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30일 목요일

고종의 광무개혁은 근대국가와 무관하다


ㅇ 한국사 교과서는 고종을 높게 평가하며 근대적 개혁군주로 평가. 그러나 이는 실제와 차이가 있음


ㅇ 한국사 교과서는 광무개혁을 다음과 같이 서술

- 황제가 없으면 독립도 없다

- 구본신참의 원칙(전통거치를 지키면서 서방문명과 제도를 도입)

- 군사제도 개혁

- 토지 조사와 그 소유 인정

- 상공업 진흥


ㅇ 한국사 교과서는 고종의 광무개혁 의지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러일전쟁과 을사조약을 통해 조선의 근대화가 좌절되었다고 서술

ㅇ 그러나 이는 실제와 다름


ㅇ 광무개혁은 역사학계에서 3차례에 걸쳐 큰 논쟁이 있음


ㅇ 광무개혁은 황제권이 크게 강화시키는 내용임. 물론 황제권 강화가 근대국가와 배치하는 것은 아님

ㅇ 다만 서양 근대국가의 황제권 강화는 반드시 개인의 권리와 의무의 증대와 병행해왔음

ㅇ 근대국가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은 국가에 대한 역사의 주요 주체로서 개인의 성립


ㅇ 광무개혁은 근대국가와는 무관

- 대한제국의 정치는 만세불변의 전제정치

-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 법, 의회, 관료제 등에 대한 내용은 없다

- 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가지며 법률을 제정하고 개정한다

- 황제는 타국과의 제반 조약을 체결한다  <- 이 항목은 을사조약의 빌미가 되었다


ㅇ 심지어 근대 개혁을 주장하는 실학자들조차 토지와 주요 국권은 결국 왕의 것이라고 적극 주장. 이는 동학도 마찬가지

- 실학에서 주장한 토지대장의 시작(時作), 시점의 개념 : 원래 땅은 왕의 것이고 개인은 잠시 땅을 점유하거나 사용한다는 의미로서 실학사상의 전근대성을 보여줌

 

ㅇ 이는 구한말의 국내에서는 근대국가라는 기본 개념자체가 없었다는 의미


ㅇ 반면 1895년 갑오개혁에는 근대국가로의 주요 내용이 담겨있었다(고종의 반대로 실패)

- 갑오개혁에는 청으로부터의 독립, 왕과 신하의 협의체, 관료제, 징병제, 민법과 형법으로 개인을 보호하는 내용이 포함


ㅇ 근대국가 설립과정에서 왕과 개인간의 치열한 다툼과 논의, 전쟁은 매우 긴 과정을 통해 서구사회에서 설정되었다. 구한말에 갑자기 이루어진다는 것은 어려워


ㅇ 광무개혁의 황제의 외교권 독점은 결국 일본이 을사조약을 고종과 마음대로 체결하게 되는 주요 독소조항이 된다(이토 히로부미는 을사조약성립여부에 조선 대신들이 이의를 제기하자 고종 황제가 외교조약권을 독점함을 들어 이를 묵살)


ㅇ 심지어 이러한 황제의 권리 독점은 이전 조선의 왕보다도 더 전제적이고 구시대적


ㅇ 재정지출은 그당시 국가 통치의 주요 철학을 알 수 있다

- 당시 대한제국의 예산은 18세기에 비해 오히려 1/2~1/3로 축소, 당시 일본의 일개 현에 불과한 규모

- 재정의 2/3가 황실과 관련있다(황실 의식주, 제사, 친위군 유지비 등). 재정 수입은 매관매직, 전매, 세금 등으로 충당


ㅇ 결국 고종을 근대적 개혁군주 보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크다


source: https://www.youtube.com/watch?v=YYMczu5L2a8

2021년 9월 11일 토요일

드라마 D.P ;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

드라마 D.P. 에서 군대 가혹행위 피해자 김석봉은 가해자 황장수를 납치해 고문한 후 총을 겨누고 물어본다.



조석봉: 저한테 왜 그러셨습니까? 왜?!?!!


황장수: 그래도...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


----------- 드라마 D.P.  6화:방관자들 ----------------

2021년 9월 6일 월요일

후기 조선왕조는 국제정치의 주류를 역행

- 한 국가는 혼자서 존재하지 않고 타국과의 관계속에서 존재한다

-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사 교과서에서 조선의 대외관계에 대한 서술은 매우 빈약


- 특히 역사 교과서는 개항기말 1876~1945년의 반일, 민중 활동에 대해 너무 많은 분량을 할애. 역사 교과서의 1/4이 해당되


- 조선초기 명나라와 16세기에 걸쳐 청나라와의 관계 이해가 중요


- 명나라의 적나라한 조선화의 음. 병자호와 삼위일체 故오랑캐로 운신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 깊숙이 깊숙이 파고드는 명망이 깊다 


- 18세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 19세기부터 미국 상선이 조선에 ​​알리기를 요청했습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또는 제후국이 1832년에 이르러 중국의 외교를 요청했습니다.


- 19세기 청의 조공국(위구르, 미얀마, 대만 등)들은 잇따른 열강(영국, 프랑스, 일본 등)의 침입을 받고 청은 상당한 국가혼란을 겪음


- 청은 위기감 속에서 조선이 흔들릴까 우려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 내외정을 직접 장악하고 조선의 속방규정을 공식화


- 당시 일본은 메이이유신(1868년)이후 1875년까지 5차례에 걸쳐 일본의 왕정복고(천황제)를 알리는 문서를 조선에 보냈으나 조선은 이를 거부

- 청의 속국으로서 조선은 일본의 천황의 지위를 조선에 알리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음. 이는 당시 동아시아의 청 중심의 질서를 훼손한다고 생각


- 당시 일본과 영국은 국제적 이해관계가 일치했는데 이는 러시아 제국의 남하(부동항 확보)를 저지해야 한다는 것

- 이미 러시아는 18세기 초부터 캄차카 반도 등을 통해 일본을 위협했던 사례가 있었고 중간에 위치한 조선을 러시아가 접수할 경우 상당히 위험해질 수 있었음


- 1884년까지 일본의 극동아시아 전략은 '동문동조(同文同祖)'와 '순치보거(脣齒輔車)', 같은 아시아인끼리 동등하게 연합하자는 의미


- 1876년 한일 수교(강화도 조약), 한국사 교과서는 이를 불평등 조약이며 조선침략의 의도를 숨긴 것으로 간주함

- 그러나 이는 사후적 해석일 가능성 높아, 조문을 하나하나 뜯어봐도 불평등한 내용은 없으며 당시 조선도 이를 불평등하다고 인식하지 않았음

- 오히려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후 내정안정에 힘쓸 때에서 대외 정책은 다소 나이브한 낭만적 관점으로 접근


- 1885년 이후 일본은 이 전략을 전면적으로 바꾼다, 이는 서양과의 전쟁에서 보여준 청나라의 무능, 조선의 후진성(갑신정변 실패 등)에 기인 

- 일본은 탈아시아론으로 정책을 바꾸고 대규모 군비 증강, 특히 조선에 대해 절대 '서양 제국 열강'에게 양보할 수 없는 '이익선'으로 규정


- 당시 영국은 현재의 미국 국무부처럼 전세계 외교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뒤에서 조정하고 있었음

- 영국은 당시 조선은 거리도 멀고 무역할 재화가 전무해 점유가치가 없다고 판단. 단, 러시아 남하를 저지할 수 있는 일본이 조선을 점유하는 것을 지지

- 미국도 이러한 영국의 전략에 동조


- 1883년 영국은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맺음. 동 조약에 따라 조선이 러시아와 수교(1884년)하자 거문도를 점령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포석을 마련

- 이후 러시아는 영국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 후퇴 대신 시베리아 철도부설에 착수

- 시베리아 철도는 극동아시아 정세에 있어서 영국과 일본에 상당한 위협이었음


- 러시아의 수교에는 배경이 있었음

- 당시 고종이 조선 단독의 국가 체제로는 열강의 침입을 막을 수 없으므로 러시아를 끌어들여 세력균형을 이루려 했던 것

-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에 접근했고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이 발생, 고종의 확제즉위와 대한제국 선포 등은 고종의 친러정책의 산물

- 이에는 조선의 뿌리깊은 반일, 혹은 일본을 무시하는 정서가 작용했다는 설이 있음

- 고종 입장에서 친러정책은 나름의 방책을 강구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이는 영국의 심기를 건드려 악수가 되었음


- 의화단 사건이 발발하며 서양 연합군은 청나라와 동양의 야만성과 후진성에 경악하고 이를 빌미로 청에 군대를 주둔시킴

- 러시아가 의화단 사건 이후 대련항을 점령하자 조선에서 철수한 후 요동지방을 공략하고 만주를 점령, 이는 영국과 일본의 동맹을 가져왔으며 후 러일전쟁의 배경이 됨

- 미국의 미국의 조선이 일본에 복속을 요청하고 있다.


- 머리말이론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WDgwd-L8f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