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ance는 '금융'이다. 라틴어로 '끝' 을 뜻하는 finis에 프랑스어 명사어미 'ance' 가 결합한 단어. 원래는 '일을 마무리짓다' 로 쓰였다. 사람 사이 일은 대부분 잔금을 모두 지급한 시점에 끝나기 때문에 '돈을 지불하다'라는 뜻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돈을 주고받는 일, 즉 '금융'을 뜻하게 됐다.
유럽 중세에는 자나깨나 전쟁을 치르며 살았지만, 전사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중세 기사들은 사살보다 생포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적을 생포하면 패자의 갑옷과 말 등 전쟁 도구들을 승자가 차지하도록 했다. 대신 생포한 패자 가족이 비싼 몸값을 내면 풀어주곤 했다. 기사들은 전쟁터에 나가 목숨 걸고 싸워도 봉급을 받지 못했다. 전리품과 생포한 적의 몸값이 주 수입원이었다. 생포한 적군 기사의 가족에게 몸값을 받으면 그를 풀어주고 두 사람 사이 거래는 끝난다. 그래서 기사의 몸값을 '마무리 돈' 즉 finance라고 불렀다. 물론 패자의 계급에 따라 finance는 크게 달랐다. 1475년 기록에는 '존'이라는 왕의 finance가 금화 3백만냥으로 나와 있다. 이렇다 보니 중세 전쟁터에서는 같은 편 기사들끼리 경쟁적으로 몸값 높은 적군을 생포하려고 적 앞에서 싸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이처럼 finance는 '몸값을 치르다' '빚을 갚아 일을 마무리 짓다' 등의 의미로 쓰이다'받아야 할 세금을 완불 받고 국가의 수익과 지출을 맞춘다'라는 뜻으로 보편화됐고 지금은 '금융'을 뜻하는 어휘로 발전했다.
2014년 7월 29일 화요일
[인문학으로 배우는 비즈니스 영어] Union
union은 조합이다. labor union, trade union 등 노동조합을 줄여 부를 때 쓰인다. 라틴어로 '하나'인 unus에서 나왔다. '여러 사람이 하나의 목적 달성을 위해 뭉쳤다'를 뜻한다. 학생조합에서 대학이라는 의미로 발전한 university, 영어로 숫자 '1'인 one, 통일성의 unity 등과 사촌 단어이다.
이탈리아 볼로냐에는 고대 로마시대부터 많은 변호사가 법률 학원을 차리고 후배 변호사들을 가르쳤다. 정식 학교 개념이 없어 스승들 추천서로 졸업장을 대신했다. 그러다 보니 질 나쁜 학원 선생들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실력이 미흡하다며 추천서를 써주지 않아 학생들은 노동만 착취당했다. 불이익 당한 학생 수가 늘자 똘똘 뭉쳐 조합을 만들고 학비를 학생 대표가 거두고 오히려 교수들을 고용하고 연도별로 수업 내용을 정해두고 일정한 시일이 지나면 졸업을 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제대로 지키도록 해서 피해 학생이 없도록 했다. 이후로 학생조합을 학생들이 하나 즉 unus로 뭉쳤다고 해서 uniones 또는 여러 사람이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는 의미인 universitas라고 불렀는데, 오늘날에는 노동조합을 뜻하는 union과 대학을 뜻하는 university, 각기 다른 단어로 분화 발전했다.
1800년대 중반부터 유럽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중세 학생회와 비슷한 조직을 만들어 집단적으로 기업과 노동 조건 등을 협상하기 시작했다. 이후로 union은 '노동조합'의 의미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참고로 일본의 반 무사 농민 세력들 역시 여러 사람이 '하나의 규율' 아래 뭉쳤다고 해서 일규(一揆), 일본 발음으로는 '잇키'라고 했다고 한다. 사회 약자들이 서로 힘을 뭉쳐 큰 힘을 만드는 것은 동서 공통의 문화인 것 같다.
이탈리아 볼로냐에는 고대 로마시대부터 많은 변호사가 법률 학원을 차리고 후배 변호사들을 가르쳤다. 정식 학교 개념이 없어 스승들 추천서로 졸업장을 대신했다. 그러다 보니 질 나쁜 학원 선생들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실력이 미흡하다며 추천서를 써주지 않아 학생들은 노동만 착취당했다. 불이익 당한 학생 수가 늘자 똘똘 뭉쳐 조합을 만들고 학비를 학생 대표가 거두고 오히려 교수들을 고용하고 연도별로 수업 내용을 정해두고 일정한 시일이 지나면 졸업을 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제대로 지키도록 해서 피해 학생이 없도록 했다. 이후로 학생조합을 학생들이 하나 즉 unus로 뭉쳤다고 해서 uniones 또는 여러 사람이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는 의미인 universitas라고 불렀는데, 오늘날에는 노동조합을 뜻하는 union과 대학을 뜻하는 university, 각기 다른 단어로 분화 발전했다.
1800년대 중반부터 유럽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중세 학생회와 비슷한 조직을 만들어 집단적으로 기업과 노동 조건 등을 협상하기 시작했다. 이후로 union은 '노동조합'의 의미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참고로 일본의 반 무사 농민 세력들 역시 여러 사람이 '하나의 규율' 아래 뭉쳤다고 해서 일규(一揆), 일본 발음으로는 '잇키'라고 했다고 한다. 사회 약자들이 서로 힘을 뭉쳐 큰 힘을 만드는 것은 동서 공통의 문화인 것 같다.
[인문학으로 배우는 비즈니스 영어] bond
채권을 영어로 'bond'라고 한다. '꽁꽁 묶는다'를 뜻하는 동사 'bind'에서 파생됐다. 유래는 고대 페르시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 삼각주에 위치한 페르시아는 강이 자주 범람하면서 매년 영양분이 가득한 새 흙이 흘러들어 땅이 무척 비옥했다. 덕분에 4대 문명 발상지 중 한 곳이 되었다. 하지만 강수량이 부족한 해에는 강이 범람하지 않아 씨앗을 뿌려도 자라지 못했고, 어떤 해에는 추수를 마치기도 전에 비가 너무 많이 내려 애써 지은 곡식이 속절없이 물에 떠내려갔다.
이런 자연재해 때 농민들을 구조한다는 명분으로 신전이 은행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전이 점차 부패해 흉작으로 고통당하는 농부들에게서 담보를 빼앗는 것이 목적이 된다. 신전들이 가장 선호하는 담보는 노예였다. 특히 여자들의 가치를 높이 쳤다. 노예로 잡혀온 여자가 낳은 아이까지 대대로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빚을 지면 내 가족이 노예가 되어서 밧줄에 묶인다'는 의미에서 채무 계약을 'bond 계약'이라고 표현했다.
채권에 대한 영국의 유명한 문학 작품으로는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을 빼놓을 수 없다.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잡은 샤일록은 변제 기일을 지키지 못한 채무자를 죽일 권리를 주장하면서 "I seek my bond" 라고 말한다. 직역하면 '밧줄을 가져와 묶을 노예를 찾는다'라는 말인데 "반드시 빚을 받겠다"라는 뜻이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 삼각주에 위치한 페르시아는 강이 자주 범람하면서 매년 영양분이 가득한 새 흙이 흘러들어 땅이 무척 비옥했다. 덕분에 4대 문명 발상지 중 한 곳이 되었다. 하지만 강수량이 부족한 해에는 강이 범람하지 않아 씨앗을 뿌려도 자라지 못했고, 어떤 해에는 추수를 마치기도 전에 비가 너무 많이 내려 애써 지은 곡식이 속절없이 물에 떠내려갔다.
이런 자연재해 때 농민들을 구조한다는 명분으로 신전이 은행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전이 점차 부패해 흉작으로 고통당하는 농부들에게서 담보를 빼앗는 것이 목적이 된다. 신전들이 가장 선호하는 담보는 노예였다. 특히 여자들의 가치를 높이 쳤다. 노예로 잡혀온 여자가 낳은 아이까지 대대로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빚을 지면 내 가족이 노예가 되어서 밧줄에 묶인다'는 의미에서 채무 계약을 'bond 계약'이라고 표현했다.
채권에 대한 영국의 유명한 문학 작품으로는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을 빼놓을 수 없다.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잡은 샤일록은 변제 기일을 지키지 못한 채무자를 죽일 권리를 주장하면서 "I seek my bond" 라고 말한다. 직역하면 '밧줄을 가져와 묶을 노예를 찾는다'라는 말인데 "반드시 빚을 받겠다"라는 뜻이다.
2014년 7월 23일 수요일
2014년 7월 19일 토요일
워렌버핏에 대한 신화
주식투자를 포함한 금융의 세계에서 워렌 버핏만큼 칭송받는 투자자는 거의 없다. 주식투자를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워렌 버핏이 주식투자 하나만으로 억만장자가 됐다는 사실은 잘 안다. 이렇듯 그는 전세계 부자 순위 10위권 내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처럼 워렌 버핏은 가장 화려하면서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투자자임에 틀림없다. 이 시대를 넘어선 역대 최고의 투자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런데 한가지 살펴볼 게 있다. 대중들은 그가 단지 주식종목을 잘 골랐기 때문에 최고의 부자가 됐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그가 탁월한 성과를 거둔 건 분명 맞는 사실이지만 대중들이 알고 있는 그의 모습과 실제 모습은 매우 다르다. 나는 개인적으로 워렌 버핏과 관련된 신화가 금융계를 통틀어 가장 많이 오해되고 있는 사례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워렌 버핏은 주식을 잘 고르는 인자하고, 소박한 노인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그는 가치가 있는 주식들을 찾는데 매우 열심이며 이런 종목을 찾았을 땐 팔지않고 계속 보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버핏의 투자방법에 대한 오랜 믿음 중 하나는 주식투자를 지극히 평범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투자자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주식, 예컨대 당신이 체리콕을 좋아하면 코카콜라 주식에, 신용카드를 자주 쓰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주식에 관심을 가져보라는 식이다. 그 다음에는 해당 회사의 연간, 분기 보고서를 샅샅이 훑어보고 괜찮다는 생각이 들면 자산의 일부를 이들 주식에 투자하면 된다. 마지막은? 투자금이 계속 늘어나는 걸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이게 끝이다. 주식투자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얘기다.
그런데 이렇게 해선 그를 둘러싼 진실에 한발자국도 다가갈 수 없다. 일단 대중들이 그의 투자방식에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대부분은 가치투자의 간단한 방식에 매료되거나, 아니면 한번 산 다음에 계속 보유하는 이른바 Buy&Hold 방식이 주식투자에서 성공할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여길 것이다. 그런데 사실 버핏은 이런 대중적인 믿음과는 정반대인 부분들을 많이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엄밀히 말해 그는 주식투자자라기보단 고도의 정교함을 지닌 사업가에 훨씬 더 가깝다. 이게 무슨 얘긴지 알려면 그의 커리어부터 살펴봐야 한다.
큰 틀에서 봤을 때 워렌 버핏은 주식시장의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나 다름없다. 그의 대성공에 자극받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주식시장에서 부를 일궈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미국인들은 주식시장에 돈을 투자했다. 그런데 이 과정을 냉정히 평가하자면 이는 증권사를 비롯한 금융기관들이 지향하는 바와 완벽히 일치한다. 버핏 신화의 결과물과 광고를 통해 투자자들을 부추겨 주식시장에 돈을 투자하게끔 만드는 금융회사들의 전략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버핏 덕분에 가치투자 방법, 가치주 펀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일반 투자자들은 가치투자 펀드에 돈을 집어넣으면 워렌 버핏이 사용하는 방식(가치투자)을 손쉽게 따라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아무튼 그가 일반 대중들로 하여금 주식투자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게 만든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월스트리트 저널 6개월짜리 구독권을 끊거나 관심있어 하는 회사의 PER을 계산하는 행위는 어느덧 투자자들의 안락한 노후를 보장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미디어에서 워렌 버핏이라는 최고의 투자자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나머지 일반 대중들은 주식 포트폴리오 운영이 주식을 하나도 모르는 초보도 거뜬히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되었다. 아기가 침대에서 주식거래를 하거나 중년의 신사가 근무 중 주식거래를 하는 광고를 우리는 숱하게 봐오지 않았는가. 이 역시 같은 맥락이다.
수많은 미국인들이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걸 따라잡기 위해 자신들의 피땀같은 돈(수수료)을 증권회사에 갖다 바쳤다. 증권회사들은 우리가 워렌 버핏의 신화를 그대로 믿길 원한다. 사실 증권회사의 사업모델 중 많은 것들이 워렌 버핏 신화에 대한 우리의 맹목적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워렌 버핏을 싫어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는 분명 워렌 버핏을 존경한다. 내가 투자업계 견습생으로 일하던 시절 나는 그의 연례서한을 가지고 다니면서 통째로 읽곤 했다. 그의 연례서한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최고의 시장 지침서로 남아있다. 지금까지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읽어보라고 권할 정도다.
하지만 그에 대해 알면 알 수록 나는 버핏이 미디어에 의해 묘사되는 모습, 즉 소박하고 평범한 가치투자자가 아니라 엄청나게 약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실제 그가 달성한 업적은 미디어에 나타난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거대하다.
사실 버핏은 1956년도에 헤지펀드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펀드(버핏 파트너쉽)를 설립했다. 그런데 이 펀드는 최근 그가 맹비난하고 있는 헤지펀드 수수료 체계와 거의 흡사한 수수료를 고객에게 부과했다. 그리고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으니 당시 그는 주식투자자가 아닌 사업가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는 점이다.
포브스가 선정하는 400대 부자명단에 이름을 올린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만의 사업체를 설립해 부를 축적했다. 버핏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방법-계좌를 개설해 여러 자산에 투자하는 것-으로 부를 쌓은 게 절대 아니다. 절대 잊지 말길 바란다. 버핏은 사업가이자 헤지펀드 매니저이며 고도로 치밀한 사업가라는 사실을 말이다.
특히 버핏이 초창기 때 운영했던 펀드를 분석해보면 매우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최근 그가 헤지펀드들의 수익률과 수수료 체계에 대해서 비판한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버핏 파트너쉽은 설립 당시 펀드 수익률 6% 초과분에 대해 무려 25%의 수수료를 책정했다. 이것이 그가 초창기 때 부를 급속도로 늘릴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다. 한마디로 버핏은 오늘날의 헤지펀드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펀드를 운영했던 것이다.
초창기 때 그가 가치주 펀드를 운영한 게 아니었다는 증거는 몇개 더 있다. 버핏은 종종 레버리지를 사용했으며 특히 펀드 전체 금액을 소수의 종목에 소위 '몰빵'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가 뎀스터 밀을 인수했을 때다. 버핏은 인수 후 직접 경영에 나섬으로써 '행동주의 헤지펀드 매니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잠깐, 버핏이 행동주의 헤지펀드 매니저라고? 분명 맞는 표현이다. 그는 초창기 때 이런 호칭을 들으면서 맹렬히 기업인수에 나섰다. 현재 그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버크셔 해서웨이를 인수한 것도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버크셔 해서웨이란 회사는 흔히 당신이 생각하는 집단지주회사가 아니다. 오늘날의 버크셔 해서웨이 왕국 밑바탕에는 버핏의 화려한 사업가적 기질이 자리잡고 있다. 그는 이 회사를 인수하자마자 세계 최대의 보험 심사기관으로 탈바꿈시켰다. 보험사업에서 창출되는 프리미엄과 풍부한 현금은 그가 기타 사업에 투자할 때 사용했던 원천이 됐다. 쉽게 말해 버핏이 이 회사의 현금을 다른 기업 인수에 사용하면서 버크셔 해서웨이는 자연스레 버핏의 지주회사가 된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버핏이 단지 코카콜라와 가이코만 사지 않았다는 점이다. 버핏은 초창기 자본을 모아 실물자산 투자에 전념한 전력이 있다. 또 특정기업의 생산 과정에서 특유의 '행동주의 사업가'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심지어 파생상품시장에서 장단기 베팅을 한 것은 물론이고 옵션시장, 채권시장에 참여하기까지 했다.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신화-버핏은 100% 주식투자자-는 사실이 아닌 것이다.
그가 유명해지게 된 계기인 주식 포트폴리오 비중도 매우 흥미롭다. 주식종목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3년 기준 버크셔해서웨이 전체 시가총액의 불과 28% 밖에 안된다. 한 술 더 떠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종목들-코카콜라, 아멕스, 무디스-이 차지하는 비중은 불과 8% 밖에 안된다. 이는 포트폴리오 내 대부분이 주식일 거라고 생각하는 대중들의 믿음과 반하는 것이다.
사실 버핏의 인수건 중 가장 유명한 사례는 모두 가치투자가 아닌 부실채권에 투자한 것이었다. 그가 최초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와 가이코를 사들일 때 두 회사는 모두 부도 직전에 처한 상황이었다. 이런 형태의 매수는 현재 다수의 부실채권 전문 헤지펀드들이 사용하는 방식과 매우 흡사하다. 아무도 이런 형태의 투자를 가치투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절대 명심하기 바란다. 버핏은 뛰어난 업적을 이룬 많은 사업가들 중에서도 발군의 킬러 본능을 지닌 사람이란 사실을 말이다. 2008년 당시 그가 골드만삭스, 그리고 GE와 맺었던 딜을 떠올려보자. 금융위기로 이들 기업이 자본확충을 시도하고 있을 때 버핏은 제발로 그들의 '목구멍'에 들어가 5년짜리 워렌트 딜을 요구했다. 결국 그는 이 투자로 아주 준수한 수익률을 거둘 수 있었다.
물론 버핏은 이 거래를 '장기적 관점에 입각한 가치투자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 부실채권 전문 헤지펀드가 이와 똑같은 방식을 사용했다면(실제로 버크셔 해서웨이가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기자들은 물론이고 일반 대중들까지 그 헤지펀드 매니저를 엄청나게 비난했을 것이다.(미국이 자랑하는 2개 기업이 쓰러진 틈을 타 치사하게 매수하려 한다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워렌 버핏은 위대한 미국인이자 비즈니스 리더다. 하지만 그의 투자전략을 흉내냄으로써 세계 최고의 투자자처럼 내 수익률도 훌륭할 거라는 근거없는 믿음은 일찌감치 버려야 한다. 사실 일반 투자자들이 따라하고 있는 전략은 버크셔해서웨이와 워렌 버핏이 실제로 사용하는(혹은 사용했던) 전략과 하나도 비슷하지 않다. 버핏을 존경하되 그에 대해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 워렌버핏의 진실
2014년 7월 6일 일요일
의식과 자유의지의 실체
연구원: 노튼 박사님, 어떻게 한 거죠?
노튼: 소프트웨어는 더 빠르게 하드웨어는 더 강하게 더욱 월등하게 만들었소
연구원: 인간은 주저하지 않나요?
노튼: 결정을 내릴 때만
연구원: 그럼 그는 결정을 못 내리나요?
노튼: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일상생활에선 인간이 기계를 통제하니 알렉스가 결정하지 그러나 전투 상황에서 바이저가 내려가면 소프트웨어로 대체되어 기계가 모든 걸 하지 알렉
스는 단지 승객으로 참여할 뿐이야
연구원: 기계가 통제하면 머피의 역할은요? 누가 방아쇠를 당기죠?
노튼: 기계가 싸울 때는 시스템이 신호를 알렉스 뇌에 보내고 생각하게 만들지 지금 알렉스는 자신이 통제한다고 믿지만 아냐 자유 의지에 대한 환상이지
- 로보캅(2014) - 머피의 테스트 장면에서
의식은, 정신은 오로지 물질 작용의 부산물인가, 물질과 다른 이원론적 존재, 아니면 또 다른 그 무엇인가? 내가 결정하는 자유의지라는 것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을, 우리의 물질적인 몸 그 자체가 아닌 우리의 몸에 담겨 있는, 혹은 우리의 몸을 조종하는 비물질적인 존재로 생각한다. 종종 ‘영혼’이라고도 표현되는 이러한 비물질적인 존재는 좀 더 일반적인 표현으로 ‘의식’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의식은 우리가 깨어있을 때 느끼는 우리 자신에 대한 ‘느낌’이다. 우리의 의식은 외부에서 오는 온갖 감각을 인지하고,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지 결정하고,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분노를 느끼는 주체이며 그야말로 우리 ‘자신’이다. 그에 비해 우리의 팔다리나 눈, 코, 입 같은 물질로 구성되는 몸뚱이는 우리 의식이 외부와 소통하기 위해 이용하는 기계장치와 같다. 따라서 공각기동대의 세계에서 인간의 몸을 기계로 완벽하게 구현하고 뇌까지도 그대로 기계로 구현해 기억까지 심어놓을 수 있더라도 인간의 본질인 의식만은 심을 수 없기 때문에 인간 행동을 그대로 모사하는 인간형 로봇과 인간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라고 생각한다).
‘의식의 실체’에 관한 오랜 관심
인간의 의식에 관련한 어렴풋한 의문은 고대부터 있어 왔지만 의식의 실체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논의의 시작은 데카르트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에서 출발해, 인간의 의식이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는 비물질적인 정신이라는 이론을 전개했다. 이에 비해 인간의 육체는 기계적인 방식으로 물리학 법칙을 따르는 물질적인 실체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러한 물질적인 인간의 육체는 비물질적인 정신과 인과적으로 상호작용 할 수 있다. 즉, 간단히 이야기하면 정신이 우리 몸 안에 존재하면서 어떤 방법을 통해 우리 몸을 조종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커피를 마시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려는 정신적 판단이 실제로 팔을 들어올리는 원인이 되고, 또한 뜨거운 커피를 잡았을 때 고통을 느끼는 주체는 우리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상식적이고 많은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과연 물질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정신이란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우리 의식의 실체가 비물질적인 정신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그것이 어디에서 생겨나는지, 어떻게 육체와 상호작용 할 수 있는지 등 더욱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이런 반성과 더불어 발전하게 된 관점이 의식에 대한 유물론적 관점이다. 유물론적 관점이란 모든 현상을 ‘물질’에 근거하여 설명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의식을 생각하면 우리가 느끼는 ‘정신’이라고 하는 대상은 실제로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물질로 이루어진 뇌에서 일어나는 작용의 부산물이다. 우리가 막연히 느끼는 정신적인 감각, 자아, 느낌, 이 모든 것이 신경세포들 간의 정보전달 과정에서 생겨나는 어떤 부산물 같은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관점은 물질적인 뇌와 비물질적인 정신을 따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일원론적 관점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잠깐, 정신적인 부분이 뇌의 신경세포들의 전기적 작용으로 생겨났다고 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왜 이들을 ‘부산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일까? 그 의미는 우리 뇌가 이러한 특성들을 창조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의미일까? 의식에 대한 유물론적 관점 중에 하나인 ‘부수현상론’은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이야기한다.
감각, 자아, 느낌과 같은 것들이 뇌의 작용으로 생겨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이지만 뇌가 기능하기 위해서 이런 특성이 필요하지는 않아 보인다. 불에 손을 가져다 대었을 때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빨리 손을 치우는 행동을 만드는 것은 뇌가 수행해야 하는 기능이지만 왜 데인 고통을 수반해야만 하는 것일까? 손을 불에 가져다 대면 통각세포가 신경신호를 뇌로 전달해서 바로 손을 치우는 일련의 행동을 만들어 내는 운동신경세포들을 활성화하고 이들은 팔의 근육을 움직여 손을 치우게 한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 몸을 지키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기능이긴 하지만 이 과정이 일어나기 위해서 ‘고통’이라는 느낌이 관여돼야만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렇게 생각하면 왠지 우리가 느끼는 정신적인 그런 부분들은 꼭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런 면에서 부수현상론은 우리의 의식이 뇌 작용에서 파생된 부산물과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우리의 직관과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의식이 단지 뇌작용의 부산물이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나’라고 하는 자아의식이 나의 행동을 결정하는 주체가 아니라는 것 아닌가? 즉, ‘나’라는 주체의 자유의지를 의심케 하는 놀라운 결과를 초래한다. 내가 하는 모든 판단의 주인이 ‘나’라는 자아의식이 아니라면 나의 행동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이란 말인가? 하지만 의식에 대한 최신 뇌과학 연구는 언뜻 받아드리기 힘든 이러한 내용이 사실일 수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의 의식이 우리 몸의 주인이라는 것은 허구일 수 있으며 우리가 느끼는 자아라는 것은 어쩌면 생각보다는 하찮은 것일 수도 있다. 다음의 연구들을 살펴보자.
내 행동은 내가 생각하기 전에 결정돼 있다
지난 2007년 독일 베를린의 번스타인 계산신경과학센터의 신경과학자인 존-딜런 하네스(John-DylanHaynes) 박사는 우리의 의식적인 판단을 규명하기 위해 인간을 대상으로 한 가지 실험을 수행했다. 그는 피험자에게 왼쪽과 오른쪽 두 개의 버튼을 주면서 피험자가 어느 한 쪽의 버튼을 눌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눈 앞의 스크린에서 무작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알파벳을 기억하도록 했다. 이 알파벳들은 계속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피험자가 의식적인 결정을 내리는 순간의 시각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하네스 박사는 피험자의 뇌활성을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장치(functional Magnetic ResonanceImaging)를 이용해 기록해서 버튼을 누르겠다는 피험자의 판단이 나타나는 시각을 기록하였다.
하네스 박사팀은 이 실험을 통해, 스크린에 나타나는 알파벳을 기억함으로써 기록된 피험자의 의식적인 판단 시각과 자기공명영상 장치에 나타난 버튼을 누르는 결정과 연관된 뇌 활성시각을 비교했다. 그 결과 놀랍게도 버튼을 누르겠다는 판단을 나타내는 뇌 활성이 피험자 자신이 자각한 판단 시각보다 수 초 가까이 먼저 나타나는 것을 관찰했다. 그 뿐 아니라 뇌 활성 분석은 왼쪽과 오른쪽 버튼 중 어느 버튼을 누를지도 피험자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유의미한 수준으로 예측해 낼 수 있었다. 이 연구결과는 다른 말로 이야기하자면 우리 자신이 의식적인 판단을 내리기 전에 뇌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버튼을 누르는 행동은 나의 의식이 ‘지시’한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을 내린 뇌로부터 ‘통보’를 받은 것이다.
사실 이런 우리 뇌의 무의식적인 결정을 연구한 사람은 하네스 박사가 처음이 아니다. 1980년대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소재 캘리포니아대학의 신경심리학자인 벤자민 리벳(Benjamin Libet) 교수가 수행한 비슷한 종류의 실험은 뇌전도검사(Electroencephalogram, EEG)를 통해 피험자가 시계를 보고 있는 동안 뇌파를 측정해서 피험자가 손가락을 움직이겠다고 결정하기 전보다 수백 밀리초 전에 뇌파에는 이미 손가락 움직임을 결정하는 신호가 나타남을 보여줬다. 하지만 당시 연구는 피험자가 의식적으로 기억하는 시각과 뇌전도에 기록된 시각의 차이가 크지 않았고 그로 인해 실험의 설계와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비판이 있어 왔다. 그에 비해, 하네스 박사팀의 연구는 발전된 뇌영상 도구를 활용하여 둘 간의 좀 더 명확한 차이를 보여줄 수 있었다.
그뒤 2011년 미국 로스엔젤레스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의 신경과학자인 이자크 프라이드(Itzack Fried) 박사는 기존의 연구에서 더 나아가 전극을 환자의 뇌에 직접 이식하는 방법으로 우리 뇌의 특정 영역에 있는 개개 신경세포의 활성을 측정했다. 프라이드 박사는 이들 신경세포들의 활성을 관찰해 환자가 버튼을 누르는 의식적인 판단보다 1초 정도 앞서서 이 환자가 버튼을 누를 결심을 할 것이라는 것을, 더욱이 어느 쪽 버튼을 누를 것이라는 것까지도 80% 확률로 예측할 수 있었다. 프라이드 박사는 이런 현상에 대해 “이미 결정된 판단을 우리 의식이 나중에 받아들이는 것”이라며 의사결정 과정에 우리의 의식은 참여하지 않고 나중에나 통보받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발전된 뇌과학 기술을 이용한 이와 같은 연구들은 의식에 대한 기존의 믿음을 흔들리게 하고 있다. 우리 뇌의 기계적인 작용이 모든 판단을 내려놓고 의식은 나중에 그 결과를 통보 받기만 하는 것이라면 도대체 의식의 역할은 무엇이라는 것일까? 어쩌면 정말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나’라는 주체라고 생각되던 의식은 단지 뇌 활동의 부산물로 생겨나는 어떤 현상이 아닐까? 그리고 ‘나’라는 의식이 우리 몸을 통제한다는 것은 단지 착각이 아닐까? 앞의 연구들로도 도저히 이런 이야기들이 납득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의식의 실체를 엿보게 해주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일어난 행동을 나중에 합리화하는 의식
인간의 뇌는 크게 좌반구와 우반구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두 개의 반구는 뇌량(Corpus callosum)이라는 신경섬유의 다발로 연결되어 있다. 좌반구와 우반구는 기능적으로 서로 다른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둘은 뇌량을 통해 정보를 주고 받으며 서로 소통을 한다. 하지만 중증의 간질환자 가운데에는 치료를 위한 목적으로 뇌량을 절단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뇌량을 절단하고 나면 양 반구는 서로 정보소통이 불가능해져 양쪽이 독립적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렇게 절단된 뇌를 갖고 있는 환자가 나타내는 증상을 분리뇌 증후군(Split-brain syndrome)이라고 하는데, 흥미롭게도 이들이 나타내는 행동이 우리에게 의식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몇몇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런 분리뇌증후군 환자를 통한 의식에 대한 연구는 미국 산타바바라 소재 캘리포니아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마이클 가자니가(Michael Gazzaniga) 박사와 신경생물학자 로저스페리(Roger Sperry)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들의 연구는 분리뇌 환자들의 분리된 반구들이 각각 서로 다른 의식을 갖고 상대방의 영향 없이 별개의 자유의지를 수행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서로 다른 반구들이 행동하는 양상을 관찰하면 눈에 띄는 점을 볼 수 있는데, 우반구가 제공하는 정보가 없을 때 좌반구는 자신이 수행한 행동에 대해 일관된, 그러나 틀린 설명을 지어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앉아 있는 피험자의 우반구만 볼 수 있는 시각영역에 “걸으시오(Walk)”라는 명령어를 보여 주었다고 생각해보자. 피험자는 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벌떡 일어서서는 걸어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피험자에게 “왜 걸어가고 있느냐”라고 물어보면 피험자는 “모르겠다”거나, “그냥”이라거나, “이유 없는 충동 때문에”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콜라를 마시러”라고 대답한다. 이 환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걸으시오”라는 명령에 반응해서 걸어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상황에도 환자는 분명히 “콜라가 마시고 싶어서 걸어갔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우반구한테서 걷는 이유에 대한 적절한 정보를 받지 못한 좌반구 뇌의 의식은 행동에 대해 스스로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 낸다. 그러고는 스스로 그런 행동을 지시한 것이 아닌데도 자신이 걷는 행위를 지시했다고 ‘착각’한다. 이외에도 많은 비슷한 사례를 보여주는 가자니가 박사와 스페서 박사의 어찌 보면 섬뜩해 보이는 분리뇌 환자에 대한 연구는 생각보다 의식이 자기 능력에 대해 상당히 과대평가 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어쩌면 의식은 행동의 주체가 아니라 정말 행동의 부산물이 아닐까?
아직은 불충분한 연구,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
물론 아직까지 이런 질문에 대해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앞에서 소개한 사례들이 의식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꼭 한 가지 방향으로만 해석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의식에 관한 문제는 그 긴 역사만큼이나 많은 관점들이 있고 다양한 주장들이 있어 왔다. 이 글에서 하려는 얘기는 예전에는 오로지 철학자들의 형이상학적인 논의의 대상이었던 의식에 대한 연구가 뇌과학의 발전으로 검증할 수 있는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의식에 대해 선구적인 연구를 하고 있는 캘리포니아공과대학의 신경과학자 크리스토프 코흐(Christof Koch) 박사의 말처럼 과거에는 학술적으로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주제인 의식에 관한 문제가 뇌과학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점점 도전해 볼 수 있는 실체를 가진 대상으로 변화하고 있다.[6] 이번 이야기를 통해 뇌과학 연구가 단순히 편리한 삶이나 유용한 기술만을 생산하기 위해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근본적인 존재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해나가고 있다는 점을 공유해 보고 싶었다. 분량의 한계와 미숙한 글 솜씨 탓에, 좀 더 흥미로운 많은 연구를 다루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적어도 이런 시도가 뇌과학을 좀 더 다채롭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의식에 대한 공부를 하다 인상적이었던 사실 한 가지는 다양한 분야의 뛰어난 학자들이 자신의 업적을 이루고 나서는 노년에 의식에 대한 질문에 빠져드는 여러 사례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의식에 대한 진지한 신경과학적 접근의 원조라고도 할 수 있는 <놀라운 가설(Astonishing hypothesis)>을 저술한 프란시스 크릭(Francis Crick)은 생물학자로서 디엔에이 이중나선 구조의 발견으로 노벨상까지 수상하고는 노년에 신경과학자로 탈바꿈하여 의식에 관한 문제에 집중하다 생을 마쳤다. 시냅스에서 일어나는 신호전달 작용을 연구해 노벨상을 수상한 존 에클스(John Eccles)는 후에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저자인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와 함께 의식과 자유의지에 대한 연구를 했다.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인 의식에 관한 문제는 분명 위대한 과학자들의 매력적인 탐구 대상이었던 듯하다.
덧붙여:
의식에 관한 뇌과학 사례들을 소개하기 위해 글의 서두에 인간 의식에 대한 몇몇 철학적 관점들을 소개했지만 이는 의식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 중에 극히 일부일 뿐이며 이런 관점만이 과학적으로 올바르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두고 싶다. 유물론적 접근만이 과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은 아니며 앞서 소개한 에클스 박사 같은 경우는 이원론을 넘어서 심지어 삼원론적 세계관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노튼: 소프트웨어는 더 빠르게 하드웨어는 더 강하게 더욱 월등하게 만들었소
연구원: 인간은 주저하지 않나요?
노튼: 결정을 내릴 때만
연구원: 그럼 그는 결정을 못 내리나요?
노튼: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일상생활에선 인간이 기계를 통제하니 알렉스가 결정하지 그러나 전투 상황에서 바이저가 내려가면 소프트웨어로 대체되어 기계가 모든 걸 하지 알렉
스는 단지 승객으로 참여할 뿐이야
연구원: 기계가 통제하면 머피의 역할은요? 누가 방아쇠를 당기죠?
노튼: 기계가 싸울 때는 시스템이 신호를 알렉스 뇌에 보내고 생각하게 만들지 지금 알렉스는 자신이 통제한다고 믿지만 아냐 자유 의지에 대한 환상이지
- 로보캅(2014) - 머피의 테스트 장면에서
의식은, 정신은 오로지 물질 작용의 부산물인가, 물질과 다른 이원론적 존재, 아니면 또 다른 그 무엇인가? 내가 결정하는 자유의지라는 것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을, 우리의 물질적인 몸 그 자체가 아닌 우리의 몸에 담겨 있는, 혹은 우리의 몸을 조종하는 비물질적인 존재로 생각한다. 종종 ‘영혼’이라고도 표현되는 이러한 비물질적인 존재는 좀 더 일반적인 표현으로 ‘의식’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의식은 우리가 깨어있을 때 느끼는 우리 자신에 대한 ‘느낌’이다. 우리의 의식은 외부에서 오는 온갖 감각을 인지하고,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지 결정하고,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분노를 느끼는 주체이며 그야말로 우리 ‘자신’이다. 그에 비해 우리의 팔다리나 눈, 코, 입 같은 물질로 구성되는 몸뚱이는 우리 의식이 외부와 소통하기 위해 이용하는 기계장치와 같다. 따라서 공각기동대의 세계에서 인간의 몸을 기계로 완벽하게 구현하고 뇌까지도 그대로 기계로 구현해 기억까지 심어놓을 수 있더라도 인간의 본질인 의식만은 심을 수 없기 때문에 인간 행동을 그대로 모사하는 인간형 로봇과 인간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라고 생각한다).
‘의식의 실체’에 관한 오랜 관심
인간의 의식에 관련한 어렴풋한 의문은 고대부터 있어 왔지만 의식의 실체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논의의 시작은 데카르트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에서 출발해, 인간의 의식이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는 비물질적인 정신이라는 이론을 전개했다. 이에 비해 인간의 육체는 기계적인 방식으로 물리학 법칙을 따르는 물질적인 실체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러한 물질적인 인간의 육체는 비물질적인 정신과 인과적으로 상호작용 할 수 있다. 즉, 간단히 이야기하면 정신이 우리 몸 안에 존재하면서 어떤 방법을 통해 우리 몸을 조종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커피를 마시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려는 정신적 판단이 실제로 팔을 들어올리는 원인이 되고, 또한 뜨거운 커피를 잡았을 때 고통을 느끼는 주체는 우리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상식적이고 많은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과연 물질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정신이란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우리 의식의 실체가 비물질적인 정신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그것이 어디에서 생겨나는지, 어떻게 육체와 상호작용 할 수 있는지 등 더욱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이런 반성과 더불어 발전하게 된 관점이 의식에 대한 유물론적 관점이다. 유물론적 관점이란 모든 현상을 ‘물질’에 근거하여 설명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의식을 생각하면 우리가 느끼는 ‘정신’이라고 하는 대상은 실제로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물질로 이루어진 뇌에서 일어나는 작용의 부산물이다. 우리가 막연히 느끼는 정신적인 감각, 자아, 느낌, 이 모든 것이 신경세포들 간의 정보전달 과정에서 생겨나는 어떤 부산물 같은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관점은 물질적인 뇌와 비물질적인 정신을 따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일원론적 관점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잠깐, 정신적인 부분이 뇌의 신경세포들의 전기적 작용으로 생겨났다고 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왜 이들을 ‘부산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일까? 그 의미는 우리 뇌가 이러한 특성들을 창조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의미일까? 의식에 대한 유물론적 관점 중에 하나인 ‘부수현상론’은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이야기한다.
감각, 자아, 느낌과 같은 것들이 뇌의 작용으로 생겨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이지만 뇌가 기능하기 위해서 이런 특성이 필요하지는 않아 보인다. 불에 손을 가져다 대었을 때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빨리 손을 치우는 행동을 만드는 것은 뇌가 수행해야 하는 기능이지만 왜 데인 고통을 수반해야만 하는 것일까? 손을 불에 가져다 대면 통각세포가 신경신호를 뇌로 전달해서 바로 손을 치우는 일련의 행동을 만들어 내는 운동신경세포들을 활성화하고 이들은 팔의 근육을 움직여 손을 치우게 한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 몸을 지키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기능이긴 하지만 이 과정이 일어나기 위해서 ‘고통’이라는 느낌이 관여돼야만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렇게 생각하면 왠지 우리가 느끼는 정신적인 그런 부분들은 꼭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런 면에서 부수현상론은 우리의 의식이 뇌 작용에서 파생된 부산물과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우리의 직관과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의식이 단지 뇌작용의 부산물이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나’라고 하는 자아의식이 나의 행동을 결정하는 주체가 아니라는 것 아닌가? 즉, ‘나’라는 주체의 자유의지를 의심케 하는 놀라운 결과를 초래한다. 내가 하는 모든 판단의 주인이 ‘나’라는 자아의식이 아니라면 나의 행동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이란 말인가? 하지만 의식에 대한 최신 뇌과학 연구는 언뜻 받아드리기 힘든 이러한 내용이 사실일 수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의 의식이 우리 몸의 주인이라는 것은 허구일 수 있으며 우리가 느끼는 자아라는 것은 어쩌면 생각보다는 하찮은 것일 수도 있다. 다음의 연구들을 살펴보자.
내 행동은 내가 생각하기 전에 결정돼 있다
지난 2007년 독일 베를린의 번스타인 계산신경과학센터의 신경과학자인 존-딜런 하네스(John-DylanHaynes) 박사는 우리의 의식적인 판단을 규명하기 위해 인간을 대상으로 한 가지 실험을 수행했다. 그는 피험자에게 왼쪽과 오른쪽 두 개의 버튼을 주면서 피험자가 어느 한 쪽의 버튼을 눌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눈 앞의 스크린에서 무작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알파벳을 기억하도록 했다. 이 알파벳들은 계속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피험자가 의식적인 결정을 내리는 순간의 시각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하네스 박사는 피험자의 뇌활성을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장치(functional Magnetic ResonanceImaging)를 이용해 기록해서 버튼을 누르겠다는 피험자의 판단이 나타나는 시각을 기록하였다.
하네스 박사팀은 이 실험을 통해, 스크린에 나타나는 알파벳을 기억함으로써 기록된 피험자의 의식적인 판단 시각과 자기공명영상 장치에 나타난 버튼을 누르는 결정과 연관된 뇌 활성시각을 비교했다. 그 결과 놀랍게도 버튼을 누르겠다는 판단을 나타내는 뇌 활성이 피험자 자신이 자각한 판단 시각보다 수 초 가까이 먼저 나타나는 것을 관찰했다. 그 뿐 아니라 뇌 활성 분석은 왼쪽과 오른쪽 버튼 중 어느 버튼을 누를지도 피험자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유의미한 수준으로 예측해 낼 수 있었다. 이 연구결과는 다른 말로 이야기하자면 우리 자신이 의식적인 판단을 내리기 전에 뇌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버튼을 누르는 행동은 나의 의식이 ‘지시’한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을 내린 뇌로부터 ‘통보’를 받은 것이다.
사실 이런 우리 뇌의 무의식적인 결정을 연구한 사람은 하네스 박사가 처음이 아니다. 1980년대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소재 캘리포니아대학의 신경심리학자인 벤자민 리벳(Benjamin Libet) 교수가 수행한 비슷한 종류의 실험은 뇌전도검사(Electroencephalogram, EEG)를 통해 피험자가 시계를 보고 있는 동안 뇌파를 측정해서 피험자가 손가락을 움직이겠다고 결정하기 전보다 수백 밀리초 전에 뇌파에는 이미 손가락 움직임을 결정하는 신호가 나타남을 보여줬다. 하지만 당시 연구는 피험자가 의식적으로 기억하는 시각과 뇌전도에 기록된 시각의 차이가 크지 않았고 그로 인해 실험의 설계와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비판이 있어 왔다. 그에 비해, 하네스 박사팀의 연구는 발전된 뇌영상 도구를 활용하여 둘 간의 좀 더 명확한 차이를 보여줄 수 있었다.
그뒤 2011년 미국 로스엔젤레스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의 신경과학자인 이자크 프라이드(Itzack Fried) 박사는 기존의 연구에서 더 나아가 전극을 환자의 뇌에 직접 이식하는 방법으로 우리 뇌의 특정 영역에 있는 개개 신경세포의 활성을 측정했다. 프라이드 박사는 이들 신경세포들의 활성을 관찰해 환자가 버튼을 누르는 의식적인 판단보다 1초 정도 앞서서 이 환자가 버튼을 누를 결심을 할 것이라는 것을, 더욱이 어느 쪽 버튼을 누를 것이라는 것까지도 80% 확률로 예측할 수 있었다. 프라이드 박사는 이런 현상에 대해 “이미 결정된 판단을 우리 의식이 나중에 받아들이는 것”이라며 의사결정 과정에 우리의 의식은 참여하지 않고 나중에나 통보받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발전된 뇌과학 기술을 이용한 이와 같은 연구들은 의식에 대한 기존의 믿음을 흔들리게 하고 있다. 우리 뇌의 기계적인 작용이 모든 판단을 내려놓고 의식은 나중에 그 결과를 통보 받기만 하는 것이라면 도대체 의식의 역할은 무엇이라는 것일까? 어쩌면 정말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나’라는 주체라고 생각되던 의식은 단지 뇌 활동의 부산물로 생겨나는 어떤 현상이 아닐까? 그리고 ‘나’라는 의식이 우리 몸을 통제한다는 것은 단지 착각이 아닐까? 앞의 연구들로도 도저히 이런 이야기들이 납득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의식의 실체를 엿보게 해주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일어난 행동을 나중에 합리화하는 의식
인간의 뇌는 크게 좌반구와 우반구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두 개의 반구는 뇌량(Corpus callosum)이라는 신경섬유의 다발로 연결되어 있다. 좌반구와 우반구는 기능적으로 서로 다른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둘은 뇌량을 통해 정보를 주고 받으며 서로 소통을 한다. 하지만 중증의 간질환자 가운데에는 치료를 위한 목적으로 뇌량을 절단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뇌량을 절단하고 나면 양 반구는 서로 정보소통이 불가능해져 양쪽이 독립적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렇게 절단된 뇌를 갖고 있는 환자가 나타내는 증상을 분리뇌 증후군(Split-brain syndrome)이라고 하는데, 흥미롭게도 이들이 나타내는 행동이 우리에게 의식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몇몇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런 분리뇌증후군 환자를 통한 의식에 대한 연구는 미국 산타바바라 소재 캘리포니아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마이클 가자니가(Michael Gazzaniga) 박사와 신경생물학자 로저스페리(Roger Sperry)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들의 연구는 분리뇌 환자들의 분리된 반구들이 각각 서로 다른 의식을 갖고 상대방의 영향 없이 별개의 자유의지를 수행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서로 다른 반구들이 행동하는 양상을 관찰하면 눈에 띄는 점을 볼 수 있는데, 우반구가 제공하는 정보가 없을 때 좌반구는 자신이 수행한 행동에 대해 일관된, 그러나 틀린 설명을 지어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앉아 있는 피험자의 우반구만 볼 수 있는 시각영역에 “걸으시오(Walk)”라는 명령어를 보여 주었다고 생각해보자. 피험자는 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벌떡 일어서서는 걸어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피험자에게 “왜 걸어가고 있느냐”라고 물어보면 피험자는 “모르겠다”거나, “그냥”이라거나, “이유 없는 충동 때문에”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콜라를 마시러”라고 대답한다. 이 환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걸으시오”라는 명령에 반응해서 걸어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상황에도 환자는 분명히 “콜라가 마시고 싶어서 걸어갔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우반구한테서 걷는 이유에 대한 적절한 정보를 받지 못한 좌반구 뇌의 의식은 행동에 대해 스스로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 낸다. 그러고는 스스로 그런 행동을 지시한 것이 아닌데도 자신이 걷는 행위를 지시했다고 ‘착각’한다. 이외에도 많은 비슷한 사례를 보여주는 가자니가 박사와 스페서 박사의 어찌 보면 섬뜩해 보이는 분리뇌 환자에 대한 연구는 생각보다 의식이 자기 능력에 대해 상당히 과대평가 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어쩌면 의식은 행동의 주체가 아니라 정말 행동의 부산물이 아닐까?
아직은 불충분한 연구,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
물론 아직까지 이런 질문에 대해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앞에서 소개한 사례들이 의식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꼭 한 가지 방향으로만 해석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의식에 관한 문제는 그 긴 역사만큼이나 많은 관점들이 있고 다양한 주장들이 있어 왔다. 이 글에서 하려는 얘기는 예전에는 오로지 철학자들의 형이상학적인 논의의 대상이었던 의식에 대한 연구가 뇌과학의 발전으로 검증할 수 있는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의식에 대해 선구적인 연구를 하고 있는 캘리포니아공과대학의 신경과학자 크리스토프 코흐(Christof Koch) 박사의 말처럼 과거에는 학술적으로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주제인 의식에 관한 문제가 뇌과학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점점 도전해 볼 수 있는 실체를 가진 대상으로 변화하고 있다.[6] 이번 이야기를 통해 뇌과학 연구가 단순히 편리한 삶이나 유용한 기술만을 생산하기 위해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근본적인 존재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해나가고 있다는 점을 공유해 보고 싶었다. 분량의 한계와 미숙한 글 솜씨 탓에, 좀 더 흥미로운 많은 연구를 다루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적어도 이런 시도가 뇌과학을 좀 더 다채롭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의식에 대한 공부를 하다 인상적이었던 사실 한 가지는 다양한 분야의 뛰어난 학자들이 자신의 업적을 이루고 나서는 노년에 의식에 대한 질문에 빠져드는 여러 사례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의식에 대한 진지한 신경과학적 접근의 원조라고도 할 수 있는 <놀라운 가설(Astonishing hypothesis)>을 저술한 프란시스 크릭(Francis Crick)은 생물학자로서 디엔에이 이중나선 구조의 발견으로 노벨상까지 수상하고는 노년에 신경과학자로 탈바꿈하여 의식에 관한 문제에 집중하다 생을 마쳤다. 시냅스에서 일어나는 신호전달 작용을 연구해 노벨상을 수상한 존 에클스(John Eccles)는 후에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저자인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와 함께 의식과 자유의지에 대한 연구를 했다.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인 의식에 관한 문제는 분명 위대한 과학자들의 매력적인 탐구 대상이었던 듯하다.
덧붙여:
의식에 관한 뇌과학 사례들을 소개하기 위해 글의 서두에 인간 의식에 대한 몇몇 철학적 관점들을 소개했지만 이는 의식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 중에 극히 일부일 뿐이며 이런 관점만이 과학적으로 올바르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두고 싶다. 유물론적 접근만이 과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은 아니며 앞서 소개한 에클스 박사 같은 경우는 이원론을 넘어서 심지어 삼원론적 세계관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남자들의 '음경뼈'는 왜 사라졌을까
"우리 아이 무릎이 이상해요."
주부 A씨는 어느 날 막 기어 다니기 시작하는 젖먹이 아들의 무릎을 만져보고 깜짝 놀랐다.
기어 다니는 아들의 무릎이 까질까 봐 염려하던 차에 무릎을 살폈는데, '이상'이 발견된 거였다. 무릎 뼈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A씨는 소아과 의사인 친척으로부터 정상이라는 설명을 듣고 마음을 놓았다. 의사는 "유아의 무릎 뼈는 어른과 달리 연골이어서 두드러지지 않는다"고 말해줬다.
어린 아이들은 단순히 어른의 축소판이 아니다. 뼈는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이다. 유아들의 뼈 숫자는 300개 안팎이다. 반면 어른들은 206개로 유아들보다 훨씬 그 숫자가 적다. 자라면서 뼈들이 하나로 융합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람이 태어나면 머리뼈만 해도 40개가 넘는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두개골의 숫자는 28개로 줄어든다.
축소
태아 때 엉치뼈는 5개가 기본이다. 하지만 성인들은 1개뿐이다. ⓒ wiki commons
엉치뼈도 마찬가지다. 태아 때 엉치뼈는 5개가 기본이다. 하지만 성인들은 1개뿐이다. 꼬리뼈는 태아마다 3~6개 정도로 좀 다르지만, 성인이 되면 결국 하나로 합쳐진다. 뼈는 단단하고 우리 몸에서 가장 딱딱한 부위처럼 인식된다. 하지만 뼈의 숫자만큼은 제법 탄력성 있게 변하는 것이다.
동양인, 아프리카인, 서양인을 가릴 것 없이 양상은 비슷하다. 즉, 태아나 어릴 때는 뼈 개수가 월등 많았다가, 어른이 되면 '기본' 206개로 대폭 줄어든다. 물론 인체의 다른 부위처럼 선천적으로 뼈 숫자가 다른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한 예로, 매우 드물지만 갈비뼈가 한 쌍 더 있는 사람도 있다.
뼈는 완전히 자라 최고로 단단해지는 데 보통 25년쯤 걸린다. 골절 같은 부상으로부터 어린이나 청소년이 중장년층보다 더 잘 회복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성인 뼈의 기본 숫자인 206은 그러나 평생 유지된다고 장담할 수 없다. 사람에 따라서는 나이가 들면서 다시 뼈 숫자가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 먹으면 생길 수 있는 뼈... 종자뼈
뼈 숫자가 늘어나는 건 기존의 뼈가 둘 혹은 셋으로 나눠지기 때문은 아니다. 없던 뼈가 생겨나는 탓이다. 나이를 먹으며 생길 수 있는 대표적인 뼈가 엄지 손가락 근처와 오금 쪽에 생기는 '종자뼈'다. 힘줄이 변해 작은 콩알 같은 뼈가 생기는 것이다. 식물의 종자를 연상 시킨다 해서 이렇게 부른다.
엄지 손가락 부위와 오금 쪽의 종자뼈는 기계적으로 과도한 스트레스가 반복적으로 주어질 때 생길 가능성이 높다. 평생 손으로 밭일 등을 한 시골의 노인들 가운데서 심심치 않게 엄지 근처 종자뼈가 발견되는 건 이런 이유에서이다.
엄지 손가락과 마찬가지로 엄지 발가락 근처도 종자뼈가 흔히 생긴다. 하이힐을 오랫동안 신고 다니는 여성 가운데 엄지 발가락 근처에 심각한 트러블이 있다면 종자뼈의 위치가 어긋나 있을 가능성도 높다. 엄지 발가락 근처 종자뼈 염증은 작은 콩알만하다고 무시할 수 없는 대표적인 질환이다. 고질적이고 치료도 쉽지 않다.
아주 옛날에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대인, 즉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없는 뼈도 있다. 대표적인 게 음경뼈이다. 인류학자들은 호모 사피엔스 전에 출현한 호모 에렉투스만 해도 음경뼈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음경뼈란 말 그대로 남성 혹은 수컷의 음경에 음경 방향을 따라 자리한 뼈이다. 음경뼈가 없다는 점에서 인류는 동물 가운데 매우 특이한 경우다. 대부분의 고등동물 수컷은 음경뼈가 있다.
인간과 생물학적으로 가장 닮은 침팬지만 해도, 길이 1센티미터가 좀 못 되는 음경뼈가 있다. 침팬지는 전체 뼈의 숫자나 각각의 형태 또한 사람과 상당히 유사하다. 침팬지에 이어 사람과 비슷한 구석이 많은 고릴라도1센티미터가 넘는 음경뼈를 갖고 있다. 바다 코끼리의 음경뼈는 50센티미터 이상인 예도 흔하다. 요컨대, 인간과 생물학적으로 근연관계가 먼 동물일수록 음경뼈가 길다.
인간의 음경뼈 '소실'은 일부일처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파트너가 정해져 있는 만큼 잦은 섹스의 기회를 가질 수 있고, 이에 따라 자손을 퍼뜨릴 확률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자나 늑대 같은 동물들은 평생에 걸친 교미 횟수가 인간보다 적을 것으로 짐작된다. 음경뼈는 동물들의 짝짓기 시간을 연장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데, 교미 횟수가 적은 동물들에게는 교미 시간이 길면 그만큼 후손을 얻을 확률을 높일 수 있다. 뼈의 발달과 숫자에 영향을 미치는 동물마다의 생물학적 특성에는 성행태까지도 예외 없이 포함되는 것이다.
주부 A씨는 어느 날 막 기어 다니기 시작하는 젖먹이 아들의 무릎을 만져보고 깜짝 놀랐다.
기어 다니는 아들의 무릎이 까질까 봐 염려하던 차에 무릎을 살폈는데, '이상'이 발견된 거였다. 무릎 뼈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A씨는 소아과 의사인 친척으로부터 정상이라는 설명을 듣고 마음을 놓았다. 의사는 "유아의 무릎 뼈는 어른과 달리 연골이어서 두드러지지 않는다"고 말해줬다.
어린 아이들은 단순히 어른의 축소판이 아니다. 뼈는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이다. 유아들의 뼈 숫자는 300개 안팎이다. 반면 어른들은 206개로 유아들보다 훨씬 그 숫자가 적다. 자라면서 뼈들이 하나로 융합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람이 태어나면 머리뼈만 해도 40개가 넘는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두개골의 숫자는 28개로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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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아 때 엉치뼈는 5개가 기본이다. 하지만 성인들은 1개뿐이다. ⓒ wiki commons
엉치뼈도 마찬가지다. 태아 때 엉치뼈는 5개가 기본이다. 하지만 성인들은 1개뿐이다. 꼬리뼈는 태아마다 3~6개 정도로 좀 다르지만, 성인이 되면 결국 하나로 합쳐진다. 뼈는 단단하고 우리 몸에서 가장 딱딱한 부위처럼 인식된다. 하지만 뼈의 숫자만큼은 제법 탄력성 있게 변하는 것이다.
동양인, 아프리카인, 서양인을 가릴 것 없이 양상은 비슷하다. 즉, 태아나 어릴 때는 뼈 개수가 월등 많았다가, 어른이 되면 '기본' 206개로 대폭 줄어든다. 물론 인체의 다른 부위처럼 선천적으로 뼈 숫자가 다른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한 예로, 매우 드물지만 갈비뼈가 한 쌍 더 있는 사람도 있다.
뼈는 완전히 자라 최고로 단단해지는 데 보통 25년쯤 걸린다. 골절 같은 부상으로부터 어린이나 청소년이 중장년층보다 더 잘 회복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성인 뼈의 기본 숫자인 206은 그러나 평생 유지된다고 장담할 수 없다. 사람에 따라서는 나이가 들면서 다시 뼈 숫자가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 먹으면 생길 수 있는 뼈... 종자뼈
뼈 숫자가 늘어나는 건 기존의 뼈가 둘 혹은 셋으로 나눠지기 때문은 아니다. 없던 뼈가 생겨나는 탓이다. 나이를 먹으며 생길 수 있는 대표적인 뼈가 엄지 손가락 근처와 오금 쪽에 생기는 '종자뼈'다. 힘줄이 변해 작은 콩알 같은 뼈가 생기는 것이다. 식물의 종자를 연상 시킨다 해서 이렇게 부른다.
엄지 손가락 부위와 오금 쪽의 종자뼈는 기계적으로 과도한 스트레스가 반복적으로 주어질 때 생길 가능성이 높다. 평생 손으로 밭일 등을 한 시골의 노인들 가운데서 심심치 않게 엄지 근처 종자뼈가 발견되는 건 이런 이유에서이다.
엄지 손가락과 마찬가지로 엄지 발가락 근처도 종자뼈가 흔히 생긴다. 하이힐을 오랫동안 신고 다니는 여성 가운데 엄지 발가락 근처에 심각한 트러블이 있다면 종자뼈의 위치가 어긋나 있을 가능성도 높다. 엄지 발가락 근처 종자뼈 염증은 작은 콩알만하다고 무시할 수 없는 대표적인 질환이다. 고질적이고 치료도 쉽지 않다.
아주 옛날에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대인, 즉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없는 뼈도 있다. 대표적인 게 음경뼈이다. 인류학자들은 호모 사피엔스 전에 출현한 호모 에렉투스만 해도 음경뼈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음경뼈란 말 그대로 남성 혹은 수컷의 음경에 음경 방향을 따라 자리한 뼈이다. 음경뼈가 없다는 점에서 인류는 동물 가운데 매우 특이한 경우다. 대부분의 고등동물 수컷은 음경뼈가 있다.
인간과 생물학적으로 가장 닮은 침팬지만 해도, 길이 1센티미터가 좀 못 되는 음경뼈가 있다. 침팬지는 전체 뼈의 숫자나 각각의 형태 또한 사람과 상당히 유사하다. 침팬지에 이어 사람과 비슷한 구석이 많은 고릴라도1센티미터가 넘는 음경뼈를 갖고 있다. 바다 코끼리의 음경뼈는 50센티미터 이상인 예도 흔하다. 요컨대, 인간과 생물학적으로 근연관계가 먼 동물일수록 음경뼈가 길다.
인간의 음경뼈 '소실'은 일부일처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파트너가 정해져 있는 만큼 잦은 섹스의 기회를 가질 수 있고, 이에 따라 자손을 퍼뜨릴 확률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자나 늑대 같은 동물들은 평생에 걸친 교미 횟수가 인간보다 적을 것으로 짐작된다. 음경뼈는 동물들의 짝짓기 시간을 연장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데, 교미 횟수가 적은 동물들에게는 교미 시간이 길면 그만큼 후손을 얻을 확률을 높일 수 있다. 뼈의 발달과 숫자에 영향을 미치는 동물마다의 생물학적 특성에는 성행태까지도 예외 없이 포함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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