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1일 목요일

“도덕의 역설”로 본 인간의 가축화

원문: http://newspeppermint.com/2019/03/18/goodness2/
영문원문: https://www.newyorker.com/books/under-review/did-capital-punishment-create-morality


인간의 공격성외에도 도덕의 역설을 알려주는 또 다른 요소에는 인간의 진화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여지는 가축화(domestication)가 있습니다. 가축화를 위해서는 이를 이끄는 주인이 필요하며, 따라서 인간이 과연 가축화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심지어 다윈 조차도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물론 인간이 다른 존재에 의해 가축화된 것은 당연히 아니지요.

하지만 자연 선택은 외부 요인 없이도 같은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만약 공격성에 반하는 선택압이 존재한다면 해당 종은 스스로 가축화될 수 있습니다. 지난 50여년 동안, 인간이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를 가축화했음을 말해주는 다양한 증거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가축화의 가장 중요한 증거인 유순함 외에도 인간은 가축화 증후군의 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체구와 뇌의 크기가 작아졌고, 뼈가 가늘어졌으며, 얼굴이 납작해지고 수컷과 암컷의 신체적 차이가 줄었습니다. 이러한 해부학적 특징 외에 공포 반응, 놀이 습성, 학습 속도, 성적 행동, 호르몬 생산 등의 행동적 생리적 특징 또한 인간의 가축화 가설을 지지합니다.

이들 특성의 공통점은 바로 유형보유(pedomorphism, 곧 아이의 특징)라는 것입니다. 개, 여우, 기니피그 등 가축화된 많은 동물들은 그들의 조상에 비해 그들이 더 어린 개체일때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십 만 년 전 인간의 조상 화석은 인간이 그들에 비해 유형보유의 특징을 띠게 되었는지를 확인할 만큼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네안데르탈 인의 화석은 충분히 많고, 현생 인류가 여러가지 면에서 우리 조상들보다 더 아동화 되었다는, 곧 가축화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어떻게 인간은 스스로를 가축화시켰을까요? 진화생물학자에게 이 질문은 그러한 적응이 인간에게 어떤 이득을 주었는지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의 답은 예상과 다릅니다. 바로,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 소련의 두 유전학자가 시베리아에서 수십 년 동안 여우를 가축화했던 실험은 뇌의 크기가 줄어들고, 뼈가 가늘어지는 등의 여러 가축화의 증거들이 사실 다른 본질적인 적응의 우연한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였습니다. 바로 그 적응은 반응적 공격성의 감소입니다. 공격성 감소의 선택압은 배아에서 태아에 이르는 시기의 발달을 관장하는 신경능선세포를 지연시켜 더 작은 몸집과 작은 뇌를 만들고 호르몬 변화를 유도합니다.

이런 내용은 이미 여러 연구들을 통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반면, 인간이 왜 스스로의 반응적 공격성을 감소시켰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랭엄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집단 생활은 최소한의 안정성을 필요로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반응적 공격성은 분노와 괴롭힘, 폭력 등 타인을 지배하고 복종하게 만든 뒤 식량과 여성을 독점하려는 행동으로 이어지며, 이는 집단의 안정성을 해치는 행동입니다. 이 행동들은 알파 메일의 전형적인 행동으로, 사실 알파 메일은 반응적 공격성의 화신입니다. 집단은 이런 해충을 견디거나 아니면 제거해야 합니다. 인간이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자, 이들에 대한 견제 또한 시작되었습니다. (언어의 발생은 30만 년 전에서 50만 년 전 사이로 좁혀집니다. 하지만 공감 혹은 “의도의 공유”는 언어와 무관하게 가능했을 수 있습니다.) 랭엄은 집단이 알파 메일을 처단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가축화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문명은 살인, 혹은 인류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협력 기반 주도적 공격성(coalitionary proactive aggression)”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알파 메일을 처단한 것은 주로 짝이 있는 성인 수컷에 의해서였을 것입니다. (알파 메일의 가장 큰 적은 자신의 짝을 빼앗긴 수컷입니다.) 알파 메일이 계속 죽임을 당하고, 반응적 공격성 유전자가 집단에서 점점 줄어들면서 협력에 의한 처단은 제도화되었습니다. 이들의 힘은 집단에서 절대적이 되었고, 이는 막스 베버가 국가를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하는 주체로 정의한 것을 떠오르게 만듭니다. 이들은 사형이나 추방과 같은 처벌을 내렸고 이들과 같은 편에 서는 것은 생사를 가르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집단은 어떤 행동이 위험한 행동인지를 정해주는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자선은 좋은 평판으로 이어졌고, 반사회적 행동은 죄로 규정했습니다. 이를 통해 인간이 가진 도덕성의 가장 근본적인 두 가지 특성이 만들어졌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븐능과 이타주의, 협력, 공정성 등 다른 영장류에 비해 훨씬 더 발달한 친사회성(prosociality)입니다.

처단은 무엇이 옳은 행동인지를 생각하게 만들었고, 덕(virtue)이라는 관념을 탄생시켰습니다. 하지만 알파 메일의 제한적인 권력이 지배 무리의 무제한적 권력으로 대체되면서, “협력 기반 주도적 공격성은 사형, 전쟁, 학살, 노예제, 신고식, 희생양, 고문, 린치, 갱단 싸움, 정치적 숙청 등 권력의 남용을 탄생시켰다”고 랭엄은 말합니다. 바로 이 사실이 이 책이 말하는 도덕의 역설입니다. 계획적, 협력적 폭력은 사회 질서를 탄생시켰고, 사람들이 덕을 추구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회질서에 의해 국가, 혹은 강력한 특정 집답이 다른 집단을 착취하고 압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랭엄은 인간이 “최선인 동시에 최악의 생명체”라 결론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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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엄은 자신을 오해하지 말라고 조심스레 이야기합니다. 이는 인간이 조금이라고 폭력적 경향을 타고났다고 말할 경우 전쟁 지지자들이 평화에의 요구를 자연에 반하는 것이라 무시할 것이며,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을 “자연스러운” 것이라 주장하게 될 까 두려워하는 루소주의 사회과학자들을 향한 것입니다. 이는 또한 이들이 진화론을 반대하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곧, 그것이 진실이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진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진화론에서 우리가 얻게될 지식의 정치적 의미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아마 인간의 복잡한 행동에 대해 유전자와 문화가 정확히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는지는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겁니다. 하지만 문화와 유전자 모두가 충분히 중요하다는 상식적 직관을 확인할 만큼은 밝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유전자는 우리의 운명이 아닙니다.

랭엄의 주장이 옳든 그르든 – 이 복잡하고 야심찬 이론은 아마 부분적으로만 옳은 것으로 밝혀지겠지만 – 여섯 개의 대륙, 여남은 개의 학문 분야, 수십 종의 동물, 그리고 2백만 년의 시간에서 나온 증거들을 거르고, 저울질하고, 다듬어 정교하게 짜맞춘 이 책은 충분히 인상적이며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교훈까지 알려줍니다. 바로 인간의 성장에 있어 진화보다는 도덕적 상상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잠재력을 파악하기에 역사는 진화론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랭엄의 말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평화와 평등을 향해 나아가기에 불가능하다거나 아니면 필연적이라고 가정해서는 안됩니다. 그 어느 쪽도 아닙니다. 그저 매우 어려운 일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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