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라인
대담한 문제 제기와 추종 불허의 경험적 자료 집적
무엇이 이 책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었나? 무엇보다 두 가지 점이 특기할 만하다. 하나는 자본축적과 분배를 만들어내는 거대한 동학을 통하여 경제성장, 부의 집중, 그리고 불평등의 진화를 탐구하려 했다는, 문제 제기의 대담성이다. 오늘날 미국의 사회과학 일반, 그리고 경제학이 미시적이고 기술적인 문제나 방법론에 치중했던 한계를 벗어나 18, 19세기 애덤 스미스, 리카도,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정치경제학의 전통이 지녔던 강점을 살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의 유럽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프랑스의 지적 환경에서 저자의 학문적 업적이 나왔다는 것은 결코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다른 하나는 누구도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경험적 자료를 집적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역사적으로 17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미국, 프랑스, 영국은 물론,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일본, 오스트레일리아까지 포함하는 선진자본주의의 개별 국가들에 대한 방대한 역사적, 국가 비교적 통계자료를 접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세금보고 자료를 통해 초고소득자 계층의 봉급수익을 0.01%까지 추적할 수 있는 고도로 정밀한 자료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다른 학자들 (특히 에마뉘엘 사에즈와 앤서니 애트킨슨)과 협력하면서 수행한 15년 동안의 경험적 연구의 결과였다. 그 때문에 그가 한 인터뷰에서 말한 대로 “데이터에 기초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가능할 수 있었다.
피케티의 역사적, 정치경제적 방법론과 자료의 축적에 힘입어 3세기 동안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 있어 소득과 부(저자가 자본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그 동안 알고 있던 것과는 아주 다른 지식을 얻게 됐다. 또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역사에 대해 새롭게 말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역사적 경험에 대한 여러 발견 가운데 하나는 더 나은 경제적 평등을 향한 일반적 경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다른 발견은 2차대전 이후 실현된 바 있는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평등은 부분적으로는 의도적인 정책의 결과, 특히 누진세의 효과라는 면이 크지만, 그보다는 1914~1945년 사이 특히 유럽에서 상속된 부가 파괴된 것이 더 중요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발견은 선진자본주의 사회는 상속된 부가 지배했던 19세기 말의 ‘가산제적 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로 서서히 후퇴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혹자는 주장하기를 휴먼캐피털의 증가는 다른 형태의 부의 중요성을 감소시킬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피케티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비휴먼캐피털’(nonhuman capital)은 필수불가결하다고 강조한다. 많은 사람들이 ‘계급 간 전쟁’은 ‘세대 간 전쟁’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고 내다보는데, 그러나 세대 간 불평등은 그들 세대 내에서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발견은 유럽, 특히 프랑스와 영국에서 소득에 대한 부의 비율이 미국보다 높아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1980년 이래 영어권 국가, 특히 미국의 경우 전체 소득에서 상위 1%의 점유율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통계는 미국에서 최상위 1%가 1977~2007년 사이 미국 국민소득 증가의 60%를 차지했음을 보여준다. 기술발전과 세계화도 이 문제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고소득 국가들에서 이 두 요소는 공통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기업인들의 지배력은 단지 그들 자신의 노동에 의존하는 사람들에 대해 점차적으로 강화되었다. 종합해보면, 두 개의 가장 놀라운 결론은 미국에서의 ‘초특급경영인’(supermanagers)의 등장과 유럽에서의 ‘가산제적 자본주의’의 회귀이다.
피케티의 이론에서 중요하고도 무척 흥미로운 것은 자본축적에 관한 것인데, 그것은 책의 기본공식으로서 ‘자본의 수익률’(r)이 ‘경제성장’(g)을 능가한다는 의미의 “r>g”로 표현된다. 풀어 말하면 소득 대비 자본의 비율은 그 수익률이 경제성장보다도 현저하게 더 높은 한, 한정 없이 증가할 것이라는 명제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이 늘 사실이었다고 말한다. 지난 수세기에 걸쳐 유일한 예외는 부에 대한 수입 부분이 상당량 몰수되거나, 전쟁 과정에서 파괴되거나 또는 특정 국가의 경제가 2차대전 이후 유럽에서나 현재 개발도상국에서처럼 비상하게 급성장할 때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론은 두 증거에 기초를 두는 것인데, 하나는 자본의 수익률이 소득에 대한 자본의 비율에 단지 약간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상 시기의 자본가들은 그들의 자본 증가가 최소한 경제성장만큼 빠르게 성장할 것임을 확실히 해두기 위해 그들의 수익 가운데 충분한 부분을 저축한다는 것이다. 결국 작은 재산은 사라져버리고, 큰 재산은 사라지지 않는다. 경제보다 자본이 더 빠르게 성장하는 경향은, 인구변동 때문이든 기술발전의 약화 때문이든 경제성장이 상대적으로 둔화될 때 더 분명히 나타난다. 요컨대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시현되는 것은 낮은 성장률이라는 것이다.
회색 라인
대담한 대안 혹은 비현실적인 정책?
이러한 분석 뒤에 피케티는 대담한 대안 혹은 여러 평자들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는 정책을 제시한다. 특히 그는 최고 수준의 소득에 대해 훨씬 더 높은 한계세율을 부과하는 것과 누진적인 글로벌 부유세를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개별 국가들이 국민소득 배분에 있어 중간층과 하층에게 경제자원을 재분배할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책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러한 대안은 불평등이 허용될 수 있는 조건은 그것이 전체 이익에 기여하고 가장 열악한 경제적 지위에 있는 하층에게 최우선적으로 편익이 부여될 때 정당화될 수 있다는 존 롤즈의 “차등의 원칙(difference principle)”과 아마르티아 센의 “능력(capability)” 개념과 유사성을 갖는다.
피케티의 책은 경제학 이론과 공리주의적 도덕이론을 통해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기존의 중요 이론과 명제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무엇보다 경제가 전체적으로 성장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이른바 “적하경제학”(trickle-down economics)은 더 이상 사실일 수 없다. 또한 성장 초기에는 불평등이 상승하지만 성장이 궤도에 오르고 선진 경제가 되면 불평등이 감소한다는 역U자형 “쿠즈네츠 곡선” 역시 틀린 얘기다. 불평등지표를 담는 곡선은 차라리 U자형에 가깝다. 그리고 실력과 그것이 창출하는 가치에 부응하여 보상받는다는 “능력주의(meritocracy)” 또한 신화에 불과하다. 더 거시적으로 말한다면, 피케티의 『21세기의 자본』은 마르크시즘과 그 결정론적 이론에 대한 부정이고, 자유방임 경제이론에 대한 도전이다. 두 경제이론은 공통적으로 경제적 힘에 의존해서 조화 내지 정의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마르크스는 체제의 모순 때문에 자본의 이윤율은 제로에 근접할 정도로 하락해서 결국은 체제의 붕괴와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상정했다. 그러나 피케티는 자본의 이윤율은 성장률보다 영원히 클 수 있다고 말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는 자유방임경제이론의 기본 가정들을 모두 틀린 것으로 만들었다. 2012년 미국 가구의 상위 1%는 전체 국민소득의 22.5%를 취득했는데, 그것은 1928년 이래 최고 수준이다.
책의 뒷부분에서 저자는 부가 극소수 최정상으로 집중되는 “과두화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다. 분명 책은 자본주의 성장과 그 분배 효과와 관련해 전후 30년 동안의 낙관주의적 시대 다음의 그에 대한 비관적 정조를 대변하는 연구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피케티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가 분석하고 진단한 자본주의의 동학 그 자체를 넘어, 불평등의 악화를 제어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주주의가 해야 할 과업, 정치적 행동의 긴요함에 있다고 하겠다.
- 최장집 -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