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3일 수요일

언어적 상대성 - 사피어-워프 가설


언어적 상대성 - 사피어-워프 가설
Linguistic Relativity.

흔히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으로 불리며, 혹은 Whorfian hypothesis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언어학자들은 이것이 잘못 명명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워프와 그의 멘토였던 사피어는 실제적으로 검증 가능한 가설을 세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는 뉴스피크라는 언어를 통한 구성원들의 사고 통제를 다룬 바가 있다. 또한 로지반이라는 인공어는 이 가설을 시험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피어는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고 사고가 언어를 만든다고까지 얘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제자인 워프는 사피어의 생각을 발전시켜 대담한 가설을 세웠고 이것은 피쉬먼을 비롯한 많은 사회언어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이런 류의 생각은 조지 오웰의 1984등에서 직접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워프는 생업이 화재예방기사였고 부업이 언어학자였는데 주변인들이 가스통을 묘사할 때 full과 empty라는 형용사만 사용하는 것을 발견했다. 결국 그들은 가스통의 상태와는 별개로 그들이 쓰는 형용사 때문에 '가득찬' 가스통과 '빈' 가스통 근처에서만 담배를 피우는 것이었다.

워프는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증거를 수집하여 이 가설의 신빙성을 높였는데 그에 의해 제시된 유명한 예는 이누이트어의 눈(snow)에 관한 것이다. 이누이트어에서는 눈(snow)을 ‘내리는 눈(falling snow), 바람에 휩쓸려온 눈(wind-driven snow), 녹기 시작한 눈(slushy snow), 땅 위에 있는 눈(snow on the ground), 단단하게 뭉쳐진 눈(hard-packed snow)’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한다. 이는 눈을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인식한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반면 이누이트어와 다르게 영어에서는 '눈(snow)'이라는 한 가지 표현밖에 없다.

워프는 이와 같은 각 집단의 어휘의 차이뿐만 아니라 문법적 차이가 각 언어의 차이를 더 두드러지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미국 인디언 언어에 대한 연구를 통해 입증하고자 하였다. 그는 영어, 불어, 독일어 등 인도유럽어와 같은 언어구조와 Hopi어의 구조를 대조하였는데, 대조 결과 SAE(Standard Average European)의 범주들은 화자들에게 시간과 공간을 향한 고정된 방향을 주는 반면 Hopi어의 문법범주는 세계에 대한 ‘과정’ 방향을 제공해 준다는 것을 발견해 내었고 이러한 차이들이 Hopi어와 SAE의 화자들이 세계를 서로 다르게 보도록 해준다고 믿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워프 가설에 대해 언어가 미치는 통제의 정도 차이에 따라 ‘강한(strong)' 해석과 ’약한 (weak)' 해석으로 나눈다.

전자는 linguistic determinism으로, 언어가 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생각의 폭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워프 외에도 비트겐슈타인 등이 이 버전의 창시자라는 설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이 구분은 워프나 사피어가 한 것은 아니고 스튜어트 체이스라는 후대의 학자가 만들어낸 개념이다.

강한 해석에 의하면, 사람들의 인지 범주는 그들이 말하는 언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고 약한 해석에 의하면 사람들의 행위는 상황에 따라 그들이 사용하게 되는 언어의 언어 범주에 의해 지배받기 쉬울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과 더불어 워프의 가설과 그를 입증하는 증거에 대해 학자들 간에 많은 논쟁이 있었다. 학자들은 유럽언어와 워프가 인용한 북미 토착 언어 사이에는 실질적인 차이성이 있으나, 이러한 차이성이 반드시 각 언어 화자들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에 깊은 차이성을 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사피어 워프 가설에 대한 가장 타당한 주장은 이 가설이 기본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음의 말은 현재의 학계의 입장을 대변해 준다.


"오늘날 우리는 사피어-워프 가설을 전적으로 수용하지도, 그렇다고 전적으로 거부하지도 않는다"
 
- 맥코맥


현재 강력한 버전의 언어적 상대성은 틀렸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나, 약한 버전에 대해서는 연구가 이어지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언어와 생각 사이에는 실증적 상관관계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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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언어학자나 인지과학자의 주류는 언어결정론(강한 사이어 워프 가설)을 부정한다. 심지어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사람의 생각은 그가 쓰는 자연언어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라고까지 판단하는 이론가도 있다.

캐나다 출신의 미국인 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가 그 예다. 핑커에 따르면, 사람은 영어나 중국어나 아파치어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언어’(language of thought)로 생각한다. 그 ‘사고의 언어’는 모든 자연언어들에 선행하는 메타언어다. 핑커는 자연언어들로부터 독립적인 이 추상언어를 ‘멘털리즈'(mentalese)라 불렀다.

핑커의 이런 견해는 모든 자연언어가 심층구조에서는 동일한 문법을 지녔다는 촘스키 이후 언어학자들의 생각과 통한다. 이런 보편문법이나 ’멘털리즈‘를 상정하는 한, 지각의 근본적 범주와 인식작용은 인류에게 종(種)보편적이고, 따라서 자연언어들의 다양하고 변덕스러운 표면구조로부터 독립적일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의 견해가 아니더라도, 언어결정론은 경험적, 직관적으로도 많은 의심을 받는다. 사람의 사고와 인식이 모국어와 어느 정도 상호작용을 하는 듯 보이긴 하지만, 더 큰 결정력을 행사하는 것은 사고와 인식 쪽이지 언어 쪽은 아니다. 이를테면 한국어는 그 고유어에 빛깔의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는 어휘들이 매우 많다. ‘빨갛다’ 계통의 형용사만 해도 한국어 사전에 올라있는 것이 예순 개 가까이 된다.

(빨그스레하다, 빨그스름하다, 뻘겋다, 뻘그스레하다, 뻘그스름하다, 뻘그죽죽하다, 발갛다, 발그레하다, 발그무레하다, 발그스레하다, 발그스름하다, 벌겋다, 벌그레하다, 벌그스레하다, 벌그스름하다, 벌그죽죽하다, 새빨갛다, 시뻘겋다, 붉다, 불그데데하다, 불그레하다, 불그름하다, 불그무레하다, 불그스레하다, 불그스름하다, 불그죽죽하다, 불긋하다, 불긋불긋하다, 검붉다 등)

그런데 자음이나 모음을 교체하고 이런저런 접사를 붙여가며 한국어가 제 어휘장 안에 마련한 이 섬세한 색채어휘 덕분에 한국인들의 색채 감각은 다른 자연언어 사용자보다 섬세한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대(색 인식이 오히려 단순)인 것 같기도 하다.

조형예술사 책에서 한국인들의 이름을 찾기 어려운 걸 보면 그건 아닌 듯하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육안으로 변별할 수 있는 무지개 빛깔의 수는 제 모국어가 구별하는 무지개 빛깔의 수보다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다.

영어나 한국어에 눈(snow)을 가리키는 말이 이누이트 족같이 네 개가 아니라 하나뿐이라 해서 영어화자나 한국어화자가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땅에) 쌓인 눈을 구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누이트 이외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그 눈들을 구별하지 않는 것은 구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그들이 쓰는 언어 때문이 아니다. 셋 이상의 수를 헤아리는 데 서툴다는 브라질의 피라하족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수 계산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언어에 수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수렵 채취 활동에 수 계산이 그리 필요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영어의 to be에 해당하는 동사가 스페인어에는 둘이 있다. ser와 estar가 그것이다. ser는 불변적 본질적 속성과 관련이 있고, estar는 가변적 상태나 존재를 나타낸다. 예컨대 영어의 good에 해당하는 형용사 bueno를 ser 동사와 함께 쓰면 ‘선량하다’는 뜻이 되고 estar 동사와 함께 쓰면 ‘건강하다’는 뜻이 된다.

또 영어의 pretty에 해당하는 여성형 형용사 guapa를 ser 뒤에 붙이면 원래부터 예쁘다는 뜻이지만 estar 뒤에 붙이면 일시적으로 예뻐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스페인어화자가 영어화자보다 존재와 상태에 대한 인식이 더 섬세하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원칙적으로, 스페인어는 영어로 충분히 번역될 수 있고, 영어도 스페인어로 충분히 번역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관사를 사용하지 않는 한국어화자들이라 해서 “He loves a girl”과 “He loves the girl”의 차이를 분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고나 인식보다, 더 나아가 세계보다 언어가 우위에 있다는 생각은 언뜻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것은 언어라는 것에 어떤 위광을 드리우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생각은 사피어-워프 가설이라는 이름으로 20세기에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지적 논쟁의 흥미로운 주제였다. 언어결정론은, 유구한 반-이성주의 전통 속에서, 고대 인도의 언어학자들로부터 근대 독일의 낭만주의 문필가들에 이르는 강력한 지지자들을 얻었다.

이런 전통과는 이질적인 기반 위에 선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도 “내 언어의 한계들은 내 세계의 한계들을 뜻한다”는 멋진 정식으로 다른 방향에서 언어결정론을 거들었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결정론은 자연언어들의 세계 분절 방식 차이에 바탕을 둔 워프의 언어결정론과 층위를 달리 하는 관점이다.)

그런데 이런 견해를 속화하며 기계적으로 밀고 나가다 보면, 기이한 언어신비주의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일본어에는 특별한 주술적 힘이 있어서 그것이 일본에 복을 가져다 준다고 여기는 이른바 고토다마(言靈) 신앙은 이런 언어신비주의의 극단적 예다. 또 자연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이댄다면, 실어증 환자는 생각이라는 것 자체를 할 수 없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를 것이다.

분명히, 언어는 사고나 세계관에 일정한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언어가 사고나 세계관을 ‘결정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언어의 도움을 받아 세계를 인식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언어의 도움 없이도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적어도 일반적 수준에서는, 언어가 사고의 흔적이고 세계관의 흔적인 것이지, 그 거꾸로가 아니다. 다시 말해, 사고나 세계관이 언어의 흔적인 것은 아니다. 영어화자에게도, 한국어화자에게도, 스와힐리어화자에게도, 사고와 인식의 가능성은 똑같이, 무한히 열려있다. 그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인 한, 그에겐 보편문법으로 운용되는 ‘멘털리즈’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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