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 정치(office politics)는 학문의 세계에서 금기시돼 왔다. 가설이나 주장, 그리고 법칙을 세우기는 뭔가 석연치 않아서였다. 기업의 세계에서도 사내 정치는 조심스러운 단어다. 팀워크를 앞세우고, 가족적 분위기를 강조하는 상황에서 공식적으로 입에 담기 힘든 소재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스포트라이트'는 방송국 사내 정치를 양념처럼 활용했다. 지난해 화제가 된 '하얀 거탑'은 병원 내 세력다툼을 그린 정치드라마였다. 사내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한 『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50가지 비밀』 같은 책은 계속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학문과 현실을 오가며 가장 발 빠르게 현대 경영의 흐름을 분석하고 전파해온 '하버드비즈니스리뷰' 역시 1980년대 후반부터 사내 정치에 주목해 왔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가 전하는 사내 정치 리포트를 모았다.
◇업무능력 VS 사내 정치=최근 출간된 5월호에는 '권력, 사내 정치, 그리고 경력상의 위기'라는 사례 연구를 실었다. 막 승진해 스타가 됐지만, 직속 상사에게 견제를 받는 토머스 그린의 얘기였다. 상사는 그린의 승진을 주도한 부사장에게 그린이 형편없는 실적을 올리고 있다고 보고했다. 민망해진 부사장은 그린에게 나쁜 실적에 대한 경위를 보고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 상사에게는 공식적 권한이 있고, 그린은 승진 후 부사장에게 고마움도 제대로 표시하지 못한 상태다. 부사장은 상사와 그린 가운데 누구 편을 들 것인가?
보통 직장인들에게 흔히 벌어지는 이런 일에는 사실 업무 지식이나 정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사내 정치가 결과를 좌우할 때가 많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심리분석학 교수인 에이브러햄 잘레즈닉은 1989년 1·2월호에서 경영자가 종종 제품이나 소비자보다는 사내 정치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다는 주장을 폈다. '진짜 일'이라는 제목의 이 논문에서 그는 오늘날 경영자들이 전통적인 경영학계의 주장과 달리 사회적이며 의식적인 일에 더 시간을 쏟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쓸데없는 시간 낭비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사람에게는 모두 공격적 성향이 있으며, 틈만 나면 누군가를 골라 상처를 주려고 한다. 따라서 경영자는 직원들의 공격적 에너지를 잘 관리해 직원들의 응집력과 사기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 논문의 주요 내용이다. 이 논문은 사내 정치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고조로 97년 11·12월호에서 다시 게재되기도 했다.
◇“핵심은 비공식 네트워크”=카네기멜론대 행정대학원의 데이비드 크래커트 교수와 컨설팅사 핸슨앤컴퍼니의 제프리 핸슨 대표가 93년 7·8월호에 발표한 글을 보자. 이들은 '비공식 네트워크: 공식 조직 도표 뒤의 회사'에서 공식 조직도표와는 별개로 직원 간의 정치적 관계를 도표화함으로써 경영자들이 조직의 실제 권력을 관리하기가 용이하다고 주장했다. 공식 조직을 관리하는 데 경영자의 역량을 집중하라는 기존 경영학계의 이론과는 사뭇 다른 얘기였다.
심지어 이 두 사람은 공식 조직 도표와 비공식 네트워크 가운데 어떤 것이 더 회사의 목표에 부합하는가를 따져 활용해야 한다는 파격적인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해럴드 리빗(Harold Leavitt) 교수와 클레어몬트대 피터드러커경영연구센터 진 블루먼(Jean Bluemen) 교수는 비공식 네트워크의 정점에 속한 집단의 특성을 밝혔다. 이름하여 '핵심 집단'이다. 이들은 공식적인 업무는 물론 먹고 마시고, 심지어 자는 것까지도 일의 일부로 여길 정도로 일에 열심이다. 이런 사람들끼리 비공식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나면 힘이 커져 때로는 경영자도 건드릴 수 없을 정도가 된다. 그렇다고 이런 집단을 문제 집단으로 간주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두 저자의 충고다. 이런 핵심 집단을 적당히 장려하되 집단의 관심사를 일로 한정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두 사람은 이런 핵심 집단에 대한 사회적 선입견도 거부했다. 일반적으로 지극히 사교적인 '야심가형 직원'이 이런 집단을 이끌 것이라 여기지만 실제로는 호기심이 많은 개인주의자 스타일이 리더인 경우가 오히려 많다는 것이다.
◇당신은 핵심집단인가=사내 정치의 성공과 실패 여부를 아는 방법은 뭘까? 스스로 회사의 핵심이 됐다고 생각하지만, 혼자만의 착각인 경우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컨설팅회사인 다이얼로그의 조사 담당 이사 아트 클라이너는 2003년 7월호 '당신은 핵심 집단에 속해 있나?'라는 논문에서 그런 고민을 토로한다. '핵심 집단에 속했다고 통지를 해주거나 공식 축하 만찬을 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는 하는 일에 있어서도 큰 변화가 없다'고.
그렇지만 클라이너는 모든 것이 이전과는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그 변화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당신이 뭔가를 요구할 때, 조직이 그보다 더 들어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직급이나 보수, 그리고 각종 복리후생은 말할 것도 없다. 유능한 경영자들은 어떤 직장인이 핵심 집단의 일원이 된 것을 축하해주는 의식을 치른다고도 한다. 예를 들어 미국 식품회사인 하인즈사의 전 대표 토니 오라일리는 자신이 아끼는 직원들을 아일랜드에 있는 자신의 성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하고는 했다. 그 초대장이야말로 하인즈사 핵심 집단의 표식 같은 것이었다. GE의 잭 웰치 전 회장은 자신의 측근들에게 플로리다에 있는 자신의 집 옆집을 사주고는 했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가 제안하는 사내 정치의 공식은 이렇다. 공식 조직과 관계없이 회사 내의 역학 관계를 파악한다. 그리고 비공식 조직 가운데 회사의 오너나 사장, 그리고 잠재적 사장감이 가장 신경 쓰는 조직을 찾아내라. 그리고 그들에게 일로 인정받도록 부단히 신경 써라.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상사가 당신의 심기를 살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일 그린의 경우처럼 상사가 본격적인 견제에 나선 경우라면, 당신은 아직 권력의 핵심집단 안에는 들어가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
중앙일보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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