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3일 일요일

(상식과 달리)한국의 교육 불평등은 악화되지 않았다

출처    http://sovidence.tistory.com/m/987
논문 위치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7565420
최성수 이수빈 공동 연구


주요 내용

ㅇ 더이상 개천용은 없고 이제 금수저만 더더욱 고등 교육을 받는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를 증명할 만한 연구는 없었다.

ㅇ성균관대 최성수, 이수빈 두 사회학자가 서베이 자료 8개를 통합해서 1940년대 이전 출생자부터 1990년대 출생자까지 부모의 학력 수준에 따른 자녀의 교육 성취도를 연구

ㅇ부모의 교육 수준을 상위 20%, 하위 20%로도 나누어서 그에 따른 자녀의 교육 성취를 연구. (단순히 대졸로 하면 과거의 대졸과 현재의 대졸은 수준이 다르므로 직접 비교가 안된다)

ㅇ자녀의 교육 수준도 교육연수, 전문대 이상, 4년제 대학 이상, 명문대 졸업 등으로 나누어서 다층적으로 어떻게 역사적 변화를 거쳤는지 분석

논문의 결론: 한국에서 교육 기회 불평등은 커지지 않았다


아래 그래프는 부모가 대졸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자녀의 교육연수가 얼마나 다른지 자녀의 출생연도에 따른 변화를 나타낸 것. 보다시피 현재 70대인 전쟁 세대는 부모의 학력에 따른 자녀 학력 격차가 4년에 이르렀는데, 86세대인 60년대생에 오면 3년 이하로 줄어들고, 90년대 출생자에 이르면 1년 이하로 줄어듦.




아래 그래프는 학력 수준 상위 20%의 부모와 하위 20%의 부모 사이에 자녀가 명문대를 졸업할 확률의 격차를 측정한 것. 상층 부모를 두면 명문대 졸업 확률이 높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 차이가 늘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음. 위에 보여준 교육 연수처럼 부모의 배경에 따른 교육 격차가 지속적으로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1950년대 출생자 이후 현재까지 사실상 거의 변화가 없음.  






명문대 졸업자 중에서 '개천용'이 줄어들었다고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개천'이 줄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높음. 결과적으로 기회의 평등은 높아졌지만 실제 고용시장이나 체감적으로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다음의 이유 때문일 수 있다

1. 기회의 평등은 매우 높아졌지만 결과의 불평등은 여전하다
2. 기회의 평등을 넘어 결과의 평등까지 바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018년 12월 22일 토요일

미네르바의 부엉이와 갈리아의 수탉

미네르바(Minerva)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으로 그리스 신화의 아테나(Athena)에 상응한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로마신화에서 미네르바와 항상 함께 다니는 신조(神鳥)로서 지혜의 상징이다. 원래 미네르바의 신조는 까마귀였다. 오비디우스(Ovidius)의 <변신이야기>에 따르면 까마귀는 미네르바의 비밀을 누설한 죄를 짓고 신조의 자리를 부엉이에게 내주었다 한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헤겔(Friedrich Hegel)은 그의 저서 <법철학> 서문에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라는 경구를 남겼다. 철학은 앞날을 미리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뤄진 역사적 현상이 지나간 이후에야 그 뜻이 분명해진다는 의미이다. 헤겔의 경구는 인식이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 인간의 욕망은 변화의 속도 만큼이나 빨리 움직이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인식하고 학문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가능하다. 이와 같이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는 욕망과 인식의 속도 차이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가끔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서 ‘그때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왜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했을까? 그때 왜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라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바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날이 저물어야 날개를 편다’는 의미가 아닌가 한다.

역시 인간의 지혜는 변화의 속도와 욕망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가 보다. 그런데 그때 알지 못했던 것이 후회로 남기는 했지만 그때 알지 못해 낭패를 보았던 경험 때문에 지금 알게 됐으니 그것만으로도 소득이 아닌가?

헤겔의 말은 오늘날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다. 변화의 속도가 워낙 빨라 인간의 인식과 지식과 학문이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에 따라 지식과 학문이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뒷북만 치고 있다. 변화를 따라가기에도 숨이 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탉이 울면 새벽이 오고 얼마 안 있어 동이 트면서 태양이 떠오른다. 시계가 없었던 시절 수탉은 새벽의 전령사였다. 어둠의 공포에서 벗어나 밝은 낮으로 가는 길목에서 수탉은 항상 밝은 아침이 멀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신비한 존재였다. 동양의 옛날이야기에도 귀신이 쫓아오다가 닭 울음소리를 듣고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스토리가 제법 많이 있다. 새벽에 울음을 우는 수탉을 신성시하는 경우도 생겨난 것 같다.

서양인들은 갈리아지역(지금의 프랑스)이 닭의 원산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닭을 ‘갈리아의 새’라고도 불렀다. 갈리아인들은 고대부터 수탉을 새벽의 신으로 신성시했다. 수탉은 갈리아의 신으로 숭상되기도 하고 갈리아 군대의 기장(旗章)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프랑스를 상징하는 동물은 수탉이다.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 개념에 맞서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제기한 개념이 ‘갈리아의 수탉(Gallia Rooster)’이다.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수탉이 새벽에 울어 세상을 깨우듯이 철학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이 뒷북이나 치고 앉아 있다면 그건 죽은 학문이라는 것이다. 헤겔이 말한 것처럼 철학이 현실이 다 지나간 다음에야 겨우 이론을 정립하는 늙은이 학문이 아니라 현실이 오기 전에 그것들을 인식하고 설명하는 선도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하 테제>의 11번째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말한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 논리에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철학자의 사명은 시간이 지난 다음 뒤늦게 세상을 해석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 앞서 이론을 정립해 현실을 바꾸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성연 애터미 경제연구소장 nexteconomy@nexteconomy.co.kr

http://m.nexteconom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38

2018년 11월 18일 일요일

사람의 인격 아는 방법

누군가의 인격을 알고 싶다면

다른 사람의 돈을 어떻게 쓰는가?

술에 취하면 어떻게 행동하는가?

이 두 가지만 보면 된다.

2018년 10월 21일 일요일

리처드 호프스태터-미국의 반지성주의

‘반지성주의’란 지식인과 지적 활동을 백안시·적대시하는 미국의 사회적 경향을 말한다. 미국에는 지식인이 허세에 차 있고 대중을 기만하며 남성적이지 못한데다 속물적이고, 나아가 비도덕적이고 위험하다는 고정관념이 존재한다. 이 고정관념에 따르면 평범한 사람이 살면서 몸으로 체득한 상식과 윤리야말로 전문가나 식자들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 즉 분석적이고 보편적인 ‘지성(intellect)’을 배격하고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슬기(intelligence)’를 중시하는 것이 미국의 풍토이다. 이를 가장 잘 구현한 인물이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이다.

1820년대 이후부터 서부 개척, 산업 발전, 평등주의 부상 등의 사회 경제적 변화로 인해 미국 건국 초기 성직자와 법률가 중심의 지식인 기반 전통 질서가 해체되었다. 맨손으로 자수성가한 기업가들이 시대를 호령하고 비즈니스 논리가 거침없이 통용된 19세기의 도금 시대(Gilded Age)는 ‘나약한’ 지식인과 ‘쓸데 없는’ 학교 교육에 대한 경멸이 최고조에 달한 때였다. 그러나 사회 복잡성이 증가하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전문가 집단이 정부 정책에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중들의 지식인에 대한 비웃음은 두려움과 분노로 전환된다. 또 이데올로그로서 지식인의 비판적, 진보적 특성 때문에 우익들은 전통적으로 지식인을 적대시했다.

하지만 동시에 20세기 이후 미국 반지성주의의 깊숙한 곳에는 모더니티 자체에 대한 반동이 숨어 있다. 1차대전 이후 미국에 몰아 닥친 변화에 대한 거부다. 즉, 세계시민주의와 다윈 진화론의 유입, 미국 고립주의의 종말, 대공황으로 전통 자본주의 붕괴와 중앙 집중화된 복지 국가로의 전환, 경찰국가로서, 그리고 냉전으로 인한 전쟁 부담 등이다. 이를 거부하고, 대륙으로 떨어져 고립된 채 촌락 사회가 온존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뒷받침하며 산업 자본주의가 제재 없이 활개 쳤던 19세기의 미국으로 회귀하려는 심리의 일환이 반지성주의로 나타났다.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은 반지성주의의 가장 강한 동력이었다. 초창기의 청교도 성직자들은 지식인 계층이었지만, 18세기 중반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면서 청교도 시대가 끝나고 복음주의 시대가 열린다. 이들은 세력확장을 위해 감성에 호소하면서 성령 대 부흥회와 같은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도입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요소는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고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파악하는 미국 우익 세계관의 기저를 이루게 된다. 복음주의와 쌍벽을 이루는 또 하나의 정신적 전통은, 학습된 인공적 이성보다도 신이 주신 직관적 “지혜”를 선호하는 원시주의(primitivism)다. 이는 애초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련되었지만 타락한’ 유럽 문명과 스스로를 구분하면서 세워졌다는 데서도 기인한다.

반지성주의가 미국인 의식의 전면으로 떠오른 것은 미국이 비즈니스 패권이 지배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개척지에서 맨손으로 사업을 일구는 과정에서 거칠고 공격적인 남성적 마인드와 과감한 의사결정, 기회를 놓치지 않는 순발력이 미덕이 되고, 지적이고 문화적인 것은 ‘유약하고 여성적’이라고 배척하는 풍토가 심화된 것이다. 이들 중 다수는 공식 교육 없이 맨손으로 자수성가하여 성공 신화를 양산한 장본인들이었는데, 이들의 이상을 잘 반영한 문헌이 19세기부터 출현한, 강한 종교색을 띤 자기계발(self-help) 서적들이다.

반지성주의적 신념이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겨진 분야가 바로 미국의 교육이다. 미국 학교 교육의 실패, 즉 교사의 저임금과 낮은 지위, 노후하고 게토화된 학교, 축구팀 주장이나 치어리더에 대한 과도한 숭배, 학업 성취도의 전반적 저하, 성적이 뛰어난 학생의 방치 내지는 따돌림은 대부분 여기에 기인한다. 특히 1870년대 이후 중등 의무 교육이 시행되고 쏟아져 들어오는 이민자의 자녀들까지 가세해 학생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공부에 관심 없는 대다수 평균 이하의 학생들에게 대학보다는 시민 의식 함양과 실용적 직업 교육에 집중해야 한다는 신념이 헤게모니를 쥐게 된다. 이 신념이 가장 극적으로 표현된 예가 1940-1950년대에 시행된 ‘Life Adjustment’ 운동으로, 외국어나 수학, 고전 같은 학구적 과목이 대거 폐지되고 운전이나 가사처럼 학생들의 흥미와 필요에 부응하는 실용적인 과목이 개설되었다. 이 운동은 너그럽고 민주적이며 진보적인 이상을 추구했지만, 매스미디어가 부추기는 소비문화에 순응하는 수동적 인간을 길러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기도 했다. 존 듀이의 교육 철학은 이런 새로운 교육 운동을 떠받친 지적 기둥 중 하나였으나, 현장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듀이의 의도와 달리 단순화되고 왜곡되었다.

출처: http://lectrice.co.kr/?p=436

2018년 10월 15일 월요일

소선(小善)은 대악(大惡)이고, 대선(大善)은 비정(非情)이다

- 이나모리 가즈오 -

2018년 7월 29일 일요일

의식의 기원 - 줄리언 제인스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오랫동안 인류는 의식(consciousness)을 갖지 않은 채 살아왔다. 의식이란 인류 역사의 특정 시점에 나타난 현상일 뿐이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오랫동안 심리학을 가르쳤던 줄리언 제인스 교수가 인간의 의식의 기원을 파헤치고 과학 연구에 내재한 종교적 특질을 분석한 책 '의식의 기원'(한길사)이 번역돼 나왔다.

그는 책에서 의식에 대한 기존의 견해, 즉 의식이 물질의 속성을 지녔다거나 경험, 학습, 추론, 판단의 다른 이름이라는 견해는 물론, 의식을 인과적 영향력이 없는 단순한 부수현상으로 보는 견해를 모두 부정한다.

대신 그는 인간의 옛 정신체계는 양원적(bicameral.兩院的)이었다는 주장과 함께 의식은 인류 역사의 한 특정 기점이었던 정신의 양원적 구조의 소멸시기와 연계돼 있다는 주장을 편다.

여기서 독특한 것이 바로 '양원성'이라는 저자 특유의 개념. "태초부터 인간은 언어를 관장하는 좌뇌와 신(神)과의 소통을 관장하는 우뇌를 통합적으로 사용해왔으나 어느 순간부터 우뇌의 기능이 퇴화됐다"는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양원 시대의 인류는 중요한 순간마다 들려오는 신의 소리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했다. 고대 그리스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전사들이 그렇게 했고 히브리 성서에 나오는 선지자들이 그렇게 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 우뇌의 기능이 급속히 상실되기 시작했다. 퇴화된 신과의 소통능력을 대체한 것이 바로 '의식'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살아있는 한 언제나 의식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역사적으로 장구한 세월에 옛 인류는 의식을 갖지 않은 채 삶을 성공적으로 영위했고 의식은 후천적이며 발명된 것이라는 주장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제인스는 의식없이 살던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문헌적으로 고증하기 위해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를 분석하고, 호메로스가 행동을 급박히 결정하기 위해 수많은 판단을 했을 전사들을 묘사할 때 '의식'에 해당하는 단어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문학적 문헌 뿐 아니라 저자는 '양원적 인류'가 살던 고대 문명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돌기둥에 새겨진 글ㆍ그림을 살피고 온갖 신상(神像)을 조사하며 허물어진 사원을 탐방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내린 결론이 양원 시대의 인간들 어떤 사적인 야심이나 탐욕, 갈등이나 포악성도 없었다는 것. 그는 인간들의 정치ㆍ윤리적 삶이 잔악해진 것은 "양원성이 파괴되고 신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결과"라고 지적한다.

그는 나아가 종교 유산이야말로 이전의 정신체계에서 물려받은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현대의 종교현상은 양원 정신 체계의 명백한 증거라는 것.

그런데 제인스가 종교에 각별한 관심을 둔 더 중요한 이유는 과학적 행위가 근본적으로 종교와 관련돼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즉 과학혁명의 배후에는 신성(神性)을 지속적으로 탐구하려는 동기가 있었다는 것. 제인스는 이를 '노스탤지어'라 표현했다.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나 마르크스의 '원시공산사회' 역시 같은 맥락이다.

양원적 구조의 소멸과 '의식'의 탄생이라는 그의 주장도 그렇지만, 결론에 이르는 지적 여정에서 심리학ㆍ문학ㆍ철학ㆍ인류학 등을 온갖 지적 유산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점이 흥미롭다. 이 책은 1978년 전미도서상을 수상했다. 줄리언 제인스의 저작이 국내에 소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원제 'The Origin of Consciousness in the Breakdown of the Bicameral Mind'

김득룡ㆍ박주용 옮김. 552쪽. 3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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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줄리언 제인스, 심리학 · 문학 · 인류학 · 철학 등을 넘나드는 통찰력 돋보여

일찍이 헤라클레스는 의식을 가리켜 “아무리 길을 걸어도 경계를 발견할 수 없는 광대한 공간과 같다”고 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셀 수 없이 많은 창고로 놀랍게 치장되어 있고 광활한 방들이 겹겹으로 들어차 있는 후미진 곳”이라 했다. 밀, 분트, 티치너는 “의식은 실험실에서 감각과 감정의 정확한 요소들로 분석될 수 있는 복합구조”라 했으며, 증기기관차가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칠 때 “잠재의식은 긴장을 유발하는 에너지의 발생기관인 보일러”라고 했다. 이처럼 의식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의식을 의식하게 된다.

저자 제인스(1920~97)는 하버드 대학을 거쳐 맥길 대학을 졸업했으며, 예일 대학에서 심리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66년부터 1990년까지 프린스턴 대학 심리학과에서 강의했다. 그의 저작들은 광범위한 영역을 다루는데, 초기에는 동물심리학에 초점을 두었으나 나중에는 인간의 의식문제에 집중하여 '의식의 기원'(The Origin of Consciousness in the Breakdown of the Bicameral Mind )을 집필하기에 이른다. 일생 동안 심혈을 기울인 이 책으로 1978년 그는 전미도서상(National Book Award)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이 책에서는 의식에 대한 기존의 여러 견해, 즉 의식이 물질의 속성이라거나 원형질의 속성이라거나, 혹은 경험 · 학습 · 추론 · 판단의 다른 이름이라는 견해는 물론, 의식을 인과적 영향력이 없는 단순한 부수현상으로 보는 견해가 모두 기각된다. 그 대신 인간의 옛 정신체계는 양원적(兩院的, Bicamaral)이었다는 주장과 함께, 의식은 인류 역사의 한 특정 기점이었던 정신의 양원적 구조의 소멸 시기와 연계되어 있다는 다소 파격적인 주장을 편다. 그는 심리학 · 문학 · 인류학 · 철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끌어낸 논거들을 유기적으로 연계함으로써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제시했다. 이 때문에 이 책은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근본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그 영향력은 프로이트에 비견되며 20세기가 산출한 가장 의미 있는 학문적 성과로 꼽힌다. 고대 문헌을 분석하고, 고고학적 성과물을 분석하며 이상심리학적 증거들을 제시함으로써 옛 인류의 양원적 정신 역량은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대목에 이르면, 학자들의 학문적 관심을 넘어 세인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옛 인류는 의식을 갖지 않았지만 성공적인 삶을 누렸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정신(마음)을 다루는 제1권은 “의식은 ~이 아니다”라는 도전적인 접근으로 시작한다. 살아 있는 한, 언제나 ‘의식’이 있는 것이라고 믿는 우리에게 그는 그것이 의식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장구한 세월 동안 역사 초기의 옛 인류는 의식을 갖지 않은 채 삶을 성공적으로 영위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정신적 기능에 의거해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의식과 지각, 반응성, 인지 등을 구별하는 저자는, 의식보다는 반응성이 우리의 행동을 유발하는 모든 자극들을 관장하는 정신기능이며, 이에 비해 의식은 훨씬 더 국소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우리가 반응하고 있는 것들을 단지 이따금씩만 의식할 뿐이라는 것이다. “당신을 보고 있는 나는 지금 당신을 의식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묻는 반론자에게 그는 “당신이 지금 의식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의 논증일 것이다”라고 답한다. 이로써 그는 “적어도 나에 대해서 말하는 한, 당신은 의식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때 당신의 정신기능은 ‘의식’이 아니라 ‘지각’일 것이다”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는 의식 없이 살던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문헌적으로 고증하기 위해 ??일리아스??를 분석한다. 행동을 급박하게 결정내리기 위해 수많은 판단을 해야 했을 일리아스 전사들을 묘사할 때 의식에 상당하는 단어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의식은 모두 언어는 아니지만 언어로 생성되고 언어로 접근된다

제인스에 따르면 의식은 언어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언어의 은유기능이다. 예를 들어 “그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우리는 그 경험이 독특한 것이어서 선뜻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때 “그것은 ~같은 거야”라고 답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에 새로운 어휘가 생성되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서로 잘 알고 있는 머리, 손, 가슴 등 자신들의 신체를 은유체로 사용하며 이러한 작업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런 작업은 신체감각으로 관찰될 수 없는 추상적 개념으로 확장된다.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려면 일단 인간의 마음속에서 ‘볼’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의 ‘눈’으로 이들을 ‘보는’ 것 자체가 은유일 수밖에 없다. 의식은 바로 이러한 언어발달 과정에서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증을 위해 그는 실제 나의 유추인 유사 ‘나’(analogue ‘I’), 그리고 그 유사 ‘나’가 수행하는 ‘이야기 엮기’(narratization) 등과 같은 중요한 개념을 소개한다.




양원시대의 인류는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제목이 ‘역사의 증언’인 제2권에서 제인스는 놀랍게도 제1권과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양원성에 역사적 · 고고학적 · 문화적 접근을 시도하는 박학을 과시한다. 여기서 관심 주제는 양원성과 신이다. 양원시대의 인류는 신의 소리를 들었다. 중요한 순간마다 들려오는 그 소리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했다. 고대 그리스 민족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전사들이 그렇게 했고, 히브리 민족의 성서에 나오는 선지자들이 그렇게 했다. 앞에서 문학적 문헌으로 고증하던 제인스는 이번에는 양원적 인류가 살던 고대 문명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돌기둥에 적힌 양각 · 음각의 글줄과 그림을 살피고 온갖 종류의 신상을 조사하며 허물어진 사원을 탐방한다. 신의 영향력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제인스의 주장은 신의 부재(신의 등돌림)의 원인이 인간 자신들의 죄악 때문이라고 믿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사뭇 다른 점인데, 그에 따르면 오히려 인간들의 정치적 · 윤리적 삶이 잔악해진 것은 양원성이 파괴되고 신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결과다. 그는 양원시대에는 어떤 사적인 야심이나 탐욕, 갈등이나 포악성도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양원적 인간은 사적으로 존재할 내적 ‘공간’도, 그런 공간에 있을 유사 ‘나’도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오늘날의 우리보다도 평화스러웠고 친절한 인간족이었다고 주장한다.


환청을 듣는 것은 고대 양원적 인간과 오늘날의 정신분열증 환자가 비슷하다

현대세계에서의 양원정신의 흔적을 논하는 제3권에서는 현대인에게서 관찰되는 정신분열증, 최면 등과 같은 정신현상을 다룬다. 이들에 대한 수많은 이론이 이 현상을 근원적으로 설명해내는 데 적절하지 못하다면서 제인스는 자신의 양원적 정신체계 이론의 설명력이 훨씬 낫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제인스는 우선 환청을 듣는 것을 고대 양원적 인간과 오늘날의 정신분열증 환자가 비슷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에게 양원적 정신체계가 원래의 모습이었으리라는 자신의 가설을 뒷받침하려 한다.

한편 제인스는 양원성과 종교적 신의 문제를 다룬 데 이어, 양원성과 정신병의 관련성을 논의한다. 그는 “정신병으로 심리적 변화를 일으키는, 신경계에 내재하는 태양숭배나 신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양자의 연관성을 부인한다. 양자 간에 때때로 환각이라는 공통 현상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그것은 교육과 종교적 역사에 대한 친숙함 때문이라고 본다.

과학적 행위는 근본적으로 종교와 관련이 있다

마지막으로 제인스는 현대의 종교현상을 양원정신 체계의 증거로 든다. 그는 종교 유산이야말로 이전의 정신체계에서 물려받은 것 가운데 가장 명백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인스가 종교에 각별한 관심을 둔 더 심각한 이유는 실은 이른바 과학적 행위가 근본적으로 종교와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과학혁명의 배후에는 신성을 지속적으로 탐구하려는 동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과학 탐구는 양원 정신이 와해된 직접적인 결과였다. 물리학 · 심리학과 생물학의 토대를 만든 사람들은 모두 17세기 말엽의 영국 프로테스탄트들로 이들은 경건했다. 그에 따르면 현대과학도 종교적인 형식이 있다. 예를 들어 그가 과학주의라 부르는 것 역시 이 시대에 과학과 종교와 분리되면서 남은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급격히 신앙적 신조로 굳은 과학적 신화다. 따라서 현대과학 역시 그것이 대신하려는 종교가 했던 것과 똑같은 특징이 있다.

“크게 보면 근대과학도 종교적 형식을 갖고 있다. 모든 것을 설명하는 합리적 우수성,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와 두드러져 비판받지 않는 지도자의 계승, 과학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경전 같은 일련의 틀, 특정한 사고방식과 해석, 그리고 완전한 헌신의 요구 등이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추종자들은 한때 종교가 제공했던 것을 그대로 받는다. 세계관, 중요성의 위계체계, 그가 무엇을 하고 생각할지를 알려줄 복점 치는 장소, 요컨대 인간에 대한 총체적 설명을 제공받는다.”

결국 과학 스스로가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주장할지라도 근원에서는 의사 종교의 발흥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제인스는 자신의 학문적 연구를 포함하여 모든 과학행위를 이렇게 일갈하며 방대한 글을 끝맺는다. “양원적 정신구조의 폐허 속에서 행동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점치던 일이 이제는 사실이라는 신화들 속에서 완전한 확실성(an innocense of certainty)을 추구하는 일이 되었을 뿐이다.”



지은이 소개


줄리언 제인스
매사추세츠 주 웨스트 뉴턴에서 태어났다. 하버드 대학을 거쳐 맥길 대학을 졸업했으며, 예일 대학에서 심리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6년부터 1990년까지 프린스턴 대학에서 심리학을 강의했다. 그의 저작들은 광범위한 영역을 다루는데, 초기에는 동물심리학에 초점을 두었으나 후에는 인간의 의식문제에 집중하여 [의식의 기원]을 집필하기에 이른다. 일생 동안 심혈을 기울인 책으로 19789년 전미도서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왜 인간과 범고래만 폐경이 있을까?

동물 세계에서 대부분의 암컷은 죽을 때까지 연이어 새끼를 낳을 수 있다.

전체 수명의 3분의 2 시점에서 생식능력을 잃는 폐경(閉經) 현상은 사람과 범고래(killer whale), 들쇠고래(pilot whale) 등 3종에서만 발견된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침팬지도 폐경이 없다.

자연에서 살아가는 생물의 기본 목적이 가능한 대로 많이 자손을 퍼뜨리는 일인데 왜 사람과 고래만 유독 섭리에서 벗어난 것일까.


◇폐경을 하는 동물들

인도의 람지트 라그하브(102)는 94살과 96살에 자식을 얻어 ‘가장 나이 많은 아빠’로 꼽힌다. 남성은 늙어서도 정자를 생산하지만, 여성은 50∼51살이면 난소 기능이 쇠퇴해 월경이 중지되는 폐경이 나타난다. 산업화와 현대 의료 혜택을 입지 않은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쿵족 여성도 현대인과 비슷한 폐경을 거치고 수십 년을 더 산다.

영장류는 사람과 유전적으로 가장 비슷한 동물이지만 폐경은 하지 않는다. 야생에서 침팬지, 보노보, 고릴라, 오랑우탄은 30대말에 마지막 출산을 하고 곧 죽는다. 사람이 45살 이전에 출산을 마치고 약 20년 더 사는 것과 딴판이다. 야생 영장류학자인 김산하 박사(생명다양성재단 사무국장)는 27일 “침팬지가 인간보다 수명은 짧지만, 마지막 자식을 낳는 시기는 비슷하다. 수명 차이를 고려하면 침팬지는 아주 늙어서까지 새끼를 낳는 셈이고, 인간은 자식을 낳을 수 있는데도 갑자기 중단하는 특별한 행태를 보인다”라고 말했다.

영장류와 달리 고래 가운데 범고래, 들쇠고래, 흑범고래 등 3종이 폐경 이후 오래 사는 것으로 밝혀졌다. 범고래는 12∼40살 동안 번식하지만 수명은 90살이 넘는다. 폐경 이후의 삶이 수명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60살 넘게 사는 들쇠고래도 35살이면 번식을 멈춘다. 북극고래가 100살 이상 살지만 죽기 직전까지 새끼를 낳는 것과 대조적이다. 아프리카코끼리와 아시아코끼리도 각각 수명인 60대와 70대까지 출산을 이어간다. 김현우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센터 박사는 “범고래, 들쇠고래, 흑범고래는 모두 대양에 사는 대형 돌고래로 고도의 사회적 행동을 하는 공통점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새끼를 적게 낳고 오래 기르며 안정된 모계 집단 속에서 어미와 자식의 유대가 굳건하다.

흑범고래의 폐경은 지난해 남아프리카공화국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이들은 남아공에 좌초하거나 일본이 포경한 흑범고래를 통계적·형태학적으로 분석해 이런 결론을 얻었다. 과학저널 ‘동물학 최전선’에 실린 논문에서 연구자들은 “흑범고래의 폐경 후 수명이 범고래나 들쇠고래보다는 아시아코끼리와 비슷했다”며 향고래, 큰머리돌고래, 들고양이고래 등 다른 대형 사회적 돌고래에도 폐경이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식물에 벌레혹을 형성하는 일본의 진딧물 한 종도 폐경을 한다는 사실이 2010년 일본 연구자에 의해 밝혀졌다. 이 사회성 진딧물은 번식기를 마친 뒤 새끼를 보호하는 ‘제2의 삶’을 산다. 생식기관이 점액 분비기관으로 바뀐 이 늙은 진딧물은 새끼가 든 벌레혹을 지키다 포식자가 오면 왁스질 분비물로 자신과 포식자를 함께 굳혀 죽이는 행동을 한다.


◇범고래 폐경은 마마보이 기질 때문

범고래는 몸길이 5~7m에 몸무게가 4~5t이나 된다.  어미를 중심으로 아들·딸들이 함께 사는 모계사회를 이루며 바다사자, 심지어 다른 고래 새끼도 사냥한다.  범고래 암컷은 90세까지 살지만 보통 30~40대 젊은 나이에 생식을 멈춘다.

영국 엑시터대의 다렌 크로프트(Croft) 교수 연구진은 1974년부터 2010년까지 36년 동안 미국과 캐나다 동부해안에 사는 범고래 589마리를 관찰했다. 연구진은 폐경 원인을 찾는 연구에서 의외를 결과를 얻었다.

무시무시한 영어 이름과 달리 범고래 수컷은 어미 없이는 살 수 없는 ‘마마보이’(mommy's boy)였던 것.  범고래는 등지느러미를 보면 나이와 성별을 알 수 있다. 일종의 지문인 셈이다.  연구진은 이를 토대로 보험회사가 생명보험료를 계산할 때 쓰는 알고리즘을 적용해 만약 어미가 없다면 범고래의 생존율이 어떻게 되는지 계산했다.  그 결과 어미가 죽은 다음 해에 30세 이상 수컷의 사망률이 14배나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나이 암컷 사망률은 3배 증가에 그쳤다.

연구진은 지난 14일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에서 “범고래 암컷이 생식을 멈추고 나서도 오랫동안 사는 이유는 다 큰 아들을 보살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범고래 어미는 왜 아들만 편애하는 것일까. 연구진은 범고래 가족의 특성에서 답을 찾았다.  범고래 수컷은 짝짓기 때가 되면 다른 집단으로 가서 짝을 찾는다. 새끼가 태어나면 잠시 머물다가 다시 어미에게 돌아온다.

반면 암컷은 원래 집단 안에 있다가 다른 집단에서 찾아온 수컷과 짝짓기한다.

범고래 어미로선 다른 집단에서 새끼를 낳는 아들을 돕는 편이 에너지를 덜 들이면서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더 많이 퍼뜨리는 길이 된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 왜 생식 능력을 포기하나

폐경이 출현한 이유는 대개 이렇게 설명한다. 자신의 번식능력을 포기하는 대신 자식이나 손주를 도와 결과적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이득을 얻는다. 1957년 나온 ‘어머니 가설’과 1998년 나온 ‘할머니 가설’이 대표적인 예이다. ‘어머니 가설’은 자신의 생식을 중단하더라도 자식에 투자하면 노산의 위험을 피하는 등 결과적으로 적응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의료 혜택이 없는 수렵채취인도 출산 때 산모 사망률이 3% 미만으로 나타나 노산의 위험이 과장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 유타대의 인류학자 크리스틴 호크스는 아프리카 하드자인을 연구해, 나이 든 여성은 출산을 포기하고 젖을 뗀 손주를 돕는 편이 진화적으로 득이라는 ‘할머니 가설’을 내놨다. 인간의 아이는 젖을 뗀 뒤에도 오랫동안 돌봐야 한다. 잇따라 출산을 하는 젊은 여성보다 나이 든 여성의 경험과 힘이 뿌리 식량을 채집하는 등 중요한 구실을 한다.

자신의 생식 기회를 버리고 자식과 손주 지원에 나서는 진화적 이점은 동물 연구에서도 밝혀졌다. 영국 엑시터대 진화생물학자 대런 크로프트 등은 2012년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실은 논문에서 36년 동안 북서태평양 범고래를 조사한 데이터를 분석했다. 놀랍게도 범고래의 어머니가 죽으면 30살 아들이 이듬해 죽을 확률은 14배로 뛰었다. 범고래 수컷은 커서도 ‘마마보이’였다. 할머니 범고래는 무리를 이끌며 먹이 찾기, 포식자 감지, 문제 해결, 이동, 집단 내 갈등 해소 등에 기여한다.

가장 최근의 학설은 ‘생식 갈등 가설’이다. 2008년 영국 엑시터대 진화생물학자 마이클 칸트 등은 생식을 둘러싼 젊은 세대와 늙은 세대의 갈등이 나이 든 세대의 생식 포기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할머니 가설은 자신의 유전자의 절반을 남기는 직접 출산에 견줘 4분의 1을 남기는 손주 지원의 이득이 충분치 않다는 이론적 약점이 있었다. 43년 동안 범고래를 장기조사한 연구에서 어미와 딸이 동시에 번식에 나서면 어미의 자식이 사망할 위험성이 딸의 자식보다 1.7배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인간도 딸이 출산을 시작할 즈음 어머니의 출산이 멎는다. 생식 갈등 가설은 할머니 가설을 보완하는 이론으로 주목받는다.

비슷한 연구결과가 있다. 2008년 영국 엑시터대의 마이클 칸트(Cant) 박사는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여성의 조기 폐경은 외부에서 온 며느리라는 새로운 젊은 여성과 생식 경쟁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동물은 짝짓기할 때가 되면 수컷이 집단을 떠난다. 

하지만 인간사회에서는 딸이 떠나고 대신 며느리가 가족으로 들어온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계속 아기를 낳으면 음식이나 보살필 시간과 같은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을 벌일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며느리로선 유전자가 다른 시어머니를 위해 희생할 이유가 없다.

결국 시어머니는 유전자를 나눈 아들이 며느리를 통해 자식을 낳을 수 있게 폐경으로 양보했다는 설명이다.

지난달 핀란드 투르쿠대의 미르카 라덴페라(Lahdenpera) 교수 연구진은 ‘고부 갈등설’을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를 ‘에콜로지 레터스(Ecology Letters)’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산업화 이전인 1702~1908년 사이 핀란드 루터교회에 보관된 출생·결혼·사망 기록을 분석했다.  여기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비슷한 시기에 아기를 낳으면 시어머니의 늦둥이가 15세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50% 떨어지고, 며느리가 낳은 아기는 66%까지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시어머니가 계속 출산을 고집하면 후손을 퍼뜨릴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말이다.

이 연구도 한계가 있다.

산업화 이전 시대라고는 불과 200여년의 시간이 폐경의 진화를 설명하기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또 인간은 당시 핀란드와 같은 농경사회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오래전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할 때부터 가족을 이뤘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직은 한 가설만으로는 설명이 어려운 상황이다.

학계에서는 여성이 할머니와 시어머니의 역할을 동시에 하면서 자신을 희생해 인류를 발전시켰을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원문보기: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9/17/2012091702359.html#csidx62bd5a36192a01dbbbb85645723969d

2018년 7월 5일 목요일

슈뢰딩거 고양이 사고실험 오류와 상호작용

사고 실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외부에서 절대 확인할 수 없는 상자 - 추후 기술하지만 이것이 오류의 핵심이다 - 안에 고양이와 청산가리가 담긴 병이 들어있다. 청산가리가 담긴 병 위에는 망치가 있고 망치는 가이거 계수기와 연결되어있다. 방사선이 감지되면 망치가 내리쳐져 청산가리 병이 깨지는 구조고 결국 그 병이 깨지면 고양이는 중독되어 죽고 만다. 가이거 계수기 위에는 1시간에 50%의 확률로 핵붕괴해 알파선을 방사하는 우라늄 입자가 놓여있다.

이럴 경우 1시간이 지났을 때 고양이는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 실험자는 외부에 있기 때문에 관찰이나 간섭을 절대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대답을 해야 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1시간 후에 절반의 확률로 상자 안의 고양이가 죽는다. 정확히는 절반의 확률은 방사선이 뿜어질 확률이므로 수정하면 '절반의 확률로 병이 깨지고 병이 깨지면 고양이가 확실히 죽는다.'가 더 정확하다. 하지만 야옹이가 우라늄을 먹는다면 어떨까? 역시 죽는다. 당신은 그 상황을 전혀 볼 수 없다. 1시간 후 상자 속의 고양이는 어떻게 되어있을까?"라는 것이다.

물론 상식적인 답은 죽었거나 살아있거나 둘 중 하나가 나와야 하지만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내리는 답변은 그런 '이거 아니면 저거'같은 답변이 아니기 때문에 유명한 것이다.

코펜하겐 해석은 죽음과 살아있음이 중첩된 상태, 즉, '죽음 or 삶'이 아니라 '죽음 and 삶'의 상태에 놓여 있다가, 관측에 의해 죽음과 살아있음이 확정된다는 답을 내놓는다.

슈뢰딩거는 특히 코펜하겐 해석에 있어서 무엇보다 과학적 사실이 관측과 무관한 결정론적인 것이 아닌 관측에 의해 확률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아인슈타인도 학을 뗀 양자역학의 이 기묘한 성질은 '달을 관측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달이 존재하지 않는 거냐?', '당신은 저 달이...당신이 보고있을 때에만 존재한다면 믿을 수 있겠소?'라는 비유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러한 점을 까기 위해 이러한 사고실험을 내놓게 된 것.

물론 이런 반론은 양자역학 내부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데, 이를 대표하는 것이 양자역학의 준입자(Quasi-particle)이다. 자동차가 사막을 고속으로 달릴 때, 자동차 뒷편으로 흙무리가 발생할 것이다. 자동차가 움직이는 물리계 전체의 운동현상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자동차 자체의 상태도 알아야 하지만, 뒤에 따라 붙는 무수한 흙무리 속 흙입자들의 정보 또한 알아야 한다. 하지만 해당 계산은 무수히 많은 계산을 하는 어려움을 동반하므로, 물리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흙무리 덩어리를 싸 잡아 엄청나게 무거우면서 일반적이지 않은 흙입자 한개로 보자.' 이렇게 근본적인 물질 성질은 입자가 아닌데도 입자로 볼때 해당 입자를 준입자라 부른다. 다른말로 하자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해당 물리량의 정보가 측정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입자가 아닌 다른 형태들로 나타날 것이며, 준입자들로 표현된 정보들을 끌어모으면 관측하지 않은 실존하는 입자의 정보를 직접 보지 않고도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철학적으로도 상당한 쟁점이 되는 주제이다. 양자역학 자체의 발전과는 무관하게 "도대체 '양자적 중첩' 같은 것이 뭐냐?"라는 철학적/물리학적 문제는 꾸준하게 제기되었다.

이상의 내용은 '관측'이라는 용어의 애매함 때문에 오해가 많았는데, 아래의 내용들을 더 읽어보도록 하자.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삶과 죽음이 중첩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언어로 완벽하게 표현을 할 수도 없고, 일반적인 상식 안에서 이해되지도 않는다. 간단한 실험을 통한 예시로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해보도록 하자.

우선 이중슬릿 실험에서 전자빔발사기에서 전자다발들이 전자를 한 번에 하나씩 발사해 보도록 하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감광판엔 간섭 무늬가 남는다. 우리는 이를 통해 전자다발들 혹은 연속적인 전자들의 흐름만이 파동이 아니라, 애초에 각각의 전자 하나 하나가 그 자체로 (입자이면서 동시에)파동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는가? 감광판에 간섭 무늬가 남기 위해선 A슬릿을 통과한 파동과 B슬릿을 통과한 파동(여기선 전자)이 서로 간섭을 일으켜야 하고, 서로 간섭을 일으키기 위해선 최소한 한 번에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전자가 발사되어 각각의 슬릿을 최소한 하나 씩의 전자가 동시에 통과해야 한다. 한 번에 하나씩 발사해서는 결코 이 전자는 감광판에 간섭 무늬를 남겨서는 안 된다. 하나의 전자가 두 개로 쪼개져서 각각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한 것일까? 물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전자는 기본입자로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다. 그럼 기기의 오작동으로 한번에 두 개 이상의 전자가 발생된 것일까? 아니다. 실험은 완벽하게 제어되어 있었다.

위의 의문을 정리해 보자. 감광판에 간섭 무늬가 남기 위해선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전자가 A와 B 각각의 슬릿을 따로 그리고 동시에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전자는 분명 한번에 하나씩만 발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광판엔 선명하게 간섭 무늬가 남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전자가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모두 통과했다! 사실 이 표현은 어폐가 있다. 이는 이 단락이 전체적으로 양자역학의 전반적인 설명 보다는 "삶과 죽음의 중첩"이라는 말이 가진 정확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할애된 것으로, 이를 위해 코펜하겐 해석의 핵심적인 부분인 상보성의 원리에 대한 설명이 의도적으로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중첩"의 물리적인 의미를 이해하는데는 훨씬 편할 것이다. 코펜하겐 해석 자체부터 이미 1920년대에 나온 것으로 과학 기술과 지식의 발달에 힘입어 양자역학적 해석도 점점 발전해 오고 있으며, 현대적인 해석 중 하나로 파인만의 역사총합(sum of histories) 또는 경로적분(Path integral formulation) 설명이 좀 더 엄밀하다. (즉, 경로 적분은 이를테면 코펜하겐 해석의 신버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앞서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라는 표현도 상보성의 원리와 배치되는 표현임에 주의하자. 참고적으로 이중 슬릿 실험 자체는 상보성의 원리와 깊은 연관이 있다. 전자의 경로를 직접 보지 못하고 간섭 무늬를 통해 확인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상보성 때문이다.

하나의 전자가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했다는 것은 물론 하나의 전자가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한다는 뜻을 포함하며, 결론적으로 하나의 전자는 확률적으로 위치할 수 있는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파동함수를 따르는 한) 있을 수 있는 모든 상태로 동시에 존재하며,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중첩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더 나아가서 양자역학은 확률론과 인식론과는 하등 관련이 없으며, 대중매체 속에 등장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거의 100% 잘못 인용되었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다. 즉, 일반적인 확률의 개념과 양자역학에서의 확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2.2. 현실세계로 나올 수 없는 상상 속의 고양이

고양이가 삶과 죽음이 중첩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이 사실이라고 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에 대한 정답은 이미 밝혀놓았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은 실제로 재현할 수 없다. 즉, 현실 속의 고양이는 삶과 죽음이 확정된 상태에 있으며, 우리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선 직접 뚜껑을 열어봐야 한다. 즉,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고전적 확률을 따르게 된다. 그 전에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깨지는 소리를 듣는 것도 관측이다. 관측을 하지 않으려면 완벽하게 방음이 되는 상자에서 실험을 진행해야 한다. 전자의 뒷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건 잠시 멈추고, 처음으로 돌아가 슈뢰딩거가 고양이를 이용한 사고 실험을 제안하게 된 이유를 다시 돌이켜보자.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거시세계에서도 똑같이 일어나야 한다. 내가 만든 방정식이 확률을 뜻한다는 당신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거시세계에서도 똑같은 현상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슈뢰딩거의 방정식을 따르는 한) 상자속의 고양이는 삶과 죽음이 중첩된 상태로 존재해야 하는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거시세계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은 미시세계에서도 일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만든 방정식이 확률을 뜻한다는 당신들의 주장은 틀렸다."

바로 이 얘기를 하기 위해 고양이를 이용한 사고 실험을 제안한 것이다. 슈뢰딩거의 주장에 논리상 허점은 최소한 그가 주장하던 당시에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중 슬릿 실험을 통해 하나의 전자가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하는 것을 목격했다. 미시 세계에선 이런 해괴한 일이 분명히 벌어지고 있다. 비단 실험실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주위 곳곳에서 지금 당장도 셀 수도 없을 만큼 일어나고 있다. 사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태양은 빛을 발하지 않으며, 그 어떤 생명체도 지구에서 존재할 수 없다. 아니, 그 이전에 세상 만물이 붕괴해버리고 만다. 이론상 가능하다거나 수학적으로 계산된다는 문제가 아니라, 실존할 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을 지탱하는 강력한 원천임을 잊지 말도록 하자.

그렇다면 거시세계에서도 한마리의 고양이가 두개의 슬릿을(물론 이 슬릿은 고양이가 통과하기에 충분히 커야 할 것이다) 동시에 통과하는 일이 벌어져야 마땅할텐데, 왜 우리는 그런 장면을 결코 목격할 수 없는가? 전술한 바와 같이 상보성 원리에 의해 전자가 됐든 고양이가 됐든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간섭무늬를 통해서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고양이는 결코 간섭무늬를 남기지 않는다. 물론 불쌍한 고양이를 괴롭히는 대신(...) 적당한 물체를 사용해서 여러 실험이 진행되었다.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이제 거시세계와 미시세계의 경계를 들여다 보도록 하자. 다행히 이에 적당한 녀석이 존재한다. 풀러렌을 이용한 이중 슬릿 실험 결과를 살펴보자. 플러렌의 크기는 앞에서 실험한 전자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크다. 원자핵과 전자의 크기 비가 100,000 : 1이고 탄소 원자들이 60개가 모여 입체적인 구 형태를 만든 풀러렌(C60)은 수소 원자보다 5만배는 더 크다. 미시적 세계에 속한다기에는 앞에 실험에 비해서는 무지막지하게 크고 거시적 세계에 속한다기에는 무지막지하게 작은 풀러렌으로 이중 슬릿 실험을 할 경우 간섭 무늬가 아닌 단지 2개의 띠를 만든다.

하지만 실험 환경을 진공에 가깝게 조성할수록 간섭무늬가 생긴다!! 공기는 기체이기에 분자 자체가 많지도 않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전자의 크기가 분자의 크기에 비해 너무 작기 때문에 전자를 이용한 이중 슬릿 실험에서는 진공이 아니더라도 간섭 무늬를 만든다. 진공의 여부가 실험에 어떤 영향을 끼친걸까?

이번엔 풀러렌이 아닌 전자 실험으로 다시 넘어가 이번에는 A슬릿과 B슬릿에 관측 장비를 달아서 전자가 어떤 슬릿을 통과하는지 확인해보도록 하자. 정말 전자는 A슬릿과 B슬릿을 동시에 통과하는 걸까? 하지만 놀랍게도 이번 실험에서는 전자는 A슬릿과 B슬릿 중 하나만 통과하며 간섭 무늬가 아닌 이중 띠를 만든다.

공기 중에서의 풀러렌 실험과 관측 장비를 단 전자 실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공기 중에서의 풀러렌 실험에서는 공기와 풀러렌이 서로 상호작용을 했고 관측 장비를 단 전자 실험에서는 관측 장비의 광자와 전자가 서로 상호작용을 했다. 즉 풀러렌 분자와 전자와 같은 입자들은 다른 입자들과 상호작용을 하기 전까지는 여러 개의 중첩된 상태를 가지고 있다가, 다른 입자들과 상호작용을 하는 순간 결어긋남 상태가 되어 더 이상 간섭을 일으킬 수 없으며, 파동성을 잃는 것과 같은 결과에 이른다. 간섭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파동이 아닌 것은 아니다. 예컨대 최초의 실험에서 나온 손전등 불빛은 제대로 간섭무늬를 남기기 힘들지만(이에 대해선 각주 9에 간략히 암시돼 있다. 단, 간섭무늬를 아예 남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엄연한 파동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의 파동은 결국 간섭으로 귀결되므로, 간섭성을 잃는 것은 곧 파동성을 잃는 것과 같다. 좀 더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자면 전자발사기에서 발사된 전자와 투수가 던진 야구공 모두 파동함수를 따르지만, 투수가 던진 야구공은 파동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그런데 풀러렌은 그 자체로 여러 개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1번이 2번을, 2번이 3번을... 이런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관측(서로간의 상호작용을)하지 않나? 어째서 진공 속의 풀러렌을 서로가 서로를 관측하는데도 불구하고 진공 속에서 여러 개의 상태를 동시에 가질 수 있을까? 그건 풀러렌은 서로가 서로를 관측하지만 그 정보를 자기네들끼리만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풀러렌 그 자체는 닫힌 계(고립계)로써 외부와는 상호 작용을 하지 않기 때문에 진공 상태에서 풀러렌이 중첩된 상태를 갖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위의 풀러렌의 처지와 똑같다. 상자 안의 물체들이 각각 닫힌 계라면 외부 계는 그들의 상태를 관측할 수 없고 그들은 파동성을 잃지 않고 동시에 여러 상태를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상자 안의 물체들이 각각 닫힌 계인가? 상자 안은 진공도 아니며 적외선과 같은 광자를 방출하고 있을 것이다. 즉 이중 슬릿 실험에서의 전자와 진공에서의 풀러렌과는 다르게 상자 안의 고양이, 청산가리가 든 병, 가이거 카운터는 서로 의미있는 상호작용을 하는데다가 상자 안과 밖을 상자 자체가 연결해주기에 상자 자체부터가 완전한 닫힌 계가 아니다. 즉 상자 밖과 안은 언제나 의미있는 상호작용을 하며 이는 언제나 상자 안이 관측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상자 속의 고양이는 상자를 열든 열지 않든 죽거나 살아있는 둘 중 하나의 분명한 상태를 가진다.

출처: https://namu.wiki/

2018년 5월 4일 금요일

과거나 미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


우리는 시간을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흘러 가는” 강물이라 생각합니다. 그 경우 죽음은 강가에 우리를 내려놓는 것이 될겁니다. 어쨌든 시간은 흘러갑니다. 영원히 앞으로 흘러가지요. 그런데 정말 시간이 그런 것일까요? 시인들은 때로 시간을 주춤거리고, 기어가고, 느려지며 심지어 멈추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합니다. 또 과거는 피할 수 없는 것이며 물건이나 사람, 장소에 새겨져있다고 표현하지요. 줄리엣이 로미오를 기다릴때 시간은 더디게 흘렀을겁니다. 아마 태양신의 아들 파에톤이 다시 한 번 아버지의 전차를 빠르게 몰아 “밤을 즉시 몰고오기를” 바랬겠지요. 우리는 너무나 현실같은 꿈에서 깨어났을때도 평소 느끼던 시간이라는 개념이 환상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카를로 로벨리는 일반인을 위한 물리학 책을 쓰는 이탈리아의 이론물리학자입니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Seven Brief Lessons on Physics)”은 블록홀에서 양자에 이르는 주제를 단순하고 참신하게 설명해 세계적으로 130만권이 팔렸습니다. 그의 신작 “시간의 순서(The Order of Time)”는 시간에 대한 시적이면서도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으로 그저 “흐르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내가 시간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개념을 모든 면에서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로벨리가 수학했던 볼로냐의 산 페트로니오 교회 앞에서 만났습니다. (“나는 코페르니쿠스처럼 볼로냐에서 학부를, 파두아에서 대학원을 나왔다고 말하기 좋아합니다.” 그의 말입니다.) 60대 초반의 작은 체구를 가진 그는 약간 들뜬 모습으로 추억에 잠긴듯 했습니다. 그는 지난 2010년 부터 마르세이유의 이론물리센터에서 양자중력센터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미국 피츠버그 대학에서 10년 정도 지냈습니다.

그는 볼로냐를 거의 방문하지 않는 듯, 볼로냐의 오랜 친구들과 연락 했습니다. 우리는 대학가를 거닐었습니다. 베르디 광장은 학생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깃발과 낙서, 플랭카드 등이 파시스트에 대한 반대와 쿠르드 족 지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고, 2016년 이집트에서 살해당한 캠브리지의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지울리오 레제니를 기억하자는 팻말도 있었습니다.

“내가 학생일때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찰과 대치하곤 했지요.” 그는 당시 운동권이었습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무엇을 주장했을까요? “별것 아니었어요. 우리는 국경이 없어지고, 국가가 존재하지 않으며, 전쟁이 사라진, 종교가 없고, 가족이 없고, 학교가 없고, 사유재산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죠.”

이제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이 너무 급진적이었다고 말하며, 사유재산을 없애는 것이나 질투 없이 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LSD가 있습니다. 그는 LSD를 몇 번 해 보았습니다. 그 경험은 후에 그가 물리학에 관심을 가지는데, 특히 시간이라는 개념에 의문을 가지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LSD는 감정적으로만이 아니라 지적으로도 매우 강력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는 회상합니다. “여러 이상한 느낌 중 가장 특별한 것은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입니다. 무언가가 내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었지만 시계는 움직이지 않았죠. 시간은 전혀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실재의 구조가 완전히 전복되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물건들이 번쩍이며 이상한 형태를 취하는 환상을 보았고, 또한 그 경험 중에도 스스로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내 뇌 속의 화학물질 조성이 변하고 있군. 하지만 평소의 인식이 옳고 지금의 인식이 틀렸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지? 세상을 인식하는 두 가지 방법이 이렇게 다르다면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누가 알 수 있을까?” 그가 LSD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할때와 자신이 학생일때 칼라브리안 해변에 누워 아인슈타인의 책을 읽으며 이 세상이 사실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니라 그 위대한 물리학자가 설명하는 것처럼 물결치는 시공간 속에 놓여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할때의 느낌은 매우 비슷했습니다.

그는 보수적인 베로나 출신의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쳐 드렸었다고 말합니다. 이제 90대인 그의 아버지는 카를로가 어렸을때 그의 선생님이 카를로는 그런대로 잘하고 있다고 말하며, 단지 머리가 좀 길고, 급진적이며, 종종 경찰과 부딪힐 뿐이라고 말했을때 크게 놀랐습니다. 한때 이탈리아에서 학생운동은 긍정적인 분위기였지만 1978년 한 급진파가 전직 수상인 알도 모로를 납치해 살해하면서 분위기는 크게 바뀌었고, 로벨리는 물리학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학계 경력은 남들과 다릅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일자리가 없다고 고민이지요. 우리가 어렸을때는 어떻게 해야 직장인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고민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생산적인 시스템’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았죠.”

학계는 일반적인 직장에서 하는 일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보였고 그는 몇 년 동안 직장을 잡기 보다는 자신의 호기심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는 북부 이탈리아 토렌토의 한 연구팀으로 가서 몇 달 동안 자신의 차에서 잠을 자며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몸을 씻기 위해 학교 샤워실을 이용했지요.”) 그는 크리스 이샴과 같이 연구하기 위해 런던으로 갔고, 앱해이 아쉬테카와 리 스몰린과 같이 연구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습니다. “나는 다른 학생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늦게 첫 논문을 썼습니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았고, 더 많은 시간을 들였기 때문에 꼭 손해만은 아니었죠.”

그의 책이 인기를 끈 것도 다른 이들에 비해 좀 늦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양자중력 공부를 끝내고 나서 2004년 첫 책을 썼습니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이 입문서에 해당한다면, “시간의 순서”는 조금 더 어렵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내가 과학을 위해 하는 일, 내가 깊게 생각하는 것, 내게 중요한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로벨리가 물리학자로서 남긴 업적은 크게 보아 아인슈타인과 양자 이론이 채우지 못한 영역입니다. 일반상대론은 모든 것이 연속적이면서 휘어진 시공간을 다룬다면, 양자이론은 불연속적인 에너지가 상호작용하는 세계를 다룹니다. 로벨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양자역학은 휘어진 시공간을 다루지 못하는 반면, 일반상대론은 양자를 다루지 못한다.”

이 두 이론은 모두 성공적이었지만 이들을 연결하는 문제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이론 물리학에서 이루어지는 주요한 작업 중 하나는 이 두 이론을 모두 설명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시공간이 그 자체로 미세한 구조로 꼬여 있는 알갱이라고 말하는 로벨리의 루프 이론, 혹은 루프 양자 중력은 그 문제의 가능한 답 중 하나입니다.

끈이론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또다른 방식의 답입니다. 내가 그에게 그의 양자중력이론이 틀렸을 가능성을 묻자 그는 맞고 틀리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논쟁을 진행시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역사상 가장 충격적이면서, 가장 오래 남아있을 이론을 만든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아인슈타인입니다. 하지만 가장 실수를 많이 저지른 과학자가 누구냐는 질문에도 나는 아인슈타인을 말할겁니다.”

그의 이론에서 시간은 어떤 역할을 할까요? 아인슈타인이 오래전에 보인 것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가기 때문에 시간은 상대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대적인 세상에서 절대적인 “지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즉 시간은 그저 다른 것과 무관하게 흘러가는 그런 독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로벨리는 시간을 “기하학적 공간에 대해 더 복잡하게 기하학적으로 얽혀있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특히 로벨리의 이론에서 가장 근본적인 수준으로 가면 시간이 사라집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시간은 그저 인간의 “모호한”인식의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는 침침한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혹은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비유에서처럼 그림자의 연극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로벨리에 따르면, 우리가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은 열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시간의 순서”에서 그는 왜 우리가 과거만을 알 수 있고 미래는 알 수 없는지 묻습니다. 그는 그 답이 열은 따듯한 물체에서 차가운 물체로만 흐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뜨거운 커피에 떨어진 얼음은 커피를 차갑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 반대 현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열역학 2법칙이 말하는 것처럼, 열은 한 방향으로만 흐릅니다.

시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이를 무질서한 정도를 나타내는 개념인 엔트로피를 이용해 설명합니다. 과거의 엔트로피는 더 낮았습니다. 미래의 엔트로피는 더 높아집니다. 미래는 더 무질서하며, 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과거의 카드 한 팩은 깔끔하게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지만 미래의 카드 한 팩은 더 섞여있고 불확실합니다. 하지만 엔트로피, 열, 과거와 미래는 우주의 근본적인 특성이 아니라 우리의 관찰 결과 때문에 나타나는 개념입니다. “극미의 세계를 관찰해보면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사라집니다. 가장 근본적인 법칙에서 ‘원인’과 ‘결과’의 차이는 없습니다.”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로벨리의 책을 읽어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물리를 처음 접하자 마자 포기해버린 나같은 사람의 요약은 빨리 잊어야합니다. 그러나 나는 로벨리와 이야기하면서 내가 그의 완벽한 독자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또한 내가 그에게 처음으로 엔트로피라는 개념을 배웠다는 사실을 기뻐하는듯 했습니다. (“시험에 통과했어요.” 그가 한 말입니다.)

“나는 다양한 수준의 사람들에게 맞게 글을 쓰기위해 노력했습니다. 물리학을 전혀 모를 뿐더러 물리학에 관심도 없는 사람을 상상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부였던 할머니에게 설명하듯이 글을 썼지요. 그리고 물리학을 배우는 학생들을 상상했고, 나와 같이 물리학을 연구하는 동료들 또한 내 책의 대상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수준의 사람들을 생각했지요. 하지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역시 물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이입니다.”

그의 책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처럼 물리학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의 동료들 역시 그의 책을 좋아합니다. 그의 책을 비판적으로 보는 이들은 그 중간에 있는, “물리학을 조금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물리를 비판합니다. (“떨어지는 공의 속도를 계산하라? 누가 그런 걸 신경쓰나요? 나는 다음 생에는 물리학 교과서를 쓰고 싶어요.”) 그는 세상이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두 문화”로 나뉜 것을 “바보같은 일이죠, 마치 영국의 학생들을 둘로 나눈뒤 한 쪽에는 음악을, 다른 쪽에는 문학을 가르치고 음악을 배운 학생들은 소설을 못 읽게 하고 문학을 배운 학생들은 음악을 못듣게 하는 식입니다.”

그의 글이 즐거운 이유는 그가 매우 넓은 문화적 식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역사 지식은 그의 책을 처음 읽는 이들로 하여금 책을 손에서 떼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는 과학과 인문학 학생들이 모두 들을 수 있는 과학사 과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인슈타인, 루드비히 볼츠만, 로저 펜로즈가 프루스트, 단테, 베토벤, 그리고 호레이스 – 각 장은 로마시대 시인의 시를 인용하며 시작합니다 – 와 함께 등장하며 마치 블랙홀과 스핀, 확률 구름의 세계로 떠나기 전에 인간의 감정과 정서를 한껏 느끼게 만드는 듯 합니다.

“호레이스는 친밀하면서 서정적이고, 또 극도로 강렬하지요. 그는 가장 위대한 시인입니다.” 로벨리의 말입니다. “그의 시에는 향수가 나타나는데 – 괴로움이나 슬픔이 아닌 – 바로 ‘이번 세상을 열정적으로 살아보자’는 느낌이지요. 어렸을때 세상을 떠난 나의 친구 어네스토가 준 이 호레이스 시집을 나는 평생 가지고 다녔습니다.”

로벨리는 인간의 삶을 사소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우주적 관점과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슬픔과 즐거움이 전혀 모순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차가운 과학”과 인간의 내적, 영적인 삶 사이에도 모순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즉, 우리가 느끼는 즐거움과 슬픔 또한 자연의 본성인 것이지요. 자연은 그저 원자들의 집합이 아닙니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에는 물리학과 시를 비교하며, 두 학문은 모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묘사하려 애쓰는 공통점이 있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에 물리학은 수학이라는 본래의 언어 외에도 비유와 은유를 사용해 설명한다는 특징이 있을겁니다. 로벨리는 인상적인 비유를 만들어내는 재능을 타고났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시간이 부드럽게 “흐른다”는 것은 환상이며, “이세상의 사건들은 영국인들이 하듯이 순서를 지켜가며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탈리아인처럼 난리북새통을 만들며 일어납니다.” 시간 개념에 대해서는 “시간에 대한 환상은 하나씩 하나씩 벗겨졌습니다.” 우리는 “시간성에 대한 모든 흔적이 사라진 텅빈, 아쉬운 아름다움만으로 반짝이는 본질만이 남은 세상”에 버려졌습니다.

내가 읽은 모든 책들 중에서 로벨리는 BC 1세기 경 로마의 시인이었고,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장대한 서사시를 썼던 루크레티우스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로벨리는 실제로 루크레티우스의 팬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상한 생각은 아닐겁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원자의 존재를 예견했고 이는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서야 이를 증명했으며, 189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틀린 주장으로 여겨졌습니다.

로벨리와 루크레티우스의 공통점은 뛰어난 언어능력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연 속 인간의 위치에 대해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은 이 우주를 구성하는 자연의 일부인 동시에 한편으로 놀라운 아름다움을 가진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주를 더 잘 이해할수록 가지게 되는, 잘못된 믿음이나 미신을 버리고 일종의 담담한 마음을 즐기면서 얻게되는 이성적인 관점입니다. 동시에 로벨리는 인간의 본질이 사랑, 공포, 욕망, 열정이며 이들이 바로 우리의 덧없는 삶, 곧 우리에게 할당된 매우 짧은 시간을 비로소 의미있게 만들어준다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출처: 뉴스 페퍼민트
http://newspeppermint.com/2018/05/01/m-rovelli1/

2018년 3월 31일 토요일

국가별 행복의 시각화


Visualizing The Relationship Between Money & Happiness

국가별 행복의 시각화 아래 링크 참조

http://www.visualcapitalist.com/relationship-money-happiness/

https://www.zerohedge.com/news/2018-03-30/visualizing-relationship-between-money-happiness

소득 수준 대비 행복의 정도를 나타냄

남미 국가들이 소득 대비 행복도가 상당히 높아

북유럽이나 선진국들은 소득 대비 행복도가 평균 수준이다

중동국가나 도시국가(홍콩, 싱가폴, 룩셈) 등은 소득 대비 행복도가 낮은 편이다

아시아 국가중 소득이 낮은 국가는 행복이 높고 소득이 높아질 수록 행복이 낮아진다

2018년 2월 4일 일요일

한국의 애널리스트는 전반적으로 쓰레기?



https://papers.ssrn.com/sol3/papers.cfm?abstract_id=2943146

2017년 4월에 발표된 논문인데 충격적이다. 한국 애널리스트의 기업 수익 예측력은 선진국은 물론이고 신흥국 중에서도 이례적으로 낮다. 게다가 엄청나게 낙관편향되어 있다. 대체 왜? 이 분석의 방법론에 문제가 없다면 한국 애널리스트에게 쓰레기 소리를 했을 때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다.

가설

ㅇ한국 기업들의 재무재표에 문제가 있다
다른 신흥국은 재무재표에 더 문제가 있다. 한국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ㅇ업무를 위한 인맥유지를 위해서는 기업에 낙관적으로 추정해야 한다
이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ㅇ다른 나라에서는 기업이 미리 실적 가이던스를 주기도 하고 실적은 슬쩍 흘리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실적 흘리기는 국내에서도 크게 문제된 적이 있었고 실적을 먼저 받아다가 매니저에게 알려주면서 애널리스트 순위를 잘 찍어달라는 영업도 많이 했었다. 특히 선진국의 주가는 실적발표일에 급등락하는데 이건 실적에 대한 보안이 잘 지켜진다는 의미다. 오히려 보안이 잘 유지되는 선진국 기업의 실적이 더 맞추기 어려울 수도 있다.

ㅇ애널과 영업(IB부서, 법인 브로커)의 이해관계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신흥국과 선진국도 마찬가지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업계에 있는 내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다. MifidII 규제가 이러한 유착을 근절시키기 위한 노력임을 고려하면 전세계에 만연한 문제점이다.

ㅇ예측이 애널리스트 개인의 영역이고 시스템화되지 않았다
개발도상국은 더더욱 시스템화 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이유를 잘 모르겠다. 어쩌다 이리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