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31일 수요일

< 고마츠 사야카 > 책 中

< 고마츠 사야카 > 책 악플후기 中

주: 고마츠 사야카(한국 거주 일본인 여류 작가) 약력

2000 1년간 뉴질랜드 어학연수 중 한국친구들을 만남
2001 외국인에게 친절한 한국사람이 신기.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무작정 한국(부산)방문
2001 부산대 한국어 어학당 입학(6개월과정 수료)
2001~2005 일본어개인과외, 일본어학원강의 다수
2002 일본에서 다니던 대학 자퇴 후 부산대 입학
2006 부산대학교 우수 졸업
2006~2008 경기도 용인시 거주
2008~2011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거주(한국인 남편, 1남 출생)
2011~현재 인천광역시 연수구 송도국제도시 거주中



선비의 나라

한국은 성인이 성인 동영상을 자유롭게 보는 것을 국가 차원에서 막는다.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것이 명분이다.

성인사이트 접속시 워닝이라는 화면이 나왔을 때 나는 경찰이 방문하는 줄 알고 며칠을 혼자 고민하다가 남편에게 실토한 적도 있다.

게다가 여성단체에서는 야동을 보면 공격성이 증가하거나 야동을 보는 남성은 더럽다거나 하는 말로 남성들을 희롱한다. 특히 야동이 남성의 공격성을 증가시킨다는 말은 너무 터무니 없다.

평범한 남성이 야동으로 망상이 생겨 범죄를 저지른다? 백번 양보해서 만약 그 명제가 참이라면 오버워치 게임을 하면 테러리스트가 되고 스타크래프트를 하면 우주전쟁이라도 일으킨다는 말인가? 못 보게 하면 더 집착하고 욕구불만이 생겨서 공격성이 증가하지 않을까?

야동의 남녀관계가 올바르지 못한 것이라면 올바른 남녀관계를 캠페인하면 되는 것이고 과도한 게임시간이 문제라면 건강한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유도하면 되는 것이다. 국가 = 부모와 같은 왕정국가도 아닌데 아직까지도 국민을 통제하고 계몽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인가.

한국은 자발적으로 매춘을 하겠다고 나서는 여성이 다른 나라에 비해 많은데 무작정 불법으로 규정하니까 미국, 일본, 호주로 수십만명의 창녀들이 원정 매춘을 간다. 국민소득이 3만불에 가까워지는 나라에서 창녀를 수출한다니 국가 망신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여성들을 피해자라고 돕는 것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위험한 일을 하는 청년들을 도와야 한다.

그리고 보통 여성들은 단순히 상품화라는 단어의 거부감으로 야동이나 매춘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 일단 공격성이 증가하기는 커녕 성범죄가 줄어들기 때문에 더 안전해진다. 합법인 나라와 불법인 나라의 성범죄율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창녀와 일반여성이 추구하는 것은 다르다. 창녀는 몸을 팔지 사랑을 나누지 않는 반면 보통 여성은 사랑을 하고 인생의 파트너를 원한다. 그러므로 성을 쉽고 사고파는 사회일수록 허무한 매춘보다 순수한 사랑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스스로가 남성과 연애하고 결혼할 때 창녀와 같은 물질적인 가치로 남성을 고르지 않는다면, 그리고 사랑, 이해, 배려라는 정서적 유대감을 가지고 있는 여성이라면 굳이 성매매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 반대로 이 사회에 사랑이 실종되었다면 반대해야 한다. 창녀와 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문제는 개인이나 한 쪽 집단의 호불호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불법으로 억누르기만 하니까 욕구가 더욱 왜곡되어 올바른 성의 가치는 퇴색되었고 오직 배설의 기능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이런 성문제를 이야기하면 ‘성’진국 여성이라고 비웃을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한국 사람들이 조금 솔직해졌으면 좋겠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한국남성들에게 군인들은 2년 넘게 갇혀서 사는데 성욕은 어떻게 해결하는지 군대에는 그것을 어떻게 배려해주는지 물은 적이 있다. 다들 내 질문에 황당해했고 그들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남성들의 욕구는 이렇게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군인은 인간이자 남성이지 가두리 양식장의 생선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본능과 욕구가 있다. 그 마음을 무시한 법은 반드시 왜곡을 낳게 된다.

흔히들 성욕은 인류의 3대 욕구중의 하나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요즘 유행하는 먹방도 어떤 의미에서는 야동이 되는 것이니 금지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제 그만 갓을 벗어 던져도 좋다.

2019년 7월 20일 토요일

sns 신진사대부들의 병신외교

주인장 경고: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익명게시판 펌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출처는 확실치 않다. 본 글의 내용은 본 블로그의 생각이나 편집방향, 철학, 역사관 및 정치정 성향 등 일체의 방향성과 완전히 무관함을 미리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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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4번_제보

sns 신진사대부들의 병신외교

과거 명청 교체기와 구한말에 조선의 외교가 절름발이로 전락한 이유는 바로 힘도 없으면서 명분만 따졌기 때문이다. 명을 도와 청을 물리치거나 대한제국을 유지할 힘이 있는지 자문해야 할 외교담당자들과 위정자 그리고 국내 여론은 열강들 사이에서 한줌 값어치도 안되는 명분에 집착하다 한심한 자충수만을 거듭했고 그 결과 민족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다. 이렇게 현실을 외면하고 사대부들이 둘러앉아 명분만 논하는 병신 짓을 병신외교라는 고유명사로 부르기로 하자.

이 병신외교의 말로는 다 똑같았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오랑캐 무리들의 기세가 날카롭지만 그들을 덕으로 가르치고 교화한다면 결국 알아서 부끄러움을 깨닫고 물러날 것이라고 주장하며 뜬구름 잡는 신선놀음을 하다 저세상으로 떠나 진짜 신선을 만났다. 19세기에는 태국이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인도차이나 반도의 완충지대로 남아 독립을 유지한 데 비해 고종이 다스리던 조선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사이에 뜬금없이 제국선언을 했다가 강제로 합병당했다.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것이 청, 러시아, 일본이었고, 이 힘의 균형이 조선이 독립국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유일한 이유였는데 그 마당에 갑자기 황제선언이라니 희극 아닌가. 이 "대제국"은 수립 8년만에 외교권을 빼앗기고 13년만에 도로 왕으로 강등당한다. 남의 역사라면 크게 웃겠건만 우리의 이야기라 못 웃을 뿐이다.

그 후손인 우리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기계처럼 되뇌이면서도 그 말의 뜻을 곱씹어보지 않는 듯 하다. 지금도 대한민국의 외교노선은 병신외교에 가까우니까, 아니 그 자체니까. 한국인인 나는 일본이 매년 매번 천황 명의로 사죄하면서 총리가 새로 취임할 때마다 3.1절에 서울의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해 무릎꿇고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기를 바란다. 아니 아예 전 일본 국민들에게 3.1운동 서사시 백일장을 열어 매년 1등 작품들을 암송시키고 전범기업들의 재산을 몰수해서 위안부 피해자들과 강제징용 노동자들 후손들에게까지 나눠주고 싶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럴 힘이 있는가?

정상적인 국가의 정상적인 외교라면 하나, 우리가 뭘 원하는지를 자각하고 둘, 상대의 입장을 파악한 뒤 셋, 그 차이를 조율할 전략을 세운다. 하지만 병신 외교는 1번에서 멈춘다. 내가 뭘 원하는지 이게 왜 정당한 지 우리끼리 모여서 허구한 날 지지고 볶는게 외교의 전부라고 믿는다. 왜 우리가 명에 보은해야하는지, 그리고 왜 대한제국이 독립국으로 남아야하는지 한반도 유생들끼리 모여 백날 명분을 따지는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청에게는 늙은 말 한필보다 값어치가 없고 일본제국에겐 대포 한방보다 못한 헛짓거리에 불과한데.

이는 미숙아의 방식이다. 신생아는 원하는게 생기면 그것이 충족될 때 까지 운다. 울고 울고 또 운다. 엄마가 혹은 아빠가 줄 때 까지 운다. 하지만 세상은 엄마나 아빠로만 이루어진 곳이 아니기에 성장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고 상대가 뭘 원하는지 파악한 뒤 전략을 세운다. 아무리 미숙한 어린아이도 완구점에 가서 "오등은 자에 이 변신로봇을 원하노라, 이 로봇을 만든 것은 나같은 어린아이에게 제공하기 위함이었으니 이 메가트론은 나에게 주어짐이 마땅하다"라며 명분을 논하지 않는다. 아군인 엄마 앞에서 울면서 무력을 투사하거나 명절에 받은 세벳돈을 주고 사거나 아니면 훔치기라도 한다. 하지만 과거 한국의 병신외교는 6세 아이만도 못한 행태를 반복했고 현재도 마찬가지다. 병신외교로는 변신로봇조차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아니라고?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일본이 왜 사과를 해야하는지 명분을 논하지 어떻게 사죄를 받을지 방법론을 논하지 않는다. 아베가 잘못했고 일본이 치사하고 이런 도덕적 평가만 가득하고 희망과 전망을 범벅한 비정상적 낙관론을 펼치고 있다. 이게 병신외교를 펼치던 조선 사대부들과 무엇이 다른가. 거기에 가방끈 긴 병신외교 옹호론자들이 국제법이네 보편적 인권이네 하며 명분을 강화시키고 있다. 중화사상의 핵심 교리가 성리학이었던 것 처럼 국제사회의 새 윤리는 인권이다. 하지만 그런 도덕은 힘을 가진 자들에게만 허락된 일종의 사치재이지 만국의 움직임을 제어할 전가의 보도가 아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힘도 없는 주제에 성리학을 들먹이며 청나라의 팔기군이 멈추기를 바랐던 것 처럼 sns에서 주로 활동하시는 한국의 21세기 신진사대부새끼들도 인권을 들먹이면 일본이 겁이 나 깨갱하며 사과할 줄 안다. 인조반정의 개국공신들이 대청 강경발언들을 늘어놓고 청의 경고를 무시하다 적의 반격이 국경을 넘자 헐레벌떡 대책회의를 열었던 것 처럼, 강제징용 판결 이후 8개월 간 우리는 일본 외교가의 소통채널을 무시하면서 심지어 외교부 장관 까지 나서서 "일본이 보복할 경우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다 수출제한조치가 나오자 그제서야 대책회의를 시작했다. 이래도 우리가 펼치는 것이 병신 외교가 아니라고?

현실을 돌아보자. 2차 세계대전의 도죠 히데키 내각은 황군을 천황의 아들들이라며 치켜세웠지만 보급을 무시해 총 250만 명의 전사자 중 100만 명 이상이 굶어서 죽었을 정도로 자국민 목숨을 소모품처럼 대한 인간백정 정권이었다. 그 역사를 긍정하는 일본인은 소수 극우들 뿐이고 그들도 내부에서는 한국의 박사모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동시에 평화헌법으로 태어난 현재 일본 정부는 헌법 이전 정부가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고 있다. 이번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그나마 조선인들이라 한국 법정으로 온 것이지 일본 국적의 타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모두 일본 내에서 같은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이제 일본인들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국가가 저지른 일들로 인해 70년째 죄책감을 가지고 사는 것에 대해, 그리고 아무리 사과를 하고 배상을 해도 끝나지 않는 거듭되는 과거사 논쟁에 대해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그들의 멱살을 잡고 인간백정 정권을 지지한 이들의 후손이 어찌 그러냐고 일갈하고 싶지만 지금 우리는 그게 안되는 현실세계의 정치를 논하는 것이다.

게다가 함께 일본을 압박해주길 바라는 서구의 동맹국들은 다들 일본이 저지른 전과를 하나 이상씩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작정 한국의 입장에 동의해 주지 않을 것이다. 미국과 캐나다는 일본계 자국 시민권자들을 몇년 간이나 격리시키고 구금한 적이 있으며 흑인 노예, 인디언 원주민들에 대한 과거사 및 경제적 보상 논쟁을 마주하고 있다. 영국은 식민지 통치기에 끔찍한 범죄들을 저지른 전력이 있으며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 뱅골에서 의도적으로 기아를 촉발해 수십만 명을 굶겨죽였다는 의심도 받고 있다. 당연히 프랑스나 벨기에,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처럼 적극적으로 해외식민지를 운영한 나라들이나 독일 소련처럼 20세기 들어 적극적 팽창정책을 펼친 나라들, 심지어 폴란드 그리스 터키 처럼 우리가 희생자리고 생각했던 나라들 조차 누군가에겐 전쟁범죄의 가해자로 등재되어있다. 그들이 이런 범죄를 지우개로 쓱쓱 지우고 새로 써 낸 인권이라는 멋지고 폼나는 낱말 하나 만으로 그들이 우리에게 백지수표나 국제사법재판소의 전권 위임장을 던저주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만약 진심으로 그러기를 바란다면 당신은 열강들이 식민지를 평화롭게 나눠먹는 자리였던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해서 쫒겨난 고종 수준의 인식을 가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역사로 타인을 재단하니 서구의기준에서 이 문제를 보자. 나치 합병의 첫 희생자들은 체코나 폴란드가 아니라 바로 오스트리아다. 물론 당시 오스트리아와 도이칠란드의 합병 찬성 여론은 90%가 넘었고 나치 당원 비율도 오스트리아 높았다. 하지만 전후 오스트리아는 빠르게 피해자로 둔갑하고 중립국 선언을 했다. 그들의 눈엔 조선은 어떤가? 조선은 2차 세계대전은 물론 1차 세계대전도 훨씬 전인 1910년에 일본과 합병한 나라지 식민지가 아니었다.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자원병을 모집하자 지원자가 수백대 일에 달했고(출세길이 몇 없었으니까) 일부 조선인 출신 고급장교들은 연합군 포로를 학대한 죄로 전범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자 조선인들은 갑자기 스스로를 식민지로 낮추고 모든 전쟁범죄에서 피동적 역할을 강조했다. 하지만 분명 조선인의 전쟁참여를 적극적으로 독려한 사회 지도층들이 무수히 존재했으며 그들 중 상당수가 해방 대한민국(및 북한)의 건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우리는 그들을 "친일파"로 구분짓고 나머지 한국인들과 분리했지만 그건 우리의 논리고 제 3자의 시각에서는 그냥 다 한국인들이다. 그들이 만약 극동군사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조선인들 명단을 보여주며 "이들은 분명 조선인이고 이들의 전쟁참여를 독려한 한국인들도 건국에 참여했다. 그럼 대한민국 정부도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진 않은 것 아닌가" 라고 물으면 우리는 아마 "에이 그건 일부 친일파들의 비행이에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답이 바로 현 일본 정부의 변명이다. "이는 일부 군국주의자들의 소행이었다"

우리의 미래가 과거와 다르길 바란다면 오늘의 전략이 달라야 한다. 위와 같은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정상적인 국가의 정상적인 외교를 해보자. 우리에겐 일본을 굴복시킬 힘이 없으며 서구열강들이 무상으로 우리를 도와 일본의 팔을 비틀어주지도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현재 전략은 수정되어야한다. 먼저 우리의 목적을 재정립해야 한다. 배상인가? 사과인가?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일본은 외환보유고의 약 40%가 넘는 금액의 용역과 물품을 제공했고 일본은 지난 70년간 최소 8번 이상의 사과를 했다. 따라서 사과와 배상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목표가 아니다. 일본은 무엇을 원하는가? 그들은 정상국가로 나아가고 또 경제력 만큼의 정치력을 인정받길 원한다. 특히 UN을 개편해서 상임이사국 중 하나가 되기를 꿈꾸고 있지만 그들의 발목을 잡는 것은 바로 동맹국 한국이다. 그들은 우리 만큼이나 과거사 문제를 정리하고 싶어하지만 동시에 한국이 원할 때마다 배상을 하고 미안하다고 사죄하는 ATM이나 ARS가 될 생각은 없다. 지난 2015년 위안부 협상에서 일본 측의 요구로 "비가역적이고 항구적인 합의"라는 문구가 들어간 것이 그 단적인 증거다. 그리고 이런 일본의 목표와 우리의 목표가 겹치는 부분을 찾아 협상에 나서는 것이 바로 정상국가의 외교이므로 우리는 한국의 전략적 목표 우선순위를 정립하고 일본의 우선순위를 파악한 후 협상에 나서야 한다. 물론 손익계산서를 작성해서 이득이 된다면 무력도 투사할 수 있도록 현실적 준비도 갖추어야 한다. 

우리의 역사에서 마지막 외교적 승리는 거의 천년도 전인 1차 여요전쟁이었다. 거란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자 겁에 질린 고려 지도부는 땅을 주더라도 휴전을 하자고 제의하지만 이에 반대한 서희는 혼자 적진으로 걸어들어가 담판을 짓고 강동 6주까지 얻어서 돌아온다. 병신외교술을 추종하는 sns사대부들은 서희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하여 명분싸움에서 이겼다고 해석하지만 실제로는 거란의 진짜 침공 목적은 주적인 송과 고려의 연대를 끊는 것이지 땅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하고 그 관계 재정립을 대가로 영토를 받아낸 것이다.

명분을 논하는 일은 편안하고 달달하다. 현실이 열악할 수록 더욱 그러하다. 내가 어떻게 하명 강남의 아파트를 살수 있는지 논하는 일 보가 내가 강남에 살아야 하는 이유를 논하는 것이 훨씬 더 편하고 쉬운 것과 같다. 하지만 이제 병신외교 매뉴얼은 휴지통에 넣고 영구히 삭제하자. 우리는 한국인의 시각 뿐 아니라 일본의 시각과 제 3자의 시각을 모두 가르쳐야 하며 그 시각을 바탕으로 전략을 수립해야한다. 현재 sns의 신진사대부 무리는 "이야 토착왜구 많네"라는 비아냥거림으로 우리의 눈이 국수주의에 머물기를 바라지만 나와 이해관계가 반대인 적의 눈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것은 지능의 문제이지 나라사랑의 문제가 아니다. 앞서 언급한 소손녕이 우리의 역사인식 처럼 서희와의 담판 후 요의 황제에게 돌아가 "고려가 고구려 후예라는데요"라며 명분하나 때문에 땅 까지 주고 빈손으로 회군한 병신이었다면 목이 뎅겅 잘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듬해 그는 공신의 칭호를 받고 이후로도 계속 중책을 맡았다. 실제로 그는 병력과 물자를 거의 소모하지 않고도 짧은 시간 안에 송과 고려의 동맹을 파기시키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한 명장이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미래에도 국제외교가 명분 만으로 이루어진다고 믿는 병신들은 살아남을 수 없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의 외교는 조선 사대부들이 아니라 고려의 서희에 가까워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신채호 선생님께서 기르시던 구관조마냥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짹짹거릴 것이 아니라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되새겨야 한다.

새대가리같은 신진사대부들은 저 주문을 읊으면 자동으로 괜찮은 미래가 올 거라고 믿겠지만.

2019년 7월 17일 수요일

잔다르크, 이단심문 중 일부

(이하 질문자는 코숑 주교를 비롯한 재판관(총 70명), 답변자는 잔 다르크)

문. 주님의 기도를 이 자리에서 외워, 그대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임을 증명하라.[55]
(잔은 문맹이었으므로 그녀의 권위를 떨어트리기 위한 질문)

답. 주교 예하께서 저의 주님의 기도 암송을 들을 만큼 독실한 신자임을 신앙고백하여 먼저 입증하세요.

문. 다른 성직자들을 불러서 암송하게 하겠다.
(당시 성직자들은 라틴어 주기도문을 외우지 못하는 경우가 흔했음)

답. 저에게 질문하신 주교 예하께서 직접 하셔야 합니다.


문. 넘어가겠다.


문. 법정에서 항상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하는가?
답. 저는 언제나 진실을 이야기할 것이지만, 필요하지 않은 부분에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문. 천사의 목소리를 얼마나 자주 듣는가?
답. 제가 필요한 때에 못 들은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문. 그대가 목격했다는 천사들이 옷을 입고 있던가?
(천사의 외형에 관해 함부로 논하면 이단)

답. 주님께서 그에게 옷을 입힐 능력이 없다고 믿으시는 건가요?

문. 성 미카엘의 몸엔 털이 나 있던가?
(천사의 외형에 관해 함부로 논하면 이단)

답. 그럼 털을 밀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문.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느냐?
(신학에서 '은총의 상태'는 하느님만이 알 수 있으므로 긍정의 대답은 신성모독, 부정의 대답은 자신이 죄악의 상태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

답. 만약 제가 은총의 상태에 있지 않다면 하느님께서 제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만약 제가 은총의 상태에 있다면 하느님께서 제게 계속해서 은총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문. 성녀 마르가리타는 프랑스어로 말을 하던가?
답. 성인들이 영국의 편에 서 있지 않은데 왜 영어로 말을 하겠습니까?

문. 그분께서 영국을 미워하신단 말인가?
답. 저로서는 하느님께서 영국인을 미워하는지 사랑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분께서 영국인들을 프랑스에서 쫓아내시리란 것만은 압니다.

문. 천사들의 앞에서 순결을 맹세했던데, 만약 그대가 결혼하면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될 거라 보는가?
답. 그것은 지금으로선 저도 알 수 없으나, 저는 우리의 주를 믿습니다.

문. 천사들이 그대가 심판받을 것이라고 미리 위험을 경고해주진 않던가?
답. 제가 무슨 위험에 처해 있나요? 천사들의 목소리는 재판하는 동안 제가 자유로울 것이라 말했습니다. 저의 것이 될 천국을 위해, 저의 순교에 대해 불평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문. 지금이라도 도망칠 생각은 없는가?
답. 문이 열려 있으면 나가야지요. 그것은 주님께서 허락하셨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문. 왜 남자의 옷을 입고 다니는 금기를 저질렀는가?
답. 옷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일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문.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낱 소녀인 그대에게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냈다고 생각하는가?
답. 바로 그 한낱 소녀를 쓰는 것이 그 분의 기쁨입니다.
\
문. 피고가 행한 일에 대해 교회가 내리는 결정에 승복하며 순명하겠는가?
답. 저를 보내신 주님과 동정녀 성모 마리아와 천국의 모든 성인들의 뜻에 순명하겠습니다. 저는 교회를 사랑하지만, 당신들은 저를 심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제 말과 행동은 모두 주님과 그분의 천사들에게만 호소할 뿐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저를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문. 교회의 결정에 불복하겠다는 말인가?
답. 여러분, 제가 보기엔 주님과 교회의 뜻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문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은 바로 당신들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단 심문관들은 잔 다르크의 이단 혐의를 입증하거나 자백을 받아내는데 실패했다. 공개재판에서 오히려 잉글랜드 측이 잔의 논리에 크게 밀려서 첫번째 공개재판 이후 모든 재판이 비공개 재판으로 전환되었다.

잉글랜드도 처음에는 잔을 죽일 생각이 없이 모욕하고 그녀의 성스러운 권위를 떨어뜨릴 생각이었지만 재판이 진행되어감에 따라서 잔이 잉글랜드에 협력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라는 극단적인 선택지만 남게 되었다.

결국 잔은 고문과 화형 위협을 포함한 협박을 받아 교회의 처분을 따르겠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잔은 문맹이었으므로 자신이 어떤 문서에 서명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서명하면 수녀원에 감금시킨다 는 구두 약속과 달리, 여전히 군사 감옥에 가둬놨고 여자 옷을 입게 하고선 병사들을 보내 강간 위협을 가했다. 이 상황에서 순결을 지키지 못하면 악마와 관계를 맺은 마녀로 몰 것이고 순결을 지키기 위해 잔은 남자 옷을 다시 입을 수밖에 없었고, 이를 빌미로 재판정은 이단 판결을 내린다.

1431년 5월 30일, 잔은 루앙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성해(聖骸)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잔의 시신은 3번에 걸쳐 태워졌고 그 재는 세느 강에 뿌려졌다.

2019년 6월 1일 토요일

사랑(Eros)은 의심하는 마음(Psyche)에 깃들 수 없다는 것을 몰랐는가?

어리석은 여인아, 사랑(Eros)은 의심하는 마음(Psyche)에 깃들 수 없다는 것을 몰랐는가?


- 에로스, 약속을 지키지 못한 푸쉬케를 책망하며 -

2019년 5월 22일 수요일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

- 장 폴 사르트르

2019년 5월 14일 화요일

연애의 10계명

출처: http://blog.daum.net/njmusician/2545

1. 차이면 내 잘못이라고 생각할수록 다음 연애는 비참하게 차이거나 버림받지 않는다.

2. 연애의 진짜 싸움은 감정보다 이성적인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볼때이다.

3. 상대방 잘못에 섭섭하다고 하거나, 투정을 부리거나 화를 내거나 욕을 하면 나중에 내가 잘못할 경우 상대방도 똑같이 한다. 정말 큰 잘못이라면 헤어지고 그렇지 않다면 잘못을 온전히 안고가라.

4. 상대방이 잘못했더라도 사랑이 남아있다면 네가 약속한 것은 해주고 나서 화를 내든, 그 사람이과 잘잘못을 따져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화를 내거나 그 사람의 잘못을 이야기를 해도 상대방은 '너도 안해주었잖아' 이런식으로 받아들인다.

5. 너의 연애경험이 너한테 깨달음과 배움을 줄 수 있지만 동시에 그 경험이 너한테 고집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 고집때문에 연애를 망치는 경우도 있다

6. 연애의 끝은 결혼이다. 어차피 추억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추억이라는 것도 네가 다른 사람하고 결혼을 잘 했을때 좋은 추억인거다.

7. 너의 잘못으로 그 연애가 끝났다라고 하더라도 그 슬픔과 아픔에 너무 매몰되어 있지 말아라. 지금 중요한 것은 다시 연애를 해서 행복해 지는 것이다.

8. 사랑을 받는 것에 익숙해지면 주는 방법을 모르게 되고 주는 방법에 익숙해지면 받는 방법에 대해서 모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받으면 그것에 대해서 주면 되는 것이고 사랑을 주면 그것에 대해서 언제가는 받으면 된다고 생각해라

9. 나는 연애를 모른다고 나는 사람을 상대할줄 모른다고 그런 생각만 하지 말아라 만약 네가 그런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 해야 될 것은 밖에 나가서 누구라도 만나면서 커피라도 한잔 하는 것이다.

10. 사랑은 때로는 전부일 수 있지만 때로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사랑이 전부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고 헤어졌다라고 해서 죽을 듯이 아파할 필요도 없다. 언제가 다시 사랑이 오면 그 사랑도 전부가 될 수 있다. 혹은 nothing이다.

2019년 5월 9일 목요일

킹덤 오브 헤븐 : 예루살렘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살라딘의 병사들이 협상을 상징하는 천막을 치고, 발리앙은 협상 제안에 응해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 밖으로 나간다.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넘기면 발리앙의 인민들의 목숨을 보장하고 기독교 땅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한다.

발리앙: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 도시의 모든 이슬람교도를 학살했소"
살라딘: "나는 그들과 다르네 나는 살라흐 앗 딘이야. 살라흐 앗 딘(정의와 신념)

협상이 타결되자, 살라딘과 발리앙은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눈다.

발리앙은 돌아서다 말고 살라딘에게 묻는다.

발리앙: "예루살렘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What is Jerusalem worth?)

살라딘: Nothing.

하지만 살라딘은 이내 다시 돌아서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한다.

살라딘: ...... Everything!


- 영화 킹덤 오브 헤븐 -
https://www.youtube.com/watch?v=ThBOw3ja6hU


발리앙의 질문은 가톨릭, 무슬림에게 있어 예루살렘의 가치를 묻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루살렘으로부터 아내를 잃은 허무함을 달래는 한편 신을 찾고자 이곳으로 온 발리앙의 고뇌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2019년 3월 26일 화요일

우리의 우주가 시뮬레이션인 이유


우리의 우주가 시뮬레이션인 이유

출처: https://scientificinquirer.com/2019/03/22/science-and-the-simulation-hypothesis-5-reasons-we-may-be-in-the-matrix/amp/


1. 양자화된 우주, 플랑크 크기

제논의 역설에서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화살은 과녁에 명중하며 우리는 공을 잡을 수 있다. 만약 공간이 연속적(continuous)이라면 제논의 역설이 맞는다. , 현재 우리의 우주는 단속적(discrete)이다. 이는 데이터 처리에 주로 사용되는 방식이다. Bit의 개념으로서 존재하는 프로그래밍은 최소 처리 단위가 필요하다. 제논의 역설이 실생활에 적용되지 않는 이유는 현 우주가 단속적이고 최소 정보 처리 단위가 존재한다는 의미다. 물리학자들은 이것이 존재하는 가장 작은 공간단위인 플랑크 길이(10^-35m, 이 이하에서는 시공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라고 추정하고 있다. 우주의 시뮬레이션을 암시한다.


2. 확률함수의 붕괴

확률파동함수의 붕괴 프로세스는 물리학에서 가장 큰 신비다. 현재의 해석은 우리의 의식이 붕괴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주가 왜 이런 식으로 작동하냐는 것이다시뮬레이션 가설은 꽤 그럴듯한 답을 제시한다. 시뮬레이션의 가장 흔한 사례인 게임은 반드시 최적화 기술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컴퓨터 게임에서 존재는 3D 세계의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렌더링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비효율 적이다. 유저의 오감이 느끼는 곳만 렌더링하면 된다. , 관찰되는 것만 렌더링된다. 시뮬레이션 가설은 양자 불확정성이 일종의 최적화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3. 평행우주의 분기, 슈뢰딩거의 고양이 문제

양자 물리에는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마다 수많은 다른 우주로 분기하는 평행우주가 존재한다고 이야기하는 이론이 있다이것은 AI 시뮬레이션의 작동원리와 매우 흡사하다. 컴퓨터가 다음 결정을 선택하는 방법은 가능한 미래를 모두 확률적으로 투사하고 특정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그 미래의 가능성을 "순위 지정"한 다음 해당 값을 현재로 가져와 경로를 선택한다. 최적화 시뮬레이션 디자인에서는 Minimax 알고리즘(최악의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손실을 최소화)을 사용하여 디시전 트리의 최종 결정을 뽑아낸다.


4. 빛의 속도는 왜 일정한가?

현대 물리의 또 다른 큰 수수께끼는 왜 빛의 속도가 일정한가 이다. 모든 물질은 에너지로 치환될 수 있고 에너지는 빛 자체의 파생물이다. 중력과 시공간을 포함한 모든 것이 변하더라도 빛(=전자기파)은 일정하다. 왜 전자기파의 속도는 정보가 우주를 여행 할 수 있는 한계 속도와 같으며 왜 일정한가컴퓨터 시뮬레이션에서 각 처리단위 픽셀은 빛을 기반으로 한다. , 깜빡이는 0 1의 모든 정보통신은 빛의 속도로 이루어진다. 동시성을 보장 할 수 없는 상대성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비디오 게임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는 문제

ㅇ양자 정보 통신은 왜 우주의 국지성을 받아들이지 않는가? 정보는 시공간을 넘어서 전달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ㅇ확률 함수의 붕괴가 우리의 의식 때문이 아니라 각 분자 단위에서 무수히 일어난다면? , 내가 보고 있지 않아도 달이 거기에 존재한다면?

2019년 3월 21일 목요일

“도덕의 역설”로 본 인간의 가축화

원문: http://newspeppermint.com/2019/03/18/goodness2/
영문원문: https://www.newyorker.com/books/under-review/did-capital-punishment-create-morality


인간의 공격성외에도 도덕의 역설을 알려주는 또 다른 요소에는 인간의 진화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여지는 가축화(domestication)가 있습니다. 가축화를 위해서는 이를 이끄는 주인이 필요하며, 따라서 인간이 과연 가축화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심지어 다윈 조차도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물론 인간이 다른 존재에 의해 가축화된 것은 당연히 아니지요.

하지만 자연 선택은 외부 요인 없이도 같은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만약 공격성에 반하는 선택압이 존재한다면 해당 종은 스스로 가축화될 수 있습니다. 지난 50여년 동안, 인간이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를 가축화했음을 말해주는 다양한 증거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가축화의 가장 중요한 증거인 유순함 외에도 인간은 가축화 증후군의 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체구와 뇌의 크기가 작아졌고, 뼈가 가늘어졌으며, 얼굴이 납작해지고 수컷과 암컷의 신체적 차이가 줄었습니다. 이러한 해부학적 특징 외에 공포 반응, 놀이 습성, 학습 속도, 성적 행동, 호르몬 생산 등의 행동적 생리적 특징 또한 인간의 가축화 가설을 지지합니다.

이들 특성의 공통점은 바로 유형보유(pedomorphism, 곧 아이의 특징)라는 것입니다. 개, 여우, 기니피그 등 가축화된 많은 동물들은 그들의 조상에 비해 그들이 더 어린 개체일때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십 만 년 전 인간의 조상 화석은 인간이 그들에 비해 유형보유의 특징을 띠게 되었는지를 확인할 만큼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네안데르탈 인의 화석은 충분히 많고, 현생 인류가 여러가지 면에서 우리 조상들보다 더 아동화 되었다는, 곧 가축화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어떻게 인간은 스스로를 가축화시켰을까요? 진화생물학자에게 이 질문은 그러한 적응이 인간에게 어떤 이득을 주었는지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의 답은 예상과 다릅니다. 바로,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 소련의 두 유전학자가 시베리아에서 수십 년 동안 여우를 가축화했던 실험은 뇌의 크기가 줄어들고, 뼈가 가늘어지는 등의 여러 가축화의 증거들이 사실 다른 본질적인 적응의 우연한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였습니다. 바로 그 적응은 반응적 공격성의 감소입니다. 공격성 감소의 선택압은 배아에서 태아에 이르는 시기의 발달을 관장하는 신경능선세포를 지연시켜 더 작은 몸집과 작은 뇌를 만들고 호르몬 변화를 유도합니다.

이런 내용은 이미 여러 연구들을 통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반면, 인간이 왜 스스로의 반응적 공격성을 감소시켰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랭엄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집단 생활은 최소한의 안정성을 필요로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반응적 공격성은 분노와 괴롭힘, 폭력 등 타인을 지배하고 복종하게 만든 뒤 식량과 여성을 독점하려는 행동으로 이어지며, 이는 집단의 안정성을 해치는 행동입니다. 이 행동들은 알파 메일의 전형적인 행동으로, 사실 알파 메일은 반응적 공격성의 화신입니다. 집단은 이런 해충을 견디거나 아니면 제거해야 합니다. 인간이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자, 이들에 대한 견제 또한 시작되었습니다. (언어의 발생은 30만 년 전에서 50만 년 전 사이로 좁혀집니다. 하지만 공감 혹은 “의도의 공유”는 언어와 무관하게 가능했을 수 있습니다.) 랭엄은 집단이 알파 메일을 처단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가축화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문명은 살인, 혹은 인류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협력 기반 주도적 공격성(coalitionary proactive aggression)”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알파 메일을 처단한 것은 주로 짝이 있는 성인 수컷에 의해서였을 것입니다. (알파 메일의 가장 큰 적은 자신의 짝을 빼앗긴 수컷입니다.) 알파 메일이 계속 죽임을 당하고, 반응적 공격성 유전자가 집단에서 점점 줄어들면서 협력에 의한 처단은 제도화되었습니다. 이들의 힘은 집단에서 절대적이 되었고, 이는 막스 베버가 국가를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하는 주체로 정의한 것을 떠오르게 만듭니다. 이들은 사형이나 추방과 같은 처벌을 내렸고 이들과 같은 편에 서는 것은 생사를 가르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집단은 어떤 행동이 위험한 행동인지를 정해주는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자선은 좋은 평판으로 이어졌고, 반사회적 행동은 죄로 규정했습니다. 이를 통해 인간이 가진 도덕성의 가장 근본적인 두 가지 특성이 만들어졌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븐능과 이타주의, 협력, 공정성 등 다른 영장류에 비해 훨씬 더 발달한 친사회성(prosociality)입니다.

처단은 무엇이 옳은 행동인지를 생각하게 만들었고, 덕(virtue)이라는 관념을 탄생시켰습니다. 하지만 알파 메일의 제한적인 권력이 지배 무리의 무제한적 권력으로 대체되면서, “협력 기반 주도적 공격성은 사형, 전쟁, 학살, 노예제, 신고식, 희생양, 고문, 린치, 갱단 싸움, 정치적 숙청 등 권력의 남용을 탄생시켰다”고 랭엄은 말합니다. 바로 이 사실이 이 책이 말하는 도덕의 역설입니다. 계획적, 협력적 폭력은 사회 질서를 탄생시켰고, 사람들이 덕을 추구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회질서에 의해 국가, 혹은 강력한 특정 집답이 다른 집단을 착취하고 압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랭엄은 인간이 “최선인 동시에 최악의 생명체”라 결론내립니다.

——

랭엄은 자신을 오해하지 말라고 조심스레 이야기합니다. 이는 인간이 조금이라고 폭력적 경향을 타고났다고 말할 경우 전쟁 지지자들이 평화에의 요구를 자연에 반하는 것이라 무시할 것이며,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을 “자연스러운” 것이라 주장하게 될 까 두려워하는 루소주의 사회과학자들을 향한 것입니다. 이는 또한 이들이 진화론을 반대하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곧, 그것이 진실이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진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진화론에서 우리가 얻게될 지식의 정치적 의미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아마 인간의 복잡한 행동에 대해 유전자와 문화가 정확히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는지는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겁니다. 하지만 문화와 유전자 모두가 충분히 중요하다는 상식적 직관을 확인할 만큼은 밝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유전자는 우리의 운명이 아닙니다.

랭엄의 주장이 옳든 그르든 – 이 복잡하고 야심찬 이론은 아마 부분적으로만 옳은 것으로 밝혀지겠지만 – 여섯 개의 대륙, 여남은 개의 학문 분야, 수십 종의 동물, 그리고 2백만 년의 시간에서 나온 증거들을 거르고, 저울질하고, 다듬어 정교하게 짜맞춘 이 책은 충분히 인상적이며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교훈까지 알려줍니다. 바로 인간의 성장에 있어 진화보다는 도덕적 상상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잠재력을 파악하기에 역사는 진화론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랭엄의 말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평화와 평등을 향해 나아가기에 불가능하다거나 아니면 필연적이라고 가정해서는 안됩니다. 그 어느 쪽도 아닙니다. 그저 매우 어려운 일일 뿐입니다.

2019년 3월 16일 토요일

인간 수명에 영향을 주는 것들(그래픽)









출처:
https://informationisbeautiful.net/visualizations/what-could-really-increase-life-expectancy-lifespan-and-longevity/

2019년 2월 25일 월요일

다니엘 카네만: 사람들은 행복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복을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인지심리학자 다니엘 카네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은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카네만은 행복(happiness)과 만족(satisfaction)을 구분합니다. 행복은 순간적인 경험이며 곧 사라지는 감정입니다. 하지만 만족은 긴 시간 동안 자신이 바라는 종류의 삶의 향해 노력하며 삶의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얻어지는 감정입니다. 지난 해 12월 19일, 경제학자 타일러 코웬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타일러와의 대화(Conversation with Tyler)”에서 카네만은 두 감정 중 하나만을 추구하는 것은 다른 하나를 누리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일상의 행복을 측정하는 연구에서 연구자들은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기분이 좋은지를 물었고, 그 결과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행복을 느끼는 매우 좋은 방법임이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만족감을 느끼기 위한 장기적 목표를 추구하는 이들은 자신의 더 큰 목표를 위해 평소 친구들을 만나는데 시간을 많이 쓰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사실이 카네만으로 하여금, 사람들은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행복을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만들었습니다. “여러가지 사실로 볼 때, 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행복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행복이 아니라 만족감을 원합니다. 이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만듭니다.”

지난 10월 하레츠와 가진 인터뷰에서, 카네만은 만족은 대부분 남과의 비교에 기인한다고 말했습니다. “만족감은 사회적 목표를 이루고,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것과 같은 사회적 지표와 크게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행복은 돈이 부족할때만 돈의 영향을 받지만, 만족감은 재산의 양에 매우 큰 영향을 받는 다고 덧붙였습니다. 가난은 고통을 만들지만, 최소한의 필요를 채우는 일정 수준 이상의 수입에서는 행복이 더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프는 놀라울 정도로 평평합니다.”

이는 배고픔이나 의복, 집 등의 기본적인 욕구가 만족될 경우 누구나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만큼이나 행복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일시적인 행복감은 삶에 대한 만족감에 더해지지 않습니다. 과거 행복했던 시간을 충분히 많이 가진 사람이라도 자신의 인생 전체에 대해 그만큼의 만족감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두 감정과 기억의 관계가 한 가지 이유입니다. 만족감은 지속적인 효과를 가지는 반면, 행복감은 일시적으로만 존재합니다. 카네만은 자신의 연구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자신의 이야기가 그 순간의 행복과는 크게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한 순간의 행복보다는 그들이 가진 더 큰 목표가 더 중요했습니다. 기억은 오래 가지만, 느낌은 지나갈 뿐입니다. 우리가 가장 행복해하는 순간들은 대부분 보존되지 않습니다. 사진도 이를 붙잡을 수 없으며, 그저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갈 뿐입니다.

예를 들어, 휴가를 생각해봅시다. 카네만은 만약 사람들이 휴가를 즐긴 뒤 그 기억이 모두 사라지고, 어떤 사진도 가져올 수 없다면 사람들은 그 여행을 가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즐거운 일을 하는 이유가 그 일을 만족스런 기억으로 남기기 위해서임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사실 어떤 한 순간에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가설은 오늘날의 소셜 미디어 문화를 어느 정도 설명해줍니다. 우리는 어떤 순간을 즐기기보다 그 순간을 남들앞에 자랑하기 바쁩니다. 또 우리가 좋아하는 이들과 시간을 보내기 보다는 친구와 팔로워 수에 더 집착합니다. 이런 행동은 결국 우리를 더 비참하게 만듭니다.

카네만은 우리가 다른 이들과 함께 있을 때 행복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카네만도 영향을 미친 긍정심리학 운동은 일시적 행복이나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대신 더 긴 관점에서 중요한, 카네만 자신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인생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카네만은 자신이 “충분히 행복한” 운좋은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이 좋아하는 동료들과 함께 보냈고, “흥미로운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반면 자신이 혼자 글을 써야 했던 시간이 “끔찍”했으며, 그때는 “비참함”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그는 또한, 자신이 충분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지만 자신의 존재가 의미있다고 생각치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는 감정을 경제적, 사회적 동력으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세상에 행복의 척도를 알린 사람이지만, 5년 전 이 분야를 떠나 지금은 다른 분야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현명한 의사 결정을 방해하는 “노이즈”, 곧 랜덤한 데이터에 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행복, 곧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기 원하는지, 아니면 그저 우리 자신과 다른 이에게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할 뿐 실제로 기쁨을 느끼는데는 관심이 없는지는 중요한 질문일 것입니다. 적어도 친구들과 함께 이 주제를 두고 이야기하는 동안은 아마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겁니다.

(쿼츠, Ephrat Livni)
번역문: http://newspeppermint.com/2019/02/20/m-happiness-2/

원문: https://qz.com/1503207/a-nobel-prize-winning-psychologist-defines-happiness-versus-satisfaction/


2019년 1월 6일 일요일

2019년 1월 3일 목요일

초격차(권오현)

인간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위해서는 도덕적 가치판단이나 정치적 편향, 이해관계를 버릴 필요가 있다. 쉽지 않은 일이고 그러다 보니 인간의 본성에 대해 왜곡된 접근법과 이론이 넘쳐난다. 그런 면에서 인간행동을 밑바닥부터 이해하는 가장 현실적인 프레임은 대기업 인사과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삼성은 그 분야의 가장 최첨단을 달리는 회사다. 이 책이 전부는 아닐 지라도 인간의 조직행동론에 대한 상당한 실무 통찰을 담았을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주요 내용

ㅇ새로운 시도나 도전을 할 때, 기존의 사람은 바뀌지 않고 방식도 바꾸지 않는다. 마음 독하게 먹고 모두 갈아치우지 않는다면 도전과 개혁은 불가능하다. 기존의 인력을 교육해서 혁신의 방향으로 내부 분위기를 전환시킨 사례는 거의 없다.

ㅇ사업을 할 때는 업의 본질을 이해하고 접근해야 한다. 내수 서비스업은 상대방보다 조금만 나으면 된다는 상대적 가치, 제조업은 세계 최고를 노리는 절대적 가치 개념으로 접근한다

ㅇ실력은 있지만 봉건 영주와 같이 왕국(사일로)을 건설하려는 직원은 부지불식간에 다른 영주와 교체하여 돌린다. 그들의 왕국을 파괴하라. 그러면 영주는 겸손해지고 왕국간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해진다.

ㅇ새로운 사업에 도전할 때는 능력은 조금 부족해도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사람을 쓴다

ㅇ여유있게 건전한 가정에서 정상적으로 태어난 사람이 리더로 맞다. 그렇지 않으면 사리사욕을 포기할 줄 모르기에 리더에 부적합하다. 출생시 부모는 선택 불가능하므로 리더는 태어난다고 볼 수도 있다. 탁월한 리더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의 역사를 보고 얼마나 이기적인 선택을 자주 했는지에 주목하라. 그러한 선택을 하고도 책임지거나 비난받지 않는 환경에서 자라왔다면 그는 최악의 리더가 된다.

ㅇ최고의 리더는 나중에 리더 자리를 떠나도 그 조직이 스스로도 잘 굴러갈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게 한다. 이는 결국 인재 양성의 문제다.

ㅇ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 반드시 피해야 할 인재상부터 제거한다. 무례한 자, 부정적인 자, 뒷담화 하는 자

ㅇ긍정적 인재상 중 하나로 중요시하는 것은 호기심 많은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