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10일 화요일

조선시대의 부동산과 집값(영정조 시기)

"나이가 서른인데, 집 한 채 마련도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기 이를데 없다. 내 집 마련은 참 어렵다. 모두가 이렇게 어렵다면 대체 누가 집을 살 수 있다는 말인가?"


유만주(兪晩柱, 1755~1788)가 쓴 일기. 흠영(欽英)


유만주의 아버지는 벼슬을 하던 지방관리로서 풍족한 살림살이를 해왔다.

1782년 8월, 아버지가 해주목 판관으로 부임하게 되자 유만주는 1784년까지 해주와 서울을 왕복하면서 부친 대신 집안일을 돌본다. 해주목은 풍요로운 곳이라 부친이 서울로 보내주는 생활비와 물품도 넉넉해졌고 이에 집안 형편이 전보다 훨씬 나아졌음을 일기로 묘사하고 있다.

1783년에는 이사를 결심하는데 1년여간 한양 남촌의 여기저기에 집을 보러 다니지만 공부만 하다보니 물정에 밝지 못한 그를 두고 집주릅이 여러차례 농간을 부려 자꾸 무산되다가 1784년 8월에 이르러서야 명동에 새집을 가지게 된다. 이때 어릴 때부터 공부에만 매진해 왔지만 번번히 과거에 낙방만 하고 집안일에 치여 자존감이 낮아지고 있던 그에게 명동 새집의 정원은 큰 위안을 주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원을 직접 정돈하고 초목을 가꾸었으며 정원에 있는 초목들의 장부를 직접 만들었다. 그리고 집에 있는 방과 창문과 정원에 있는 나무들에게 자신이 지은 이름을 하나하나 붙여주고 정원을 "나의 세계"라 일컬으며 군위에 있던 때 다음으로 생애 두번째의 행복한 시절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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