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2일 토요일

헤이리(Heyri)

헤이리 사람들은 모두가 행복한 바보들이다.
헤이리는 모든 것이 주민 자율과 자원봉사로 이루어진다
장수촌 성격을 띤 헤이리에서 모든 사람들은 자유인이다

힘들게 노력을 하고 부산을 떠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탐욕과 야망을 품고, 부를 추구하고, 권력과 명성을 얻으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현재 우리를 불안에 떨게 만드는 실체는 무엇일까? 혹여 우리가 보헤미안과 부르주아지도 못 되는 주제에, 실패한 부르주아지와 사이비 보헤미안 주제에, 탐욕스럽게 양극단을 동시에 추구함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최근 언론에도 등장하기 시작한 헤이리 사람들이 새로운 인간문화를 알리는 하나의 신호탄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헤이리를 외부세계와 구분 짓게 하는 것은 여럿 있지만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문화적이고 창의적인 것에 대한 무조건적 존경심, 전문지식으로 무장한 자신감 있는 문화의식, 기득권과 신분의식에 대한 경멸, 대중문화, 맥도널드, 스타벅스 등의 획일적 문화에 대한 저항적 기질, 자원봉사방식의 마을회 운영, 1인 1표 식의 수평주의, 때로는 영적 세계에 대한 몰입 등등의 단순치 않은 주민들의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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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초 화가, 건축가, 조각가, 작가, 서예가, 문인, 출판인, 음악가, 연극인, 영화감독, 영화 배우, 방송인, 가수, 의사, 교수, 평론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파주 통일동산의 헤이리라는 작은 마을에 하나 둘씩 들어와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부르주아의 자본주의와 보헤미안의 자유분방함을 조화시켜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켰다.
그들은 회원 공동체라는 울타리 내에서 서로를 끔찍이 사랑했고, 서울 외곽의 파주라는 싼 지역에 살았고, 책을 많이 읽었고, 돈에 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고, 권력이나 물질적 성공보다는 예술과 감정에 충실했고, 가끔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생활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들을 '헤이리안(heyrian)'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헤이리안’이란 신조어는 외부사람들에게는 보헤미아의 창의력에 부르주아의 포부를 겸비한 뜻의 새로운 문화 엘리트로 비치기도 한다.

보헤미안이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19세기 사회의 관습에 구애되지 않는 방랑자,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예술가·문학가·배우·지식인들을 통칭하는 말이었다. 이것이 1960년대에 와서 히피로 한단계 발전했다가 80년대에 접어 들면서 부르주아에 한층 근접한 귀공자풍 가치관을 지닌 여피로 둔갑하기도 했다.

헤이리안은 과거의 엘리트에 저항하며 자란 교육 받은 사람들이지만, 그자신들 또한 한국의 전통적인 중상류층으로서 교육을 많이 받은 엘리트라는 것이 특징이다. 풍요를 거부하지는 않지만 물질주의는 반대한다. 헤이리에 집을 짓고 무언가를 팔면서 삶을 영위하지만 자신이 팔리는 것은 거부한다. 본능적으로 반기득권적이지만 이제는 자신들이 새로운 기득권층이 되었음을 잘 알고 있다. 여전히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세속적 성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지난 세기의 부르주아와 공통되지만, 자유와 진보, 야성과 자연, 창조성과 문화 등을 적극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일면 히피와도 닮았다.

부르주아의 합리성, 그리고 보헤미안적 자유와 상상력을 조화시킴으로써 헤이리안들은 정치와 경제보다는 문화를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사회를 혁신시키려고 한다. 헤이리안들에게 비즈니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다. 삶은 확장된 취미이며 자기 계발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그들은 의미있는 삶을 부정하고 세태에 순응하는 인간을 경멸하며, 출세와 돈을 위해 고상함과 창의성을 스스로 죽여버린 인간을 답답해 한다. 효율성보다는 창의성이 생산성의 새로운 열쇠라고 믿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의 목적은 자기 자신 속에서 최고의 세계를 발견해 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헤이리에서 일은 평생 직업이 되고 천직이 된다.

그들은 근로자가 아니라 예술가처럼 일한다. 그들에게 일은 영적인 자아와 지적 계발을 이룰 수 있는 일종의 자기 표현방법인 것이다. 그들은 헤이리내의 모든 조직을 하나의 기계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것들을 변화로 가득 찬 유기체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계의 나사나 톱니바퀴가 아니다. 자원봉사를 할 때도 조직 속에서 일을 하지만 조직의 가치 못지않게 자신의 가치를 존중하는 자신감과 적극성으로 무장되어 있다. 조용히 살기를 바라는 그들은 고상한 자기 중심자들이다. 헤이리안들에게 일터란 자극을 받는 곳, 재미있는 곳, 서로를 발견하는 사회적 장소이다. 그 곳에서 그들이 하는 것은 비즈니스가 아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논다. 일터는 바로 놀이터인 것이다.

그러나 수평적 사회를 지향하는 헤이리안들 사이에서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놓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대립의 핵심에는 늘 세속적 성취의 가치와 감수성에 대한 대조적 평가가 있지만 주류 의견은 늘 같다.

바깥세상에서는 상업적 성공과 공적인 평판에 기초하여 지위가 부여된다면, 헤이리안들에게는 고급 아파트나 우아한 옷을 살 수 있는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을 예민하게 받아 들일 수 있느냐, 감정의 주요한 저장소인 예술에 관람자나 창조자로서 헌신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헤이리안의 가치 체계에서 순교자적 인물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만들기 위해, 또는 여행이나 친구나 가족에게 헌신하기 위해 안정된 직장과 사회의 존경을 희생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러한 헌신 때문에 세상이 인정하는 외적인 품위의 표시는 부족할지 몰라도, 헤이리안들의 세계에서는 최고의 명예를 누릴 자격이 있다. 그들의 윤리적 양식과 감수성과 표현 능력 때문이다.

헤이리 사람들은 모두가 행복한 바보들이다.

97년 예술인들이 조합을 결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300여명의 회원들이 참여해 집과 작업실, 미술관, 박물관, 갤러리 등 문화예술공간을 지으면서 탄생한 헤이리는 IMF가 없었더라면 탄생하지 못했을 도시이다.(‘헤이리’라는 명칭은 경기 파주 지역에 전해져오는 전래농요인 ‘헤이리 소리’에서 따온 것이다.)
국내여건에서 도시 기반을 갖추고 16만평이라는 작지 않은 땅의 소국이 탄생한 것은 분명 우리에게도 신의 축복이며 하늘의 도움이다. 허균이 《홍길동전》에서 꿈꾸었던 '율도국'의 환생이 혹여 이곳은 아닐까?

헤이리는 이웃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젓가락이 몇 개인지 안다는 옛 말을 실감할 수 있는 마을이다. 누가 뉘집 아이인지, 누가 어느 집 어른인지도 알 정도로 전통적인 의미의 공동체적 삶이 이뤄지고 있다.

마을의 공회당 격인 커뮤니티 하우스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대다수가 참여하는 주민 회의가 열린다. '공터를 어떻게 가꿀 것인가'에서부터 '외부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어떤 프로그램을 제공할 것이냐'까지 다양한 사안을 논의한다. 정월대보름이나 추석 같은 명절마다 열리는 마을축제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두 참여해 팔씨름이나 줄다리기를 한다. 토요일마다 열리는 풍물 강좌에서 사물놀이를 배운 아이들이 송년 행사때 발표회를 하기도 한다. 매달 마지막 주 일요일 오전 8시에는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나와 마을 청소를 한다.
40대,50대들 다수는 '돈벌이에 너무 매몰되지 말고 좀 다르게 살아보자'며 이 곳에 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녀교육이나 인생관에서도 세태에 구애받지 않는 여유를 보인다. 그런가 하면 마음 맞는 이웃들과 좋아하는 것을 나누며 노후를 보내고자 하는 이들도 있다. 음악감상실 '카메라타'를 연 방송인 황인용씨나 정치박물관을 운영 중인 신명순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가 여기에 속한다.

최만린 이사장(서울대 교수)은 이런 헤이리 사람들을 "바보같은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물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이라는 반어법일 것이다. 헤이리 중심부에 위치한 서점과 레스토랑, 전시장이 있는 복합문화공간 '북하우스'한 켠에는 고은 시인의 축사가 써 있다. '나는 이 곳에서 혼자가 아닙니다. 나는 이곳에서 당신의 당신입니다. 두 사람의 헤이리.' 혼자가 아니기에, 헤이리의 '바보'들은 더욱 행복하다.

헤이리는 모든 것이 주민 자율과 자원봉사로 이루어진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헤이리는 회원들이 40대 중반부터 70대가 주민 대부분을 구성하는 관계로 또한 은퇴촌의 성격을 띠기도 한다.

그래서 헤이리에서는 주민들이 은퇴 이전에 익숙하게 하던 일들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통로가 다양하게 존재하며 이런 통로들은 자원봉사 활동과 취미 활동의 두 가지로 크게 구분될 수 있다. 지원봉사 활동의 경우 주민들이 지닌 각각의 전문성을 적절한 곳으로 연결시켜줄 수 있는 기구들이 이미 마을에 다양하게 존재한다.

기실 마을의 모든 운영이 자원봉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러한 다양성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우선 마을과 관련된 모든 중요한 사안을 토의하고 결정하는 “마을회” 자체도 주민들의 다양한 전문성을 공급 받아 운영된다. 선출직인 임원들 이외에도 상설위원회와 수많은 특별위원회의 구성은 전부 상이한 분야에서의 전문성을 지닌 주민들로 채워진다.

헤이리 주민들이 익숙한 활동을 통해 자아의 연속성을 회복할 수 있게 하는 또 하나의 통로는 스포츠 댄스와 풍물놀이, 아프리카 타악기 짐베 강습등 다양한 면면의 취미 클럽들이다. 은퇴와 더불어 시간적 여유가 생긴 주민들의 대부분은 은퇴 이전에는 여러 사정으로 충분히 즐기지 못하던 취미활동을 헤이리로 이주하며 본격적으로 재개한다. 사실 마을이 제공하는 풍부한 취미활동의 가능성이 헤이리로의 완전 정착을 유도하는 결정적 계기인 경우도 많다.

장수촌 성격을 띤 헤이리에서 모든 사람들은 자유인이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에서 우연히 마주친 로돌포와 미미는 사랑에 빠진다. 로돌포는 자유분방한 시인이고 미미는 수를 놓아 먹고 사는 가난한 여자이다. 로돌포는 보헤미안 기질을 가진 친구들과 어울리며 스스로 선택한 가난 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정신적 부자'이고, 미미는 외로움과 빈곤 속에 사는 여자이다. 그녀는 폐결핵으로 죽어간다. 추운 아파트에서 가난하게 산다는 점에서 보면 이 두 사람은 같은 처지다. 그러나 죽는 사람이 그가 아닌 그녀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미미와 로돌프의 가난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로돌프와 그의 교양 있는 보헤미안 친구들 -시인, 예술가, 음악가, 철학가- 에게는 삶에 대한 지배력, 즉 자율성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사는 방식을 스스로 선택했지만, 수를 놓으며 불행하게 사는 미미는 그렇지 못하다. 사실 살아가는 데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환경이다. 환경은 질병의 위험 및 수명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라보엠>에서 미미가 가지지 못한 것은 이러한 요소들의 부족이었다.

상대적으로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행복의 수준은 커진다. 소득과 관련한 조사연구에서도 유사한 관련성이 발견된다. 행복의 수준은 주위 사람과 비교해 어느 지위에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어디에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모든 회원들이 스스로의 삶을 택한 헤이리는 전형적인 수평사회다.(사회에서의 위계를 과시하면 ‘왕따’ 신세를 면치 못한다.) 또한 헤이리는 회원가입을 심사하여 받은 이유로 소득의 편차도 크지 않은 동네다. 소득 불평등이 낮은 곳은 범죄율도 낮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마을이 생긴 이래 헤이리는 단 한건의 범죄도 없었다.

‘어디에 사는가’는 때로 ‘누구인가’보다 더 중요하다. 강남은 아드레날린이 넘쳐나는 도시지만 위협적이다. 헤이리는 한가롭고 안전하며 느긋하다. 헤이리에는 협동과 호혜, 신뢰가 살아 숨쉰다. 사회의 협동과 신뢰는 건강을 개선시킨다. 그런 면에서 헤이리는 커다란 사회적 자본을 가진 작은 도시다.
실제로 지역과 건강의 관계는 중요하다. 멋진 곳에 가면 기분이 정말로 좋아진다. 추한 환경에 살게 되면 때때로 추하게 행동한다. 사회적 환경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개인적 특징을 모아놓은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건강까지도 좌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헤이리에서는 계급의 불평등이 없기 때문에 얼마든지 마을 일에 전면적으로 참여할 기회를 가질 수가 있고 원하는 삶을 주도할 수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자율권과 사회참여만큼 건강에 중요한 것은 없다. 헤이리 사람들이 장수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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