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의 목적은 우승자를 가리는 것이다. 최근 창궐하고 있는 리얼리티쇼나 오디션 프로그램은, 그러나 이 관행을 뒤집었다. 한회 한회 탈락자를 내는 서사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잔인한 드라마 전략이다. 참가자들을 우승의 집념이 아니라 탈락하지 않겠다는 절박감으로 몰아간다. 긴장을 거기서 추출해 내는 것이다. 이런 한편, 참가자들의 사연을 최대한 극화함으로써 감동을 연출해낸다. 탈락의 서사로 플롯의 무게 중심을 옮겨 가면서 동시에 '그럼에도 개천에서 용난다'는 기만적 판타지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확하게 경쟁이 일상이 된 신자유주의적 서사이기도 하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당신은 탈락한다, 즉 낙오자가 되는 것이다, 라는 공포를 끊임 없이 주입한다. 그리하여 체제의 불합리함에 대한 문제 의식을 마비시킨다. 사람들을 좁은 우리에 가둔 채 서로를 잡아먹어야 살아 남을 수 있는 쥐떼들로 만드는 것이다. 리얼리티 쇼는 그 정글 법칙을 사람들의 무의식에 아로새긴다.
할리우드 판타지 <헝거게임>이 탁월한 것은, 바로 이처럼 정치와 미디어가 합작한 기만의 시스템을 우화적으로나마 고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리얼리티 쇼가 채택한 탈락의 서사를 극단화해 실제로 서로를 죽이게 만드는 서바이벌 게임장으로 변모시킨다. 헝거게임의 우승자 헤이미치(우디 해럴슨)는 주인공 캣니스(제니퍼 로렌스)에게 헝거게임의 본질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게임에는 승자가 없어. 단지 생존자만 있을 뿐이지."
우승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는 것. 이것이 자본주의가 사람들에게 던져준 화두다. 모두들 단지 생존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탈락하지 않기 위해서 모든 자산을 아낌없이 퍼붓는다. 밤 11시쯤 학원가에 가보시라. 탈락의 공포에 찌들어 있는 청소년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헝거게임>은 그 안에서 꽃피우는 희미한 반역의 씨앗을 플롯의 구심점으로 삼는다. 하여, 이 영화는 한편으로 혁명 서사다. 캣니스는 1편 <판엠의 불꽃>에서 독재국가 펜암의 헝거게임에 강제 출전하지만, 누구도 죽이지 않고 우승자가 됐다. 아니, 생존자가 됐다. 그리고 이번 속편 <캣칭파이어>에서 그들은 '동맹'의 지혜를 본격화한다. 단 한 사람의 생존자만 존재해야 한다는 룰을 거역한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캣니스는 혁명 투사로 '각성'된다. 그가 혁명의 불꽃으로서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는 두 편으로 나뉘어 선보이는 후속편 <모킹제이>에 담겨져 있을 것이다.
<헝거게임>은 대단히 흥미로운 문명 비판이다. 판타지의 틀을 차용했지만 상당히 직설적이고, 무엇보다 지금의 시대가 뿜어내는 공기를 외면하지 않는다. '보편'으로 숨거나 허무주의로 빠지지 않는 영화는, 언제나 그렇듯,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든다. 만약 이 영화가 불편하거나 지루하다면, 당신의 감수성은 탈락의 공포를 내면화한 정글 법칙에 단단히 중독돼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 영화기자 최광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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