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카르도의 `비교우위 이론`은 절대적으로 옳다. 하지만 명심해야할 것은 각 나라들이 자신의 현재 기술 수준을 그대로 감수하는 한에서라는 좁은 가정하에서만 그렇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이 통하지 않는 것은 어떤 나라가 보다 고도의 기술을 획득해 대부분의 다른 나라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들을 하고자 할 때, 즉, 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할 때이다. 이를 위해선 시간과 경험, 그 시간동안의 경쟁으로부터의 보호가 필요하다. 물론 보다 우수하고 저렴한 상품을 수입하고 구매할 기회를 포기해야 한다는 희생도 따른다. 그러나 이는 선진적이고 고도의 기술집약산업을 발전시키기 원한다면 마땅히 치러야할 대가이다.
1846년 역사적인 전환점이 될만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영국이 곡물법(영국내 농업보호를 위해 수입농산물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던 것)과 공산품에 대한 관세를 폐지한 것이다. 당시 독일, 미국, 프랑스 등은 곡물법하에서 영국으로의 농산물 수출이 지지부진하자 산업혁명과 발맞추어 서서히 산업화를 키치를 올리고 있던 때였다. 그런 시기에 돌연 영국이 수입곡물법에 대한 관세를 폐지하자 이들 국가들의 농업경쟁력이 높아졌으며 공업보다는 농업에 집중할 이유가 생겼다. 영국이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즉, 경제사학자 폴 베어록이 지적한 것처럼 영국은 장기간 지속되어온 높은 관세장벽 속에서 기술집약적 산업을 발전시키고 확실한 우위를 획득하고 난 이후에서야 자유무역을 채택한 것이다. 영국이 자유무역을 채택하면 자국의 공산품을 경쟁국에 저렴하게 팔 수 있고 대신 농산물을 수입함으로써 경쟁국들이 농업에 집중하게 만들어 영국은 `영원히` 기술적 우위를 유지하게 된다. 소위 프리드리히 리스트가 주장한 `사다리 걷어차기`다.
이러한 영국의 위선적 자유무역을 두둔하는 행동에 가장 저항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영국의 식민지 시절부터 하이테크 제조업에 대한 발전이 철저히 말살되었다. 심지어 영국의 大 피트는 1770년에 "식민지가 말발굽에 박는 못을 생산한다고 해도 절대로 허락해서는 안된다"고 얘기했을 정도였다. 그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국부론을 지은 애덤 스미스 마저 진지하게 미국에게 공업을 발전시키지 말라고 충고했다. 독립후 미국의 초대 국무장관과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을 비롯한 많은 미국인도 이에 의견을 같이했다.
정치가와 학자가 모두 장기적인 미국의 경제발전에 치명적이며 장래 미국의 발전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밖에 없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을 때 이에 격렬하게 항의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는 2류 대학인 뉴욕의 킹스칼리지에서 전공도 없이 이것저것 공부한 열혈 청년 알렉산더 해밀턴이었다. 그는 1789년,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이 되면서 미국과 같은 후진적 나라는 유치산업을 보호하고 보호무역을 통해 하이테크 기술산업을 발전시켜나가야한다고 주장해 세계적 대학자인 애덤 스미스의 충고를 노골적으로 반박했다. 해밀턴의 유치산업 보호론은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서 많은 나라의 경제 발전 프로그램을 고무시켰고, 자유 무역 경제학자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해밀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세는 5%에서 겨우 12.5%로 오르는데 그쳤는데 이는 당시 정치권이 남부의 목화 대농장주에 의해 좌지우지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목화를 수출하면서 유럽의 공산품을 값싸게 구매하고 싶어했으므로 해밀턴의 의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열혈 청년 해밀턴은 혼외정사 추문으로 1795년 재무장관에서 쫒겨나고 50세되던 1804년 뉴욕에서 한때 친구였지만 정적으로 돌변한 애런 버에 의해 결투중 사망하고 만다. 해밀턴은 무위로 죽었지만 그 이후 그의 주장이 빠짐없이 채택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1812년 미영전쟁(나폴레옹때문에 영국이 정신없는 틈을 타 해상봉쇄의 불만을 해결하고 미국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발발)이 발발하자 미국의회는 관세를 12.5%에서 25%로 대폭 인상한다. 전쟁직후 발전한 제조업자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1816년 관세는 다시 35%로, 1820년에는 40%로 인상된다. 하지만 이후 30년동안 관세문제는 미국정체의 상존하는 긴장의 원천이 되었고 남북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다.
링컨은 노예해방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미국내 유치산업 보호를 강력하게 옹호했다. 그는 당선되자 마자 관세를 미국 역사상 최고 수준으로 올렸고 이에 반대하던 남부는 의회에서 탈퇴하여 전쟁을 일으킨다. 20세기들어 1913년 언더우드 관세법이 통과되면서 관세는 44%에서 25%로 낮아졌다. 그러나 미국이 1차대전에 참전하면서 관세는 다시 올라갔다. 1921년 공화당 집권시 관세는 더욱 올라가서 1925년 평균 관세는 37%에 이르렀다. 대공황이 시작되고 1930년 스무트-홀리 관세가 적용되면서 관세는 더 올라간다(48%). 스무트-홀리 법은 대공황 시기에 과도한 관세를 부과해 보복관세를 불러오며 세계 대공황을 심화시켰지만 미국의 자국내 산업 보호라는 전체적인 틀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2차대전후 미국은 1846년 곡물법을 폐지했던 영국의 전철을 답습한다. 이기간 미국은 말로는 자유무역을 옹호한다고 했지만 무관세 정책을 펼친 것도 아니었으며 필요하면 관세 외에 다른 보호무역 정책을 서슴없이 사용했다. 그외 R&D지원 같은 보조금으로 핵심 산업을 장려했다. 1950~1990년대 중반까지 미국 연방정부의 지원은 전체 R&D의 50~70%를 차지했는데 일본과 한국 등 소위 `정부주도형`국가에서 볼 수 있는 20%의 수치를 크게 뛰어넘는 것이었다.
요컨데 영국과 미국의 경제가 크게 발전한 것은 보호무역의 공이 크다는 것이다.
- 나쁜 사마리아인 8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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