였고, 재무제표도 공시하였으며 주주총회도 정기적으로 개최하였다.
주식은 두가지가 있었는데, 당대의 부자들로 구성된 집행임원들의 목(socii)과 일반인들로 구성된 소액주주의 몫(particulae)으로 나뉘어 있었고, 소액주주들의 주식은 요즘의 장외시장과 같은 곳에서 비공식적으로 거래되었다. 27

도시국가 채권의 매매는 14세기 이후 베니스뿐만 아니라 플로렌스와 피사, 베로나, 제노바까지 확산되었다. 도시국가들은 주식(loughi)을 발행해 조달한 자본으로 세워진 회사(monti)들에 징세업무를 위탁하였는데, 이 초기 주식 회사는 로마의 퍼블리카니와 너무나 비슷했다.

16세기 후반 프랑스 정부는 자유도시 인근 호텔에서 채권 등 각종 증권을 매매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는데, 이는 유럽 최초로 정식 인가된 거래소이다. 31

네덜란드 상인들은 기존의 은행이나 복식부기, 환어음, 주식회사 등과 같은 금융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중요 시스템들을 상업경제의 튼튼한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미래시점에 확정된 가격에 상품을 인도하기로 하는 선도 거래가 일반화되었고, 16세기 이후에는 선도거래 대상이 곡물뿐만 아니라 고래기름, 설탕, 구리, 이탈리아산 비단 등으로 다양해졌다.
이때 주식을 미래시점에 정해진 가격에 사거나 팔 수 있는 권리를 매매하는 옵션거래도 시작되었다. 17세기 후반에는 액면 분할주가 탄생했는데, 동인도 회사의 주식이 분할되어 보통주의 10분의 1 가치에 거래되었고…
그들은 유가증권을 담보로 대출해 주식에 투자하는 차입투자의 개념도 터득해,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물론 주가가 떨어질 때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34 35

꽃이 만개할 때까지 무늬와 색깔을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는 점이 튤립투기의 우연성을 극대화 해주었다. 튤립뿌리가 어떤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뿌리가 황제튤립을 터트릴 수도 있었고, 평범한 꽃잎을 터트릴 수도 있었던 것이다. 43

당시 튤립가격 정보지들은 튤립 한 뿌리를 위해 지불한 2,500길더로 27톤의 밀과 50톤의 호밀, 살찐 황소 4마리, 돼지 8마리, 양 12마리, 포도주 2드럼, 맥주 2큰통, 버터 10톤, 치즈 3톤, 린넨 2필, 장롱하나에 가득 찬 옷가지, 은컵 1개 등을 살 수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47

튤립투기의 갑작스런 종말이 네덜란드 경제를 위기에 몰아 넣지는 않았다. 이 나라 경제를 좌지우지 했던 거상들은 튤립공황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서민들은 그렇게 운이 좋지 않았다. 집을 저당잡히고 가재도구를 팔아 일확천금을 노렸던 그들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을 입었다. 48
일확천금 바람이 한 차례 네덜란드를 휩쓸자 노동을 성스럽게 여긴 칼뱅주의적 전통도 무너져내렸다. 49


2장. 1690년대 주식회사 설립 붐

영국 증권시장의 등장은 17세기 후반에 발생한 금융혁명 가운데 하나였다. 금융혁명은 윌리엄 오렌지 공이 카톨릭 황인 제임스 2세의 왕관을 차지하게된 명예혁명이 발생한 1688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기 금융혁명은 주식시장 출현뿐만 아니라 ‘국가채무’에 대한 의회의 지불보장(1693년)과 발권력을 보유한 영란은행의 설립(1694), 재무성 채권발행(1696년), 약속어음에 관한 법 제정(1704년)등 일련의 사건들을 의미한다. 65

1687년 뉴잉글랜드 호의 선장 윌리엄 핍스가 히스파니올라 섬 부근에 침몰한 스페인 해적선에서 건져올린 은 32톤과 상당한 양의 보석들을 싣고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왕과 선장, 선원들은 자신들의 몫을 채긴 뒤 남은 19만 파운드를 1만%의 배당금 형태로 항해를 지원했던 파트너들에게 배분했다.
그들의 성공적인 귀환은 영국 전역에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사정이 이쯤되자 너나할 것 없이 핍스 선장을 모방해 해저 유물 인양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들은 핍스선장처럼 단순히 파트너를 모집한 것이 아니라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71

약방주인 출인 커피 무역업자였던 존 휴턴은 1692년부터 <주가 정보지>를 일주일에 두차례 유료로 발행해 주가의 흐름을 규칙적으로 전했다. 76

당시 금본위 화폐를 대신해 토지를 근거로 화폐를 발행하는 토지 은행을 설립하려했던 사람들은 내재가치 개념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재라는 말은 내부의 질을 의미하지만 가치는 항상 외부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니콜라스 바본은 이렇게 주장했다. “모든 물건 안에는 어떤 가치도 없다. 그것들을 활용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사람들의 의견과 패션이다” 토지은행의 설립추진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존 로는 여기서 한 걸은 더 나아가, 가격은 단순히 수요와 공급의 상호작용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다. 이를 주식 시장에 적용하면 주가는 내재가치보다는 유동성에 의해 결정된다. 84
케인즈는 “주식시장에선 미래가 불확실 하기 때문에 주가는 투자자 자신의 믿음과 다수의 순진한 인간들의 집단심리에 의해 절대적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공중 누각이론에 따르면 주식은 내재가치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주가는 투자자들의 심리를 반영한 것일 뿐이다. 87

주식은 정경유착의 고리로 활용되었다.
그들은 당시로선 최신수법인 옵션과 주식을 결합시킨 뇌물수수를 활용했다. 상원의원 바질 파이어브라스 경은 6만 파운드 주식을 동인도회사가 독점권을 획득한 뒤 형성되는 주식가에 50%의 프리미엄을 받고 팔 수 있는 옵션을 선물로 받았다. 그는 이 덕에 3만 파운드의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다른 상원의원들은 확정가격에 동인도 회사 주를 살 수 있는 콜 옵션을 뇌물로 챙겼다. 독점권을 부여해 동인도회사의 주가가 오르면 확정가격으로 주식을 사들인 뒤 시가로 팔아 차익을 챙기는 수법이다. 89

찰스 킨들버거는 <투기적 광기와 공황, Manias, Panics and Crashes>에서 ‘투기적 광기’는 변화에 의해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 변화는 완전히 새로운 산업이 태동하거나, 기존 산업의 수익률이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변화는 주가를 상승시켜 신출내기 투자자들을 주식시장으로 끌어들이는 선순환을 발생시키고, 이에 따라 시장에 대세상승 분위기가 팽배해진다.
투자자들도 일확천금을 위해 파생상품이나 주식담보대출 등 직접적인 주식거래와는 다른 방법을 동원하기 시작한다. 또 주식에 투자하기 위해 차입금을 조달하는 바람에 한 사회의 부채규모가 증가하고, 사기와 협잡이 자리잡기 시작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경제가 어느 순간에 이르면 ‘금융 긴장’에 휩싸인다. 이 긴장은 공황을 알리는 전주곡이다. 95

버블이 끝나고 경제가 공황에 이르게 되면 정치도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미래를 보는 눈이 없는 주식꾼들과 주식회사 발기인들의 이기주의의 폐악이 드러나기 때문에 자유방임주의는 ‘주식시장과 무역에 일정한 규제를 해야 한다’는 쪽으로 변한다. 99


3장. South Sea 음모

1711년 1,000만 파운드의 정부부채를 떠안기 위해 South Sea사가 설립되었다. 정부의 채권을 이 회사 주식으로 전환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대신 사우스 시는 정부로부터 받는 매년 일정한 이자와, 라틴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와의 독점무역권을 보장받았다. 그리고 2~3년 뒤에는 라틴 아메리카의 흑인노예를 독점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권리도 부여받게 된다. 103

블런트는 프랑스 미시시피의 존 로의 수법을 모방해 청약시 필요한 증거금(공모에서 신청한 전체 주식대금 가운데 일정 금액을 미리 선납하는 것) 비율을 낮춰 투자자들이 청약대금의 20%만을 예치하면 주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나머지는 16개월 동안에 8번에 걸쳐 나눠내면 되었다. 여기서 블런트는 존 로의 수법 가운데 하나를 더 모방한다. 사우스 시 주식을 담보로 돈을 꿔주는 것이었다. 결국 투자자들은 사우스 시로부터 돈을 빌려 주식을 청약하고, 주식은 배정 받자마자 담보로 사우스 시에 잡히게 된 것이다. 이 수법은 적은 돈으로 많은 주식을 살 수 있게 해 서민들까지 청약대열에 끌어들여 주식 수요를 폭증시켰고, 주식은 담보로 제공되었기 때문에 시중에 유통된는 주식수는 줄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주가가 치솟게 된 것이다.
블런트는 한술 더 떠 전환에 참가한 채권보유자들에게 주식배분을 차일피일 미루는 수법으로 시장의 수급 불균형을 가중시켰다. 117

런던의 금융인들과 네덜란드 출신 자본가들은 초기 주식청약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지만, 4차 주식 청약이 실시되자 그 도박판이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이미 투기를 경험했던 네덜란드 투기꾼들은 일찌감치 보유주식을 팔아 자본을 당시 호황을 보이고 있던 암스테르담 주식시장으로 철수시켰다. 런던의 은행가들도 마지막 주식청약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처럼 노련한 투기꾼들이 버블 정점의 언저리에서 보유 주식을 팔아치우는 현상은 투기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129

졸부들은 자신의 돈을 자랑하고 다니며 고급 저택과 마차, 화려한 코트를 사들였으며, 부인이나 정부를 위해 금장 시계를 구입하기도 했다. 또 이들이 앞다투어 부동산을 사들이는 바람에 당시 런던의 건물 임대료가 50배까지 치솟기도 했다. 133

‘합리적 버블’ 논리는 ‘더 한심한 투자자들에게 모든 위험을 떠넘기는 투자행태’를 좀더 정교하게 다듬은 것 뿐이다. 투기 꾼들은 ‘더 한심한’ 투자자들이 모든 손실을 뒤집어 쓸 것이라고 기대하고, 적정가격 이상의 가격에 주식을 사들인다.
‘더 한심한 투자자’를 이용한 투자행태는 1990년대 활황을 보이고 있는 미국 주식시장에서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단지 ‘모멘텀 투자’라는 말로 그럴듯하게 포장되었을 뿐이다. 모멘텀 투자를 벌이는 투기꾼들은 지수상승보다 빠르게 치솟는 종목을 우선 사들여 상승세가 꺽이기 전에 잽싸게 팔아치워 수익을 챙긴다. 150


4장. 1820년대 이머징마켓 투기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폐되고 프랑스와의 사이에 평화가 찾아오자, 영국정부의 채권발행량도 줄기 시작했다. 투기 대상 자체가 사라지자 투기꾼들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남미국가들의 채권은 이자율이 높아 연 5% 이상의 이자를 금지하는 당시 영국법 아래에서는 발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채권을 발행한 뒤 영국으로 들여오는 수법이 이용되었다. 정부의 각종 규제를 피하기 위해 애용되고 있는 요즘 역외펀드의 초기 사례인 셈이다.
남미 채권값은 엄청난 비율로 할인되어 팔려나갔고, 이로 인해 매수자는 높은 이자수익 뿐만 아니라 턱없는 시세차익까지 얻을 수 있었다. 또 소액의 증거금만 있으면 채권 청약에 참여할 수 있었고, 나머지 대금은 장기간에 걸쳐 분할 납입하면 되었기 때문에 개인투자자들의 선풍적인 관심을 끈 것이다.
원금으로 이자를 지금하는 ‘폰지 파이낸스(Ponzi Finance)’가 당시 남미 신생국가들의 지독한 자금난에도 불구하고 만기 상환이 가능할 것이라는 환상을 투자자들 사이에 불러일으켰다. 159

이 시기 벤처기업들도 투기열풍을 이용해 자본이익을 얻는 것 외엔 별다른 목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주가를 끌어올려 주식을 사도록 대중들을 유혹하는 것이고, 모든 투자자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한 당시 소설속의 발기인의 말은 그 시대 벤처기업인들의 욕망을 숨김없이 표현한 것이다. 167

벤처기업인들은 자사의 지명도를 높이기 위해 의회 의원이나 귀족들을 ‘얼굴 마담’으로 영입했다. 169

당시 영국정부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투기에 대한 규제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데 실패했다.
‘투기라는 악마는 그것을 억제할 방안을 마련하기가 힘들지라도 마땅히 억제되어야 할 존재다. 하지만 공동체 발전에 큰 기여를 하는 기업가 정신을 저하시키는 투기대책은 투기보다 더 해롭다.’

본디 경기 순환은 투기보다는 흉작과 전쟁, 정부의 재정위기 등으로 발생한 공황과 관련이 있었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자본주의 경제가 좀더 발전하자, 경기순환의 원인이 농업과 재정 부침에서 신용의 팽창과 수축으로 바뀌었다.
버블이 한창일 때 무제한적인 신용창출은 자산가치를 치솟게 만들었고, 또 적정가격 이상으로 치솟은 자산을 담보로 과도한 신용창출이 발생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존 스튜어트 밀에 따르면, 주기적인 경제호황의 씨앗은 직전에 발생한 공황시기에 뿌려진다는 것이다. 신용경색은 자산가치의 폭락을 야기하기 때문에 헐값에 자산을 매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후 자산가치 상승은 투기의 부활로 이어진다. 188


5장. 1845년 철도 버블

<더 타임스>가 1845년 11월 초에 별지로 발행한 ‘영국의 철도문제’에는 당시 투기열풍과 철도건설로 영국 경제가 얼마나 깊게 주름졌는지를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이보다 앞선 10월말에는 5억 6,000만 파운드 이상이 필요한 1,200개의 노선이 계획중이며, 겉으로 드러난 철도회사의 채무는 6억 파운드가 넘었다고 보도했다. 이는 당시 5억 5,000만 파운드였던 영국 국민총생산을 초과하는 것이고, 영국 경제가 다른 부문에 대한 투자를 줄이지 않고 1년 동안 정상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한계인 2,000만 파운드의 30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211

계속된 철도건설에 따른 피할 수 없는 결과는 주식청약자들의 자금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었다. 1846년 한 해 동안 청약자들이 납입해야할 주식대금은 4,000만 파운드에 이르렀고, 이 돈은 임금지급 등 정상적인 산업활동에 필요한 자금에서 전용되었다.
결국 투자자들은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기업에서 고용을 줄이거나 개인적인 소비지출을 삭감해야 했고, 이로 인해 철도를 뺀 나머지 부분의 산업활동은 극도로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218

철도투기의 여파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1855년 현재 영국에서 가동된 철도의 길이는 모두 8,000킬로미터에 달했다. 이는 프랑스와 독일의 7배가 넘는 것이다. 이때 건설된 철도가 빅토리아 여왕 시기 영국경제에 엄청난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다. 저렴한 대량 수송 수단으로 산업혁명에 톡톡한 기여를 한 것이다. 또한 영국 경제가 심각한 불황을 겪고 있던 1840년대 철도 건설의 붐이 일자 50만 명의 노동자들이 철도건설 현장에서 돈을 벌어 생계를 이었다. 229


6장. 미국 금권정치시대의 투기

미국은 출신 성분보다는 재산규모에 따라 신분상의 구분과 상승이 이뤄지는 근대국가 였다. 235
미국처럼 부가 신분을 결정하는 근대사회에서는 물질적으로 남보다 뒤처지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길게 드리우고 있다. 236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가운데 상당수가 땅투기꾼이었다. 조지 워싱턴은 미시시피 회사를 설립해 서부지역 땅을 사들이고, 벤저민 프랭클린은 일리노이 주에서 6,300만 에이커에 달하는 땅에 투기를 벌였다. 열렬한 혁명주의자였던 패트릭 헨리 역시 조지아 주에서 1,000만 에이커를 매입하기 위해 설립된 아주 사의 투자자였다. 심지어 토머스 제퍼슨과 알렉산터 헤밀턴도 한 때 땅장사꾼이었다. 237

1790년대 미국에 증권거래소가 설립되자 땅투기 열풍은 종이쪽지 투기로 바뀌기 시작했다. 238

주식매집은 주식시장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지만 가장 왕성하게 이뤄진 곳은  19세기의 미국이었다. 주식매집의 첫번째 목적은 주가를 끌어올리는 것이었고, 다음으로는 주가폭락시  저가 매수를 위해 물량공세를 펼치는 공매도 세력을 견제하자는 것이었다. 매집세력들이 주식매집에 성공할 경우 공매도 투기꾼들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결제일까지 약속한 주식을 내놓아야 하는 매도세력들은, 집중 매수로 주식을 구할 수 없어 ‘울며 겨자먹기’로 장외에서 매집세력이 요구하는 값을 지불하고 주식을 매입해 결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239

Margin Loan(주식 담보 대출)이 일반화되자 미국 주식시장의 거래는 한층 활발해졌다. 초단기 투기꾼들이 마진론을 활용해 자신의 실제 능력보다 많은 주식을 매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40
마진론으로 주식시장의 자금은 풍부해졌지만, 주식시장은 시중 자금사정 등 증시주변 여건변화에 더 민감해졌다. 실제로 밀 수확기에는 자금이 뉴욕의 은행들에서 내륙지역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자금사정이 악화되어, 은행들이 마진론의 상환을 독촉하고 나서자 주가가 약세를 보였다. 241

다니엘 드루는 주가하라가 매집세력에 대한 견제를 위해 이사라는 직위를 이용해 불법으로신주를 발행했고, 이를 시장에 풀었다. 월스트리트 최초로 경영권 방어를 위해 ‘물타기 수법 watering stock’을 이용한 것이다. 246

절대 다수의 투자자들은 거물급 투기꾼들의 사냥감이었다. 드루는 “내부자가 아니면서 주식에 투자하는 것은 달빛 아래에서 황소를 사는 것과 같다”고 말했고, 헨리 애덤스는 “거대한 자본을 동원한 투기는 결국 소규모 투기꾼들을 집어삼켜 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파울러는 아마추어 투자자들을 ‘금융이라는 아편을 먹은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그들은 정반대 종류의 흥분에 흔들이고 불확실성과 두려움에 무너져 내린다. 또 고점에서 사 저점에서 파는 우를 쉽게 범하는 경향이 있다.
제임스 메드버리는 아마추어 투자자들에 대해 “그들은 의심해야 할 때 확신을 갖고, 과감해야 할 때 망설이며, 확신이 필요할 때 의심을 품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유약함은 작전세력들에게는 성공의 조건이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254

충분한 주식을 매집하는 데 성공한 작전세력은 매도자들을 쓸어내고 가격을 끌어올리기 시작한다. 부패한 언론이 이 순간에 유용하게 쓰였다. 259

이리 철도회사의 이사였던 짐 피스크는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익스프레스 사의 주식을 공매도 한 뒤 이 회사와 맺은 계약을 파기했고, 계약파기로 폭락한 이 회사의 주식을 대거 사들여 결제하고 다시 매수포지션을 취했다. 그런 다음에는 다시 계약을 맺어 주가를 끌어올렸다. 260

1881년 브러커 헨리 클루스는 의회 청문회에 나가 “투기는 주식이나 공산품의 미래가치에 대한 견해차이를 좁힐 수 있는 방법이다. 희소성이 있을 때 가격상승은 생산을 촉진하고, 과잉생산이 발생하면 가격이 폭락해 감산이 이뤄지도록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투기는 공황을 예방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라고 덧붙였다. 281
심각한 문제는 작전꾼들에 의한 시세조정이 계속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투기가 헨리 클루스가 주장했던 순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공황과 불황의 원인이 되는 이유이다. 282


7장. 새시대의 종말 : 1929년 대공황과 그 여파

‘자본주의가 새시대에 들어섰다’는 관념은 투기열풍이 몰아치는 시대마다 유행했다. 디즈레일리는 런던 증시가 호황을 보인 1825년 진일보한 경영기법 때문에 ‘이 시대’는 과거와 구분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9세기 유명한 저널리스트 월터 베이지헛은, “투기가 발생할 때마다 기업인들과 은행가들은, 현재의 번영이 더 큰 번영의 시작이기 때문에 영원할 것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는 말고 새시대 관념을 설명했다. 288

증시의 초호황이 시작된 1924년 에드거 로렌스 스미스는 <장기 투자수단으로서의 보통주>를 발표했다. 그는 19세기 중반 이후 주식과 채권의 수익률을 이용했다. 그리고 “주식의 수익률이 채권을 능가했고, 특히 20세기 들어 20년동안 펼쳐진 인플레이션 시기에는 주식의 수익률이 더 높았다”고 분석했다.
스미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점에서 주식을 샀을 때에도 투자 원본을 회복할 수 있는 순간은 꼭 온다”고 강변했다. 또 주식투자자가 원본손실을 입을 확률은 15년 동안 1%도 되지 않았다고 목청을 돋우었다. 291

아주 부정확한 가정과 정확한 수학공식의 조합은 특정 주식의 가치를 만들어내거나 옹호하는데 주로 쓰인다… 수학은 투기를 투자로 위장하는 수단일 수 있다. 293

루이스 헨리는 1929년 <노던 아메리칸 리뷰> 8월호에서 “미래의 희망수익을 근거로 명목가치 이상으로 주가가 솟는 것은 전형적인 투기”라며, “현재의 안전을 비용으로 치르고 미래의 우연성을 선택하는 것은 투자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293

할부거래에도 투기요소가 있었다. 현재 이뤄지는 소비를 미래의 수익으로 결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96

1926년 2월 연방준비위는 은행가들을 불러보아 “주식투자를 위해 대출해주는 것은 적절한 자산운용이라고 볼 수 없다”고 타일렀다. 하지만 이런 ‘도덕적 권고’로는 극에 달한 투기열풍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296

신기술에 대한 투기꾼들의 환상은 주식시장이 호황을 유지하는 동안 지속되었다. 경제적 번영의 원동력과 투기의 대상으로서 자동차가 철도를 대체했고 미국의 문화와 지도를 바꾸어 놓았다. 곳곳에 자동차도로와 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수많은 차고가 세워졌다.
자동차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능가한 것은 1920년 웨스팅하우스 사에 의해 처음 세상에 출현한 라이오뿐이었다.
투기열풍은 찰스 린드버그가 1927년 대서양 횡단 단독비행에 성공하자 항공기 산업으로 번졌다. 308

19세기 후반 스코틀랜드에서 출발한 투신사의 목적은 소액투자자들의 돈을 모아 적은 비용으로 전문적인 운용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빙 피셔는 1929년 여름에 발표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투신사를 옹호했다. “투신사는 주가가 고점이나 저점에 이르렀을 때 흔히 발생하는 투기적 변동성을 바로잡는 역할을 한다. 주가가 실제로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 때에만 주식을 매입하고 실제로 내릴 전망이 서면 팔기 때문에, 주가가 실제 가치에 근접하게 하는 구실을 한다”
하지만 실제 투신사들의 매매는 주식시장의 심한 변동성을 야기했다. 펀드매니저들은 우량주만을 골라 집중 투자했고, 여윳돈은 마진론 형태로 대출했다. 이는 주식에 대한 수요를 늘리고 투기를 조장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또 수익 레버리지 효과를 올리기 위해 차입금을 끌어들여 투자에 활용하는 바람에 주식시장의 변동성을 더욱 높여 놓았다.
최악의 경우는 투신사들이 계열사의 주식매집에 참여해 주가를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312

고통과 함께 반복된 역사는 ‘투기적 과잉지출이 필연적으로 과도한 경기수축과 공황으로 끝난다’는 교훈을 알려주었다. 314

증시호황 이면의 보이지 않는 힘처럼 군중심리는 본질적으로 불안정성을 띠고 있다. 일정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균형이 형성되지도 않고 상승하거나 하강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혼란의 순간 쉽게 패닉에 빠져든다. 프로이트는 “아무런 위협이 발생하지 않는데도 사소한 자극으로도 쉽게 혼란에 빠지는 것이 패닉의 본질”이라고 설명했다. 317

심리학자 페스팅어는 고통이 보상보다 크지 않을 경우 군중들은 인식의 부조화가 주는 스트레스를 견디어낸다고 했다. 이를 증권판 용어로 풀이하면, 손실의 두려움이 수익에 대한 탐욕보다 커지는 순간까지 투자자들은 인식의 부조화가 주는 스트레스를 견뎌낸다는 말이다. 319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은 1920년대의 개인주의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자유방임주의는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간섭으로 대체되었다. 시장을 대신해 정부가 복지와 주택, 노동, 금융, 물가, 소득, 최저임금을 결정했고, 이로써 대상이 무엇이든 투기는 경제영역에서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케인즈는 자본을 배분할 수 있는 권한을 투기꾼과 주식시장에 맡겨둔 과거 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331

1920년대 그레이엄과 데이비드 도즈가 <주식 분석>에서 “새시대에는 기존 가치기준으로 주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주식의 시장가치에 근거해 주식의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듯이, 1990년대 증시 전문가들도 이와 비슷한 ‘시장가치가 부가된’ 가치평가 방법을 주장하고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기업의 평가가치는 자본금이 아니라, 주당 가격을 합산한 시가총액으로 따져야 한다. 시가 총액이 클수록 기업의 가치는 더 높다는 것이다. 343

“증시가 영구기관처럼 변해 주가상승이 계속적인 주가 상승을 낳고 있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볼 때 투기와 차입규모가 최고조에 달하고 영구기관이 반대방향으로 회전하면서, 새시대는 끝이 났다. 345


8장. 카우보이 자본주의 : 브레턴우즈 이후

1944년 미국 뉴햄프셔 주 브레턴우즈의 마운트 워싱턴 호텔에서 영국대표 케인즈를 비롯해 연합국 고위 경제관료들이 모여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질서를 재구성했다. 그들은 금본위제 부활 대신 금태환 달러를 기축통화로 삼고, 여타 통화를 달러에 고정환율로 묶어두는데 합의했다. 달러의 금태환 비율은 금 1온스당 35달러로 정해졌다. 347

1971년 8월 15일 닉슨 대통령이 달러의 금태환 중단을 선언했다. 이로서 과거 25년 동안 세계 경제를 지배해왔던 브레턴우즈 체제는 종말을 고하고, 투기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지불의무를 표현한 ‘종이’를 화폐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발생한 17세기 후반 1차 금융혁명기에는, 그래도 모든 가치가 금에 의존했다. 따라서 금이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투기 제어장치로 기능했다. 투기에 대한 고삐가 풀리고 금융위기가 발행하면, 모든 사람들은 금에서 피난처를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351

브레턴우즈 시스템의 붕괴 이후 돈은 질량과 본질이 없는 상상의 조각물이 되었다.
Citicorp의 헤드인 Walter Wriston은 “정보본위제가 금본위제를 대체하고 세계 금융기초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353

역사의 사례를 살펴보면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금융시장이 더 안정되고 투자행태가 더 효율화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줄만한 근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는 쉽게 발견된다. 역사적으로 금융정보의 폭넓은 이용과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은 투기의 세계로 새로운 참여자들을 끌어들이는 효과를 낳았다. 1세대 일간지의 출현과 맞물려 사우스 시 버블이 발생했고, 영국 신문들이 금융시장 지표를 싣기 시작한 1825년 광산회사 투기가 벌어졌다. 또 철도가 건설되었던 1845년 철도버불이 부풀어올랐고, 주가표시기가 도입된 1870년대와 라디오가 출현했던 1920년대 미국 증시에도 투기가 발생했다. 354
정보교환이 빠르게 진행될수록 공황의 전파는 더 신속하게 이뤄진다. 357

워렌 버펫은 “시장이 ‘심심치않게’ 효율적인 양상을 보일 뿐인데, 시장주의자들은 ‘항상’ 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고 공격했다. 조지 소로스도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에서 “난해한 방정식을 동원하는 효율적 시장론자들은 근대 이성에 근거한 학자라기 보다는 ‘바늘 끝에 천사 몇 명이 올라설 수 있는가’를 계산하는 중세 스콜라 학자와 닮았다”고 비판했다. 360

과거에는 파생상품 거래와 도박을 구분하는 법적 장치들이 존재했다. 만기 결재일에 현물을 서로 주고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1981년 현물인도가 불가능한 이자율 선물거래가 합법화되었다. 1974년 설립된 시카고 선물거래 위원회가 선물거래의 결재를 반드시 현물로 해야 한다는 규정을 삭제하고, 현금을 대체 결제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 결정으로 다양한 지수 선물이 줄줄이 도입된다. 363

밀켄은 하이일드 채권은 위험하기 때문에 ‘투기적’이라는 고정관념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신용등급이 낮은 채권은 ‘추락한 천사’로 부르며, 부도율보다 높은 수익률을 보장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379

차입매수 붐은 1980년대 중반 미국 증시활황의 가장 큰 원동력이 었다. 전통적인 가치평가 방법이 의미를 잃고, 인수합병 가치가 중요한 기업가치 평가수단으로 등장했다. 현금 흐름이 얼마나 좋고, 어느 정도의 채무를 감당할 수 있느냐에 따라 기업가치가 달라진 것이다. 차입매수꾼들이 기업을 인수할 때 인수에 들인 차입금을 원할하게 상환할 수 있는 기업이 높은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다. 386

워렌 버펫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차입매수 채권을 경고했다. 이어 그는 “연금술은 그 대상이 쇠든 돈이든 실패했다. 어떤 기업의 기본적인 영업이 회계나 금융 구조를 변경시킨다고 해서 황금알을 낳는 사업으로 바뀌는게 아니다.” 408

밀켄이 역사적인 통계를 활용해 정크본드의 우수성을 주장하자 워렌 베펫은 “역사책이 부자가 되는 열쇠라면, <포브스>가 뽑은 400대 부자들은 모두 도서관 사서들일 것”이라고 반박했다. 413

1987년의 대폭락은 1929년의 경우와 아주 다른 메시지를 투자자들에게 남겼다. 1987년 대폭락 이후 시장이 빠르게 회복되자 투자자들은 ‘바이 앤 홀드’ 전략이 유효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또 주식시장의 폭락이 경제공황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대신 ‘골이 깊을 때 주식을 매수해’ 차익을 남길 수 있다는 기대를 낳았다. 또 달리는 증시가 고속으로 충돌할 때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혼란을 수습하기위헤 출동할 것이라고 예상하게 되었다. 은행이 혼란에 빠졌을 때는 연방 예금보험 공사가 예금을 보호해줄 것이고, 이후에는 납세자들이 알아서 부담해줄 것이라는 기대도 갖게 되었다. 414


9장. 가미가제 자본주의 : 일본의 버블 경제

1980년대 초반 일본 기업들은 ‘자이테크(재테크)’라는 다양한 자산운용으로 엄청난 영업외 수익을 벌여들였다. 1984년 대장성은 기업들이 ‘토이킨계정(투금계정)’을 두고 주식과 채권등에 투자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424

1980년대 후반 일본 기업들이 조달한 자금이 모두 투기에 투입된 것은 아니었다. 신주 인수권부 발행으로 조달된 자금이 생산설비 투자에도 흘러들어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고 설립투자 붐이 불었다.
특히 해외 설비투자를 통해 엔화 강세에 따른 수출난을 극복했다. 엄청난 설비투자 덕분에 일본 기업들은 엔화강세에 따른 가격경쟁력 약화와 자본수익률 하락을 딛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426

일본의 땅값은 1956~1986년 사이에 50배 이상 치솟았다. 반면 일본의 소비자 물가는 단 두 배 뛰었을 뿐이다. 이 기간 동안 땅값이 하락할 때는 1974년 뿐이었다. 따라서 일본인은 땅값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고, 일본 은행들은 채무자의 현금수입보다는 땅을 담보로 대출을 해주었다.
한 마디로 땅은 일본에서 신용의 상징이었고, 이 때문에 ‘통치홍이세이(토지본위제)’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428

1985년 9월 미국의 재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뉴욕 맨하탄 플라자호텔로 각국 재무장관을 소집했다. 베이커의압박에 각국 재무장관은 달러가치, 특히 엔화에 대한 달러가치를 떨어뜨리기로 합의했다. 일본 엔화의 구매력은 40% 오르고, 달러로 표시되는 상품가격은 그만큼 하락했다. 국제시장에서 일본의 상품값이 갑자기 2배 가까이 뛰어올랐다. 430
다급해진 대장성은 이자율을 낮추라고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을 마구 윽박질러 1986년 한 해 동안 일본은행은 네 차례에 걸쳐 재할인율을 인하해 3%에 이르게 했다. 431

1980년대 후반 도쿄 증시의 주가는 자이테크 수익이 포함된 기업 수익보다 3배 이상 급증했다. 섬유업종의 주가수익배율을 평균 103배에 달했고, 서비스 주들은 112배, 해상운송 주들은 176배, 어업관련 종목들은 319배 까지 뛰었다.
기업의 펀더멘털을 무시하는 갖가지 현상들이 벌어졌다. 동일 업종 내 주가는 개별기업의 순이익 등 재무상황이나 사업전망과는 관련없이 비슷한 추세를 보였다.
또 신주발행 소식이 전해지자 주가가 들먹거렸고, 회사가 실제 가치를 창출하지 않고 액면 분할만을 발표할 경우에도 주가는 하늘을 때렸다. 수출이 줄어들고 기업들이 생산시설을 해외로 이전해 산업 공동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주가는 치솟았다. 437

부동산 버블은 증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일본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기업의 ‘숨겨진 자산’을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어떤 기업이 땅을 소유하고 있거나, 부동산 소유 기업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을 경우 이 회사의 주가는 하루아침에 껑충 뛰어올랐다. 438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돼 빈부차가 적은 나라’라고 여겼다. 하지만 자산가치의 상승과 투기가 낳은 부의 불평등 배분으로 빈부의 격차가 심하게 벌어졌다. 전체인구가운데 상위 20%가 보유하고 있는 부가 버블기간 동안 4배 이상 늘어난 반면, 하위 20%의 부는 실질적으로 감소했다. 457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스티븐 핑커

마음은 연산 체계다
마음에 관한 많은 담론들이 주위에 떠돌고 있다. 개별 종교에서 수행의 방편으로 삼고 있는 ‘마음 공부’, ‘피정’ 등을 포함해, 마음을 주제로 한 TV 다큐멘터리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 시기에 왜 마음이라는 단어에 관심을 갖는가? 왜 마음을 알고 싶을까? 이 질문들을 제기하는 마음의 저 뒤편에는 ‘마음이 곧 나다’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마음을 쓰고, 마음을 내려놓고, 마음을 정리하고, 마음이 떠날 때, 나의 실존적 존재가 총체적으로 그렇게 행동한다. 결국 내가 나를 알고 싶기 때문에, 내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주제는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주로 심리학에서 다루었으며, 그 분석 대상이 너무도 복잡하고 미묘해서 과학이라는 엄밀한 학문이 다룰 만한 것이 아니라고 간주했다. 20세기의 3대 회의주의자 중의 한 명인 프로이트, 미국의 심리학과 실용주의를 철학으로 끌어올린 윌리엄 제임스가 다루었던 마음도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이후 컴퓨터, 사이버네틱스, 정보이론, 뇌과학, 진화생물학이 새로운 이슈들을 제기하면서 마음이라는 주제는 과학적 연구 주제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MRI를 이용해 뇌 사진을 찍고, 사랑하는 연인들의 호르몬 작동을 탐색하고, 티벳 고승들이 명상에 들었을 때 뇌파를 측정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마음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책의 저자인 핑커는 이러한 연구 성과를 종합하면서 마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마음은 뇌의 활동인데, 뇌는 정보를 처리하는 기관이며 사고는 일종의 연산이다. 마음은 여러 개의 모듈 즉 마음 기관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모듈은 이 세계와의 특정한 상호작용을 전담하도록 진화한 특별한 설계를 가지고 있다. 모듈의 기본 논리는 우리의 유전자 프로그램에 의해 지정된다. 이러한 모듈들의 작용은 인간의 진화사 대부분을 차지하는 수렵채집 시기에 자연선택이 우리 조상들이 직면했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발전시킨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직면했던 다양한 문제들은 사실 그들의 유전자가 직면했던 하나의 큰 문제, 즉 사본의 수를 최대한 늘려 다음 세대에 남기는 문제의 부차적 과제들이다. (본문 48쪽)

마음을 이렇게 연산 체계로 정의한 핑커는, 역설계라는 방법을 통해 마음이 어떻게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해 왔는지를 설명한다. 정상적인 설계에서는 기계가 특정한 일을 하도록 설계하는 것을 말하는 반면, 역설계에서는 거꾸로 특정한 기계가 어떤 일을 하도록 설계되었는지를 알아낸다. 예를 들어 골동품 가게에서 발견한 신기한 물건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그 장치가 올리브 씨를 빼는 기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금속 고리가 올리브를 고정시키기 위해 설계된 것이고 작은 지레는 X자 형태의 날을 눌러서 올리브 씨를 반대쪽 끝으로 빼내기 위해 설계된 것임을 알고서 ‘아하, 그렇군!’을 말한다. 결국 스프링, 연결부, 날, 지레, 고리로 이루어진 그 구조와 형태가 전체적으로 이해된다. 심지어는 왜 통조림에 담긴 올리브의 한 쪽 끝에 X자 모양의 자국이 있는지도 이해하게 된다.

계산주의로 마음을 설명하다
마음을 추상적인 심리적인 현상이 아닌, 과학적인 방법·추론·실험을 통해 이해하기 위해 도입된 이론이 계산주의 마음 이론이다. 이 이론은 마음의 작동 방식을 정보처리장치로 설명한다. 입력장치, 기억장치, 중앙처리장치, 출력장치 등으로 구성된 기계(예를 들어 컴퓨터)처럼, 인간의 마음도 이러한 기관들의 네트워크로 이해한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과 컴퓨터를 일대일 대응시켜 마음 또는 뇌에서 그런 장치들이 정말로 존재하는지를 찾으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뇌는 신경세포인 뉴런과 그 뉴런들 사이의 틈을 가리키는 시냅스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다.

수학자 앨런 튜링, 컴퓨터과학자 앨런 뉴웰, 허버트 사이먼, 마빈 민스키, 철학자 힐러리 퍼트넘과 제리 포더가 최초로 계산주의 마음 이론(computational theory of mind)을 제안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믿음과 욕구는 ‘정보’이고, 정보는 기호들의 배열로 구현된다. 기호는 컴퓨터 속의 칩이나 뇌 속의 뉴런처럼 특정한 물리적 상태를 띠고 있는 물질 조각들이다. 그것들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을 상징한다. 존재물들은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기호를 촉발하고, 일단 촉발된 기호는 존재물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기호를 구성하는 물질 조각들이 적절히 배열되어 다른 기호를 구성하는 물질 조각들과 충돌을 일으키면 한 믿음에 해당하는 기호들은 그것과 논리적으로 연결된 다른 믿음의 새 기호들을 발생시킬 수 있고, 그것은 또 다른 믿음에 해당하는 기호들을 발생시킬 수 있다. 결국 한 기호를 구성하는 물질 조각들이 근육과 연결된 물질 조각들과 충돌을 일으켜서 행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계산주의 마음 이론은 행동에 대한 설명에 믿음과 욕구를 포함시키는 동시에 믿음과 욕구 자체를 물리적 세계에 포함시킨다. 그로 인해 의미는 원인이자 결과가 될 수 있다. (본문 53~54쪽)

마음은 단일한 기관이 아니라 여러 기관들로 구성된 하나의 체계로, 각 기관은 심리적 기능 또는 마음 모듈로 간주할 수 있다.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 언급되는 것들, 예를 들어 일반지능·문화형성 능력·범용 학습 전략들은 생물학에서의 원형질이나 물리학에서의 흙·공기·물·불과 동일한 길을 걸으며 사라질 것이다. 마음을 설명하는 이러한 고전적인 실체들에서 벗어나, 마음 역시 진화한다는 것이 핑커의 주장이다.

계산주의 마음 이론이 없으면 마음의 진화를 이해하기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지성인들은 인간의 마음이 어떤 식으로든 진화의 과정을 겪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 생각에 진화는 단지 저급한 본능과 고정된 행동 패턴들, 예를 들어 성 충동, 공격성, 영토 확보 충동, 알 위에 앉는 암탉의 본능, 어미를 쫓아다니는 새끼 오리의 본능 같은 것들만을 만들어 낼 뿐이다. 인간의 행동은 너무나 섬세하고 융통성이 커서 진화의 산물일 수 없으며, ‘문화’와 같은 다른 어떤 것에서 나오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화가 우리에게 불가항력적인 충동들과 융통성 없는 반사행동들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신경세포로 이루어진 컴퓨터를 구비해 준 것이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사람이 만든 컴퓨터 프로그램들은, 날씨를 모의실험 화면을 보여 주는 매킨토시 사용자 인터페이스에서부터 영어로 된 말을 인식하고 질문에 대답하는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연산이 수행할 수 있는 교묘한 기술과 힘이 얼마나 큰지를 암시적으로 보여 준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도 아무리 섬세하고 융통성이 크다 해도 대단히 복잡한 프로그램의 산물일 수 있으며, 또한 그 프로그램은 자연선택이 우리에게 부여한 것일 수 있다. (본문 56~57쪽)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한 시각기관
21세기 초 한국에서 디지털카메라와 폰카메라가 널리 유통되고,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되면서 사진이 사람들의 주요한 놀이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 카메라가 작동되는 방식을 통해, 우리의 눈과 시각기관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역설계해 보자. 정상적인 광학은 특정한 형태, 물질, 조명을 가진 물체가 어떻게 망막상이라고 불리는 색채 모자이크로 투사되는가를 예측하는 물리학의 한 분야다. 그러나 뇌는 역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입력물이 망막상이라면 출력물은 외부 세계의 사물들과 그 사물을 구성하는 것, 즉 우리가 보고 있다고 느끼는 것에 대한 명세표다. 역광학을 가리켜 공학자들은 ‘잘못 설정된 문제’(ill-posed problems)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해가 없다는 뜻이다. 몇 개의 수를 곱해 그 결과를 말하는 것은 쉽지만, 어떤 결과를 보면서 그것이 어떤 수들의 곱인지 말하기가 불가능한 것처럼, 광학은 쉽지만 역광학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뇌는 우리가 냉장고를 열고 우유를 꺼낼 때 마다 그 일을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뇌는 부족한 정보를 보충한다’는 것이 그 답이다. 부족한 정보란 인간이 진화해 온 이 세계와, 이 세계가 어떻게 빛을 반사하는가에 대한 정보를 말한다. 만약 시각적 뇌가 자신이 일정한 세계, 즉 빛이 균일하게 비치고, 대부분의 사물들이 매끄럽고 일정한 색깔의 표면을 갖고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유효한 추측을 해낼 것이다. 예를 들어, 망막에 투사된 상의 밝기를 조사하는 것으로는 밝은 햇빛을 받고 있는 석탄과 어두운 그늘에 있는 흰 눈을 구별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표면의 특성을 인지하는 모듈이 있고, 그 속에 다음과 같은 전제가 구축되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세계는 고르고 균일하게 빛을 받는다.” 그러면 그 모듈은 3단계로 석탄-눈 문제를 해결한다. (1) 해당 장면의 한쪽 끝에서 반대편 끝까지 밝기의 변화도를 계산한다. (2) 전체 장면으로부터 밝기의 평균 수치를 추산한다. (3) 평균 밝기에서 각 조각의 밝기를 빼는 방법으로 각 조각의 명암을 계산한다. 평균과의 편차가 +쪽으로 크면 하얀 물체로 보이고, -쪽으로 크면 검은 물체로 보인다. 조명이 정말로 고르고 균일하다면 지각의 결과에는 이 세계의 표면들이 정확히 나타날 것이다. 지구라는 행성은 무한히 긴 시간 동안 빛이 고르게 퍼진다는 가정에 잘 들어맞았으므로, 자연선택은 그 가정을 모듈 속에 구축하는 방법으로 오래전부터 성공했을 것이다. (본문 58~59쪽)

‘중국어 방’을 둘러싼 논쟁
계산주의 마음 이론에 대한 반론과 논쟁은 존 설(John Searle)이 제안한 ‘중국어 방chinese room’이라는 사고실험을 통해 일어났다. 먼저 사고실험을 세팅해 보자.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방안에 있다. 구불구불 갈겨쓴 종이들이 문틈으로 들어온다. 방안에 있는 사람은 “[구불구불]이 나오면 그때마다 [고불고불]을 적어라”같이 복잡한 지시 사항들이 적힌 긴 목록을 갖고 있다. 몇몇 규칙에는 그가 쓴 종이를 다시 문밖으로 내놓으라는 지시가 적혀 있다. 그는 그 지시사항들을 능숙하게 수행한다. 그는 모르지만, 구불구불한 말들과 고불고불한 말들은 중국어 문자이고, 그 지시문들은 중국어로 된 이야기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에 답을 하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다. (본문 158쪽)

그렇다면 그 방에 있는 사람은 중국어를 알고 있을까? 물론 문밖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 방안에 있는 사람은 중국어를 알고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남자는 중국어를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기호를 조작할 뿐인데, 이해는 기호 조작이나 연산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은 이 사고실험을 통해 그 중국어 방 안에 있는 사람에 없는 것은 기호와 기호가 의미하는 것의 관계인 지향성이라고 지적한다. 지향성, 의식, 그리고 그 밖의 마음 현상들은 정보처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제 인간 뇌의 실제적인 물리-화학적 특성들’에 의해 야기된다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이 사고실험에 대해 100편 이상의 논문이 출판되었고, 인터넷에서도 격렬한 토론이 있었다.

‘그 방 전체(남자+규칙표)’가 중국어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설은 이렇게 응답했다. “좋아요, 그 남자가 규칙을 기억하고,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가 일을 한다고 해봅시다. 그 방이 사라지고 나면, 우리의 기호 조작자는 여전히 중국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남자는 외부 세계와의 연결이 전혀 없음을 지적하면서 그것은 치명적인 결손 요소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설은 이렇게 응수했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구불구불한 글씨가 텔레비전 카메라의 출력물이고 밖으로 나오는 고불고불한 글씨가 로봇 팔에게 내리는 명령어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 남자는 외부 세계와 연결되어 있지만, 그래도 중국어를 말하지 못합니다.” 그의 프로그램이 뇌의 활동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설은 중국어 방에 해당하는 블록의 병렬 분산 체계인 중국어 체육관을 예로 들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체육관에 모여 마치 뉴런처럼 서로에게 휴대용 무선전화기로 신호를 외치고 중국어 이야기에 대한 질문들에 답을 하면서 하나의 신경망처럼 활동한다. 그러나 그 ‘체육관’은 방 안의 남자처럼 중국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본문 159쪽)

결국 설은 이해와 관련된 사실들을 지적하고 있다. 사람들은 언어의 규칙들이 빠르고 무의식적으로 사용되어야 하고, 언어의 내용이 사용자의 믿음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사람들이 이해라는 현상의 본질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그것에 위배되는 조건들에 이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꺼려한다고 해도 과학적으로는 문제되지 않는다. 결국 과학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어떤 단어의 현실적인 예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대상의 작동 원리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어떤 과학자가 팔꿈치의 기능을 설명하면서 인간의 팔꿈치는 제2형 지레라고 말할 때, 그에 대한 반박으로 강철로 만든 제2형 지레를 들고 있는 사람을 설명하면서, ‘이 남자가 3개의 팔꿈치를 갖고 있지 않소?’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착시현상에 대한 마음의 역설계
매직아이나 만화경, 또는 ‘윌리를 찾아라’ 같은 게임은 우리의 시각을 혼란시키면서 시각 기관의 능력을 시험한다. 이러한 착시 현상은 물속에 있는 막대가 꺾여 보이는 것, 한곳에서 만나는 것처럼 보이는 평행선, 균일하지 않게 보이는 균일한 선, 길이가 같은데 다른 것처럼 보이는 두 직선 등을 말한다. 이 현상은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수 세기 동안 서양 사상가들의 주된 철학적 논쟁점이었다. 특히 인식론에서는 착시 현상을 통해 인간의 감각 능력과 인식 능력, 그리고 그에 따른 지식에 대해 많은 회의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인지과학자들은 더 가벼운 눈으로 착시 현상을 다룬다.

시각은 항상 정확하진 않지만 어쨌든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 보통 때 우리는 벽에 부딪히지 않고, 플라스틱으로 만든 과일을 베어 물지 않고, 자신의 어머니를 못 알아보지 않는다. 로봇 제작은 이것이 결코 하찮은 기술이 아님을 보여준다. 눈으로 세계를 볼 때 유기체들은 사물에 반사되어 눈으로 들어온 다음 양쪽 망막 위에 흔들리고 고동치는 2차원의 만화경을 만들어 내는 빛을 이용해야만 한다. 뇌는 그 움직이는 콜라주를 분석해서 그것을 만들어 낸 외부 물체를 정확하게 감지한다.
그 정확성이 놀라운 것은 뇌가 해결하는 문제들이 말 그대로 해결 불가능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망막에 맺힌 타원 형태는 정면으로 본 타원에서 생긴 것일 수도 있고, 비스듬히 본 원에서 생긴 것일 수도 있다. 회색 조각은 그늘 속에 있는 눈덩이에서 생긴 것일 수도 있고, 햇빛을 받는 석탄 덩어리에서 생긴 것일 수도 있다. 시각은 여러 전제들을 첨가함으로써 이 문제들을 해결한다. 그 전제들은 진화의 환경인 이 세계가 평균적으로 어떻게 결합해 있는가에 대한 전제들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시각 기관은, 물질은 응집력이 있고, 표면은 균일한 색을 갖고 있으며, 사물들은 함부로 이상하고 혼란스럽게 배열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시각기관은 예쁜 무늬와 색을 보여 주어 우리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시각기관은 이 세계의 실제 형태와 재료에 대한 감각을 전달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선택의 이점은 명백하다. 음식, 포식자, 벼랑 등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동물은 그 음식을 위장에 넣을 수 있고, 자신의 몸을 포식자로부터 피신시킬 수 있고, 벼랑 아래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 (본문 335~336쪽)

세계를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세계를 보는 사람은 그것을 말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세계와 협상하거나, 물리적 또는 심리적으로 조작하거나, 미래를 위해 기억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기술은 세계를 망막에 비친 환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물체로 해석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이러한 시각에 대한 정의를 인공지능 과학자인 데이비드 마르가 제안했다. 그에 따르면 ‘시각은 외부 세계의 이미지들로부터 보는 사람에게 유용한 동시에 부적절한 정보와 뒤섞이지 않는 설명을 생산하는 과정’이다.

책은 망막에 사다리꼴 형태를 투사하지만, 우리는 책이 사다리꼴이 아니라 직사각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책을 들 때도 손가락을 직사각형으로 만들고, 책을 진열할 책장을 만들 때도 직사각형으로 만들고, 다리가 부러진 소파 밑을 괼 때도 직사각형의 공간을 차지할 것이라고 추론한다. 이처럼 시각이 설명을 전달해 주지 않는다면 각각의 마음 기능은 망막에 맺힌 사다리꼴이 사실은 직사각형이라는 사실을 추론하기 위해 특정한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기울어진 직사각형을 ‘직사각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을 직사각형으로 받아들이는 법, 직사각형의 공간에 들어맞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법 등을 학습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시각이 일단 망막 위에 상으로 맺힌 물체의 형태를 추론하면, 마음의 모든 부분이 그 발견을 이용할 수 있다. 비록 마음의 부분들이 정보를 운동신경 회로로 돌려서 움직이는 표적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게 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체계가 한 종류의 행동에만 몰두하는 일은 없다. 전체적인 체계는 망막상이 아니라, 사물과 3차원 좌표로 표현된 세계에 대한 설명 또는 묘사를 만들고 그것을 모든 마음 모듈들이 읽을 수 있도록 게시판에 새긴다. (본문 337~338쪽)

Manias,Panics,Crashes - 찰스 킨들버거

"거품은 항상 터지기 마련이다."……언제 읽어도 시의 적절한 진정한 고전

이 책은 투기적 광기에서 비롯되는 거품과 이에 뒤따르는 금융위기에 관한 고전이다. 찰스 킨들버거는 이 책에서 17세기 화폐변조시대와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튤립 광기부터 2001년 아르헨티나 페소화 위기까지 지난 400년간 전세계적으로 발생한 수십 차례의 거품을 분석했다. 이 책이 다루는 주제는 금융위기를 야기하는 광기와 패닉, 붕괴의 진행과정과 궁극적 대여자의 역할 및 그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언제 읽어도 시의 적절한 주제일 뿐만 아니라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진정한 고전이라는 평가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아파트값의 급등과 부동산 거품을 둘러싼 논쟁이 거세게 일고 있다. 그러나 거품은 어느 시대에나 금융시장의 한 모습이었다. 시대는 달랐지만 수많은 투자자들이 이 거품의 덫에 걸려 더 높은 가격에 팔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고점에 매수해 결국, 투기적 광기가 결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뼈저린 교훈을 배워야 했다.

"시장은 때로 비합리적일 수 있다"
새로운 혁신이나 발명과 같은 변위요인(變位要因, displacement)이 경제전망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면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줄 투자기회가 생겨난다. 레버리지를 이용한 투자자, 즉 빌린 돈으로 자산을 사려는 투자자들이 늘어나면서 신용 공급이 급격히 증가한다. 매수자가 늘어나니 자산가격이 오르고, 자산가격이 오르니 더 많은 매수자가 몰리는 피드백이 벌어진다. 광기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같은 투기붐은 계속 이어지다가 보다 영리하거나 운이 좋은 친구가 시장에서 빠져나간다. 가격 상승세는 멈추고, 점점 더 많은 투자자들이 이제는 팔 때라고 결정한다. 패닉이 시작된다. 투자자들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사건이 터지고, 투자자들은 지금까지 투자 결정을 부추겼던 광기에서 깨어난다. 패닉은 더욱 강화돼 붕괴로 이어진다. 투자자들은 대출상환 요구에 시달리고, 결국 가격은 불문하고 팔아 치우기에 급급해진다. 붕괴는 더욱 가속화한다. 마침내 궁극적 대여자(the lender of last resort)의 개입으로 패닉이 멈출 때까지 금융위기는 경제전반에 가공할 충격을 미칠 수 있다.

킨들버거는 이 책에서 시장은 때로 비합리적일 수 있으며, 언제나 스스로 치유하지는 못하므로 궁극적 대여자가 반드시 개입해야 하는 시기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궁극적 대여자의 개입은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를 야기한다. 금융위기가 닥치더라도 궁극적 대여자가 개입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대중들이 무모한 투기에 나서는 것을 막아야 한다. 킨들버거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모호성과 함께 궁극적 대여자의 능숙한 기술을 제시한다. 궁극적 대여자는 언젠가 개입해 붕괴 국면에서 구원해주겠지만, 투자자들은 구원의 손길이 임박했음을 결코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킨들버거가 전하는 메시지는 과거에 일어난 금융위기로부터 진정으로 배우고 미래에 발생할 금융위기를 진지하게 대비하지 않는 한 거품은 다시 발생할 것이며,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주 능숙한 궁극적 대여자가 필요할 것이라는 점이다. 로버트 솔로 교수의 말처럼 "광기와 패닉, 붕괴가 늘어나면 우리 모두가 곤경에 빠지겠지만, 적어도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예방접종을 맞은 효과를 얻을 것이다."

풍부한 역사적 사실과 탁월한 분석
킨들버거의 역사적 서술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는 경제 문헌들뿐만 아니라 역사와 정치, 문학에서도 자료를 모았다. 특히 경제학 서적에는 으레 따라다니는 복잡한 수식이나 가정 하나 없이 수 세기에 걸친 금융위기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 제시되는 풍부한 역사적 사실과 탁월한 분석은 경제학을 잘 모르는 독자들에게도 통찰력을 줄 것이다.
이 책의 초판은 1978년에 나왔고, 이번에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번역 출간되는 로버트 알리버 공저판은 2005년에 나온 제5판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새뮤얼슨 MIT 교수가 "이 책을 읽고, 또 읽지 않는다면 5년 안에 후회의 순간을 맞을지 모른다"고 말했던 것처럼 이 책의 개정판이 거듭될 때마다 새로운 금융위기가 추가됐다. 1989년에 출간된 제2판에는 다우존스 평균주가가 하루에 20%이상 폭락했던 1987년 10월 17일 검은 월요일의 세계 금융시장 붕괴위기가, 1996년 출간된 제3판에는 1990년부터 붕괴가 시작된 일본의 거품경제와 1994년의 멕시코 경제위기가, 2000년 출간된 제4판에는 1997~98년의 아시아 경제위기와 러시아 금융대란 등이 새로 추가됐다.
이번에 새롭게 펴낸 제5판에 추가된 내용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20세기의 마지막 15년 사이 발생한 세 차례의 거품과 붕괴에 체계적인 상호 관련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가히 거품경제의 총체적인 경연장과 흡사했던 1980년대 후반 일본의 거품은 1990년 이후 참혹하게 붕괴됐다. 한국도 그 한가운데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던 아시아 경제위기는 1990년대 중반에 형성된 동아시아 거품의 붕괴였다. 신경제와 닷컴붐으로 한껏 달아올랐던 미국 나스닥 주식시장의 거품은 2000년 초 5000을 넘어섰던 나스닥 지수가 1년여 만에 80%나 폭락하며 붕괴됐다.
이들 세 차례의 거품 형성과 붕괴 과정은 시기적으로, 또 지역적으로 독립된 사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 거품의 연결고리는 일본의 자산가격 거품이 붕괴되면서 "밀려나온" 자금이 동아시아 각국의 거품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아시아 금융위기로 이들 나라 통화의 외환가치가 급락하면서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는 급증했고, 미국으로 이동하는 자금 흐름이 극적으로 증가하자 미국의 유가증권 가격은 계속해서 상승했던 것이다.

"교조주의적 접근방식은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매우 위험할 수 있다"
금융위기라는 심각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곳곳에서 "앙천대소를자아내는 일화들과 우아한 풍자"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은 이 책의 또 한 가지 장점이자 독자들을 매혹하는 부분이다. 특히 제5판에서는 이전 판에서 제시된 주제를 토대로 분석영역을 더욱 넓혔다는 점 외에도, 킨들버거 저서 특유의 "너무 많은 내용을 축약시켜 놓은"(서울대 주경철 교수의 표현) 난해함을 확실히 줄였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본문 곳곳에 친절한 배경 설명과 에피소드를 싣고 있다.
킨들버거는 어느 한 가지 논리에만 집착하는 교조주의적 접근방식은 단지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매우 위험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 책의 초판이 나온 1978년 무렵을 떠올려보면, 당시 경제학계의 가장 큰 화두는 "합리적 기대가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목부터, 인간 행동의 비합리성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광기(mania)"라는 단어를 썼다는 것은 킨들버거의 개방적인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경제학이 그 출발점으로 인간 행동의 합리성을 전제하고, 이 개념에 너무 집착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비합리적 사태와 시장의 균형을 이탈시키는 투기적 광기를 인식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킨들버거는 "시장은 완벽하게 작동하며 시장에 대한 모든 규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합리론자도 거부하지만, "시장은 기본적으로 취약하므로 항상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정반대의 입장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시장은 전체적으로 잘 작동하기는 하지만, 때로는 무력해지기도 하므로 지원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게 킨들버거가 이 책에서 전해주는 교훈이다.
[인터파크 제공]

투자의 미래 (제레미 시겔)

1994년 나의 저서 `주식투자 바이블`을 출간했을 때, 나는 주식투자야말로 장기적으로 인플레이션을 헤지하고 여타 다른 자산보다 훨씬 우수한 수익률을 안겨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저점매수 고점매도의 타이밍 매매를 노리는 것 보다는 인덱스를 충실히 따르는 장기투자야말로 가장 우수한 퍼포먼스를 기록할 수 있다고 주장했었다.

이러한 주장의 기본 원칙은 아직도 변함없이 유효하다. 그러나 90년대 사람들을 열광하게 하고, 투자의 세계에 큰 변화를 가져올 사건인 발생한다. 바로 `IT버블`이다. 전체 주식의 수익률은 여타 자산과 비교했을 때 장기적으로 우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산배분포트폴리오 내에서의 주식들간, 혹은 업종간의 수익률 격차는 어떻게 설면할 수 있을 것인가?

지난 50년간의 면밀한 수익률 추적기법을 통해 나는 투자자들이 고기술 산업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주식을 매수하는 데 너무 높은 가격을 지불했으며, 정작 탁월한 수익률을 보장해 주는 주식은 사람들의 흥미에서 벗어난 산업들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나는 기술 혁신을 선도하며 경제 성장을 촉발시키는 기업들이 투자자들에게 뛰어난 수익률을 줄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표현하고자 `성장의 함정`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시장의 비합리적인 변동은 경고의 의미보다는 인덱스화된 주식의 `BUY AND HOLD`전략보다 훨씬 더 좋은 투자기회를 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세계 경제의 성장은 세계화를 지향하는 기업과 투자자에게 전에 없는 규모의 새로운 기회를 열어줄 것이다.

본 서는 다음과 같은 차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성장의 함정을 파헤치다.
  01. 성장의 함정
  02. 창조적 파괴인가, 창조의 파괴인가
  03. 황금기업을 찾아서
  04. 고성장 부문 투자의 함정
2부 새로운 것에 대한 지나친 열광
  05. 시장의 유혹을 물리치는 법
  06. 주식공개상장
  07. 자본비대증
  08. 사양산업의 승리전략
3부 주주가치는 어디서 오는가
  09. 배당과 수익률 그리고 지배구조
  10. 배당의 재투자
  11. 순이익의 진실
4부 고령화 위기와 글로벌 경제의 힘
  12. 과거는 미래의 전조
  13. 고령화 물결의 도래
  14. 고령화 물결의 극복
  15. 글로벌 해법
5부 포트폴리오 전략
  16. 글러벌 시장과 세계 포트폴리오
  17. 미래를 위한 전략

1부 성장의 함정을 파헤치다.
1장 성장의 함정

신기술과 새로운 산업은 고성장으로 우리에게 보답하며 삶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했지만 그것이 투자자들에게도 합당한 수익을 올려주지는 못했다. 가장 혁신적인 기업들조차도 투자자들에게 거의 최선의 투자처는 되지 못한다. 기술적 혁신에 대한 투자자들의 맹목적 추종은 경제성장을 촉발시켜주면서도 투자자들에게는 반복적인 실망감을 안겨주는 아이러니를 가져온다.

왜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인간은 새로운 것을 포용하려는 열정으로 너무나도 높은 가격을 지불해왔다는 사실이다. 신기술의 혜택은 혁신기업의 창업자, 임직원, 벤처 캐피털리스트, IPO를 주간한 IB BANK, 최초 스탁옵션 매수자에게는 혁명적으로 높은 이득을 가지다주지만 이들의 성장을 쫒는 투자자는 반드시 실패하고 만다.

당신이 타임머신을 타고 1950으로 돌아가 뉴저지 스탠더드 오일(엑슨모빌의 전신)과 최고의 IT 기업 IBM중 하나를 매수한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당신은 이미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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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주식을 사겠는가? 당신이 IBM을 선택했다면 다음 표 1-3처럼 뉴저지 스탠다드 오일을 선택한 투자자보다 50년동안 매년 0.6%p낮은 수익을 기록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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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은 성장하는 신기술 분야에서 쇠퇴하는 에너지 산업에 비해 비교가 안되는 탁월한 위치였으며 배당, 순이익, 등 모든면에서 뛰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익률이 왜 낮을까? 답은 수익과 배당을 받기 위해 지불한 가격, 즉 밸류에이션이다. 투자자들은 IBM의 밝은 미래때문에 너무나도 높은 가격을 지불해버렸다. 반면 뉴저지 스탠더드 오일은 관심을 적게 받아 주가가 낮게 유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다 높은 수익률을 기록한 것이다. 비단 뉴저지 뿐만이 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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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5에는 어떠한 성장산업이나 기술 산업도 찾아볼 수 없다.

면밀한 과거 데이터의 분석 결과 나는 다음과 같은 조언을 당신에게 해준다.

ㅇ 1957년 이래 새로이 인덱스에 추가된 기업은 초창기 기업보다 평균수익률이 낮다. 만약 기존의 초창기 기업들을 50년간 보유했다면 당신의 수익률은 동기간 존재했던 그 어떤 뮤추얼 펀드나 자산관리자의 수익률을 초과할 것이다.
ㅇ 배당이 운명을 결정짓는 결정적 요소이다.
ㅇ 주식의 수익률은 순이익이나 시가총액의 성장과는 무관하며 순이익의 성장이 투자자들의 기대를 얼마나 초과하느냐와 큰 관계가 있다. 이것은 PER로 구체화된다.
ㅇ IPO주식을 발행가격으로 산다하더라도 성과는 좋지 않다.
ㅇ 성장의 함정은 산업에도 적용된다.(가장빠른 성장을 보인 금융부분은 지수성장을 따라가지 못했다.)
ㅇ 성장의 함정은 국가에도 적용된다.(가장빠른 성장을 보인 중국은 브라질의 수익률을 따라가지 못했다.)


2장 창조적 파괴인가, 창조의 파괴인가

S&P500 수익률을 주도한 것이 새로운 창조적 기업이라는 주장은 틀렸다. 과거 기업의 인수합병, 스핀오프, 자회사 매각, 배당등 모든 자료를 바탕으로 실질 수익률을 계산한 결과 오히려 오래된 기업 주식들이 매수후 보유가 더큰 수익률을 냈다. 창조적인 기업들의 고성장과 빠른 시가총액 증가는 자본시장에서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3장 황금기업을 찾아서

지난 50년간 최고의 수익률을 보여준 기업은 현 `알트리아 그룹`으로 이름을 바꾼 `필립모리스`다. 이외에 최고 수익률을 기록했던 S&P500기업들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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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기업을 볼 때 놀라운 점은 두산업(유명 소비자 브랜드기업과 제약 회사)이 해당 목록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소비자들 사이에서 최고로 인정되는 브랜드 네임과 제품을 고집하고 쉽게 바뀌지 않는 소비자 `기호`를 공략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성공적인 기업을 찾아낼 것인가?

주식의 장기투자는 해당 기업의 순이익 성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순이익 성장과 투자자들이 기대하는 기대 성장률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 이때문에 뉴저지 스탠다드 오일이 IBM보다 수익률이 좋았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PER로 대변된다. 이것은 성장에 대한 기대치를 측정해줄 수 있는 최고의 도구다. 이것은 다음 그림 3-1에 나타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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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은 이들 기업들 대부분은 PER가 가장 낮은 주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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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 이들 기업의 순이익은 S&P500 인덱스 순이익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했으나 평균 밸류에이션은 S&P500평균보다 약간 높다는 게 놀랍니다.

여기에 배당은 매우 중요하다. 투자수익률 기본 원칙의 힘은 주식이 배당을 지급할 때 극대화된다.

실제로 필립모리스는 PER가 13정도로 저평가 되어있었을 뿐 아니라 배당수익률은 네번째로 높았다. 피터린치는 그의 저서 `전설로 떠나는 월가의 영웅`에서 단순한 전략을 취했다. 그것은 `장기 성장률을 구하고 배당 수익률을 합치고 PER로 나눠서 1보다 작으면 나쁘고 1.5보다 크면 좋다.`

이는 GARP라는 전문가들의 전략과 비슷하다. 주가수익비율을 순이익 성장률로 나눈 주가 수익비율(PEG)를 계산한다.)(배당수익률을 순이익 성장률에 합친다고 가정)

이는 피터린치가 쓴 방법의 역수와 비슷하다. 그러나 그림 3-2의 황금기업들은 전부 린치의 법칙에 들지 않고 필립모리스만 든다.

황금기업의 공통된 특징

과거 46년간의 자료로 보아 고수익의 어떤 기업도 PER가 27을 넘기않았고 시장 평균 배당 수익률에 근접한 배당과 함께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배당을 제공했다.

과거의 황금기업

72년 12월 최고의 유량주로 각광받고 절대팔지 않으리라했던 니프니 피프티 주식들이 꼭지를 쳤으며 이때의 PER는 40을 초과했다. 이후 이들주가는 74년까지 폭락했다.

PER가 가장 높았던 (72년평균 54) 25개 니프티 피프티 주식은 PER가 가장 낮았던(평균30) 나머지 25개 기업보다 수익률이 3%이상 낮다.

니프티 피프티 중에서 기술과 통신관련주식은 좋지 못한 수익률을 주었으며 이들 기술주는 모두 시장수익률보다 못했고 상위 그림3-2의 20개 기업중 하나도 없다.

피터린치조차도 이렇게 고백했다.

"계속적인 투자실패와 관련된 주식은 기술주였다. 98년 디지털 이큅먼트에서 2500만$, 탠덤,모터로라, 텍사스인스트루먼트,EMC에서 비슷한 손실, IBM은 최고의 골치덩이였다. 나는 결코 기술주를 선호하지 않았지만 종종 기술주에 빠지는 나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요약하면

ㅇ최고 수익률 기업은 소비재와 제약에서 강력한 브랜드를 가지고 있다.
ㅇ투자수익은 실제 수익과 기대 순이익 성장에 의해 결정되며 배당은 이 영향을 증폭시킨다.
ㅇ최고 기업들은 1)평균보다 조금 높은 PER 2)평균적인 배당률 3) 평균보다 훨씬 높은 장기 순이익 성장이다. 특히 27이상의 PER는 요주의대상이다.
ㅇ기술이나 통신주는 피하라
ㅇPER가 낮은 주식에 투자는 반대기업투자보다 고수익을 가져다준다.

4장 고성장 부문 투자의 함정

10대 주요산업중 금융은 57년이래 시가총액이 가장크다 반면 에너지는 21%이상이던 것이 6%미만으로 줄었다. 그러나 금융주의 수익률은 S&P500보다 못했고 에너지가 보다 높은 수익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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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주의 70년대 거품, IT주의 2000년 거품을 봤을 때 특정부문이 거대하지는 것을 경계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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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부문은 57년이후 매년 14.19%성장했으며 10개 부문중 가장 고성장했다. 반면 금융부문은 인덱스보다 낮았다. 의료부문에서 새로이 진입한 기업보다는 구 기업들의 수익률이 높았다.

경기비관련 소비재는 경기관련 소비재보다 안정적이고 고수익을 기록해다. 경기소비재는 제품의 질의 유지가 어려웠고 급변하는 소비자 기호를 맞추기 어려워 쇠퇴하는 경우가 많았다.

교통,운수,방위 등의 산업재는 워낙에 다양한 산업이 있어 뭐라하기 곤란하다. 항공기 회사는 어려웠던 반면 GE는 금융으로 통해 수익을 창출했다. 특히 철도는 5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축소되고 부도를 맞았음에도 인덱스를 초과했다. 그 이유는 역시 낮은 기대치로 인한 낮은 주가와 고배당이었다. 이후 80년대 탈규제등으로 많은 이윤을 보게되었다. 이렇듯 장기 침체에 접어든 산업이 좋은 수익률을 안겨주는 경우가 많다.

원자재는 화학,철,제지 등이다. 이분야는 가장 낮은 수익률을 기록했다. 이는 국가경쟁과 산업의 서비스업 이동, 아시아의 값싼 노동력 때문이었다.

통신 역시 빠른 성장에 비해 조악한 수익률을 가져다 주었다. 공공재는 높은 수익률로 분명 매력적이지만 향후의 탈규제 환경에서 살아남을지는 불확실하다. 역사적으로도 이들 기업의 주가는 급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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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어느정도 양의 상관관계가 있지만 꼭 그렇진 않다. 의료와 필수소비재는 고수익을 가져다주었다. 따라서 의료,비경기 소비재, 에너지가 장기적인 승자였다. 결론적으로

ㅇ빠른부문 성장이 수익률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ㅇ특정부문의 시가총액이 급증하는 경우(30%정도) 비중을 축소하라

5장 시장의 유혹을 물리치는 법(버블을 알아차리기)

교훈1. 밸류에이션이 중요하다. 주식의 평균 PER는 지난 55년간 17에 불과했다. 인터넷 버블시 이들의 PER는 50을 넘어 세자리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교훈2. 주식과 사랑에 빠지지 마라. 이번만은 다르다고 낙관론에 젖지 마라
교훈3. 알려지지 않은 대기업을 경계하라. 시스코를 보자. 이 기업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잘 모른다.
교훈4. 세자리 PER는 절대적으로 피해라
교훈5. 그렇다고 버블기간에 공매도를 하지마라. 장기적인 정확이 단기적인 정확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6장 기업공개(IPO)

기업공개를 통해 수익을 얻기는 어렵다. 이는 주식 버블을 이용한 기업공개를 통해 투자은행과 애초에 주식을 가지고 있던 스톡옵션자 및 기업임원들만의 잔치다. 장기적인 성과를 볼 때 IPO를 공개가로 매수하는 것은 항상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 대규모 IPO는 일반적으로 버블의 꼭지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7장 자본비대증

대규모 투자를 통한 생산성 증가가 더 높은 이윤을 가져온다는 것은 `구성의 오류`다. 개별 기업의 혁신적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고성장을 기대할 수 있으나 이것이 경쟁사간에도 일반화된다면 생산성의 이득은 모두 소비자가 가져가게된다.
지속적인 고성장은 결코 따라할 수 없는 기술에서 나온다. 버펫은 사양산업의 버크셔를 팔고 이름만 유지한채 투자회사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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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림에서 알 수 있듯 높은 투자가 실제 고 수익률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8장 사양산업의 승리전략

위대한 산업보다 느리게 성장하는 산업에서 독보적인 이익을 창출하는 기업이 엄청난 투자수익을 가져다준다. 월마트, 사우스웨스트, 뉴코 등이 그 예이다.

9장 배당과 수익률 그리고 지배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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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부터 지금까지 자본이득보다는 배당재투자의 총수익률이 압도적이다. 사실 이기간 130년동안 주식실질누적 수익의 97%가 배당 재투자에서 나왔고 3%만이 자본이득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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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림은 고배당 기업의 높은 수익률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배당수익률이 최근 감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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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일까? 첫째, 배당을 지금하지 않아 얻을 수 있는 성장기회가 배당을 지급해서 사라져버린다는 잘못된 믿음, 둘째, 배당 지금에 대한 이중과세, 셋째 주가에만 신경쓰게 하는 스톡옵션이다. 버펫은 헤서웨이에 과도한 현금을 보유하고 배당을 하지 않는다. 이는 세금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과도한 현금들은 배당처럼 작용해 주가를 끌어올린다.

10장 배당의 재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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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년11월24일 다우지수는 25년만에 공황이전의 주가수준을 처음으로 돌파했다. 그럼 25년동안 주식투자자는 손실만 보았는가? 주식을 가진채 대공황을 맞았더라도 배당을 꾸준히 재투자한 사람은 년 6%의 수익률을 얻었고 채권보다 월등한 수익률이었다. 대공황의 꼭지에서 1,000달러의 주식을 산사람은 공황을 맞고 다우지수가 제자리 걸음했더라도 배당의 재투자로 54년11월에 44,000달러를 얻게된다.

오히려 대공황이 없었고 주가가 꾸준히 성장했을 경우의 수익률이 훨씬 낮다. 이는 떨어지는 배당으로 대공황시에 싸게 주식을 살 수 있었지만 대공황이 없었으면 비싸게 주식을 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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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당은 약세시장에서 투자자를 보호해주고 시장이 다시 살아날 때 높은 수익률을 가져다준다.

11장 순이익의 진실

순이익은 제대로 계산되어야하며 스톡옵션은 비용처리되어야한다.

12장 과거는 미래의 전조

자산수익률의 역사를 보면 주식은 이상하게도 지난 200년동안 연 실질적(인플레이션 감안)으로 6.5~7.0%의 수익을 지속적으로 올려왔다. 71년 이후 금가격은 달러공급과잉으로 불안한 모습을 보였고, 달러가치는 하락,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30년대 이후 재정증권과 채권의 수익률은 제자리걸음을 면치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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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6.5~7%의 숫자를 우리는 `시겔상수`라 명명한다. 반면 다른 자산들은 일관성있는 실질수익률을 보이지 못한다. 시겔상수의 원인은 무엇일까? 아마도 이는 주식의 리스크 프리미엄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주식이 과연 채권보다 위험한가? 이는 주식 수익률의 평균회귀를 알게된다면 전혀 의외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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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보듯이 보유기간이 20년을 넘어가면 오히려 주식의 리스크가 줄어든다. 이는 인플레이션 때문이다. 이는 전세계 주식시장에도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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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5장
글로벌 해법을 통한 미래의 투자전략

버블 붐 - 해리 덴트

그림1-1을 보면 단기적인 정치/경제적 충격에도 불구하고 주식시장과 인구통계학적 추세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1990년대 초반처럼 2009년이나 2010년까지 빠른 주식시장 회복과 더불어 강력한 소비지출 회복 및 경제성장을 볼 수 있다. 그이후 출생률이 낮은 세대대문에 부동산이나 내구재 소비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또다른 장기 하락세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림1-1의 인플레이션을 감안한 다우지수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세대는 약 40년주기의 사이클을 창출한다.

이번호황은 09년말에서 10년 중반사이 베이비붐 세대의 지출과 생산성 주기가 마감된 후에나 끝날 것이다. 또다른 핵심 포인트는 80년(한세대)마다 혁신적인 신기술과 신경제가 나타났다는 점이다.

처음에 신기술과 그 기업들은 서서히 시장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보급률이 10%정도가 되면 급속히 퍼저나가 큰 S자형 흐름을 이룬다.
1886년 발명되어 1900년 상업화된 자동차, 1970년에 발명된 마이크로 칩 등이 좋은 예이다.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직선적인 추세를 예상하는 습성이 있으나 실제는 다르다.
기술부문의 사이클릭한 발전은 생산성 증가, 라이프스타일 및 생활수준의 향상을 가져오고 1922~1929년사이처럼 09년까지 경기호황의 최정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

2000~2002년의 폭락이 기술혁명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술혁명은 핵심 기술이 잠재시장의 90%를 침투할 08~09년사이일것이다.
경기호황의 최종단계는 09년말이나 2010년 초가 될 것이다. 아주 효과적인 10년사이클은 주로 `5`년과 `9`년사이에 가속화된다. 1900년대부터 살펴보다라도 놀랍게 일치한다.

제프리 무어에 따르면 버블에는 세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1.자산버블(80년대 일본주식, 1630년대 튤립버블)
  -지속적인 경제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며 급등후 폭락한다.
2.구조적불안정버블(90년2000년 고유가)
  -산업에 정치적, 제도적 충격이 닥칠때(70년대 석유파동은 아님)
3.기술버블
  -급진적,경제,사회기반을 변화시킴
  -일련의 구조조정을 거친후에야 진정한 강세버블이 형성됨

인구통계학적 소비추세가 강하게 상승하고  뛰어난 성장산업이 S곡선에서 주류로 진입할 때면 경기가속화는 예외없이 발생한다.

그림2-1은 로버트 프렉터가 개발한 그래프이다. 측정가능한 1700년경의 영국주가와 1780년 이후 미국주가를 결합시킨 것이다. 1490년에서 1720년 초까지 230년간의 강세시장이후 1720년에는 버블폭락이 뒤따랐고(사우스시 버블)이후 69년간 약세장이 계속되었다.

프렉터의 엘리어트 파동이론에 따르면 대부분의 강세장은 세번의 큰 상승과 중간에 두번의 조정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그림 2-1에서 1780년이후 강세장에서 엘리어트 파동의 강세장 패턴을 볼 수 있다. 제1파 상승은 1780~1832년 사이에 발생한다. 1837년에는 가격폭락의 제2파 하락이 있었따. 1937~1929년사이에 장기간의 제3파 상승이 있었다. 특히 광란의 20년대 후반 주식상승은 실로 폭발적이었다. 주식시장에 40년의 주기가 있다 그림3-10을 보라. 다음번 정점으로 08~09년, 저점으로 2022년으로 예상한다. 40년 주기 안에는 20년주기가 있다.

첫번째 대폭락: 09년말,10년초~12,14년 깊고 장기적인 약세시장을 예고, 14년이후에는 더욱 강한 4~8년주기의 하향세가 올 것
두번째 대폭락: 2020~2022년

장기강세시장: 2023년이후 이는 세계전쟁과 에코붐세대의 지출증가에서 기인,그러나 82~09년의 호황과는 비교가 안됨, 인구통계학적으로 유리한 동남아나 인도등에 좋은기회가 올 것

09년과 10년이후 투자와 비즈니스 기회는 중국,동남아,인도로 이동할 것이다. 투자자들은 10~12년 혹은 14년까지 유동성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10~12년까지 주가급락장에서 아시아나 헬스케어도 약할 것이다. 그때야말로 투자기회다. 22~23년경에 미국과 캐나다 몇몇 선진국에서 에코붐세대에 의한 호황이 올것이다. 중국은 20~30년까지는 정점에 다다를 가능성이 높다.

불안(Status Anxiety)

불안의 원인

사랑결핍

높은 지위를 바라는 마음

1
누가 우리에게 호감을 보여주면 우리는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들은 모두 개인 정체성을 가진 존재권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흔히 언어도단에 가깝게, 사회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을 `유명인(이름있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필요이상의 부를 창조하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만을 가지고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돈을 모으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존경을 추구한다. 존엄을 갈망한다. 어째서? 왜? 나 스스로는 나의 존재가치를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에서 이렇게 말했다.

“탐욕과 야망을 품고 권력과 명성을 얻으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주목받고 관심받고 내 말에 귀 기울여주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부는 세상의 관심을 모은다. 반면 가난한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은 쉬 잊혀진다.” 잊혀짐은 근원적인 공포심일지도 모른다.


3
어른이 되어 사랑을 찾아가는 두 가지 방법
첫째, 노래와 문학의 주제가 되는 남녀간의 사랑
둘째, 세상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얻고자 하는 것, 즉, 탐욕과 야망

우리는 후자에 대해서는 쉽게 입에 올리려 하지 않지만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본연의 핵심적인 삶의 명제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중요성

1
윌리엄 제임스는 ‘심리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Psychology>’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개인이 모든 구성원으로부터 완전히 무시당하는 것이 만약 가능하다면 그는 울화와 절망감을 견디지 못해 차라리 잔인한 고문을 당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2
왜 타인의 관심이 필요한가? 그들의 관심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보다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존재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야 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른지 모른다. 그 결과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관점이 곧 내가 나를 바라보는 관점이 되어버린다.

우리의 `ego`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줘야 하고 무시라는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 남의 관심 때문에 기운이 나고 무시 때문에 상처받는 자신을 보면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어디있나 싶어 정신이 번쩍든다.


속물근성

1
속물이란 하나의 가치척도를 지나치게 떠받드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가치를 동일하게 취급한다.

2
언론 때문에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속물은 독립적 판단을 할 능력이 없는 데다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갈망한다. 그래서 언론이 이들의 사고를 결정해버리는데 그 수준은 놀라울 정도로 위험하다.


기대

물질적 진보

과거 200년동안 서방국가들의 생활수준은 역사상 가장 빠르고 급진적으로 풍족해졌다. 2차대전후 경제팽창에서 서방, 특히 미국의 소비자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특권을 누렸지만 어찌된 일이지 동시에 가장 괴로운 사람들이 되었다.

평등,기대,선망

1
그들의 괴로움이란 불안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실제적 궁핍이 급격히 줄었음에도 궁핍에 대한 공포는 오히려 늘어났다.

2
부나 존중의 수준은 준거집단에 크게 좌우된다. 쾌적한 아파트에 살고 편안한 일자리에 출퇴근한다고 해도 동창회에서 친구몇명(최강의 준거집단)이 더 매력적인 직업으로 더 큰집에서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괴로워진다. 그런 면에서 강력한 준거집단인 친구의 성공은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3
이러한 고통은 계급제도가 확연했던 고대시대에는 이렇게 만연되지는 않았다. 준거집단의 생활수준은 비슷했으며 다른 계급에 질투나 선망의 의식은 없었다. 자유주의와 상업주의가 가져온 평등사상, 이것이 우리들의 고통의 씨를 뿌렸다.

4
19세기 초부터 서양의 서점들은 자수성가한 영웅들의 자서전이나 조언집, 교훈담등이 독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또 의도와는 달리 결과적으로 그들을 슬프게 했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Autobiography>’을 필두로 하여 윌리엄 매슈즈의 ‘출세하기<Getting On in the World>’, 리먼 애벗의 ‘성공하는 방법<How to Succeed>’, 윌리엄 스피어의 ‘성공의 법칙<The Law of Success>’등이 잇따라 출간됐다. 이러한 출판 경향은 지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앤서니 로빈스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Awaken the Giant Within>’은 강한 결심을 통하여 인생을 바꾸라고 종용한다. 미디어는 이러한 분위기를 한껏 무르익게 한다.

5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Wealth of Nature>’(1776)에서 근대사회가 이루어낸, 경외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생산성과 원시적인 사냥과 채집사회의 형편없는 자원을 비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원시사회는 극심한 궁핍에 시달렸다. 기아와 가난한 자는 짐승의 밥이 되곤 했지만 혁신적인 생산성으로 근대의 모든 구성원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그는 가난한 노동자라해도 근면하게 일하기만하면 과거의 어떤 야만인도 얻을 수 없었던 많은 물자를 손에 넣고 편리한 생활을 즐길 수 있다고 했다. 하물며 250여전이 지난 지금에서야 두말할 게 있겠는가?

6
그러나 스미스보다 22년전 장-자크 루소는 날카롭고 기묘하지만 섬뜩할 정도로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야만인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인간 불평론 기원론<Discour surl’origune et les fondements de l’inegalite parmi le bommes>’(1754)에서 다들 야만인과 근대의 노동자중 노동자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과연 정말일까 하고 물었다.

루소의 주장은 부에 대한 명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사회는 첫번째 방법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이루었지만, 욕망에 줄기차게 부채질을 하여 자신이 가장 뛰어난 성취의 한 부분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부유하다고 느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와 같다고 여겼지만 우리보다 더 큰 부자가 된 사람과 실제로나 감정적으로나 거리를 두면 된다.

발전한 사회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전보다 높아진 소득을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를 더 부유하게 해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볼 때 우리를 더 궁핍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무제한의 기대를 갖게 하여 우리가 워하는 것과 얻을 수 있는 것, 우리의 현재의 모습과 달라졌을 수도 있는 모습 사이에 늘 간격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루소는 머리 위에 지붕이 있고, 배를 채울 과일 몇알과 견과가 있고, 저녁에 투박한 악기를 연주하거나 낚시용 배를 만들 수만 있다면 부족함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능력주의

실패에 관한 유용한 옛이야기

고대시대, 사람들은 계급에 의해 명확히 나뉘었다. 서양계급사회(기타 세계도 마찬가지지만) 주요한 세계급 – 성직자, 귀족, 농민 – 은 매우 확고했으며 나면서부터 결정된 것이다. 농민은 낮은 위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도덕적 의미는 없었다. 오히려 농민계급은 생산계급으로서 사회유지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귀족들도 이를 알고 있었다. 성서에도 나타난다. 예수는 목수의 아들이며 부자는 성서에서 부정적으로 다뤄졌다.

불안을 일으키는 새로운 성공이야기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개념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1723년 봄, 런던의 의사 버나드 맨드빌은 소책자 ‘벌의 우화<The Fable of the Bee>’에서 부자들이야말로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의 생존을 돕는 쓸모있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그의 책의 부제가 말해주듯이 “사적인 악덕, 공적인 유익”으로 요약된다. 24년대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돈이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님을 인정했으나 동시에 돈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에 매우 감사한다. 이런 욕망과 능력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보다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이런 이야기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다지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도덕성까지 해치는 것은 아니어서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켜주었다. 그런데… 시간이 더 지나가자 지위에 도덕적 의미까지 부여되었다.

계급제 사회에서 평등한 사회로 이행하면서 세습으로 유지되었던 기존의 무능력했던 왕, 귀족, 장군 등의 높은 지위자들은 퇴출되고 공정한 경쟁에 의해 능력 있는 사람들이 높은 지위를 얻게 되었다. 교육은 평등하게 이루어졌고 능력주의가 자리잡았으며 불평등을 조장하는 것들은 제도적으로, 혹은 자연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능력과 세속적 지위 사이에 신뢰할 만한 관련이 있다는 믿음이 늘어나면서 돈에도 새로운 도덕적 가치가 부여되었다. 록펠러는 부끄러움 없이 주님이 자신을 부자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스코틀랜드의 의사 새뮤얼 스마일즈는 ‘자조<Self-help>’에서 궁핍한 젊은이들에게 높은 목표를 세우고, 공부하고, 절약하라고 권한 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돕는 정보를 비난했다. 심지어 엄청난 기부금을 냈던 앤드류 카네기조차도 그의 ‘자서전<Autobiography>’(1920)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선행위에 쓰는 1,000달러 가운데 950달러는 차라리 바다에 버리는 게 낫다. 자선으로 먹여살리는 주정뱅이 부랑자 또는 게으름뱅이 하나하나가 이웃을 부도덕하게 감염시킨다. 감정은 적을수록 좋다. 자선행위로는 개인이든 인류든 나아질 수가 없다. 진정 고귀한 사람은 결코 자선이나 동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불안의 해법

철학

명예와 약점

기원전 5세기 그리스에는 지위로 인한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소크라테스, 디오게네스, 엠페도클레스 같은 철학자들은 세속적인 사람들의 이목으로부터 자유롭고 독립적이었다. 이 철학자들은 남들이 우리를 보는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모욕은 근거가 있던 없든 수치를 준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지적인 염세주의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면밀하게 검토해보면서 서글픈 동시에 묘하게 위안이 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고 이야기해왔다. 어떤 문제이든 다수의 의견에는 혼란와 오류가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샹포르는 그의 이전과 이후의 여러 세대의 철학자들의 염세적 태도를 반영하여 이렇게 말했다. “여론은 모든 의견가운데 최악의 의견이다.”

이렇게 여론에 결함이 있는 것은 공중이 이성으로 자신의 생각을 엄격하게 검토하지 않고, 직관, 감정, 관습에 의존해버리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피상적이고 편협하고 잘못되었고 하찮다는 것, 그들의 잘못이 수도없이 많다는 것을 알게되면 점차 그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철학적 염세주의의 중요한 모범을 보여준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그는 이런식으로 묻는다. “만일 청중이 한두 사람만 빼고는 모두 귀머거리라면 그들의 우렁찬 박수갈채를 받는다 해서 연주가가 기분이 좋을까?”

인간성에 대한 통찰력있는 시각이 유용하기는 하지만 친구가 줄어든다는 단점이 있다. 샹포르가 이러한 삶의 자세의 큰 대가를 넌지시 드러낸 순간 쇼팬하우어는 선선히 그 가능성을 받아들였다. 그는 곧이어 모든 젊은이들이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충고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만날 일이 줄어들수록 더 낫은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

불안을 줄이는데 예술은 힘을 발휘한다. 권위에의 풍자,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 삶에 대한 비평… 예술작품은 세상을 더 진실하게, 더 현명하게, 더 똑똑하게 이해하는 방법을 안내해준다.

정치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역적으로 높은 지위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고대 스파르타의 전사, 로마의 성직자, 중세의 기사, 영국의 신사, 이들이 중요시하는 것이나 이들이 되는데 필요한 것은 지금 시점에서 본다면 치졸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다. 지금 중요시되는 것도 미래에는 그렇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기준을 바꾸는 것을 시도해보는 것, 이것이 정치이다.




종교

우리들에 대한 유한성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종교는 시작한다. 잘났건 못났건 고귀하건 미천하건 결국 우리가 죽음 앞에서는 평등하다.

사람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던 가장 힘 센 인간과 커다란 자연 – 큰 사막, 높은 산, 빙하와 대양 – 사이의 차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광대한 시공간을 인식하는 순간 사회적 위계속의 우리란 보잘 것 없는 느낌안에 포섭되면서 마음에 위로를 얻게 된다.


보헤미아

19세기초 서구사회에 새로운 집단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소박하고,청빈하며,예술적이고,때론 우울하고,문란한 듯한 성생활을 하고,독특한 헤어스타일을 가진 그들을 우리는 보헤미안이라고 불렀다. 보헤미안들은 부르주아지가 대표하는 거의 모든 것을 싫어했으며 그들을 모욕했다.

오해를 받고 거부당하며 살지만 그럼에도 인사이더보다 우월한 아웃사이더라는 신화는 보헤미아의 가장 위대한 인물들 다수의 삶을 반영하거나 그 삶을 규정한다.

몸은 알고 있다 - 뤼르그 달케

빛이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란 과학적 사실로부터 사람들이 깨달은 것은 너무 적었습니다.

사실 현대문명의 기본이 된 개인주의는 물질단위를 입자로 보기 때문에 개체 중심의 세계관이 형성된 것입니다.

파동으로 본다면 한 개인의 언행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이 책은 일종의 기적(氣的)인식론의 초보서입니다.


목차소개

제1부 질병과 치유를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인 가설
1장 질병과 증상
2장 양극성과 통일성
3장 그림자
4장 선과 악
5장 인간은 병에 걸려 있다
6장 원인을 찾아서
7장 근원을 살피는 법
의학에서의 인과성
전체증상의 시간적 속성
증상의 유추와 상징내용
강요된 것들
상반되는 증상들의 공통점
점진적 상승단계
자신에 대한 무지
이론의 요약


제2부 질병의 증상들과 그 의미

1장 염증을 일으키는 질병
자극
분비단계
방어활동
발열
해열(해결)
죽음
만성화

2장 방어체계

3장 호흡
기관지 천식
감기와 독감질환

4장 소화
치아
삼키기
메스꺼움과 구토

소장과 대장
취장(이자)

담낭(쓸개)
거식증(신경성 식욕부진)

5장 감각기관

-시력장애
-결막염
-사팔뜨기
-내장안
-시각상실



6장 두통
긴장성 두통
편두통

7장 피부
피부발진
가려움증(소양증)

8장 신장
신장결석
위축신장 - 인공신장
방광

9장 성문제와 임신
생리장애
상상임신
임신에서 오는 문제점들
임신중독
출산과 수유
불임증(수태불능)
폐경과 갱년기
불감증과 발기불능

10장 심장과 혈액순환
저혈압-고혈압
심장
결체조직 이완-정맥류-혈전증

11장 운동기관과 신경
자세
추간판과 좌골신경통
관절
류머티즘의 여러양상
운동장애:사경과 서경
손톱 물어뜯기
말더듬 증

12장 사고
교통사고
가정과 직장에서의 사고
골절

13장 정신적인 증상들
우울증
불면증
중독증
-탐식증
-술
-담배
-약물

14장 암

15장 에이즈

16장 앞으로의 과제


1.알레르기
˚ 알레르기 = 물질로 변한 공격성향
   알레르기 환자는 스스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

① 나는 왜 내 공격성향을 의식 속에 머물도록 허용하지 못하고, 그것을 억지로 몸의 고역이 되도록 하는가?
② 어떤 생활영역에 대해 내가 그토록 불안을 느껴서 그것을 피하는 것인가?
③ 나의 알레르기 원인물질은 어떤 테마를 암시하는가? 성욕, 충동, 공격성향, 번식, 어두운 생활영역
④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을 마음대로 움직이기 위해 내 알레르기를 얼마나 많이 이용하는가?
⑤ 나의 사랑, 안으로 받아들이는 나의 능력은 어떤 상태인가?

알레르기는 해롭다고 인식되는 물질에 대한 과민반응이다. 몸의 생존능력과 관련하여 볼 때 신체 고유의 방어 체계는 전적으로 그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몸의 면역체계는 알레르기 원인물질에 대항하는 항체를 형성해서 침입자들에 대해 효과적으로 방어한다.

알레르기 체질의 사람에게서는 이 방어의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 이들은 중무장을 갖추고 적개심을 점점 더 많은 분야로 확대한다. 이 많은 적들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그는 다시 더 강력한 무장을 갖추게 된다. 군사분야에서 중무장이 항상 강한 공격성향의 표시인 것처럼, 알레르기도 억압되어 있던 공격성향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알레르기 환자는 자신의 공격성향에 문제가 있지만, 그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알레르기에 있어 공격성향은 의식에서 몸속으로 내려온 것이며, 이제 몸속에서 맹렬한 기세를 보인다 : 환자는 마음껏 방어하고 공격하고 맞서 싸우고 제압한다.

이 재미난 일이 적들이 없어져서 너무 빨리 끝나지 않도록 아주 하챦은 대상들도 적으로 선언된다 : 꽃가루, 고양이나 말의 털, 먼지, 세제, 담배연기, 딸기, 개, 토마토, 이 선택은 제한이 없으며, 그는 필요하다면 어떤 것과도 맞서 싸우지만, 거의 언제나 몇몇 상징성을 띤 단골 메뉴들을 특별히 선호한다.

공격성향이 불안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불안을 느끼는 것만 물리친다.

자주 언급되는 알레르기 원인물질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대개 어떤 생활분야가 알레르기 환자에게 그토록 엄청난 불안을 일으켜서 환자로 하여금 그것과 싸우게 하는지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여기에 수위를 차지하는 것은 애완동물의 털, 무엇보다 고양이의 털이다. 털가죽이 전반적으로 그러하듯이, 특히 고양이의 털가죽에 대해 사람들은 쓰다듬고 애무하는 것을 연상한다. 그것은 부드럽고 포근하며, 몸에 달라붙지만, 그럼에도 '야성적'이다. 그것은 성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토끼 털가죽도 이와 비슷하다. 말의 경우에는 충동적인 요인들이 더 강하게 강조되며, 개에게서는 공격적인 요인들이 강조된다. 그러나 이 차이점은 미세하며,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왜냐하면 상징은 결코 명확한 경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건초성 알레르기 환자들이 가장 자주 언급하는 꽃가루도 이와 동일한 영역을 대표한다. '한창 무르익은' 봄이 환자들이 가장 많이
'시달리는' 계절인 것과 마찬가지로, 꽃가루는 번식의 상징이다.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짐승의 털과 꽃가루는 '성욕', '충동', '다산성'이라는 테마들이 불안으로 가득 채워져 있으며, 그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들을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집안 먼지 알레르기를 통해 나타나는 더럽고 불결한 것에 대한 불안도 이와 비슷하다. 알레르기 환자가 알레르기 원인물질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과 관련된 생활영역도 피하려고 노력한다. 이 환자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는 여기서도 아무런 제한이 없다. 애완동물들은 없애버리고, 꽃나무를 뽑아 버리고, 아무도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 등, 주변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전횡을 부리면서 알레르기 환자는 자신의 억압된 공격성향을 실현하기 위해 위장된 활동영역을 찾아낸다.

알레르기 '과민성을 없애는' 갖가지 약물치료와 배려는 그 아이디어의 측면에서 보자면 좋다. 다만 진정한 효과를 보려면 그것을 신체적인 영역이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알레르기 환자는 자신이 회피하고 거부한 영역과 의식적으로 대결을 벌이는 법을 익히고, 마침내 그 영역을 자신의 의식 속으로 완전하게 동화할 수 있을 때에만 치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레르기 환자가 방어 전략을 짜는데 도움을 주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는 자신의 적들과 화해를 해야만 한다. 그는 적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알레르기 원인물질은 알레르기 환자에게오직 상징적인 작용만 가져오며, 결코 물질적. 화학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아무리 철저한 유물론자라도 이 사실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알레르기가 밖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항상 의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그가 깨닫는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마취상태에서는 알레르기가 나타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심한 흥분 상태에 있는 동안에도 모든 알레르기가 사라진다.

그와는 반대로 모사된 것들, 예를 들어 고양이의 사진이나 영화 속의 연기를 내뿜는 기관차만으로도 벌써 천식환자에게 발작을 불러온다. 알레르기 반응은 알레르기 원인물질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알레르기 원인물질의 대부분은 성욕, 다산성, 공격성향, 지저분한 행동과 같은 생명력의 표현이다. 이 모든 영역에서 생명은 가장 활발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억지로 밖으로표출되기를 바라는 이 생명력은 알레르기 환자에게 엄청난 불안을 불어넣는다.

그는 결국 생명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가 꿈꾸는 이상은 균이 없고 싹이 트지 않고 열매가 맺지 않는 것, 충동과 공격성향에서 해방된 그런 상태다. 그러므로 알레르기가 치명적인 자기 면역 질환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질환에 걸리면 너무나 연약한 인간의 몸은 마침내 스스로 파멸해 이를 때까지 격렬한 공격을 한다. 그때는 저항하는 것, 즉 스스로 봉쇄하고 차단하는 것이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관 속에서 완전하게 성취된다. 관은 알레르기 원인물질이 없는 진정한 방인 것이다.

2.피부질환
피부는 몸의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만큼 피부병처럼 신경 쓰이고 광범위하며 잘 낫지 않는 질환도 없을 것이다. 피부의 온갖 징후들, 마른버짐에서부터 습진, 가려움증 그리고 피부암까지
대체 몸은 그러한 증상을 통해 내게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걸까?

피부 질환

피부의 문제점과 습진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잘 추적해보아야 할 것이다.

① 나는 너무나 심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가?
② 나의 교제 능력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
③ 나의 거부하는 태도 이면에는 친숙해지고 싶은 억압된 소망이 도사리고 있는가?
④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위해 경계를 뚫고 나오려는 것은 무엇인가? (성적 욕구, 충동, 열정, 공격 성향, 흥분)
⑤  실제로 무엇이 나를 안달하게 만드는가?
⑥ 나는 자신을 고립 속에 가두어 놓았는가?

피부 발진

자주 발생하는 피부병들 중의 하나는 '건선'이라고도 불리는 마른버짐이다. 이것은 경계가 뚜렷하고, 원반 내지 평면 모양을 보이며, 은백색의 비늘로 덮여 있다.

피부의 자연적 각질이 마른 버짐에서는 도를 넘어선 것이다. 마른버짐은 필연적으로 동물의 갑각 조직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는 피부의 자연적인 보호기능이 갑각으로 둘러싸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마른버짐이 있는 사람들은 모든 방향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그들은 어떤 것도 받아들이거나 내보내려 하지 않는다.

이 심리적인 거부와 고립의 결과를 라이히?'성격갑각'이라고 불렀다. 모든 종류의 방어 이면에는 '상처를 입게 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숨겨져 있다. 어떤 사람의 방어가 더 심하고 갑각이 더 두꺼울수록, 내면의 민감성과 상처에 대한 불안은 더욱 더 크다.

우리가 어떤 갑각류의 껍질을 벗겨내면, 무방비 상태의 연약하고 상하기 쉬운 모습을 대하게 된다. 어떤 것도 자신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장 예민한 사람들이다.

"거친 껍질 속에는 대부분 말랑말랑한 알맹이가 들어 있다."는 격언도 이러한 경험을 의미한다. 그러나 상처받기 쉬운 영혼을 갑각을 사용해서 보호하려는 노력은 비극적 운명을 지니고 있다. 비록 갑각이 상하고 다치지 않도록 보호해주기는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사랑과 온정마저도 '막아버린다.'

"사랑은 자신을 열어놓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방어를 취약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갑각은 영혼을 생기의 흐름으로부터 차단하며 갑갑하게 만든다. 그리고 불안은 더욱 더 늘어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는 것은 점점 더 힘들어진다.

 인간은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방어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영혼이 상처를 입는 것을 그냥 버려두어야만 한다. 그래야 영혼이 그것 때문에 파멸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경이로운 것을 경험할 수 있기 위해서는 상처받기 쉬워져야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조처는 오직 운명이나 심리치료와 같은 외부의 압박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상처받기 쉬운 민감함과 갑각을 두르는 것의 연관성을 상세하게 설명한 이유는 마른버짐이 신체의 영역에서 이 연관성을 인상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마른버짐은 피부의 생살을 드러나게 하고, 갈라지고 상처가 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피부는 감염될 위험이 높아진다.

우리는 여기서 극과 극이 어떻게 서로 맞닿아 있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갈라터진 부위와 갑각이 동경과 불안 사이의 갈등을 얼마나 명확하게 깨닫게 해주는지도 알게 된다. 마른버짐은 팔꿈치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잦다. 팔꿈치를 이용하여 우리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다. 팔꿈치로 몸을 받친다. 바로 이 부위에서 조직 경화증과 쉽게 갈라터지는 부분이 나타난다. 마른버짐의 경우에 멀리하고 격리하는 것이 절정에 달했기 때문에, 마른버짐은 그 환자를 신체적으로 다시 '개방되고 상처 입기 쉽게'만든다.

가려움증(소양증)

가려움증은 여러 가지 피부병(예를 들어 두드러기, 담마진)을 수반하는 현상이지만, 또한 어떤 원인이 없이 단독을 나타나기도 한다.
가려움증은 사람을 거의 미쳐버리게 할 수도 있다. 환자는 끊임없이 신체의 어떤 부위를 긁어야만 하는 것이다. 가려움과 긁는 것은 정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 나는 가렵다, 혹은 그것은 나를 긁지 못한다. 이 표현에서 우리는
가렵다와 긁다는 말을 자극하다는 말로 가장 쉽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가려움은 자극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려운 자극이라고도 말한다.

비록 가렵다와 자극하다는 말에서 성적인 연관성이 쉽게 떠오르지만, 이 개념들 속에 함께 표현되어 있는 다른 영역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공격적인 의미에서도 자극할 수 있으며, 저녁의 평온한 분위기도 자극이 가득할(매력적일) 수 있다.

무엇이 어떤 흥분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내면의 어떤 것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것이 공격성향이든 성적 욕망이든 애정이나 사랑이든 상관 없이 말이다. 자극은 사람들 사이에 양면적인 가치로 인식된다.
우리가 어떤 자극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할지, 아니면 그것에 흥분되는 반응을 보일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어떤 경우든, 자극은 흥분을 불러온다. 라틴어 가려움(prurigo)도 색정, 정욕을 뜻하기도 하며, 거기에 해당하는 동사 가렵다(prurire)도 마찬가지다.

몸에 나타나는 가려움증은 육체적인 면에서 어떤 것이 나를 흥분시키고 자극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정신적인 면에서 간과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가려움증으로 나타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가려움증 이면에는 드러나기를 원하는 어떤 열정, 내면의 불길, 격정이 놓여 있다. 그 때문에 그것은 가려움증을 통해 억지로 긁게 만드는 것이다. 긁는 것은 발로 파헤치고 땅을 파는 행동의 온건한 형태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찾아내서 세상에 알리기 위해 땅을 파고 헤집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려움증 환자는 자신을 안달나게 하고 괴롭히고 자극하고 흥분시키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상징적으로 피부의 표면을 긁는 것이다. 자신을 그토록 신경질나게 하는 것을 찾아내면, 사람들은 매우 긁어 상처가 났다고(아주 기분 좋게) 여긴다. 따라서 가려움증은 항상 나를 가렵게 만드는 것 (내가 안달하는 것)에 관해 알려주며, 나를 냉담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 내 영혼에서 불타고 있는 것(긴박한 것)에 관해 밝혀준다

: 그것은 화끈한 열정, 불같은 열망, 뜨거운 사랑 혹은 또한 분노의 불길일 수도 있다.

가려움이 종종 피부발진, 붉은 반점, 따끔거리는 발진과 함께 나타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요구사항은 의식 속에서 안달하게 만드는 것을 찾아낼 때까지 긁으라 (신경을 쓰라는) 것이다. 그것은 매우 자극이 가득할(매력적) 것이다.

3.감기
..감기는 항상 우리가 코가 꽉 막혔거나(넌더리를 내거나), 어떤 일에 코감기가 들어(화가 잔뜩 나)있는 그런 위기상황에서 나타난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에게 위기상황이라는 용어는 너무 과장되게 들릴지 모른다. 물론 여기서는 결정적인 인생의 위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그만큼 심각한 증상으로 나타난다. 위기상황이라는 말은 일상에서는 사소하고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만, 정신에 있어서는 중요한 상황을 나타내는데 사용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과중한 부담으로 느끼고 그 때문에 너무나 힘들어서 약간 쉬고 싶은 정당한 이유를 찾는 그런 상황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당장 일상의 이 사소한 상황에서 오는 힘든 과제와 그것을 피하고싶은 욕구를 확실히 인정할 각오가 되어 있지않기 때문에, 그것은 신체의 증상을 통해 나타난다.

몸은 이것을 코가 막히고(지긋지긋함) 코감기에 걸린 것(화가 잔득 나 있는)을 통해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무의식적인 과정을 통해서도 우리는 목적을 성취한 것이다. 심지어 이런 상황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대단한 이해심을 보여준다는 장점도 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이 갈등을 처리하는 것으로는 이런 이해심을 전혀 기대할 수 있다.

감기는 일단 부담이 되는 상황에서 손을 떼고 약간 물러나있게 한다. 그리고 다시 자신에게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짜증을 신체의 영역에서 마음껏 드러낼 수 있다.

머리가 아프고(이 상황에서 계속해서 의식적으로 일에 몰두하는 것을 아마 누구에게서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고, 사지가 아프고 쑤신다. 전신으로 퍼진 이 짜증은 결국 머리가 쑤시는 통증으로까지 심해질 수도 있다.

누구도 우리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는 안 되며,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도 우리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 코가 막히고 모든 의사소통이(숨쉬는 것이 접촉이다!) 불가능하게 된다. "나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마, 나는 감기에 걸렸어!"라고 위협을 하면서 우리는 모든 사람을 우리 곁에서 떨어져 있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러한 방어태도를 재채기로 한층 강화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숨을 내뱉는 것이 재채기를 할 때는 아주 공격적인 방어수단으로 그 기능을 바꾸기 때문이다. 또한 의사소통으로서의 말도 목이 쉬어서 최소한으로 줄어든다.

아무튼 논쟁을 벌이는 데는 더 이상 충분하지 못하다. 요란한 기침은 그 위협적인 소리를 통해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만 말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토록 여러 가지의 방어수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기의 한 증상인 편도선도 몸의 가장 중요한 방어기관의 하나로서 능력을 발휘한다. 이때 편도선도 몸의 가장 중요한 방어기관의 하나로서 능력을 발휘한다.

이때 편도선은 너무나 부어올라서 더 이상 모든 것을 다 삼킬(참을)수 없다. 이것은 이 환자에게 자신이 원래 무엇을 못 참겠는지에 대한 자기 비판적 질문을 하도록 자극한다.

삼키는 것은 사실 안으로 들여보내고 받아들이는 행위다. 하지만 바로 이것을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원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감기는 우리에게 모든 면에 걸쳐 보여준다. 독감은 모든 움직임을 마비시키며, 때로는 심지어 어깨 통증을 통해 자신의 어깨에 지워져 있고 더 이상 견뎌내고 싶어하지 않는 문제의 심각성을 명확히 깨닫게 해준다. 이러한 문제들의 상당 부분을 우리는 누른 가래의 형태로 몸 밖으로 내보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 문제들에서 더 많이 벗어날수록 더욱 홀가분한 기분이 든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막았고, 모든 흐름과 모든 의사소통을 중단시켰던 끈끈한 가래가 다시 흐르기 위해서는 녹아서 액체로 변해야만 한다. 결국 우리가 감기에 걸릴 때마다 감기는 매번 다시 어떤 것을 진척시켜준다. 자연요법은 감기를 당연히 건강에 좋은 소독작용이라고 본다. 이 작용을 통해 톡신이 몸 바깥으로 씻겨나가는 것이다.

정신의 영역에서는 풀려서 제거되는 문제점들이 이에 해당한다. 몸과 정신은 위기를 겪으면서 강화된다. 언젠가 다시 코가 막히는(넌더리를 내는) 다음 번까지.

4.기관지 천식
다소 병약한 어린애들이 그렇듯 어릴 적 나도 기관지염을 오래 앓았다. 결핵도 자주 의심하고 감기에 들면 혹독하게 앓았다. 어른이 되어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호흡량이란 절대적으로 빈곤한 것이었고 산을 오르는 일이나 달리기를 하는 건 꿈도 꾸고 싶지 않게 공포스러웠다.

가슴을 내미는 것(과시하는 것) 속에는 상당량의 공격성향도 들어 있다. 천식 환자는 자신의 공격성향을 적절하게 어떤 언어적인 수단을 통해 표현하는 법을 익히지 못했다.

그는 울분을 터뜨리고 싶어하며, 거의 터져버릴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공격성향을 적절하게 고함을 지르거나 욕을 하는 것으로 드러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가슴 속에서 막혀 있다.

그러므로 이 공격적인 표시들은 신체영역으로 되돌아가며, 기침과 가래가 되어 밖으로 나온다. 공격 성향은 그 외에도 거의 언제나 천식과 결부되어 있는 알레르기 요인들에서도 나타난다. 천식 환자는 사랑을 갈망하는 인간이다. 그는 사랑을 얻고자 하며,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이 숨을 들이 쉬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랑을 줄 수는 없다. 날숨을 쉬는 데 지장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 환자에게 도움이 될까?
모든 증상들에서 그러하듯이 단 한가지의 처방밖에 없다
: 올바른 인식과 자기 자신에 대해 단호하게 정직함을 보이는 것이다.

guns,germs,steel<총,균,쇠> - 제레드 다이아몬드

농경 목축이 갖는 이점으로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며 이는 국가와 정치, 문화와 법률같은 사회시스템, 전쟁을 통한 무기개발능력 등을 비약적인 상승을 가져왔다. 그리고 문자가 등장했다.

문자는 근대 제국 통치의 절대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문자 중 가장 오래된 문자 체계인 수메르 인의 설형 문자를 생각해 보자. 이 문자가 정착된 수천 년 전부터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일부 농경 마을에서는 양의 수나 곡물의 분량을 기록하는 등 회계 목적으로 신표를 이용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수메르 인의 문자는 여러 가지 유형의 기호들이 복잡하게 얽히는 체계로 발달하였고, 이는 후에 인간의 보편적 창의성을 입증할 수 있는 문자 체계로 발전하게 된다. 일부 지역을 제외한 많은 지역에서는 수메르 문자나 초기 중앙아메리카 문자(수메르 문자와 비슷하게 만들어지기 시작)를 변경시키거나 적어도 거기서 자극을 받아 문자 체계를 만들게 된다. 문자를 새로 만들어내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지역마다 독립된 문자 체계를 발전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수메르 문자나 초기 중앙아메리카 문자와 그 파생 문자들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문자를 만들어 낼 기회가 견제되었다.

유라시아 세계는 농경문화로 발전하는데 매우 적합한 요건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작물화 가능한 식물(밀)이 존재했고 아울러 가축화 가능한 동물(소,말,양)이 있어야 한다. 메소포타미아 지대나 황하유역은 이런 조건이 충족된 대표적 사례이다. 그에 비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지역은 작물화 가능한 식물과 가축화 가능한 동물이 압도적으로 부족했다.

출발부터 앞서나간 유라시아 지역은 여러가지 요인으로 타 지역과의 격차를 훨씬 벌리기 시작한다. 유라시아 대륙은 동서로 멀리 뻗어 있는 반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는 남북으로 뻗은 대륙이다. 기후는 같은 위도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농경의 확산의 속도는 유라시아쪽이 훨씬 빨랐다.

타 대륙에 비해 농경이 빨리 확산된 유라시아는 강력한 병원균도 가지게 된다. 천연두, 페스트 등 치명적인 전염병은 원래 숙주가 동물인 경우가 많았으나 세균들은 살기에 이상적인 동물(인간)이 크게 늘어난 것을 느끼고 숙주를 다양화한다. 일찍부터 소, 말, 양, 돼지 등 타 대륙애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가축을 가질 수 있었던 유라시아인들은 강력한 병원균 때문에 큰 희생을 치렀으나 종국에는 강력한 세균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된다. 이 지식은 질병의 통제를 통해 유럽지역 인구가 다시한번 폭발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해주었으며 남북아메리카의 수많은 원주민을 손쉽게 죽인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유럽의 강력한 군대가 도착하기 이전에 벌써 원주민들은 유럽의 몇몇 모험가들이 가져온 병원균에 의해 감염되어 인구가 크게 감소한 상태였다.

농경 사회가 인구 증가를 촉진시켰냐 아니면 인구 증가에 따라 농경 사회로의 이행이 강제 되었냐는 여전히 논쟁거리지만, 저자는 이 둘의 관계가 '자가 촉매 작용'이라 단정짓고, 확실한 것은 농경 사회가 좀 더 복잡한 사회를 낳았고, 그 결과 문자와 종교, 야금술 등의 발명을 유발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결과의 연장선에서 현 세계는 지금 이 모습인 것이다.

기술도 그렇다. 기술이란 어느 발명가나 영웅의 개별적인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누적된 행동을 통해 발전한다. 그리고 기술이란 대개 어떤 필요를 미리 내다보고 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된 이후에 그 용도가 새로 발견된다. 발명가가 어떤 새로운 기술의 용도를 발견하면 그 다음 단계는 사회가 그 기술을 채택하도록 설득하는 일이다. 여기서 경제적 이점, 사회적 가치관과 위신, 기득권과 양립 가능성 등의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한다. 이때, 기술의 `확산`이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는데, 바로 여기서 지리적 위치, 상태, 환경적 요인이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정복의 궁극적인 원인은 식량 생산과 각 사회 사이의 경쟁 및 확산이었다. 거기서 시작된 인과 관계의 사슬에 의해 병원균, 문자, 기술, 중앙 집권적 정치 조직 등 정복의 직접적 요인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구체적인 인과 관계는 경우에 따라 달랐지만, 공통적인 요소는 조밀한 대규모 인구와 정주형 생활이었다. 이러한 궁극적인 원인들은 각 대륙에서 제각기 다르게 발전해서 정복의 직접적 요인들에도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Stand Alone Complex

AOI : 모든 정보는 공유해 병렬화된 지점에서 본질을 상실해 동기없는 타인의 무의식에 또는 동기가 있는 타인의 의지에 내포됩니다.

MOTOKO:  그건 당신의 경험에서 익힌 것인가?

AOI : YES. 당신은 세상만사가 모두 부정으로 보여지겠죠?

MOTOKO:  J.D.샐린저..

AOI : YES. 굳이 말하자면 나는 내게 보이는 세상을 모두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계입니다.

MOTOKO:  지가베르토프… 영화감독이었지?

AOI : YES. 저는 저만이 간간히 알게된 정보의 확인과 전파를 자신의 사명으로 착각해 분주했죠.

MOTOKO:  순진한 매개자는 사회 시스템의 집약성에 낙담해 입을 봉한다.

AOI : YES. 그리고 난 소멸한 매개자가 됐습니다. 흡사 신작을 발표하지 않는 것으로 그 존재를 부풀리는 작가처럼.. 다르게 표현하지면 소멸하는 것으로 인해 사회 시스템의 동태를 규정하는 매체면서 최종적으론 시스템의 안에도 밖에도 그 존재의 흔적을 남기질 않습니다.

MOTOKO:  프레드릭 제임슨.

AOI : YES. 허나 NO. 후자는 오사와 마사치.. 말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 눈으로 접하기 전까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오리지널의 부재가 오리지널 같은 복제를 만들어 낸다고는…… 당신이라면 그런 현상을 뭐라고 하겠습니까?

MOTOKO:  Stand Alone Complex.

AOI : Yes.. Stand Alone Complex. 본래.. 현재의 사회 시스템은 그러한 현상을 일으킬만한 장치가 처음부터 내포되어 있습니다. 내겐 그게 절망의 시작이라 느껴져 참기 힘든데. 당신은?

MOTOKO:  글쎄.. 뭐라 하기 어렵군. 허나 나는 정보의 병렬화 끝에 자아를 되돌리기 위한 하나의 가능성을 찾았어.

AOI : 그 답은?

MOTOKO: 아마도 호기심.

AOI : 과연..! 그것엔 나도 미처 생각이 닿지 못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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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host in the Shell - Stand Alone Comple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