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라는 것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意味)야 말로 가장 절박한 문제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저 똑같은 나날들을 언제까지고 반복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왜`라는 물음이 고개를 든다. 그러면 주변의 모든 것은 권태로 변해버리며 그 속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기계적인 생활 끝에 권태가 있다. 하지만 권태의 인식은 곧 의식 운동의 시작이 된다. 동기야 어떻든 의식이 없이는 어떤 것도 인식할 수 없다.
의식을 차린 순간, 인간의 정신은 깨어나고 싶어한다. 정신은 하늘의 구름을 알고 별빛을 바라보며 바람의 촉감을 느낀다. 하지만 세계와는, 자연과는 달리 몸안에 갖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세상과의 단절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때론 알고 싶은 세계는 커녕, 자기 자신조차도 알수 없어, 자신에게 조차 이방인이 되고 만다. 바로 이 시점부터 부조리는 시작된다. 혼란과 단절, 불일치와 모순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모순과 애매함 속에 답답한 가슴이 터질 듯 억눌리며 구토하지만, 실제 생활은 별반 변하지 않는다. 그저 의식을 갖게된 순간 정신은 무언가를 애타게 갈구하는데, 도무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해결할 길도 없다. 무엇이 문제일까? 신체가 내리는 판단은 정신의 판단과 같은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 우리들은 사고하는 습관 이전에 사는 습관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래서 그 이후 이같은 모든 문제의 명쾌한 해답을 얻기 위해 사고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기준을 가지고, 즉 이성을 가지고 이 모든 답답함과 애매함과 부조리를 설명해 줄 무언가를 기대하며 수없이 생각한다. 세상의 수많은 존재들을 인식하기 위해, 즉 인간의 의식으로 모든 것을 통일하여 인식하기 위해 고뇌한다. 그렇게 수천년이 흘렀지만 인식의 불가능성만이 증명되어 왔다. 정신의 궁극(窮極)은 좌절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라 한다. 모든 답답함을 명쾌히, 후련히 설명해 줄 어떤 통일체를 간절히 원하지만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사고한다는 것은 이제는 통일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를 다양성 안으로 환원시키며 이성의 초월적인 힘을 부정한다. 정신의 우주는 그 이후 풍부해진다. 장미의 꽃잎도 이정표도 인간의 손도 각기 사랑이나 욕망이나 중력의 법칙과 같은 중요성을 지닌다. 사고한다는 것은 이제는 통일하는 것이 아니다. 사고한다는 것은 마주치는 모든 것을 주의깊게 대하는 태도를 배우는 일인 동시에, 의식을 그것에 돌리는 일이다. 이미지의 하나하나가 각기 특권적인 기회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어쩌면 사람의 사고 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에 특권이 부여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순간 나의 인식의 폭이 넓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생은 부조리하다. 그리고 부조리한 인간은 부조리한 인생 속에서 끊임없이 의식을 일깨우는 강인한 정신력을 유지하며 세계를 인식하고 자유를 느낀다.
Camus, Albert (1913.11.7~196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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