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8일 금요일

이중(二重) 슬릿(Slit) 실험, 의식의 영역

누구나 다 잘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잘 산다는 게 무엇인가요? 어떤 이는 재물이 많아야 한다고, 다른 이는 건강해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이름을 오래 남겨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사람에 따라 아주 많은, 제 각각의 잘 사는 방법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잘 사는 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에 따라 같지 않겠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느냐(?)에 앞서, 모든 것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아는 게 필수입니다. 돈이 많으면 잘 사는 것인지 알고 죽어라고 돈 벌기에 몰두했었는데, 뒤늦게 그게 아니란 걸 알고, 땅을 쳐가며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출세하고 명예롭게 사는 게 전부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고, 건강이 제일인 줄 알았는데, 그 역시 허망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 흔한 게 그런 사람들 아닙니까?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의 본질을 모르고, 그저 눈에 보이는 바에 따라, 그리고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만을 좇아 귀중한 삶을 허비하고 허탈해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든 것의 본질, 과연 물질과 비 물질(정신)이 별개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별개가 아닌 나눌 수 없는 것인가? 이 모든 것을 만든 어떤 별개의 존재(神)가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런 고민을 하는 나는 과연 누구, 아니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런 생각에 동조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근본적인 의문이 해소되지 않고, 돈, 건강, 출세,.... 이런 것들을 추구한다는 것은, 결국 사막에서 신기루를 보고 오아시스를 찾으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근본적인 답을 모르는 상태에서 마감하는 삶은 결코 평안한 임종(臨終)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참선(參禪)을 하고, 요가도 하고, 고행(苦行)도 하고, 기도(祈禱)를 하기도 하고,.... 아주 많은, 다양한 길들로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삶은 그 답을 찾는 순례(巡禮)인 것입니다. 물론 그걸 그렇다고 인식하는 삶은 극히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천만다행히도,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그것, 모든 것의 본질을 알 수 있는 절호의 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나간 역사를 살펴 볼 때, 지금처럼 누구나 잘 살 수 있었던 시절은 없었습니다. 이건 물론 우리가 역사를 기록한 연대(年代)의 범위 이내에서의 얘기입니다. 그 이전, 기록으로 남겨진 시대보다 앞선 시절,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는 모르기에 이렇게 밖에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모든 것의 본질을 탐구해서 잘 살았던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난 시절에는 영(靈)적으로 뛰어난 존재들만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이 시대에는 그런 특별한 존재가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그럴 마음만 낸다면, 잘 살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면 저 같은 존재라도 그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블로그에서 하는 얘기란 게 거의 다 그런 얘기니까 새삼스런 얘기가 아닙니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같은 얘기가 반복됩니다. 이 얘기는 저같이 이과(理科)를 전공한 이에게는 좀 더 쉽게 다가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뭐 복잡한 얘기도 아닙니다. 19세기 말, 그리고 20세기 초, 당시 첨단 물리학자들은 물질(物質)의 본성이 거의 다 규명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 미해결인 부분들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그걸 밝혀내는 건 그야말로 시간문제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런 사소한 미해결 문제점들 중의 하나가, 흑체복사(黑體輻射, blackbody radiation)란 게 있었습니다.

제 전공이 아니고, 또 저 또한 잘 모르는 부분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게 지금 얘기하고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고 넘어가겠습니다. 혹 궁금하신 분들은 인터넷을 검색해 보시면 쉽게 그 설명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의 막스 플랑크(Max Planck)는 이 미해결 부분을 연구하다가 그야말로 엄청난 사고를 치게 됩니다. 실험결과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양자물리학(量子物理學)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창시자가 된 것입니다. 그때까지 물리학을 지배해온 뉴턴(Issac Newton)의 고전물리학(古典物理學)과는 판이하게 상이한, 전혀 새로운 신경지를 인류에게 소개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자물리학의 역사는 이미 100년을 넘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들(비록 물질에 국한한 것이지만)의 내용에는 이 새로운 발견이 빠져있었습니다. 만약 그때, 학교 다닐 때, 양자물리학의 개념을 배울 수 있었더라면, 제 인생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요새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대학입시 논술고사에 양자물리학의 핵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EPR 역설(逆說, paradox)이 나올 정도니까, 아마 고등학교 과정에 양자물리학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가보다(?) 하고 짐작을 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양자물리학의 기본개념을 교과과정에 포함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게 틀림없습니다. 양자물리학이 밝혀낸 바를 받아들이는 존재라면, 그렇게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더 건강하려고, 더 출세하려고, 그밖에도 많은 것들을 더, 더, 더,.... 하는 비참한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온통 더, 더, 더,... 하는 열기가 더해만 가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이미 그런 내용이 교과과정에 포함된 지 오래인 구미 각국의 상황을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노벨상을 수상한 저명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이 토로한 것처럼, “"양자물리학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가 원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양자물리학이 시사해주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는 존재라면, 이 세상 삶을 이렇게 영위할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번에 얘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양자물리학 중에서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이중(二重) 슬릿(Slit) 실험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 실험 내용 역시 제 전공이 아니라서, 제가 설명하기에는 벅찹니다. 다행히 이중 슬릿 실험을 아주 잘 설명해 놓은 자료를 발견했습니다. 실험의 세부 내용에 대해서는 아래 자료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http://blog.naver.com/sherufa/120099653790

그럼 이중 슬릿 시험의 세부는 건너뛰고, 실험 내용을 가지고 얘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아래 설명은 실제 실험을 알기 쉽도록 다듬은 것입니다. 전자(電子, electron)를 한 개씩 발사할 수 있는 전자총 앞에 세로로 한 개의 틈(slit)이 난 가림판을 설치하고, 그 뒤에는 스크린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전자란 아주 조그만 입자, 알갱이 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스크린을 향해 전자를 발사하면 가림판에 맞고 튀어나오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 전자들은 세로로 난 틈을 통과해서 최종적으로 스크린에 도달합니다. 그렇게 스크린에 도달한 전자들의 흔적은 가림판에 있는 틈을 그대로 뒤로 평행 이동한 것처럼 세로로 난 기둥모양을 남깁니다.

그러니까 전자 대신에 조그만 당구공을 총으로 쓰는 것과 같은 결과라고 보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가림판에 한 개가 아닌 두 개, 평행으로 난 두 개의 틈(slit)을 만들고 전자 대신 조그만 당구공으로  같은 실험을 하면, 스크린에는 가림판에 있는 틈을 그대로 뒤로 평행 이동한 것처럼 세로로 난 기둥모양을 남기는데, 틈이 두 개이니까, 흔적도 두 개의 기둥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비슷한 실험을 당구공 같은 입자가 아닌 파동(波動)을 대상으로 실시하면, 틈이 한 개일 때는 입자로 실험했을 때와 차이가 없이 가림판에 있는 틈을 그대로 뒤로 이동한 것처럼 세로로 난 기둥모양을 남깁니다.

그렇지만 파동의 경우, 두 개의 틈을 가진 가람판으로 실험을 하면, 두 개의 세로로 난 기둥모양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 줄의 간섭무늬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번에는 조그만 당구공 대신 진짜 전자를 가지고 해 봅니다. 자 여기서 양자물리학의 가장 기이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배운 개념으로는 전자(電子)란 것은, 아주 작지만 당구공 같은 알갱이입니다.

그러니까 두 개의 틈을 가진 가림판 앞에서 전자총으로 전자를 쏘아 스크린에 나타나는 흔적은 당연히 당구공 같은 형태, 두 개의 기둥 모양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실제로 측정된 결과는 파동으로 실험한 것 같은 여러 줄의 간섭무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 개의 전자를 쏘기 때문에, 그들 간에 서로 간섭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반론도 고려하여, 전자를 하나씩 발사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유일한 합리적인 해석은 전자가 파동 상태를 유지하지 않고서는 그런 간섭이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자(電子)는 알갱이, 입자(粒子)가 아니라, 실체(實體)가 없는 파동(波動), 떨림이라는 얘기입니다. 그 후 계속된 연구에 의하면 전자(電子)만이 아니라, 물질을 구성하는 다른 아원자(亞原字)들 역시 전자와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이 결과를 토대로 한다면, 모든 것이 다 텅 비었다, 공(空)하다는 얘기가 성립됩니다. 이중 슬릿 실험은 여기가 다가 아닙니다. 전자총에서 발사된 전자가 두 개의 틈 중에서 어느 쪽을 통과했는지를 알기 위해, 틈 바로 뒤에다 측정장치를 설치하고 같은 실험을 했더니, 이번에는 간섭무늬가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전자는 누군가가 관찰을 하면 이번에는 파동 상태가 아니라, 입자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자가 의식(意識)을 갖고, 생각을 한다는, 그러니까 살아있는 존재라는 얘기가 아닙니까?

이걸 관찰자 효과(Observer Effect)라고 부릅니다.

그럼 과연 전자의 본질은 무엇인가, 입자인가 파동인가? 답은 파동, 그걸 양자파동(quantum wave function)이라고 부르며, 전자를 포함한 모든 아원자들이 다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걸 아주 멋들어지게 묘사한 글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계에서 익히 기대할 수 있는 종류의 행태라기보다는 마술에 더 가까워보인다. 당신이 지켜보고 있을 때만 볼링공으로 보이는 그런 공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볼링 레인에다 밀가루를 뿌려놓고 이 ‘양자’ 볼링공을 핀을 향해 굴리면, 당신이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동안에는 밀가루 위에 한 줄의 선을 남기면서 굴러갈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잠시만 눈을 깜빡이더라도 공을 지켜보지 않았던 그 짧은 시간 동안 공은 한 줄의 선이 아니라 마치 사막의 뱀이 모래언덕을 지나갈 때 남기는 물결모양의 흔적처럼 넓은 물결무늬를 남겨놓은 것을 발견할 것이다.

『홀로그램 우주』(마이클 탤보트 지음/이균형 옮김, 정신세계사)

여기까지는 양자물리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얘기입니다. 저도 이 정도로만 알았었는데, 최근 홀로그램 우주(holographic universe)를 공부하면서, 새로운 실험결과를 전해 듣게 됐습니다. 토머스 캠벨(Thomas Campbell)이라는 물리학자가 설명하는 내용인데, 제게는 마커스 드 사토이(Marcus du Sautoy) 교수가 소개한 두뇌 스캐닝 결과 못지않게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물론 이 설명 역시,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실험의 구체적 내용을 쉬운 말로 푼 것입니다. 이중 슬릿 실험을 진행하면서 별도의 장치를 하여 상이한 조건을 조성했습니다. 물론 슬릿에서 관측을 하지 않은 데이터는 예상대로 파동의 간섭무늬를 나타냅니다.

또한 관측 장치를 틈, 슬릿 바로 뒤에 설치하고 실험을 계속합니다. 그런데 관측을 하면서 실험을 하기는 하지만, 그 결과는 판독을 하지 않고, 그냥 컴퓨터가 기계적으로 기록만 했습니다. 실험결과는 두 개의 슬릿 바로 뒤에서의 관측 데이터와 최종적으로 스크린에 나타난 흔적을 개개의 전자마다 측정해서 컴퓨터에 보관했습니다. 그렇게 수집한 100개의 데이터를 무작위로 나누어 2개의 그룹으로 구분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의 데이터는 정상적으로 판독(그러니까 전자가 어느 쪽 슬릿을 통과했는지와 그 전자가 스크린에 남긴 흔적의 위치를 모두 판독)했는데, 결과는 예상대로 관찰자 효과가 반영된 입자(당구공 같은)로 실험한 것 같이, 두 개의 기둥으로 나타났습니다.

두 번째 그룹의 경우에는, 측정 데이터 중에서 전자가 어느 쪽 슬릿을 통과했는지를 관측한 것들은 모두 폐기처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50개의 실험에서는 전자의 슬릿 통과 과정에 대한 측정은 하였으되 그 데이터는 없애버리고, 스크린에 도달한 데이터만 판독했다는 얘기입니다.

자, 과연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까요?

분명 슬릿을 통과할 때, 측정 장치로 관측을 했으니까, 당연히 관찰자 효과가 적용돼서 입자로 실험한 것 같은 결과가 나왔을까요?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관찰자 효과가 없는, 즉 슬릿에서 관찰을 하지 않은 것과 같은, 간섭무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전자가 파동형태에서 입자(물질)로 전환하는 시점이 언제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일반적인 상식 수준으로 판단하면, 측정 장치로 관측하는 때일 것이니까, 그 시점에서 전자는 파동에서 입자로 전환하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고, 측정 행위 여부와는 상관없고, 그 데이터를 우리가, 다시 말해 의식(意識)이 인지함으로써 본질적인 파동형태로부터 붕괴하여(collapse) 입자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해 봅니다.

눈으로 볼 때는 공 모양을 취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풀어져서 파동 형태를 취하는 그런 공이 목표 스크린을 향해 던져집니다. 공이 날아가는 동안 중간 지점에 설치한 카메라가 모든 공을 촬영합니다. 스크린에도 역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서, 공이 스크린에 어떤 위치에 어떤 형태로 도달했는지를 촬영했습니다. 그렇게 100개의 공을 촬영했지만 실험하는 사람이 그걸 직접 한 것이 아닙니다. 전부 자동화 장비들이 그걸 해 냈습니다. 나중에 촬영된 100개의 데이터를 무작위로 두 무더기로 분류했습니다.

첫 무더기는 촬영된 모든 데이터를 읽고 그 자료를 통계분석 해 보았더니 모두 공 모양의 결과를 얻었습니다. 중간에 관측을 하였으니 당연히 그런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두 번째 무더기는, 중간의 촬영 데이터는 모두 폐기처분하고 최종 스크린 위치에서 촬영한 데이터만 남겨서 읽고 통계분석 했습니다. 그랬더니 결과는 모두 파동형태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전자가 본래의 상태인 파동(비물질)상태에서 입자(물질)상태로 바뀌었는데, 그 시점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같은 실험 과정을 거쳤는데도 말입니다.

이게 마술일까요, 아니면 본래가 그런 것일까요?  답은 본래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분석을 언제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즉 지금 실험을 하고 1주일 뒤, 혹은 1년 뒤, 심지어 10년 뒤에 분석을 하더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실험을 지연된 선택(Delayed Choice)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전자가 본래의 상태(파동, 비물질)에서 입자 상태(물질)로 전환하는 선택을 실험 시점보다 늦춘다는 것이지요. 정말 이게 과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실험의 세부 내용은 유튜브(www.toutube.com)에서 쉽게 검색해 볼 수 있습니다(Quantum Physics 101-Double Slit Experiment).

“만약 당신이 이중 슬릿 실험을 정말로 이해한다면, 양자 물리학 모두를 이해할 수 있다.”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이 한 얘기입니다.

“양자론을 처음 접하고서도 충격을 받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양자 물리학의 대부(代父)라고 할 수 있는 닐스 보어(Niels Bohr)의 얘기입니다.

이중 슬릿 실험에 대한 얘기를 읽고 나서, 그것이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를 주었는가요? 지난 번 얘기한 내용, 그것이 이중 슬릿 실험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거기 함유된 내용은, 제게는 대단한 것입니다. 지난 번 서술한 그 내용, 실험 결과는, 저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실험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해석한 바의 의미(意味)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지어온 바 그 모든 것의 총합(總合)인 나(我)라는 물방울이 느끼는 의미는 이와는 다른 이력(履歷)의 결과인, 즉 다른 물방울인 당신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글에서 얘기하는, 〔이중(二重) 슬릿(Slit) 실험의 의미〕는 어디까지나, 저 개인의 의미입니다. 만약 아직 〔이중(二重) 슬릿(Slit) 실험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그 의미를, 당신만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럼 제가 찾은 의미를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중 슬릿 실험이란 걸 처음 접해본 건 제법 오래 전이었습니다. 그건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물론 그 엄청난 충격으로 사물을 보는 안목이 크게 달라지고, 모든 일의 의미를 폭넓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글로 그 의미를 쓰려고 하니까, 이번엔 보다 깊은 사색이 필요했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사물을, 모든 것을 폭넓게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보다는, 좀 더 깊이 이 현상을 따져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블로그에 글을 쓴다는 게, 진리추구(眞理追求)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다시 깨우치게 됩니다. 문득 어렸을 때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반백년도 지난 일인데, 이 주제를 공부하면서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매년 설날이 되면, 집안 어르신에게 세배를 갔습니다. 그 어르신의 서재 한쪽 벽을 가득 도배한, 알 수 없는 기호들, 기하학적 도형들도 있었고 별자리 그림도 있는 가운데, 몇몇 알아볼 수 있는 문자들 중에 광년(光年)이란 것도 있었습니다.

대개 오래 전에 작성되었음을 알려주듯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그래서 누렇게 변색이 된 종이들로 언뜻 괴이한 분위기마저 가득했던 그 방에서 그 분은 과연 무얼 알고 싶어서 그런 공부들을 하셨을까? 지금도 그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 어르신에게 큰 의심(大疑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 역경(易經), 성리학(性理學)도 공부하고 천문(天文)도 바라보고, 그러셨을 것입니다. 그 어른이 모든 것의 이치(理致)를 깨우치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돌아가시는 길이 평온하지 못했다고 하니까, 아마 그걸 깨우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 어른의 절망(絶望)이 느껴집니다. 연전(年前)에 돌아가신 모친도 생각이 납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 “.....수보리 어의운하...(....須菩提 於意云何....)”, 그렇게 금강경(金剛經)을 독송(讀誦)하셨습니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 이렇게 외고 또 외셨지만, 과연 그 어른이 그 의미를 완전히 받아들이셨을지는 의문입니다.

아마 그러지는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그렇다고 가르치셨으니까 그런 줄 믿지만, 이렇게 눈앞에 사물들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데, 어떻게 모든 것이 텅 비었음(空)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믿을(believe) 수는 있지만, 알(know) 수는 없으셨을 것입니다. 어머님의 그 절망(絶望)이 피부로 느껴집니다. 그 분들의 절망을 제가 알 수 있는 건, 저 역시 한참 전에 그런 절망에 떨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단순히 양자 물리학, 이중 슬릿 실험 결과로 인한 것만은 아닙니다만, 양자 물리학이 밝혀준 사실(fact)들을 몰랐더라면, 어림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중 슬릿 실험 결과를 간단히 요약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 크기, 모양, 무게를 갖고 있다고 믿는 입자(粒子), 예를 들면 전자(電子)가 사실은 텅 비었다(空)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여기는 물질,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코로 냄새 맡을 수 있고, 혀로 맛볼 수 있으며, 감촉으로 느낄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은 근본적으로 확률 파동(wave function)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그 근본은 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여기에 관찰자(observer)가 개입하면, 그러니까 마음, 생각, 의식(意識)이 더해지면, 텅 빈 곳에서 돌연 알갱이가 출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의식, 마음이 사라자면, 그 알갱이는 다시 파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있다고, 존재한다고 여기는 그 모든 것, 여기에는 물질만이 아니라 생각, 느낌, 분위기, 사건,...... 이런 것들까지를 아우른,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이 텅 비었음을, 믿는(believe) 게 아니라 알(know)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별다른 해석, 분석이 필요 없는 있는 그대로의 과학적 사실(fact)입니다. 여기까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거나, 이걸 받아들이지 못 하겠다고는, 그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가톨릭신자, 개신교도, 불교도,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심지어 무신론자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밝혀진 사실(fact)을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과학의 힘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그렇게 나타난 실험결과의 의미가 무엇인가(?)는 아직 과학으로는 답을 주질 못합니다.

“당신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한 얘기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 물리학자였지만 이렇게 밝혀지는 사실들을 거부하지도 못하고, 흔쾌히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과학의 힘으로 그 의미, 답을 찾는다고 통일장이론(統一場理論, The Unified Field Theory) 개발에 말년의 노력을 다 경주했지만, 끝내 그 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양자물리학의 대부 닐스 보어는 연구실 문에 “지금 연구 중, 철학자 출입금지”란 팻말을 붙여 놓았다고 합니다.

그 역시 과학의 범주 내에서 답, 의미를 찾아내려고 했지만, 아직까지 과학의 힘 단독으로는 모든 것들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이건 아마도 영영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물리학자 얀(Robert G. Jahn)과 듄(Brenda J. Dunne)이 얘기한 것처럼, ‘어쩌면 물리학자들이 입자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입자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원자 입자인 아나말론(anamalon)이라는 입자의 성질은 실험실마다 다르게 관측되었다고 합니다. 즉, 어떤 성질을 지닌 입자가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연구자의 가설 및 기대에 부응하여 그런 성질의 입자가 만들어진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질의 입자로는 문제가 풀리질 않는다는, 그와는 다른 견해를 가진 연구자 역시 아나말론을 발견하는데, 그 발견 내용은 연구자가 예측한 것과 같다는, 즉 이전에 발견된 내용과는 다른 성질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이런 위대한 연구자들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게 오히려 더 유리한 조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양자 물리학자는 아니지만, 그래서 새로운 발견을 도모하지는 못하지만, 우리 평범한 존재도 확인된 내용까지는 과학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벗어나는 경지, 그 의미에 대해서는, 정신세계의 깨우친 이(覺者)들의 가르침에 의존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간, 지난 이천년 이상, 깨우친 분들이 가르침을 주었지만, 깨우치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큰 의심의 씨앗을 심기는 했지만, 꽃을 피운 존재는 극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과거 양자물리학 이전의 세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넘지 못할 경계가 분명 존재했습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집안어르신이나 제 모친 처럼 의심의 씨앗은 심어졌지만, 보통 사람이 모든 게 다 텅 비었다, 그러면서도 아무 것도 없는 건 아니다(眞空妙有)라는 걸 믿을(believe) 수는 있었지만, 알(know)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첨단 물리학자들 덕분으로 이 경계를 허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불자(佛子)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그리고 유명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으로 불자가 아닌 사람에게도 잘 알려진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이란 가르침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온(五蘊)이라 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다시말해 일체 모든 것을 다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만이 아니라 생각, 행동, 감정, 정신,....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한 것이 사실은 다 텅 비었다(空)는 것을 알면(照見五蘊皆空), 모든 괴로움, 고(苦)를 벗어날 수 있다(度一切苦厄)는, 어찌 보면 간단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분명 내 눈앞에 책상도 있고 의자도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이핑하는 손도 있고, 그걸 보는 눈도 있으며, 컴퓨터도 있고, 또 그걸 인식하는 뇌도 있는데, 모든 것이 텅 비었음을 어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道)에 목마른 이는,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머리도 깎고 먹물들인 옷을 입고 토굴 속에서 몇 년이나 고행을 하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게 텅 비었다는 걸 아는 이는 겨우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밖에는 되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양자 물리학의 실험 덕분으로, 보통의 존재라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지도 않고, 머리 깎지도 않고, 고행을 하지 않고도, 그걸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게 텅 비었음을 아는 것하고 모든 고(苦)에서 벗어나는 것하고 무슨 관계에 있느냐(?)는 질문이 뒤따를 것입니다. 그건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일단 모든 게 텅 비었다는, 양자 물리학의 이중 슬릿 실험에 대해서라도 직접 공부를 하고, 확인해 보시라는 말씀밖에는 드릴 게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얘기입니다. 비행기 타고 이집트 카이로에 가서, 꼭 내 두 눈으로 피라미드를 보고 스핑크스를 만져 보아야만, 그것들이 정말로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충분한 증거가 있다면, 그걸 믿는(believe) 게 아니라 그렇다는 것을 알(know)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걸 위해서는 반드시 본인 스스로 마음을 내서, 직접 의문을 풀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게 다 텅 비었음을 믿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출세하려고, 더 많은 돈을 벌고자, 좀 더 건강하려고, 더, 더, 더,.... 할 수가 있을까요? 제 경우이기는 하지만, 그럴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하기만 하면 저절로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은 따라올 수밖에는 없습니다. 금강경(金剛經)에도 핵심 가르침 내용은 다르지 않습니다. 크게 다르지 않은 많은 가르침 중에서도 지금 이 얘기와 관계 깊은 걸 찾아보면 이런 게 있습니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다 채울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칠보(七寶)로서 보시(布施)하는 것보다 사구게(四句偈) 하나라도 수지독송(修持讀誦)하는 복덕(福德)이 더 수승(殊勝)하다”라는 가르침이 있는데, 그게 당연함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런 보시를 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엄청난 부(富)를 소유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만 그런 상상할 수 없는 복 보다도 사구게(四句偈) 하나라도 제대로 아는 게 훨씬 더 낫다는 걸, 조금만치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사구게(四句偈)라는 게 별 게 아닙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응당히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응당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만약 색신으로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니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의 모든 것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같으며
이슬,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알 지니라

이렇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데, 그걸 그렇게 받아들이기가 쉽지가 않은가 봅니다.

물론 양자 물리학, 이중 슬릿 실험결과를 공부한다고 해서 즉시 이런 받아들임이 당연시되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천년 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당신 가르침이 잘못 전해지는 것을 바로 잡으시겠다고, 20세기 미국에, 헬렌 슈크만(Helen Schucman)이라는 심리학자에게 나타나셔서 무려 7년간이나 전수해 주셨다는 가르침, 『기적수업(A Course In Miracle)』, 수백만의 미국인들이 자발적으로 공부하고 있다는 그 가르침 역시 양자 물리학, 이중 슬릿 실험 결과와 다르지 않습니다.

당장에 그런 변화가 나오지는 않지만, 또 그게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에, 기적수업에서는 워크북(Workbook)이라는 수행지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수행지침(Workbook for Students)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Nothing I see in this room[on this street, from the window, in this place] means anything.

Now look slowly around you, and practice applying this idea very specifically to the whatever you see:

This table does not mean anything.
This chair does not mean anything.
This hand does not mean anything.
This foot does not mean anything.
This pen does not mean anything.
......

한 마디로 이 방에 보이는 것들, 길에 있는 것들, 창문을 통해 보이는 것들, 이 장소에 있는 것들이란 실재(實在)하는 게 아니란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탁자, 의자, 손, 발, 펜이 실재하는 게 아니란 걸 깨우치는 연습을 하라는 것으로 『기적수업(A Course In Miracle)』수행(修行)을 시작하라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들이 실재(實在)가 아니란 걸, 조금씩 연습을 통해 익혀간다면, 언젠가는 그런 인식이 당연한 게 될 것입니다. 물론 저 역시도 지금 그런 과정을 겪는 중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그게 익숙해지니까, 출세한다는 것이나, 큰 상을 탄다는 것이나, 많은 돈을 번다는 것이나, 건강이 좋아진다는 것이나, 그런 것들이 더 이상 탐(貪)할 것이 아니란 걸 지극히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더, 더, 더,... 할 건더기가 더는 없습니다. 이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 지, 아니 도무지 이게 설명이 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모든 게 다 텅 비었음을 아니까(믿는 게 아니라) 삶이 살아 볼만 한 게 됩니다. 과거 같으면 감히 꿈도 꾸지 못할, 그런 경지를 이제는 우리 스스로의 평범한 의지로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래서 이 시대를 새 시대(New Age), 황금 시대(Golden Age)라고 부르나 봅니다.

- 출처, http://blog.daum.net/mwldfi/13661148

댓글 1개:

  1. 잘 읽었습니다. 블로그에 다양한 내용이 많아서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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