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2일 토요일

불안(Status Anxiety)

불안의 원인

사랑결핍

높은 지위를 바라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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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에게 호감을 보여주면 우리는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들은 모두 개인 정체성을 가진 존재권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흔히 언어도단에 가깝게, 사회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을 `유명인(이름있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필요이상의 부를 창조하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만을 가지고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돈을 모으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존경을 추구한다. 존엄을 갈망한다. 어째서? 왜? 나 스스로는 나의 존재가치를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에서 이렇게 말했다.

“탐욕과 야망을 품고 권력과 명성을 얻으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주목받고 관심받고 내 말에 귀 기울여주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부는 세상의 관심을 모은다. 반면 가난한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은 쉬 잊혀진다.” 잊혀짐은 근원적인 공포심일지도 모른다.


3
어른이 되어 사랑을 찾아가는 두 가지 방법
첫째, 노래와 문학의 주제가 되는 남녀간의 사랑
둘째, 세상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얻고자 하는 것, 즉, 탐욕과 야망

우리는 후자에 대해서는 쉽게 입에 올리려 하지 않지만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본연의 핵심적인 삶의 명제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중요성

1
윌리엄 제임스는 ‘심리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Psychology>’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개인이 모든 구성원으로부터 완전히 무시당하는 것이 만약 가능하다면 그는 울화와 절망감을 견디지 못해 차라리 잔인한 고문을 당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2
왜 타인의 관심이 필요한가? 그들의 관심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보다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존재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야 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른지 모른다. 그 결과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관점이 곧 내가 나를 바라보는 관점이 되어버린다.

우리의 `ego`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줘야 하고 무시라는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 남의 관심 때문에 기운이 나고 무시 때문에 상처받는 자신을 보면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어디있나 싶어 정신이 번쩍든다.


속물근성

1
속물이란 하나의 가치척도를 지나치게 떠받드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가치를 동일하게 취급한다.

2
언론 때문에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속물은 독립적 판단을 할 능력이 없는 데다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갈망한다. 그래서 언론이 이들의 사고를 결정해버리는데 그 수준은 놀라울 정도로 위험하다.


기대

물질적 진보

과거 200년동안 서방국가들의 생활수준은 역사상 가장 빠르고 급진적으로 풍족해졌다. 2차대전후 경제팽창에서 서방, 특히 미국의 소비자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특권을 누렸지만 어찌된 일이지 동시에 가장 괴로운 사람들이 되었다.

평등,기대,선망

1
그들의 괴로움이란 불안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실제적 궁핍이 급격히 줄었음에도 궁핍에 대한 공포는 오히려 늘어났다.

2
부나 존중의 수준은 준거집단에 크게 좌우된다. 쾌적한 아파트에 살고 편안한 일자리에 출퇴근한다고 해도 동창회에서 친구몇명(최강의 준거집단)이 더 매력적인 직업으로 더 큰집에서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괴로워진다. 그런 면에서 강력한 준거집단인 친구의 성공은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3
이러한 고통은 계급제도가 확연했던 고대시대에는 이렇게 만연되지는 않았다. 준거집단의 생활수준은 비슷했으며 다른 계급에 질투나 선망의 의식은 없었다. 자유주의와 상업주의가 가져온 평등사상, 이것이 우리들의 고통의 씨를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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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부터 서양의 서점들은 자수성가한 영웅들의 자서전이나 조언집, 교훈담등이 독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또 의도와는 달리 결과적으로 그들을 슬프게 했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Autobiography>’을 필두로 하여 윌리엄 매슈즈의 ‘출세하기<Getting On in the World>’, 리먼 애벗의 ‘성공하는 방법<How to Succeed>’, 윌리엄 스피어의 ‘성공의 법칙<The Law of Success>’등이 잇따라 출간됐다. 이러한 출판 경향은 지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앤서니 로빈스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Awaken the Giant Within>’은 강한 결심을 통하여 인생을 바꾸라고 종용한다. 미디어는 이러한 분위기를 한껏 무르익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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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는 ‘국부론<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Wealth of Nature>’(1776)에서 근대사회가 이루어낸, 경외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생산성과 원시적인 사냥과 채집사회의 형편없는 자원을 비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원시사회는 극심한 궁핍에 시달렸다. 기아와 가난한 자는 짐승의 밥이 되곤 했지만 혁신적인 생산성으로 근대의 모든 구성원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그는 가난한 노동자라해도 근면하게 일하기만하면 과거의 어떤 야만인도 얻을 수 없었던 많은 물자를 손에 넣고 편리한 생활을 즐길 수 있다고 했다. 하물며 250여전이 지난 지금에서야 두말할 게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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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스미스보다 22년전 장-자크 루소는 날카롭고 기묘하지만 섬뜩할 정도로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야만인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인간 불평론 기원론<Discour surl’origune et les fondements de l’inegalite parmi le bommes>’(1754)에서 다들 야만인과 근대의 노동자중 노동자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과연 정말일까 하고 물었다.

루소의 주장은 부에 대한 명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사회는 첫번째 방법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이루었지만, 욕망에 줄기차게 부채질을 하여 자신이 가장 뛰어난 성취의 한 부분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부유하다고 느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와 같다고 여겼지만 우리보다 더 큰 부자가 된 사람과 실제로나 감정적으로나 거리를 두면 된다.

발전한 사회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전보다 높아진 소득을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를 더 부유하게 해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볼 때 우리를 더 궁핍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무제한의 기대를 갖게 하여 우리가 워하는 것과 얻을 수 있는 것, 우리의 현재의 모습과 달라졌을 수도 있는 모습 사이에 늘 간격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루소는 머리 위에 지붕이 있고, 배를 채울 과일 몇알과 견과가 있고, 저녁에 투박한 악기를 연주하거나 낚시용 배를 만들 수만 있다면 부족함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능력주의

실패에 관한 유용한 옛이야기

고대시대, 사람들은 계급에 의해 명확히 나뉘었다. 서양계급사회(기타 세계도 마찬가지지만) 주요한 세계급 – 성직자, 귀족, 농민 – 은 매우 확고했으며 나면서부터 결정된 것이다. 농민은 낮은 위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도덕적 의미는 없었다. 오히려 농민계급은 생산계급으로서 사회유지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귀족들도 이를 알고 있었다. 성서에도 나타난다. 예수는 목수의 아들이며 부자는 성서에서 부정적으로 다뤄졌다.

불안을 일으키는 새로운 성공이야기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개념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1723년 봄, 런던의 의사 버나드 맨드빌은 소책자 ‘벌의 우화<The Fable of the Bee>’에서 부자들이야말로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의 생존을 돕는 쓸모있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그의 책의 부제가 말해주듯이 “사적인 악덕, 공적인 유익”으로 요약된다. 24년대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돈이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님을 인정했으나 동시에 돈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에 매우 감사한다. 이런 욕망과 능력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보다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이런 이야기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다지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도덕성까지 해치는 것은 아니어서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켜주었다. 그런데… 시간이 더 지나가자 지위에 도덕적 의미까지 부여되었다.

계급제 사회에서 평등한 사회로 이행하면서 세습으로 유지되었던 기존의 무능력했던 왕, 귀족, 장군 등의 높은 지위자들은 퇴출되고 공정한 경쟁에 의해 능력 있는 사람들이 높은 지위를 얻게 되었다. 교육은 평등하게 이루어졌고 능력주의가 자리잡았으며 불평등을 조장하는 것들은 제도적으로, 혹은 자연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능력과 세속적 지위 사이에 신뢰할 만한 관련이 있다는 믿음이 늘어나면서 돈에도 새로운 도덕적 가치가 부여되었다. 록펠러는 부끄러움 없이 주님이 자신을 부자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스코틀랜드의 의사 새뮤얼 스마일즈는 ‘자조<Self-help>’에서 궁핍한 젊은이들에게 높은 목표를 세우고, 공부하고, 절약하라고 권한 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돕는 정보를 비난했다. 심지어 엄청난 기부금을 냈던 앤드류 카네기조차도 그의 ‘자서전<Autobiography>’(1920)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선행위에 쓰는 1,000달러 가운데 950달러는 차라리 바다에 버리는 게 낫다. 자선으로 먹여살리는 주정뱅이 부랑자 또는 게으름뱅이 하나하나가 이웃을 부도덕하게 감염시킨다. 감정은 적을수록 좋다. 자선행위로는 개인이든 인류든 나아질 수가 없다. 진정 고귀한 사람은 결코 자선이나 동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불안의 해법

철학

명예와 약점

기원전 5세기 그리스에는 지위로 인한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소크라테스, 디오게네스, 엠페도클레스 같은 철학자들은 세속적인 사람들의 이목으로부터 자유롭고 독립적이었다. 이 철학자들은 남들이 우리를 보는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모욕은 근거가 있던 없든 수치를 준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지적인 염세주의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면밀하게 검토해보면서 서글픈 동시에 묘하게 위안이 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고 이야기해왔다. 어떤 문제이든 다수의 의견에는 혼란와 오류가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샹포르는 그의 이전과 이후의 여러 세대의 철학자들의 염세적 태도를 반영하여 이렇게 말했다. “여론은 모든 의견가운데 최악의 의견이다.”

이렇게 여론에 결함이 있는 것은 공중이 이성으로 자신의 생각을 엄격하게 검토하지 않고, 직관, 감정, 관습에 의존해버리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피상적이고 편협하고 잘못되었고 하찮다는 것, 그들의 잘못이 수도없이 많다는 것을 알게되면 점차 그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철학적 염세주의의 중요한 모범을 보여준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그는 이런식으로 묻는다. “만일 청중이 한두 사람만 빼고는 모두 귀머거리라면 그들의 우렁찬 박수갈채를 받는다 해서 연주가가 기분이 좋을까?”

인간성에 대한 통찰력있는 시각이 유용하기는 하지만 친구가 줄어든다는 단점이 있다. 샹포르가 이러한 삶의 자세의 큰 대가를 넌지시 드러낸 순간 쇼팬하우어는 선선히 그 가능성을 받아들였다. 그는 곧이어 모든 젊은이들이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충고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만날 일이 줄어들수록 더 낫은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

불안을 줄이는데 예술은 힘을 발휘한다. 권위에의 풍자,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 삶에 대한 비평… 예술작품은 세상을 더 진실하게, 더 현명하게, 더 똑똑하게 이해하는 방법을 안내해준다.

정치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역적으로 높은 지위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고대 스파르타의 전사, 로마의 성직자, 중세의 기사, 영국의 신사, 이들이 중요시하는 것이나 이들이 되는데 필요한 것은 지금 시점에서 본다면 치졸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다. 지금 중요시되는 것도 미래에는 그렇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기준을 바꾸는 것을 시도해보는 것, 이것이 정치이다.




종교

우리들에 대한 유한성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종교는 시작한다. 잘났건 못났건 고귀하건 미천하건 결국 우리가 죽음 앞에서는 평등하다.

사람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던 가장 힘 센 인간과 커다란 자연 – 큰 사막, 높은 산, 빙하와 대양 – 사이의 차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광대한 시공간을 인식하는 순간 사회적 위계속의 우리란 보잘 것 없는 느낌안에 포섭되면서 마음에 위로를 얻게 된다.


보헤미아

19세기초 서구사회에 새로운 집단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소박하고,청빈하며,예술적이고,때론 우울하고,문란한 듯한 성생활을 하고,독특한 헤어스타일을 가진 그들을 우리는 보헤미안이라고 불렀다. 보헤미안들은 부르주아지가 대표하는 거의 모든 것을 싫어했으며 그들을 모욕했다.

오해를 받고 거부당하며 살지만 그럼에도 인사이더보다 우월한 아웃사이더라는 신화는 보헤미아의 가장 위대한 인물들 다수의 삶을 반영하거나 그 삶을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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