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17일 금요일

인류는 왜 공평, 정직 같은 미덕을 고취시켰을까? - 윌슨 교수

출처 : http://m.biz.chosun.com/svc/article.html?contid=2014021402148

'사회생물학 창시자' 윌슨 교수에게 듣는다 에드워드 윌슨 교수가 말하는 '인간의 본성' "인류는 왜 정직ㆍ공평 같은 美德을 고취시켰을까?… 그렇지 못한 집단은 도태됐기 때문" 진정한 이타성은 존재한다 죽음을 무릅쓰고 타인을 돕는 행동은 개인을 위험에 빠뜨리지만 집단엔 유익 결국 그런 행동 일으킨 유전자 확산시켜 집단 위한 것만 선이고 개인은 악인가? 개체선택은 많은 죄악을 낳기도 하지만 생산성ㆍ리더십 등 가치 있는 성향의 원천 인간활동, 이기성과 이타성의 갈등서 비롯 철학엔 더 많은 자연과학이 필요 뇌가 갖고 있는 본능ㆍ욕망 같은 것이 진화 역사상 어떻게 생긴 건지 모른다면 표피적인 상관관계 설명에 그칠 것

에드워드 윌슨 교수의 연구실은 하버드대 비교 동물 박물관 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1834년 찰스 다윈이 발견한 성게 화석을 포함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2100만여 종의 동물 표본을 소장하고 있는 곳이다.

마침 초등학생들이 박물관을 견학하고 있었다. 그들이 중학교에 올라가 생물학 시간이 되면 개미가 윌슨 교수가 발견한 페로몬이란 화학물질을 통해 의사소통을 한다는 사실을 배울 것이다. 그들이 나이가 들어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고민에 부딪히게 되면, 언젠가 진화론 책을 뒤적이게 될 것이고, 윌슨 교수가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사회적 행동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사회생물학'의 창시자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쓴 '인간 본성에 대하여'나 '지구의 정복자'를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함께 열독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과학자답지 않은 윌슨 교수의 유려한 글솜씨에 경탄하게 될 것이고, 위키피디아를 뒤적거려 그가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미로 같은 박물관을 헤치고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가니 윌슨 교수가 환한 웃음으로 반겨줬다. 그의 오른쪽 눈은 어린 시절 낚싯바늘에 찔린 사고로 실명해 반쯤 감겨 있었지만, 그의 웃음 띤 얼굴에선 별 부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남은 왼쪽 눈 하나로 평생 개미를 연구해 왔고, 개미에 대한 관심을 인간으로 확장시켜 인간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봐 왔다.

그는 기자의 질문을 받기 전에 자신이 집필 중인 책들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미 스무 권이 넘는 책을 썼는데, 지금 세 권의 책을 새로 쓰고 있다고 했다. 집필 중인 책에 대한 그의 긴 설명이 끝난 뒤 기자는 준비해둔 질문을 꺼냈다.

해탈을 느껴보진 못했다. 점점 더 도전을 느꼈을 뿐

-세계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도달하면 해탈의 감정을 느낀다는 사람도 있다. 혹시 교수님도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달했다는 생각과 함께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나?

"아니요, 나는 점점 더 도전을 느끼지 평화를 느끼지 않는걸(웃음). 훌륭한 과학자라면 다 그럴 것이다. 참고로 진화생물학은 아직도 약한 과학(weak science)이라고 할 수 있다(그래서 도전하고 고민해야 하는 게 많고 평화를 얻기 어렵다는 의미). 물론 미래를 다루는 데 아주 중요한 과학이다. 왜냐하면 진화생물학이야말로 인간에 대해서, 그 역사와 인간이 인간이도록 추동하는 힘들에 대해 다루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해탈을 느껴보지 못했다. 불교에 대해서 좀 읽어보려고 하긴 했었다. 완전한 평화에 대해서, 자아를 버리는 것 등등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음… 그 평화를 찾은 이들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진화론은 사람이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다고 설명한다. 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기계에 불과하다. 진화론을 접한 많은 이는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 같다. 이런 허무주의에 빠진 경험이 있는가? 이런 느낌을 극복할 조언이 없는가?

“그게 바로 내가 지금‘인간 존재의 의미’라는 책을 쓰는 이유다. 인간은 여러 층위로 볼 수 있는데, 종(種)이라는 차원에서, 사회라는 측면에서 각 단위에 대한 이해가 모두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해는 인간을 어떤 식으로든 왜소하게 만들지 않는다. 최근 내 몇몇 연구를 놓고 꽤 논란이 많다. 수학자들과 함께 최근에 논문을 냈는데, 어떻게 이타성이 인간 사회에서 나타나며, 고등 사회가 생물학적으로 어떻게 형성되는가가 주제이다. 그런데 우리가 점점 더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은, 자연선택(키워드 참고)에 의해 추동되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이를테면 경쟁심이나 집단에서 인정받으려는 욕망 같은 것―이 개인이라는 단위의 인간 본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부분이지만, 200만~300만년 전 선사 인류가 모닥불을 피워 집단생활을 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비롯된 집단 사이 경쟁도 매우 중요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그룹 간의 경쟁이 이타성도 촉진했다는 것이다. 이건 새로운 생각이라고 할 수 있고, 점점 더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런 집단 간 경쟁은 ‘덕(德·virtue)’을 고취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도덕감을 증진하며, 애국심을 증진한다. 결국 정직, 공평과 같이 우리가 표피적으로만 ‘가져야만 한다’고 얘기하던 특징들을 우리가 왜 갖고 있는지 이제 생물학자들이 답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 개개인이 단지 분자들의 상호 작용이나 이들의 집합이라는 식의 이해로부터 벗어나서 서서히 독립적으로 인간의 의미의 토대를 구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길고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설명은, 그가 최근에 주장하기 시작한 집단선택설의 핵심 개념을 담고 있다. 여기서 ‘최근에 주장하기 시작한’이라고 한 이유는 그가 예전에는 전혀 다른 학설을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현재 진화생물학계에는 크게 두 가지 학설이 있다. 혈연선택설(kin selection)과 집단선택설(group selection)이 그것이다. 혈연선택설은 이타성조차 이기성의 다른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집단선택설은 이기적 유전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타성이 분명히 존재하며, 이는 집단 차원의 경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혈연선택설은 학계의 다수설이자 정설로 굳어져 왔고, 윌슨 교수는 이 학설의 대부(代父)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9년 전 돌연 혈연선택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거의 이단으로 취급되던 집단선택설로 돌아서 학계에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윌슨 교수의 주장이 정설이 되기엔 갈 길이 멀어 보인다. 2010년에 그가 네이처지에 관련 논문을 발표한 뒤 학자 137명이 비판 서명을 했다.

―책 ‘지구의 정복자’에서 “개체 선택(혹은 혈연 선택)은 우리가 죄악이라고 부르는 것의 많은 부분을 빚어내지만 집단선택은 미덕의 많은 부분을 형성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설명하면 집단은 곧 선이고, 개인은 악이 되어버리지 않는가?

“내가 집단선택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조금 단순화한 면이 있다. 내 의도는 ‘죄와 덕’이라는 비유를 통해 집단선택의 개념을 빨리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당연히 개체선택은 생산성, 성취, 리더십과 같이 고귀하고 가치 있는 많은 성향을 있게끔 한 동력이기도 하다.”

그는 “법 제도에서부터 예술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활동은 개인선택과 집단선택, 이기성과 이타성 간의 내적 갈등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진정한 이타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교수님은 사회생물학의 핵심적인 과제는 이타성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했다. 교수님의 평생 연구로 이타성이 어디서 비롯됐는지를 설명한다면?

“진정한 이타성은 자신이 갖고 있는 가치 있는 것을 포기하는 행위다. 즉, 사회에서 자신의 소유, 자신의 안전, 가족을 이룰 기회, 자기 부의 일부를, 집단의 다른 이들의 복리를 위해서, 대가 없이 포기하는 것이다. 이게 진정한 이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자기 자신이 불에 타는 것을 무릅쓰고 불난 차 안의 사람을 구해내는 것이다. 물론 대다수 이타적 행동은 호혜적인 인식, 사회 계약에 기반해 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나의 것을 포기하는 것은, 반드시 그게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예를 들어 그게 우리 사회의 전체 복리를 증가시킨다고 판단해서―이 아니라, 내가 사회라는 그물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이런 행동들을 통해 내 인맥을 만든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 DC에서 평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치 체제는 이렇게 주고받는다는 인식 위에 세워져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이타성은 분명 존재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는 규명하기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집단선택설은 이런 진정한 이타성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어떻게 설명한다는 것인가?

“자신의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집단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그 집단이 다른 집단과 경쟁해 생존할 가능성을 높인다.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 자주 목격하는 행동이다. 그리고 그렇게 집단이 강해지면, 그 집단에 속한 자기 자신도 강화된다. 내 개인의 존재에는 해가 가겠지만, (그런 이타적 행동을 유발하는) 유전자의 생존과 확산의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다. 그리고 잘 살펴보면 사회는 그런 과정이 일어나도록 애쓴다.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희생하면서 타인을 도우면 사회는, 특히 그가 소속된 사회(사회의 하위 단위들·편집자 주)가 그 가족을 돌봐준다. 꽤 잘 돌아가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수학적으로 잘 모델링해 설명할 수 있다.”

―교수님은 이타주의에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맹목적 이타주의와 목적적 이타주의(보답을 기대하는 이타주의)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했다. ‘강력한 이타적 충동이 대개 목적적이라는 것은 행운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맹목적이라면, 역사는 족벌주의와 인종차별이라는 극심한 음모의 기록이 될 것이며, 미래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황량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목을 보면서 종교인이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과 같은 딜레마를 잘 묘사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교수님이 종교를 비판하는 것도 이런 이유인가?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잠시만, 내가 그런 말을….”

윌슨 교수는 매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대목은 기자가 읽은 그의 여러 책 중 하나에서 인용한 것이었다. 어느 책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윌슨 교수는 “지금 내 생각을 정리해야겠다. 당신이 내 책을 인용하긴 했지만. 흠… 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예전에 내가 진정한 이타성, 그러니까 그 어떠한 호혜적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하는 행동들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맥락에서 옛날에 말한 것 같은데. 흠, 찾아봐야겠다. 뭔가 내가 실언한 걸 잡아낸 것 같구먼….”

―아무래도 교수님이 첫 번째 퓰리처상을 받은 책 ‘인간 본성에 대하여(On Human Nature)’에 나와 있던 내용 같다(나중에 확인 결과 그랬다).

“아, 그럼 이해가 간다. 그건 1978년에 쓴 책 아닌가. 참 세월이 많이 바뀌었다.”

이 해프닝을 통해 기자는 윌슨 교수가 집단선택설로 학문적 전향을 한 것이, 인간성의 좀 더 따뜻한 면을 찾고 싶은 그의 내밀한 본능의 소산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테레사 수녀의 희생마저 이기적 유전자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면 인간의 삶은 너무 황량해지지 않겠는가? 윌슨 교수는 멀지 않은 죽음을 앞두고 사회와 화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과학은 투표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교수님은 그동안 쌓아 놓은 업적만으로 편안하게 살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편한 길을 포기하고 가시밭길을 선택했나?(왜 혈연선택설을 포기하고 집단선택설로 전향했느냐는 의미)

“나는 언제나 가시밭길을 걸었다. 중요한 과학적 발견은 언제나 논란을 유발한다. 과학은 원래 그렇게 변하는 거다. 과학은 투표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내가 1970년대 처음으로 사회생물학을 제안했을 때도 엄청나게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많은 과학자가 말로는 ‘언제나 새로운 정보와 데이터에 따라 변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실제로는 변화에 매우 인색하고 보수적이다.”

―마이클 샌델 교수를 아시는가? 정치학과의.

“물론이다.”

―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는 한국에서만 100만부나 팔렸다.

“오, 대단하다.”

―교수님은 “정의란 태생적 선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공정함”이라는 윤리 철학자들의 말을 반박했는데, 그 이유는?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웃음). 난 평생 하버드에서 철학자들 틈바구니에 있었다. 존 롤스, 마이클 샌델과도 교류했다. 그리고 지혜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도덕성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이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을 표피적으로 관찰하고 묘사하는 것만으로 철학을 세우고 결론을 이끌어낼 수 없다. 인간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들은 꼭 알아야 하는 것들을 알지 못한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했던 것들에 대해 말이다.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신호처리기계(뇌)가 갖고 있는 본능, 욕망 같은 것이 인류 진화 역사상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지 않으면, 결국 표피적 설명에 머물 뿐이고, 그러면 단지 상관관계들을 바탕으로 상위 이론을 만들게 될 뿐이다. 내 생각에 새로운 철학은 훨씬 더 많이 자연과학을 그 밑바탕으로 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불완전함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본질이자 의미

―과학자는 시인처럼 생각하고, 사서처럼 연구하고, 저널리스트처럼 글을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시인처럼 생각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창조적 과정이란 비슷하다는 의미다. 모든 과학자는, 특히 뭔가 새로운 것을 하려고 할 때, 끊임없이 꿈을 꾼다. 사실 가설이라는 게 공상이다. 백일몽을 꾼다. 뭔가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지어낸다. 최종 결과물을 상상해 본다. 그런데 이건 바로 시인들이 하는 일 아닌가?”

그가 올가을 낼 예정으로 지금 교정을 보는 책 제목은 ‘인간 존재의 의미(The Meaning of Human existence)’이다. 윌슨 교수는 “이제 난 그런 얘기를 할 나이가 된 것 같다. 그리고 나쁜 서평을 받아도 별로 상관없다. 어차피 오래 살 것도 아니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지구의 정복자’에서 지금의 세계를 ‘석기 시대의 정서, 중세의 제도, 신과 같은 기술’이 공존하는 곳으로 묘사했다. 그는 신과 같은 기술에 힘입어 인류가 인간 게놈(유전 정보 전체)을 수정할 수 있는 시기의 문턱에 와있다고 내다봤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자연선택이 아니라 ‘의지선택’으로 진화하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나은 인간 종―예를 들어 더 합리적이고, 불필요한 감정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종―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윌슨 교수는 그러나 “그런 세상이 가능하더라도 원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불완전하고, 엉성하고, 때로 위험하기까지 한 감정이야말로 인간을 수퍼컴퓨터와 구분하고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