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거품으로 만들어진 세계 : 금융버블의 기원
로마는 국가기능 가운데 조세징수에서 신전건립까지 상당부분을 퍼블리카니(Publicani)라는 조직에 아웃소싱하였다. 퍼블리카니는 현재의 주식회사처럼 파르테스(partes, 주식)를 통해 소유권이 다수에게 분산된 법인체였다. 집행임원들이 이 조직의 업무를 수행하였고, 재무제표도 공시하였으며 주주총회도 정기적으로 개최하였다.
주식은 두가지가 있었는데, 당대의 부자들로 구성된 집행임원들의 목(socii)과 일반인들로 구성된 소액주주의 몫(particulae)으로 나뉘어 있었고, 소액주주들의 주식은 요즘의 장외시장과 같은 곳에서 비공식적으로 거래되었다. 27
도시국가 채권의 매매는 14세기 이후 베니스뿐만 아니라 플로렌스와 피사, 베로나, 제노바까지 확산되었다. 도시국가들은 주식(loughi)을 발행해 조달한 자본으로 세워진 회사(monti)들에 징세업무를 위탁하였는데, 이 초기 주식 회사는 로마의 퍼블리카니와 너무나 비슷했다.
16세기 후반 프랑스 정부는 자유도시 인근 호텔에서 채권 등 각종 증권을 매매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는데, 이는 유럽 최초로 정식 인가된 거래소이다. 31
네덜란드 상인들은 기존의 은행이나 복식부기, 환어음, 주식회사 등과 같은 금융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중요 시스템들을 상업경제의 튼튼한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미래시점에 확정된 가격에 상품을 인도하기로 하는 선도 거래가 일반화되었고, 16세기 이후에는 선도거래 대상이 곡물뿐만 아니라 고래기름, 설탕, 구리, 이탈리아산 비단 등으로 다양해졌다.
이때 주식을 미래시점에 정해진 가격에 사거나 팔 수 있는 권리를 매매하는 옵션거래도 시작되었다. 17세기 후반에는 액면 분할주가 탄생했는데, 동인도 회사의 주식이 분할되어 보통주의 10분의 1 가치에 거래되었고…
그들은 유가증권을 담보로 대출해 주식에 투자하는 차입투자의 개념도 터득해,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물론 주가가 떨어질 때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34 35
꽃이 만개할 때까지 무늬와 색깔을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는 점이 튤립투기의 우연성을 극대화 해주었다. 튤립뿌리가 어떤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뿌리가 황제튤립을 터트릴 수도 있었고, 평범한 꽃잎을 터트릴 수도 있었던 것이다. 43
당시 튤립가격 정보지들은 튤립 한 뿌리를 위해 지불한 2,500길더로 27톤의 밀과 50톤의 호밀, 살찐 황소 4마리, 돼지 8마리, 양 12마리, 포도주 2드럼, 맥주 2큰통, 버터 10톤, 치즈 3톤, 린넨 2필, 장롱하나에 가득 찬 옷가지, 은컵 1개 등을 살 수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47
튤립투기의 갑작스런 종말이 네덜란드 경제를 위기에 몰아 넣지는 않았다. 이 나라 경제를 좌지우지 했던 거상들은 튤립공황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서민들은 그렇게 운이 좋지 않았다. 집을 저당잡히고 가재도구를 팔아 일확천금을 노렸던 그들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을 입었다. 48
일확천금 바람이 한 차례 네덜란드를 휩쓸자 노동을 성스럽게 여긴 칼뱅주의적 전통도 무너져내렸다. 49
2장. 1690년대 주식회사 설립 붐
영국 증권시장의 등장은 17세기 후반에 발생한 금융혁명 가운데 하나였다. 금융혁명은 윌리엄 오렌지 공이 카톨릭 황인 제임스 2세의 왕관을 차지하게된 명예혁명이 발생한 1688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기 금융혁명은 주식시장 출현뿐만 아니라 ‘국가채무’에 대한 의회의 지불보장(1693년)과 발권력을 보유한 영란은행의 설립(1694), 재무성 채권발행(1696년), 약속어음에 관한 법 제정(1704년)등 일련의 사건들을 의미한다. 65
1687년 뉴잉글랜드 호의 선장 윌리엄 핍스가 히스파니올라 섬 부근에 침몰한 스페인 해적선에서 건져올린 은 32톤과 상당한 양의 보석들을 싣고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왕과 선장, 선원들은 자신들의 몫을 채긴 뒤 남은 19만 파운드를 1만%의 배당금 형태로 항해를 지원했던 파트너들에게 배분했다.
그들의 성공적인 귀환은 영국 전역에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사정이 이쯤되자 너나할 것 없이 핍스 선장을 모방해 해저 유물 인양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들은 핍스선장처럼 단순히 파트너를 모집한 것이 아니라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71
약방주인 출인 커피 무역업자였던 존 휴턴은 1692년부터 <주가 정보지>를 일주일에 두차례 유료로 발행해 주가의 흐름을 규칙적으로 전했다. 76
당시 금본위 화폐를 대신해 토지를 근거로 화폐를 발행하는 토지 은행을 설립하려했던 사람들은 내재가치 개념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재라는 말은 내부의 질을 의미하지만 가치는 항상 외부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니콜라스 바본은 이렇게 주장했다. “모든 물건 안에는 어떤 가치도 없다. 그것들을 활용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사람들의 의견과 패션이다” 토지은행의 설립추진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존 로는 여기서 한 걸은 더 나아가, 가격은 단순히 수요와 공급의 상호작용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다. 이를 주식 시장에 적용하면 주가는 내재가치보다는 유동성에 의해 결정된다. 84
케인즈는 “주식시장에선 미래가 불확실 하기 때문에 주가는 투자자 자신의 믿음과 다수의 순진한 인간들의 집단심리에 의해 절대적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공중 누각이론에 따르면 주식은 내재가치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주가는 투자자들의 심리를 반영한 것일 뿐이다. 87
주식은 정경유착의 고리로 활용되었다.
그들은 당시로선 최신수법인 옵션과 주식을 결합시킨 뇌물수수를 활용했다. 상원의원 바질 파이어브라스 경은 6만 파운드 주식을 동인도회사가 독점권을 획득한 뒤 형성되는 주식가에 50%의 프리미엄을 받고 팔 수 있는 옵션을 선물로 받았다. 그는 이 덕에 3만 파운드의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다른 상원의원들은 확정가격에 동인도 회사 주를 살 수 있는 콜 옵션을 뇌물로 챙겼다. 독점권을 부여해 동인도회사의 주가가 오르면 확정가격으로 주식을 사들인 뒤 시가로 팔아 차익을 챙기는 수법이다. 89
찰스 킨들버거는 <투기적 광기와 공황, Manias, Panics and Crashes>에서 ‘투기적 광기’는 변화에 의해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 변화는 완전히 새로운 산업이 태동하거나, 기존 산업의 수익률이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변화는 주가를 상승시켜 신출내기 투자자들을 주식시장으로 끌어들이는 선순환을 발생시키고, 이에 따라 시장에 대세상승 분위기가 팽배해진다.
투자자들도 일확천금을 위해 파생상품이나 주식담보대출 등 직접적인 주식거래와는 다른 방법을 동원하기 시작한다. 또 주식에 투자하기 위해 차입금을 조달하는 바람에 한 사회의 부채규모가 증가하고, 사기와 협잡이 자리잡기 시작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경제가 어느 순간에 이르면 ‘금융 긴장’에 휩싸인다. 이 긴장은 공황을 알리는 전주곡이다. 95
버블이 끝나고 경제가 공황에 이르게 되면 정치도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미래를 보는 눈이 없는 주식꾼들과 주식회사 발기인들의 이기주의의 폐악이 드러나기 때문에 자유방임주의는 ‘주식시장과 무역에 일정한 규제를 해야 한다’는 쪽으로 변한다. 99
3장. South Sea 음모
1711년 1,000만 파운드의 정부부채를 떠안기 위해 South Sea사가 설립되었다. 정부의 채권을 이 회사 주식으로 전환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대신 사우스 시는 정부로부터 받는 매년 일정한 이자와, 라틴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와의 독점무역권을 보장받았다. 그리고 2~3년 뒤에는 라틴 아메리카의 흑인노예를 독점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권리도 부여받게 된다. 103
블런트는 프랑스 미시시피의 존 로의 수법을 모방해 청약시 필요한 증거금(공모에서 신청한 전체 주식대금 가운데 일정 금액을 미리 선납하는 것) 비율을 낮춰 투자자들이 청약대금의 20%만을 예치하면 주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나머지는 16개월 동안에 8번에 걸쳐 나눠내면 되었다. 여기서 블런트는 존 로의 수법 가운데 하나를 더 모방한다. 사우스 시 주식을 담보로 돈을 꿔주는 것이었다. 결국 투자자들은 사우스 시로부터 돈을 빌려 주식을 청약하고, 주식은 배정 받자마자 담보로 사우스 시에 잡히게 된 것이다. 이 수법은 적은 돈으로 많은 주식을 살 수 있게 해 서민들까지 청약대열에 끌어들여 주식 수요를 폭증시켰고, 주식은 담보로 제공되었기 때문에 시중에 유통된는 주식수는 줄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주가가 치솟게 된 것이다.
블런트는 한술 더 떠 전환에 참가한 채권보유자들에게 주식배분을 차일피일 미루는 수법으로 시장의 수급 불균형을 가중시켰다. 117
런던의 금융인들과 네덜란드 출신 자본가들은 초기 주식청약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지만, 4차 주식 청약이 실시되자 그 도박판이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이미 투기를 경험했던 네덜란드 투기꾼들은 일찌감치 보유주식을 팔아 자본을 당시 호황을 보이고 있던 암스테르담 주식시장으로 철수시켰다. 런던의 은행가들도 마지막 주식청약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처럼 노련한 투기꾼들이 버블 정점의 언저리에서 보유 주식을 팔아치우는 현상은 투기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129
졸부들은 자신의 돈을 자랑하고 다니며 고급 저택과 마차, 화려한 코트를 사들였으며, 부인이나 정부를 위해 금장 시계를 구입하기도 했다. 또 이들이 앞다투어 부동산을 사들이는 바람에 당시 런던의 건물 임대료가 50배까지 치솟기도 했다. 133
‘합리적 버블’ 논리는 ‘더 한심한 투자자들에게 모든 위험을 떠넘기는 투자행태’를 좀더 정교하게 다듬은 것 뿐이다. 투기 꾼들은 ‘더 한심한’ 투자자들이 모든 손실을 뒤집어 쓸 것이라고 기대하고, 적정가격 이상의 가격에 주식을 사들인다.
‘더 한심한 투자자’를 이용한 투자행태는 1990년대 활황을 보이고 있는 미국 주식시장에서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단지 ‘모멘텀 투자’라는 말로 그럴듯하게 포장되었을 뿐이다. 모멘텀 투자를 벌이는 투기꾼들은 지수상승보다 빠르게 치솟는 종목을 우선 사들여 상승세가 꺽이기 전에 잽싸게 팔아치워 수익을 챙긴다. 150
4장. 1820년대 이머징마켓 투기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폐되고 프랑스와의 사이에 평화가 찾아오자, 영국정부의 채권발행량도 줄기 시작했다. 투기 대상 자체가 사라지자 투기꾼들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남미국가들의 채권은 이자율이 높아 연 5% 이상의 이자를 금지하는 당시 영국법 아래에서는 발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채권을 발행한 뒤 영국으로 들여오는 수법이 이용되었다. 정부의 각종 규제를 피하기 위해 애용되고 있는 요즘 역외펀드의 초기 사례인 셈이다.
남미 채권값은 엄청난 비율로 할인되어 팔려나갔고, 이로 인해 매수자는 높은 이자수익 뿐만 아니라 턱없는 시세차익까지 얻을 수 있었다. 또 소액의 증거금만 있으면 채권 청약에 참여할 수 있었고, 나머지 대금은 장기간에 걸쳐 분할 납입하면 되었기 때문에 개인투자자들의 선풍적인 관심을 끈 것이다.
원금으로 이자를 지금하는 ‘폰지 파이낸스(Ponzi Finance)’가 당시 남미 신생국가들의 지독한 자금난에도 불구하고 만기 상환이 가능할 것이라는 환상을 투자자들 사이에 불러일으켰다. 159
이 시기 벤처기업들도 투기열풍을 이용해 자본이익을 얻는 것 외엔 별다른 목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주가를 끌어올려 주식을 사도록 대중들을 유혹하는 것이고, 모든 투자자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한 당시 소설속의 발기인의 말은 그 시대 벤처기업인들의 욕망을 숨김없이 표현한 것이다. 167
벤처기업인들은 자사의 지명도를 높이기 위해 의회 의원이나 귀족들을 ‘얼굴 마담’으로 영입했다. 169
당시 영국정부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투기에 대한 규제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데 실패했다.
‘투기라는 악마는 그것을 억제할 방안을 마련하기가 힘들지라도 마땅히 억제되어야 할 존재다. 하지만 공동체 발전에 큰 기여를 하는 기업가 정신을 저하시키는 투기대책은 투기보다 더 해롭다.’
본디 경기 순환은 투기보다는 흉작과 전쟁, 정부의 재정위기 등으로 발생한 공황과 관련이 있었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자본주의 경제가 좀더 발전하자, 경기순환의 원인이 농업과 재정 부침에서 신용의 팽창과 수축으로 바뀌었다.
버블이 한창일 때 무제한적인 신용창출은 자산가치를 치솟게 만들었고, 또 적정가격 이상으로 치솟은 자산을 담보로 과도한 신용창출이 발생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존 스튜어트 밀에 따르면, 주기적인 경제호황의 씨앗은 직전에 발생한 공황시기에 뿌려진다는 것이다. 신용경색은 자산가치의 폭락을 야기하기 때문에 헐값에 자산을 매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후 자산가치 상승은 투기의 부활로 이어진다. 188
5장. 1845년 철도 버블
<더 타임스>가 1845년 11월 초에 별지로 발행한 ‘영국의 철도문제’에는 당시 투기열풍과 철도건설로 영국 경제가 얼마나 깊게 주름졌는지를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이보다 앞선 10월말에는 5억 6,000만 파운드 이상이 필요한 1,200개의 노선이 계획중이며, 겉으로 드러난 철도회사의 채무는 6억 파운드가 넘었다고 보도했다. 이는 당시 5억 5,000만 파운드였던 영국 국민총생산을 초과하는 것이고, 영국 경제가 다른 부문에 대한 투자를 줄이지 않고 1년 동안 정상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한계인 2,000만 파운드의 30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211
계속된 철도건설에 따른 피할 수 없는 결과는 주식청약자들의 자금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었다. 1846년 한 해 동안 청약자들이 납입해야할 주식대금은 4,000만 파운드에 이르렀고, 이 돈은 임금지급 등 정상적인 산업활동에 필요한 자금에서 전용되었다.
결국 투자자들은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기업에서 고용을 줄이거나 개인적인 소비지출을 삭감해야 했고, 이로 인해 철도를 뺀 나머지 부분의 산업활동은 극도로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218
철도투기의 여파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1855년 현재 영국에서 가동된 철도의 길이는 모두 8,000킬로미터에 달했다. 이는 프랑스와 독일의 7배가 넘는 것이다. 이때 건설된 철도가 빅토리아 여왕 시기 영국경제에 엄청난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다. 저렴한 대량 수송 수단으로 산업혁명에 톡톡한 기여를 한 것이다. 또한 영국 경제가 심각한 불황을 겪고 있던 1840년대 철도 건설의 붐이 일자 50만 명의 노동자들이 철도건설 현장에서 돈을 벌어 생계를 이었다. 229
6장. 미국 금권정치시대의 투기
미국은 출신 성분보다는 재산규모에 따라 신분상의 구분과 상승이 이뤄지는 근대국가 였다. 235
미국처럼 부가 신분을 결정하는 근대사회에서는 물질적으로 남보다 뒤처지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길게 드리우고 있다. 236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가운데 상당수가 땅투기꾼이었다. 조지 워싱턴은 미시시피 회사를 설립해 서부지역 땅을 사들이고, 벤저민 프랭클린은 일리노이 주에서 6,300만 에이커에 달하는 땅에 투기를 벌였다. 열렬한 혁명주의자였던 패트릭 헨리 역시 조지아 주에서 1,000만 에이커를 매입하기 위해 설립된 아주 사의 투자자였다. 심지어 토머스 제퍼슨과 알렉산터 헤밀턴도 한 때 땅장사꾼이었다. 237
1790년대 미국에 증권거래소가 설립되자 땅투기 열풍은 종이쪽지 투기로 바뀌기 시작했다. 238
주식매집은 주식시장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지만 가장 왕성하게 이뤄진 곳은 19세기의 미국이었다. 주식매집의 첫번째 목적은 주가를 끌어올리는 것이었고, 다음으로는 주가폭락시 저가 매수를 위해 물량공세를 펼치는 공매도 세력을 견제하자는 것이었다. 매집세력들이 주식매집에 성공할 경우 공매도 투기꾼들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결제일까지 약속한 주식을 내놓아야 하는 매도세력들은, 집중 매수로 주식을 구할 수 없어 ‘울며 겨자먹기’로 장외에서 매집세력이 요구하는 값을 지불하고 주식을 매입해 결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239
Margin Loan(주식 담보 대출)이 일반화되자 미국 주식시장의 거래는 한층 활발해졌다. 초단기 투기꾼들이 마진론을 활용해 자신의 실제 능력보다 많은 주식을 매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40
마진론으로 주식시장의 자금은 풍부해졌지만, 주식시장은 시중 자금사정 등 증시주변 여건변화에 더 민감해졌다. 실제로 밀 수확기에는 자금이 뉴욕의 은행들에서 내륙지역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자금사정이 악화되어, 은행들이 마진론의 상환을 독촉하고 나서자 주가가 약세를 보였다. 241
다니엘 드루는 주가하라가 매집세력에 대한 견제를 위해 이사라는 직위를 이용해 불법으로신주를 발행했고, 이를 시장에 풀었다. 월스트리트 최초로 경영권 방어를 위해 ‘물타기 수법 watering stock’을 이용한 것이다. 246
절대 다수의 투자자들은 거물급 투기꾼들의 사냥감이었다. 드루는 “내부자가 아니면서 주식에 투자하는 것은 달빛 아래에서 황소를 사는 것과 같다”고 말했고, 헨리 애덤스는 “거대한 자본을 동원한 투기는 결국 소규모 투기꾼들을 집어삼켜 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파울러는 아마추어 투자자들을 ‘금융이라는 아편을 먹은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그들은 정반대 종류의 흥분에 흔들이고 불확실성과 두려움에 무너져 내린다. 또 고점에서 사 저점에서 파는 우를 쉽게 범하는 경향이 있다.
제임스 메드버리는 아마추어 투자자들에 대해 “그들은 의심해야 할 때 확신을 갖고, 과감해야 할 때 망설이며, 확신이 필요할 때 의심을 품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유약함은 작전세력들에게는 성공의 조건이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254
충분한 주식을 매집하는 데 성공한 작전세력은 매도자들을 쓸어내고 가격을 끌어올리기 시작한다. 부패한 언론이 이 순간에 유용하게 쓰였다. 259
이리 철도회사의 이사였던 짐 피스크는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익스프레스 사의 주식을 공매도 한 뒤 이 회사와 맺은 계약을 파기했고, 계약파기로 폭락한 이 회사의 주식을 대거 사들여 결제하고 다시 매수포지션을 취했다. 그런 다음에는 다시 계약을 맺어 주가를 끌어올렸다. 260
1881년 브러커 헨리 클루스는 의회 청문회에 나가 “투기는 주식이나 공산품의 미래가치에 대한 견해차이를 좁힐 수 있는 방법이다. 희소성이 있을 때 가격상승은 생산을 촉진하고, 과잉생산이 발생하면 가격이 폭락해 감산이 이뤄지도록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투기는 공황을 예방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라고 덧붙였다. 281
심각한 문제는 작전꾼들에 의한 시세조정이 계속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투기가 헨리 클루스가 주장했던 순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공황과 불황의 원인이 되는 이유이다. 282
7장. 새시대의 종말 : 1929년 대공황과 그 여파
‘자본주의가 새시대에 들어섰다’는 관념은 투기열풍이 몰아치는 시대마다 유행했다. 디즈레일리는 런던 증시가 호황을 보인 1825년 진일보한 경영기법 때문에 ‘이 시대’는 과거와 구분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9세기 유명한 저널리스트 월터 베이지헛은, “투기가 발생할 때마다 기업인들과 은행가들은, 현재의 번영이 더 큰 번영의 시작이기 때문에 영원할 것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는 말고 새시대 관념을 설명했다. 288
증시의 초호황이 시작된 1924년 에드거 로렌스 스미스는 <장기 투자수단으로서의 보통주>를 발표했다. 그는 19세기 중반 이후 주식과 채권의 수익률을 이용했다. 그리고 “주식의 수익률이 채권을 능가했고, 특히 20세기 들어 20년동안 펼쳐진 인플레이션 시기에는 주식의 수익률이 더 높았다”고 분석했다.
스미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점에서 주식을 샀을 때에도 투자 원본을 회복할 수 있는 순간은 꼭 온다”고 강변했다. 또 주식투자자가 원본손실을 입을 확률은 15년 동안 1%도 되지 않았다고 목청을 돋우었다. 291
아주 부정확한 가정과 정확한 수학공식의 조합은 특정 주식의 가치를 만들어내거나 옹호하는데 주로 쓰인다… 수학은 투기를 투자로 위장하는 수단일 수 있다. 293
루이스 헨리는 1929년 <노던 아메리칸 리뷰> 8월호에서 “미래의 희망수익을 근거로 명목가치 이상으로 주가가 솟는 것은 전형적인 투기”라며, “현재의 안전을 비용으로 치르고 미래의 우연성을 선택하는 것은 투자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293
할부거래에도 투기요소가 있었다. 현재 이뤄지는 소비를 미래의 수익으로 결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96
1926년 2월 연방준비위는 은행가들을 불러보아 “주식투자를 위해 대출해주는 것은 적절한 자산운용이라고 볼 수 없다”고 타일렀다. 하지만 이런 ‘도덕적 권고’로는 극에 달한 투기열풍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296
신기술에 대한 투기꾼들의 환상은 주식시장이 호황을 유지하는 동안 지속되었다. 경제적 번영의 원동력과 투기의 대상으로서 자동차가 철도를 대체했고 미국의 문화와 지도를 바꾸어 놓았다. 곳곳에 자동차도로와 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수많은 차고가 세워졌다.
자동차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능가한 것은 1920년 웨스팅하우스 사에 의해 처음 세상에 출현한 라이오뿐이었다.
투기열풍은 찰스 린드버그가 1927년 대서양 횡단 단독비행에 성공하자 항공기 산업으로 번졌다. 308
19세기 후반 스코틀랜드에서 출발한 투신사의 목적은 소액투자자들의 돈을 모아 적은 비용으로 전문적인 운용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빙 피셔는 1929년 여름에 발표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투신사를 옹호했다. “투신사는 주가가 고점이나 저점에 이르렀을 때 흔히 발생하는 투기적 변동성을 바로잡는 역할을 한다. 주가가 실제로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 때에만 주식을 매입하고 실제로 내릴 전망이 서면 팔기 때문에, 주가가 실제 가치에 근접하게 하는 구실을 한다”
하지만 실제 투신사들의 매매는 주식시장의 심한 변동성을 야기했다. 펀드매니저들은 우량주만을 골라 집중 투자했고, 여윳돈은 마진론 형태로 대출했다. 이는 주식에 대한 수요를 늘리고 투기를 조장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또 수익 레버리지 효과를 올리기 위해 차입금을 끌어들여 투자에 활용하는 바람에 주식시장의 변동성을 더욱 높여 놓았다.
최악의 경우는 투신사들이 계열사의 주식매집에 참여해 주가를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312
고통과 함께 반복된 역사는 ‘투기적 과잉지출이 필연적으로 과도한 경기수축과 공황으로 끝난다’는 교훈을 알려주었다. 314
증시호황 이면의 보이지 않는 힘처럼 군중심리는 본질적으로 불안정성을 띠고 있다. 일정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균형이 형성되지도 않고 상승하거나 하강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혼란의 순간 쉽게 패닉에 빠져든다. 프로이트는 “아무런 위협이 발생하지 않는데도 사소한 자극으로도 쉽게 혼란에 빠지는 것이 패닉의 본질”이라고 설명했다. 317
심리학자 페스팅어는 고통이 보상보다 크지 않을 경우 군중들은 인식의 부조화가 주는 스트레스를 견디어낸다고 했다. 이를 증권판 용어로 풀이하면, 손실의 두려움이 수익에 대한 탐욕보다 커지는 순간까지 투자자들은 인식의 부조화가 주는 스트레스를 견뎌낸다는 말이다. 319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은 1920년대의 개인주의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자유방임주의는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간섭으로 대체되었다. 시장을 대신해 정부가 복지와 주택, 노동, 금융, 물가, 소득, 최저임금을 결정했고, 이로써 대상이 무엇이든 투기는 경제영역에서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케인즈는 자본을 배분할 수 있는 권한을 투기꾼과 주식시장에 맡겨둔 과거 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331
1920년대 그레이엄과 데이비드 도즈가 <주식 분석>에서 “새시대에는 기존 가치기준으로 주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주식의 시장가치에 근거해 주식의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듯이, 1990년대 증시 전문가들도 이와 비슷한 ‘시장가치가 부가된’ 가치평가 방법을 주장하고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기업의 평가가치는 자본금이 아니라, 주당 가격을 합산한 시가총액으로 따져야 한다. 시가 총액이 클수록 기업의 가치는 더 높다는 것이다. 343
“증시가 영구기관처럼 변해 주가상승이 계속적인 주가 상승을 낳고 있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볼 때 투기와 차입규모가 최고조에 달하고 영구기관이 반대방향으로 회전하면서, 새시대는 끝이 났다. 345
8장. 카우보이 자본주의 : 브레턴우즈 이후
1944년 미국 뉴햄프셔 주 브레턴우즈의 마운트 워싱턴 호텔에서 영국대표 케인즈를 비롯해 연합국 고위 경제관료들이 모여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질서를 재구성했다. 그들은 금본위제 부활 대신 금태환 달러를 기축통화로 삼고, 여타 통화를 달러에 고정환율로 묶어두는데 합의했다. 달러의 금태환 비율은 금 1온스당 35달러로 정해졌다. 347
1971년 8월 15일 닉슨 대통령이 달러의 금태환 중단을 선언했다. 이로서 과거 25년 동안 세계 경제를 지배해왔던 브레턴우즈 체제는 종말을 고하고, 투기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지불의무를 표현한 ‘종이’를 화폐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발생한 17세기 후반 1차 금융혁명기에는, 그래도 모든 가치가 금에 의존했다. 따라서 금이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투기 제어장치로 기능했다. 투기에 대한 고삐가 풀리고 금융위기가 발행하면, 모든 사람들은 금에서 피난처를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351
브레턴우즈 시스템의 붕괴 이후 돈은 질량과 본질이 없는 상상의 조각물이 되었다.
Citicorp의 헤드인 Walter Wriston은 “정보본위제가 금본위제를 대체하고 세계 금융기초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353
역사의 사례를 살펴보면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금융시장이 더 안정되고 투자행태가 더 효율화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줄만한 근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는 쉽게 발견된다. 역사적으로 금융정보의 폭넓은 이용과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은 투기의 세계로 새로운 참여자들을 끌어들이는 효과를 낳았다. 1세대 일간지의 출현과 맞물려 사우스 시 버블이 발생했고, 영국 신문들이 금융시장 지표를 싣기 시작한 1825년 광산회사 투기가 벌어졌다. 또 철도가 건설되었던 1845년 철도버불이 부풀어올랐고, 주가표시기가 도입된 1870년대와 라디오가 출현했던 1920년대 미국 증시에도 투기가 발생했다. 354
정보교환이 빠르게 진행될수록 공황의 전파는 더 신속하게 이뤄진다. 357
워렌 버펫은 “시장이 ‘심심치않게’ 효율적인 양상을 보일 뿐인데, 시장주의자들은 ‘항상’ 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고 공격했다. 조지 소로스도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에서 “난해한 방정식을 동원하는 효율적 시장론자들은 근대 이성에 근거한 학자라기 보다는 ‘바늘 끝에 천사 몇 명이 올라설 수 있는가’를 계산하는 중세 스콜라 학자와 닮았다”고 비판했다. 360
과거에는 파생상품 거래와 도박을 구분하는 법적 장치들이 존재했다. 만기 결재일에 현물을 서로 주고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1981년 현물인도가 불가능한 이자율 선물거래가 합법화되었다. 1974년 설립된 시카고 선물거래 위원회가 선물거래의 결재를 반드시 현물로 해야 한다는 규정을 삭제하고, 현금을 대체 결제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 결정으로 다양한 지수 선물이 줄줄이 도입된다. 363
밀켄은 하이일드 채권은 위험하기 때문에 ‘투기적’이라는 고정관념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신용등급이 낮은 채권은 ‘추락한 천사’로 부르며, 부도율보다 높은 수익률을 보장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379
차입매수 붐은 1980년대 중반 미국 증시활황의 가장 큰 원동력이 었다. 전통적인 가치평가 방법이 의미를 잃고, 인수합병 가치가 중요한 기업가치 평가수단으로 등장했다. 현금 흐름이 얼마나 좋고, 어느 정도의 채무를 감당할 수 있느냐에 따라 기업가치가 달라진 것이다. 차입매수꾼들이 기업을 인수할 때 인수에 들인 차입금을 원할하게 상환할 수 있는 기업이 높은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다. 386
워렌 버펫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차입매수 채권을 경고했다. 이어 그는 “연금술은 그 대상이 쇠든 돈이든 실패했다. 어떤 기업의 기본적인 영업이 회계나 금융 구조를 변경시킨다고 해서 황금알을 낳는 사업으로 바뀌는게 아니다.” 408
밀켄이 역사적인 통계를 활용해 정크본드의 우수성을 주장하자 워렌 베펫은 “역사책이 부자가 되는 열쇠라면, <포브스>가 뽑은 400대 부자들은 모두 도서관 사서들일 것”이라고 반박했다. 413
1987년의 대폭락은 1929년의 경우와 아주 다른 메시지를 투자자들에게 남겼다. 1987년 대폭락 이후 시장이 빠르게 회복되자 투자자들은 ‘바이 앤 홀드’ 전략이 유효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또 주식시장의 폭락이 경제공황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대신 ‘골이 깊을 때 주식을 매수해’ 차익을 남길 수 있다는 기대를 낳았다. 또 달리는 증시가 고속으로 충돌할 때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혼란을 수습하기위헤 출동할 것이라고 예상하게 되었다. 은행이 혼란에 빠졌을 때는 연방 예금보험 공사가 예금을 보호해줄 것이고, 이후에는 납세자들이 알아서 부담해줄 것이라는 기대도 갖게 되었다. 414
9장. 가미가제 자본주의 : 일본의 버블 경제
1980년대 초반 일본 기업들은 ‘자이테크(재테크)’라는 다양한 자산운용으로 엄청난 영업외 수익을 벌여들였다. 1984년 대장성은 기업들이 ‘토이킨계정(투금계정)’을 두고 주식과 채권등에 투자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424
1980년대 후반 일본 기업들이 조달한 자금이 모두 투기에 투입된 것은 아니었다. 신주 인수권부 발행으로 조달된 자금이 생산설비 투자에도 흘러들어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고 설립투자 붐이 불었다.
특히 해외 설비투자를 통해 엔화 강세에 따른 수출난을 극복했다. 엄청난 설비투자 덕분에 일본 기업들은 엔화강세에 따른 가격경쟁력 약화와 자본수익률 하락을 딛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426
일본의 땅값은 1956~1986년 사이에 50배 이상 치솟았다. 반면 일본의 소비자 물가는 단 두 배 뛰었을 뿐이다. 이 기간 동안 땅값이 하락할 때는 1974년 뿐이었다. 따라서 일본인은 땅값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고, 일본 은행들은 채무자의 현금수입보다는 땅을 담보로 대출을 해주었다.
한 마디로 땅은 일본에서 신용의 상징이었고, 이 때문에 ‘통치홍이세이(토지본위제)’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428
1985년 9월 미국의 재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뉴욕 맨하탄 플라자호텔로 각국 재무장관을 소집했다. 베이커의압박에 각국 재무장관은 달러가치, 특히 엔화에 대한 달러가치를 떨어뜨리기로 합의했다. 일본 엔화의 구매력은 40% 오르고, 달러로 표시되는 상품가격은 그만큼 하락했다. 국제시장에서 일본의 상품값이 갑자기 2배 가까이 뛰어올랐다. 430
다급해진 대장성은 이자율을 낮추라고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을 마구 윽박질러 1986년 한 해 동안 일본은행은 네 차례에 걸쳐 재할인율을 인하해 3%에 이르게 했다. 431
1980년대 후반 도쿄 증시의 주가는 자이테크 수익이 포함된 기업 수익보다 3배 이상 급증했다. 섬유업종의 주가수익배율을 평균 103배에 달했고, 서비스 주들은 112배, 해상운송 주들은 176배, 어업관련 종목들은 319배 까지 뛰었다.
기업의 펀더멘털을 무시하는 갖가지 현상들이 벌어졌다. 동일 업종 내 주가는 개별기업의 순이익 등 재무상황이나 사업전망과는 관련없이 비슷한 추세를 보였다.
또 신주발행 소식이 전해지자 주가가 들먹거렸고, 회사가 실제 가치를 창출하지 않고 액면 분할만을 발표할 경우에도 주가는 하늘을 때렸다. 수출이 줄어들고 기업들이 생산시설을 해외로 이전해 산업 공동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주가는 치솟았다. 437
부동산 버블은 증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일본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기업의 ‘숨겨진 자산’을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어떤 기업이 땅을 소유하고 있거나, 부동산 소유 기업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을 경우 이 회사의 주가는 하루아침에 껑충 뛰어올랐다. 438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돼 빈부차가 적은 나라’라고 여겼다. 하지만 자산가치의 상승과 투기가 낳은 부의 불평등 배분으로 빈부의 격차가 심하게 벌어졌다. 전체인구가운데 상위 20%가 보유하고 있는 부가 버블기간 동안 4배 이상 늘어난 반면, 하위 20%의 부는 실질적으로 감소했다. 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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