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는 근대국가 개념의 '가정(family)'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출처:www.youtube.com/watch?app=desktop&v=U51eFrKXGsI&list=WL&index=48
ㅇ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 가정의 삶에 대한 자료가 대단히 빈약, 오히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하멜 등 외부인이 쓴 자료가 조선 사람들의 생활사 연구에 상당히 큰 도움을 주고 있다
ㅇ 그런 면에서 제이콥 로버트 무스(Jacop R. Moose, 1864~1928)라고 하는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의 서적자료가 조선 후기의 조선사람들의 삶, 특히 농촌을 연구하는데 많은 도음을 줬다.
: 그는 1988~1917, 1921~1924년, 도합 20년이상 양주와 춘천(당시 완전한 농촌 지역으로 주로 하층민)에서 선교와 교육활동
: 그는 Village Life in Korea(1909)라는 서적을 남겼다
: 그의 증손자가 2008년에 '1900, 조선에 살다', 라는 책을 한글로 소개하여 당시 실상이 소개됨
ㅇ 무스 목사는 당시 찬송가의 sweet home을 한글로 번역할 단어를 찾지 못했다. 실제로 home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
ㅇ 가족처럼 모여서 사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성스러운 관계나 남녀간의 사랑, 유대가 없었다
: 참고로 가족이라는 단어는 우리나라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1900년대 이후 일본의 민법이 들어오면서 등장했다
ㅇ 당시 조선의 한 가족(편의상 가족, 혹은 식솔로 칭함)은 다른 나라보다 훨씬 많은 인원으로 구성, 흔히 여러세대가 한 지붕 아래에서 생활하는 식솔이 됨, 하인과 노비도 이러한 식솔의 일원
ㅇ 식솔 내에서의 위계와 폭력(주로 하층민 위주)
: 부부는 함께 식사하지 않는다. 남자는 대령된 밥상에서 혼자 식사, 여자는 부엌에서 남은 음식을 먹으면서 처리(양반가의 경우 이 정도는 아니나 겸상하지 않는다)
: 남자들에게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의무에 대해 무스 목사가 말하면 어떤 사람은 "부인을 때리지 않고 어떻게 함께 살수 있죠?"라고 거리낌 없이 말함(이는 1980년대까지도 그랬음)
: 이런 상황에서 사랑은 존재하기 어렵다. 조선의 남자들은 아내를 사랑하더라도 이를 인정하는 것을 부끄럽고 남자답지 못하다고 여김
ㅇ 결혼의 양상
: 모든 사람은 반드시 결혼, 여성에서 선택권이 없고 부모의 소유고 부모가 마음대로 시집보낸다
: 하층신분의 여성은 한번 이상 결혼하며 여러번 결혼한다
: 남자도 아주 빈궁하지 않은이상 여러번 결혼(정도의 차이일 뿐 양반댁도 비슷)
: 남자는 다양한 이유로 아내를 잃는다. 부인의 소박, 사망, 도망 등
: 남자는 함께 살 여자를 찾아서 집으로 데려오기만 하면 된다
ㅇ 조선후기의 민며느리 풍속은 무스 목사의 책에서만 제대로 확인된다(중국에도 19~20세기 민며느리, 데릴사위제가 성행해서 기록이 많으나 한국은 기록이 거의 없음)
: (무스 목사의) 우리 마을 소녀들은 출생에서부터 초대도 환영도 받지 못한 채 세상에 내던져진다, 대부분의 딸은 12세 전에 남편될 사람의 집으로 보내진다(사실상 민며느리(=노예)로 팔려가는 셈)
: 아주 가난한 집안은 2~3세 부터 시어머니 될 사람에게 보내진다. 아내가 필요한 아들을 가진 사람은 약간의 성의표시로 나중에 아들과 결혼시킬 어린 소녀를 얻는다. 그러다가 12~15세에 혼례를 올린다
: 어린 아내는 들어가자마자 시어머니의 엄격하고 냉혹한 지배하에 노예처럼 놓인다. 그들은 문자그대로 노비와 비슷하게 양반가의 노비가 행할 온갖 종류의 가사를 도맡는다
ㅇ 무스 목사의 사례
: 어느날 무스목사의 교회의 직원이 2달러의 가불을 요청하는데 용처를 듣자하니 민며느리를 사오는 용도라고 함
: 당시 주막의 한끼 식사값이 0.1 달러, 따라서 20끼 식사값으로 어린 소녀를 민며느리를 사올 수 있었다는 것
ㅇ 조선후기 민며느리의 자살사례
: 위와 같이 당시 특히 하층민의 어린 소녀는 사고팔리는 부모 입장에서 노예 소유와 비슷한 존재
: 반면 딸아이는 생명의 본능으로서 부모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었을 것
: 아주 어린 나이에 민며느리로 다른 집안에 팔려간 소녀는 시어머니될 사람의 혹독한 취급과 가족과의 단절, 자신의 신세한탄으로 인해 자살하는 경우가 많아
: 이러한 자살 사례는 조선 후기~ 일제시대까지 지방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만연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
ㅇ 무스목사의 목격담과 서술
: 저 어린 소녀아이들은 팔려온 자신의 신세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움을 깨달고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 그녀는 자신의 앞날이 어떠한 희망도 없음을 깨달고 밤의 고요속에서 마을 우물가에 나와 우물에 비친 차가운 별을 마지막으로 응시하며 이 세상을 떠나간다
: 다음날 아침 아이의 시신은 우물에서 건져저 가마니에 대충 싸여 산허리에 묻힌다
: 그리고 열흘이 안되어 또 다른 며느리가 지체없이 그 자리에 앉혀질 것이다
: 무스목사가 강원도 일대 어느 주막에 투숙, 다음 날 아침 안채에서 한 소녀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곧 남편의 집에 보내지는 어린 소녀의 울음소리다
: 오후에 두 명의 가마꾼이 와 아이를 반강제로 데려간다
: 이 가련한 어린 신부의 온 몸은 두려움에 떨었으며 작은 가슴에서 들썩이며 울려나오는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 옆에 있던 부모와 친지들은 아이의 울음에 마치 팔려가는 돼지의 비명소리 정도로 들리는 듯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무스 목사는 큰 충격을 받는다
: 아아!! 하나님의 믿음없는 조선인의 비정한 풍습이여...
: 순진무구한 아이에게 기쁨을 빼앗고 이 어린 생명을 상상하기 힘든 깊은 절망의 어두운 밤 속으로 내동댕이 칠 수 있는 그대는 도대체 누구며 그 힘은 얼마나 대단하단 말인가!!
ㅇ 첩의 존재가 매우 일반적
: 우리 마을 양반은 둘, 셋, 또는 그 이상의 여자를 거느리며 그래야 존경을 받는다
: 법적으로 취할 수 있는 여성의 수에는 제한이 없다
: 단 정실부인은 한사람이다
: 이러한 축첩의 상황에서 기이한 사실은 일반 여성들이 양반의 첩이 되어 그 명예를 나누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 양반가에게 첩으로 들어가더라도 그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으면 영예롭게 생각한다(혼례는 없고 여성의 아비가 인사만 하고 갈 뿐이다)
: 당시 한 양반이 개종하여 세례를 받기로 했는데 첩이 여럿 있었다. 무스 목사가 세례를 받으려면 첩을 버리라고 했고 그 양반도 이를 알고 있었으므로 그리했다
: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의 정실부인이 첩을 내보내는 것을 알고 몹시 화를 냈다는 것
: 정실 부인입장에서는 첩이 많아 그 사이에서 정실부인으로서의 권력을 행사하고 권위를 세우는 것이 당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듯하다
: (참고로 이러한 사실은 1950년대 사회학자들의 농촌 조사에서도 확인됨: 당시 조사에서 본부인이 아들이 없을 때 첩을 들이는 것이 당연하다는 여성의 응답 비율이 65%)
ㅇ 자주 바뀌는 부인
: 조선의 가족구성원은 자주 바뀐다
: 어떤 가족을 본 후 다음 번에 다시 보면 그 사이 부인이 없어지거나 바뀌어 있다
: 시어머니에게 불손하거나 아들을 낳지 못해 이혼을 당하거나 그외 트집이 잡히는 사안이 괘 있다
: 나(무스 목사)는 이에 대해 꽤 조사를 해 보았는데 이 나라 남자들의 상당수는 첫 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와 살고 있다
: 어떤 조선인이 말해주길 이 나라 조선의 전체 가족 중에 절반이 두번째 이후의 부인과 살고 있을 것이라고 한다
: 실제 16세기 이후 조선의 호적자료 등을 보면 하층민의 경우에는 특히 단혼(한번 결혼함)의 풍습이 없었다고 함, 단 19세기 이후 자료가 거의 없었음
ㅇ 과부의 운명
: 양반 집 여자의 재혼은 악덕으로 간주
: 반면 서민 신분의 과부는 쉽게 배우자를 다시 만난다
: 과부는 죽은 남편의 친척들의 영향력에 종속되는데 친척들은 그들이 보기에 가장 이득이 될 만한 곳으로 과부를 첩 등으로 보내버린다
: 여자가 의지할 곳이 없는 경우 뭇 사내들이 몰려들어 그들 중 하나가 납치하듯 아내로 데려가는 일도 허다
: 무스 목사의 교회에 젊은 과부가 하나 있었는데 어디로 끌려갈지 몰라 한 신도의 집에 머물게 했다. 그날 오후 죽은 남편의 동생(시동생)이 와서 그녀를 강제로 데려갔으며 그 이후 소식은 끊겼다
주: 비슷하게 하멜의 경우에도 조선의 인구가 매우 많음을 지적, 조선에서 애를 낳지 못한 여자는 없었다. 반면 같은 시기 영국은 출산연령 여성의 40%가 출산을 경험하지 못함(비혼, 과부 등)
ㅇ 종합하자면 조선후기 일반적인 조선사람들의 삶에서 여성의 지위는 다음과 같다
: 여성은 단지 소녀의 연장이거나 소유물, 사고팔수 있는 상품
: 조선의 여인은 남편의 동반자가 아님. 저급한 품성과 지성의 존재로서 주인인 남편에게 사역당하는 하인이자 노예
: 사소한 실수나 핑계로도 쫒겨남
: 이름없는 존재, 조녀 시에는 이름이 있으나 결혼 이후 무명의 존재가 됨
: 아들을 낳으면 그제서야 집안과 마을 내에서 지위가 달라진다
ㅇ 부부를 중심으로하는 현대의 가족개념은 조선시대에는 없었다. 더 큰 가솔, 가문, 칙족으로 존재하고 가족은 그 존재가 미미했다
ㅇ 20세기 들어 명목상으로나마 이러한 체제가 깨지고 가족이 호주제를 중심으로 하여 근대국가의 틀을 갖춘다
ㅇ 근대문명의 기틀인 사적자치로서 개인의 성립은 가족의 성립과 함께 이루어졌다
: 이러한 개인의 성립은 19세기까지는 전혀 없었고 20세기 들어서야 명목상 도입되었다
: 그러나 한국인의 삶에 가족으로서의 개념이 제대로 자리잡는 시기는 적어도 1980년대 이후 도시율의 증가로 봐야 할 것이다
: 결과적으로 한국의 가족과 개인의 중요성에 대한 독립의 개념은 서양보다 한참 뒤져 있고 이는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ㅇ 출산율과 혼인율 하락을 역사적 접근으로 볼 수도 있다. 매우 빠르게 바뀌는 세태 속에서 어린시절부터 가정과 부부간 사랑의 본질, 개인의 독립의 가치 등에 대한 인식 부재에 기반한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