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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개항 초기 인천의 조선인들은 '객주조합'이나 '신상회사' 및 '근업소' 등을 중심으로 쌀을 매매하고 유통시켰다
ㅇ일본영사관은 미두취인소(米豆=쌀, 거래소)를 설립, 일본인과 조선인들이 유통과 정미 소 등에서 쌀거래에 참여
: 인천 정미소를 경영하던 유군성, 개성 부자 김익환, 평안도 대지주 장최근 등
(초기 미두취인소)
(과거 미두취인소 자리에는 현재 국민은행이 있다)
ㅇ초기에는 쌀, 대두, 석유, 명태, 방적사, 금사, 목면 등 7가지 상품에 대한 거래를 하다가 1904년부터 운영상의 문제로 주된 거래품목을 쌀과 대두(大豆)로 한정
ㅇ일본은 이미 에도 시대인 1,600년대부터 쌀 선물 시장이 존재, 미두취인소도 쌀 선물을 거래, 중거금은 10%, 레버리지 10배,
ㅇ수많은 조선인들이 투기판에 뛰어들면서 아비규환이 만들어져
: 인천 바다는 미두로 전답을 날린 자들의 한숨으로 파인 것이요, 인천 바닷물은 그들이 흘린 눈물이 고인 것이다. 신문 <개벽>에는 '인천아 너는 어떤 도시?'라는 제목으로 인천 미두취인소를 '피를 빨아 먹는 악마 굴이요, 독소'라 칭해
: 채만식이 1937년 12월부터 1938년 5월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탁류'에는 군산 일대에서 미두로 패가망신한 인간군상을 상세하게 묘사(미두취인소는 인천과 군산에 있었다)
ㅇ반복창은 인천에 미두시장이 개설된 지 4년 후인 1,900년, 강화도 이방(吏房)의 아들로 태어나
: 어린 시절 이방의 아들로서 유복하게 자랐으나 한일 합방 이후 가세가 기울어
: 반복창 12세에 아버지는 빚을 남기고 사망
: 강화도에는 일자리가 없어 인천으로 건너가 아라키(荒木)라는 일본인 집에 아이 돌보는 하인으로 취업
: 아라키는 개항 직후 화륜선(증기선)을 몰고 인천으로 와 인천과 한양을 오가면서 곡물을 운송해 부를 축적. 1896년 인천에 ‘미두취인소’가 들어서자 ‘아라키 중매점’을 열어 막대한 부를 축적
: 아이를 돌보던 반복창은 2년 후 갑자기 아라키 중매점 요비코(呼び子)로 발탁(인천과 오사카의 미두 시세를 전달하는 일, 당시 오사카와 인천 사이에는 전화 없이 전보만 있었다)
: 반복창의 월급은 한 달에 6원(현가 60만원 가량), 허투루 쓰지 않고 착실히 저축해서 밑천을 마련, 일과가 끝나면 괘선(罫線•그래프)을 그리고 밤새워 시세를 연구, 독학으로 일본어를 깨치고 경제 지식을 쌓아
: 1918년, 반복창은 19세에 ‘바다지(場立•중매점의 시장대리인)’로 발탁, ‘지로(次郞)’라는 일본식 이름도 얻어
ㅇ1919년 쌀가격 폭등과 미두취인소 위기 발생. 아라키의 몰락
: 반복창이 ‘바다지’로 승진한 직후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 전후복구 사업이 본격화하자 일본경제 대호황, 쌀 값 폭등, 그 해 가을 흉년이 들어 쌀값이 걷잡을 수 없이 올라
: 아라키는 뱃사람이었던 만큼 날씨에 민감. ‘천기상장(天氣相場•날씨 시세)’이라는 미두 용어가 있을 만큼 날씨가 쌀 시세에 중요
: 1919년 1월, 쌀 값이 3개월간의 폭등을 멈추고 폭락하자 아라키는 반등에 대비해 투기적으로 쌀을 지속적으로 매수. 쌀값 폭락세는 좀처럼 멈추지 않아
: 아라키의 쌀 롱포지션은 10석. 손실이 너무 커지자 아라키는 쌀 시세 조작에 가담. 오사카미두 취인소 전보 직원에게 미두 시세 상승 전보만 치라고 부탁
: 문제는 이러한 작전이 당시 만연하다 보니 인천 미두 시장에서 가격 상승이 반영되지 않아
: 아라키는 최후의 수단으로 인천 미두취인소 이다(飯田) 사장과 결탁해 현찰 대신 수표로 증거금을 예치, 180만원(현가 1,800억)의 부도 수표를 내고 일본으로 도망
: 미두 취인소 자본금이 4.5만원이어서 아라키 부도를 포함한 총 300만원의 미결제가 발생. 현금을 받지 않고 부도 수표를 가지고 있던 미두취인소는 1919년 3월 영업정지. 이다 사장을 비롯한 10여 명의 취인소 간부는 실형
: 그러나 그 해 6월, 미두취인소는 자본금을 100만원으로 늘려 재개장. 쌀 선물 시장은 경제에 중요했기 때문
ㅇ반복창의 등장과 승승장구
: 이때 반복창은 아라키 밑에서 일한 노하우와 500원의 밑천으로 미두 거래에 참여
: 승승장구, 한 번의 거래로 18만원(현가 180억)을 벌거나 쌀 시세를 정확히 예측하여 그의 재산은 40만원으로 증가. 일본에까지 이름을 떨침
: 그를 '미두신'이라고 부르며 칭송하는 미두꾼들, 반복창 소문 만으로도 그의 영향력과 명성은 막강. 당시 그의 나이는 21세
: 그는 인천 바다가 보이는 경동사거리 동쪽 100미터 위치의 명당에 400평의 집터를 사고 20만원을 들여 조선에서 최대, 가장 화려한 서양식 저택을 짓기로
: 땅 사고 도면 그리고 지반 다지는 데만 9만원 소요
: 집의 돌담이 완공되어 갈 때쯤, 반복창은 아내 될 사람을 찾아 나서
: 그가 배우자로 간택한 여성은 당시 미의 여신으로 추앙받던 ‘원동 큰 재킷’ 김후동
: 김후동은 반복창과 동갑, 경성여고를 나오고 바이올린 연주에 특기, 얼굴이 꽃같이 아름답고 치마 끝자락에 수를 놓아 입고 다녀 당대 최고의 인기 아이돌 취급
ㅇ반복창(반지로)의 성대한 결혼식
: 1921년 5월 28일 토요일. 22세 청년 백만장자 반복창의 결혼식
: 당시는 토요일 오전까지 일과가 있었음에도 요시마쓰(吉松憲郞) 인천부윤(현 인천시장 급)을 필두로 한 인천의 유력인사들은 만사를 제쳐두고 모두 모여
: 인천역에는 2등객차만 연결한 결혼식 하객 전용 임시급행열차가 대기(당시 경인선을 달리는 열차의 일반석은 3등석), 하객 접대를 위한 특별열차를 통째로 대절한 것
(당시 객차 내부)
: 임시 급행열차가 경성역에 도착하자, 이번엔 대기하고 있던 수십대의 자동차가 하객을 맞이(당시 서울 시내에 운행 중이던 자동차는 200여대 였으나 결혼식에만 60대가 소요)
: 결혼식은 조선호텔에서, 축사는 인천부윤
[동아일보에 실린 김후동과 그 아이들에 대한 기사 1926년 1월 22일자, 반복창과 이혼 한 이후]
ㅇ반복창의 짧은 전성기와 몰락
: 1920년 1월, 그의 시장 예측이 빗나가기 시작
: 보다 신중한 매매로 돌아섰음에도 연전연패, 1921년 한 해 동안에만 손실 10만원
: 현금 흐름이 좋지 않아 집 공사도 잠시 중단, 이듬해 더 큰 손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완전히 파산 직전까지 몰려, 1923년 생계마저 어려워져
: 그를 ‘미두신’으로 추앙하며 따르던 부하가 30~40명에 달했지만, 실패를 거듭한 이후에는 정우석, 박용하 둘만 남아
: 투자자의 돈을 모집해도 다 날리고 1923년 5월 사기혐의로 구속, 같은 해 10월 보석으로 풀러나
: 그의 명성이 바닥을 기면서 재기불능, 미두시장 근처를 기웃거리며 ‘합백꾼’들과 어울려
: ‘절치기’라고도 부르는 합백은 많으면 1~2원, 적게는 10~20전씩 걸고 쌀값이 오르는지 내리는지를 맞추는 ‘사설 미두’ 거래
ㅇ미인박복
: 김후동은 자신이 반복창의 재산을 보고 결혼한 것이 아니라고 항변
: 김후동은 “남편보다 아이들이 더 소중하고 사랑스럽다”고 말한 바로 그 이듬해 반복창에게 세 아이를 모두 맡기고 이혼
: 반복창은 거듭된 실패와 상실감으로 나이 서른에 중풍으로 쓰러져 반신불수
ㅇ반복창의 사망과 미두시장의 폐장
: 중일전쟁이 3년째에 접어든 1939년, 일본은 쌀을 전수물자로 분류하고 쌀과 쌀값을 정부에서 직접 관리
: 반복창은 1938년 10월 18일 송림리(송림동) 나무집 곁방에서 사망, 향년 40세
: 미두시장은 그로부터 20일 후인 11월 7일 이 땅에서 사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