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30일 수요일

[안계환의 역사 인문학]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많은 기업에서 인문학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다. 삼성그룹에서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 현대자동차 그룹에서는 역사적 인식을 갖춘 인재를 채용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각 기업의 직원 연수 과정에서도 인문학 특강은 반드시 포함시킨다. 하지만 국내 뿐만 아니라 미국 기업에서도 인문학 전공은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 미국에서 가장 좋은 일자리의 대부분은 이공계고 뛰어난 이공계 인력을 찾기 위해 노력중이다. 각 기업에서는 인문학 소양을 갖춘 사람을 원하는 것이지 인문학 전공자를 원하는게 아니다.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을 추앙했다고 흔히 이야기하지만 이는 탁월한 테크놀러지와 결합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기술을 모르는 인문학자를 데려다가 기업에서 쓸 생각은 전혀 없다.

인문학 만큼 말도 많고 오해도 많은게 별로 없다. 대부분의 인문학 특강은 철학전공 연구자들이 하거나 인문학 독서에서도 읽기 어려운 서양 문학작품에 치우쳐 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기업이 원하는 인문학과 인문학 전공자들이 제공하는 인문학은 상당히 다르다. 그러기에 말도 많고 인문학이 기업에서 생각보다 효용 가치가 낮은 것이다.

또 최근신세계 그룹에서 올해 20억원을 투자해 인문학 인력을 우대하겠다고 나서는 데에서는 겉으로 보여지는 것과 실제 현실은 매우 차이가 있다. 신세계가 원하는 것은 국내 대학의 인문학을 전공한 전공자를 필요로 하는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신의 전공을 바탕으로(어떤 전공이든지) 세상을 통섭적으로 생각하고 미래를 그려갈 수 있는 지혜의 소유자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배출되는 많은 인력들이 세상을 통섭적으로 생각하는데 있어서 매우 약하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교육과정이 지나치게 세분화되어 있고, 또 교육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전공과는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하는데 그저 높은 학점을 따는데만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기업에서 일하는 근로자들도 그렇다. 언제까지 자신은 실무자에 머물러 있을 것처럼 나에게 주어진 업무에만 목숨걸려고 한다. 내가 개발한 제품만 바라보고 정해진 루틴대로 일을 처리하려고만 한다. 미래를 바라보는 통찰력이 부족한 것이다.

여기에 인문학적 소양이란 용어가 등장한다. 인문학적 소양이란 인문대학 과정에서 키워줄 수 있는게 아니다. "정해진 것, 주어진 것, 그렇다고 말 하는 것" 등등을 부정할 수 있고 그것들을 융합하고 새로운 사고를 통해서 무언가 나름의 방향성을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게 인문학적 소양이다. 경영자들은 그래서 직원들의 좁은 마인드를 확대해 보려고 인문학을 접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많은 오해가 있고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인문학에 대한 정의와 영역을 너무 좁게 설정한 때문이다. 흔히 인문학은 문사철(文史哲)이라고 말하지만 이 말이 생긴게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아직 100년도 안된 1920년대에 생긴 말이다. 인문학은 인간이 문명을 만들면서부터 생겼다. 그런데 겨우 100년된 정의를 가지고 수 천년된 인문학을 정의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인문학을 정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라파엘로의 그림 "아카데미아" 를 들여다 보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인문학의 범주가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알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다. 하늘을 가르키며 이상사회를 이야기했던 플라톤이 있고 땅을 보며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늘날 '철학자' 라고 정의된다. 하지만 오늘날의 철학자인 강신주나 김용옥, 최진석과는 분야가 매우 다르다. 과거의 그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정치가였고, 수학자였고, 과학자였다. 그저 세상의 관심있는 모든 걸 다룬 사람들이라고나 할까?

아카데미아 그림에는 더 다양한 인물들이 존재한다. 유일신 사상을 만들어 낸 조로아스터, 과학자 프톨레마이오스, 수학자이며 음악가이며 교주이기도 했던 피타고라스, 기하학의 완성자 유클리드, 헤라클레이토스도 있다. 하지만 이들도 오늘날 용어로 수학자,과학자, 철학자 라고 정의하기에는 그들이 생각하던 범주가 매우 달라서 무리가 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의 정의는 "인류문명학" 이다. 인류 문명이 탄생하고 발전된 이래 사람들의 생각은 발전하고 인문학을 통해 가치를 높여왔다. 따라서 인류 문명의 발자취를 찾아 내고 그 속에서 인간이 살아야 하는 가치, 인간이 영유해야 할 행복, 인간이 느껴야 할 삶의 의미 등을 찾아낼 수 있다. 따라서 인문학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지나치게 어렵거나 멀리 있는 멋있는 존재일 필요가 없다. 그저 내 가까이에서, 삶 속에서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낼 수 있다. 물론 문사철이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데는 동의할 수 있으나 여기에 예술,종교,과학등도 포함시켜야 한다. 과학을 인식하는 가치철학도 매우 중요한 인문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한가지 중요한 점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 인류 문명학이라고 정의해 보았을 때 인류 문명의 역사를 간과할 수 없다. 예술을 다루더라도 예술의 역사적 기반을 이해하는게 좋다. 철학을 하더라도 그 역사적 변화와 현재의 시사점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기에 모든 인문학은 역사를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왔던 각 분야의 역사를 모르고서 미래를 이야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경련에서 진행하는 CEO과정에서도 역사CEO 특강을 포함시켜 진행하고 있을 정도로 기업경영자와 역사와의 관련성은 매우 높다. 기업에서는 사철문예종의 역사를 매우 중시한다. 경영은 역사적 리더들의 의사결정과 매우 흡사하다. 전략, 마케팅, 조직 등이 모두 역사에서 유래된 용어다. 기업에 관심이 있고 기업에서 원하는 인문학에 관심을 둔다면 역사에 대한 공부와 이해는 필수다. 하지만 역사도 지나치게 깊이 있는 것은 연구자들의 몫이다. 우리는 넓은 의미에서 통찰적 역사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세계사적 흐름은 무엇인지, 국가간의 경쟁에 있어서 역사적 이유는 무엇인지를 캐내 보는 것도 경영인에게 큰 의미가 있다.

오늘은 인문학은 무엇인가 에 대해서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 보았다. 결론적으로 인문학은 어려운게 아니고 어려울 필요도 없다. 삶 속에서 즐기고 느끼고 나의 삶에서 어떤 가치를 얻을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는게 중요하다.

- 안계환의 역사인문학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오웰과 헉슬리가 예상한 디스토피아


누구라 할 거 없이 인간은 돈이 생기면 졸부처럼 행동한다

캘리포니아대학교 폴피프(Paul Piff)교수는 미국내 소득불균형 심화와 연관된 행동의 변화를 탐구한 일련의 실험을 이끌었습니다.

피프교수는 부와 꼴사나운 행동 사이의 연결관계를 발견했습니다. 한 실험에서 피프교수는 탁자 위에 사탕 단지가 있는 방에 한 명씩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사탕은 그 다음 실험에 참가할 아이들을 위한 거라고 말하면서 몇 개 정도는 먹어도 되지만 너무 많이 먹지는 말라고 당부합니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참가자들은 가난한 참가자에 비해 두 배나 많은 아이들 몫의 사탕을 먹었습니다.

피프교수의 연구진은 상금을 걸어놓고 주사위를 굴려 나오는 숫자를 얼마나 정직하게 보고하는지 시험했습니다. 소득 수준이 높은 사람들($150,000-$200,000)은 $50 상금을 타기 위해 소득 수준이 낮은 사람들에 비해 네 배나 더 정직하지 못한 보고를 했습니다.

부의 어떤 점이 사람들의 행동 방식을 바꾸는 걸까요?

피프교수는 사무실에서 부자가 된 듯한 느낌만 주는 실험도 했습니다. 두 명의 피험자가 모노폴리 게임을 하도록 했습니다. 한 사람이 더 부유한 환경에서 게임을 시작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1,000를, 부유한 사람은 $2,000를 받고 시작합니다. 가난한 이는 낡은 신발을, 부자는 롤스로이스를 말로 가지고 시작합니다. 또한 부자만 주사위를 두 개씩 굴리도록 했습니다. 같은 수가 나오면 한 번 더 던질 수 있게 되죠. 결국 게임은 부자가 이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부유한 피험자는 임의로 결정했지만 게임이 끝나고 부유한 피험자에게 게임을 이길 만한 자격이 있는지 묻자, 대답은 이구동성으로 “그렇다”였습니다. 결국 게임 시작 전에 누가 더 많은 돈으로 시작할지 결정한 동전 던지기가 근본 원인이었지만, 이들은 성공을 자신의 몫으로 본 것입니다. 이렇게 간단한 게임에서도, 개개인이 부유해질수록 성공을 자신의 몫으로 돌리는 경향이 늘고, 성공에 기여한 다른 모든 변수는 무시한다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부유하게 출발한 피험자들은 탁자 위에 놓은 프레첼을 더 먹었습니다. 입안 가득 음식을 넣고 말하기 때문에 좀 더 무례한 모습을 보였죠. 이에 비해 심리학적으로 가난한 이들은 보다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다른 사람을 더 잘 돕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이는 부자를 가난하게 느끼게 하고, 가난한 사람을 부자처럼 느끼게 한 후 진행한 일련의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로 입증되었습니다.

경제적 불균형은 결국 자신이 도달한 경제적인 수준을 합리화하는 행동을 낳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캘리포니아주에서는 횡단보도에서 보행자가 건널 수 있도록 모든 차량은 일단 정지하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이 동영상의 도입부에는 BMW나 포르쉐, 벤츠를 모는 부유한 사람들이 법을 어기고 심지어 상향등까지 켜가며 보행자를 위협하고 먼저 지나가는 모습이 나옵니다.

물론 개개인의 성향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피프교수는 실제 부자라도 심리적으로 가난한 입장에서 실험에 참가하도록 하면 훨씬 더 관대하고 남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며, 가난해도 심리적으로 부유한 입장으로 참가하면 졸부의 행동을 보인다고 강조합니다.



원문 – http://bigthink.com/60-second-reads/just-add-money-see-what-happens

리더의 공감 결핍 증후군,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


아래는 The Signs of a Leader’s Empathy Deficit Disorder 번역.

당신의 조직에 있는 두 명의 사람을 떠올려 봅시다.. 한 명은 당신보다 하나나 두 직급위에 있는 사람이며 다른 한 명은 바로 당신 아래 직급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두 명에게 동시에 이메일을 받았다고 상상해보세요. 그 두 개의 이메일에 답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아마도 당신은 당신보다 높은 사람에게 받은 이메일에는 바로 답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받은 이메일은 나중에 짬이 날때 답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응답시간의 차이는 조직에서 서열을 나타내는데 이용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좀 더 일반적인 법칙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권력이 쎈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더 기울이며 힘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적게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권력과 집중력간의 관계는 미팅에서 처음으로 만난 두 사람의 접촉모습을 들여다보면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단지 첫 5분간의 대화만을 보더라도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 대해 눈을 덜 마주치거나 고개를 덜 끄떡이는 식으로 관심을 덜 기울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부유한 집안출신과 가난한 집안출신의 대학생간에도 나타납니다.

이런 이메일응답시간 분석은 엔론의 몰락과 함께 당시 모든 직원들의 이메일데이터베이스가 증거자료로 공개되면서 가능하게 됐습니다. 이메일분석을 통한 조직에서의 소셜네트워크 분석프로젝트는 컬럼비아대학이 진행했으며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것으로 판명됐습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정도가 권력서열을 따라갈 때 공감능력도 영향을 받게 됩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서로에게 이혼이나 인생에서의 굴곡에 대해서 털어놓을때 상대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사람들이 더 많은 공감을 표현합니다.  또 사람의 얼굴표정에서 감정을 읽어내는 공감능력에 있어서도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보다 더 뛰어납니다.

사회생활에서 나타나는 이런 사실은 리더들에게 하나의 위험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효과적인 리더들은 설득이나 영향력발휘, 동기부여, 경청, 팀워크, 협업 같은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공감능력에에는 3가지종류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인지적(cognitive) 공감능력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지, 즉 타인의 세계관에 대해서 느낄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당신이 전달해야 할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감정적(emotional) 공감능력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즉시 공명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로는 감정이입적 관심(empathic concern) 공감능력입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것을 도와주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을 표현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리더십 공감능력결핍의 징후는 부하를 대하는 리더의 행동에서 가장 잘 나타납니다.  여기 몇개의 공통적인 징후가 있습니다.

1. 부하가 보기에 말이 안되는 지시사항이나 메모는 보스가 직원들의 위치에서 세상을 보지 못하고 직원들이 납득이 될만한 수준의 말로 풀어내는데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다른 낮은 인지공감능력의 징후는 막상 그 목표를 수행해야할 직원들에게 납득이 가지도 않고 말도 안되는 전략이나 계획, 목표입니다.

2. 부하들을 당혹스럽게(upset) 하는 공식발표나 명령입니다. 이것은 보스가 직원들의 감정적인 현실을 제대로 읽지 못하며 부하들에게 대해서 무지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3. 직원들이 힘들어하는 일에 대해 보스가 차갑게 대하거나 무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감정이입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부하들은 보스가 차갑고 무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방어적이 됩니다. 예를 들어 혁신을 위해 모험을 감수하는 것을 꺼리게 됩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리더일수록 공감결핍증에 빠질 위험이 큽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지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솔직한 피드백을 주는 사람의 수는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특히 리더가 주위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한 솔직한 피드백을 주기를 꺼리게 됩니다.

공감결핍증을 피하는 방법중 하나는 하버드경영대학원의 빌조지가 말하는 ‘트루노스그룹’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그룹은 당신의 지인들에게 솔직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또 하나는 당신에게 격의없이 대할 수 있는 (아마도 회사바깥의) 동료들의 비공식그룹을 만들어서 정기적으로 접촉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조직안에서 신뢰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회사안을 일부러 어슬렁거리며 직원들과 친밀해지기 위한 가벼운 시간을 갖는 친화력이 높은 (High-contact) 리더들은 공감결핍으로부터 면역력을 갖고 있습니다. 직원들이 (보스에게)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은 (그래도 무사할 것이라는) 회사분위기를 만드는 리더들도 마찬가지로 면역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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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답글

17개의 답글

estima7
2013년 12월 8일 at 4:48 오후
응답
이유를 논하기 전에 전제로 말씀하신 “보통, 공감결핍인 사람들이 공감능력이 있는 사람들보다 리더 자리에 많은지”가 실제로 그런지를 검증하는게 먼저인것 같습니다. “보통 그렇지 않느냐?” 정도로는 비약이 심합니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망명객
2013년 12월 8일 at 5:07 오후
응답
어디서 본 글인데, 이런 저런 조직이나 상사에 대한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나중에 자기가 저 자리에 가면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는데 힘겹게 그 자리까지 가면서 많이 물들고 조직에 순응해서 아랫 사람의 위치에 있을때 가졌던 생각을 잊는 경우가 많을 거라고 합니다. 위치/상황에 따라 다른 입장을 지녀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실제 그 자리에 가 보니 그럴만 하다하고 옛 상사의 행동을 이해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이 잊어버렸을 거라는 말에도 일견 공감이 되네요

조혜림
2013년 12월 9일 at 9:28 오전
직위가 오를수록 공감해야할 직원의 절대인원수가 늘어나는데 전부를 만족할수있는 결과를 찾으려면 의사결정이 제 시간에 이루어질수 있을까요. 그 직위라면 감정공감보다 적당히 욕먹어도 객관적인 수익이나 결과가 평가의 기준이 될수밖에 없을듯… 아랫직원도 결국 야근하고 상사랑 안맞아도 회사가 잘되서 복지랑 성과급많고 유명한 대기업 가려하는거겠죠. 문제는 공감도 안하고 효율도 없고 실적도 나쁜 리더…

후동
2013년 12월 10일 at 3:25 오전
응답
때로는 타고난 성품이나 나고 자란 환경과는 무관하게 “그 자리에 가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봐야 할 때도 많습니다. 일전에 제가 번역해 올린 “돈의 맛, 부자는 무례하다?”를 읽어보세요. 왜 부자가 되면 갑자기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맘이 줄어드는지에 관한 캘리포니아대학교 폴피프 교수의 연구에 관한 글입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
http://popntalk.wordpress.com/2013/07/29/money-on-mind/

조영수
2013년 12월 9일 at 11:01 오후
응답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부하직원들이 많아지면 공감능력을 스스로 떨어트리는게 어떤 결정을 하기에 편하고 단기적인 관점에서 효율적인 것 같습니다. 동일한 결정을 내리더라도 그 부하직원의 감정과 어려운 상황을 무시하고 지시하는 것은 감정을 배려하고 상황을 다 이해하고 내리는 결정보다 빠르고 편하고, 덜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동시다발적으로 많은 결정을 해야하는 리더에 자리에 올라가면 갈수록 스스로에게 편한 쪽을 택하는 것 같고요.
어떻게 보면 많은 리더들이 공감결핌의 방향으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고, 그렇지 않고 매번 공감 속에서 결정을 내리는 소수의 리더들을 보면 참 대단하고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단지 어렵지만 그렇게 가는 것이 올바르다고 알고 있어 노력하는 사람과 아예 노력조차 안하는 사람과는 차이가 크다 생각되네요.

cheombooks
2013년 12월 10일 at 11:55 오전
응답
속도가 중요한 한국사회에서는 공감에 할애할 여력이 없는게 아닐까요?리더가 공감하는데 필요한 기반 지식이 없는 경우도 있겠구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좀 더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고, 위로 올라가서도 실무지식을 갖출 수 있어야 할텐데 이런 분들은 정말 찾기 힘든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2014년 4월 29일 화요일

사람관리

뛰어난 사람은 가치관으로 관리하고, 보통 사람은 제도로써 관리한다.

- 사마의

2014년 4월 26일 토요일

[인문학으로 배우는 비즈니스 영어] mortgage

죽음 'mort'와 서약 'gage' 합친 말
빌린 돈 완납 때 소멸되는 계약 의미

mortgage는 주택 또는 자동차 등을 담보로 제공하는 장기 할부 대출을 말한다. 프랑스어로 '죽음' mort와 '서약' gage가 합쳐진 단어다. 할부금을 완납하면 담보 권리가 소멸된다는 의미에서 '죽는 계약서'를 뜻하는 mortgage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결혼을 서약하는 '약혼'의 engage, 직장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대가로 받는 '임금'인 wage와 사촌이다.

중세 프랑스 기사들은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하거나 불명예스러운 대접을 받으면 결투를 신청해서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결투 신청 방법은 증인들 앞에서 장갑을 벗어 땅에 던지는 것이었다. 상대방이 그가 던진 장갑을 주우면 증표가 교환되는 것이 되면서 결투 시간, 방법, 사용한 무기 등 결투에 필요한 규칙들을 정해서 합법적으로 결투할 수 있었다. 오늘날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면 계약이 성립되는 것처럼 중세 프랑스에서 증표 교환은 모두 법적 효력이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이 증표 명칭을 지역에 따라 wage 또는 gage라고 했다. 기사들이 결투하려면 장갑을 교환해서 증표로 삼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engage가 '교전'으로 쓰인다. 반지를 gage로 교환하고 결혼을 약속했기 때문에 같은 단어가 '약혼'으로도 쓰인다.

프랑스 농민들은 예로부터 큰돈이 필요하면 채무업자에게 땅문서를 담보 즉, gage로 제공하고 돈을 빌렸다. 빌린 돈을 완납하면 gage로 제공한 토지 문서를 돌려받았다. 여기서 모든 빚 정리가 무사히 끝나면 gage가 사라지는 '계약'이라는 의미로 이런 방식의 계약을 '죽음 서약' 즉 mortgage라는 다소 소름 돋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주택이나 자동차를 담보로 하는 할부 계약을 mortgage라고 한다.]

2014년 4월 23일 수요일

선동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선동은 한문장으로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반박하는 순간 사람들은 이미 선동되어있으며
선동이 반박될쯤에 이미 사람들의 관심에는 사라져 있다.

- 파울 요제프 괴벨스

소니의 전략은 정말 멍청했나?



비디오 포맷 전쟁: 소니의 완패

소니와 마쓰시타 사이에 벌어진 ‘비디오 포맷 전쟁’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소니는 베타맥스라는 포맷을, 마쓰시타는 VHS란 포맷을 각각 비디오 녹화 방식으로 채택했는데, 결국 VHS가 시장을 석권하게 됐죠. 이 이야기는 경영의 세계에서 전략의 실패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됩니다.

베타맥스가 VHS보다 기술 면에서, 비디오 품질 면에서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녹화할 수 있는 분량이 영화 한편을 다 담기에는 짧아서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소비자들이 외면했다는 이야기, 소비자들의 니즈를 사전에 간파하지 못하고 오로지 기술적인 우위에 ‘취하여’ 판매자 중심으로 사고했다는 이야기, 개방적인 포맷(VHS)이 폐쇄적인 포맷(베타맥스)보다 여러 VCR 제조업체에게 매력적이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기술과 품질의 우수함이 전략의 전부라고 여기는 것은 구시대적인 마케팅 전략이라는 이야기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고는 ‘소니는 바보였고 마쓰시타는 영리했다’란 식으로 마무리짓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사후 평가의 늪: 소니는 정말 바보였는가?

하지만 진짜로 소니는 ‘전략적 바보’였을까요?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런 평가는 소니가 실패했고 마쓰시타는 성공을 거둔 후에 결과론적으로 내린 ‘사후 평가’에 지나지 않습니다. 베타맥스와 VHS가 초기에 시장에 출시될 때는 베타맥스가 시장을 석권하리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VCR로 녹화했다가 나중에 보려는 니즈가 강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소니는 그런 니즈를 잘 파악했기에 그에 딱 맞는 베타맥스 포맷을 내놓은 겁니다. TV 프로그램을 녹화하는 데에 녹화 분량이 특별히 길 필요가 없었고, VHS보다 상대적으로 비싼 테이프 가격은 좋은 화질이라는 장점으로 상쇄할 수 있었죠.

비싼 테이프 가격, 폐쇄적인 포맷, 필요 이상의 화질 등 전략을 멍청하게 세워서 소니가 실패했다기보다는 소비자들의 니즈가 TV 프로그램 녹화에서 영화 대여를 통한 감상으로 옮겨갈 것임을 미리 간파하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봐야 정확한 판단입니다.

소니는 베타맥스를 출시하기 전에 CTI라는 회사가 영화 대여업에서 크게 실패한 것으로부터 교훈을 얻어 자신들의 전략 방향을 나름대로 옳게 설정했죠. 그 사례로부터 소비자들은 집에서 영화를 감상하기를 그다지 원하지 않는다고 ‘합리적’으로 판단했던 겁니다. 반면 VHS의 성공은 소 뒷걸음 치다 쥐 잡은 격인 셈입니다. 마쓰시타가 전략을 영리하게 세웠기 때문이 아니죠.


철저한 전략도 넘기 힘든 장벽: 불확실성

소니가 과거의 사례와 소비자의 니즈를 철저하게 연구하여 전략을 세웠음에도 마쓰시타와의 비디오 포맷 전쟁에서 패한 이유는 바로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CTI가 영화 대여업을 시작하고 실패하는 동안 불붙지 않았던 영화 감상 니즈가 갑작스레 커지리라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는 불확실성이 소니의 실패를 옳게 지적하는 단어입니다.

소니는 베타맥스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1992년에 새로운 레코딩 기술인 MD를 출시합니다. 하지만 이 기술 역시 실패하고 맙니다. 소니는 최근(2011년 7월)에 80분 짜리를 제외한 모든 MD의 판매를 중단한다고 발표하며 실패를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CD보다 작은 크기의 MD는 내구성이 강하고 쉽게 녹음이 가능했습니다. 그럼에도 역시 CD와 후에 나오는 플래시 메모리에 밀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소니가 철저하게 전략을 수립했는데도 MD가 실패한 이유 역시 불확실성입니다. 바로 곧이어 인터넷이 일반화되고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MD가 아니라 하드디스크에 음악을 저장하고 다른 사람들과 음악을 공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인터넷을 검색하면 원하는 음악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게 됐기에 번거롭게 MD에 따로 저장하여 음악을 재생할 이유가 적었던 겁니다. 소니의 전략은 훌륭했지만 인터넷이 야기한 불확실성까지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죠.

마이클 레이너는 기업이 실패하는 이유는 잘못된 전략에 있지 않고 훌륭하게 수립된 전략이 예상치 못한 불확실성을 만나기 때문이라고 정리합니다. 훌륭한 전략은 환경의 불확실성에 따라 크게 성공할 수도 있고 크게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성공과 실패 중 어디로 갈지는 사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죠. 여기에서 ‘내 그럴 줄 알았다’는 사후 가정은 전략의 성공 확률을 높이는 데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훌륭한 전략을 성공으로 이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훌륭한 전략이 처하게 될 미래의 불확실성을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요?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시나리오 플래닝’입니다. 시나리오 플래닝은 훌륭한 전략을 수립할 때 “환경이 이러이러할 것이니 이렇게 하기로 하자”라고 했던 가정을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하는 과정입니다.

훌륭한 전략이 처하게 될 미래의 여러 가지 상황을 몇 개의 시나리오로 구분한 다음에 각 시나리오에 맞게 전략을 따로따로 마련하는 ‘전략 포트폴리오’를 가져야 불확실성에 따른 전략의 실패 가능성을 줄일 수 있습니다. 물론 시나리오 플래닝만 가지고 전략 리스크를 온전하게 헷지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 봐도 훌륭하게 만들어진 전략일수록 ‘이것이 최선이다. 이것 이외에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다’는 고집을 유발합니다.

시나리오 플래닝은 훌륭하게 수립된 전략이 가지게 될 경직성을 부드럽게 완화하는 효과를 가함으로써 불확실성에 크게 휘둘리지 않도록 만드는 방법입니다.

완벽한 전략 수립보다 유연성이 필요한 시대

과거의 교훈, 경쟁자의 성공과 실패, 시장 조사 등을 통해 훌륭한 전략을 수립하는 데에 힘을 기울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대처는 전략을 유연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전략을 위한 전략이 되지 않도록 모든 시간을 불확실성을 생각하고 전략을 끊임없이 수정해 가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최선입니다.

소니의 전략은 진짜 멍청했을까요? 진짜 멍청한 전략은 무엇일까요? 요즘 소니는 상당한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동안 그들이 세운 전략이 멍청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불확실성 때문일까요?

- '상식의 배반', '위대한 전략의 함정'

2014년 4월 16일 수요일

전세의 본질

전세는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돈을 빌려주는 사금융이다. 

적은 자본을 가지고도 금융 수단을 통해 집을 거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보면 정말 선진적인 시스템이다. 전세라는 금융을 통해 거래를 활성화하고, 시장을 키우고,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오히려 전세제도로 인해 걱정되는 것은 시스템적인 리스크다. 신용 경색에 따른 연쇄 파급효과가 걱정되는 것이다. 전세가 없어지면 거래 비용이 감소한다는 말은 정말 금융의 본질을 모르는 소리다.

집 구매자는 전세라는 높은 이자율의 사금융을 썼다. 만약 전세가 없어지면 제도권 금융이 전세라는 사금융을 완벽히 대체할까? 아니다. 그게 가능했으면 애초에 전세가 생기지도 않았다. 중소기업더러 저금리로 회사채 발행해서 살아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은행이 있는데 캐피털은 그냥 없애자는 소리와 다를게 없다

게다가 은행에는 DTI, LTV 등 여러가지 대출 규제들이 있다. 전세가 없어지면 집을 사는 것과 관련된 유용한 금융수단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전세가 높은 이자율의 사금융인 이유는 이것이 임대료의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어떤 분석가는 전세가 사라지면 임대료가 예금금리와 대출금리의 중간에 위치할 것이란 막연한 낙관론을 펼친다. 이게 가능할까? 그럼 초저금리 국가인 일본의 임대료율은 왜 그리도 비싼가? 애초에 현실과 맞지 않는 소리를 하고 있다.

전세가 사라지는 이유는 그냥 높은 이자를 지불할 만큼 사금융의 매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기초 자산이 예전보다 리스키해졌으니 사금융까지 끌어쓰면서 살 이유가 없어졌을 뿐이다. 

사금융의 전주로서 이익을 챙기던 세입자들은 이제 좋은 시절이 사라지는거다. 세입자들은 사회의 주요 소비 구성원이다.이들의 이익이 줄어드는데 GDP가 높아질까? 오히려 우리는 이들 중저소득 소비층들의 실소득이 악화되는데 대한 대책을 강구해야한다. 정부의 월세 지원 대책도 이런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사금융이 사라지면 사회적 비용이 줄 것이다? 이런건 지극히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인 발상이다. 오히려 사금융을 억제하면 사회적 비용은 커진다. 전세가 월세로 대체되는 건 그게 좋은 방향이라서라기 보다는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전세를 억지로 지키려고 한다거나, 아니면 전세를 아예 없애버리겠다고 정책을 만드는 건 양쪽 다 바보같은 짓이다. 사회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제도다. 그냥 흘러가는대로 놔두고, 그런 변화로 인한 충격에 대비하는 정책만 만들면 된다.

진화에는 계통이 있다. 사람 눈이 이렇게 복잡하게 된 것은 이 눈이 어류의 눈에서 부터 조금씩 고쳐져 왔기 때문이다. 현재의 모습이 다소 복잡하고 어지럽다고 해서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안된다.  이걸 제대로 설계하면 정말 깔끔한 구조와 뛰어난 기능을 가진 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가? 택도 없는 소리다. 그런 짓하다가는 눈의 주인이 먼저 죽는다. 진화에는 계통이 있고, 현재의 균형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러니 도덕적 규범, 진보의 논리 같은 것으로 색안경을 끼고 사회를 재단해선 안된다.


- 마왕의 서재 -

2014년 4월 12일 토요일

마르크스의 ‘별로 혁명적이지 않았던’ 삶

마르크스의 사생활과 그가 추구하는 반(反) 자본주의 사상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마르크스는 본인이나 가족들이 그 자신의 표현으로’프롤레타리아 이하’의 삶(그는 근검절약하는 건강한 생활습관을 ‘프롤레타리아 이하’의 삶이라 지칭했다)을 사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고, 부인의 귀족 혈통을 자랑했으며, 굳건한 후원자였던 엥겔스의 정기적인 경제적 지원 외에도 여기저기에 돈을 빌리고 많은 외상을 지면서 끝끝내 소비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삶을 추구하였다.

소박하게 살았다면 엥겔스의 지원과 원고료만으로도 충분한 경제적 여유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나 마르크스는 경제적으로 분수에 넘치는 소비생활을 추구하였고, 어느 시대의 관점으로도 사회경제적으로는 ‘빈대’ 혹은 ‘진상’라고밖에는 부를 수 없는 인물이었다.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에는 이사야 벌린의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보다 마르크스의 사생활에 대한 훨씬 상세한 기록들이 나온다. 흔히 마르크스의 자본가 계급에 대한 증오에는 그가 런던 생활에서 겪었던 극심한 생활고가 한 몫을 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윈의 책을 보면 실제로는 마르크스의 수입은 재정적으로 최악의 한 해였던 1851년에도 당시의 영국 중류계급 수준이었다는 것으로, 그는 허영을 버리지 못해 과다 지출로 인한 생활고를 겪었던 것이지 절대적 수준에서 못 먹고 못 입을 정도로 빈곤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 ‘마르크스 평전’에서 프랜시스 윈은 마르크스의 인간성이나 사생활이 아닌 그의 사상 자체에는 상당히 호의적인 평가를 하고 있으므로 이 책에 나오는 마르크스의 한숨이 절로 나오는 모습들은 저자의 이념적 편향으로 인한 것은 아닌 듯 하다.

사실 통상적인 생활인의 수준에서 보자면 마르크스는 무슨 유별나게 악하다거나 추한 삶을 살았다고는 볼 수 없으며 그저 본인이 살던 시대의 인간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에 불과했다고 보는 것이 공정할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는 그렇게 여러 사람들로부터 돈을 빌릴 수 있었다는 자체가 웅변하듯이 인간적으로 매력이 있고 기지가 넘치는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 본인이 한 평생 추구한 혁명적인 사상에 비추어 본다면 상상할 수 없는 추접스러운, 부르주아적 생활을 추종하는 스타일로 한 평생을 살아내었으니 그것이 흥미로운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방탕했던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베를린 법대에서 아버지가 권유하는 학문을 성실히 익히려고도 해 보았으나 결국 다시 철학 쪽으로 빠지게 되었다. 아버지 하인리히는 유대인이었으나 동시에 프로이센의 군주제를 찬미하는 애국자이기도 하였다. 공부야 무엇을 하든 자유라 할 수 있겠으나 마르크스는 결핵에 시달리는 아버지에게 거의 편지를 쓰지 않았으며 그러면서도 한 해에 7백 탈러나 되는 돈을 탕진하며 아버지의 등골을 빨았다. 당시 가장 부유한 학생도 1년에 5백 탈러 이하를 썼다고 하니 마르크스는 학생 시절부터 방탕한 소비 습관에 길들었던 모양이며, 심지어 부모가 간청하는데도 방학 때 트리어에 있는 집에 한 번도 다녀가지 않았다.

남작 가문의 딸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 이후 마르크스는 유럽 전역을 떠돌며 혁명 활동에 참여하다가 1850년대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게 되었다. 그가 처음 거처를 마련한 곳은 런던 소호였다. 아내가 계속 임신을 하면서 생활은 점점 궁핍해졌는데 가족들의 경제적 지원을 받는 데에는 실패했다.

결국 마르크스 가족의 구원자는 유럽 대륙을 떠돌던 시절 파리에서 만난 평생의 친우, 엥겔스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엥겔스는 런던에서 저널리스트로 입신하겠다는 야망을 친구를 돕기 위해 포기하고 아버지가 합자로 운영하는 직물회사 ‘에르멘 & 엥겔스’의 멘체스터 지사로 취직하여 이후 20년간 그 자리를 지키며 때로는 자기 돈으로, 때로는 회사 돈을 횡령하여 마르크스의 생활을 부조하였다.



평생의 든든한 물주친구 엥겔스

사실 엥겔스는 기업인이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저널리스트로 성공할 만한 필력과 지식도 충분했다. 그는 자신이 영위하는 ‘천한 상업’을 ‘총명하지만 가난한 친구를 지원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고행 쯤으로 여겼고 자신을 궁극의 적인 부르주아 집단의 전선 배후에 침입한 비밀 요원 노릇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엥겔스는 사업가들의 배타적인 고급 사교클럽에 가입하고, 지하실에 고급 샴페인을 채우고, 사냥개들을 끌고 여우 사냥에 나서는 등 전형적인 영국 부르주아-귀족 계급의 삶을 살면서도 훗날 혁명의 날이 왔을 때 자신이 군사령관으로서 혁명군을 이끌기 위해서는 승마 실력이 필수적이라는 이유로 이를 합리화하였다.

엥겔스는 회사의 현금 상자나 계좌에서 교활하게 돈을 빼돌려 정기적으로 마르크스에게 보내주었는데 그의 아버지나 맨체스터의 동업자 페터 에르멘은 이를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으니 참으로 느슨하게 운영되는 회사였던 모양인데 그러고도 망하지 않고 번영하였으니 신기한 일이다.

엥겔스는 ‘훗날 혁명의 때를 위해’ 여기저기 사교 생활을 해야 하여 부유한 신사의 삶을 살아야만 했고 또한 맹우 마르크스에게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보내주어야 했으므로 ‘엥겔스 & 에르멘’ 상회는 그에 의해 엄청난 돈을 횡령당했다. 1853년에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마르크스에게 자랑하였다.

“다행히도 작년에는 아버지가 이곳에서 벌인 사업에서 생긴 이윤의 반을 먹어치웠다.”

마르크스 평생의 친구이자 물주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
마르크스 평생의 친구이자 물주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
이런 아들을 둔 아버지야 그렇다쳐도 아버지의 동업자인 에르멘 씨는 무슨 횡액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가 마르크스 가족에게 매년 지원해 준 돈은 당시의 통상적 노동자들의 연수입의 여러 배에 달하는 돈이었으나 마르크스와 예니는 마치 자신들이 여전히 부르주아 아버지, 남작 아버지를 둔 부자들인양 돈을 헤프게 썼으므로 항상 ‘궁핍’하였다.

마르크스 가족은 특히 궁핍하였던 런던 생활 초기에는 방 두 개 짜리 낡은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그러면서도 가정부는 두고 있었다. 가정부의 이름은 헬레네 렌헨 데무트였다. 그들은 굶어죽어도 가사 노동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가장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던 해로 꼽히는 1851년에도 그는 엥겔스와 다른 지지자들로부터 최소한 150파운드를 받았는데, 이 돈은 현재의 한국 돈의 가치로는 적어도 사오천만원은 되는 돈이었고 당시 런던의 중산층 하층에 속한 가족이 어느 정도 안락을 누리며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당시 런던에서 의사, 변호사들이 거주하는 넓은 정원과 여러 개의 방이 딸린 안락한 집의 집세가 1년에 65파운드 가량이었다니 이를 최소한으로 쳐서 2천만원이라고만 잡아도, 150파운드는 5천만원 가까운 가치가 되니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사실 런던에 연고도 없는 외국인으로서는 경제적으로 아주 운이 좋았는데 1952년에 ‘뉴욕 데일리 트리뷴’이 그를 유럽 통신원으로 임명하여 기사 한 편당 2파운드를 받고 매주 기사 2편을 송고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또한 1854년에는 브레슬라우의 ‘노이에 오더 차이퉁’에 기고하여 매년 50파운드를 받았으므로 1852년부터는 마르크스는 매년 최소 2백 파운드의 수입을 올렸던 것이며 이는 칠팔천만원 가까이 되는 액수이니 충분히 안락한 중산층의 삶을 누릴만한 돈이었다.

1854년 6월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다급하게 돈을 요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곤경에 처해 있네. 가계에 12파운드를 지출해야 하는데, 내 수입은 글을 쓰지 않아 상당히 줄어들었기 때문이지. 게다가 약값만도 지출에서 많은 부분을 잡아먹고 있다네.”

그러나 편지의 바로 그다음 구절에서 마르크스는 아내와 아이들에 가정부까지 딸려서 에드먼턴에 있는 빌라로 두 주 동안 휴가를 떠날 예정이며, 아내가 시골 공기로 몸을 충분히 회복하면 독일의 트리어까지 여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서 ‘곤경에 처해 있다’는 조금 전의 호소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예니가 트리어로 여행가기 위해 새 옷을 장만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의사와 식료품상 등 마르크스의 채권자들은 그에 합당한 분노를 표시하였는데, 마르크스는 그들의 분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남작의 딸이 초라한 행색으로 트리어에 도착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고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주장하였다.

모든 자본가와 귀족의 적인 마르크스로서는 참으로 우스운 일이지만 그는 부인이 독일 명문가의 딸임을 몹시 자랑스러워하였다. 그래서 예니의 명함을 ‘예니 마르크스 부인. 구성(舊姓) 베스트팔렌 여남작’이라 박아놓고 자신과 거래하는 상인들이나 사교차 만난 토리당원들에게 이 명함을 자랑스럽게 휘둘렀다.

마르크스는 스스로 ‘프롤레타리아 이하의 생활’을 누리기를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남작 가문의 딸인 부인이 ‘신분’에 걸맞는 상류계급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는 아내를 바닷가로 휴양보낸 다음 엥겔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안사람은 램즈게이트에서 세련되고, 또 끔찍한 말이기는 하지만, 영리한 영국 여자들을 사귀었네. 오랫동안 여자들을 사귄다 해도 자신보다 열등한 여자들하고만 사귀고 난 뒤라,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교제하게 되니 그것이 안사람에게는 좋은 모양이야.”

마르크스는 부인에게 ‘상류 계급’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살게 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자녀들만은 프롤레타리아 계층이 아닌 상류계급과 어울릴 수 있도록 노력했다. 딸들이 적당한 구혼자들을 주위에 끌어들이려면 무도회 드레스, 댄스 교습을 비롯해 돈으로 살 수 있는 기타 사교적 장치들이 필요했는데, 이는 중산층 정도의 수입을 지닌 그로서는 분수에 넘치는 소비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무한정 구걸해야 했다. 물론 그 구걸 대상은 대체로 엥겔스였다.


마르크스의 가족과 엥겔스

마르크스는 1865년에 북 런던의 넓은 집으로 이사하면서 엥겔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내 집이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은 사실이네. 하지만 이것이 아이들이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음으로써 장차 안정된 미래를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세… 상업적인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순수하게 프롤레타리아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은 적당치 않네. 물론 안사람과 나 둘만 있다면, 또는 아이들이 딸이 아니라 아들이라면 그렇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네만, 자네도 나와 같은 의견일 것으로 생각하네”

사람 좋은 엥겔스는 딸들이 비싸고 화려한 옷을 입고 분기에 8파운드를 내는 ‘숙녀 학교’에 다녀야 하며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음악, 미술의 개인 교습까지 받아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에 한 번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지만 그로서도 그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것은 무리였다.

1855년 봄에 마르크스는 환희에 넘쳐서 엥겔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어제 우리에게 아주 행복한 사건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네. 안사람 삼촌이 돌아가셨다네. 향년 90세.”

그는 죽은 사람 -예니의 삼촌이자 변호사이며 역사가인 하인리히 게오르크 폰 베스트팔렌-에게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었지만, 이 노인의 재산을 상속받기를 오랫동안 고대하며 노인을 ‘상속 훼방꾼’이라 수년간 지칭하고 있었으므로 그 고대하던 노인의 죽음에 열광할 만도 하였다. 유산 중 예니의 몫 100 파운드가 그해 연말에 도착하였다.

마르크스의 재수가 몹시 좋았는지 그 다음 해에는 예니의 어머니인 남작 부인도 연속적으로 사망하여 120파운드의 유산을 받게 되었다. 아내가 친정 어머니의 마지막 며칠 동안 병상을 지키기까지 하였으므로 장모의 죽음에는 차마 기쁜 마음을 내색하지 못하였으나, 마르크스는 아내가 모친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이 놀랍다는 듯 엥겔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안사람은 노인의 죽음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 같네.”

하기야 아버지의 장례식에조차 참석하지 않은 냉담한 성격이었으니 어머니의 죽음-그로 인해 수천만원치의 목돈이 굴러들어왔음에도-에 슬퍼하는 아내에게 놀랄 만도 하였을 것이다. 아내의 외삼촌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굴러들어온 220파운드에 달하는 이 ‘횡재’ 덕에 마르크스 일가는 소호에서 나와 북런던 그래프턴 테라스의 보다 넓은 집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아내가 받은 유산은 그동안의 빚을 청산하고 집을 얻고 새 가구를 장만하는데 금새 다 써버렸으므로 새로 장만한 가구는 다시 전당포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집의 집세를 낼 돈이 없어 엥겔스에게 징징거려 매달 5파운드(150만원 가량)의 돈을 받고, 필요할 때마다 추가로 받기로 하였다. 엥겔스는 그 때 아버지가 보내준 크리스마스 축하금으로 새로운 말을 장만했던 터였으므로 친구의 불행에 몹시 미안해하고 가슴아파하였고 회사의 사정이야 어찌되든 회사돈을 금고에서 횡령하여 보내주기로 굳게 약속하였다.



마르크스가 평생 물주친구 엥겔스를 잃을 뻔했던 사건

엥겔스는 1863년 1월, 사실상의 아내나 다름 없던 메리 번스가 사망했을 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마르크스에게 보냈다.

“메리가 죽었다네… 월요일 저녁까지는 아주 건강했는데. 내 감정은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네. 그 가엾은 여자는 온 마음으로 나를 사랑했는데.”

마르크스는 다음 날 답장을 보냈는데, 의례적인 조의를 한 마디 표한 후 곧바로 아이들 학비와 집세 독촉으로 힘들다는 푸념을 주절주절 늘어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메리가 아니라, 어차피 병도 들고 또 살 만큼 산 우리 어머니가 죽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 환경의 압박에 시달리는 ‘문명인’의 머릿속에는 별 이상한 생각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 안녕.”

엥겔스는 닷새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아래와 같이 답장을 보냈다.

“이번에는 내가 당한 불행과 자네가 그 일을 바라보는 차가운 태도 때문에 자네한테 더 일찍 답장을 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네. 자네도 그럴 만하다고 생각할 걸세. 내 모든 친구들과 그저 알고 지내는 사이일 뿐인 속물들까지도 이번에 나에게 깊은 충격을 준 이 일을 두고 내가 바랬던 것 이상으로 나에게 동정과 우정을 보여주었네. 하지만 자네는 이것이 자네의 ‘냉정한 태도’의 우월성을 보여줄 적당한 기회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그럼 그렇게 하게나!”

사람 좋은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이렇게 화를 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후 3주 동안 마르크스는 돈이 너무도 궁하여 예니와 엄청난 부부 싸움을 벌였으며 결국 엥겔스에게 사과 편지를 보냈으며 딸들은 가정교사 일자리를 구하고 자신들 부부는 막내딸을 데리고 런던의 빈민 구호 시설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고 비참한 상태를 알렸다. 이 편지는 마르크스가 타인에게 했던 단 한 번 뿐인 진지한 사과 편지였는데, 아마도 돈이 궁하지 않았다면 그의 성격으로 보아 결코 사과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메리 번즈의 동생 리지 번즈. 메리가 사망하자 리지는 엥겔스와 함께 살았으며 자신이 죽기 바로 전날 엥겔스와 결혼하였다. 현존하는 메리 번즈의 사진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리 번즈의 동생 리지 번즈. 메리가 사망하자 리지는 엥겔스와 함께 살았으며 자신이 죽기 바로 전날 엥겔스와 결혼하였다.
현존하는 메리 번즈의 사진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너그러운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사과에 감동하여 ‘엥겔스 & 에르멘’ 사의 금고에서 100 파운드 짜리 수표를 훔쳐 배서한 다음 마르크스에게 보내주고는 말했다.

“나로서는 매우 과감한 행동이지만, 모험을 할 수 밖에 없지.”

또한 몇 달 뒤에는 마르크스가 여름을 날 수 있도록 250파운드를 보내주었다. 회삿돈을 횡령하였을 것임은 명백하다.

메리 번스의 죽음에 “우리 엄마가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투덜대었던 아들의 말이 씨가 되었는데 그해 11월에 마르크스의 어머니 헨리에테 마르크스가 향년 75세로 사망했다는 전보가 날아왔다. 이 소식이 왔을 때 마르크스는 아무런 슬픔의 표현없이 냉랭하게 썼다.

“운명이 우리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을 요구했네. 나 자인도 이미 무덤에 한 발을 들여놓고 있었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머니보다는 나를 더 원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네.”

이번에는 유산을 받아야 했으므로 독일 트리어로 돌아가 장례식에 참석해야만 했다. 엥겔스는 여비에 보태쓰라고 10파운드를 보냈지만, 마르크스의 냉담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조의의 문구 같은 것은 한 마디도 쓰지 않았다. 유언장 집행에는 여러 달이 걸렸으며 그 동안 외삼촌 리온 필립스에게 결국 꾸어다 쓴 빚 등 여러 채무를 청산하고 나니 100 파운드 정도만이 손에 남았다.

마르크스는 이 돈을 가지고 또 다시 분수에 넘치는 집으로 이사했는데 이곳은 집세가 연간 65파운드로 넓은 정원, 매혹적인 온실, 딸마다 자기 방을 가질 만한 넓은 실내 공간을 갖추고 있었다. 공원을 내려다보는 2층에는 마르크스의 서재가 될 널찍한 방이 있었다. 이곳은 부유한 의사나 변호사들이 사는 곳이었으나 마르크스는 아무 대책없이 덜컥 이 집에 3년 계약을 맺고 입주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타인의 죽음이 마르크스에게는 행운을 안겨주었는데, 바로 독일에서 공산주의 활동에 동참했던 맹우 빌헬름 볼프가 1864년에 그에게 많은 돈을 남기고 사망하였던 것이다. 볼프는 브뤼셀에서 ‘공산주의자 통신 위원회’ 일을 할 때, 1848년의 파리 혁명 때, 쾰른에서 ‘노이에 라이니세 차이퉁’ 일을 할 때 늘 마르크스와 함께 일을 했고 1853년부터는 맨체스터로 망명하여 외국어 교사 일을 하며 마르크스와 달리 혼자서 근검절약하며 조용히 살았다. 그는 유언집행인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지명했는데, 장례비용과 유산 상속세, 주치의에게 남긴 100파운드, 엥겔스에게 상속된 100 파운드(이돈은 어차피 나중에 마르크스에게 올 돈!)를 제하고도 마르크스에게 820파운드라는 거액의 돈이 남았다.

이 돈은 현재의 한국 돈으로는 적어도 2, 3억원의 가치는 있는 돈이었는데, 마르크스는 볼프가 주치의에게 100 파운드를 남긴 것에 몹시 화를 냈다. 하기야 본인의 주치의에게는 유산은 커녕 정당한 치료비조차 지급하지 않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으니 그에게 와야만 할 돈 100 파운드(삼천여만원의 가치)를 주치의에게 남긴 볼프의 유언을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마르크스는 볼프를 기념하여 3년 후에 출판된 ‘자본론 1권’에 ‘프롤레타리아의 용맹하고 충실하고 고귀한 옹호자인 내 잊을 수 없는 친구 빌헬름 볼프에게’ 바치는 헌사를 넣었는데, 사실 이 헌사는 엥겔스가 받아야 더 마땅한 것이었다.

아무튼 마르크스 부부는 볼프가 남긴 유산을 아낌없이 탕진하였다. 새 집에 비싼 가구를 들이고 아이들에게는 애완동물을 떼거지(개 세 마리, 고양이 두 마리, 새 두 마리)로 사다주고, 해변으로 가족 모두가 3주 동안 여행을 떠났다.



주식투자가 마르크스

빌헬름 볼프가 죽은 1864년 여름에 마르크스는 외삼촌 리온 필립스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이 볼프의 유산으로 ‘주식투자’를 하고 있음을 자랑하였다.

“많이 놀라시겠지만, 저는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 국채에도 하지만 주로 영국 주식이지요… 어쨌든 저는 주식 투자로 4백 파운드 넘게 벌었습니다. 이제 정치적 상황이 복잡해지면서 여기저기 틈이 많기 때문에 저는 다시 투자를 시작해볼 작정입니다. 이것은 시간을 조금만 써도 되는 일이고, 또 적으로부터 돈을 우려내려면 약간의 위험은 감수해야지요.”

그는 주식 투자가 ‘적(자본가 계급)으로부터 돈을 우려내는’ 일이라고 합리화하고 있었는데, 자본가인 외삼촌이 이 편지를 보고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일부 학자들은 마르크스가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으므로 외삼촌을 놀래기 위해 지어낸 농담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는데, 엥겔스에게 보낸 다음 편지를 보면 마르크스가 볼프의 유산으로 주식 놀음을 하고 있었음은 분명하였다.

그는 볼프의 유산에서 나올 다음 지급액을 빨리 보내라고 독촉하며 이렇게 엥겔스에게 말했던 것이다.

“돈이 있었다면 지난 열흘 동안 이곳 증권거래소에서 큰 돈을 벌었을 걸세. 런던에는 수완과 약간의 돈만 있으면 돈을 벌 수 있는 때가 다시 왔네.”

주식투자 즐겨하시는 우리 엄니께서도 즐겨 하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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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으로 끝끝내 돈을 번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볼프의 ‘거대한’ 유산도 마르크스 부부의 방탕한 생활에는 금새 녹아내렸다. 1년이 지난 1865년에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다시 돈을 구걸하며 이렇게 썼다.

“두 달 동안 나는 오로지 전당포에 의지해서 살았네. 채권자들이 줄을 서서 문을 두드리는데 날이 갈수록 견디기가 힘들어지네.”

마르크스 부부는 1년 동안 최소 3억원 가량의 돈을 탕진해버렸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인생 역전

마르크스가 52세가 되던 1870년 여름, 그는 드디어 ‘경제적 안정’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엥겔스가 가족 사업인 ‘에르멘 & 엥겔스’의 지분을 에르멘 형제 가운데 한 사람에게 팔았던 것이다. 그는 이 돈으로 ‘궁핍한’ 친구 마르크스에게 1년에 350파운드의 종신 연금을 선물해주었다! 현재 한국 돈 가치로는 적어도 매년 1억 2천만원에 해당하는 수입이었다.

얼굴이 두껍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마르크스도 이 정도 후의에는 그야말로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자네의 엄청난 호의에 압도당하고 말았네.”

이후 마르크스는 1883년에 죽을 때까지 경제적으로 유복한 생활을 누렸다. 마르크스보다 오래 산 엘레아노르와 라우라의 두 딸은 아버지의 사후에 각각 자살하였다. 맏딸 라우라는 1911년에 66세로 파리 외곽에서 남편 폴 라파르그와 함께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어서’ 자살하였는데, 주로 엥겔스의 돈에 기생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엥겔스는 친구의 유족들까지도 돌보았던 것이다. 라우라 부부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맡았던 사람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으로 그는 “라우라 선친의 사상이 누구의 예상보다도 빠르게 거침없이 실현될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고 그 예언은 수년 후에 실현되었다.



로버트 오웬의 전혀 다른 삶

마르크스의 삶은 사회주의 사상가로서는 한 세대 앞선 선배인 로버트 오웬의 생애와 극명히 대비된다.

로버트 오웬은 1771년 웨일즈의 한 철물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열 살의 나이에 링컨셔의 직물 상인의 도제로 들어가 18세 되던 해에 100파운드를 빌려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100파운드는 마르크스라면 한 두 달에 다 탕진해 버릴 돈이다).

오웬은 차츰 사업에 성공하여 종업원이 500명이나 되는 면방적 공장의 주인이 되었는데, 거기서 나오는 이윤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는 대신 자신이 혼자서 공부한 사회주의 이론을 자신의 기업에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노동자들의 도덕적, 경제적 수준을 향상시키고, 민중 계급의 불행과 타락의 가시적 원인인 빈곤과 무지를 해소하기 위해 자신의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로버트 오웬
로버트 오웬
오웬은 자신의 공장 노동자와 그 가족들에게 가구당 채마밭을 하나씩 주고, 당시 하루 15시간이 관행이었던 노동시간을 10시간으로 단축했다. 일곱 살 짜리 아동이 광산에서 일을 하던 당시에, 직업 교육을 받기 전인 10세 이전의 아동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생필품을 일정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는 협동조합, 작업장 내의 위생 시설을 노동자들에게 제공하였다. 이로 인해 마을의 복지는 획기적으로 개선되었고 뉴라나크 마을은 매년 2500여명의 사람들이 시찰하는 명소가 되었다. 유니레버 사의 설립자인 윌리엄 헤스커스 레버도 오웬의 실험에 감명을 받아 그의 공장의 근로조건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오웬을 본따 노동자들이 거주할 안락하고 쾌적한 마을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오웬은 이러한 ‘단일공장 사회주의’에 만족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좋은 대접을 받는 노예’처럼 행동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강연회를 열어 기금을 모으고 유럽의 모든 정부에 탄원서를 발송하여 그가 이상적인 모델로 생각했던 ‘자치공동체’ 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824년에서 1828년에 걸쳐 미국 뉴하모니에서 생활과 노동을 함께 하는 공동체를 건립하였고, 소수의 사람들을 재산과 종교, 결혼 같은 ‘장애물’이 없는 환경 속에 두고 ‘각자의 필요에 따라’ 노동하게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평균적 인간이 필요의 지배를 넘어서 풍요와 지식, 연대의 지배를 실현할 수 있음을 입증하려 하였으나, 공동체를 무시한 개인들의 방종으로 말미암아 실험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공동체 실험의 실패 후 오웬은 생산 및 소비 협동조합, 노동조합 운동에 주력하였다. 그는 노동계급이 정치 사회적 권리의 획득이라는 온건한 방안에 호소할 수 있도록 이끌었으며 노동조합운동의 틀 내에서 노동시간의 제한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여 노동조합과 소비협동조합의 조직에 기여했다. 말년에는 신비주의에 빠졌다는 비아냥도 받았으나, 지행이 일치한 자수성가자 로버트 오웬의 삶은 자본가 계급에 대한 증오로 똘똘 뭉쳐 있으면서도 귀족과 자본가 같은 사치스러운 소비생활을 동경하며 평생 가족과 친구들의 골수를 빼먹고 산 카를 마르크스의 삶과 극명히 대비되는 것이다.


참고자료
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저 정영목 역 푸른숲 2001.06.15)
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 (이사야 벌린 저 안규남 역 미다스북스 2012.03.23)
미래의 기억 유토피아 (욜렌 딜라스-로세리 저 김휘석 역 서해문집 2007.02.10)
그 외 영문 위키피디어의 몇 항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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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6일 일요일

거미의 사생활: 저 여자는 몇 명의 남자와 사귀었을까?

“저 여자는 지금껏 몇 명의 남자와 사귀었을까?”

어처구니 없는 질문 같지만, 성(聖)앤드루 십자가 거미(St. Andrew’s Cross spiders)라는 성(性)스러운 이름을 가진 거미의 수컷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교미 후 자신의 그것을 부러뜨려 암컷의 그것을 막는 수컷

이 거미의 암컷은 좌우에 두 개의 질(정확히 말하면 질 비슷하게 생긴 저장소)을 갖고 있는데, 수컷 역시 두 개의 음경(정확히 말하면 음경과 비슷하게 생긴 촉수)을 이용하여, 이곳에 정자를 저장한다.

그런데 일단 암컷과 교미한 수컷은, 그녀가 바람을 피우지 못하게 하려고 – 끔찍하게도 – 음경을 부러뜨려, 그곳을 폐쇄한다. 음경 하나를 잃은 수컷은 나머지 하나로도 교미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상대방 암컷과 짝이 맞아야 한다. 예를 들면 왼쪽 음경만 갖고 있는 수컷은 왼쪽 질이 개방된 암컷과 만나야만 교미를 할 수 있다.

짝이 안 맞거나, 두 개의 질이 모두 막힌 암컷에게 접근한 수컷은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 암컷이 임신했거나 배고픈 경우에는 수컷을 잡아먹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컷의 입장에서는 암컷의 성경험 횟수를 아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페로몬으로 암컷의 성경험 횟수를 알아내는 수컷 거미

그렇다면 수컷은 어떻게 암컷의 성경험 횟수를 알 수 있을까? 이번 주 Behavioral Ecology에 실린 논문에 그 답이 있다. 과학자들은 수컷을 두 개의 거미집 앞에 놓았다. 각각의 거미집에는 한 번과 두 번의 성경험을 가진 암컷이 살고 있었는데, 수컷은 거미줄에 묻은 페로몬을 감지하여, 한 번의 성경험을 가진 암컷을 찾아가는 것으로 밝혀졌다. (적중률은 75~90%였다.)

그러나 거미의 육감(spidey sense)에도 한계는 있었다. 암컷의 성경험 횟수는 정확히 맞출 수 있지만, 한 번의 성경험을 가진 암컷의 경우 어느쪽 질이 비어 있는지(또는 막혀 있는지)는 맞추지 못하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지막 실험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밝혀졌다. 양쪽 질이 비어 있는 ‘숫처녀’와 만난 수컷은 절대로 두 번 교미하지 않고, 나머지 하나의 음경은 미래의 파트너를 위해 아껴 두는 센스를 보였다. 이것은 성앤드루십자가 거미가 다자간 사랑(polyamory)을 하도록 적응했다는 것을 뜻한다. 참고로, 이 거미가 속한 Argiope속의 다른 종들은 일부일처제를 택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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