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이조훈
m.blog.naver.com/pretty119/220141533748
I. 들어가며
지난 번에 스웨덴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에 대해 몇 자 적어본 바 있다. 이에 관련하여 스웨덴 모델의 바탕이 된 렌-마이드너 모델에 대해 모 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선배가 언급하여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더니, 참으로 재미있는 모델이었다. 그래서 책을 몇 권 사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그 후로 한 두 권 읽었습니다.) 국가의 운영 뿐만 아니라 잘 수정하면 기업 경영에서도 참고할 부분이 있다.
2. 렌-마이드너 모델(스웨덴 복지 모델)
2.1. 렌-마이드너 모델의 개요
당시 스웨덴은 현재 한국과 유사한 수출 중심의 경제였으며, 수출경쟁력을 가진 대기업 중심의 경제였다. 그런데, 이들이 기득권을 내려놓고 다른 산업과 평준화하여 평등 사회로 나아갔다.....
라면 이 글을 쓸 이유가 없다.
스웨덴은 높은 인플레이션율과 산업경쟁력 약화로 인하여 실업률이 늘어나고 있었다. Philips Curve(물가상승률과 실업률은 역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고용이 증가하면 인플레가 발생하고, 인플레이션을 잡으면 실업율이 늘어난다.)에 따라 양자를 모두 추구하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불가능하다. Long Term에서는 가능하겠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의 민주노총에 해당하는 단일노조(LO)가 노동자의 임금을 평준화하고 이를 우리 나라 전경련에 해당하는 기업 대표(SAF)와 합의한다. 즉, 노동자의 임금이 수출 대기업은 100이고, 내수 중소기업은 60인데 이를 평준화하여 모든 노동자가 80의 임금을 받는 협약을 체결한다. 우리 나라로 이야기하자면 GS칼텍스, 포스코, 현대자동차 노동자의 임금을 깍고, 삼각김밥 공장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서 서로 임금이 비슷해졌다.
그 결과 대기업, 수출 기업의 경쟁력이 높아져 빨리 성장한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현대자동차는 노동자의 임금이 낮아저 더 빨리 성장하고, 높은 임금을 감당할 수 없는 내수 기업, 중소기업은 파산하게 만든다. 기업 뿐만 아니라, 스웨덴의 모든 산업에서 다른 국가에 비해 경쟁력이 높은 곳은 낮은 임금으로 혜택을 보고, 경쟁력이 떨어지는 산업은 임금 상승으로 인하여 퇴출된다. 한마디로 수출 중심, 대기업 중심으로 산업과 기업을 구조 조정 한다. 그리고 임금 대비 생산성이 떨어지고 경쟁력이 떨어지는 기업에서는 마구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부여한다. (종신 고용은 없다.)
이렇게 낮은 임금을 바탕으로 경쟁력이 더욱 향상된 수출 대기업이 충분히 성장하여 다른 산업에서 퇴출된 노동자들을 흡수한다. 그래서, 독점 자본에 온갖 혜택을 제공해서 성장을 드라이브한다.
여기까지 정리하면, 1. 전 산업의 노동자의 임금 평준화 -> 2. 물가/임금 안정 -> 3. 대기업/수출 기업 경쟁력 향상, 한계 산업 퇴출, 한계 기업 파산 -> 4. 노동자의 고용 보장 폐지, 자유로운 해고가 가능하도록 노동 유연성 보장 -> 5. 급격히 성장한 수출 대기업에 의한 퇴출 산업 노동자의 고용 흡수 -> 6. 동일 임금으로 폭넓은 담세층 확보 및 세금 부과 -> 7. 재원을 바탕으로 사회 안전망의 확보 -> 8. 폭넓은 사회 복지 제도로 해고로 인한 사회 문제가 적어 자유로운 해고와 이직으로 노동 유연성 가속
이제부터 렌-마이드너 모델의 특이한 점이 도드라지는데, 이렇게 해고된 노동자는 국가로부터 실업수당과 재교육을 받아서 경쟁력이 향상된 수출 산업으로 이동할 수 있다. 구조 조정의 결과로 대기업/수출기업이 충분히 성장해야 퇴출된 인력들을 흡수 할 수 잇다.
결국 스웨덴 모델은 개별 기업이 종신 고용을 통해 구체적인 개별 직장의 고용 안정성(Job Security)를 보장하는 게 아니다. 자유로운 이동을 통하여 전체적인 고용 유지 상태(Employment Security)를 보장하는 방식이다. 한마디로, 고용주인 기업에게 노동유연성(Flexibility)을 극단적으로 보장하고, 노동자들의 이동성(mobility)을 높이기 위하여 국가가 직업 교육으로 지원한다.
그리고, 수출대기업이 성장하여 퇴출된 산업과 기업의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창출될 수 있도록 수출대기업의 성장을 방해하는 모든 규제를 철폐한다. 스웨덴은 대기업이 잘 되어야 하므로 우리나라에서 문제시 되는 순환 출자가 허용되고, 법인세는 매우 낮고, 독점 자본이 금융자본과 결탁하는 걸 막기 위한 금산 분리도 없다.
대신, 고용 안정성이 급격히 떨어짐에 따라 사회안전망을 폭넓게 제공해야 하는데, 평준화된 임금을 받는 폭 넓은 노동 계층에 집중적으로 세금을 부과하여 재원을 마련하고 사회안전망을 구축한다.
2.2. 렌-마이드너 모델의 흥미로운 점이 모델의 흥미로운 점은
첫째, 사회주의 or 사민주의를 달성하기 위해 시장친화적인 아이디어를 적극 도입한다 . 대기업의 경쟁력과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성장을 이끌고, 그 과정에서 철저히 시장 친화적인 방법(한계 기업의 퇴출, 해고를 폭 넓게 인정하여 노동유연성의 확보, 대기업의 성장을 가로 막는 규제의 철폐, 낮은 수준의 법인세, 정부의 긴축 재정을 통한 물가 안정)으로 접근한다.
둘째, 이와 같은 산업의 구조조정 방안이 기업이 아닌 LO(노동자 연합)의 제안으로 관철되었다는 점이다.(렌과 마이드너 모두 LO에 소속된 economist였다.) 노동자가 구조 조정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선제적으로 기업과 산업의 ‘구조조정’을 주도했다. 실제로 마이드너는 시장의 힘에 의해 구조 조정을 당할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자율 조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셋째, 이해 관계가 엇갈리는 이 문제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었다는 점이다. 대기업 노동자의 임금을 깍고, 중소기업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고, 이로 인해 역설적으로 중소 기업과 내수 기업이 망하여 중소기업 노동자가 퇴출된다는 것을 어떻게 합의해 내었을까? 노조조직율이 80%여서 LO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기업은 발렌베리 가문이 스웨덴의 민간 경제의 대다수를 지배하여 합의의 당사자가 간결했다고 하더라도, 놀라울 따름이다. 이 모델은 화이트칼러 노조와 블루컬러 노조가 동일 임금에 합의해야 하고, 기술 혁신으로 등장한 새로운 직업 예를 들어, IT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에게도 동일 임금에 합의하도록 해야 하는데, 나중에 언급할 균열 지점이 여기에도 있다.
2.3. 렌-마이드너 모델의 지향점
렌-마이드너 모델은 궁극적으로 대기업의 초과 이윤에 대한 견제를 위해, 이윤의 20%에 해당하는 신주를 발행하게 하고, 이 신주를 임금 노동자가 조성한 펀드에서 매집하도록 하여 노조가 대주주가 되도록 구상되었다. 하지만 이부분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노조에 의한 기업 지배를 펀드 조성과 신주 인수를 통한 증자 참여라는 지극히 시장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접근했다는 것도 흥미롭다.
2.4. 소결
렌-마이드너 모델은 스웨덴을 일컫는 [독점 자본과 복지 사회]의 공존이라고 요약된다. 충분히 성장할 수 있도록 경쟁력 없는 기업과 산업을 퇴출시키고, 그 혜택으로 충분히 성장하여 퇴출된 기업의 노동자들을 흡수한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의 담세 계층을 폭넓게 하여 재정적 안정을 가져오고, 이러한 재정적 안정은 사회보장제도를 강화시켜 더욱 노동 유연성을 강화하고 수출대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선순환을 가져온다.
3. 렌-마이드너 모델이 작동하기 위한 전제 조건과 Key Success Factor
위의 내용들은 몇 권의 책과 웹서핑을 통해서 내가 이해한 바를 정리한 것이고, 이제 이 모델이 어려운 이유와 균열 지점에 대해 나의 생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3.1. 대규모 소비 시장
수출 대기업이 한계 산업에서 퇴출된 노동자들을 모두 흡수해주고 실업 상태에 있는 산업예비군(K. Marx의 표현이다.)까지 고용을 하려면, 자국의 소비 시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이를테면, IKEA와 중소 가구업체까지 모두 같은 임금을 적용하거나 IKEA와 김밥천국까지 같은 임금을 적용한다고 해보자. 일부 프리미엄 브랜드를 제외하고 대중적인 제품을 만드는 중소 가구업체들에서 퇴출된 인원이 100명이라고 할 때, 같은 수의 가구를 만들기 위해 IKEA에서는 70명만 필요로 한다면 이 모델은 작동하지 않는다. IKEA가 120명을 추가로 고용해주어야 하는데, 자국에서 사람들이 집에 식탁을 하나 가지고 있다가 2개를 보유하겠다고 하나 더 살리는 없지 않은가. 이 문제는 결국 IKEA의 개선된 경쟁력이 퇴출된 기업이 감당하던 수요보다 더 큰 수요를 창출하는 시장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스웨덴은 바로 지근 거리에 그런 시장을 가지고 있는데, 그곳은 바로 미국이나 EU의 다른 국가들이다. 결국 100명이 퇴출되고 그 가운데 80명은 기존 중소 업체에서 감당하던 수요를 충족하는데 고용되고, 20명 + 알파는 그렇게 낮아진 임금을 바탕으로 원가 경쟁력이 개선되어 이를테면 미국 가구 시장에서 늘어난 수요/판매에 대응하는데 고용된다.
3.2. 소국으로 작은 경제 규모와 제한적 산업 보유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이 모델은 동일 임금에 의한 대규모의 기업과 산업의 구조 조정을 바탕으로 한다. 인구가 몇 백만 수준이어서 대부분의 산업을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도시 국가라면 이런 식의 구조 조정이나 산업의 퇴출과 이동이 기민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데 한 나라의 인구가 1억쯤 되어서 다양한 산업을 보유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일본을 가정해보자. 일본은 없는 산업이 없을 정도로 거의 모든 산업을 다 보유하고 있는데, 여기서 세계 시장에서는 경쟁력이 없으나 자국 시장에서 근근히 먹고 사는 사양 산업들을 구조 조정하는 게 가능할까? 구조 조정의 규모를 감당하기도 힘들고, 사회적 혼란도 커서 아비규환이 될 것이다. 하나의 국가와 경제 체제를 가지고 실험을 하다가 실패하면 생지옥이 열릴 것이다.
(참고: 우리가 생지옥으로 기억하는 IMF때 우리나라는 수십년 사이에 처음으로 -5%성장을 했다. 즉, 경제 성장율이 -5%면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고 수많은 가정이 파괴된다. 자연과학처럼 좋은 아이디어인데 한 번 호기심 해소 차원에서 실험해보자고 하지 말자.) FTA를 통해 농업을 퇴출 시키고 핸드폰이나 자동차 좀 더 팔아보겠다는 정도도 합의가 불가능한게 현실인데, 전체 산업들을 구조 조정한다는 건 그냥 학자들의 탁상 공론일 뿐 현실화되기 어렵다.
자영업이나 내수 산업의 비중이 높은 국가에서는 실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몰락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이 기업의 피고용인이 된다는 건 마치 [자본론]에서 K.Marx가 쁘띠 부르조아의 몰락으로 자본의 축적이 가속화되는 것을 묘사하는 걸 연상시키지 않나.
3.3. 합의를 위한 채널 간소화
위에서 언급한 산업이 다양하지 않은 소국이어야 한다는 조건과 비슷한 얘기다. 스웨덴에서는 저 합의가 우리나라의 민주 노총에 해당하는 LO와 전경련에 해당하는 SAF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노조조직률이 80%에 달해서 LO가 대표성을 띄고 있었고, 사용자 측인 SAF 역시 스웨덴의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발렌베리 가문이 주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찾아보기 귀찮은데 발렌베리 가문이 스웨덴 전체 민간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삼성의 비중이 비할 바가 아니다.-
과연 다른 나라에서 수많은 이해 관계자와 contact point들을 간소화하여 각자 하나의 대표에게 활동권한이 위임될 수 있을까. 노사정위원회는 좋은 시도였다. 하지만, 노사정위원회에서 대표들이 가지는 대표성은 얼마나 강한 것일까. 민주노총의 조직률이 얼마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전체 근로자 가운데 20%나 될까? 전경련에서 삼성이 총대를 매고 합의하면 경쟁력의 요소가 전혀 다른 현대자동차가 따를 수 있을까.(자본집약적인 삼성과 하청업체를 포함하여 노동집약적인 현대차 그룹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지는 않을까)
3.4. 변화 관리 - 세계화의 위협에 대한 방어, 동일 임금에 대한 합의 유지
이 모델의 균열 지점 중에 하나는 세계화이다. 누군가 자기만 잘 살겠다고 더 높은 임금을 찾아서 해외로 이주하면 자국에는 경쟁력이 없는 인적 자원만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본인만 더 잘 살겠다고, 렌-마이드너 모델에서 이탈하면 산업과 기업의 경쟁력은 약화되고 세금을 내줄 담세 계층은 허약해진다. 실제로. 스웨덴에서도 고임금 노동자(금속노조)가 중심이 되어 렌-마이드너 모델에서 탈퇴했었다.
너무 진지하게 써서, 말도 안되는 농담을 하나 해본다. 프랑스 PSG에서 100억이 넘는 연봉을 받는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라는 스웨덴 선수가 있다. 만약 바르셀로나에게 메시가 없어진다면 언제 즐라탄에게 손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축구 클럽의 선수들은 LO에 가입되어 있지도 않고 동일 임금도 적용되지 않겠지만, 어떤 기업이나 산업 분야에도 즐라탄 같은 사람이 있다. 수학자, 의학, 컴퓨터 프로그래밍처럼 local 의존성이 적은 인적 자본들에게 더 좋은 보수와 대우를 제시하는 곳이 있기 마련이다. 즉,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노동과 자본의 이동에 대한 방어막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
여기서 렌-마이드너 모델과 이를 넘어선 스웨덴 모델의 enabler가 등장한다고 생각한다. 더 높은 임금이나 더 좋은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성공이 아니며 행복은 청빈한 삶과 자유에서 비롯된다는 정서를 보편화시켜야 한다. 또 이를 끊임 없이 변화 관리해야 한다. 경제적 보상 외에 다른 추상적 가치... 이를테면 세금을 통해 사회의 수호자가 되고 있다는 존경과 명예 같은 것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북유럽에 관한 글들을 읽다보면 종종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매우 속된 것이고, 그것을 추구하거나 언급하는 것은 속물스러운 것으로 폄하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반면, 미국의 모델에서 -비록 최근에는 전혀 그렇지 않지만 적어도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 시절을 보면 - 부는 긍정적 가치를 추구한 결과로서 그것은 부끄러움의 대상이 아닌 것으로 젼화 관리 되어왔다.
3.5. 수출 지향적 경제 구조로 인한 취약성과 재정 건전성의 확보
대기업, 수출 기업 중심으로 산업이 구조조정되면서, 스웨덴 모델은 커다란 리스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높은 대외의존도는 경제의 변동성을 증가시킨다. 이를테면, 글로벌 금융 위기로 인한 미국의 수요 침체가 발생하는 경우에 이에 연동되기 쉽다. 따라서, 높은 세율을 바탕으로 한 국가의 재정 지출(GDP 중 40~50%를 조세로 가져가서 재정 지출을 함)이 이러한 대외 경제 위기 상황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말은 쉽지만,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가 재정 정책을 사용하기 위한 재정건전성을 확보해야 한다. 세입 대비 더 많은 지출로 재정 적자가 발생하는 경우에는 이 위기에 불을 끌 재정이 바닥나기 때문에 엄격한 재정 준칙으로 포퓰리즘을 경계하고 재원이 뒷받침된 복지 정책을 펼친다. -항상 이야기하지만, 경제 위기에서 불을 끄는 건 물이 아니라 돈이다.- 그래서, 스웨덴은 지방정부가 적자 재정을 편성하지 못하도록 강제하고 있으며, 중앙 정부도 명목 지출의 상한선을 설정해 놓고 이를 넘기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스웨덴 정부는 포퓰리즘이 득세한 남미와 달리 넓은 복지 제도에도 불구하고 98년 이후로 계속 흑자 재정을 유지하고 있다.
3.6. 지속적 혁신과 재교육
렌-마이드너 모델은 기업의 성장과 경쟁력 향상이라는 시장주의적인 사고와 사회안전망을 제공하는 사민주의의 결합이다. [독점 자본과 복지의 결합]이라는 쉽게 붙지 않는 것을 강제로 억지로 붙인 것이 아니라, 서로를 자극하고 선순환하도록 설계하였다. 그렇다면, 기업의 경쟁력 향상... 즉, 지속적으로 미국이라는 거대 소비시장에 어떻게 더 많이 팔아먹을까에 관한 방법이 필요하다. 성장을 통한 복지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성장이라는 하나의 바퀴가 멈추면 자전거는 넘어지고 복지라는 나머지 바퀴도 덩달아 멈춰 버린다.
그래서, 스웨덴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기업의 '혁신'이다. (혁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얼마전에 간략히 다룬바 있다) 그리고, 국가는 산업의 변동에 대응할 수 있도록 훌륭한 재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노동자들을 일종의 고급 인적 자본-다기능공-으로 만든다. 성장하는 산업에 인력을 공급할 수 있도록. (운전하다가 든 생각 중에 하나는 도요타처럼 하나의 기업이 종신 고용을 해서 먹고는 살게 해주면서 대신 극한까지 지속적인 개선을 요구하는 게 혁신을 국가 단위로 확장한 것은 아닌가라는 잡생각도 들었다.)
4. 결론
지난 번 글이 받은 비판에 대해 몇 마디 변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지난 번 글 [왜 모든 나라가 스웨덴 모델을 택하지 않는가]는 작년 이때 쯤 회사에서 잠시 머리를 식히다가 떠오른 생각을 웹서핑하고 OECD 자료를 찾아서 몇 시간만에 대충 휘갈긴 글이다. 스웨덴에 대해 가본 적도 없고, 관련된 책도 읽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현상을 기술한 글이다. 스웨덴을 횡단면 분석(현 시점의 몇몇 지표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현재 상태를 묘사하는데 대부분을 할애하였다.
그리고, 내가 economist도 아니고, 무슨 연구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대학 시절 경제학 수업도 거의 안 들었고, 이런 문제에 대해서 아는 거라고는 없는 그냥 공장 다니면서 자료 보고 문제 해결을 하는 걸 업으로 삼은 사람으로서.... 현재 눈에 보이는 현상이 이러한 원인 때문은 아닐까라며 하나의 지적인 유희로 가설을 세워본 것이었다.
이번 글은 어떻게 스웨덴은 그것을 해냈을까라는 의문에서 올해 초에 좀 더 웹서핑도 해보고, 책도 한 두 권 읽어보고 나서 쓴 글이다. 물론 가장 긴 내용을 할애한 3번은 역시 그냥 내가 생각한 감이고 가설에 불과하다.
이제, 결론을 내보도록 한다. 스웨덴 모델은 충분히 매력적이고 연구해 볼 가치가 있으며, 사회 구성원의 전체적인 후생을 증가시키며 롤스 식의 정의의 관념에도 부합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정말 하기 힘들고 어려워서 "모두가 마음을 선하게 먹으면.." 또는 "누구를 바꾸면..."이라는 식으로 바라보지 말고 어떻게 이 난관을 뚫고 해낼까에 좀 더 매진했으면 한다.
변명 1. 국제경제 상의 환율과 수지에 대한 문제, 국제 금융의 발달로 인한 자본의 이동으로 인한 문제도 다루지 않는다. -한마디로 헷지 펀드의 환율 공격 같은 문제-
변명 2. 원래 내일 써서 후배인 김희준에게 검수를 좀 받으려고 했으나, 사랑하는 딸이 일찍 잠드는 바람에 일필휘지로 휘갈김. 퇴고도 하기 싫어서 비문이 난무할 겁니다. 예전에 김훈씨를 통해서 바라본 [글쓰기의 원칙]을 써놓고 정작 하나도 안 지킴.
변명 3. fact가 잘못 되었을 수도 있고, 각종 숫자와 지표로 뒷받침 되지 않는 말 뿐인 '소설'에 불과하지만, 돈 받고 쓰는 것도 아니고 이 분야에 문외한인데 각종 통계를 찾아보며 source를 달고 정량적으로 뒷받침 하는 건 귀찮아서 못하겠습니다.
2014년 10월 21일 화요일
2014년 10월 17일 금요일
인류는 왜 공평, 정직 같은 미덕을 고취시켰을까? - 윌슨 교수
출처 : http://m.biz.chosun.com/svc/article.html?contid=2014021402148
'사회생물학 창시자' 윌슨 교수에게 듣는다 에드워드 윌슨 교수가 말하는 '인간의 본성' "인류는 왜 정직ㆍ공평 같은 美德을 고취시켰을까?… 그렇지 못한 집단은 도태됐기 때문" 진정한 이타성은 존재한다 죽음을 무릅쓰고 타인을 돕는 행동은 개인을 위험에 빠뜨리지만 집단엔 유익 결국 그런 행동 일으킨 유전자 확산시켜 집단 위한 것만 선이고 개인은 악인가? 개체선택은 많은 죄악을 낳기도 하지만 생산성ㆍ리더십 등 가치 있는 성향의 원천 인간활동, 이기성과 이타성의 갈등서 비롯 철학엔 더 많은 자연과학이 필요 뇌가 갖고 있는 본능ㆍ욕망 같은 것이 진화 역사상 어떻게 생긴 건지 모른다면 표피적인 상관관계 설명에 그칠 것
에드워드 윌슨 교수의 연구실은 하버드대 비교 동물 박물관 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1834년 찰스 다윈이 발견한 성게 화석을 포함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2100만여 종의 동물 표본을 소장하고 있는 곳이다.
마침 초등학생들이 박물관을 견학하고 있었다. 그들이 중학교에 올라가 생물학 시간이 되면 개미가 윌슨 교수가 발견한 페로몬이란 화학물질을 통해 의사소통을 한다는 사실을 배울 것이다. 그들이 나이가 들어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고민에 부딪히게 되면, 언젠가 진화론 책을 뒤적이게 될 것이고, 윌슨 교수가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사회적 행동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사회생물학'의 창시자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쓴 '인간 본성에 대하여'나 '지구의 정복자'를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함께 열독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과학자답지 않은 윌슨 교수의 유려한 글솜씨에 경탄하게 될 것이고, 위키피디아를 뒤적거려 그가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미로 같은 박물관을 헤치고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가니 윌슨 교수가 환한 웃음으로 반겨줬다. 그의 오른쪽 눈은 어린 시절 낚싯바늘에 찔린 사고로 실명해 반쯤 감겨 있었지만, 그의 웃음 띤 얼굴에선 별 부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남은 왼쪽 눈 하나로 평생 개미를 연구해 왔고, 개미에 대한 관심을 인간으로 확장시켜 인간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봐 왔다.
그는 기자의 질문을 받기 전에 자신이 집필 중인 책들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미 스무 권이 넘는 책을 썼는데, 지금 세 권의 책을 새로 쓰고 있다고 했다. 집필 중인 책에 대한 그의 긴 설명이 끝난 뒤 기자는 준비해둔 질문을 꺼냈다.
해탈을 느껴보진 못했다. 점점 더 도전을 느꼈을 뿐
-세계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도달하면 해탈의 감정을 느낀다는 사람도 있다. 혹시 교수님도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달했다는 생각과 함께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나?
"아니요, 나는 점점 더 도전을 느끼지 평화를 느끼지 않는걸(웃음). 훌륭한 과학자라면 다 그럴 것이다. 참고로 진화생물학은 아직도 약한 과학(weak science)이라고 할 수 있다(그래서 도전하고 고민해야 하는 게 많고 평화를 얻기 어렵다는 의미). 물론 미래를 다루는 데 아주 중요한 과학이다. 왜냐하면 진화생물학이야말로 인간에 대해서, 그 역사와 인간이 인간이도록 추동하는 힘들에 대해 다루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해탈을 느껴보지 못했다. 불교에 대해서 좀 읽어보려고 하긴 했었다. 완전한 평화에 대해서, 자아를 버리는 것 등등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음… 그 평화를 찾은 이들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진화론은 사람이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다고 설명한다. 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기계에 불과하다. 진화론을 접한 많은 이는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 같다. 이런 허무주의에 빠진 경험이 있는가? 이런 느낌을 극복할 조언이 없는가?
“그게 바로 내가 지금‘인간 존재의 의미’라는 책을 쓰는 이유다. 인간은 여러 층위로 볼 수 있는데, 종(種)이라는 차원에서, 사회라는 측면에서 각 단위에 대한 이해가 모두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해는 인간을 어떤 식으로든 왜소하게 만들지 않는다. 최근 내 몇몇 연구를 놓고 꽤 논란이 많다. 수학자들과 함께 최근에 논문을 냈는데, 어떻게 이타성이 인간 사회에서 나타나며, 고등 사회가 생물학적으로 어떻게 형성되는가가 주제이다. 그런데 우리가 점점 더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은, 자연선택(키워드 참고)에 의해 추동되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이를테면 경쟁심이나 집단에서 인정받으려는 욕망 같은 것―이 개인이라는 단위의 인간 본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부분이지만, 200만~300만년 전 선사 인류가 모닥불을 피워 집단생활을 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비롯된 집단 사이 경쟁도 매우 중요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그룹 간의 경쟁이 이타성도 촉진했다는 것이다. 이건 새로운 생각이라고 할 수 있고, 점점 더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런 집단 간 경쟁은 ‘덕(德·virtue)’을 고취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도덕감을 증진하며, 애국심을 증진한다. 결국 정직, 공평과 같이 우리가 표피적으로만 ‘가져야만 한다’고 얘기하던 특징들을 우리가 왜 갖고 있는지 이제 생물학자들이 답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 개개인이 단지 분자들의 상호 작용이나 이들의 집합이라는 식의 이해로부터 벗어나서 서서히 독립적으로 인간의 의미의 토대를 구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길고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설명은, 그가 최근에 주장하기 시작한 집단선택설의 핵심 개념을 담고 있다. 여기서 ‘최근에 주장하기 시작한’이라고 한 이유는 그가 예전에는 전혀 다른 학설을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현재 진화생물학계에는 크게 두 가지 학설이 있다. 혈연선택설(kin selection)과 집단선택설(group selection)이 그것이다. 혈연선택설은 이타성조차 이기성의 다른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집단선택설은 이기적 유전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타성이 분명히 존재하며, 이는 집단 차원의 경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혈연선택설은 학계의 다수설이자 정설로 굳어져 왔고, 윌슨 교수는 이 학설의 대부(代父)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9년 전 돌연 혈연선택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거의 이단으로 취급되던 집단선택설로 돌아서 학계에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윌슨 교수의 주장이 정설이 되기엔 갈 길이 멀어 보인다. 2010년에 그가 네이처지에 관련 논문을 발표한 뒤 학자 137명이 비판 서명을 했다.
―책 ‘지구의 정복자’에서 “개체 선택(혹은 혈연 선택)은 우리가 죄악이라고 부르는 것의 많은 부분을 빚어내지만 집단선택은 미덕의 많은 부분을 형성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설명하면 집단은 곧 선이고, 개인은 악이 되어버리지 않는가?
“내가 집단선택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조금 단순화한 면이 있다. 내 의도는 ‘죄와 덕’이라는 비유를 통해 집단선택의 개념을 빨리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당연히 개체선택은 생산성, 성취, 리더십과 같이 고귀하고 가치 있는 많은 성향을 있게끔 한 동력이기도 하다.”
그는 “법 제도에서부터 예술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활동은 개인선택과 집단선택, 이기성과 이타성 간의 내적 갈등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진정한 이타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교수님은 사회생물학의 핵심적인 과제는 이타성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했다. 교수님의 평생 연구로 이타성이 어디서 비롯됐는지를 설명한다면?
“진정한 이타성은 자신이 갖고 있는 가치 있는 것을 포기하는 행위다. 즉, 사회에서 자신의 소유, 자신의 안전, 가족을 이룰 기회, 자기 부의 일부를, 집단의 다른 이들의 복리를 위해서, 대가 없이 포기하는 것이다. 이게 진정한 이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자기 자신이 불에 타는 것을 무릅쓰고 불난 차 안의 사람을 구해내는 것이다. 물론 대다수 이타적 행동은 호혜적인 인식, 사회 계약에 기반해 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나의 것을 포기하는 것은, 반드시 그게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예를 들어 그게 우리 사회의 전체 복리를 증가시킨다고 판단해서―이 아니라, 내가 사회라는 그물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이런 행동들을 통해 내 인맥을 만든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 DC에서 평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치 체제는 이렇게 주고받는다는 인식 위에 세워져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이타성은 분명 존재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는 규명하기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집단선택설은 이런 진정한 이타성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어떻게 설명한다는 것인가?
“자신의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집단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그 집단이 다른 집단과 경쟁해 생존할 가능성을 높인다.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 자주 목격하는 행동이다. 그리고 그렇게 집단이 강해지면, 그 집단에 속한 자기 자신도 강화된다. 내 개인의 존재에는 해가 가겠지만, (그런 이타적 행동을 유발하는) 유전자의 생존과 확산의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다. 그리고 잘 살펴보면 사회는 그런 과정이 일어나도록 애쓴다.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희생하면서 타인을 도우면 사회는, 특히 그가 소속된 사회(사회의 하위 단위들·편집자 주)가 그 가족을 돌봐준다. 꽤 잘 돌아가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수학적으로 잘 모델링해 설명할 수 있다.”
―교수님은 이타주의에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맹목적 이타주의와 목적적 이타주의(보답을 기대하는 이타주의)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했다. ‘강력한 이타적 충동이 대개 목적적이라는 것은 행운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맹목적이라면, 역사는 족벌주의와 인종차별이라는 극심한 음모의 기록이 될 것이며, 미래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황량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목을 보면서 종교인이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과 같은 딜레마를 잘 묘사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교수님이 종교를 비판하는 것도 이런 이유인가?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잠시만, 내가 그런 말을….”
윌슨 교수는 매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대목은 기자가 읽은 그의 여러 책 중 하나에서 인용한 것이었다. 어느 책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윌슨 교수는 “지금 내 생각을 정리해야겠다. 당신이 내 책을 인용하긴 했지만. 흠… 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예전에 내가 진정한 이타성, 그러니까 그 어떠한 호혜적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하는 행동들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맥락에서 옛날에 말한 것 같은데. 흠, 찾아봐야겠다. 뭔가 내가 실언한 걸 잡아낸 것 같구먼….”
―아무래도 교수님이 첫 번째 퓰리처상을 받은 책 ‘인간 본성에 대하여(On Human Nature)’에 나와 있던 내용 같다(나중에 확인 결과 그랬다).
“아, 그럼 이해가 간다. 그건 1978년에 쓴 책 아닌가. 참 세월이 많이 바뀌었다.”
이 해프닝을 통해 기자는 윌슨 교수가 집단선택설로 학문적 전향을 한 것이, 인간성의 좀 더 따뜻한 면을 찾고 싶은 그의 내밀한 본능의 소산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테레사 수녀의 희생마저 이기적 유전자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면 인간의 삶은 너무 황량해지지 않겠는가? 윌슨 교수는 멀지 않은 죽음을 앞두고 사회와 화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과학은 투표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교수님은 그동안 쌓아 놓은 업적만으로 편안하게 살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편한 길을 포기하고 가시밭길을 선택했나?(왜 혈연선택설을 포기하고 집단선택설로 전향했느냐는 의미)
“나는 언제나 가시밭길을 걸었다. 중요한 과학적 발견은 언제나 논란을 유발한다. 과학은 원래 그렇게 변하는 거다. 과학은 투표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내가 1970년대 처음으로 사회생물학을 제안했을 때도 엄청나게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많은 과학자가 말로는 ‘언제나 새로운 정보와 데이터에 따라 변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실제로는 변화에 매우 인색하고 보수적이다.”
―마이클 샌델 교수를 아시는가? 정치학과의.
“물론이다.”
―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는 한국에서만 100만부나 팔렸다.
“오, 대단하다.”
―교수님은 “정의란 태생적 선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공정함”이라는 윤리 철학자들의 말을 반박했는데, 그 이유는?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웃음). 난 평생 하버드에서 철학자들 틈바구니에 있었다. 존 롤스, 마이클 샌델과도 교류했다. 그리고 지혜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도덕성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이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을 표피적으로 관찰하고 묘사하는 것만으로 철학을 세우고 결론을 이끌어낼 수 없다. 인간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들은 꼭 알아야 하는 것들을 알지 못한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했던 것들에 대해 말이다.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신호처리기계(뇌)가 갖고 있는 본능, 욕망 같은 것이 인류 진화 역사상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지 않으면, 결국 표피적 설명에 머물 뿐이고, 그러면 단지 상관관계들을 바탕으로 상위 이론을 만들게 될 뿐이다. 내 생각에 새로운 철학은 훨씬 더 많이 자연과학을 그 밑바탕으로 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불완전함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본질이자 의미
―과학자는 시인처럼 생각하고, 사서처럼 연구하고, 저널리스트처럼 글을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시인처럼 생각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창조적 과정이란 비슷하다는 의미다. 모든 과학자는, 특히 뭔가 새로운 것을 하려고 할 때, 끊임없이 꿈을 꾼다. 사실 가설이라는 게 공상이다. 백일몽을 꾼다. 뭔가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지어낸다. 최종 결과물을 상상해 본다. 그런데 이건 바로 시인들이 하는 일 아닌가?”
그가 올가을 낼 예정으로 지금 교정을 보는 책 제목은 ‘인간 존재의 의미(The Meaning of Human existence)’이다. 윌슨 교수는 “이제 난 그런 얘기를 할 나이가 된 것 같다. 그리고 나쁜 서평을 받아도 별로 상관없다. 어차피 오래 살 것도 아니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지구의 정복자’에서 지금의 세계를 ‘석기 시대의 정서, 중세의 제도, 신과 같은 기술’이 공존하는 곳으로 묘사했다. 그는 신과 같은 기술에 힘입어 인류가 인간 게놈(유전 정보 전체)을 수정할 수 있는 시기의 문턱에 와있다고 내다봤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자연선택이 아니라 ‘의지선택’으로 진화하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나은 인간 종―예를 들어 더 합리적이고, 불필요한 감정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종―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윌슨 교수는 그러나 “그런 세상이 가능하더라도 원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불완전하고, 엉성하고, 때로 위험하기까지 한 감정이야말로 인간을 수퍼컴퓨터와 구분하고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생물학 창시자' 윌슨 교수에게 듣는다 에드워드 윌슨 교수가 말하는 '인간의 본성' "인류는 왜 정직ㆍ공평 같은 美德을 고취시켰을까?… 그렇지 못한 집단은 도태됐기 때문" 진정한 이타성은 존재한다 죽음을 무릅쓰고 타인을 돕는 행동은 개인을 위험에 빠뜨리지만 집단엔 유익 결국 그런 행동 일으킨 유전자 확산시켜 집단 위한 것만 선이고 개인은 악인가? 개체선택은 많은 죄악을 낳기도 하지만 생산성ㆍ리더십 등 가치 있는 성향의 원천 인간활동, 이기성과 이타성의 갈등서 비롯 철학엔 더 많은 자연과학이 필요 뇌가 갖고 있는 본능ㆍ욕망 같은 것이 진화 역사상 어떻게 생긴 건지 모른다면 표피적인 상관관계 설명에 그칠 것
에드워드 윌슨 교수의 연구실은 하버드대 비교 동물 박물관 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1834년 찰스 다윈이 발견한 성게 화석을 포함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2100만여 종의 동물 표본을 소장하고 있는 곳이다.
마침 초등학생들이 박물관을 견학하고 있었다. 그들이 중학교에 올라가 생물학 시간이 되면 개미가 윌슨 교수가 발견한 페로몬이란 화학물질을 통해 의사소통을 한다는 사실을 배울 것이다. 그들이 나이가 들어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고민에 부딪히게 되면, 언젠가 진화론 책을 뒤적이게 될 것이고, 윌슨 교수가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사회적 행동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사회생물학'의 창시자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쓴 '인간 본성에 대하여'나 '지구의 정복자'를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함께 열독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과학자답지 않은 윌슨 교수의 유려한 글솜씨에 경탄하게 될 것이고, 위키피디아를 뒤적거려 그가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미로 같은 박물관을 헤치고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가니 윌슨 교수가 환한 웃음으로 반겨줬다. 그의 오른쪽 눈은 어린 시절 낚싯바늘에 찔린 사고로 실명해 반쯤 감겨 있었지만, 그의 웃음 띤 얼굴에선 별 부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남은 왼쪽 눈 하나로 평생 개미를 연구해 왔고, 개미에 대한 관심을 인간으로 확장시켜 인간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봐 왔다.
그는 기자의 질문을 받기 전에 자신이 집필 중인 책들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미 스무 권이 넘는 책을 썼는데, 지금 세 권의 책을 새로 쓰고 있다고 했다. 집필 중인 책에 대한 그의 긴 설명이 끝난 뒤 기자는 준비해둔 질문을 꺼냈다.
해탈을 느껴보진 못했다. 점점 더 도전을 느꼈을 뿐
-세계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도달하면 해탈의 감정을 느낀다는 사람도 있다. 혹시 교수님도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달했다는 생각과 함께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나?
"아니요, 나는 점점 더 도전을 느끼지 평화를 느끼지 않는걸(웃음). 훌륭한 과학자라면 다 그럴 것이다. 참고로 진화생물학은 아직도 약한 과학(weak science)이라고 할 수 있다(그래서 도전하고 고민해야 하는 게 많고 평화를 얻기 어렵다는 의미). 물론 미래를 다루는 데 아주 중요한 과학이다. 왜냐하면 진화생물학이야말로 인간에 대해서, 그 역사와 인간이 인간이도록 추동하는 힘들에 대해 다루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해탈을 느껴보지 못했다. 불교에 대해서 좀 읽어보려고 하긴 했었다. 완전한 평화에 대해서, 자아를 버리는 것 등등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음… 그 평화를 찾은 이들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진화론은 사람이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다고 설명한다. 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기계에 불과하다. 진화론을 접한 많은 이는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 같다. 이런 허무주의에 빠진 경험이 있는가? 이런 느낌을 극복할 조언이 없는가?
“그게 바로 내가 지금‘인간 존재의 의미’라는 책을 쓰는 이유다. 인간은 여러 층위로 볼 수 있는데, 종(種)이라는 차원에서, 사회라는 측면에서 각 단위에 대한 이해가 모두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해는 인간을 어떤 식으로든 왜소하게 만들지 않는다. 최근 내 몇몇 연구를 놓고 꽤 논란이 많다. 수학자들과 함께 최근에 논문을 냈는데, 어떻게 이타성이 인간 사회에서 나타나며, 고등 사회가 생물학적으로 어떻게 형성되는가가 주제이다. 그런데 우리가 점점 더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은, 자연선택(키워드 참고)에 의해 추동되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이를테면 경쟁심이나 집단에서 인정받으려는 욕망 같은 것―이 개인이라는 단위의 인간 본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부분이지만, 200만~300만년 전 선사 인류가 모닥불을 피워 집단생활을 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비롯된 집단 사이 경쟁도 매우 중요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그룹 간의 경쟁이 이타성도 촉진했다는 것이다. 이건 새로운 생각이라고 할 수 있고, 점점 더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런 집단 간 경쟁은 ‘덕(德·virtue)’을 고취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도덕감을 증진하며, 애국심을 증진한다. 결국 정직, 공평과 같이 우리가 표피적으로만 ‘가져야만 한다’고 얘기하던 특징들을 우리가 왜 갖고 있는지 이제 생물학자들이 답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 개개인이 단지 분자들의 상호 작용이나 이들의 집합이라는 식의 이해로부터 벗어나서 서서히 독립적으로 인간의 의미의 토대를 구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길고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설명은, 그가 최근에 주장하기 시작한 집단선택설의 핵심 개념을 담고 있다. 여기서 ‘최근에 주장하기 시작한’이라고 한 이유는 그가 예전에는 전혀 다른 학설을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현재 진화생물학계에는 크게 두 가지 학설이 있다. 혈연선택설(kin selection)과 집단선택설(group selection)이 그것이다. 혈연선택설은 이타성조차 이기성의 다른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집단선택설은 이기적 유전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타성이 분명히 존재하며, 이는 집단 차원의 경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혈연선택설은 학계의 다수설이자 정설로 굳어져 왔고, 윌슨 교수는 이 학설의 대부(代父)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9년 전 돌연 혈연선택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거의 이단으로 취급되던 집단선택설로 돌아서 학계에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윌슨 교수의 주장이 정설이 되기엔 갈 길이 멀어 보인다. 2010년에 그가 네이처지에 관련 논문을 발표한 뒤 학자 137명이 비판 서명을 했다.
―책 ‘지구의 정복자’에서 “개체 선택(혹은 혈연 선택)은 우리가 죄악이라고 부르는 것의 많은 부분을 빚어내지만 집단선택은 미덕의 많은 부분을 형성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설명하면 집단은 곧 선이고, 개인은 악이 되어버리지 않는가?
“내가 집단선택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조금 단순화한 면이 있다. 내 의도는 ‘죄와 덕’이라는 비유를 통해 집단선택의 개념을 빨리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당연히 개체선택은 생산성, 성취, 리더십과 같이 고귀하고 가치 있는 많은 성향을 있게끔 한 동력이기도 하다.”
그는 “법 제도에서부터 예술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활동은 개인선택과 집단선택, 이기성과 이타성 간의 내적 갈등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진정한 이타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교수님은 사회생물학의 핵심적인 과제는 이타성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했다. 교수님의 평생 연구로 이타성이 어디서 비롯됐는지를 설명한다면?
“진정한 이타성은 자신이 갖고 있는 가치 있는 것을 포기하는 행위다. 즉, 사회에서 자신의 소유, 자신의 안전, 가족을 이룰 기회, 자기 부의 일부를, 집단의 다른 이들의 복리를 위해서, 대가 없이 포기하는 것이다. 이게 진정한 이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자기 자신이 불에 타는 것을 무릅쓰고 불난 차 안의 사람을 구해내는 것이다. 물론 대다수 이타적 행동은 호혜적인 인식, 사회 계약에 기반해 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나의 것을 포기하는 것은, 반드시 그게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예를 들어 그게 우리 사회의 전체 복리를 증가시킨다고 판단해서―이 아니라, 내가 사회라는 그물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이런 행동들을 통해 내 인맥을 만든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 DC에서 평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치 체제는 이렇게 주고받는다는 인식 위에 세워져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이타성은 분명 존재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는 규명하기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집단선택설은 이런 진정한 이타성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어떻게 설명한다는 것인가?
“자신의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집단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그 집단이 다른 집단과 경쟁해 생존할 가능성을 높인다.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 자주 목격하는 행동이다. 그리고 그렇게 집단이 강해지면, 그 집단에 속한 자기 자신도 강화된다. 내 개인의 존재에는 해가 가겠지만, (그런 이타적 행동을 유발하는) 유전자의 생존과 확산의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다. 그리고 잘 살펴보면 사회는 그런 과정이 일어나도록 애쓴다.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희생하면서 타인을 도우면 사회는, 특히 그가 소속된 사회(사회의 하위 단위들·편집자 주)가 그 가족을 돌봐준다. 꽤 잘 돌아가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수학적으로 잘 모델링해 설명할 수 있다.”
―교수님은 이타주의에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맹목적 이타주의와 목적적 이타주의(보답을 기대하는 이타주의)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했다. ‘강력한 이타적 충동이 대개 목적적이라는 것은 행운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맹목적이라면, 역사는 족벌주의와 인종차별이라는 극심한 음모의 기록이 될 것이며, 미래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황량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목을 보면서 종교인이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과 같은 딜레마를 잘 묘사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교수님이 종교를 비판하는 것도 이런 이유인가?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잠시만, 내가 그런 말을….”
윌슨 교수는 매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대목은 기자가 읽은 그의 여러 책 중 하나에서 인용한 것이었다. 어느 책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윌슨 교수는 “지금 내 생각을 정리해야겠다. 당신이 내 책을 인용하긴 했지만. 흠… 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예전에 내가 진정한 이타성, 그러니까 그 어떠한 호혜적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하는 행동들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맥락에서 옛날에 말한 것 같은데. 흠, 찾아봐야겠다. 뭔가 내가 실언한 걸 잡아낸 것 같구먼….”
―아무래도 교수님이 첫 번째 퓰리처상을 받은 책 ‘인간 본성에 대하여(On Human Nature)’에 나와 있던 내용 같다(나중에 확인 결과 그랬다).
“아, 그럼 이해가 간다. 그건 1978년에 쓴 책 아닌가. 참 세월이 많이 바뀌었다.”
이 해프닝을 통해 기자는 윌슨 교수가 집단선택설로 학문적 전향을 한 것이, 인간성의 좀 더 따뜻한 면을 찾고 싶은 그의 내밀한 본능의 소산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테레사 수녀의 희생마저 이기적 유전자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면 인간의 삶은 너무 황량해지지 않겠는가? 윌슨 교수는 멀지 않은 죽음을 앞두고 사회와 화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과학은 투표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교수님은 그동안 쌓아 놓은 업적만으로 편안하게 살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편한 길을 포기하고 가시밭길을 선택했나?(왜 혈연선택설을 포기하고 집단선택설로 전향했느냐는 의미)
“나는 언제나 가시밭길을 걸었다. 중요한 과학적 발견은 언제나 논란을 유발한다. 과학은 원래 그렇게 변하는 거다. 과학은 투표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내가 1970년대 처음으로 사회생물학을 제안했을 때도 엄청나게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많은 과학자가 말로는 ‘언제나 새로운 정보와 데이터에 따라 변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실제로는 변화에 매우 인색하고 보수적이다.”
―마이클 샌델 교수를 아시는가? 정치학과의.
“물론이다.”
―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는 한국에서만 100만부나 팔렸다.
“오, 대단하다.”
―교수님은 “정의란 태생적 선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공정함”이라는 윤리 철학자들의 말을 반박했는데, 그 이유는?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웃음). 난 평생 하버드에서 철학자들 틈바구니에 있었다. 존 롤스, 마이클 샌델과도 교류했다. 그리고 지혜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도덕성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이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을 표피적으로 관찰하고 묘사하는 것만으로 철학을 세우고 결론을 이끌어낼 수 없다. 인간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들은 꼭 알아야 하는 것들을 알지 못한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했던 것들에 대해 말이다.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신호처리기계(뇌)가 갖고 있는 본능, 욕망 같은 것이 인류 진화 역사상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지 않으면, 결국 표피적 설명에 머물 뿐이고, 그러면 단지 상관관계들을 바탕으로 상위 이론을 만들게 될 뿐이다. 내 생각에 새로운 철학은 훨씬 더 많이 자연과학을 그 밑바탕으로 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불완전함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본질이자 의미
―과학자는 시인처럼 생각하고, 사서처럼 연구하고, 저널리스트처럼 글을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시인처럼 생각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창조적 과정이란 비슷하다는 의미다. 모든 과학자는, 특히 뭔가 새로운 것을 하려고 할 때, 끊임없이 꿈을 꾼다. 사실 가설이라는 게 공상이다. 백일몽을 꾼다. 뭔가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지어낸다. 최종 결과물을 상상해 본다. 그런데 이건 바로 시인들이 하는 일 아닌가?”
그가 올가을 낼 예정으로 지금 교정을 보는 책 제목은 ‘인간 존재의 의미(The Meaning of Human existence)’이다. 윌슨 교수는 “이제 난 그런 얘기를 할 나이가 된 것 같다. 그리고 나쁜 서평을 받아도 별로 상관없다. 어차피 오래 살 것도 아니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지구의 정복자’에서 지금의 세계를 ‘석기 시대의 정서, 중세의 제도, 신과 같은 기술’이 공존하는 곳으로 묘사했다. 그는 신과 같은 기술에 힘입어 인류가 인간 게놈(유전 정보 전체)을 수정할 수 있는 시기의 문턱에 와있다고 내다봤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자연선택이 아니라 ‘의지선택’으로 진화하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나은 인간 종―예를 들어 더 합리적이고, 불필요한 감정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종―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윌슨 교수는 그러나 “그런 세상이 가능하더라도 원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불완전하고, 엉성하고, 때로 위험하기까지 한 감정이야말로 인간을 수퍼컴퓨터와 구분하고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포가 많은 덩치 큰 생물은 어떻게 암을 억제해왔는가
출처: http://newspeppermint.com/2014/10/06/mcancer/
약 40년 전, 리처드 페토는 세포 하나가 암으로 발전할 확률은 모두 같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그리고 이 가설을 바탕으로, 세포를 더 많이 가진 더 큰 동물은 암에 걸릴 확률이 더 높을 것이며, 더 오래 사는 동물 역시 암에 걸릴 확률이 더 높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추측은 현실과 맞지 않았습니다. 모든 포유류는 크기와 수명과 무관하게 거의 비슷한 확률로 암에 걸렸습니다.
이 문제는 “페토의 역설”로 불립니다. 이를 설명하는 여러가지 가설들이 제시되었습니다. 한가지 가설은 작은 동물들은 신진대사가 더 빠르기 때문에 암을 발생시키는 것으로 알려진 자유기(free radical)를 더 많이 만든다는 것입니다. 또다른 가설은 진화의 영향으로 더 큰 동물들은 암을 억제하는 유전자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옥스포드의 진화생물학자 아리스 카츠라키스는 덩치 큰 동물이 암을 일으키는 특정 바이러스를 더 잘 억제하기 때문에 암에 덜 걸린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연구는 지난 7월 “PLOS 병원균(PLOS Pathogens)”에 실렸습니다.
암을 일으키는 점핑 바이러스는 “내인성 레트로바이러스(engogenous retroviruses)” 로 알려져 있으며 숙주의 유전자에 자신의 유전자를 집어넣음으로써 암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바이러스는 포유류와 함께 수백만년을 진화해왔기 때문에 여러 척추동물 유전자의 5 – 10 %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유전자의 대부분은 활성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암의 발생에 있어 이 바이러스의 영향을 계산하기위해 카츠라키스는 지난 1천만년 동안 존재했던 38종의 포유류에 대해 이들의 크기와 이들의 유전자에 포함된 레트로바이러스의 수를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더 큰 동물일수록 그들의 유전자에 이 레트로바이러스가 적게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어, 쥐의 유전자에는 3,331개의 바이러스 흔적이 있었던 반면, 인간은 348개를 그리고 돌고래는 단 55개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더 크고 오래사는 동물들일수록 이들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능력을 키웠음을 말해줍니다. 카츠라키스와 그의 연구팀은 이런 과정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구체적으로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코끼리나 고래와 같은 동물들은 어쩌면 이들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유전자를 더 많이 가지고 있거나, 혹은 더 효율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몸집을 크게 진화시킨 동물들은 암에 대한 저항력 역시 키웠을 것입니다. 이번 발견은 매우 놀라운 것입니다.”
이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옥스포드의 전염병학자이자 올해 71세가 된 리처드 페토의 말입니다.
약 40년 전, 리처드 페토는 세포 하나가 암으로 발전할 확률은 모두 같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그리고 이 가설을 바탕으로, 세포를 더 많이 가진 더 큰 동물은 암에 걸릴 확률이 더 높을 것이며, 더 오래 사는 동물 역시 암에 걸릴 확률이 더 높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추측은 현실과 맞지 않았습니다. 모든 포유류는 크기와 수명과 무관하게 거의 비슷한 확률로 암에 걸렸습니다.
이 문제는 “페토의 역설”로 불립니다. 이를 설명하는 여러가지 가설들이 제시되었습니다. 한가지 가설은 작은 동물들은 신진대사가 더 빠르기 때문에 암을 발생시키는 것으로 알려진 자유기(free radical)를 더 많이 만든다는 것입니다. 또다른 가설은 진화의 영향으로 더 큰 동물들은 암을 억제하는 유전자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옥스포드의 진화생물학자 아리스 카츠라키스는 덩치 큰 동물이 암을 일으키는 특정 바이러스를 더 잘 억제하기 때문에 암에 덜 걸린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연구는 지난 7월 “PLOS 병원균(PLOS Pathogens)”에 실렸습니다.
암을 일으키는 점핑 바이러스는 “내인성 레트로바이러스(engogenous retroviruses)” 로 알려져 있으며 숙주의 유전자에 자신의 유전자를 집어넣음으로써 암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바이러스는 포유류와 함께 수백만년을 진화해왔기 때문에 여러 척추동물 유전자의 5 – 10 %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유전자의 대부분은 활성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암의 발생에 있어 이 바이러스의 영향을 계산하기위해 카츠라키스는 지난 1천만년 동안 존재했던 38종의 포유류에 대해 이들의 크기와 이들의 유전자에 포함된 레트로바이러스의 수를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더 큰 동물일수록 그들의 유전자에 이 레트로바이러스가 적게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어, 쥐의 유전자에는 3,331개의 바이러스 흔적이 있었던 반면, 인간은 348개를 그리고 돌고래는 단 55개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더 크고 오래사는 동물들일수록 이들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능력을 키웠음을 말해줍니다. 카츠라키스와 그의 연구팀은 이런 과정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구체적으로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코끼리나 고래와 같은 동물들은 어쩌면 이들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유전자를 더 많이 가지고 있거나, 혹은 더 효율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몸집을 크게 진화시킨 동물들은 암에 대한 저항력 역시 키웠을 것입니다. 이번 발견은 매우 놀라운 것입니다.”
이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옥스포드의 전염병학자이자 올해 71세가 된 리처드 페토의 말입니다.
아파야 산다 - Sharon Moalem
샤론 모알렘 Sharon Moalem
출처: http://www.seehint.com/hint.asp?md=201&no=11419
제1장 철들면 죽는 병
제2장 빙하기를 이겨낸 당뇨병
제3장 콜레스테롤의 딜레마
제4장 말라리아를 부탁해
제5장 세균과 인간
제6장 바이러스의 재발견
제7장 콩 심은 데 팥 나는 사연
제8장 죽어야 사는 생명의 대원칙
인간은 왜 아플까? 왜 어떤 사람은 끔찍한 병에 걸려 단명하는 것일까? 인류를 괴롭히는 수많은 유전병과 당뇨병, 빈혈, 낭포성섬유증 등은 왜 생겼을까? 인간은 질병과 연관이 있는 일부 유전자 때문에 아플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유전자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도 있다. 이것이 파격적인 의학사상가 샤론 모알렘의 주장이다. 인체생리학과 최근 새롭게 떠오르는 분야인 신경유전학 및 진화의학 박사인 샤론 모알렘은 가족성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새로운 유전적 연관성을 발견하는 등, 꿀벌 면역학에서부터 질병의 진화적 이득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 논문을 발표했다.
‘우리 몸의 유전자는 부모로부터 시작해 태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 모든 생물체가 진화하면서 남긴 유산이다. 그들에게 닥친 온갖 역병, 포식자, 기생충, 지구상의 격변을 이겨낸 조상의 무용담이 유전자 코드 어딘가에 남겨 있다’라고 말하며, 기존 의학계에서 거의 다루지 않은 의문들을 파헤치고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인체생리학, 신경유전학, 진화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샤론 모알렘은 현재 뉴욕 마운트 시나이 의과대학에서 유전과 질병, 난치병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질병은 재앙이 아닌 축복이다!
14세기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흑사병. 유럽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죽은 무서운 전염병 속에서 왜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남았을까? 왜 말라리아에 걸리면 드러눕게 되지만 감기에 걸리면 출근하는 데 지장이 없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에이즈에 면역력이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하고 불필요한 유전자 스위치를 켜고 끄는 게 가능할까? 당뇨병은 빙하기를 이기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데…
내 몸을 아프게 하는 유전자, 하지만 그 유전자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독창적 의학 사상가 샤론 모알렘! 질병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 날카로운 통찰력, 파격적이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탄탄한 과학 연구 성과! 재미있게 읽으면서 깨달음을 얻는, 놓쳐서는 안 될 환상적인 인류 진화의 여정!
할아버지는 일흔한 살에 알츠하이머에 걸려 6년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평소 헌혈을 자주 했다. 아예 헌혈 자체를 즐겼다. 피를 뽑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고 몸이 가뿐해진다고 했다. 평소 쑤시고 아픈 것이 헌혈만 하면 싹 가실 뿐 아니라 힘도 솟는다는 것이었다. 당시 고교생으로 호기심이 많았던 지은이는 도서관을 온통 뒤져 그 원인을 찾아봤다. 알고 보니 혈색소침착증이라는 유전병 때문이었다. 몸속에 철분이 쌓여 췌장이나 간 등을 해치는 질병이다. ‘철분 과적’ 현상이다. 그러니 철분이 다량 포함된 혈액을 뽑아내면 개운해질 수밖에. 피를 뽑는 ‘사혈’ 요법이 효과가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은이의 호기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혈색소침착증이 유전병이라면 알츠하이머병도 유전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는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하면서 혈색소침착증과 알츠하이머병이 서로 관련이 있음을 밝혀냈다. 지은이가 인체생리학·신경유전학·진화유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랫동안 한 우물을 파온, 끈질긴 과학자다. 유전질환은 인류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수퍼박테리아 등 신종 질병도 유전의 특성을 잘 이용해 공격력을 약화한 뒤 공존하는 지혜를 찾아야 한다.
이런 배경을 지닌 지은이는 이 책에서 질병과 유전과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파헤친다. 그는 우리가 주변에서 늘 보지만 항상 간과해온 문제를 걸고넘어진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따르면 유전 과정에선 자연적 선택에 따라 열악한 형질은 도태되고 우세한 것만 대물림된다고 한다. 그런데 어째서 사람을 힘들게 하는 질병은 유전이 되는 것일까. 지은이는 다윈의 우성 유전론을 화두로 삼고 용맹정진에 나선다. 그 결과 그는 그 이유를 ‘우성’에 대한 사람과 자연의 기준이 서로 다른 데서 찾는다. 사람이 생각하는 우성의 기준은 ‘삶의 질’이지만 자연이 선택하는 기준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설명이다.
예로 당뇨의 경우, 빙하기에는 이를 가진 인간이 추위 속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훨씬 컸기 때문에 그 유전 형질이 지금까지 후손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당뇨에 걸리면 혈액 속에 당이 쌓이고 소변을 자주 보게 되면서 혈액 농도가 높아진다. 그럴 경우 장기적으로 혈관이 파손되고 장기에 손상을 입게 된다. 삶의 질에선 불리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잇점도 있다. 혈액 농도가 높으면 어는 점이 그만큼 낮아져 동사할 가능성이 작아진다. 당뇨 유전 형질을 가진 사람은 추위 속 생존에서는 훨씬 유리한 것이다. 결국 살아있는 모든 것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두 가지 사명에만 매진하게 마련인 모양이다.
또 다른 사례는 흑인에게만 나타나는 유전 질환인 겸상적혈구빈혈증이다. 원래 도넛 모양인 적혈구가 낫 모양으로 변하는 유전병이다. 빈혈은 물론 황달과 순환장애까지 일으킨다. 이런 고약한 유전병이 후손에게 계속 대물림되는 이유는 생존 때문이다. 이 병을 가진 사람은 말라리아에 강해 아프리카 열대우림 환경 속에서 생존 확률이 높다. 그래서 계속 후손에게 이 형질을 물려줄 수 있게 된다.
지은이의 할아버지를 괴롭혔던 혈색소침착증도 바이킹이 살던 극지방 등 척박한 환경 속에서 충분한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할 때는 생존에 유리하다. 그렇다면, 유전 질환은 인류가 험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는 데 큰 도움을 줬다는 설명도 가능해진다. 달리 표현하면, 죽지 않을 정도의 고난은 그만큼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고나 할까.
항생제에 잘 듣지 않는 변종 박테리아 등 다양한 위험이 인간을 힘들게 한다. 이를 헤쳐나가려면 이 같은 유전방식을 잘 이해하고 응용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유전의 특성을 잘 이용해 박테리아의 공격력을 약화한 뒤 함께 공존할 지혜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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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운전면허증을 받기 위해 적성검사를 실시한다. 이때 적록색맹인 사람중 일부는 면허증을 받지 못한다. 신호등에 쓰이는 녹색과 빨강을 구분하지 못해 사고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색맹인 사람은 일반인과 색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 그렇다면 색맹인 사람과 일반인이 보는 세상은 어떻게 다를까. 색 구분력이 떨어져 일반인보다 더 적은 색의 세상을 볼까. 케임브리지대 연구팀은 색맹인 사람이 정상인보다 색을 ‘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본다는 연구결과를 커런트 바이올로지(Current Biology) 12월 최신호에 발표했다. 색은 적색, 녹색, 청색을 받아들이는 세 종류의 원추세포를 통해 인지된다. 적록색맹인 사람들은 녹색을 인지하는 원추세포가 적색과 가까운 파장의 빛을 인지하도록 변형돼 적색과 녹색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적록색맹에 관련된 유전자는 X염색체에 존재하며 적록색맹 중 녹색약'이 6%이다. 이들 연구팀은 변형된 원추세포가 인식하는 빛의 파장을 계산해서 적록색맹인 사람에게는 구별되지만 정상인에게는 같게 보일 것으로 기대되는 영역의 색, 즉 녹색계통의 색을 보여주고 색을 구별할 수 있는 지 실험했다. 예상대로 적록색맹인 사람들은 이 색의 차이를 쉽게 식별하는 반면 정상인은 똑같은 녹색으로 보았다. 정상인이 볼 수 없는 색을 적록색맹인 사람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를 주도한 존 몰론 교수는 “2차 세계대전 때 색맹인 사람들이 적군의 위장을 알아채는데 탁월했다는 속설이 있었다. 이번 연구가 이를 증명한 셈이다”고 말했다. 나뭇잎 등 주변 배경과 비슷하게 보이는 위장색은 보통사람에게는 잘 안보이지만 적록색맹인 사람에게는 좀더 뚜렷하게 보인 듯 싶다. 색맹은 인류의 진화에서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을까. 농업사회에 이르기 전에 인류는 긴 시간동안 고기와 나무열매를 주식으로 삼았다. 적록색맹인 사람은 빨갛게 익은 열매를 발견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따라서 적록색맹의 유전자는 도태됐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에도 높은 빈도의 적록색맹 유전자가 남아있다는 사실은 색맹으로 발생하는 손해를 충당할만한 이점을 지니고 있음을 추론케 한다. 진화는 이익과 손해의 중간점에서 균형을 맞추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예가 겸상적혈구 빈혈증이다. 겸상적혈구 빈혈증은 헤모글로빈 유전자의 변이로 산소가 부족할 때 낫모양으로 일그러지는 적혈구를 만드는 유전병이다. 이 유전자는 열성이기 때문에 부모 한 쪽에서라도 정상 유전자를 받으면 병을 일으키지 않지만 쌍 전체가 유전자 변이를 가지고 있으면 겸상적혈구 빈혈증의 여러 가지 증상으로 인해 수명이 단축된다. 이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유전자는 미국의 흑인 열명 중 한명이 보유하고 있고, 600명 중 한명이 겸상적혈구 빈혈증으로 고통 받는다. 그런데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겸상적혈구 빈혈증이 도태되지 않고 남아 있을까. 1940년대에 과학자들은 이 유전자가 도태되지 않는 이유가 말라리아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정상 유전자만을 가진 사람에 비해 이 유전자를 하나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 말라리아 저항성이 강하다. 따라서 말라리아 위험이 높은 지역에서는 겸상적혈구 유전자 보유자가 손해를 충당할만한 이점을 갖는다.
최근에 알려진 또다른 예는 혀다. TAS2R16 유전자는 식물이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생산하는 독소인 베타-글루코피라노사이드에 대해 쓴 맛을 느끼게 하는 미각수용체를 만들어낸다. TAS2R16 유전자는 두가지 형태가 존재하는데 새로운 형태의 유전자가 원시형보다 쓴맛을 더 강하게 느끼도록 한다. 과학자들은 과거 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나기 직전에 새로운 형태가 생겨나 확산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인류가 낯선 지역으로 이동하면 처음 만나는 식물을 먹게 된다. 이때 쓴 맛을 통해 독이 있음을 경고하는 유전자가 생존에 유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원시형의 유전자가 아직도 높은 빈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 지역은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지역과 일치했다. 과학자들은 독소를 약하게 느껴 독소를 더 많이 섭취하면 말라리아 저항성이 강화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두가지 형태의 TAS2R16 유전자는 음식물의 독소와 말라리아라는 두 가지의 위협 속에서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색맹 유전자의 역사에는 겸상 적혈구 유전자와 TAS2R16 유전자 뒤에 감춰진 이야기들보다 더 놀라운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모른다. 색맹 원시인은 사냥터에서 선봉장이 돼 가장 먼저 사냥감을 발견하고 진두지휘를 했던 것은 아닐까.
출처: http://www.seehint.com/hint.asp?md=201&no=11419
제1장 철들면 죽는 병
제2장 빙하기를 이겨낸 당뇨병
제3장 콜레스테롤의 딜레마
제4장 말라리아를 부탁해
제5장 세균과 인간
제6장 바이러스의 재발견
제7장 콩 심은 데 팥 나는 사연
제8장 죽어야 사는 생명의 대원칙
인간은 왜 아플까? 왜 어떤 사람은 끔찍한 병에 걸려 단명하는 것일까? 인류를 괴롭히는 수많은 유전병과 당뇨병, 빈혈, 낭포성섬유증 등은 왜 생겼을까? 인간은 질병과 연관이 있는 일부 유전자 때문에 아플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유전자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도 있다. 이것이 파격적인 의학사상가 샤론 모알렘의 주장이다. 인체생리학과 최근 새롭게 떠오르는 분야인 신경유전학 및 진화의학 박사인 샤론 모알렘은 가족성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새로운 유전적 연관성을 발견하는 등, 꿀벌 면역학에서부터 질병의 진화적 이득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 논문을 발표했다.
‘우리 몸의 유전자는 부모로부터 시작해 태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 모든 생물체가 진화하면서 남긴 유산이다. 그들에게 닥친 온갖 역병, 포식자, 기생충, 지구상의 격변을 이겨낸 조상의 무용담이 유전자 코드 어딘가에 남겨 있다’라고 말하며, 기존 의학계에서 거의 다루지 않은 의문들을 파헤치고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인체생리학, 신경유전학, 진화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샤론 모알렘은 현재 뉴욕 마운트 시나이 의과대학에서 유전과 질병, 난치병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질병은 재앙이 아닌 축복이다!
14세기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흑사병. 유럽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죽은 무서운 전염병 속에서 왜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남았을까? 왜 말라리아에 걸리면 드러눕게 되지만 감기에 걸리면 출근하는 데 지장이 없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에이즈에 면역력이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하고 불필요한 유전자 스위치를 켜고 끄는 게 가능할까? 당뇨병은 빙하기를 이기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데…
내 몸을 아프게 하는 유전자, 하지만 그 유전자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독창적 의학 사상가 샤론 모알렘! 질병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 날카로운 통찰력, 파격적이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탄탄한 과학 연구 성과! 재미있게 읽으면서 깨달음을 얻는, 놓쳐서는 안 될 환상적인 인류 진화의 여정!
할아버지는 일흔한 살에 알츠하이머에 걸려 6년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평소 헌혈을 자주 했다. 아예 헌혈 자체를 즐겼다. 피를 뽑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고 몸이 가뿐해진다고 했다. 평소 쑤시고 아픈 것이 헌혈만 하면 싹 가실 뿐 아니라 힘도 솟는다는 것이었다. 당시 고교생으로 호기심이 많았던 지은이는 도서관을 온통 뒤져 그 원인을 찾아봤다. 알고 보니 혈색소침착증이라는 유전병 때문이었다. 몸속에 철분이 쌓여 췌장이나 간 등을 해치는 질병이다. ‘철분 과적’ 현상이다. 그러니 철분이 다량 포함된 혈액을 뽑아내면 개운해질 수밖에. 피를 뽑는 ‘사혈’ 요법이 효과가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은이의 호기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혈색소침착증이 유전병이라면 알츠하이머병도 유전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는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하면서 혈색소침착증과 알츠하이머병이 서로 관련이 있음을 밝혀냈다. 지은이가 인체생리학·신경유전학·진화유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랫동안 한 우물을 파온, 끈질긴 과학자다. 유전질환은 인류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수퍼박테리아 등 신종 질병도 유전의 특성을 잘 이용해 공격력을 약화한 뒤 공존하는 지혜를 찾아야 한다.
이런 배경을 지닌 지은이는 이 책에서 질병과 유전과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파헤친다. 그는 우리가 주변에서 늘 보지만 항상 간과해온 문제를 걸고넘어진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따르면 유전 과정에선 자연적 선택에 따라 열악한 형질은 도태되고 우세한 것만 대물림된다고 한다. 그런데 어째서 사람을 힘들게 하는 질병은 유전이 되는 것일까. 지은이는 다윈의 우성 유전론을 화두로 삼고 용맹정진에 나선다. 그 결과 그는 그 이유를 ‘우성’에 대한 사람과 자연의 기준이 서로 다른 데서 찾는다. 사람이 생각하는 우성의 기준은 ‘삶의 질’이지만 자연이 선택하는 기준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설명이다.
예로 당뇨의 경우, 빙하기에는 이를 가진 인간이 추위 속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훨씬 컸기 때문에 그 유전 형질이 지금까지 후손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당뇨에 걸리면 혈액 속에 당이 쌓이고 소변을 자주 보게 되면서 혈액 농도가 높아진다. 그럴 경우 장기적으로 혈관이 파손되고 장기에 손상을 입게 된다. 삶의 질에선 불리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잇점도 있다. 혈액 농도가 높으면 어는 점이 그만큼 낮아져 동사할 가능성이 작아진다. 당뇨 유전 형질을 가진 사람은 추위 속 생존에서는 훨씬 유리한 것이다. 결국 살아있는 모든 것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두 가지 사명에만 매진하게 마련인 모양이다.
또 다른 사례는 흑인에게만 나타나는 유전 질환인 겸상적혈구빈혈증이다. 원래 도넛 모양인 적혈구가 낫 모양으로 변하는 유전병이다. 빈혈은 물론 황달과 순환장애까지 일으킨다. 이런 고약한 유전병이 후손에게 계속 대물림되는 이유는 생존 때문이다. 이 병을 가진 사람은 말라리아에 강해 아프리카 열대우림 환경 속에서 생존 확률이 높다. 그래서 계속 후손에게 이 형질을 물려줄 수 있게 된다.
지은이의 할아버지를 괴롭혔던 혈색소침착증도 바이킹이 살던 극지방 등 척박한 환경 속에서 충분한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할 때는 생존에 유리하다. 그렇다면, 유전 질환은 인류가 험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는 데 큰 도움을 줬다는 설명도 가능해진다. 달리 표현하면, 죽지 않을 정도의 고난은 그만큼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고나 할까.
항생제에 잘 듣지 않는 변종 박테리아 등 다양한 위험이 인간을 힘들게 한다. 이를 헤쳐나가려면 이 같은 유전방식을 잘 이해하고 응용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유전의 특성을 잘 이용해 박테리아의 공격력을 약화한 뒤 함께 공존할 지혜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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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운전면허증을 받기 위해 적성검사를 실시한다. 이때 적록색맹인 사람중 일부는 면허증을 받지 못한다. 신호등에 쓰이는 녹색과 빨강을 구분하지 못해 사고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색맹인 사람은 일반인과 색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 그렇다면 색맹인 사람과 일반인이 보는 세상은 어떻게 다를까. 색 구분력이 떨어져 일반인보다 더 적은 색의 세상을 볼까. 케임브리지대 연구팀은 색맹인 사람이 정상인보다 색을 ‘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본다는 연구결과를 커런트 바이올로지(Current Biology) 12월 최신호에 발표했다. 색은 적색, 녹색, 청색을 받아들이는 세 종류의 원추세포를 통해 인지된다. 적록색맹인 사람들은 녹색을 인지하는 원추세포가 적색과 가까운 파장의 빛을 인지하도록 변형돼 적색과 녹색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적록색맹에 관련된 유전자는 X염색체에 존재하며 적록색맹 중 녹색약'이 6%이다. 이들 연구팀은 변형된 원추세포가 인식하는 빛의 파장을 계산해서 적록색맹인 사람에게는 구별되지만 정상인에게는 같게 보일 것으로 기대되는 영역의 색, 즉 녹색계통의 색을 보여주고 색을 구별할 수 있는 지 실험했다. 예상대로 적록색맹인 사람들은 이 색의 차이를 쉽게 식별하는 반면 정상인은 똑같은 녹색으로 보았다. 정상인이 볼 수 없는 색을 적록색맹인 사람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를 주도한 존 몰론 교수는 “2차 세계대전 때 색맹인 사람들이 적군의 위장을 알아채는데 탁월했다는 속설이 있었다. 이번 연구가 이를 증명한 셈이다”고 말했다. 나뭇잎 등 주변 배경과 비슷하게 보이는 위장색은 보통사람에게는 잘 안보이지만 적록색맹인 사람에게는 좀더 뚜렷하게 보인 듯 싶다. 색맹은 인류의 진화에서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을까. 농업사회에 이르기 전에 인류는 긴 시간동안 고기와 나무열매를 주식으로 삼았다. 적록색맹인 사람은 빨갛게 익은 열매를 발견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따라서 적록색맹의 유전자는 도태됐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에도 높은 빈도의 적록색맹 유전자가 남아있다는 사실은 색맹으로 발생하는 손해를 충당할만한 이점을 지니고 있음을 추론케 한다. 진화는 이익과 손해의 중간점에서 균형을 맞추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예가 겸상적혈구 빈혈증이다. 겸상적혈구 빈혈증은 헤모글로빈 유전자의 변이로 산소가 부족할 때 낫모양으로 일그러지는 적혈구를 만드는 유전병이다. 이 유전자는 열성이기 때문에 부모 한 쪽에서라도 정상 유전자를 받으면 병을 일으키지 않지만 쌍 전체가 유전자 변이를 가지고 있으면 겸상적혈구 빈혈증의 여러 가지 증상으로 인해 수명이 단축된다. 이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유전자는 미국의 흑인 열명 중 한명이 보유하고 있고, 600명 중 한명이 겸상적혈구 빈혈증으로 고통 받는다. 그런데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겸상적혈구 빈혈증이 도태되지 않고 남아 있을까. 1940년대에 과학자들은 이 유전자가 도태되지 않는 이유가 말라리아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정상 유전자만을 가진 사람에 비해 이 유전자를 하나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 말라리아 저항성이 강하다. 따라서 말라리아 위험이 높은 지역에서는 겸상적혈구 유전자 보유자가 손해를 충당할만한 이점을 갖는다.
최근에 알려진 또다른 예는 혀다. TAS2R16 유전자는 식물이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생산하는 독소인 베타-글루코피라노사이드에 대해 쓴 맛을 느끼게 하는 미각수용체를 만들어낸다. TAS2R16 유전자는 두가지 형태가 존재하는데 새로운 형태의 유전자가 원시형보다 쓴맛을 더 강하게 느끼도록 한다. 과학자들은 과거 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나기 직전에 새로운 형태가 생겨나 확산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인류가 낯선 지역으로 이동하면 처음 만나는 식물을 먹게 된다. 이때 쓴 맛을 통해 독이 있음을 경고하는 유전자가 생존에 유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원시형의 유전자가 아직도 높은 빈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 지역은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지역과 일치했다. 과학자들은 독소를 약하게 느껴 독소를 더 많이 섭취하면 말라리아 저항성이 강화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두가지 형태의 TAS2R16 유전자는 음식물의 독소와 말라리아라는 두 가지의 위협 속에서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색맹 유전자의 역사에는 겸상 적혈구 유전자와 TAS2R16 유전자 뒤에 감춰진 이야기들보다 더 놀라운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모른다. 색맹 원시인은 사냥터에서 선봉장이 돼 가장 먼저 사냥감을 발견하고 진두지휘를 했던 것은 아닐까.
큰 동물이 오래사는 이유
출처: Seehint.com (최낙언)
<기능이 크기를 제한하고, 크기가 기능을 제한한다>
- 세균은 외막(표면적)에 의존하여 에너지 생산
- 따라서 부피가 증가하면 에너지 효율이 크게 하락
- 길이 10배 증가하면 표면적 100배, 부피 1000배 증가
- 따라서 표면적당 에너지 효율이 10배는 증가해야 버틸 수 있음
대책
- 표면적 증가를 위한 변형 시도(창자 융털)
- 유전적 복잡성 추구
- 표면적이 구조의 단단함을 결정
- 부피/체중 증가시 표면적 비율이 작아지므로 동일 구조로 체중을 견디지 못함
- 덩치카 커지면 심장이 커져야 하는데 큰 심장이 빠르게 뛰면 장기가 못 견딤
- 그래서 심장이 천천히 뛰고 산소 공급이 느려짐
(분당 심박수 쥐800회, 임팔라 150회, 사자 60회, 코끼리 30회)
- 산소사용 효율성을 높이는 시스템을 개발해야 성장하고 장수
- 모든 포유류는 평생 15억회 심장이 뛰며, 큰 동물과 작은 동물이 모두 같음
- 따라서 이것이 생존 기간을 결정
- 심박수가 느린 동물이 장수
(예외) 인간: 심박수에 비해 기타 포유류보다 2배 오래 생존
- 조류는 포유류에 비해 10배는 오래 생존(같은 크기, 같은 체질량일 때)
- 추운 곳에 사는 동물은 단위 발열량을 줄여야 함
- 그래서 몸집을 키워서 부피에 대한 표면적의 비율을 줄임
- 크기가 클수록 지방 함량이 많다. 그래서 큰 생선이 맛있다.
<기능이 크기를 제한하고, 크기가 기능을 제한한다>
- 세균은 외막(표면적)에 의존하여 에너지 생산
- 따라서 부피가 증가하면 에너지 효율이 크게 하락
- 길이 10배 증가하면 표면적 100배, 부피 1000배 증가
- 따라서 표면적당 에너지 효율이 10배는 증가해야 버틸 수 있음
대책
- 표면적 증가를 위한 변형 시도(창자 융털)
- 유전적 복잡성 추구
- 표면적이 구조의 단단함을 결정
- 부피/체중 증가시 표면적 비율이 작아지므로 동일 구조로 체중을 견디지 못함
- 덩치카 커지면 심장이 커져야 하는데 큰 심장이 빠르게 뛰면 장기가 못 견딤
- 그래서 심장이 천천히 뛰고 산소 공급이 느려짐
(분당 심박수 쥐800회, 임팔라 150회, 사자 60회, 코끼리 30회)
- 산소사용 효율성을 높이는 시스템을 개발해야 성장하고 장수
- 모든 포유류는 평생 15억회 심장이 뛰며, 큰 동물과 작은 동물이 모두 같음
- 따라서 이것이 생존 기간을 결정
- 심박수가 느린 동물이 장수
(예외) 인간: 심박수에 비해 기타 포유류보다 2배 오래 생존
- 조류는 포유류에 비해 10배는 오래 생존(같은 크기, 같은 체질량일 때)
- 추운 곳에 사는 동물은 단위 발열량을 줄여야 함
- 그래서 몸집을 키워서 부피에 대한 표면적의 비율을 줄임
- 크기가 클수록 지방 함량이 많다. 그래서 큰 생선이 맛있다.
2014년 10월 16일 목요일
금의환향(錦衣還鄕)과 좌천(左遷)
항우는 진나라를 멸망시킨 뒤 고향 팽성으로 돌아가며 천하의 주인이 된 자신을 빗대 금의환향(錦衣還鄕), 즉 ‘비단옷을 입고 돌아간다’는 말로 명분을 삼았다.
반면 유방은 항우의 견제로 서남부 험준한 변경 한중으로 귀양가듯 쫓겨나자 이를 빗대 좌천(左遷)이라는 용어가 생겼다. 그러나 결과는 좌천을 당한 유방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 현경병, ‘중국을 만든 사람들'
항우처럼 한때의 승리에 자만하면 곧 패배를 불러온다. 유방처럼 지금은 비록 패배와 시련을 겪지만 어디에서든 자신을 갈고 닦아 실력을 기르면 언젠가는 역전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교만을 멀리하고 주어진 현실에서 늘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승리의 월계관이 돌아간다.
반면 유방은 항우의 견제로 서남부 험준한 변경 한중으로 귀양가듯 쫓겨나자 이를 빗대 좌천(左遷)이라는 용어가 생겼다. 그러나 결과는 좌천을 당한 유방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 현경병, ‘중국을 만든 사람들'
항우처럼 한때의 승리에 자만하면 곧 패배를 불러온다. 유방처럼 지금은 비록 패배와 시련을 겪지만 어디에서든 자신을 갈고 닦아 실력을 기르면 언젠가는 역전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교만을 멀리하고 주어진 현실에서 늘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승리의 월계관이 돌아간다.
2014년 10월 5일 일요일
월령효과2: 월령효과의 반전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들 뿐이다.”
- 니체 -
나는 월령효과 편에서 캐나다 아이스하키 팀을 중심으로 잘못된 가정과 시스템이 불합리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잘못된 가정이 있다면 그 가정을 수정해야 하고 불합리한 시스템이 있다면 그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당신에게 내 딸처럼 하반기에 태어나는 불운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그 불운을 가져오는 시스템을 내가 고칠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짐 콜린스 연구팀은 캐나다 아이스하키의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선수들을 조사했다. 캐나다 하키의 명예의 전당은 해마다 4명의 선수만 추대되고 있으며 평가는 선수 경력 전체를 기준으로 한다. 명예의 전당에 오른 선수들은 그야말로 위대한 선수들이다.
이 위대한 선수들의 태어난 월을 조사한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명예의 전당에 오른 출생월별 비율을 보면 1~3월은 22.9%, 4~6월은 25.7%, 7~9월은 25.7%, 10~12월은 25.7%로 나왔다. 통계를 보면 알겠지만 심지어 1~3월 출생이 가장 적다. 상반기와 하반기로 나누면 아주 적은 수치이긴 하지만 하반기에 태어난 더 많게 나타났다. 그 강력하다는 월령효과는 위대한 선수들 앞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이 명예의 전당에서 나타난 통계는 보이는 것 이상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상반기와 하반기가 거의 50 대 50이지만 캐나다 프로 하키 선수들의 70%가 상반기에 태어났다는 것을 기억해보라. 그중에서도 1~3월 출신이 40%에 다다른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프로 선수의 40%의 차지한 선수들은 겨우 명예의 전당의 22.9%를 차지하고 있지만 프로 선수의 10%에 불과한 10~12월생 선수들은 명예의 전당의 25.7%를 차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월령효과는 좋은 선수들을 선발하는 데에는 그 마수를 강력하게 펼쳤지만 위대한 선수들에게는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월령효과라는 불행이 이들을 위대한 선수로 만들었다고.
‘맨발의 마라토너’ 아베베 바킬라를 아는가? 그는 1960년 로마 올림픽 마라톤 경주에서 69명의 선수 중 유일하게 흑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2시간 15분 16초라는 세계기록으로 아프리카인 최초로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그는 당시 철저하게 배척당하는 흑인이었으며 게다가 어둠의 대륙 아프리카 출신이었다. 그는 그에게 닥친 불운과 고통을 이겨내고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4년 뒤 그는 도쿄올림픽 마라톤에서도 세계 기록을 갈아치우며 올림픽 마라톤 2연패라는 기염을 토해냈다. 그러나 불과 경기 6주 전에 맹장수술을 받아 자신의 컨디션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위대한 선수를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리고 또 4년 뒤 멕시코 올림픽. 아프리카인들은 아베베를 ‘아프리카의 자긍심’으로 여기며 올림픽 3연패를 염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불행하게도 다리 골절상을 입었고 경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년 뒤 그는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그리고 그때 그는 이런 말을 하게 된다.
“더 이상 내 다리는 달릴 수 없지만 나에게는 아직 두 팔이 있다.”
이 위대한 선수는 장애인 올림픽에 출전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금메달을 목에 건다. 그는 그에게 남은 두 팔로 총(사격)과 활(양궁)을 통해 그에게 닥친 불운은 날려 버렸다.
- 니체 -
나는 월령효과 편에서 캐나다 아이스하키 팀을 중심으로 잘못된 가정과 시스템이 불합리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잘못된 가정이 있다면 그 가정을 수정해야 하고 불합리한 시스템이 있다면 그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당신에게 내 딸처럼 하반기에 태어나는 불운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그 불운을 가져오는 시스템을 내가 고칠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짐 콜린스 연구팀은 캐나다 아이스하키의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선수들을 조사했다. 캐나다 하키의 명예의 전당은 해마다 4명의 선수만 추대되고 있으며 평가는 선수 경력 전체를 기준으로 한다. 명예의 전당에 오른 선수들은 그야말로 위대한 선수들이다.
이 위대한 선수들의 태어난 월을 조사한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명예의 전당에 오른 출생월별 비율을 보면 1~3월은 22.9%, 4~6월은 25.7%, 7~9월은 25.7%, 10~12월은 25.7%로 나왔다. 통계를 보면 알겠지만 심지어 1~3월 출생이 가장 적다. 상반기와 하반기로 나누면 아주 적은 수치이긴 하지만 하반기에 태어난 더 많게 나타났다. 그 강력하다는 월령효과는 위대한 선수들 앞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이 명예의 전당에서 나타난 통계는 보이는 것 이상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상반기와 하반기가 거의 50 대 50이지만 캐나다 프로 하키 선수들의 70%가 상반기에 태어났다는 것을 기억해보라. 그중에서도 1~3월 출신이 40%에 다다른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프로 선수의 40%의 차지한 선수들은 겨우 명예의 전당의 22.9%를 차지하고 있지만 프로 선수의 10%에 불과한 10~12월생 선수들은 명예의 전당의 25.7%를 차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월령효과는 좋은 선수들을 선발하는 데에는 그 마수를 강력하게 펼쳤지만 위대한 선수들에게는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월령효과라는 불행이 이들을 위대한 선수로 만들었다고.
‘맨발의 마라토너’ 아베베 바킬라를 아는가? 그는 1960년 로마 올림픽 마라톤 경주에서 69명의 선수 중 유일하게 흑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2시간 15분 16초라는 세계기록으로 아프리카인 최초로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그는 당시 철저하게 배척당하는 흑인이었으며 게다가 어둠의 대륙 아프리카 출신이었다. 그는 그에게 닥친 불운과 고통을 이겨내고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4년 뒤 그는 도쿄올림픽 마라톤에서도 세계 기록을 갈아치우며 올림픽 마라톤 2연패라는 기염을 토해냈다. 그러나 불과 경기 6주 전에 맹장수술을 받아 자신의 컨디션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위대한 선수를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리고 또 4년 뒤 멕시코 올림픽. 아프리카인들은 아베베를 ‘아프리카의 자긍심’으로 여기며 올림픽 3연패를 염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불행하게도 다리 골절상을 입었고 경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년 뒤 그는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그리고 그때 그는 이런 말을 하게 된다.
“더 이상 내 다리는 달릴 수 없지만 나에게는 아직 두 팔이 있다.”
이 위대한 선수는 장애인 올림픽에 출전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금메달을 목에 건다. 그는 그에게 남은 두 팔로 총(사격)과 활(양궁)을 통해 그에게 닥친 불운은 날려 버렸다.
월령효과1: 아이를 학교에 일찍 보내서는 안되는 이유
내 딸의 생일은 11월 5일이고 친한 친구의 아들은 생일이 1월 1일이다. 두 아이는 모두 같은 해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모든 것을 나이로 나누는 우리나라의 시스템으로 볼 때, 이 두 아이는 항상 함께 갈 것이다. 그런데 보통 어린이집에 들어가는 4세 때 내 딸은 30개월이었지만 친구의 아들은 40개월이었다. 당시 10개월은 딸아이가 살아온 날들의 33%에 해당되었다. 같은 나이지만, 두 아이의 몸과 삶의 경험 차이는 하늘과 땅차이였다. 당시 아버지로서 우리 딸이 상반기에 태어난 아이들과 잘 헤쳐나 갈 수 있을지 꽤 걱정되었다. 왜냐하면 ‘월령효과’ 때문이다.
어릴 때의 몇 개월은 엄청난 차이를 낳는다
심리학자인 로저 반슬리(Roger Barnsley)는 아내와 친구인 톰슨과 함께 캐나다 프로 아이스하키팀의 명단을 검토하던 중에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 했다. 통계를 보니 프로 아이스하키 선수 중에서 1월생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이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두 번째로 많은 달은 2월이었고 세 번째로 많은 달은 3월이었다.
반슬리는 주니어 아이스하키 선수들을 살펴보았다. 마찬가지로 1월생이 11월생보다 5배나 많았다. 11세와 13세 올스 타팀, 그리고 내셔널 하키 리그의 선수들을 모두 조사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생일이 빠른 아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자료를 종합해 보았더니 어떤 엘리트 아이스하키 선수팀을 선택하더 라도, 선수들의 40%는 1~3월생, 30%는 4~6월생, 20%는 7~9월생, 10% 는 10~12월생이었다. 조사를 마친 후 그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심리학계에 몸담아 왔지만 월령효과만큼 강력한 효과를 본 적이 없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는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다. 한 학년에서 아이들끼리 생일의 최대 편차는 1년에 가깝다. 그런데 사춘기 이전,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이 1년의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캐나다는 아이스하키가 최고의 인기 스포츠이기 때문에 9세부터 될성부른 아이들을 선발한다.
당연히 9세의 1월생 아이들은 같은 나이의 12월생 아이들보다 신체발달이 꽤 유리하기에 먼저 코치의 눈에 띌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렇게 해서 엘리트팀에 선발된다면 그들은 최고의 훈련과 대우를 받으며 훈련할 것이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신체적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아이들이 경쟁을 했을 때, 상반기에 태어난 아이들은 승리를 맛볼 기회가 많아지며 자신감이 높아지는 등 긍정적 시너지를 얻게 된다. 반면 하반기에 태어난 아이일수록 패배의 경험이 많아져 좌절감이나 패배감이라는 부정적 시너지를 얻게 될 확률이 크다.
이렇게 신체와 정신적 측면 모두 상반기에 태어난 아이들이, 하반기에 태어난 아이들보다 유리하기 때문에 생일이 빠른 아이들은 ‘기대주’로 뽑히고 승승장구의 길을 갈 수 있게 된다.
아이스하키만 그러할까? 앞에서 소개한 반슬리의 고백을 되새겨 보자. 월령효과는 매우 강력하다. 미국에서 야구 리그는 7월 31일을 기준으 로 선수의 연령을 구분하고 일찍부터 선수를 선별한다. 2005년 메이저리 그에 출전한 미국계 선수들을 조사한 결과, 8월생은 505명이었지만 7월 생은 고작 313명이었다. 무려 200명 가까이 차이가 나는데 이는 충격적 이기까지 하다.
그러면 축구선수들은 어떨까? 영국 축구선수의 나이 구분은 9월 1일이 기준이다. 1990년 프리미어리그에 출전한 선수들 중에서 9~11월생은 288명인 반면에 6~8월생은 고작 136명이다. 두 배가 넘는 수치이다.
월령효과는 스포츠뿐 아니라 공부와 태도에도 영향을 준다
그런데 월령효과는 스포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어린 나이에 1년 차는 신체뿐만 아니라 지능, 인식, 태도 등 정신영역에서도 차이가 나고 이는 바로 학업 성취도의 차이로 이어진다.
경제학자인 켈리 베다드(Kelly Bedard)와 엘리자베스 듀이(Elizabeth Dhuey)가 4학년의 TIMSS(수학·과학 성취도 추이변화 국제비교연구) 성적을 조사한 결과, 나이가 같더라도 생일이 빠른 학생들이 생일이 늦은 학생들보다 4~12점이나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는 생일이 빠른 학생들은 상위 18%에 속하지만 생일이 늦은 학생들은 상위 68%에 머문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향은 한 사람의 삶에서 언제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베다드와 듀이는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이며 월령효과가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는 4년제 대학교를 조사했다. 그런데 거기에서도 생일이 늦은 아이들의 성적이 약 11.6% 낮게 나온 것이다. 월령효과의 망령은 지독했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어떠할까? 고려대학교 교육학과의 홍후조 교수팀에 따르면 2006년 고등학교 1학년생의 OECD 학업성취도 국제비교(PISA) 성적과 월령 간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 3월생이 다음해 2월생 보다 평균 20~25점이 높았다. 우리나라는 예전에는 빠른 생일이라고 하여 2월생까지는 1년 일찍 학교에 입학했다.
뿐만 아니라 국제고, 외고, 과학고 등의 엘리트 고등학교 재학생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월령효과는 강력했다. 1분기에 태어난 학생은 30.2%였지만 4분기에 태어난 학생은 18.5%에 불과했다.
종합해 보면 이렇다. 스포츠건 학업성적이건 1년 단위로 묶는 현재의 시스템에서는 하반기에 태어난 아이들이 상반기에 태어난 아이들보다 불리한 환경에 있다. 게다가 월령효과가 강하게 나타나고 매우 오래 지속되는 영역은 엘리트 중심의 시스템이 자리잡은 곳이다. 왜냐하면 엘리트 중심의 교육은 일찍부터 될성부른 아이들을 선별하는데 어릴수록 월령효과의 힘은 강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점은 시스템 설계를 잘못할수록 제대로 된 평가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생일이 빠르다는 이유만으로 유리한 것이 통계적 사실이지만, 만약 잘못된 시스템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각 개인의 자질에 의해 차이가 난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는 ‘자기 실현적 예언’이 된다.
‘자기실현적 예언’이란 시작 단계에서 잘못된 가정을 세웠을 때, 다음에 나타나는 새로운 행동이 최초의 잘못된 정의를 올바른 것이 되도록 하는 상황을 말한다. 실제로는 생일이 빨라서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인 데, 원래 잘한다고 생각하여 엘리트로 선발하면 결국 그 아이는 잘 할 확률이 높아지고 자연스럽게 최초의 생각이 결국 옳았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알렉스 맥킨지(Alex Mckenzie)는 이런 말을 했다.
“모든 실패의 뿌리에는 잘못된 가정(假定)이 있다.”
사람을 평가할 때, 또는 어떠한 현상을 판단할 때에 평가대상에만 모든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된다. 내가 잘못된 가정을 가지고 평가하는지 점검하고, 평가대상이 어떠한 시스템에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덴마크는 월령효과를 잘 이해하고 있기에 교육적 차원에서 아이들의 능력에 대한 분류를 최대한 늦춘다고 한다. 최대한 월령효과가 사라질 때까지 말이다. 하지만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래서 11월생 딸을 가진 아빠는 조금 걱정이 된다.
- ㅍㅍㅅㅅ, 그녀생각’s 생각 -
2014년 10월 3일 금요일
왜 모든이들이 스웨덴 모델을 택하지 않는가?
I. 서론
우리 사회의 화두가 복지로 이동한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성장은 모든 문제를 덮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만병통치약이지만, 저성장 사회에 들어와 있거나 들어갈 것이 예상 가능한 상황이기에, 이제라도 이 논의가 사회의 주요 agenda로 설정된 것은 분명히 환영할만하다. 적어도 지역주의 극복 같은 아젠다보다는 훨씬 낫다. 복지의 근본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는 주변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사람이 없는지라 잘 모르겠다. 아마도 두 가지 의미가 있으리라고 본다.
첫째는 위험의 분산이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불행이나 불운을 분산하여 공동으로 부담하자는 것이다.
둘째는 비용-편익을 비교해 봤을 때 예방적 비용을 지불하는 게 이익이라는 관점이다. 이를테면, 높은 실업률은 범죄를 증가시키고 범죄의 증가는 커다란 사회적 비용을 야기한다. 그러니, 고용 보험 제도를 둔다던지 해서, 실업이 야기할 비용들을 감소 시킨다는 의미가 있을 듯 싶다.
셋째, 공동체로서의 연대감 혹은 휴머니즘에 근거한 …………… 몇 가지 더 있지만 넘어가기로 한다. 결론은 나는 그 근본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스웨덴 모델이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회자되고, 몇몇 이민자들이나 유학생들도 그곳을 천국으로 그린다. 몇몇 매체들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발생하면서 스웨덴에 대해서 검색을 해보기 시작했다. 모두가 그렇게 바라는 완벽한 제도가 있다면, 왜 모두 그 시스템을 채택하지 않는가?
가설 1. 아주 소수의 힘과 권력을 소유한 자들이 부정한 마음으로 방해하고 있다는 음모론은 탈락. 그 음모론을 지지하기 위해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검증 불가능한 가설을 들이대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컴의 면도날을 적용하여 기각.
가설 2. 스웨덴 모델의 보편성이 떨어진다는 가설이 있을 수 있다. 인구 1천만 명의 소국으로 이미 1950년대 유럽에서 1인당 GDP가 최고 수준이었던 부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그러한 특정한 조건이 갖추어진다는 것은 마치 카타르나 브루나이처럼 보편적인 조건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 가설은 일견 일리가 있어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설3. 스웨덴 모델에도 일장 일단이 있어 보편적으로 우월한 모델이 아니라서, 의사 결정과 합의의 문제라는 가설이다. 그 장점이 단점을 압도하지 않아서, 사회적 합의의 길이 멀고도 험하며, 심지어 과연 그 모델이 우월한가에 대해서도 명확치 않다는 가설이다. 나는 이 가설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그래서 data를 모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이 가설을 지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웨덴 복지 모델이 약간이나마 단점 보다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여 도입에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이 모델이 오로지 장점만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설 1에서와 같이 일부의 부정하고 부패한 권력자들의 잘못으로 도입되지 않고 있다는 환상을 깨고자 한다.
II. 본론
1. 빈곤의 커브
빈곤의 덫(Poverty Trap?)이라는 개념이 있다. 풀어 설명하자면, 어떤 특정 소득이나 자산 이하에서는 빈곤의 악순환을 겪게 되어 개인이 노력을 기울여도, 더욱 가난해지기만 할 뿐이라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은 체력이 낮은 열량을 가진 음식을 먹게 되고, 이 낮은 열량의 음식은 몸을 병들고 피폐하게 만들어 육체 노동 시장에서 경쟁력이 없게 만들고, 따라서 그는 낮은 임금의 일자리를 차지하게 되거나, 일을 거르는 경우가 빈발하게 되고, 이는 다시 낮은 소득으로 이어져 더 낮은 열량의 음식을 섭취하게 된다는 식이다.
다른 예로는 생산성이 높은 종자를 살 돈이 없는 사람은 수확량이 떨어지게 되는 값싼 종자를 사게 되고, 농사를 짓게 되면 적은 산출량으로 이어지고, 다시 생산성이 더 낮은 종자를 사게 되고 하는 식이다.
마지막으로 높은 소득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이를 위한 투자(대표적으로 교육)를 해야 하는데, 낮은 소득과 자산을 보유한 사람은 당장 먹고 살기에 급급하여 장기적으로 미래 소득을 높이는 교육과 같은 곳에 투자하지 못하고, 진입 장벽이 낮은 단순 노동에 종사하게 되고 악순환이 발생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즉, 시작점이 빈곤의 덫 영역에서 시작하면,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P1 -> P2 -> P3로 이어지며 점점 가난해져 가고, 그 영역을 넘어서면 (노력에 따라) W1-> W2->W3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이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빈곤의 덫 영역을 벗어나게 하는 복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하버드 경제학 교수였던(클린턴 정부 시절 정부에서 일하느라 관뒀던 거 같은데 요즘에는 프린스턴 교수인가?) 제프리 삭스는 빈곤의 덫 영역을 인정하고 이 사슬을 끊는 것에 대해 언급한 바가 있다.
반면, 이 견해에 반대하는 시장주의 성향의 경제학자들도 있다. 이들은 빈곤의 덫 영역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가 W1 이상에서 시작한다고 이야기하고, 인위적인 방법으로의 개입은 상황을 악화시킨다고 이야기한다.
2. 스웨덴의 경제 현황
2.1 스웨덴의 GDP 및 PPP와 우리 나라의 비교
난데 없이 왜 빈곤의 Curve를 들고 왔는지는 잠시 잊고(뒤에 결론에서 재등장 예정), 스웨덴의 경제 현황을 보자. 스웨덴의 1인당 GDP는 IMF, World Bank, UN의 통계에 따르면 2012년 기준 약 USD 55,000이다. 전세계에서 약 7~10위권에 속하는 높은 1인당 GDP이다. 그러나, GDP는 물가가 반영되어 있지 않으므로 물가를 반영하여 구매력 지수(PPP)로 환산해 보면 약 4만불이다.
반면 우리 나라는 1인당 GDP가 약 USD 23,000이고, PPP로는 USD로는 32,000이다. 이처럼 명목 GDP로는 2배 이상 차이가 나지만, 물가가 우리 나라 보다 1.57배 비싸기 때문에 1인당 GDP는 약 8,000달러 즉 20% 정도 난다. (Source : 물가는 OECD 홈페이지의 통계에서 직접 찾아봄, GDP, PPP는 Wikipedia)
2.2 스웨덴의 전체 담세
스웨덴의 5.5만불(GDP per capita) x 천만명(인구)이 총 GDP이다. 이 가운데, 국가는 얼마를 세금으로 가져갈까? 참고로 지난 번 글에서 언급했다시피 우리나라는 1300조의 GDP 가운데 사회 기금을 제외하면 17% 사회기금을 포함하면 약 1/4(370조) 정도를 국가가 가져가서 재정을 운영한다. Sweden의 담세는 국가 총 GDP의 절반을 국가가 세금으로 가져간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상당히 논쟁적이 될 것이며 슬슬 흥미가 돋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리라는 것도 안다. “스웨덴이 많이 낸다고 공격할 모양인데, 많이 내는 한이 있더라도 많이 혜택을 본다면 나는 더 낼 용의가 있어.”라고 생각하리라는 걸 왜 모르겠는가. 만약 결론이 그렇다면 나는 이 글을 애초에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2.3. 스웨덴 세금의 종류 및 구조
2.3.1. 개인 소득세
Sweden의 세원의 대부분은 소득세와 부가가치세(이른바 Sales Tax)이다. 개인소득세 최고 세율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60%이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 있으니 최저 세율이 존재한다. 최저 세율은 30%이다. 스웨덴에서 10원이라도 번다면 번 것의 30%는 소득세로 내야 한다. 이를테면, 누군가에게 악기를 가르쳐주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한 달에 30만원의 소득이 생긴다면 국가가 30%를 냉큼 떼어간다. 말했다시피 최저 세율이 30%이다. 그리고, 이 Range는 매우 좁아서 대학을 졸업해서 정규직을 가지거나 풀타임 노동자가 되는 순간 세율은 50%로 폭발한다. 연봉이 5천만원이면 세율이 50%이다. (누진세이니, 30% 구간이 일부 존재하여 평균 세율은 40%대가 된다.) 화끈하다. 최고 세율은 60%이다. 직업간의 연봉 격차도 거의 없어서, 전문직이나 육체노동자나 임금은 다 거기서 거기다. 한마디로 알바생에게는 30%의 세율을, 사회 초년생에게는 50%의 세율을, 그리고 장년층에게는 60%의 세율을 적용한다. (출처 : 위키) 참고로 우리나라는 과표가 최저수준을 넘지 않으면 소득세를 내지 않는다. 우리나라 임금근로자중에 소득세를 내지 않는 비율은 절반에 육박한다.
2.3.2 부가가치세
자, 당신은 여자 친구의 선물을 하나 사보겠다고, 아르바이트를 하여 한달에 100만원을 번다고 하자. 국가는 당신의 급여 100만원 가운데 30만원을 준엄하게 소득세로 징수한다. 그리고, 당신에게 임금을 준 회사에게 간접세로 employer social fee라는 이름으로 31만원을 뗀다. 그래서, 세율은 (30만원+31만원)/(100만원+31)만원으로 48.3%가 된다. 당신이 70만원을 손에 쥐기 위하여 국가가 61만원을 가져간다.
이제, 70만원을 들고 가게에 가서 선물을 사고자 한다. 선물을 고르고, 영수증에는 이렇게 찍혀 있을게다. Total 70만원 = 물건 가격 56만원 + 부가가치세 14만원(25%) 국가는 못내 당신이 131만원 가운데 절반이 넘는 70만원을 가져가는 게 못내 아쉬웠던지 부가가치세를 마련해 놓았으니, 여기서 다시 14만원이 추가 되어, 결국 131만원 가운데 국가가 74만원을 당신이 54만원을 가진다.
씁쓸하지만 어찌하랴. 그나마 이것은 파트타이머로 30%의 낮은 세율을 적용 받을 때 이야기고,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거나, 정규직 자리를 구하게 되면, 50%의 세율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나마 131만원 가운데 54만원이나 손에 쥐던 때가 그리워질 것이다.
2.3.3. 법인세 및 상속세
스웨덴에서 서민들에게도 이렇게 많은 증세를 하는 걸 보면, 분명 사회적 정의를 위해 부자들에게는 더 많은 세금을 걷을거라고 희망하리라. 정답은 No. 스웨덴에는 상속세가 없다. 즉, 상속은 면세다. 예전에는 전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형식적인 수준의 상속세를 부과하였는데, 이마저 그냥 폐지해 버렸다.
그렇다면, 저 자본가들의 더러운 착취를 차단할 수 있도록 대기업들에게 세금을 많을 거란 기대는 버리는 편이 좋다. 스웨덴은 유럽에서 최저수준의 법인세(22%로 우리나라보다 낮다)를 부과하고 있다. 한마디로 개인에게만 뽑아 먹는 구조다.
3. 스웨덴의 경제적 불평등, 자산 격차 스웨덴은 평등한 나라인가?
물론 정치적으로는 평등할 수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일부 신문에서 우리나라의 부의 편중이 스웨덴 보다 덜하다고 나온 기사에 그럴 리 없다며 정하였으나, IMF나 World Bank 통계가 그러하다.
Sweden의 부의 불평등은 심각한 수준이다. 지니 계수가 전세계에서 거의 최고 수준으로 미국과 막상막하를 다툰다. 한국은 이보다 훨씬 낮다. 각 국가 별로 상위 10%가 소유하고 있는 부를 차트로 표현해 보면 위와 같다. 서유럽 직접 국가들이 대체로 50%인데 비해서 스웨덴이 현저히 높다. 상위 10%가 스웨덴 가계 자산의 71%를 소유하고 있다. (출처 : 위키)
반면에, 스웨덴은 높은 소득세 등으로 인하여 소득불평등 지수는 다른 OECD 국가들에 비교해 봤을 때 최저수준이다. World Bank 기준 미국 45%, 일본 38%, 스페인 35%, 한국 31%, 독일 28%, 스웨덴 25%다.
4. 평등한 소득, 불평등한 자산
스웨덴은 살펴 보았듯이, 매우 평등한 소득과 매우 불평등한 자산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고소득자라도 세금을 내고 나면 그 사회에서 최저임금을 받는 사람에 비해서 그다지 나을 것도 없는 소득을 가져간다.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아무리 높은 소득을 올려도 부자가 될 일은 스웨덴에서는 없다. 높은 소득세율(60%)과 0%인 상속세율로 인하여, 고소득자가 된들 자산이 축적될 일은 없다.
그래도, 소득이 높으면 저축을 하여, 자산을 축적하면 빈곤의 Curve에서 자산의 축적으로 이어지지 않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친절한 스웨덴 정부는 불로소득인 이자에 대해 80~100%의 세율을 적용하고 있다. (나도 살다가 100%의 세율이라는 건 처음 봤다.) 그래서, 스웨덴 사람들은 저축을 하지 않으며, -애당초 세금을 내고 나면 소비하기에 빠듯해서 저축할 돈도 사실 별로 없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가계 부채를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스웨덴은 아주 이상한 덫에 빠져버린다. 빈곤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W1->W2->W3로 이어지는 자산 축적 과정이 형성이 되지 않는다. 부(자산의 축적)은 오로지 “상속”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연구 결과 스웨덴 상위 10%의 자산 축적 원인으로 90%가 상속이라는 결과가 있다고 카더라. 출처는 확실치 않음.
5. 동전의 양면, 스웨덴 모델의 명과 암
빈곤의 커브를 보자면 스웨덴 모델은 직선과 S Curve가 거의 일치할 정도로 붙어 있는 형태라고 할 것이다. 번 돈은 다 세금으로 나가고 남은 것은 거의 모조리 소비된다. 대신, 자산을 축적 하지 않더라도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위험을 국가가 50%로 떼어간 세금으로 보호해준다. 나이가 들어 근로 소득이 없으면 실업 수당이나 노령 연금을, 병이 들면 무상 의료를, 자식을 교육 시키려면 무상 교육을 제공한다.
그러나, 단 하나 불가능한 것이 있으니 바로 자산의 축적이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공’한다는 모델은 없고 계층은 고착화 된다. 상위 10%와 하위 90%는 그냥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 사이에 이동은 존재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의대를 간다거나 고시에 붙거나 해서 전문직이 된다한들 높은 소득세로 인해 세후 소득은 별 차이가 없고, 사업체가 성공해도 부자가 될 일은 없으니 혹시 성공하면 어쩌지라는 걱정은 하지 말자. 3억을 벌면 2억을 소득세로 떼어가고, 남은 1억으로 무엇인가를 소비하면 25%의 부가가치세가 기다리고 있으며, 은행에 저축을 하면 세율 100%가 기다리고 있다.
게다가 물가는 우리나라보다 57%가 높으니 연간 3억의 소득을 거두면 실수령액 1억, 이 가운데 무엇인가를 산다면 소비세 25%를 물고 나면 7500만원. 그리고 이를 우리 나라 물가로 환산하면 5000만원에 조금 못 미치는 무엇인가를 살 수 있다. 아이패드 하나 사는 것도 참 부담되는 소득인데, 대신 공공도서관에 가면 아이패드가 언제라도 쓸 수 있을 정도로 널려 있는 모습이지 않을까.
대신 스웨덴 모델의 장점은 저 S Curve가 없으므로, 모두가 그냥 산다. 그냥 말 그대로 하루 하루를 살아내고 죽는 날까지 지옥으로 떨어질 걱정은 없다.
III. 결론
1. 정리
살펴본 바와 같이 스웨덴 모델은 명과 암이 모두 있는 모델이고, 이를 모두 인지하고 동의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상위 10%에 들어갈 성공은 없다. 다만 나락으로 떨어지는 실패도 없을 것이다”라는 원칙을 수용하도록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스웨덴 모델의 도입도 논의 가능하다.
그러나, 성공과 실패가 교차하고, 역전 만루 홈런을 자식이 때려 주기를 원하는 욕망을 가진다면 이 모델 보다는 미국식 모델이 더 선호될 수도 있다. 성공과 실패가 모두 존재하느냐, 성공과 실패가 모두 존재하지 않는 모델이냐의 선택지점에서 누가 어떻게 방향타를 쥐고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 밀튼 프리드먼(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시카고 학파의 수장이자, 통화주의자이다.)이 말한 ‘공짜 점심은 없다.(There’s no such thing as free lunch)’는 말은 여기에 해당된다.
2. 정부와 공공성에 대한 신뢰
스웨덴 모델은 서민에게 과세를 하여, 서민에게 돌려주는 방식이다. (계층은 상위 계층과 나머지 평등한 계층으로만 구성되기 때문에 그 나머지 평등한 계층을 중산층이라 부르던 서민이라 부르던 상관 없다.) 여기에는 꽤 흥미로운 관점이 녹아 들어 있다.
서론에서 복지의 목적과 근거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던져진다. 사회복지란 ‘네가 나중에 나락으로 떨어지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고, 그것은 사회에 부담이 된다. 그래서 네가 버는 것의 절반을 국가에게 위임해서 국가가 너의 삶을 care 해주마’는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필연적으로 이 질문이 던져진다. ‘나는 국가를 위해 사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삶의 주인은 나이고, 나의 노동의 결과를 사용, 수익, 처분할 수 있는 Full Ownership을 가져갈 것인가?’
만약 개인의 노동 결과물 가운데 일정 부분을 그 사회의 인프라 사용의 대가로 징수하거나, 혹은 자선과 박애주의의 관점에서 내놓는다면 그것은 내 생각에는 절반 이하여야 한다. 국가가 누군가로부터 절반 이상을 가져가는 순간, 개인은 전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이것은 개인의 권리 보장을 위한 국가의 존재라는 근대 사회의 원칙에 반할 우려가 있다.
전체에서 개별로의 이행이 진보라면 이것은 상당히 어떠한 불편함을 내포하고 있다. “내가 번 것을 세금으로 내는 것인가, 세금을 내기 위해 버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요즘 자유주의의 정신적 지주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1970년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의 책을 읽고 있는데, 대학 시절 나에게 지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교실 밖에서는 K. Marx를 읽었고, 교실 안에서는 케인즈를 읽었지만, 아무도 하이에크를 책을 읽지 않았고 읽어보라고 권해주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졸업한지 십수년이 지나고보니 하이에크가 옳건 그르건 간에 읽어볼 필요가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다.
하이에크는 통제경제(나치의 국가사회주의, 그리고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가 도저히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거라고 1940년대에 썼다. 그 이유는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하이에크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바로, 그러한 국가와 정부가 주도하는 계획이 얼마나 잘 동작할지에 대해서 얼마나 신뢰를 가지고 있느냐에 대해서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걸 이야기 하고 싶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대목인데, 전시가 아닌 상태에서 전국민의 절반 가량이 군대를 경험한 이 나라에서 복지 문제가 나오면 국가와 정부가 공공성을 유지하면서도 효율적으로 돌아갈 거라는 기대를 하는 걸 보면 그 간극이 어떻게 좁혀졌는지 매우 궁금하다.
3. 맺으며
두 극단(미국식 모델과 스웨덴식 모델)의 양 극단에 답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두 가지 모델을 우리의 현실과 처해진 환경, 향후 전망들을 가지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한다는 정도다.
이를테면, 개인이 사회적 안전망 바깥에 놓일 때 발생할 수 있는 우려가 있다면, 절충점과 대안을 모색해 보는 건 어떨까?
국가가 세금으로 강제로 걷어서 그 노후 보장 프로그램을 일률적으로 짜는 것 보다, 다만 소득에서 노후 보장을 위해 써야하는 최소한의 비율만을 법적으로 강제하고, 개인은 다양한 민간의 상품들 이를테면 퇴직 연금 가입, 퇴직 전에는 해지가 안되는 저축 상품 가입 등등 다양한 민간의 상품을 선택하게 하고, 월급에서 원천 징수하게 하고 가입의 증거를 제출하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
국가가 직접 그 상품을 설계하고 운영하여야만 할까? 자동차 보험처럼 정부는 강제로 가입만 하게 하고, 보험사들이 가격과 서비스 경쟁을 하게 하는 건 어떨까?
이것이 조잡한 절충론에 불과한지 아니면 그 균형점인지는 알지 못하겠다.
PS. 우리 나라에서 스웨덴에 대해 몇 자 적는 여행객이나 유학생은 그 소득세를 내지 않고, 스웨덴 사람들이 50%를 들여서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 인프라를 이용하니, 당연히 스웨덴이 좋아보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고백하는데, 나는 스웨덴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 유럽은 제일 위로 가본 게 벨기에, 스위스다.
- ㅍㅍㅅㅅ-
2014년 10월 2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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