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31일 토요일

하버드 MBA 지표: 다음 거품을 알아보는 방법[

모두가 다음 거품은 무엇이 될지 알고 싶어 하며, 이를 알아보는 쉬운 방법이 있다: 하버드 졸업생들이 가는 곳을 보면 된다.

하버드 MBA 지표(Harvard M.B.A. Indicator)라고 불린다(학부에도 적용되지만). 일부는 심리학적 요소이며, 다른 일부는 경제학적 요소이다. 아이디어는 아주 간단하다. 월스트리트에 진출하는 하버드 졸업생들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좋지 않은 신호라는 것이다.

하버드는 색칠 공부에 익숙한 조직 세대(Organization Kids)를 위한 일종의 자석과도 같다.

그들은 졸업 후 무언가 권위 있고, 무언가 수지맞는 일을 하고 싶어 하지만, 케빈 루즈가 지적한 것처럼, 대부분 새로운 색칠 공부를 건네주는 무언가를 하게 된다. 그 무언가는 실리콘밸리 일 수도 있고, 미국을 위한 가르침(Teach for America) 프로그램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월스트리트일 수 있으며, 그렇게 된다면 성공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붕괴 전까지는 가장 좋은 것으로 보인다. 1987년, 2000-2002년 그리고 2005-2008년에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하버드 MBA 지표가 최고 수준을 기록한다면, 문제가 일어난다. 경제학자 하이만 민스키의 설명처럼, 금융의 안정성이 불안정해진다.

시장의 평온한 시기가 오래되면 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머물 계획을 세운다. 사람들은 점점 더 큰 위험을 감수하고, 더 큰 빚을 지게 된다. 잘못될 가능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잘못되기 전까지 그렇다. 이 모든 레버리지는 작은 손실을 큰 손실로 만들어 버린다. 마진 콜로 매각할 수밖에 없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자기만족 시대는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다. 하버드 키드들에게 월스트리트가 가장 매력적으로 비칠 때가 문제다. 돈은 점점 더 불어나고, 항상 쭉 그럴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해야 하는 모든 일은 앞에 놓인 길을 전속력으로 따라가는 것뿐이다.

이것이 바로 월스트리트로 향하는 하버드 졸업생들이 많아질수록, 시장에는 더 나쁜 신호인 이유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비이성적 과열이 마침내 이성적 공포에 무릎을 꿇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도 좋은 소식은 하버드 키드들이 금융 위기 이전에 그랬던 것만큼 월스트리트로 몰려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아래 하버드 크림슨의 차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졸업을 앞둔 학생들 중 31%만이 내년 금융이나 컨설팅 쪽에서 일할 예정이다. 이는 2007년 고점이었던 47% 보다 낮은 수준이다.




하지만 더 좋은 소식은 지난 몇 년 동안 시장의 호황에도 이런 비중이 30%대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 중 일부는 금융 위기 이후 월스트리트가 예전만큼 문화적 명성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일부는 기술 부문이, 더 크지는 않더라도, 수지가 맞아 보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금융-개혁 조치가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 했을 뿐 아니라 자본 요건이 더 높아짐에 따라 거대 은행들의 수익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하버드 지표는 아직 적신호를 보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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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tt O'brien ㅣ May 28, 2014 ㅣ 출처: Washington Post

2014년 5월 23일 금요일

데이비드 하비: 피케티의 자본에 관한 뒷생각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는 꽤 소동을 일으킨 <21세기의 자본>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피케티는 그가 부와 소득의 불평등이라고 부르는 것에 따른 세습적 자본주의 창출을 향한 추세에 대항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서 누진 과세와 세계적 차원의 부유세를 주장한다. 또한 그는 지난 200년 동안 부와 소득 둘 다의 사회적 불평등이 진전된 세부 상황을 반박하기 위해 증거 자료를 제시한다. 그는 자본주의가 부를 전세계로 확산시키고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거대한 보루라는 견해를 뒤집는다. 국가에 의한 재분배 개입이 없는 상황에서 자본주의는 반민주적 과두지배체제를 만들어낸다고 피케티는 보여준다. 이런 증명은 진보주의적 격분을 조장하였고 월스트리트 저널을 뇌졸중으로 몰아간다.

이 책은 흔히 19세기 마르크스에 대한 21세기 대체물이다. 피케티는 이를 부인한다. 그 책은 2008년의 경제 붕괴가 일어난 까닭과 매우 많은 사람들이 장기간의 실업과 수백 만 채의 주택 압류라는 이중 부담에서 빠져나오는 데 매우 긴 시간이 걸리고 있는 까닭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 책은 중국과는 대조적으로 현재 미국에서 성장이 매우 부진한 까닭과 유럽이 긴축의 정치와 침체의 경제에 갇혀 있는 까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피케티가 통계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역사 전체에 걸쳐서 자본은 불평등의 수준을 항상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새로운 뉴스가 아니다. 게다가, 그것은 바로 마르크스의 <자본> 1권에서 제시된 이론적 결론이다.

피케티는 논증을 뒷받침하기 위해 많은 자료를 종합하여 정리한다. 소득과 부 사이의 차이점들에 대한 그의 설명은 설득력 있고 유익하다. 그리고 그는 부와 권력의 집중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상속세, 누진세 그리고 세계적 차원의 부유세를 옹호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큰 불평등은 왜 일어나는가? 자료로부터 그는 무엇이 일어나는지 설명하는 수학적 법칙을 도출하는데, 자본 수익률(r)이 소득 증가률(g)보다 항상 더 크다는 단순할 사실이다. 이것이 자본의 핵심모순이며 항상 그랬다고 피케티는 말한다.

그런 모순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힘들은 무엇인가? 피케티는 답을 주지 않는다. 법칙은 법칙이고 지금까지 늘 그래왔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 원인을 자본과 노동 사이의 권력 불균형에 귀속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설명은 상식에 맞다. 1970년대 이래로 국민소득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몫의 지속적인 감소는 기술발달, 실업증가, 역외 조달 그리고 대처나 레이건 같은 반노동 정치꾼의 선동에서 비롯되었다. 대처의 경제 고문이었던 앨런 버드(Alan Budd)는 고백하기를, 1980년대의 반인플레이션 정책들은 실업을 증가시키는 매우 좋은 방법인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그리고 실업 증가는 노동자 계급의 힘을 약화시키는 대단히 바람직한 방법이었다. 1970년에 일반 노동자들과 최고경영자들 사이의 보수 격차는 약 30:1이었다. 현재는 300:1을 넘어서며 맥도날드의 경우에는 약 1200:1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자본> 2권에서 마르크스는 임금을 하락시키는 자본권력의 경향이 어떤 시점을 넘어서면 자본의 생산물을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을 제한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가령 노동자의 소득 감소가 경제침체를 가져와 결국 자본가에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헨리 포드는 말하기를, 소비자 수요를 부양하기 위해 자사 노동자들에게 하루 여덟 시간 5달러의 저임금을 부여했을 때 그는 이 딜레마를 인식했다. 많은 사람들이 유효 수요의 부족이 1930년대의 대공황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2차대전 이후의 케인즈주의적 확대 정책들을 고무했고, 그래서 강한 수요 주도의 성장 와중에서 소득 불등평이 얼마간 줄어들었다. 그런데 이런 해결책은 노동의 상대적인 권력 강화와 누진 과세로 재정을 조달하는 '사회적 국가'의 건설에 기초를 두었다. 1932-1980년 기간 동안, 미국의 최고 소득세율은 평균 81퍼센트였다. 그리고 이것은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성장을 침체시키지는 않았다.

1960년대 말에 과도한 노동 권력에 대해 대처해야한다고  자본가들은 생각했다. 그래서 사회적 국가를 해체하고 노동 세력들을 규율하기 위해 케인즈를 훌륭한 경제학자들의 만신전에서 추방했고,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의 공급 중시 사상으로 변환하였으며, 과세를 줄이지는 않더라도 안정화시키는 운동을 벌였다. 1980년 이후 미국에서 최고 세율은 낮아졌고 자본이득은 훨씬 더 낮은 세율로 과세되었는데, 이것은 상위 1%의 부자에게 흘러가는 부를 엄청나게 늘렸다. 그러나 막상 경제 성장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했다는 점을 피케티는 보여준다. 그래서 부유층에서 나머지 계층들로의 적하효과(trickle down)는 작동하지 않는다.

1990년대는 주택담보 융자를 서브프라임 시장으로 확대하는 것을 비롯한 방대한 신용 팽창으로 그 문제를 넘어갔다. 그런데 그 결과 발생한 자산 거품은 터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2008년에 리만 브라더스와 신용 체계를 붕괴시켰다. 그렇지만 수익률과 사유 재산의 추가 집중은 2009년 이후에 매우 빠르게 회복된 반면, 다른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은 나빠졌다. 현재 미국에서 기업들의 수익률은 항상 그랬듯이 높다. 시장 조건이 튼튼하지 않기 때문에 산더미같이 많은 현금 위에 앉아 있는 기업들은 M&A이외의 투자를 거부한다.

피케티는 문제의 원인을 밝히지 않고 경험칙에 따른 수학적 법칙만을 강조함으로써 근저에 놓인 계급 정치에 대한 것을 은폐한다. 워렌 버핏)이 언급했듯이, '확실히 계급 전쟁이 존재하며, 그것을 벌이고 있는 것은 내 계급(부자)들이고 우리는 이기고 있다.' 그들의 승리의 한 가지 핵심 척도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한 최상위 1%의 부와 소득의 격차 증대이다.

피케티의 논증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중요한 난점이 있다. 그것은 자본에 대한 잘못된 정의다. 자본은 과정이지 사물이 아니다. 자본은 노동력의 착취를 통해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돈이 사용되는 순환 과정이다. 피케티는 자본을 자산이 사용되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는 사적 개인, 법인 그리고 정부들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자산의 저량(stock)으로 정의한다. 이것에는 토지, 부동산 그리고 지적 재산권뿐 아니라 예술 및 보석 수집품도 포함된다. 이 모든 것들의 가치를 측정하고 그 성장률을 구하는 것은 아직 답이 없는 어려운 기술적 문제다. 유의미한 수익률(r)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애초 자본의 가치를 평가하는 어떤 방식이 있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그러한 방법은 없다. 자본은 그것의 생산에 투입된 것(저량)이 아니라 그것이 생산하는 것(부가가치)에 의해 가치 평가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본의 수익률은 성장률에 의존한다. 그 가치는 투기에 영향을 받고, 그래서 그린스펀이 지적한바 있는 '비이성적인 버블(irrational exuberance)'로 심각하게 왜곡될 수 있다. 자본의 정의에서 주택과 부동산을 제외하면, 과거와 현재의 불평등 상태에 대한 서술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지만 부와 소득의 격차 증가에 대한 피케티의 설명은 그 의미가 퇴색될 것이다.

생산에 사용되지 않는 돈, 토지, 부동산, 공장, 설비를 피케티는 자본의 저량(stock)으로 채용했지만 실제 이들은 자본이 아니다. 사용되고 있는 자본의 수익률이 높다면, 이것은 자본의 일부가 순환에서 벗어나서 사실상 파업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즉, 사용되고 있는 자본이 작으면 작을 수록 그 자본의 수익률은 높아진다. 새로운 투자에 대한 자본 공급을 금지하는 것이 순환하고 있는 자본의 높은 수익률을 보장한다. 일종의 독점처럼. 그런 인위적인 희소성의 창출은 석유 회사들이 높은 수익을 확보하기 위해 행하는 것일 뿐 아니라, 기회가 주어지면 모든 자본이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의 수익률이 항상 소득의 성장률을 넘어서는 경향의 기반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으로 인한 결과가 나머지 사람들에게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그것이 자본이 자체 재생산을 보장하는 방법이다.

피케티의 자료 집합에는 가치 있는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불평등과 과두지배 경향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그의 설명은 심각한 결함이 있다. 불평등의 처방책에 대한 그의 제안은 유토피아적이지는 않지만 소박하다. 그리고 확실히 그는 21세기의 자본에 대한 작동 모형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 데이비드 하비 - ㅍㅍㅅㅅ 번역

2014년 5월 20일 화요일

2014년 5월 18일 일요일

영국 커피숍의 탄생을 둘러싼 막장 에피소드

커피에 미친 영국 남자들, 커피 금지령까지

커피하우스는 17세기 영국에서 인기 절정이었던 곳이었다. ’1페니 짜리 대학’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영국 아저씨들이 여기 모여서 커피나 차 또는 코코아를 마시면서 거의 늘어 붙어서 살았다고 한다.  그니까 정치든 문화든 경제든 다들 여기 모여서 놀면서 떠벌리는게 당시 영국 아저씨들의 일상이었다.

차, 커피, 코코아는 거의 동시대에 유럽에 들어왔다. 식민지 수탈해서, 이제 뭔가 사람 사는 세상에서나 있을 법한 기호품을 접한 것이다. 사실 이 때문에 귀족주의가 쪼금 쇠퇴하고 민주주의(?)라고 하기엔 엄청 부족하지만, 온갖 사람들의 목소리가 공공연하게 나돌게 된 장소가 생기기도 했다. 영국 남자들이 얼마나 커피하우스를 좋아했는지, 명함에 주소를 지가 다니는 커피하우스로 적었을 정도였다.

예를 들면, 명함에 “톰 셰폴드 박사. 런던 러드게이트 옆 러드게이트 교회 앞 페더샵 옆집이며 블랙 프라이어스 게이트 안에 있는 블랙볼과 올드 릴리스헤드에 있습니다”라고 쓰여 있는데,  블랙볼과 올드릴리스헤드는 모두 커피하우스 이름이었다.

당시는 스튜어트왕가가 잡고 있던 시절인데, 대빵이던 찰스 2세는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해서 1675년 커피하우스 금지령을 내렸다. 그 발표문을 보믄 “근래에 커피하우스가 왕국 내에 가게를 차려 영업하고 있는데… 다수의 태만하고 게으른 불평분자들이 모여서 사악하고 위험한 중상모략을 하며 국왕과 정부를 비방하고… 이에 커피하우스를 금지함이 적절하다고…..” 요런 ….

어찌되었던 금지령의 효력은 불과 11일간이었다. 이미 영국 아저씨들은 커피하우스없이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대의 목소리가 엄청나면 국왕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남자들이 커피 때문에 밤일을 못한다”

이 글의 주제는 영국 주부들이 대대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커피하우스에는 여자들의 출입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아저씨들이 맨날 커피하우스에서 탱자탱자거리니 주부들이 열 받은 것이다. 사실 밤일이 문제였던 듯 그래서 아주머니들이 <커피를 반대하는 여자들의 청원>을 하게 됐다.

이 청원서의 부제가 ‘곤궁한 생활에서 심려하는 수천의 순종적이고 선량한 여자들에 의한 소박한 청원과 성명’이었어. 그 내용을 보면 영국이 여자들의 낙원이며, 남자들이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강건한 자들이었던 좋았던 옛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었다. 스폐인에서는 남자들이 성욕을 억제해서는 안되고 ‘남편은 아내에게 하룻밤에 9번 이상 정사를 하면 안 된다’는 법률까지 있다는 걸 상기시키며…

지금의 영국 남자들은 너무 많은 시간을 커피하우스에서 보내기 때문에 ‘진정한 영국 남자의 정력이 사그러들고 영국남자가 프랑스화되어 그저 시건방진 양아치로 전락했다… 이들은 고작 한 번의 정사로도 우리 앞에 널브러진다… 축축한 것은 그네들이 흘린 콧물뿐이고 딱딱한 것은 그네들의 굳은 관절뿐이다’ 요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여자들이 베푼 그 어떤 ‘기술’도 이 무기력한 남자들을 되살릴 수 없고, 영국 남자들은 전투 중에 끌어모은 어중이 떠중이 민병처럼, 탄약은 부족하고 혹시나 무기를 잡아도 위력을 발휘하기는 커녕 발사도 못하고, 행여 발사를 해도 허공에 대고 싼다’

이런 웃긴 코메디 청원이 실제로 1674년 런던에서 발행되고 배포된 팜풀렛이었다.



남자들의 반격 “남자들의 맘을 아는가?”

이때 희생물이 바로 커피였다. 즉 <비열하고 시커멓코, 끈적끈적하고 불결하며 쓰고 나면 짜증나는 냄새가 나는 오수>. “남자들을 거세한 것은… 커피라고 불리는 최근 유행하는 꺼림칙한 이교도 음료 때문이다”, “수다는 우리들의 특권인데, 이걸 침해하고 나아가 남자들이 말로 우릴 이기려고 한다” 등…

남자들도 이런 모욕을 당하고는 못 참았다. <커피을 반대하는 여성들의 청원에 대한 남자들의 회답> (1674년 실제로 인쇄됨)의 부제는 ‘ 은혜도 모르는 여자들이 후안무치하게도 배포한 수치스런 팜플렛에 대한 회답’이었다.

내용은 “우리가 얼마나 막대한 인내심을 가지고 너희의 모욕을 참았는지 아는가? 근데도 니들은 땀흘리며 침대에서 쫒겨나고, 두드려 맞고, 조소당하고, 온몸에 닭살이 올라오는 온갖 수난을 참고 견뎌야 하는 우리 남자들의 맘을 아는가? 그런데도 니들은 불평하겠지? “무덤과 자궁은 항상 만족을 모른다”라고 말한 솔로몬은 참으로 옳았다”라고… 그 밖에도 얼마나 유치했느냐 하면…

“우리가 없는 사이 니들은 니들이 좋아하는 친구와 즐길 수 있으니 주제넘은 생각은 하덜 말어”

“커피는 정신을 집중시키고, 발기를 강하게 하고 정자에 혼을 불어넣어 자궁이 원하는데로 사랑하는 여인네의 정열과 기대에 응하게 만드는 좋은 거야’

“니들 남편이 문제가 생긴 건 남편을 너무 혹사시켜서지, 커피 때문이 아니라니까”

“우리를 밖에서 놀게해도 되잖아. 왜냐면, 집에서는 니들이 너무 활발하게 혀를 놀려서 그 참기 힘든 소음에 대꾸할 틈도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이렇게 협박했다. <앞으로 커피에 반대하고 아니꼬운 청원을 내려는 여편내들은 혼자 자게하고, 낮에는 시금털털름한 버터밀크만 마시게 해야 한다>.


-ㅍㅍㅅㅅ-

2014년 5월 16일 금요일

치밀한 전략을 세우면 성공할까

일본의 자동차 회사 혼다(Honda)는 1959년에 미국 시장에 모터사이클(오토바이)로 첫 진출했는데, 1960년엔 겨우 50만 달러이던 매출액이 1965년이 되자 7천 7백만 달러로 급증했습니다. 게다가 1966년에는 미국의 모터사이클 시장에서 63%의 점유율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시장에 진출한지 고작 7년만에 거둔 성과이기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죠. 모터사이클 경쟁자였던 야마하와 스즈키는 혼다의 성과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했습니다.

혼다의 성공을 두고 여기저기서 '성공의 비결'을 나름대로 해석하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성공기업에는 응당 이런 식의 '사후평가' 작업이 진행되기 마련이죠. 사람들이 성공기업의 비결을 알고 싶어하고, 그 비결을 배우면 자기네들도 성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겁니다.

가장 먼저 스타트를 끊은 곳(제 생각에)은 미국의 컨설팅사인 BCG(보스톤 컨설팅 그룹)이었습니다. BCG는 영국 정부의 산업부로부터 연구를 의뢰받은 터였습니다. 영국의 모터사이클 산업(넓게 보면 자동차 산업)이 왜 몰락했는지, 타개책은 없는지가 연구 주제였죠. BCG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미국 시장에서 스타기업이 된 혼다의 성공사례를 분석했습니다. 혼다의 성공요소를 파악하여 그것을 영국 정부에 제안할 목적이었나 봅니다.

BCG는 혼다의 성공포인트가 목표시장을 세분화(세그멘테이션)하고 그에 따라 치밀한 전략을 수립한 데 있다고 봤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혼다가 미국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모터사이클은 250cc 이상의 오토바이가 아니라 배기량이 50 ~ 100cc인 소형 오토바이였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대형 모터사이클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혼다가 소형 모터사이클로 빈 틈을 파고 들었고 그게 시장에 제대로 먹혀 들어갔다는 것이죠. 그리고 소형 오토바이의 성공을 발판으로 대형 오토바이 시장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는 게 BCG가 분석한 내용의 골자입니다.

BCG는 혼다의 제품 디자인과 혁신능력이 월등하게 뛰어났고 눈 앞에 보이는 이익을 포기하고 장기적인 수익성 달성을 위해서 규모의 경제를 구축하는 일을 최우선적으로 실행했다고 주장합니다. 혼다가 일정한 시장점유율을 달성한 후에야 비용을 줄일 수 있었고, 그에 따라 높은 이익을 거둬들였다고 말하면서, 영국의 자동차 회사들도 혼다의 전략을 배워야 한다고 충고했죠. 간단히 말해, 규모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이익이라는 공식을 영국 정부에게 제안한 것입니다.

하지만 BCG의 분석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리차드 파스칼(Richard Pascale)이라는 맥킨지의 컨설턴트였습니다. 파스칼은 혼다가 미국에 진출할 당시에 활동했던 임원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혼다 성공의 '뒷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인터뷰한 가와시마 기하치로(나중에 미국 혼다 회장에 오른 인물)는 "우리는 그저 미국에 뭔가를 팔 수 있다고만 생각했다. 별다른 전략은 없었다. 그저 미국은 신천지였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BCG의 주장과는 달리, 혼다가 치밀한 사전 계획과 전략을 가지고 미국 시장에 접근한 것이 아니었고, 그런 사전 전략을 통해서 성공한 것도 아니었다는 결론 내립니다. 혼다의 소형 모터사이클이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이유는 전혀 엉뚱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점도 알게 됐죠. 미국은 원래 장거리 이동에 대한 수요가 워낙 커서 50cc짜리 오토바이는 고객의 니즈와 거리가 한참이나 먼 제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력제품이 아니었죠.

그랬던 제품이 입소문을 타며 판매량이 급증한 이유는 미국 혼다 지사 직원들이 간단한 용무를 보기 위해 자기네가 만든 50cc짜리 오토바이(모델명은 Supercub)를 타고 왔다갔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 사람들의 눈에는 그 오토바이의 모습이 꽤나 신기하고 귀여웠던 모양입니다. 여러 곳에서 문의전화가 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혼다의 경영진들은 원래 중대형 모터사이클 쪽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50cc 오토바이 판매에 주저했죠. 하지만 워낙 죽을 쑤고 있었기에 그냥 한번 팔아보자는 심정으로 시장에 본격적으로 내놓았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50cc짜리 오토바이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죠.

파스칼에 따르면, 혼다에게 치밀한 사전 전략(세그멘테이션-->규모의 경제-->비용 감축-->이익 달성-->타 세그먼트로 확장) 따위는 없었습니다. 그냥 한번 팔아나 보자는 심정으로 내놓았던 게 우연히 엄청난 성공으로 이어진 것이죠. 파스칼은 혼다의 성공포인트가 '유연한 태도'와 '학습과 적응'에 있다고 말합니다. 시행착오를 통해 학습하고, 학습한 결과를 다시 적용하면서 시장에 빠르게 적응하는 것이 치밀한 사전 전략보다 더 중요하고 성공확률도 높인다는 것이죠. 파스칼은 이를 '혼다 효과(Honda Effect)'라고 명명합니다.

혼다의 성공을 놓고 BCG와 파스칼의 분석은 이렇게 첨예하게 대립됩니다. 간단히 말해, '사전 전략' 대 '사후 학습' 입니다. 누구의 의견이 옳으냐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파스칼의 의견에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우리는 보통 성공한 기업들에게는 그들이 성공할 수밖에 없는 능력이 있을 거라고 추론합니다. '선형적인(linear)' 인과관계를 찾아내려는 인간의 본성 때문입니다. 성공을 우연히 거둔 게 아니라 특별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논리적인 판단이라고 여겨지고 그래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래서 한껏 포장된 성공 스토리가 나오게 되죠. BCG도 이런 함정에 빠진 게 아닌가 의심이 듭니다.

- 인퓨처 컽설팅 유정식-

성공사례 분석이란 잘해봐야 소설

내가 실패담을 더 좋아하는 이유

사람들이 경험이라고 부르는 건 대부분 실수를 말하죠. - A Good Woman(2004)

일기예보는 왜 자주 틀릴까?

이 문제는 인간 추론 능력의 한계를 잘 보여 주는 사례다. 인간의 사고 방식은 '인과적(causality)' 이다. 원인과 거기에 따른 결과, 이것들의 연속 혹은 집합. 이런 틀을 가지고 추론을 수행한다. 적어도 이런 모델 아래서는, 그 과정이 극도로 복잡하거나 결과가 다시 원인에 영향을 미친다거나 하는 일은 잘 없다.


인간의 사고 방식: 의외로 단순.

하지만 예를 들어 일기 예보의 대상 – 지구의 기상 시스템- 은 인과적으로 만들어져 있지 않다. 시스템이란 '임의의 목적을 위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상호작용하는 부분들의 집합체' 다. 즉, 기압에 따라 바람이 불기도 하지만, 바람이나 지형이 다시 기압에 영향을 주기도 하는 등 상호 작용한다. 문제는 현실 문제 대부분이 이런식이란느 것이다. 이를 소위 비선형적(nonlinear)이라고 부르는데, 이 정도에 이르면 단편적인 원인 결과 따위는 그 의미가 없다. 베이징에 나비가 있냐 없냐 때문에 워싱턴에 폭풍이 몰아치냐 안몰아치냐가 결정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인간의 추론 능력은 비선형적인 사건을 잘 다루지 못한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다. 이런 경우가 많은 것도 아니고, 거의 전부다. 일기예보의 경우에도 열심히 이것저것 자료를 모아서 예측을 하려고 하지만, 그 복잡한 자연계의 모든 요소(factor)들을 다 담을 수는 없다. 아무리 좋은 슈퍼컴퓨터를 써도 장기 일기예보가 힘든 이유다.

그나마 우리나라의 우기 여름철같이 지독히도 복잡한 상황이 벌어지면, 단기 일기 예보도 전혀 안 맞는 사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선형적인 사고가 효과를 보일 수 있는 곳은 실험실처럼 주위 환경이 잘 통제된 상황 정도다.


성공담은 무엇인가? '이러저러해서 성공했다' 는 얘기다. 선형적인 판단이다. 하지만 현실이 전혀 선형적으로 안 생겨먹었다는 것이 문제다. 그렇다면, 성공담의 대부분은 그 자체로 '사실'이라기보다 사후적 꿰맞추기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소니의 베타 비디오 실패나 도요타의 성공요인 분석도 이와 비슷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성공담에 도취되면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속출한다. PlayStation의 아버지 쿠다라기 켄(久夛良木健)이 PS3를 출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PS3야말로 유일한 차세대 게임기입니다. 블루레이, HDMI 출력, 고해상도 그래픽 장치를 탑재하고 있죠' 하지만 정작 시장에서 성공한 것은 후줄근한 그래픽의 닌텐도 wii였다. PS3는 xBox360한테도 밀렸고 심지어 PS3로 처음 출시된 『건담무쌍』은 하도 안 팔려서 PS2로 다운그레이드해서 재출시되는 굴욕을 당했다.

쿠다라기 전 회장은 DVD의 탑재가 PS2의 대성공에 한 요인이 되었다는 것에 크게 고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실제로 그는 3D 그래픽 엔지니어 출신이다.). 하지만 블루레이는 DVD처럼 완전한 표준도 아니었고, 고해상도 그래픽에 대한 수요가 DVD 때만큼 크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폭등하는 개발비 등의 문제에는 별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쿠다라기 켄 같은 희대의 천재도 성공담에 도취되어 삽질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성공담이 가진 한계가 분명해진다. 성공담은 재미있지만, 대부분 사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결과에 영향을 미친 수많은 요인들을 은폐함으로써 진실을 왜곡하고 정확한 판단을 가로막는다. 그 자리에 남는 건 별 도움도 안 되는 원시적 영웅담, 그 뿐이다.

그럼 실패담은? 물론 실패 중에서도 머피의 법칙급으로 일이 꼬이고 꼬여서 발생하는 비선형적인 실패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실패는 그 원인이 명확한 경우가 많다. 뒤집어 말하면, 그걸 알고 있으면 최소한 똑같은 실수만은 피할 가능성이 높다. 더 좋은 점은 실패한 당사자들이 무심코 지나쳤던, 여간해서는 잘 보이지 않는 중요한 요소들을 오히려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작 중요한 정보는 실패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인터넷 상에 넘치는 스티브 잡스에 대한 글들을 읽다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apple의 의사 결정 구조가 잡스를 중심으로 강력하게 중앙 집중화된 조직 구조라는 것, 잡스는 아이폰 출시 전날 폰에 탑재된 아이콘이 잘못 된 것을 지적할 정도로 세밀하고 꼼꼼한 리더라는 것 등의 내용들이었다.

강력하게 중앙 집중화된 조직 구조는 IMF때 접시물에 코박은 80년대 재벌 기업들이었다. 그리고 디테일한 사안까지 가장 잘 챙기는 리더가 어디 있는지를 알고 싶다면, 취임하자마자 전봇대 뽑고 톨게이트 인력 조정한 청와대 그 양반을 떠올리시길 바란다. 대체로 그게 안 좋다는 거, 다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성공담이 현실의 다양한 요소들을 반영하지 못한다면, 그런 걸 다 고려해서 분석할 수는 없을까? 안됐지만 그것도 힘들 것 같다. apple이 지금까지 걸어 온 길에 영향을 미친 모든 요소들? 이건 아마 잡스도 모를 거다. 대량의 객관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수행하는 일기 예보도 틀리기 일쑤다. 이 문제의 경우, 복잡하기는 일기 예보 뺨치고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는 더 적다. 그런데 분석이 가능할 것 같은가?

성공담이 인기가 있는 것은 아마도 읽는 이가 거기에 감정이입해서 대리 만족을 하는 재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환호나 열광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종합적이고도 냉철한 판단이다. 그리고 거기엔 대체로 실패담이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준다. 성공담 따위에 도취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ㅍㅍㅅㅅ-

2014년 5월 15일 목요일

우리가 멀리 볼 수 없는 까닭은

내가 만약 다른 이들보다 더 멀리 볼 수 없다면, 그것은 바로 난쟁이의 어깨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If I have not seen further, it is by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Dwarfs

2014년 5월 7일 수요일

피게티, "21세기의 자본"

최근 한 젊은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1971년생)의 책 『21세기의 자본(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이 세계 지식공동체를 뒤흔들고 있다. 지난 가을 프랑스에서 출간된 책이 지난달 영어로 출간된 이래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수많은 논평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저자가 보통사람들도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쓴 것이라고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많은 통계숫자와 도표를 포함하는 경제학 책이자 685쪽이나 되는 무거운 책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오를 정도이니 범상한 일은 아니다. 여러 저명한 경제학자들과 경제 저널리스트들은 “선진 자본주의경제에 있어서 불평등의 역사적 전개에 관한 결정적 설명일 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내재적 동학을 다룬 웅장한 연구”, 나아가 “경제적 사고에 있어 분수령이 될 하나의 책”이라며 높은 평가를 아끼지 않는다.

회색 라인

대담한 문제 제기와 추종 불허의 경험적 자료 집적
무엇이 이 책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었나? 무엇보다 두 가지 점이 특기할 만하다. 하나는 자본축적과 분배를 만들어내는 거대한 동학을 통하여 경제성장, 부의 집중, 그리고 불평등의 진화를 탐구하려 했다는, 문제 제기의 대담성이다. 오늘날 미국의 사회과학 일반, 그리고 경제학이 미시적이고 기술적인 문제나 방법론에 치중했던 한계를 벗어나 18, 19세기 애덤 스미스, 리카도,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정치경제학의 전통이 지녔던 강점을 살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의 유럽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프랑스의 지적 환경에서 저자의 학문적 업적이 나왔다는 것은 결코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다른 하나는 누구도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경험적 자료를 집적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역사적으로 17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미국, 프랑스, 영국은 물론,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일본, 오스트레일리아까지 포함하는 선진자본주의의 개별 국가들에 대한 방대한 역사적, 국가 비교적 통계자료를 접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세금보고 자료를 통해 초고소득자 계층의 봉급수익을 0.01%까지 추적할 수 있는 고도로 정밀한 자료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다른 학자들 (특히 에마뉘엘 사에즈와 앤서니 애트킨슨)과 협력하면서 수행한 15년 동안의 경험적 연구의 결과였다. 그 때문에 그가 한 인터뷰에서 말한 대로 “데이터에 기초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가능할 수 있었다.

피케티의 역사적, 정치경제적 방법론과 자료의 축적에 힘입어 3세기 동안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 있어 소득과 부(저자가 자본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그 동안 알고 있던 것과는 아주 다른 지식을 얻게 됐다. 또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역사에 대해 새롭게 말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역사적 경험에 대한 여러 발견 가운데 하나는 더 나은 경제적 평등을 향한 일반적 경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다른 발견은 2차대전 이후 실현된 바 있는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평등은 부분적으로는 의도적인 정책의 결과, 특히 누진세의 효과라는 면이 크지만, 그보다는 1914~1945년 사이 특히 유럽에서 상속된 부가 파괴된 것이 더 중요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발견은 선진자본주의 사회는 상속된 부가 지배했던 19세기 말의 ‘가산제적 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로 서서히 후퇴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혹자는 주장하기를 휴먼캐피털의 증가는 다른 형태의 부의 중요성을 감소시킬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피케티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비휴먼캐피털’(nonhuman capital)은 필수불가결하다고 강조한다. 많은 사람들이 ‘계급 간 전쟁’은 ‘세대 간 전쟁’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고 내다보는데, 그러나 세대 간 불평등은 그들 세대 내에서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발견은 유럽, 특히 프랑스와 영국에서 소득에 대한 부의 비율이 미국보다 높아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1980년 이래 영어권 국가, 특히 미국의 경우 전체 소득에서 상위 1%의 점유율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통계는 미국에서 최상위 1%가 1977~2007년 사이 미국 국민소득 증가의 60%를 차지했음을 보여준다. 기술발전과 세계화도 이 문제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고소득 국가들에서 이 두 요소는 공통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기업인들의 지배력은 단지 그들 자신의 노동에 의존하는 사람들에 대해 점차적으로 강화되었다. 종합해보면, 두 개의 가장 놀라운 결론은 미국에서의 ‘초특급경영인’(supermanagers)의 등장과 유럽에서의 ‘가산제적 자본주의’의 회귀이다.

피케티의 이론에서 중요하고도 무척 흥미로운 것은 자본축적에 관한 것인데, 그것은 책의 기본공식으로서 ‘자본의 수익률’(r)이 ‘경제성장’(g)을 능가한다는 의미의 “r>g”로 표현된다. 풀어 말하면 소득 대비 자본의 비율은 그 수익률이 경제성장보다도 현저하게 더 높은 한, 한정 없이 증가할 것이라는 명제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이 늘 사실이었다고 말한다. 지난 수세기에 걸쳐 유일한 예외는 부에 대한 수입 부분이 상당량 몰수되거나, 전쟁 과정에서 파괴되거나 또는 특정 국가의 경제가 2차대전 이후 유럽에서나 현재 개발도상국에서처럼 비상하게 급성장할 때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론은 두 증거에 기초를 두는 것인데, 하나는 자본의 수익률이 소득에 대한 자본의 비율에 단지 약간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상 시기의 자본가들은 그들의 자본 증가가 최소한 경제성장만큼 빠르게 성장할 것임을 확실히 해두기 위해 그들의 수익 가운데 충분한 부분을 저축한다는 것이다. 결국 작은 재산은 사라져버리고, 큰 재산은 사라지지 않는다. 경제보다 자본이 더 빠르게 성장하는 경향은, 인구변동 때문이든 기술발전의 약화 때문이든 경제성장이 상대적으로 둔화될 때 더 분명히 나타난다. 요컨대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시현되는 것은 낮은 성장률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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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한 대안 혹은 비현실적인 정책?
이러한 분석 뒤에 피케티는 대담한 대안 혹은 여러 평자들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는 정책을 제시한다. 특히 그는 최고 수준의 소득에 대해 훨씬 더 높은 한계세율을 부과하는 것과 누진적인 글로벌 부유세를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개별 국가들이 국민소득 배분에 있어 중간층과 하층에게 경제자원을 재분배할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책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러한 대안은 불평등이 허용될 수 있는 조건은 그것이 전체 이익에 기여하고 가장 열악한 경제적 지위에 있는 하층에게 최우선적으로 편익이 부여될 때 정당화될 수 있다는 존 롤즈의 “차등의 원칙(difference principle)”과 아마르티아 센의 “능력(capability)” 개념과 유사성을 갖는다.

피케티의 책은 경제학 이론과 공리주의적 도덕이론을 통해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기존의 중요 이론과 명제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무엇보다 경제가 전체적으로 성장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이른바 “적하경제학”(trickle-down economics)은 더 이상 사실일 수 없다. 또한 성장 초기에는 불평등이 상승하지만 성장이 궤도에 오르고 선진 경제가 되면 불평등이 감소한다는 역U자형 “쿠즈네츠 곡선” 역시 틀린 얘기다. 불평등지표를 담는 곡선은 차라리 U자형에 가깝다. 그리고 실력과 그것이 창출하는 가치에 부응하여 보상받는다는 “능력주의(meritocracy)” 또한 신화에 불과하다. 더 거시적으로 말한다면, 피케티의 『21세기의 자본』은 마르크시즘과 그 결정론적 이론에 대한 부정이고, 자유방임 경제이론에 대한 도전이다. 두 경제이론은 공통적으로 경제적 힘에 의존해서 조화 내지 정의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마르크스는 체제의 모순 때문에 자본의 이윤율은 제로에 근접할 정도로 하락해서 결국은 체제의 붕괴와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상정했다. 그러나 피케티는 자본의 이윤율은 성장률보다 영원히 클 수 있다고 말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는 자유방임경제이론의 기본 가정들을 모두 틀린 것으로 만들었다. 2012년 미국 가구의 상위 1%는 전체 국민소득의 22.5%를 취득했는데, 그것은 1928년 이래 최고 수준이다.

책의 뒷부분에서 저자는 부가 극소수 최정상으로 집중되는 “과두화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다. 분명 책은 자본주의 성장과 그 분배 효과와 관련해 전후 30년 동안의 낙관주의적 시대 다음의 그에 대한 비관적 정조를 대변하는 연구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피케티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가 분석하고 진단한 자본주의의 동학 그 자체를 넘어, 불평등의 악화를 제어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주주의가 해야 할 과업, 정치적 행동의 긴요함에 있다고 하겠다.


- 최장집 - 

2014년 5월 4일 일요일

기도의 방식

어린시절 하나님께 기도했지.. 자전거가 갖고 싶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어. 그리고 깨달았지 하나님은 그런식으로 우리를 보살피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자전거를 훔쳤지,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해 용서를 구했다네..

- 알 파치노


2014년 5월 3일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