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31일 일요일

최저임금은 가난한 사람을 희생시켜 부자를 돕는다

최저임금은 가난한 사람을 희생시켜 부자를 돕는다



뉴올리언스 로욜라 대학의 경제학 교수이자 미제스 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인 월터 블락은 아나코-캐피탈리즘이 하나의 이론으로 성립하는데 머레이 라스바드 다음으로 가장 많은 업적을 세운 대표적인 이론가이다. 1972년에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블락은 500개 이상의 논문, 24권의 책, 그리고 수천 편의 에세이를 저술했다.


원문 : Do You Want to Stab the Poor and Help Labor Unions? (게재일 : 2014년 1월 17일)

https://www.lewrockwell.com/2014/01/walter-e-block/want-to-stab-the-poor-and-help-labor-unions/




번역 : 김경훈 연구원

https://miseskorea.org/wire/?mod=document&uid=609



최저임금의 실체는 그것이 고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업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최저임금은 고용주에게 누군가를 고용하도록 강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법에 규정된 금액보다 더 적은 금액으로 고용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합법적으로 고용할 수 없는 사람만 말해주고 있다. 최저임금이 시간당 10달러로 정해져 있다고 해도, 이 법은 그 어떤 고용주에게도 시간당 10달러의 직원을 고용할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9.99달러 이하의 직원의 고용을 금지할 뿐이다. 이 불편한 진실은 경험적 증거의 문제가 아니다. 오스트리아학파라는 특정한 경제학파에서만 적절한 결론도 아니다. 순수한 논리적 추론일 뿐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최저임금은 고용의 법이 아니라 실업의 법이다.


경험적 연구(인간행동학적 입장에서 본다면 경제사 연구)를 통해 최저임금에 대한 다른 견해를 내세울 수 있을까? 여기서 경제학자들의 의견 충돌이 발생한다. 어떤 학자들은 최저임금이 실업을 전혀 유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시간당 10달러의 최저임금이 강제되는 환경에서도, 생산성의 수준이 시간당 6달러인 사람은 여전히 고용을 유지할 것이고 시간당 10달러를 지불받을 것이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고용주가 시간당 4달러의 손해를 입는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이러한 '경제학자'는 분명 소수이다. 다른 유형의 형편없는 경제학자들은 실업 효과가 매우 미미할 것이라 주장한다. 일부 미숙련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거나 아예 취업 자체가 불가능하겠지만, 많은 수의 미숙련 노동자가 여전히 일자리를 유지하면서 더 많은 임금을 받을 것이다. 그 다음 유형의 주장은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의 지지를 받는데, 최저임금으로 인해 낮은 생산성을 가진 사람들의 실업률이 증가할 것이고, 미숙련 노동자들의 임금은 고용주들이 생산요소(미숙련 노동)에 매겨진 시장가격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때까지만 일시적으로 상승할 것이다.


오스트리아학파는 이 모든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간행동학적으로 볼 때, 다른 조건이 동일한 상황에서, 최소 한 명 이상의 노동자가 가진 생산성 이상으로 설정된 최저임금은 그것이 없었을 때에 비해서 실업률을 상승시킨다. 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주장은 반박이 불가능하고, 반증이 불가능하고, 테스트할 필요도 없다. 이 주장은 필연적으로 사실이고, 현실 세계에 실제로 효력이 있는 지식을 제공한다. 경제학 법칙이라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가설을 테스트한 후 반증되지 않았다면 잠정적으로 받아들일 뿐인 주류 학계의 논리실증주의자들과 달리,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은 인과적으로 현실적이다.


최저임금법을 지지하는 공개서한을 작성한 일부 경제학자들이 최근에 경제학 입문서와 고급 교과서를 펴낸 바 있는데, 하물며 그 책들조차 최저임금법이 미숙련 노동자들이 직장을 구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일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최저임금을 지지하는 경제학자들조차 자기들의 생각과 교과서적 정설이 노골적으로 모순된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나는 그들이 이러한 모순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는 모습을 묵연하게 바라보며 큰 즐거움을 느낀다.


그렇다면 최저임금의 윤리적 성격은 어떠한가? 마찬가지로, 이 주제에 대해서도 전혀 논쟁의 여지가 없다. 최저임금법은 성인들이 서로 합의하여 무언가를 할 권리를 침해한다. 예컨대 고용주와 노동자는 시간당 5달러의 임금 계약에 동의할 수 있다. 우리의 해로운 법이 도입된 상황에서는 둘 다 범죄자로 간주된다. 그러나 누군가 당신에게 시간당 5달러의 노동임금을 지불하기로 하고, 당신이 그 제안에 동의하는 것이 범죄라면 그것은 전형적인 '희생자 없는 범죄'(victimless crime)일 뿐이다. 우리 사회는 성매매, 마약, 도박 등 다른 유형의 피해자 없는 범죄들을 점차 합법화하는 과정에 들어섰다. 많은 사람이 피해자 없는 성인의 행동은 '선택'의 문제라는 견해를 취하기 시작했다. 최저임금법은 우리 사회의 이러한 도덕적 진보에서 후퇴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최저임금법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은 바로 '피해자 없는 범죄'의 합법화를 옹호하는 이들이다.


'온건한' 경제학자들이 옳다고 가정해보자. 즉, 소수의 사람들은 분명 일자리를 잃겠지만, 압도적인 대다수는 더 높은 임금을 받으면서 고용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엄청나게 많은 미숙련 노동자들이 있는) 도심에 가서 다음과 같은 행동을 취했다고 가정해보자. 사람이 20명 있는데, 나는 그 중에 한 명을 붙잡아 총구를 들이밀고 1만 달러(50주 동안 한 주에 40시간 씩 시간당 5달러로 일하면 받는 금액)를 갈취했다. 그리고 나머지 19명에게 그 돈을 골고루 나눠주었다. 이제 나는 최저임금을 지지하는 온건한 경제학자들의 주장과 정확하게 같은 효과를 사회에 실현시켰다. 다시 강조하지만, 온건한 경제학자들은 최저임금법이 오직 극소수에게만 해가 될 것이고,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준다고 주장한다. 나는 도심에서 1명을 희생시켜서 19명에게 엄청난 혜택을 주었다. 이제 법은 나에게 무어라 말할까? 물론, 나는 범죄자로 수배될 것이고, 당연히 이는 매우 적절한 조치이다.


여기서 이유를 구체적으로 따질 필요는 없지만, 미국에서 백인의 생산성은 흑인의 생산성보다 높다. 흑인의 실업률이 백인의 실업률보다 약 두 배 정도 높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마찬가지로 지금 당장 원인을 분석할 수는 없지만, 중장년층 노동자의 생산성은 막 시장에 진입한 청년의 그것보다 높다. 청년 실업이 중장년층 실업보다 약두 배 정도 높은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흑인 청년의 실업률이 중장년층 백인의 실업률보다 대략 4배인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이 모든 불행은 최저임금법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리는데 기여하기는 커녕 그저 진입장벽이자 장애물로 작용하며 발생한 결과물이다. 통계를 사랑하는 최저임금 지지자들은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폭로하는 자료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최저임금법의 수혜자는 누구인가? 누가 범죄로부터 이익을 얻는가?(Quo bono?) 어떤 사람들은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겠다만, 최저임금법으로부터 가장 많은 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대체로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숙련된 노동자들이다. 그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할 때, 고용주의 즉각적인 대응은 갑작스럽게 더 비싸진 생산요소인 숙련 노동에서 벗어나 미숙련 노동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예컨대, 100명의 숙련 노동자와 100명의 미숙련 노동자가 만들 수 있는 제품의 수가, 50명의 숙련 노동자와 200명의 미숙련 노동자가 만들 수 있는 수와 동일하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제조업과 생산에서 이러한 고정비율이 존재하는 것은 매우 희박한 사례이다. 노조의 입장에서 [자기들 중 50명이 해고당하고 100명의 미숙련 노동자로 교체되는] 만일의 사태에 가장 잘 대처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한가지 방법은 노조의 임금 인상 요구에 대응하여 사측이 새로 고용한 미숙련 노동자들을 비노조원(scrabs)이라고 몰아붙여 공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새로 고용된 직원들은 기존의 직원들과의 세력 싸움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없는 소수집단 구성원으로 전락할 것인데, 소위 리버럴이나 '진보주의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들을 상대로 인구학적 투쟁을 감행하는 것은 정말로 사악해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노조원들은 맞서 싸울 수 있다. 타이어에 불을 붙이고 야구방망이로 적들의 머리를 깨부수며 저항한다면, 사측은 회답을 해줄 것이다. 글쎄, 이것도 그렇게 바람직하지는 않아 보인다. 노동조합은 까무러칠 만큼 기발한 대응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바로 최저임금법이다. 이 법이 바로 노동조합이 마주한 진퇴양난의 해결책이다. 경쟁을 제거하기 위해 시장에서의 가격을 통제하는 것보다 훌륭한 방법은 없다. (만약 당신이 햄버거 제조사이고, 정경유착(crony capitalism)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면, 피자나 핫도그같은 경쟁 제품의 가격을 10배 정도 인상하는 법률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좋다. 대충 건강상의 이유로 규제가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그래서 최저임금법으로부터 혜택을 받는 또 다른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고 싶은가? 그러한 물음은 청년 실업과 미숙년 노동자의 실업으로부터 누가 혜택을 받는지 묻는 것과 다름이 없다. 실업이 우울증과 범죄를 양산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마 사회복지사, 심리학자, 교도관, 경찰 정도가 최저임금법의 혜택을 받는 후보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의 일자리가 최저임금법을 통해 더 많은 임금을 받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최저임금으로 인한 범죄의 증가가 그들에게 더 많은 일감을 주고, 따라서 금전적 형편을 개선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 가능성에 주목하는 경험적 연구는 큰 성과를 거둘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최저임금법은 순전히 사악하고 해로울 뿐인데 왜 존재하는 것인가? 우리는 위에서 한 가지 이유를 이미 살펴보았다. 바로 노동조합원과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 말이다. 또 다른 이유는 경제학적 무식의 만연이다. 심지어 고집이 엄청나게 센 무식이다. 나는 로욜라 대학교에서 1학년을 상대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는데, 보통 개강일에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다. 대체로 과반수가 최저임금법에 찬성하는데, 이는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정 반대로, 학생들 대다수는 최저임금법이 정말로 임금을 올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혜택을 준다고 믿는다. 학생들은 최저임금이 바닥을 끌어 올리는 상향 평준화라고 생각한다. 이 법을 통해 모든 사람이 더 많은 임금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은유는 잘못된 것이다. 최저임금을 위한 더 나은 은유는 그것이 장애물, 즉 육상경기의 점프대라는 것이다. 최저임금으로 규정된 임금의 수준이 더 높을수록, 취업을 위해 '뛰어드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최저임금은 특히 청년들이 고용 사다리의 최하위 단계에 있는 현장에서 가치 있는 직업교육을 받고 그에 따라 자신의 생산성을 향상시킬 기회를 박탈한다. 만약 최저임금이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면, 나는 왜 우리가 최저임금에 그토록 쪼잔하게 구냐고 학생들에게 묻는다. 왜 우리는 최저임금을 시간당 10달러 혹은 12달러 수준에서 유지하고 있는가? 왜 일부 급진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시간당 15달러 이상으로 인상하지 않는가? 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에 그토록 쪼잔하게 구는가? 시간당 1000달러, 또는 시간당 10,000달러로 인상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여기서 학생들은 최저임금이 그렇게 오른다면 인구의 대다수가 실업자가 된다는 점을 인지한다. 그 정도로 높은 생산성을 가진 사람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희망하건대, 시간당 7달러의 최저임금은 시간당 4달러의 생산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결코 넘을 수 없는 고용 장벽이라는 점을 이해할 실마리가 잡히게 된다.


1949년, 미국의 최저임금은 시간당 40센트에서 70센트로 상승했고(이는 지금까지도 역사상 가장 급격한 상승률임), 우리 사회는 수동식 엘리베이터를 무인 자동 엘리베이터로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미숙련 노동자들을 희생시킴으로써 숙련된 엔지니어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다. 물론 이러한 전환은 1년만에 시행된 것이 아니라 몇 년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원인은 최저임금의 인상이었다. 최저임금은 노동자가 해고되기 이전에는 정말로 임금을 올려줄 것이다. 만약 미국의 최저임금이 2014년 기준 7.25달러에서 공포스럽게도 15달러로 상승한다면, 무인 주문 시스템이나 자동 튀김기를 만드는 사람들의 노동력은 여전히 경쟁력 있겠지만, 미숙련 노동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패스트푸드점이나 주유소의 아르바이트 자리는 말 그대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미국의 현행 최저임금을 7.25달러에서 조금도 올려선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7.25달러를 유지해서도 안되고, 그것보다 더 줄여서도 안된다(일부 정치인들은 여름 휴가철에만 일시적으로 혹은 고등학생들에게 국한하여 최저임금을 시간당 4달러 정도로 낮춰야 한다고 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를 취하는 것은 최저임금법이 상향 평준화가 아니라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라는 것을 인정할 뿐이다). 우리는 대신에 최저임금을 완전히 폐지해야 하고 마치 소금을 뿌리듯 완전히 그 흔적을 제거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최저임금의 입법 자체를 범죄로 규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최저임금법을 통과시킨 국회의원들, 법을 집행한 경찰들, 그리고 그들에게 승인을 내린 판사들을 비롯해 최저임금에 책임을 지는 모든 사람을 범죄자로 취급해서 감옥에 구속시켜야 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총구를 들이밀고 직업을 잃게 만든 사람을 그렇게 처벌하지 않는가? 최저임금법처럼 암묵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비자발적 실업을 양산하는 법이 아니라, 극악무도하게 노골적으로 양산하는 법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즉, 다음과 같은 법률이 제정되는 것이다: 흑인을 고용하는 것은 불법이다. 백인을 고용하는 것은 불법이다. 청년을 고용하는 것은 불법이다. 노인을 고용하는 것은 불법이다. 유대인을 고용하는 것은 불법이다. 기독교인을 고용하는 것은 불법이다. 동성애자를 고용하는 것은 불법이다. 이성애자를 고용하는 것은 불법이다. 남성을 고용하는 것은 불법이다. 여성을 고용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러한 법을 통과시킨 국회의원들, 집행한 경찰들, 승인을 내린 판사들, 그외에 이러한 법에 관여된 모든 책임자를 우리가 어떻게 대하겠는가? 정확하게 우리는 그들을 처벌할 것이다.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그들을 가장 강력하게 응징할 것이다. 왜 최저임금법의 책임자들에게는 다른 기준이 적용되어야 하는가?

2021년 10월 11일 월요일

자아(=뇌와 신경계)는 움직임을 위한 예측 프로세스

식물이 신경계가 없는 이유(갖고 있다가 없어진 놈들도 있음)는 운동성이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성게는 어린 개체일때는 올챙이처럼 생겨서 신경이 존재하지만 암벽에 붙어서 움직일 필요가 없어진 다음부터는 신경계가 사라진다

즉, 신경은 운동에 필수 요소다

세포마다 신경이 분포(심장처럼 자율로)할 수도 있지만 다세포 생물로 진화할수록 신경들도 모여서 신경계로 뭉친다. 신경을 한곳에 모아 신경계로 관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다양한 이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극한에 모인 것이 동물의 뇌이다.

신경계는 외부 세계의 변화를 인지하면서 다양한 요소를 계산한다. 이는 마치 트리구조와 비슷하다. 수없이 많은 경험을 통해 신경계는 외부 환경 입력 -> 운동 출력의 디시전 트리를 만들고 학습한다. 이는 급작스런 반응을 패턴화하므로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

이때 예측이 필요하고 이를 전담하는 기능이 신경계 내에서 발달한다. 예측이란 이런 것이다. 가령 운전중에 앞에 어린아이가 뛰어든다고 하자. 눈으로 감지한 공간의 입력이 자동적으로 발을 브레이크로 가져가게 한다. 누구도 "어 아이가 있네? 발을 옮겨서 브레이크를 눌러야겠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삶을 통해 뇌와 신경계는 다양한 변수를 미리 '예측'하고 몸의 운동기관 등이 자동으로 반응하도록 패턴을 만들어왔다. 

다양한 감각에 따른 다이나믹한 운동은 예측능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예측은 결과적으로 '의식'을 만들어 낸다. 손끝에 감각과 눈에 감각 후각적 감각 등 수많은 전기화학적 신호가 뇌에 실시간으로 전달된다. 뇌는 그것들을 모두 처리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 가장 효율적인 방식은 대강의 큰 줄기는 자동으로 프로세스화하고 세부적인 차이가 있을 때 이를 약간식 신경써서 수정하는 것이다. 후자의 신경써서 수정하는 프로세서가 바로 '의식'이다. 의식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간단하다. 이 글을 읽고 있으면서 몸 어딘가를 재관조하면 분명 다리를 떤다든지 피부를 긁는 다던지 다양한 행동을 하고 있음을 알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무의식중에 하는 행동이 있고 다시 재관조하는 행동이 있다. 재관조는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므로 이를 의식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의식중에 하는 행동은 무엇일까?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뇌는 무언가를 계속한다. 여기서 FAP(fixed action pattern 고정된 행동방식 혹은 일반적 표현으로 습관 같은 것)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FAP은 뇌의 아주 중요한 요소가 나타나는 것이다. 뇌는 기존 방식을 패턴으로 저장해두었다가 향후 비슷한 입력이 있을 시 그에 맞게 적절히 행동한다. 

의식은 뇌의 일부이며 뇌의 입출력 신호를 어느정도 조정하게 해주는 조정자도 된다. 손에 들고 있던 귤을 놓치고 그것을 인지하여 다시 땅에 닿기전에 잡는다고 생각해보자. 이는 아주 순간적인 판단으로 가능하다. 기존에 학습한 FAP가 있어서 의식전에도 몸은 기존방식대로 움직인다. FAP는 대략적인 움직임을 하지만 미세한 오차를 수정하려면 의식이 필요하다. 뇌의 입출력을 수정하는 것이다. 공간에 대한 감각을 받아들여 해석하고 내 몸의 팔, 손의 위치를 해석하여 어느정도 수정해서 움직여야하는지를 계산한다. 

즉, 의식은 FAP등을 하는 기계적 뇌에 추가로 미세조정가능한 기계적 뇌를 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일종의 다중 연산 프로세서다.

2021년 10월 2일 토요일

차현진 작가의 은행과 돈의 기원, 철학

- 서양은 민간에서 돈이 만들어졌고 동양은 국가주도로 만들어짐, 돈이란 서양은 민간의 계약발생론, 동양은 법정화폐로 처리


- 동양은 돈이 왕명으로 정해져 위조등을 엄벌, 따라서 돈의 품질에 신경을 안썼다(철조각에 돈이라고 왕명하면 신뢰성을 가짐)

- 반면 서양은 돈의 본질가치인 금과 은의 재질과 함량을 매우 엄밀하게 정했다. 대신 위조나 함량을 속이는데 대해 벌이 강하지는 않았다. 인플레이션으로 대응했다


- 어음(어-는 에누리, 살을 에는, 의 에에서 유래, 자르다는 의미)은 종이를 잘라서 서로 나눠가진대서 유래

: 동양은 어음은 차용증으로 교환소가 없었다

: 서양은 어음을 자주 교환해서 교환소가 있었고 이것이 은행의 기원이 됨


- 고대 영국은 어음을 쓸 때 나무조각으로 나눠서 채권자와 채무자가 나눠가짐 이를 Tally stick이라고 하는데 이중 채권자가 보유한 쪽을 'stock'이라고 불렀다

: 과거에는 채권을 stock이라고 불렀다. 최조의 주식회사는 채권과 유사한 성격이 있어서 stock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나중에 주식의 어원이 되었다


- 대부업과 환전은 유럽에서 천한 일이고 교회에서 금지했으므로 유태인만 종사했다. 이들은 기독교를 믿지 않으므로 대부업이 지옥으로 간다는 종교의 가르침으로부터 자유로웠지만(같은 유대인끼리는 대부업 금지) 천대는 매우 심했고 목숨도 위험했다. 따라서 늘 도피를 생각해야 했으므로 부동산 투자는 회피하고 금융자산으로만 부를 쌓았다.


- 종교전쟁과 왕실전쟁등을 겪으면서 왕은 사립은행에 대규모 부채를 졌는데 이에 대한 부담으로 은행가들을 조직적으로 죽였다


- 이후 절대 왕정과 식민지 경쟁 등을 겪으며 국가는 대규모 자본조달의 필요성을 절감. 국가차원에서 은행설립


: 1587년 베니스 은행(지급결제)

: 1609년 암스테르담 은행(지급결제)

: 1688년 스웨덴릭스방크(발권)

: 1694년 영란은행(발권)

 

- 이로써 이전의 민간 은행이 대출(대부업)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후 은행은 지급결제와 발권으로 그 역할이 옮겨진다


- 여기서 문제가 발생, 은행의 역할은 커졌는데 한두개만 망해도 국가에 큰 문제를 일으켰음(이는 지금도 동일)


- 이 과정에서 민중과 정치인, 은행간 갈등이 발생, 남해 버블, 미시시피 버블 등의 대규모 금융사기 등이 겹치며 은행이 파산하거나 아예 정치적으로 은행을 없애기도 했음


- 그러나 은행은 정치적으로 매우 유용한 돈줄을 제공했고 경제발전에도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폐단을 막을 방법을 강구. 이 과정에서 최종 대부자로서의 중앙은행이 설립

: 1925년 남미 버블(Poyais), 금융위기 발생(Panic of 1825) - 영국 젠킨스 수상 명령으로 영란은행 최종대부자 기능 발동

: 1866년 영국 금융위기 Overend, Gurney and Company파산 - 월터 베젓, 저서 '롬바르드 스트릿'에서 중앙은행의 최종대부자 기능 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