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9일 월요일

한국사의 완성된 체제는 조선후기 국가사회주적 재분배에 바탕을 둔 소농경제

https://www.youtube.com/watch?v=HPdGZejWIuc&list=WL&index=40


ㅇ 한국의 전통 역사교과서는 서유럽의 근대 발전 체제의 틀에 꿰어 맞추어 조선의 진보상황을 설명하려다보니 길을 잃어버렸다


ㅇ 조선 후기의 사회는 서양 근데 발전양상의 모습과 전혀 다르며 정의상 근대와는 거리가 매우 멀다


ㅇ 조선후기 18세기는 한국 전통문화의 완성으로서의 체제라고 정의할 수 있다


ㅇ 이 시기 숙종, 영조, 정조 등은 높은 학문 수준을 가지고 조선의 마지막 부흥을 이뤘다

- 당시 성리학적 발전이란 서양과 다르다

- 성균(成均)이 왕정의 치세이념으로서 경제의 부족함이 아닌 평등함을 더 신경쓴다

- 이에 따라 18세기는 국가적 재분배에 바탕을 둔 소농경제 사회다

- 이러한 시스템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ㅇ 이는 대한민국 경제체제의 저변을 관류하는 장기의 역사다


ㅇ 조선후기는 다양한 문헌이 남아 있으므로 당시 체제를 쉽게 알 수 있다

- 당시 하나의 동리에는 소농, 장시, 창고가 반드시 있다. 이는 18세기 핵심 체제대

- 이중 특히 창고가 중요하다. 

- 소농은 기본적으로 자급자족(70~80%)이다. 남자는 밭갈고 여자는 베를 짠다

- 장시에서 소금, 철(농기구), 토기, 생선(제사용), 동전(세금납부), 면포를 유통했다. 장시간 물건을 유통하는 상인이 있었다.

- 장시 거래의 2/3는 현지주민간 물물교환, 1/3은 상인들이 장시간 물건거래를 했다

- 철기, 토기 같은 필수 물품은 장시 외에도 방문거래와 주문생산을 했다

- 농가당 경작규모는 0.5ha로 영세하다

- 소작이라는 말보다는 당시 쓰였던 단어인 소농이라는 단어가 적절하다


ㅇ 환곡 : 국가사회주의 소농경제의 핵심

- 18세기말 곡물저장량은 쌀 670만석으로 연간 총생산량의 최소 20%, 이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 엄청나게 많은 양

- 봄에는 저장량의 70%를 분배(기아 해소, 종자 용)

- 전세계 유례없는 창고 저장 및 분배 시스템

- 조선왕조는 저장 창고 유지 관리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으며 각고을 관리의 주요업무는 창고지기에 다름 아님

- 작은 국토에서 대외무역없는 폐쇄경제에서는 이러한 저장시스템이 더 합리적


ㅇ 이러한 국가적 저축 및 보험체제는 생산충격으로부터 안정과 번영을 지켜주었다

ㅇ 반대로 가을 수확기에 국가는 불출했던 곡물을 대규모로 회수받았는데(흉년에도 80%가량을 수탈) 이는 사적 축적을 억압했다


ㅇ 이러한 시스템에서 농민은 굳이 생산량을 증가시키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   


ㅇ 결과적으로 왕조는 국가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며 균일한 체제를 유지했지만 백성은 점차 가난해졌음. 이는 현 공산주의 시스템과 비슷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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