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1일 화요일

연구 - 그리스도의 사랑의 개념

버트란드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저서에서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호전적 성격과 이기적 배타주의를 신랄하게 공격하며 편협한 도그마가 어떻게 인간세상을 파괴하는지 보여주었다. 러셀은 또 다른 저서인 [새 세계의 새 희망 1951]에서, 이데올로기의 광신화(狂信化) 현상이 인류의 파멸을 재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비단 기독교뿐아니라 종교든 이데올로기든 어떠한 형태의 <주의>라도 그것은 결국 압제와 권력의 수단으로 화해 버리고 만다.

러셀의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하지만 기독교의 비관용성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 자체에 내포된 성격인가에는 의문이 든다. 오히려 이후 바울이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같은 사람들의 정치적 용도에 의해 본질이 호도된 것이 맞다. 니체도 늘 지적하였듯이, 나는 예수가 말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아들`로서의 인류는, 그리스도의 문학적 천재성, 혹은 시대적 강압에 따른 은유로 인해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로 표현된 것이라고 본다.

종교나 교리를 떠나서 예수라는 한 젊은 종교개혁자가 가지고 있었던 계시적 철학으로서의 `사랑`에 보다 더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 소위 인류역사상 `성인`으로 추앙받는 인물들 가운데, 인간의 정신적 처방으로 `사랑`을 제시한 몇안되는 인물이기때문이다.

공자의 `인(仁)`이나 부처의 `자비(慈悲)`, 또는 소크라테스의 `자아의 본질확인` 등도 귀중한 진리이긴 하지만, 한개인의 정신적 성숙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사랑`만 못한 것 같다.(`자비`도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건 사실이다.) 이들이 주장한 인류구제의 처방은 결국 윤리적 실천으로서의 당위론적 도덕률로써 생각된다. 그러나 예수의 사랑은 단지 정신적 실천 윤리뿐 아니라, 정신과 육체를 아울러 포괄하는 `인간실존의 본질로서의 사랑`을 의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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