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4일 수요일

회전하는 물통(양동이)과 우주

공간은 물리적 실체인가? 아니면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추상적 개념인가?

믿기 힘들겠지만 과학자들이 물통 하나를 놓고 지난 300년 동안 논쟁을 벌여 왔다. 그러나 1689년 뉴턴이 제안했던 물통실험은 후대의 물리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물이 가득 차 있는 물통을 밧줄에 메달아 놓은 다음 손으로 물통을 잡고 한 쪽 방향으로 천천히 돌려서 밧줄이 꼬이게 만든다. 밧줄이 충분히 꼬인 후 물통을 잡고 있는 손을 놓으면 밧줄이 도로 풀리면서 물통은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회전 속도가 그다지 빠르지 않기 때문에 물의 표면을 그대로 수평을 유지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면 회전속도가 빨라지고 물과 물통 사이에 마찰력 작용하면서 수면이 평평한 상태에서 물 자체도 회전운동을 하게 되고 수면은 오목해진다. 이때 물통의 회전을 강제로 정지시켜도 물은 회전운동을 계속하며 수면도 오목한 곡면상태를 유지한다.

이것이 전부다. 간단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엄청난 수수께끼가  숨어 있다.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우주의 구조를 추적해 온 인류의  과학사는 엄청난 진보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회전하는 물통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하다는 말인가?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아인슈타인 이전의 상대성이론

아인슈타인이 태어나기 훨씬 전에도 '상대성'이라는 개념은 물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갈릴레오와 뉴턴은 이동하는 물체의 빠르기와 방향, 즉 속도가 상대적인 물리량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물체의 속도는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야구공을 던진 투수와 타자와의 관계). 모든 운동은 상대적인 관점에서 서술되어야 물리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즉 물체의 속도는 다른 물체와의 상호관계에서 상대적으로 결정되는 양이다.

예를 들어 기차 내부의 창가쪽 좌석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고 있을 때 반대편 선로에서 다른 기차가 움직이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면 어떤 기차가 움직이고 있는지 알 수 있겠는가?

덜컹거리는 기차의 움직임이 없다면 눈에 보이는 상황만으로 자신의 속도를 알 수 없다. 갈릴레오는 이것을 그 당시 주된 운송수단이었던 배를 이용하여 설명하였다. 조용하게 항해 중인 배 위에서 발치를 향해 동전을 떨어뜨려 보자. 발등 위에 떨어질 것이다. 배를 타고 있는 나의 관점에서 보면 나와 배는 정지해 있으며 바닷물이 선채를 때리며 흘러가고 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나의 발에 대한 동전의 상대운동은 육지에서 동전을 떨어뜨릴 때와 다를 것이 없다.

물론, 속도의 크기와 방향이 바뀌는 가속운동을 하고 있다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상태라 해도 자신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굳이 다른 물체와 비교하지 않아도, 심지어는 선실 안에 갇혀 있다 해도 나는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다. 직선경로를 따라 동일한 속도로 움직일 때는 (등속운동)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지만, 속도가 변하는 경우(빠르기가 변하거나 방향이 바뀌는 경우)에는 운동의 변화를 몸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좀 더 신중히 생각해 보면 무언가 이상하다. 등속이나 가속이나 물체가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다를 것이 없는데, 왜 가속운동은 상대적인 비교 없이도 의미를 갖는다는 것일까? 속도라는 양 자체가 비교를 통해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데, 속도 그 자체(등속운동)는 비교를 통해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데. 속도의 변화(가속도 운동)는 왜 비교를 통하지 않고서도 감지되는 것일까? 가속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무언가와 이미 비교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이 문제는 시공간의 의미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갈릴레오는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주장하여 종교재판에 회부되었고, 갈릴레오보다 좀 더 조심스러웠던 데카르트는 [철학의 원리]에서 지구의 운동과 관련된 내용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종교재판을 피해 갔다.

"물체의 운동상태가 변할 때, 물체는 그 변화에 저항하는 힘을 행사한다. 정지해 있는 물체는 외부로부터 힘이 작용하지 않는한 정지상태를 영원히 유지한다. 또한, 직선 궤도를 따라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는 외부로부터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등속 직선운동을 계속한다." 그러나 뉴턴은 여기에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하였다. '정지상태'와 '등속 직선운동'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무엇에 대하여 정지해 있고,  무엇에 대하여 등속운동을 한다는 말인가? 물체의 속도가 변한다고 말할 때, 그 변화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데카르트는 운동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지만 핵심적인 문제를 간과했고, 뉴턴은 천재답게 그 문제를 놓치지 않았다. 이와중에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바로 '회전하는 물통'이었다.


회전하는 물통

그러면 회전하는 물통의 수면은 왜 오목해지는가? 물은 무엇에 대해 회전하고 있는가? 뉴턴의 목적은 운동의 기본적인 개념을 정립하는 것이었으므로 "회전과 같은 가속운동은 외부의 대상과 비교하지 않고서도 운동은 느낄 수 있다"는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통 자체가 운동의 기준역학을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뉴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물통이 막 회전을 시작했을 때, 물통과 물 사이에는 상대운동이 존재한다. 즉, 물통은 물에 대하여 움직이고 있다. 물통이 회전하는 초기에 물은 물통을 따라 회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대운동이 존재하는 데도 회전 초기의 수면은 평평한 상태를 우지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물이 물통을 따라 회전하기 시작하면 물통과 물 사이의 상대운동이 사라지고 수면은 오목해지기 시작한다. 따라서 물통을 운동의 기준으로 삼으면 기대했던 것과 정반대의 결과 (상대운동이 있으면 수면이 평평한 상태를 유지하고 상대운동이 없어지면 수면이 오목해진다)가 없어진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꼬였던 밧줄이 풀리다가 다 풀린 후에는 반대쪽으로 꼬이기 시작한다. 이 시점부터는 물토의 회전속도가 서서히 감소하다가 일시적인 정지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물론 이 순간에도 물통에 담긴 물은 회전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물통이 일시적으로 정지한 순간에 물통과 물의 상대속도는 어떻게 될까? 처음에 밧줄을 꼬았다가 물통을 가만히 놓았을 때와 똑같다. 처음과 나중의 상대운동이 똑같음에도 불구하고 수면의 상태는 전혀 다르지 않은가? 처음에는 수면이 평평하고 나중에 반대쪽으로 완전히 꼬였을 때는 오목하다. 그러므로 상대운동의개념으로는 수면이 오목해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물통을 운동의 기준으로 삼는 관점을 포기한 뉴턴은 다른 생각을 머리에 떠올렸다. 동일한 실험을 텅 빈 공간에서 실행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해 보자.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우주공간에 우주선이 용감한 우주비행사 호머를 태운 채 표류하고 있다. 호머는 안전벨트를 단단히 메고 있다. 자, 이제 이 우주선을 회전시켜 보자. 지구상에서 처럼, 호머는 우주선의 벽 쪽으로 떠밀리는 힘을 느낄 것이다. 얼굴은 일그러지고 복부에는 압력이 느껴지며 머리카락은 벽 쪽을 향해 휘날릴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태양도, 지구도, 아무것도 없이 우주공간은 완전히 비었고 오로지 호머를 태운 물통만 존재한다면 물통이 회전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언뜻 생각하기에, 공간이 완벽하게 비어 있으면 자신의 운동 상테를 미루어 짐작할 만한 기준이 전혀 없을 것 같다. 과연 그럴까? 뉴턴의 생각은 달랐다.

뉴턴은 어떠한 경우에도 운동을 판단할 만한 기준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한 궁극적인 기준계는 바로 공간 그자체었다. "모든 존재를 포함하면서 모든 사건들이 발생하는 무대인 공간은 실재하는 물리적 실체로서, 운동의 여부를 판단하는 궁극적 기준계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그는 이것을 '절대공간(absolute space)'이라고 불렀다. 우리의 오감으로는 절대공간을 느낄 수 없지만 어쨌거나 그것은 존재한다. 이 절대공간은 물체의 운동을 짐작할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이고 진정한 기준체였다. 뉴턴은 '절대공간'에 대하여 가속운동을 하고 있는 물체는 '진정으로' 가속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뉴턴읕 절대공간 개념을 이용하여 물통을 설명한다. 실험초기 1. 물통은 절대공간에 대하여 회전하는 반면, 물은 절대공간에 대하여 정지상태다. 2. 잠시 후에 물이 물통과 함께 회전하면서 물은 절대공간에 대하여 회전한다. 그 결과로 수면은 오목해진다. 밧줄이 반대쪽으로 꼬이면서 물통의 회전속도가 느려질때도 그 속에 담기 물은 절대공간에 대하여 계속 회전하고 있으므로 수면은 오목한 상태로 유지된다. 물통과 물 사이의 상대운동만 고려한다면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지만 물과 절대공간 사이의 상대운동을 고려한다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설명알 수 있다. 뉴턴의 관점에서 본다면 공간은 운동을 정의하는 가장 확실한 기준계인 셈이다.

이 논리는 모든 사물에 적용할 수 있다. 뉴턴의 관점에 따르면 자동차가 커브길을 달릴 때 몸이 한쪽으로 밀리거나 이륙하는 비행기에서 몸이 뒤로 밀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나의 몸이 절대공간에 대하여 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엄청난 장비를 동원하여 얼음판 전체를 회전시키고 나는 그 위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한다면(스케이트 날과 얼음판 사이 마찰력은 없다고 가정한다), 얼음판과 나 사이의 상대운동은 이전과 다를 것이 없지만 나의 몸은 절대공간에 대하여 정지해 있으므로(가속되지 않고 있으므로) 스케이트를 신고 제자리 돌기를 할 때 느끼는 양팔이 바깥쪽으로 당겨지는 현상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절대공간은 물체의 운동여부를 판단하는 최후의 보루인 것이다.

그런데, 절대공간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프린키피아]를 보면 "나는 여기서 시간과 공간, 위치, 운동을 따로 정의하지 않겠다. 이들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은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난관을 피해간 듯한 인상을 받는다.그 다음에 나오는 문장이 유명하다. "절대공간은 어떠한 기준도 필요 없이 완전하게 정지해 있다. 절대공간을 이동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절대공간은 말 그대로 영원불멸의 절대적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러한 그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물체의 '겉보기 운동'과 '진정한 운동'을 효율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공간 자체는 우리의 오감이나 실험기구로 감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한 한, 뉴턴은 후대의 물리학자들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는 절대공간의 개념을 정학한 정의 없이 도입한 후 그 안에서 운동을 서술하는 식으로 고전역학의 체계를 세웠다. 가장 중요한 핵심을 모호한 말로 포장했으니, 그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페이스 잼(space jam)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빨갛다'거나 '딱딱하다'. 또는 '실망했다'라는 말을 들으면 기본적으로 그 단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공간'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경험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에 그 의미가 불확실하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의미의 불확실성은 매우 긴 역사를 갖고 있다.

데모크리토스와 에페쿠로스, 루크레티우스. 피타고라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후대의 수많은 철학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공간이라는 개념과 씨름을 벌여 왔다. 완전히 텅 빈 공간은 존재하는가? 공간과 물질은 다른 것인가? 물질이 없이도 공간은 존재할 수 있는가? 공간과 물질은 서로 배타적인 관계인가? 우리가 속해 있는 공간은 유한한가? 아니면 경계 없이 무한히 펼쳐져 있는가?

지난 수천 년 동안 공간의 철학적 개념은 신학과 더불어 변화를 겪어 왔다. 신과 공간은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는 고통점을 갖고 있으므로 한때 사람들은 공간을 신성히한 적도 있었다. 17세기 신학 및 철학자이자 뉴턴의 훌륭한 조언자였던 헨리 모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공간이 텅 비어 있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무런 물체도 없이 텅 빈 공간이라 해도 거기에는 영혼이 존재한다. 따라서 텅 빈 공간은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으며 우리가 속해 있는 공간은 존재하는 실체이다."

뉴턴은 모어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여, 우리가 사는 공간은 눈에 보이는 물질과 함께 '영적인 물질'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영적인 물질은 물체의 운동을 전혀 방해하지 않는다"는 가정을 추가하여 자신이 세운 역학법칙을 보호하였다. 뉴턴의 절대공간은 바로 '신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공간에 철학적, 또는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면 그것은 수긍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되기 쉽다. 이런 식의 정의는 과학적 명확성이 떨어진다. 공간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질문을 피해갈 수는 없다.

  "내가 지금 일고 있는 이 책처럼, 공간도 하나의 실체로 간주해야 하는가? 아니면 공간은 일상적인 물체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서술하는 하나의 용어에 불과한 것인가?"
  뉴턴과 동시대에 살았던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어떠한 논리를 동원한다 해도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공간은 물체들 사이의 상대적 위치를 결정하는 편리한 방법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위치를 결정할 대상(물체)이 하나도 없는 공간은 더 이상 존재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공간도 알파벳과 같다고 생각했다. a, b,c,d...와  같은 문자의 배열처럼 각각의 문자들이 위치적으로 상호관계를 맺고 있을 때 공간은 그들 사이의 관계를 서술하는 용어로서 의미를 가지며, 물체가 하나도 없으면 공간의 의미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다. 텅빈 공간은 문자가 하나도 없는 알파벳처럼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이 라이프티츠의 생각이었다.

라이프티츠의 주장 중에 하나만 깊고 넘어간다. 만물의 창조주이자 전지전능하고  실수가 없는 신은 이 세상을 창조할 때 각 피조물의 위치를 되는대로 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공간이 만물의 배경으로 정말로 실재한다면 신은 이 세상을 창조할 때 우주를 공간상이 어느 위치에 놓을 것을 것인지 결정을 내려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공간은 모든 지점이 완벽하게 동일히다. 이런 공간에서 신은 어떻게 피조물의 위치를 결정할 수 있었을 까? 말장난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질문에서 종교적 색체를 걷어 내면 지독한 수수께끼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 우주는 공간상의 어느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가? 만일 모든 만물들의 상대적 위치를 유지한 상태에서 우주 전체가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10미터 이동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가? 공간 속을 이동하는 우주의 속도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공간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감지될 수 없고 변형될 수도 없는 것이라면, 과연 그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이 무렵에 뉴턴이 물통-실험을 제기하면서 논쟁의 방향은 크게 달라졌다. 그는 "절대공간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존재함으로써 나타나는 결과는 관측 가능하다"고 주장했다(회전하는 물통의 가속도는 절대공간에 대한 가속도이므로, 수면이 오목하게 패는 것은 바로 절대공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확고한 증거가 직접, 또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얻어졌다면 그것으로 논쟁의 끝이라고 선언했다.

뉴턴이 제기한 간단히 논리 덕분에 종교색 짙은 논쟁 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문제가 되었으며, 그 결과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라이프니츠는 뉴턴의 논리에 승복했다. "나(라이프니쯔)는 물체의 진정한 '절대운동'과 겉으로 드러나는 상대운동(다른 물체를 기준으로 서술한 운동) 사이에 명백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 후로 200년 동안 라이프니츠의 논리를 추종하는 학자들과 공간의존재를 부정하는 학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앗으나, 학계의 중론은 뉴턴 쪽으로 기울었고 절대공간에 기초를 둔 뉴턴 운동법칙은 결국 물리학계를 평정하였다. 뉴턴의 절대공간이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던 것은 개념 자체가 확실해서가 아니라 뉴턴의 운동방정식이 물체의 운동을 너무나도 잘 설명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뉴턴은 '절대공간의 개념을 확립한 것'을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꼽았다. 뉴턴에서 있어서 공간은 물리학의 모든 것이었다.


마흐(Mach)-공간의 의미

뉴턴은 절대공간이라는 궁극적인 기준을 믿었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들이 '절대적인 관점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스케이트 신발 위에 붙어 있는 개미의 입장에서 볼 때, 회전운동을 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얼음판을 포함한 모든 세상'이다. 그리고 관중석에 앉아 있는 관객의 눈에는 스케이트 선수가 회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뜻 생각하면 이 두 가지 관점은 똑같이 옳은 것 같다. 관객과 개미는 똑같이 상대방에 대하여 회전하고 있으므로  이들의 관점은 일종의 대칭적 관계를 형성할 것이다. 그러나 뉴턴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관객과 스케이트 선수, 둘 중 한 쪽의 관점이 상대방의 관점보다 '더 옳다'고 생각했다.

진짜 회전을 하고 있는 쪽이 스케이트 선수였다면 양팔을 벌렸을 때 바깥쪽으로 당겨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고, 자신을 제외한 모든 세상이 회전운동을 하고 있는 경우라면 그런 느낌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뉴턴의 절대공간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절대적인 가속도의 개념을 수용한다는 뜻이며, 이 경우에는 "누가 회전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절대적인 답을 제시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가속운동은 왜 상대적 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는가? 등속운동에서는 상대속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대, 가속운동에서는 왜 '상대가속도'라는 개념이 없는가? 절대공간의 존재를 인정하고 뉴턴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간다면 수긍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커다란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지난 수백 년동안 수많은 물리학자와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놓고 격렬하게, 혹은 조용하게 논쟁을 벌여 왔다. 뉴턴은 물통실험을 통해 "절대공간을 운동의 기준으로 삼은 관점은 모든 관점들 중에서 가장 우월하다. 이 관점에서 바라본 운동이 진정한 운동이다(어떤 물체가 절대공간에 대하여 회전하고 있다면 그 물체는 '진정으로' 회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의 기준에 대하여 회전하는 경우는 진정한 회전운동이라고 말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뉴턴의 생각에 회의를 품은 사람들은 "모든 관점들은 서로 동등하며, 다른 관점보다 '더욱 진실에 가까운' 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상대운동만이 의미를 갖는다는 라이프니츠의 우아한 논리를 고수하며서 절대적 존대(공간)에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사실, 절대공간을 도입한다해도 서로 상대방에 대하여 등속운동을 하고 있는 물체들 중 어느 쪽이 진짜 움직이고 있는지를 판별할 수는 없다. 그런데 어찌하여 유독 가속운동만은 절대공간의 도움으로 그 진위 여부를 판별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일 절대공간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가속운동뿐만 아니라 모든 운동의 진위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주변의 사물들이 절대공간상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절대공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사물의 위치도 상대적인 관점 말고 절대적인 관점에서 결정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절대공간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는데, 어떻게 절대공간이 우리에게 영향(회전하는 스케이트 선수의 팔이 바깥쪽으로 당겨지는 현상 등)을 줄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질문은 1800년대 중반에 오스트리아 철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에른스트 마흐의 등장으로 일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마흐의 공간 개념은 훗날 아인슈타인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마흐의 영감 어린 통찰(마흐의 업적인 현대적 공간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회전하는 물통으로 다시 돌아간다.


뉴턴의 논리에는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 물통 -실험의 목적은 처음 상태에 수면이 평평했다가 밧줄이 반대로 완전히 꼬여서 물통이 정지했을 때 수면이 오목해지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둘의 차이점은 물의 정지와 회전이다. 그러므로 물의 운동상태에 의거해서 수면의 모양을 설명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런 발상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뉴턴은 절대공간 개념을 도입하기 전에 물통을 기준으로 물의 운동을 서술하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그러나 물의 회전 여부를 판단할 기준계(정지해 있다고 믿을 만한 기준)는 물통 말고도 사방에 널려 있다. 실험식 바닥이나 천장, 창문 그리고 벽 등도 얼마든지 기준이 될 수 있다. 야외에서라면 주변의 건물이나 나무, 땅까지 기준계가 될 것이다. 우주에서 실험한다면 멀리 있는 별을 기준계로 삼으면 된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또 하나의 질문이 떠오른다. 물리학의 천재 뉴턴이 과연 이 생각을 못했을까? 뉴턴은 왜 그 많은 기준계들(창문,별,땅,별 등)을 모두 무시하고 느닷없이 절대공간을 떠올린 것일까? 바로 이것이 1870년대의 마흐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이었다.

내가 아무런 움직임 없이 우주공간에 떠 있다고 상상해보자. 먼 곳에서 반짝이는 별들도 아무런 미동도 없이 정지하고 있다. 바로 그때, 누군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면서 어깨를 잡아채 그때부터 나의 몸은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나는 두 가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1. 팔, 다리가 바깥쪽으로 당겨지는 느낌 2. 멀리 있는 별들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원을 그리면서 회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나는 '사지가 바깥으로 당겨지는 느낌'과 '회전하는 별들' 사이에 밀점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 이 점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동일한 실험을 다른 환경에서 재현해 보자.

이제 나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공간 속에 조용히 떠 있다. 주변에는 별도, 은하도, 공기조차 없다. 완벽한 침묵과 어둠뿐이다. 이런 환경에서 회전운동을 한다면 어떤 느낌을 받을까? 텅 빈 공간에서 나의 몸이 회전하고 있다면 팔과 다리에는 아무런 느낌도 전달되지 않고 머리가 띵해지는 일도 없다. 내가 회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방법이 전혀 없으므로 회전운동 없이 가만히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마흐의 논리에는 매우 미묘한 부분이 숨어 있다. 완전히 텅빈 칠흑 같은 공간. 이것은 어두운 방 안에 갇혀 있는 상황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완전히 텅 빈' 공간에는 바닥도, 벽도 없고 단 한 줄기의 빛도 없다. 한마디로 완전한 무, 그 자체다. 여기에는 무엇을 비교할 만한 대상도 없고 기준을 삼을 만한 물체도 없다. 마흐는 이런 상황에서 운동과 가속도를 논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 곳에서는 회전운동을 할 때 팔과 다리에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만히 정지해 있는 상태와 회전하는 상태를 구별하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다.

물론 뉴턴은 완전히 텅 빈 공간도 어디까지나 '공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흐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간은 만질 수 없고 느낄 수도 없지만 물체의 움직임을 비교 판단할 만한 무언가를 여전히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 뉴턴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뉴턴이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그는 우주공간에서 두 개의 돌맹이가 회전하면 그들 사이를 묶어 놓은 줄이 팽팽해진다고 생각했다. 물론 뉴턴의 생각은 일종의 가정에 불과하지만 이 가정을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텅 빈 공간에도 물체의 운동을 비교 판단할 만한 무언가가 존재해야 한다. 그 '무언가'의 정체는? 뉴턴은 공간 자체가 그 역할을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마흐는 뉴턴이 도입했던 가장 기본적인 가정을 문제 삼은 것이다. "실험실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텅 빈 공간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다르다."

마흐의 공간개념은 뉴턴의 절대공간 탄생 200년 만에 처음으로 심각한 도전을 받았고 전 세계 물리학계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완전히 빈 공간에서는 회전이라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마흐의 주장은 실험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게다가 일상적인 환경에서 물통실험을 해 보면 수면은 분명히 오목해진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마흐, 운동, 그리고 별

우선 마흐의 주장의 이상한 점을 보자. 완전히 비어 있지는 않고 단 몇 개의 별들만이 사방에 흩어져 있는 아주 썰렁한 우주를 상상해 보자. 이 우주의 한 지점에서 회전실험을 한다면 별들이 아무리 멀리 있다 해도 그로부터 나오는 희미한 빛을 이용하여 몸의 운동상태를 측정할 수 있다. 그런데 까마득한 거리에 있느 단 몇 개의 별들이 무슨 수로 그토록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말인가? 별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을 때는 사지가 당겨지는 느낌을 전혀 받지 않다가 몇 개의 별만 있으면 그때 비로소 당겨진다니!. 몇 개의 별만 있어도 몸의 회전을 느낄 수 있다면 마흐의 주장은 틀렸을 가능성이 높다. 별을 하나씩 줄여나가다가 단 하나의 별만 남았을 때도 회전운동이 감지된다면 텅 빈 공간에서도 회전운동은 감지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따지고 보니 뉴턴의 절대공간설이 더 타당한 것 같다.

마흐는 이 반론에 나름대로의 대안을 준비하였다. 마흐가 수정한 이론은 다음과 같다. "별의 개수가 지금보다 적은 우주에서 회전운동을 한다면 사지를 바깥쪽으로 당기는 힘은, 우리의 우주에서 회전하는 경우보다 작아진다." 즉 회전하는 몸에 느껴지는 힘은 우리의 주변에 널려 있는 물체의 양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별이 단 하나 밖에 없는 우주에서 회전한다면 아주 미미한 힘을 느낀다느 이야기다. 이 논리에 의하면 가속운동을 할 때 느껴는 지는 힘은 우주 내의 모든 천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나는 결과인 셈이다(원심력은 회전하는물체의 질량과 속도에 의해 결정되는 양이므로 별들의 분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원심력은 뉴턴이 절대공간의 존재를 가정하고 그로부터 이끌어 낸 결론이다. 천체의 분포가 지금과 다른 우주에서는 원심력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것이 마흐의 관점이다. 옮긴이)

물론 이 논리는 회전운동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가속운동에 똑같이 적용된다. 만일 천체의 개수가 지금보다 적은 우주에 살고 있다면 가속운동을 할 때 지금보다 작은 힘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우주에서 가속운동을 한다면 아무런 힘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흐의 논리에서는 오직 상대운동과 상대적 가속운동만이 눈에 보이는 현상을 지배하게 된다. 우리는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들의 평균분포상태에 대하여 상대적인 가속운동을 해야만 그에 대응되는 힘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물질이 전혀 없으면(운동을 비교할 대상이 전혀 없으면) 가속운동을 감지할 방법이 없다. 이것이 바로 마흐기 제창한 공간이론이다.

마흐의 이론은 지난 150여 년 동안 수많은 물리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실 무형의 절대공간에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것은 다분히 위험하고 비과학적인 발상이다. 그러나 마흐의 주장을 수용했던 학자들도 "뉴턴의 물통 실험을 설명할 만한 또 다른 논리가 존재하지 않을까?라는 한 가닥 의문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마흐의 이론은 공간의 존재를 부정했던 라이프니츠의 관점을 옹호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마흐는 공간부재설을 수용했던 것이다. 마흐가 생각했던 공간은 한 물체와 다른 물체 사이에 상대적 위치관계를 서술하는 용어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위치를 결정할 물체가 하나도 없는 텅 빈 공간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마흐와 뉴턴의 대립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많은 물리학자들은 마흐의 답이 옳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마흐의 관점은 정말로 옳은 것일까? 물통 실험까지 떠올리면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었던 뉴턴은 왜 그렇게 모호한 결론을 내려야 했을까? 뉴턴의 절대공간은 과연 존재하는가? 아니면 진리의 추는 상대론자들 쪽으로 기울것인가? 마흐의 새로운 아이디어가 등장한 후로 수십 년 동안 이 질문에는 마땅한 답이 제시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마흐의 이론이 불완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주 내의 모든 물질들이 한 물체의 운동에 영향을 준다고 주장했을 뿐, 그 영향이라는 것의 물리적 얼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마흐의 이론이 맞다면 내가 방 안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을 때 멀리 있는 별들과 이웃집을 이루고 있는 벽돌들이 나의 몸에 영향을 주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과학적으로 검증할 방법이 없다.

현대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마흐가 예견했던 영향은 중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하다. 20세기 초에 아인슈타인이라는 걸출한 천재는 마흐의 원리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중력이론인 일반상대성이론을 탄생시켰고, 이 이론은 공간과 우주를 전혀 새로운 시작으로 바라봄으로써 절대론자와 상대론자의 해묵은 논쟁을 일거에 날려 버렸다.


-우주의 구조  브라이언 그린-


내생각

아인슈타인은 '절대 시공간'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회전하는 물통은 절대 시공간에서 나선형의 운동을 하고 있으므로 텅빈 공간에서도 원심력은 존재한다고 주장. 물리학자들은 이것이 정설이라고 생각하는 듯한데... 가령 가속도 운동하는 경우 시간이 있다면 직전의 자기 모습과 현재의 자기 모습을 비교하면 움직이는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않느냐는 것?




여전히 꺼림직하다. 상대론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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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블로그의 주인장은 흥미로운 가설을 주장하는데 "텅 빈 우주에서 물통은 스스로 회전 할 수 없다"고

현재 우리의 우주는 스핀이 0 라고 하니까.. (우주 자체의 스핀이 0 가 아닐경우에 시간의 방향성이 일정하지 않을수도 있으며 각종 기현상들이 발생하는데 실험적으로 그렇진 않으므로 스핀0 라고 하는듯) 빅뱅의 순간 퍼져나가는 모든 물질, 반물질, 에너지 등의 모든 토크를 합치면 0 가 된다. 따라서 내가 우주에서 회전한다는 것은 나와 토크를 교환한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나의 회전은 상대적으로 그 대상과 비교당한다고 볼 수 있을것 같음. 이렇게 하면 모든 좌표계의 원점을 '나'로 설정해도 모순없이 상대론적 우주론을 성립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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