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9일 일요일

의식의 기원 - 줄리언 제인스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오랫동안 인류는 의식(consciousness)을 갖지 않은 채 살아왔다. 의식이란 인류 역사의 특정 시점에 나타난 현상일 뿐이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오랫동안 심리학을 가르쳤던 줄리언 제인스 교수가 인간의 의식의 기원을 파헤치고 과학 연구에 내재한 종교적 특질을 분석한 책 '의식의 기원'(한길사)이 번역돼 나왔다.

그는 책에서 의식에 대한 기존의 견해, 즉 의식이 물질의 속성을 지녔다거나 경험, 학습, 추론, 판단의 다른 이름이라는 견해는 물론, 의식을 인과적 영향력이 없는 단순한 부수현상으로 보는 견해를 모두 부정한다.

대신 그는 인간의 옛 정신체계는 양원적(bicameral.兩院的)이었다는 주장과 함께 의식은 인류 역사의 한 특정 기점이었던 정신의 양원적 구조의 소멸시기와 연계돼 있다는 주장을 편다.

여기서 독특한 것이 바로 '양원성'이라는 저자 특유의 개념. "태초부터 인간은 언어를 관장하는 좌뇌와 신(神)과의 소통을 관장하는 우뇌를 통합적으로 사용해왔으나 어느 순간부터 우뇌의 기능이 퇴화됐다"는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양원 시대의 인류는 중요한 순간마다 들려오는 신의 소리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했다. 고대 그리스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전사들이 그렇게 했고 히브리 성서에 나오는 선지자들이 그렇게 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 우뇌의 기능이 급속히 상실되기 시작했다. 퇴화된 신과의 소통능력을 대체한 것이 바로 '의식'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살아있는 한 언제나 의식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역사적으로 장구한 세월에 옛 인류는 의식을 갖지 않은 채 삶을 성공적으로 영위했고 의식은 후천적이며 발명된 것이라는 주장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제인스는 의식없이 살던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문헌적으로 고증하기 위해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를 분석하고, 호메로스가 행동을 급박히 결정하기 위해 수많은 판단을 했을 전사들을 묘사할 때 '의식'에 해당하는 단어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문학적 문헌 뿐 아니라 저자는 '양원적 인류'가 살던 고대 문명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돌기둥에 새겨진 글ㆍ그림을 살피고 온갖 신상(神像)을 조사하며 허물어진 사원을 탐방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내린 결론이 양원 시대의 인간들 어떤 사적인 야심이나 탐욕, 갈등이나 포악성도 없었다는 것. 그는 인간들의 정치ㆍ윤리적 삶이 잔악해진 것은 "양원성이 파괴되고 신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결과"라고 지적한다.

그는 나아가 종교 유산이야말로 이전의 정신체계에서 물려받은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현대의 종교현상은 양원 정신 체계의 명백한 증거라는 것.

그런데 제인스가 종교에 각별한 관심을 둔 더 중요한 이유는 과학적 행위가 근본적으로 종교와 관련돼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즉 과학혁명의 배후에는 신성(神性)을 지속적으로 탐구하려는 동기가 있었다는 것. 제인스는 이를 '노스탤지어'라 표현했다.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나 마르크스의 '원시공산사회' 역시 같은 맥락이다.

양원적 구조의 소멸과 '의식'의 탄생이라는 그의 주장도 그렇지만, 결론에 이르는 지적 여정에서 심리학ㆍ문학ㆍ철학ㆍ인류학 등을 온갖 지적 유산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점이 흥미롭다. 이 책은 1978년 전미도서상을 수상했다. 줄리언 제인스의 저작이 국내에 소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원제 'The Origin of Consciousness in the Breakdown of the Bicameral Mind'

김득룡ㆍ박주용 옮김. 552쪽. 3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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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줄리언 제인스, 심리학 · 문학 · 인류학 · 철학 등을 넘나드는 통찰력 돋보여

일찍이 헤라클레스는 의식을 가리켜 “아무리 길을 걸어도 경계를 발견할 수 없는 광대한 공간과 같다”고 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셀 수 없이 많은 창고로 놀랍게 치장되어 있고 광활한 방들이 겹겹으로 들어차 있는 후미진 곳”이라 했다. 밀, 분트, 티치너는 “의식은 실험실에서 감각과 감정의 정확한 요소들로 분석될 수 있는 복합구조”라 했으며, 증기기관차가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칠 때 “잠재의식은 긴장을 유발하는 에너지의 발생기관인 보일러”라고 했다. 이처럼 의식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의식을 의식하게 된다.

저자 제인스(1920~97)는 하버드 대학을 거쳐 맥길 대학을 졸업했으며, 예일 대학에서 심리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66년부터 1990년까지 프린스턴 대학 심리학과에서 강의했다. 그의 저작들은 광범위한 영역을 다루는데, 초기에는 동물심리학에 초점을 두었으나 나중에는 인간의 의식문제에 집중하여 '의식의 기원'(The Origin of Consciousness in the Breakdown of the Bicameral Mind )을 집필하기에 이른다. 일생 동안 심혈을 기울인 이 책으로 1978년 그는 전미도서상(National Book Award)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이 책에서는 의식에 대한 기존의 여러 견해, 즉 의식이 물질의 속성이라거나 원형질의 속성이라거나, 혹은 경험 · 학습 · 추론 · 판단의 다른 이름이라는 견해는 물론, 의식을 인과적 영향력이 없는 단순한 부수현상으로 보는 견해가 모두 기각된다. 그 대신 인간의 옛 정신체계는 양원적(兩院的, Bicamaral)이었다는 주장과 함께, 의식은 인류 역사의 한 특정 기점이었던 정신의 양원적 구조의 소멸 시기와 연계되어 있다는 다소 파격적인 주장을 편다. 그는 심리학 · 문학 · 인류학 · 철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끌어낸 논거들을 유기적으로 연계함으로써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제시했다. 이 때문에 이 책은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근본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그 영향력은 프로이트에 비견되며 20세기가 산출한 가장 의미 있는 학문적 성과로 꼽힌다. 고대 문헌을 분석하고, 고고학적 성과물을 분석하며 이상심리학적 증거들을 제시함으로써 옛 인류의 양원적 정신 역량은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대목에 이르면, 학자들의 학문적 관심을 넘어 세인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옛 인류는 의식을 갖지 않았지만 성공적인 삶을 누렸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정신(마음)을 다루는 제1권은 “의식은 ~이 아니다”라는 도전적인 접근으로 시작한다. 살아 있는 한, 언제나 ‘의식’이 있는 것이라고 믿는 우리에게 그는 그것이 의식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장구한 세월 동안 역사 초기의 옛 인류는 의식을 갖지 않은 채 삶을 성공적으로 영위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정신적 기능에 의거해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의식과 지각, 반응성, 인지 등을 구별하는 저자는, 의식보다는 반응성이 우리의 행동을 유발하는 모든 자극들을 관장하는 정신기능이며, 이에 비해 의식은 훨씬 더 국소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우리가 반응하고 있는 것들을 단지 이따금씩만 의식할 뿐이라는 것이다. “당신을 보고 있는 나는 지금 당신을 의식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묻는 반론자에게 그는 “당신이 지금 의식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의 논증일 것이다”라고 답한다. 이로써 그는 “적어도 나에 대해서 말하는 한, 당신은 의식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때 당신의 정신기능은 ‘의식’이 아니라 ‘지각’일 것이다”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는 의식 없이 살던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문헌적으로 고증하기 위해 ??일리아스??를 분석한다. 행동을 급박하게 결정내리기 위해 수많은 판단을 해야 했을 일리아스 전사들을 묘사할 때 의식에 상당하는 단어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의식은 모두 언어는 아니지만 언어로 생성되고 언어로 접근된다

제인스에 따르면 의식은 언어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언어의 은유기능이다. 예를 들어 “그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우리는 그 경험이 독특한 것이어서 선뜻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때 “그것은 ~같은 거야”라고 답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에 새로운 어휘가 생성되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서로 잘 알고 있는 머리, 손, 가슴 등 자신들의 신체를 은유체로 사용하며 이러한 작업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런 작업은 신체감각으로 관찰될 수 없는 추상적 개념으로 확장된다.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려면 일단 인간의 마음속에서 ‘볼’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의 ‘눈’으로 이들을 ‘보는’ 것 자체가 은유일 수밖에 없다. 의식은 바로 이러한 언어발달 과정에서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증을 위해 그는 실제 나의 유추인 유사 ‘나’(analogue ‘I’), 그리고 그 유사 ‘나’가 수행하는 ‘이야기 엮기’(narratization) 등과 같은 중요한 개념을 소개한다.




양원시대의 인류는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제목이 ‘역사의 증언’인 제2권에서 제인스는 놀랍게도 제1권과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양원성에 역사적 · 고고학적 · 문화적 접근을 시도하는 박학을 과시한다. 여기서 관심 주제는 양원성과 신이다. 양원시대의 인류는 신의 소리를 들었다. 중요한 순간마다 들려오는 그 소리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했다. 고대 그리스 민족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전사들이 그렇게 했고, 히브리 민족의 성서에 나오는 선지자들이 그렇게 했다. 앞에서 문학적 문헌으로 고증하던 제인스는 이번에는 양원적 인류가 살던 고대 문명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돌기둥에 적힌 양각 · 음각의 글줄과 그림을 살피고 온갖 종류의 신상을 조사하며 허물어진 사원을 탐방한다. 신의 영향력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제인스의 주장은 신의 부재(신의 등돌림)의 원인이 인간 자신들의 죄악 때문이라고 믿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사뭇 다른 점인데, 그에 따르면 오히려 인간들의 정치적 · 윤리적 삶이 잔악해진 것은 양원성이 파괴되고 신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결과다. 그는 양원시대에는 어떤 사적인 야심이나 탐욕, 갈등이나 포악성도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양원적 인간은 사적으로 존재할 내적 ‘공간’도, 그런 공간에 있을 유사 ‘나’도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오늘날의 우리보다도 평화스러웠고 친절한 인간족이었다고 주장한다.


환청을 듣는 것은 고대 양원적 인간과 오늘날의 정신분열증 환자가 비슷하다

현대세계에서의 양원정신의 흔적을 논하는 제3권에서는 현대인에게서 관찰되는 정신분열증, 최면 등과 같은 정신현상을 다룬다. 이들에 대한 수많은 이론이 이 현상을 근원적으로 설명해내는 데 적절하지 못하다면서 제인스는 자신의 양원적 정신체계 이론의 설명력이 훨씬 낫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제인스는 우선 환청을 듣는 것을 고대 양원적 인간과 오늘날의 정신분열증 환자가 비슷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에게 양원적 정신체계가 원래의 모습이었으리라는 자신의 가설을 뒷받침하려 한다.

한편 제인스는 양원성과 종교적 신의 문제를 다룬 데 이어, 양원성과 정신병의 관련성을 논의한다. 그는 “정신병으로 심리적 변화를 일으키는, 신경계에 내재하는 태양숭배나 신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양자의 연관성을 부인한다. 양자 간에 때때로 환각이라는 공통 현상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그것은 교육과 종교적 역사에 대한 친숙함 때문이라고 본다.

과학적 행위는 근본적으로 종교와 관련이 있다

마지막으로 제인스는 현대의 종교현상을 양원정신 체계의 증거로 든다. 그는 종교 유산이야말로 이전의 정신체계에서 물려받은 것 가운데 가장 명백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인스가 종교에 각별한 관심을 둔 더 심각한 이유는 실은 이른바 과학적 행위가 근본적으로 종교와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과학혁명의 배후에는 신성을 지속적으로 탐구하려는 동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과학 탐구는 양원 정신이 와해된 직접적인 결과였다. 물리학 · 심리학과 생물학의 토대를 만든 사람들은 모두 17세기 말엽의 영국 프로테스탄트들로 이들은 경건했다. 그에 따르면 현대과학도 종교적인 형식이 있다. 예를 들어 그가 과학주의라 부르는 것 역시 이 시대에 과학과 종교와 분리되면서 남은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급격히 신앙적 신조로 굳은 과학적 신화다. 따라서 현대과학 역시 그것이 대신하려는 종교가 했던 것과 똑같은 특징이 있다.

“크게 보면 근대과학도 종교적 형식을 갖고 있다. 모든 것을 설명하는 합리적 우수성,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와 두드러져 비판받지 않는 지도자의 계승, 과학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경전 같은 일련의 틀, 특정한 사고방식과 해석, 그리고 완전한 헌신의 요구 등이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추종자들은 한때 종교가 제공했던 것을 그대로 받는다. 세계관, 중요성의 위계체계, 그가 무엇을 하고 생각할지를 알려줄 복점 치는 장소, 요컨대 인간에 대한 총체적 설명을 제공받는다.”

결국 과학 스스로가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주장할지라도 근원에서는 의사 종교의 발흥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제인스는 자신의 학문적 연구를 포함하여 모든 과학행위를 이렇게 일갈하며 방대한 글을 끝맺는다. “양원적 정신구조의 폐허 속에서 행동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점치던 일이 이제는 사실이라는 신화들 속에서 완전한 확실성(an innocense of certainty)을 추구하는 일이 되었을 뿐이다.”



지은이 소개


줄리언 제인스
매사추세츠 주 웨스트 뉴턴에서 태어났다. 하버드 대학을 거쳐 맥길 대학을 졸업했으며, 예일 대학에서 심리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6년부터 1990년까지 프린스턴 대학에서 심리학을 강의했다. 그의 저작들은 광범위한 영역을 다루는데, 초기에는 동물심리학에 초점을 두었으나 후에는 인간의 의식문제에 집중하여 [의식의 기원]을 집필하기에 이른다. 일생 동안 심혈을 기울인 책으로 19789년 전미도서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왜 인간과 범고래만 폐경이 있을까?

동물 세계에서 대부분의 암컷은 죽을 때까지 연이어 새끼를 낳을 수 있다.

전체 수명의 3분의 2 시점에서 생식능력을 잃는 폐경(閉經) 현상은 사람과 범고래(killer whale), 들쇠고래(pilot whale) 등 3종에서만 발견된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침팬지도 폐경이 없다.

자연에서 살아가는 생물의 기본 목적이 가능한 대로 많이 자손을 퍼뜨리는 일인데 왜 사람과 고래만 유독 섭리에서 벗어난 것일까.


◇폐경을 하는 동물들

인도의 람지트 라그하브(102)는 94살과 96살에 자식을 얻어 ‘가장 나이 많은 아빠’로 꼽힌다. 남성은 늙어서도 정자를 생산하지만, 여성은 50∼51살이면 난소 기능이 쇠퇴해 월경이 중지되는 폐경이 나타난다. 산업화와 현대 의료 혜택을 입지 않은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쿵족 여성도 현대인과 비슷한 폐경을 거치고 수십 년을 더 산다.

영장류는 사람과 유전적으로 가장 비슷한 동물이지만 폐경은 하지 않는다. 야생에서 침팬지, 보노보, 고릴라, 오랑우탄은 30대말에 마지막 출산을 하고 곧 죽는다. 사람이 45살 이전에 출산을 마치고 약 20년 더 사는 것과 딴판이다. 야생 영장류학자인 김산하 박사(생명다양성재단 사무국장)는 27일 “침팬지가 인간보다 수명은 짧지만, 마지막 자식을 낳는 시기는 비슷하다. 수명 차이를 고려하면 침팬지는 아주 늙어서까지 새끼를 낳는 셈이고, 인간은 자식을 낳을 수 있는데도 갑자기 중단하는 특별한 행태를 보인다”라고 말했다.

영장류와 달리 고래 가운데 범고래, 들쇠고래, 흑범고래 등 3종이 폐경 이후 오래 사는 것으로 밝혀졌다. 범고래는 12∼40살 동안 번식하지만 수명은 90살이 넘는다. 폐경 이후의 삶이 수명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60살 넘게 사는 들쇠고래도 35살이면 번식을 멈춘다. 북극고래가 100살 이상 살지만 죽기 직전까지 새끼를 낳는 것과 대조적이다. 아프리카코끼리와 아시아코끼리도 각각 수명인 60대와 70대까지 출산을 이어간다. 김현우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센터 박사는 “범고래, 들쇠고래, 흑범고래는 모두 대양에 사는 대형 돌고래로 고도의 사회적 행동을 하는 공통점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새끼를 적게 낳고 오래 기르며 안정된 모계 집단 속에서 어미와 자식의 유대가 굳건하다.

흑범고래의 폐경은 지난해 남아프리카공화국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이들은 남아공에 좌초하거나 일본이 포경한 흑범고래를 통계적·형태학적으로 분석해 이런 결론을 얻었다. 과학저널 ‘동물학 최전선’에 실린 논문에서 연구자들은 “흑범고래의 폐경 후 수명이 범고래나 들쇠고래보다는 아시아코끼리와 비슷했다”며 향고래, 큰머리돌고래, 들고양이고래 등 다른 대형 사회적 돌고래에도 폐경이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식물에 벌레혹을 형성하는 일본의 진딧물 한 종도 폐경을 한다는 사실이 2010년 일본 연구자에 의해 밝혀졌다. 이 사회성 진딧물은 번식기를 마친 뒤 새끼를 보호하는 ‘제2의 삶’을 산다. 생식기관이 점액 분비기관으로 바뀐 이 늙은 진딧물은 새끼가 든 벌레혹을 지키다 포식자가 오면 왁스질 분비물로 자신과 포식자를 함께 굳혀 죽이는 행동을 한다.


◇범고래 폐경은 마마보이 기질 때문

범고래는 몸길이 5~7m에 몸무게가 4~5t이나 된다.  어미를 중심으로 아들·딸들이 함께 사는 모계사회를 이루며 바다사자, 심지어 다른 고래 새끼도 사냥한다.  범고래 암컷은 90세까지 살지만 보통 30~40대 젊은 나이에 생식을 멈춘다.

영국 엑시터대의 다렌 크로프트(Croft) 교수 연구진은 1974년부터 2010년까지 36년 동안 미국과 캐나다 동부해안에 사는 범고래 589마리를 관찰했다. 연구진은 폐경 원인을 찾는 연구에서 의외를 결과를 얻었다.

무시무시한 영어 이름과 달리 범고래 수컷은 어미 없이는 살 수 없는 ‘마마보이’(mommy's boy)였던 것.  범고래는 등지느러미를 보면 나이와 성별을 알 수 있다. 일종의 지문인 셈이다.  연구진은 이를 토대로 보험회사가 생명보험료를 계산할 때 쓰는 알고리즘을 적용해 만약 어미가 없다면 범고래의 생존율이 어떻게 되는지 계산했다.  그 결과 어미가 죽은 다음 해에 30세 이상 수컷의 사망률이 14배나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나이 암컷 사망률은 3배 증가에 그쳤다.

연구진은 지난 14일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에서 “범고래 암컷이 생식을 멈추고 나서도 오랫동안 사는 이유는 다 큰 아들을 보살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범고래 어미는 왜 아들만 편애하는 것일까. 연구진은 범고래 가족의 특성에서 답을 찾았다.  범고래 수컷은 짝짓기 때가 되면 다른 집단으로 가서 짝을 찾는다. 새끼가 태어나면 잠시 머물다가 다시 어미에게 돌아온다.

반면 암컷은 원래 집단 안에 있다가 다른 집단에서 찾아온 수컷과 짝짓기한다.

범고래 어미로선 다른 집단에서 새끼를 낳는 아들을 돕는 편이 에너지를 덜 들이면서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더 많이 퍼뜨리는 길이 된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 왜 생식 능력을 포기하나

폐경이 출현한 이유는 대개 이렇게 설명한다. 자신의 번식능력을 포기하는 대신 자식이나 손주를 도와 결과적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이득을 얻는다. 1957년 나온 ‘어머니 가설’과 1998년 나온 ‘할머니 가설’이 대표적인 예이다. ‘어머니 가설’은 자신의 생식을 중단하더라도 자식에 투자하면 노산의 위험을 피하는 등 결과적으로 적응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의료 혜택이 없는 수렵채취인도 출산 때 산모 사망률이 3% 미만으로 나타나 노산의 위험이 과장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 유타대의 인류학자 크리스틴 호크스는 아프리카 하드자인을 연구해, 나이 든 여성은 출산을 포기하고 젖을 뗀 손주를 돕는 편이 진화적으로 득이라는 ‘할머니 가설’을 내놨다. 인간의 아이는 젖을 뗀 뒤에도 오랫동안 돌봐야 한다. 잇따라 출산을 하는 젊은 여성보다 나이 든 여성의 경험과 힘이 뿌리 식량을 채집하는 등 중요한 구실을 한다.

자신의 생식 기회를 버리고 자식과 손주 지원에 나서는 진화적 이점은 동물 연구에서도 밝혀졌다. 영국 엑시터대 진화생물학자 대런 크로프트 등은 2012년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실은 논문에서 36년 동안 북서태평양 범고래를 조사한 데이터를 분석했다. 놀랍게도 범고래의 어머니가 죽으면 30살 아들이 이듬해 죽을 확률은 14배로 뛰었다. 범고래 수컷은 커서도 ‘마마보이’였다. 할머니 범고래는 무리를 이끌며 먹이 찾기, 포식자 감지, 문제 해결, 이동, 집단 내 갈등 해소 등에 기여한다.

가장 최근의 학설은 ‘생식 갈등 가설’이다. 2008년 영국 엑시터대 진화생물학자 마이클 칸트 등은 생식을 둘러싼 젊은 세대와 늙은 세대의 갈등이 나이 든 세대의 생식 포기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할머니 가설은 자신의 유전자의 절반을 남기는 직접 출산에 견줘 4분의 1을 남기는 손주 지원의 이득이 충분치 않다는 이론적 약점이 있었다. 43년 동안 범고래를 장기조사한 연구에서 어미와 딸이 동시에 번식에 나서면 어미의 자식이 사망할 위험성이 딸의 자식보다 1.7배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인간도 딸이 출산을 시작할 즈음 어머니의 출산이 멎는다. 생식 갈등 가설은 할머니 가설을 보완하는 이론으로 주목받는다.

비슷한 연구결과가 있다. 2008년 영국 엑시터대의 마이클 칸트(Cant) 박사는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여성의 조기 폐경은 외부에서 온 며느리라는 새로운 젊은 여성과 생식 경쟁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동물은 짝짓기할 때가 되면 수컷이 집단을 떠난다. 

하지만 인간사회에서는 딸이 떠나고 대신 며느리가 가족으로 들어온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계속 아기를 낳으면 음식이나 보살필 시간과 같은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을 벌일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며느리로선 유전자가 다른 시어머니를 위해 희생할 이유가 없다.

결국 시어머니는 유전자를 나눈 아들이 며느리를 통해 자식을 낳을 수 있게 폐경으로 양보했다는 설명이다.

지난달 핀란드 투르쿠대의 미르카 라덴페라(Lahdenpera) 교수 연구진은 ‘고부 갈등설’을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를 ‘에콜로지 레터스(Ecology Letters)’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산업화 이전인 1702~1908년 사이 핀란드 루터교회에 보관된 출생·결혼·사망 기록을 분석했다.  여기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비슷한 시기에 아기를 낳으면 시어머니의 늦둥이가 15세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50% 떨어지고, 며느리가 낳은 아기는 66%까지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시어머니가 계속 출산을 고집하면 후손을 퍼뜨릴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말이다.

이 연구도 한계가 있다.

산업화 이전 시대라고는 불과 200여년의 시간이 폐경의 진화를 설명하기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또 인간은 당시 핀란드와 같은 농경사회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오래전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할 때부터 가족을 이뤘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직은 한 가설만으로는 설명이 어려운 상황이다.

학계에서는 여성이 할머니와 시어머니의 역할을 동시에 하면서 자신을 희생해 인류를 발전시켰을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원문보기: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9/17/2012091702359.html#csidx62bd5a36192a01dbbbb85645723969d

2018년 7월 5일 목요일

슈뢰딩거 고양이 사고실험 오류와 상호작용

사고 실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외부에서 절대 확인할 수 없는 상자 - 추후 기술하지만 이것이 오류의 핵심이다 - 안에 고양이와 청산가리가 담긴 병이 들어있다. 청산가리가 담긴 병 위에는 망치가 있고 망치는 가이거 계수기와 연결되어있다. 방사선이 감지되면 망치가 내리쳐져 청산가리 병이 깨지는 구조고 결국 그 병이 깨지면 고양이는 중독되어 죽고 만다. 가이거 계수기 위에는 1시간에 50%의 확률로 핵붕괴해 알파선을 방사하는 우라늄 입자가 놓여있다.

이럴 경우 1시간이 지났을 때 고양이는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 실험자는 외부에 있기 때문에 관찰이나 간섭을 절대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대답을 해야 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1시간 후에 절반의 확률로 상자 안의 고양이가 죽는다. 정확히는 절반의 확률은 방사선이 뿜어질 확률이므로 수정하면 '절반의 확률로 병이 깨지고 병이 깨지면 고양이가 확실히 죽는다.'가 더 정확하다. 하지만 야옹이가 우라늄을 먹는다면 어떨까? 역시 죽는다. 당신은 그 상황을 전혀 볼 수 없다. 1시간 후 상자 속의 고양이는 어떻게 되어있을까?"라는 것이다.

물론 상식적인 답은 죽었거나 살아있거나 둘 중 하나가 나와야 하지만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내리는 답변은 그런 '이거 아니면 저거'같은 답변이 아니기 때문에 유명한 것이다.

코펜하겐 해석은 죽음과 살아있음이 중첩된 상태, 즉, '죽음 or 삶'이 아니라 '죽음 and 삶'의 상태에 놓여 있다가, 관측에 의해 죽음과 살아있음이 확정된다는 답을 내놓는다.

슈뢰딩거는 특히 코펜하겐 해석에 있어서 무엇보다 과학적 사실이 관측과 무관한 결정론적인 것이 아닌 관측에 의해 확률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아인슈타인도 학을 뗀 양자역학의 이 기묘한 성질은 '달을 관측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달이 존재하지 않는 거냐?', '당신은 저 달이...당신이 보고있을 때에만 존재한다면 믿을 수 있겠소?'라는 비유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러한 점을 까기 위해 이러한 사고실험을 내놓게 된 것.

물론 이런 반론은 양자역학 내부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데, 이를 대표하는 것이 양자역학의 준입자(Quasi-particle)이다. 자동차가 사막을 고속으로 달릴 때, 자동차 뒷편으로 흙무리가 발생할 것이다. 자동차가 움직이는 물리계 전체의 운동현상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자동차 자체의 상태도 알아야 하지만, 뒤에 따라 붙는 무수한 흙무리 속 흙입자들의 정보 또한 알아야 한다. 하지만 해당 계산은 무수히 많은 계산을 하는 어려움을 동반하므로, 물리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흙무리 덩어리를 싸 잡아 엄청나게 무거우면서 일반적이지 않은 흙입자 한개로 보자.' 이렇게 근본적인 물질 성질은 입자가 아닌데도 입자로 볼때 해당 입자를 준입자라 부른다. 다른말로 하자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해당 물리량의 정보가 측정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입자가 아닌 다른 형태들로 나타날 것이며, 준입자들로 표현된 정보들을 끌어모으면 관측하지 않은 실존하는 입자의 정보를 직접 보지 않고도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철학적으로도 상당한 쟁점이 되는 주제이다. 양자역학 자체의 발전과는 무관하게 "도대체 '양자적 중첩' 같은 것이 뭐냐?"라는 철학적/물리학적 문제는 꾸준하게 제기되었다.

이상의 내용은 '관측'이라는 용어의 애매함 때문에 오해가 많았는데, 아래의 내용들을 더 읽어보도록 하자.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삶과 죽음이 중첩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언어로 완벽하게 표현을 할 수도 없고, 일반적인 상식 안에서 이해되지도 않는다. 간단한 실험을 통한 예시로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해보도록 하자.

우선 이중슬릿 실험에서 전자빔발사기에서 전자다발들이 전자를 한 번에 하나씩 발사해 보도록 하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감광판엔 간섭 무늬가 남는다. 우리는 이를 통해 전자다발들 혹은 연속적인 전자들의 흐름만이 파동이 아니라, 애초에 각각의 전자 하나 하나가 그 자체로 (입자이면서 동시에)파동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는가? 감광판에 간섭 무늬가 남기 위해선 A슬릿을 통과한 파동과 B슬릿을 통과한 파동(여기선 전자)이 서로 간섭을 일으켜야 하고, 서로 간섭을 일으키기 위해선 최소한 한 번에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전자가 발사되어 각각의 슬릿을 최소한 하나 씩의 전자가 동시에 통과해야 한다. 한 번에 하나씩 발사해서는 결코 이 전자는 감광판에 간섭 무늬를 남겨서는 안 된다. 하나의 전자가 두 개로 쪼개져서 각각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한 것일까? 물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전자는 기본입자로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다. 그럼 기기의 오작동으로 한번에 두 개 이상의 전자가 발생된 것일까? 아니다. 실험은 완벽하게 제어되어 있었다.

위의 의문을 정리해 보자. 감광판에 간섭 무늬가 남기 위해선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전자가 A와 B 각각의 슬릿을 따로 그리고 동시에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전자는 분명 한번에 하나씩만 발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광판엔 선명하게 간섭 무늬가 남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전자가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모두 통과했다! 사실 이 표현은 어폐가 있다. 이는 이 단락이 전체적으로 양자역학의 전반적인 설명 보다는 "삶과 죽음의 중첩"이라는 말이 가진 정확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할애된 것으로, 이를 위해 코펜하겐 해석의 핵심적인 부분인 상보성의 원리에 대한 설명이 의도적으로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중첩"의 물리적인 의미를 이해하는데는 훨씬 편할 것이다. 코펜하겐 해석 자체부터 이미 1920년대에 나온 것으로 과학 기술과 지식의 발달에 힘입어 양자역학적 해석도 점점 발전해 오고 있으며, 현대적인 해석 중 하나로 파인만의 역사총합(sum of histories) 또는 경로적분(Path integral formulation) 설명이 좀 더 엄밀하다. (즉, 경로 적분은 이를테면 코펜하겐 해석의 신버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앞서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라는 표현도 상보성의 원리와 배치되는 표현임에 주의하자. 참고적으로 이중 슬릿 실험 자체는 상보성의 원리와 깊은 연관이 있다. 전자의 경로를 직접 보지 못하고 간섭 무늬를 통해 확인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상보성 때문이다.

하나의 전자가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했다는 것은 물론 하나의 전자가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한다는 뜻을 포함하며, 결론적으로 하나의 전자는 확률적으로 위치할 수 있는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파동함수를 따르는 한) 있을 수 있는 모든 상태로 동시에 존재하며,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중첩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더 나아가서 양자역학은 확률론과 인식론과는 하등 관련이 없으며, 대중매체 속에 등장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거의 100% 잘못 인용되었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다. 즉, 일반적인 확률의 개념과 양자역학에서의 확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2.2. 현실세계로 나올 수 없는 상상 속의 고양이

고양이가 삶과 죽음이 중첩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이 사실이라고 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에 대한 정답은 이미 밝혀놓았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은 실제로 재현할 수 없다. 즉, 현실 속의 고양이는 삶과 죽음이 확정된 상태에 있으며, 우리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선 직접 뚜껑을 열어봐야 한다. 즉,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고전적 확률을 따르게 된다. 그 전에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깨지는 소리를 듣는 것도 관측이다. 관측을 하지 않으려면 완벽하게 방음이 되는 상자에서 실험을 진행해야 한다. 전자의 뒷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건 잠시 멈추고, 처음으로 돌아가 슈뢰딩거가 고양이를 이용한 사고 실험을 제안하게 된 이유를 다시 돌이켜보자.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거시세계에서도 똑같이 일어나야 한다. 내가 만든 방정식이 확률을 뜻한다는 당신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거시세계에서도 똑같은 현상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슈뢰딩거의 방정식을 따르는 한) 상자속의 고양이는 삶과 죽음이 중첩된 상태로 존재해야 하는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거시세계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은 미시세계에서도 일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만든 방정식이 확률을 뜻한다는 당신들의 주장은 틀렸다."

바로 이 얘기를 하기 위해 고양이를 이용한 사고 실험을 제안한 것이다. 슈뢰딩거의 주장에 논리상 허점은 최소한 그가 주장하던 당시에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중 슬릿 실험을 통해 하나의 전자가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하는 것을 목격했다. 미시 세계에선 이런 해괴한 일이 분명히 벌어지고 있다. 비단 실험실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주위 곳곳에서 지금 당장도 셀 수도 없을 만큼 일어나고 있다. 사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태양은 빛을 발하지 않으며, 그 어떤 생명체도 지구에서 존재할 수 없다. 아니, 그 이전에 세상 만물이 붕괴해버리고 만다. 이론상 가능하다거나 수학적으로 계산된다는 문제가 아니라, 실존할 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을 지탱하는 강력한 원천임을 잊지 말도록 하자.

그렇다면 거시세계에서도 한마리의 고양이가 두개의 슬릿을(물론 이 슬릿은 고양이가 통과하기에 충분히 커야 할 것이다) 동시에 통과하는 일이 벌어져야 마땅할텐데, 왜 우리는 그런 장면을 결코 목격할 수 없는가? 전술한 바와 같이 상보성 원리에 의해 전자가 됐든 고양이가 됐든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간섭무늬를 통해서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고양이는 결코 간섭무늬를 남기지 않는다. 물론 불쌍한 고양이를 괴롭히는 대신(...) 적당한 물체를 사용해서 여러 실험이 진행되었다.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이제 거시세계와 미시세계의 경계를 들여다 보도록 하자. 다행히 이에 적당한 녀석이 존재한다. 풀러렌을 이용한 이중 슬릿 실험 결과를 살펴보자. 플러렌의 크기는 앞에서 실험한 전자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크다. 원자핵과 전자의 크기 비가 100,000 : 1이고 탄소 원자들이 60개가 모여 입체적인 구 형태를 만든 풀러렌(C60)은 수소 원자보다 5만배는 더 크다. 미시적 세계에 속한다기에는 앞에 실험에 비해서는 무지막지하게 크고 거시적 세계에 속한다기에는 무지막지하게 작은 풀러렌으로 이중 슬릿 실험을 할 경우 간섭 무늬가 아닌 단지 2개의 띠를 만든다.

하지만 실험 환경을 진공에 가깝게 조성할수록 간섭무늬가 생긴다!! 공기는 기체이기에 분자 자체가 많지도 않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전자의 크기가 분자의 크기에 비해 너무 작기 때문에 전자를 이용한 이중 슬릿 실험에서는 진공이 아니더라도 간섭 무늬를 만든다. 진공의 여부가 실험에 어떤 영향을 끼친걸까?

이번엔 풀러렌이 아닌 전자 실험으로 다시 넘어가 이번에는 A슬릿과 B슬릿에 관측 장비를 달아서 전자가 어떤 슬릿을 통과하는지 확인해보도록 하자. 정말 전자는 A슬릿과 B슬릿을 동시에 통과하는 걸까? 하지만 놀랍게도 이번 실험에서는 전자는 A슬릿과 B슬릿 중 하나만 통과하며 간섭 무늬가 아닌 이중 띠를 만든다.

공기 중에서의 풀러렌 실험과 관측 장비를 단 전자 실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공기 중에서의 풀러렌 실험에서는 공기와 풀러렌이 서로 상호작용을 했고 관측 장비를 단 전자 실험에서는 관측 장비의 광자와 전자가 서로 상호작용을 했다. 즉 풀러렌 분자와 전자와 같은 입자들은 다른 입자들과 상호작용을 하기 전까지는 여러 개의 중첩된 상태를 가지고 있다가, 다른 입자들과 상호작용을 하는 순간 결어긋남 상태가 되어 더 이상 간섭을 일으킬 수 없으며, 파동성을 잃는 것과 같은 결과에 이른다. 간섭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파동이 아닌 것은 아니다. 예컨대 최초의 실험에서 나온 손전등 불빛은 제대로 간섭무늬를 남기기 힘들지만(이에 대해선 각주 9에 간략히 암시돼 있다. 단, 간섭무늬를 아예 남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엄연한 파동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의 파동은 결국 간섭으로 귀결되므로, 간섭성을 잃는 것은 곧 파동성을 잃는 것과 같다. 좀 더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자면 전자발사기에서 발사된 전자와 투수가 던진 야구공 모두 파동함수를 따르지만, 투수가 던진 야구공은 파동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그런데 풀러렌은 그 자체로 여러 개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1번이 2번을, 2번이 3번을... 이런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관측(서로간의 상호작용을)하지 않나? 어째서 진공 속의 풀러렌을 서로가 서로를 관측하는데도 불구하고 진공 속에서 여러 개의 상태를 동시에 가질 수 있을까? 그건 풀러렌은 서로가 서로를 관측하지만 그 정보를 자기네들끼리만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풀러렌 그 자체는 닫힌 계(고립계)로써 외부와는 상호 작용을 하지 않기 때문에 진공 상태에서 풀러렌이 중첩된 상태를 갖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위의 풀러렌의 처지와 똑같다. 상자 안의 물체들이 각각 닫힌 계라면 외부 계는 그들의 상태를 관측할 수 없고 그들은 파동성을 잃지 않고 동시에 여러 상태를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상자 안의 물체들이 각각 닫힌 계인가? 상자 안은 진공도 아니며 적외선과 같은 광자를 방출하고 있을 것이다. 즉 이중 슬릿 실험에서의 전자와 진공에서의 풀러렌과는 다르게 상자 안의 고양이, 청산가리가 든 병, 가이거 카운터는 서로 의미있는 상호작용을 하는데다가 상자 안과 밖을 상자 자체가 연결해주기에 상자 자체부터가 완전한 닫힌 계가 아니다. 즉 상자 밖과 안은 언제나 의미있는 상호작용을 하며 이는 언제나 상자 안이 관측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상자 속의 고양이는 상자를 열든 열지 않든 죽거나 살아있는 둘 중 하나의 분명한 상태를 가진다.

출처: https://namu.wi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