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23일 일요일

AI가 가장 먼저 바꾼 바둑계의 이야기, 책 - 먼저 온 미래 -

선요약

- AI의 등장은 인간 기사의 실력을 발전시켜 상향 평준화시켰다

- AI등장으로 기존의 기득권 우위의 시장이 무너지고 평등화되었다

- 부가가치를 가지던 독점적 암묵지가 모두에게 공개된다


이세돌에 이어 중국 커제와의 대국 이후, 구글 딥마인드는 알파고가 자기 자신인 알파고를 상대로 둔 대국 기보 50개를 웹사이트에 올렸다... 2017년 10월 구글 딥마인드는 알파고의 새 버전이자 가장 강력한 버전을 개발했다고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논문으로 발표했다. '알파고 제로'라고 불리는 이 새 버전은 이전 버전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바둑을 독학으로 배운 것이다.

이세돌과 겨룬 버전(흔히 '알파고 리'라고 불린다)과 커제와 겨룬 '알파고 마스터' 버전은 인간 기사들이 둔 기보를 학습했다. 알파고 제로는 인간 기사들의 기보는 전혀 학습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바둑 규칙만 입력되어 있었다. 알파고 제로는 혼자 바둑을 둔 지 36시간 뒤에 알파고 리의 실력을 넘어섰다

여러 기업과 개발자가 구글 딥마인드에서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을 참고해 기존 바둑 프로그램을 개선하거나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2017년 말부터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강력한 바둑 프로그램들이 나왔다. 개인 컴퓨터에 내려받을 수 있고, 무료로 쓸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기존의 바둑 이론, 정석[흑백이 서로 최선이라고 인정되어 온 수], 포석[초반에 돌을 놓아 진영을 만드는 일]을 인공지능으로 각자 검증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여태까지 프로기사들이 옳다고 믿어왔던 이론, 정석, 포석의 상당수에 허점이 있음이 드러났다. 바둑 AI 프로그램이 제시하는 새로운 포석을 프로 기사들은 'AI 포석'이라고 불렀다. 그 포석을 최대한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이 랭킹을 끌어올리는 지름길이었다.


기계가 이토록 창의적이고 인간을 앞서간다면 창의성이란 무엇인가?


박병규 9단은 알파고의 바둑이 창의적이냐는 질문에 대해 “아주 많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라고 대답했다. 그는 심지어 알파고 수법이 퍼지면서 인간 프로기사가 창의성을 발휘할 여지가 줄었다고 말했다. 동시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바둑계는 알파고 혁명 덕분에 변화가 출현한 것도 사실입니다. 즉 고인물 생태계가 무너졌죠."


신진서 9단은 인공지능으로 바둑 공부를 하는 시간을 물어보니 "조금 할 때는 하루에 2시간 정도, 많이 할 때는 7시간 정도"라고 했다.

"예전에는 매일 12시간씩, 바둑만 두는 바둑 기계처럼 공부했어요... 그런데 AI를 통해서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요. AI로 실력을 연마하다 보면 반드시 지금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믿어서 연구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세계대회 전날도 인공지능으로 공부한다고 말했다. 신진서 9단은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학습 도구로서 AI가 대단하다고 느낀다고 했다. 초반, 중반, 종반을 분리해서 연구 할 수 있고, 연구해야 할 내용이 끊이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그럼에도 신진서 9단은 "여전히 AI가 왜 이렇게 두는지 모르겠는 수는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왜 그렇게 두는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초반은 수백 가지 상황에서의 AI 추천수를 통째로 외 워버릴수 있다. 하지만 중반으로 들어가면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져서 암기로는 대응할 수 없다.

인터넷 시대가 오기 전에는 정상급 기사와 중하위권 기사 사이의 정보 격차가 훨씬 컸다. 이세돌 9단은 자서전에서 "내가 서울에 올라왔을 무렵, 기사들이 기보를 구하려면 한국기원 에 가서 복사해 와야 했다"라며 "기보를 복사해서 자기네 도장에 가지고 와서 도장 사람들 끼리 돌려본다. 그게 기보를 얻는 거의 유일한 경로였다"라고 썼다. 특히 미국이나 유럽의 기사들은 이런 기보를 얻는 데 매우 불리했다. 한국, 중국, 일본, 대만 기사들과 그 외 국가 기사들의 실력 격차에는 이런 요인도 작용했다.

1990년대 후반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기보를 구하는 것 자체는 쉬워졌다. 그럼에도 최신 포석에 대한 엘리트 기사들의 공동연구 내용이 퍼지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고, 그런 면에서 중 하위권 기사들은 불리했다. 각자 집에서 AI 포석을 혼자 연구하는 세상이 되자 그런 불리함이 사라졌다.

이를 통해 보다 '평등한 세상'이 만들어졌다.


인간 기사들이 속한 바둑계는 갑자기 평평해진 듯했다. 바둑계 인사들은 대체로 알파고의 등장 이후 인간 기사들의 실력이 상향평준화됐다는 데 동의한다.

고레이팅이라는 웹사이트에서 발표하는 세계 랭킹과 프로기사들의 기력이 상당히 믿을 만한 데이터로 통용된다. 고레이팅은 엘로 레이팅이라는 이름으로 기사들의 기력을 수치화하는데, 2024년 6월 5일 기준 신진서 9단은 3870점으로 세계 1위, 박정환 9단은 3697점으로 세계 2위, 커제 9단은 3682점으로 3위다.

엘로 레이팅 시스템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수 인플레이션이 일어난다. 그 점을 고려하더라도 현재 최강자 그룹은 과거 최강자들과 비교해 고레이팅 점수가 훨씬 높다. 조치훈 9단 (1986년 3402점)과 조훈현 9단(1989년 3462점)의 최고 점수는 모두 3400점대였다. 이창호 9단은 1995년에 3569점을, 이세돌 9단은 2010년에 3583점이다. 알파고 제로는 5185점이다.


AI의 등장은 비밀리에 암묵적으로 전수되던 지혜 혹은 암묵지가 널리 공개된 셈입니다.

어떤 분야에서는 전문가의 실력이 암묵지를 얼마나 갖추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저널리즘 이론을 오래 공부했다고 뛰어난 기자가 되는 게 아니고, 범죄수사론 교과서를 달달 외웠다고 뛰어난 형사가 되는 게 아니다. 뛰어난 임상의, 뛰어난 변호사, 뛰어난 경영인, 뛰어난 정치 컨설턴트도 마찬가지다. 프로기사와 소설가에게 바둑 이론이나 문학 이론의 효용은 크지 않다. 뛰어난 프로기사는 바둑 두는 법에 대해 뭔가를 깊이 알고 있고, 뛰어난 소설가도 소설 쓰는 법에 대해 뭔가를 이해하고 있는데, 그 지식은 언어로 잘 표현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분야에서 인간 전문가의 지식은 쉽게 복제되지 않고, 희소성이 있다. 뛰어난 변호사, 뛰어난 경영인이 높은 연봉을 받는 것, 뛰어난 임상의가 수술실에서 권위를 얻는 것은 그들이 지닌 암묵지 때문이다.

그런데 딥러닝 기법을 사용하는 인공지능은 인간 전문가들보다 더 풍성하고 정확한 암묵지를 지니게 될지 모른다. 의사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인간 의사 한 명이 체험할 수 있는 임상 사례에는 한계가 있으며, 그가 오랜 현장 경험을 통해 얻은 통찰 역시 그러하다. 그런 통찰을 지닌 임상의는 인간이 평생 훑어보는 것조차 다 할 수 없을 수많은 임상 사례를 검토하고 거기에서 중요한 '특징'을 찾아낸 AI 의사와 어떤 관계를 맺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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