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8일 토요일

일제시대 3대 부자가 되었던 금광부자 최창학


ㅇ최창학은 1891년 평안도 구성도호부(現 북한 평안북도 구성시)에서 출생, 출생지는 광산으로 유명한 지역


ㅇ30대까지 별다른 부를 얻지 못하고 각지에 금광을 찾아다녀

  : 사숙(私塾)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1906년부터 대동학교와 향산학교에서 수학하다 1912년 사립 진명학교를 졸업

  : 이후 10여 년간 탐광 활동을 한 뒤 1923년 평안북도 의주군의 삼성금광을 경영

  : 만 21세 이후부터 10여 년간 금을 찾아다니다가 32세부터 금광 경영자가 됐던 것


ㅇ당시 100여명의 동네 사람들을 이끌고 무작정 금 폐광을 까내리기 시작

  : 오랜기간 금맥이 안나와 대부분의 사람들을 뿔뿔히 흩어져

  : 마지막에 혼자 남아서 파던 금광에서 대박이 터진 것

  : 이것이 조선에 ‘황금광(狂)시대’ 열풍을 불게 만든 삼성(三成)금광

  : 당시 경성 괜찮은 주택한채에 천원 안팎이었는데 최창학은 몇 달만에 수백만원을 벌었다고


ㅇ삼성금광을 키워 일본 회사 미쓰이(三井)에 300만원(130만원이라는 기록도)이라는 거금을 받고 팔았고, 그 돈으로 평안북도 삭주 지역에 새로운 금광을 물색


ㅇ1차 대전 이후 각국이 전후 복구를 위해 금본위제를 탈퇴하고 중앙은행의 금 매입이 금감하자 1920년대 금값이 폭락

  : 이후 1920년대 중후반부터 각국이 과도한 인플레를 통제하기 위해 다시 금본위제로 복귀

  : 일본은 비교적 늦은 시기인 1930년에야 금본위제 복귀

  : 금본위제로 복귀하자 금 수요가 늘어나면서 금값이 급등하고 최창학은 돈방석에 앉게 된다


ㅇ그에게 큰 돈을 벌게 해준 것은 금채광보다는 광산 매매업

  : 금광은 금이 쌓여 있으면서도 공권력의 보호를 받기 힘든 지역이어서 무장독립단체의 강도질에 취약

  : 최창학은 1924년 한 해 동안에만 시국을 표방한 무장 독립단의 공격을 4차례, 그리고 단순 강도를 37차례나 당해

  : 1920년대에 금본위체 폐지와 무장독립군의 강도짓이 워낙 빈번해 삭주 일대의 금광, 광산주인들은 신변에 위협을 느껴

  : 이들이 매각한 광산을 최창학이 모두 사들이고 개발하여 다시 일본 대기업에 매각, 좋은 광산은 직접 경영, 나쁜 광산은 이름값을 이용해 고가에 임대

  : 금광이 많았던 조악동 부근의 치안은 1925년부터 급속히 안정, 무장독립단의 활동은 일본이 만주와 국내 양쪽에서 대대적인 단속에 나섬에 따라 시들해져

  : 최창학은 치안이 안정되어 가격이 급등한 금광을 고가에 매도, 일부 잡법도 개인 무장용역을 통해 해결

  : 이후 신변의 안위가 걱정된 그도 마침내 금광을 매각해 큰 현금을 쥐게 됨 


ㅇ1923년부터 1929년까지 평안북도 구성군에 있는 삼성금광을 경영하면서 부를 축적


ㅇ1938년에 소유했던 광산을 니혼광업주식회사에 650만원에 팔아 일명 천만장자로 성장


ㅇ조선 3대 부자중에 그나마 평가가 좋은 편

  : 민비 일가 친일파 민영휘는 지배계급의 일원으로 권력을 이용하여 막대한 재산을 불려

  : 호남 대지주의 아들인 김성수는 물려받은 재산이 많아

  : 사회공헌 사업도 해, 보성전문학교 증축비에 1만원, 경성공업학교 광산과 신설비에 3만원, 오산고등보통학교에 5만원을 희사

  : 훗날 1957년 2월 7일, 기부를 한 인연으로 오산고등보통학교(현 오산고등학교) 4대 이사장에 취임


ㅇ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인 최대의 광업자이며 천만장자로 불려,일제강점기 말기 조선임전보국단 등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고 거액의 국방헌금을 헌납


ㅇ해방 후 김구에게 자신의 별장인 서대문구 죽첨장(현 경교장)을 사저로 무상 제공, 해당 저택에서 김구는 암살됨

  : 1945년 11월 23일 그의 별장을 찾아온 김구, 그는 임시정부 요인 1진과 함께 귀국해 죽첨장으로 찾아가

  : 김구 암살 후 유족들로부터 경교장을 돌려받고 유족들에게 밀린 임대료를 요구, 이후 주한 대만대사, 주한 남베트남 대사 등에게 대여

  : 김구 서거 1개월이 조금 지난 1949년  8월 1일, 그는 광업계 원로들을 이끌고 이승만을 만나러가고 그 쪽으로 지원


ㅇ1949년 8월 10일 자 <조선일보> 2면 하단 기사: 최창학을 “과거 조선 광산왕”으로 소개

  : 같은 달 30일 자 <조선일보> 2면 우상단 기사: 광업계의 원로급 지도자 다섯이 그달 1일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금광 개발을 건의


ㅇ해방을 전후한 시점에 고리대금업에 좀 더 치중


ㅇ해방 이후 그는 재산을 크게 잃어 그가 쇠락의 길에 접어든 것은 친일파였기 때문은 아냐

  : 1949년에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입건되기는 했지만, 여타 친일파들처럼 그 역시 영향을 받지 않

  : 주요 정치인을 포섭해 빠져나갔을 거라는 후문


ㅇ1955년 강한 세무조사를 받고 인신구속

  : 명동에서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발생한 수익때문

  : 김구에게 경교장을 내준 일로 괘씸죄가 적용된 결과라는 해석도...

  : 1957년 무죄 판결


ㅇ그의 재산이 기울게 된 것은 고리대금업을 한창 하던 해방 직후에 인플레이션이 영향을 미쳤다는 설


ㅇ해방 10년 뒤에 발행된 1955년 11월 20일 자 <경향신문> 3면 하단 기사는 '왕년의 광산왕 최창학'라는 표현을 써, 이미 쇠락한지 꽤 된 상태


ㅇ당시 추정으로는 그는 구매력 기준 최고치의 자산에서 1/3정도의 자산만 남았다고


ㅇ전후인 1957년 학교법인 오산학원 이사장에 취임. 1959년 심장마비로 사망(향년 69세) 후 유족들은 경교장 건물을 삼성에 넘기면서 현재의 삼성강북병원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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