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머리에서부터 결론을 밝히자면 왜 사느냐에 대한 가치는 순전히 개인 스스로 찾아야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나 스스로도 언제나 사실과 진실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 뿐, 그것에 어떻게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지는 다루지 않는다. 사실과 진실은 모두가 공유할 수 있지만 가치판단은 사람마다 모두 달라서 그리하기 어렵다. 같은 사실을 보고도 해석은 제각각이다.
우리는 사실에 기초하여 가치를 세우는 오류를 범한다. 그리고 미리 정해진 가치관에 맞추기 위해 사실을 왜곡한다. 이렇게 사실과 가치가 뒤섞여서 진실이 왜곡되는 것을 바로 잡을 수 있을까? 왜곡되지 않은 사실과 진실에 기초한 무가치론적 진실성을 나스스로라도 세워보고자한다.
왜 사는가?
뇌의 속성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누구든 이 질문에 한번은 빠지게 된다. 뇌의 회로는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을 결정한다. 뇌의 기본소자인 뉴런세포는 그 활동자체가 반도체 소자처럼 on과 off로 작동하는 디지털 소자의 일종이다. 컴퓨터가 디지털 회로들의 소자들에 전기가 통하고 끊기는 작은 스위치들에 의해 작동하듯이, 뇌도 뉴런소자들이 전기신호를 쏘거나 쉬거나 하는 스위치들에 의해서 작동한다.
뉴런들은 하는 행동마저 뚜렷하게 디지털 소자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니 거기에서 뭔가 신비주의 색체를 찾을만한 것도 없다. 보통 인간의 사고나 감정, 정신세계는 신비주의로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것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지만, 뉴런에는 그럴만한 게 없다.
이 뉴런들의 활동에 의해 모든 생각과 감정들이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인간의 생명이 컴퓨터나 자동차, 시계와 같은 기계가 작동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작동상의 복잡성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현격한 차이가 있으나, 그것은 뇌가 다른 것과 비교하여 복잡하다는 것일 뿐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신비한 것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혼란에 빠진다. 뇌회로가 만들어진 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일 뿐 우리가 자유롭게 생각하고 스스로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도 사실은 이미 만들어진 회로가 규칙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때 사랑의 감정을 느낄때도 이것이 실제로는 진화의 프로세스가 자신을 종족번식에 끌어 넣기 위해서 뇌에 심어놓은 회로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우리는 보통 사회속에서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인연을 맺는 것을 바란다. 종교적인 믿음에서 감동과 만족을 얻거나, 예술의 아름다움의 추구하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것을 추구하는 자신 내부의 강한 욕구가 누군가에 의해서 조작된 것이라고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하며, 당연히도, 분노와 반발심으로 이러한 생각을 반대하기 위한 논리를 만들기 위해 애쓴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 그 말도 안되는 기계론적 뇌 해석을 혐오하고 죄악시하며 멸시하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인신공격을 퍼붓거나 비아냥거리기도 하며, 비인간적인, 무신론적인 생각들을 몰아내겠다며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오로지 이성적인 힘이 강한 몇몇 사람들만이 뇌의 진실을 마음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들에게 왜 사느냐는 아주 큰 의문이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이유 모든 것이 자신 스스로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힘이 만들어 놓은 것이고, 그에 따라 뇌의 회로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작동에 따라서 스스로 왜 사는지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이 기계적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생각이 가치가 있다는 생각조차도 자동으로 만들어진다.
과거에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했던 것이 이미 만들어진 뇌 회로의 결과라면 자유로운 생각이란 애초부터 없는 것인가? 의지라는 것도 어떤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뇌의 기능이므로 스스로의 의지라는 것이 무슨의미가 있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사실은 이런 뇌 회로가 작동해서 만들어 놓은 결과물이라면 그것에 따라야하는 이유는 없는 것인가? 우리인간의 자유의지는 기계론적 인간관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 않은가? 반대론자의 논리는 이렇듯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생물학적 지식은 물론, 뇌신경학,통계학,철학,논리학,수학,물리학,전산과학과 회로론 등 인류가 가장 최근에 발전시킨 모든 지식을 동원해야할 정도다. 그러나 그 이해는 인간의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능하다.
왜 사나에 대한 답을 하기위해 당신은 지금까지 왜 살아왔나? 왜 살아왔나를 정확히 설명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 왜 살아왔는지의 이유를 자기 자신에서 찾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왜 사는지, 지금까지 왜 살아왔는지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자기 자신보다는 자신이 속한 사회와 집단 속에서 찾아야 한다.
어렸을 때는 동물적 본능과 부모, 가정이 그 사람이 속한 사회가 그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것을 만든다. 그 때에는 왜 사는지에 대한 생각조차 없고, 단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먹고, 자고, 배설하고, 노는 것을 찾아헤멜 뿐이다. 그러다 학교에 가게 되면 그 사람에 영향을 주는 사회는 학교와 교육이라는 울타리로 확대되고 본격적으로 (왜 사는지가 아닌)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집중적인 주입식 교육이 실시된다. 우선은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삶의 이유가 된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좋은 직장이, 그 이후에는 승진이, 결혼이, 부(富)가 사는 이유가 된다.
당연히도 그 모든 것들은 사회가 만들고 개인에게 주입한 것이다. 개인이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스스로 결정한 것처럼 느낄 뿐이다. 자신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결정에 강하게 영향받는다. 주변사람들이 의대를 선호하면 자신도 의대를 더 선호하게 된다. 좋은 대학에 가려고 노력하는 것도 주변사람들이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므로 따르는 것이며, 대학이라는 시스템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의 대안조차 연예인, 개인사업가등과 같이 사람들이 선호하는 삶의 방향을 선택한다. 이런 심리적 경향을 이용해 사회는 그런 사람들의 모범모델을 만들어두고 유포시켜 개개인의 삶의 방향을 그곳으로 유도한다
정규교육을 거부하고 독학으로 큰 학문을 이룬 사람에게도 비슷한 방법으로 성공을 이뤘던 거장의 모델이 그 사람의 인생을 이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술가들에게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지는데 사회 전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모델이라 하더라도 그 분야에서는 한 영역을 차지 하는 위인적인 모델이 반드시 존재한다.
이렇게 개인이 왜 사는지에 대한 이유를 사회가 심어주고 주입시킨 것으로 봤을 때 왜 살아왔나에 대한 좀더 정확한 답이 주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가치관들 중에서 사회를 통해 주입되지 않은 것은 없다.
뇌에 대한 이해에서 붕괴되는 가치관 중 하나는 자유의지와 자유로운 사고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받는 교육에서는 인간이 왜 존엄한지를 가르치며, 그 이유에 동물과 기계와는 다른,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핵심을 차지한다. 또한 사람은 자라나면서 자신의 인생에서 선택을 하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을 훈련받는다. 그리고 좀더 좋은 선택을 하고 좋은 사회적인 위치를 얻을 수 있도록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는다. 그것 역시 자유의지에 책임을 덧붙여 살아가는 이유를 주입하는 방식중 하나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왔나?
사회가 그렇게 살도록 모든 가치관을 주입했기 때문이다.
뇌에 대한 이해는 왜 가치관에 혼란을 주는가?
"내가 살아온 것이 실제로 나의 결정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가장 보편적인 이유는 우리가 배고플 때 밥을 먹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살려고 하는 본능은 이성의 간섭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뇌현상이다. 그 본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곧 진화의 고리에서 도태되어 사라지게 되므로 살아남은 모든 동물은 생존본능의 회로가 작동하고 있다.
그 중 섹스에 관한 본능은 인간을 강하게 지배한다. 성적인 만족을 위한 행위들은 개인들의 생존에는 도움이 되지 않거나 오히려 해로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은 성적 만족을 위해 온갖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번식에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쾌락을 느끼는 회로가 뇌에 장착되었다.
우수한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경쟁하고 함께 생활하며 자손을 키우는 과정은 너무나도 길고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생존가능성 측면에서 이런 과정은 피해야 하는 위험한 행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번식을 위한 길로 들어간다. 종족번식을 위해 진화가 심어놓은 성적인 본능과 종족유지의 본능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작용하는 본능을 훨씬 압도한다.
우리의 뇌는 진리를 깨닫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가 아닌 생존과 번식을 위해 진화되어온 장치이다. 세상의 현상을 이해하고 핵심원리를 파악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생존에 도움을 준다. 물론 그 가장 밑에는 유전자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때로 이를 깨닫는 능력이 생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어 이를 차단하는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첫번째 안전장치는 인간에 대한 우월감과 자존의식이다. 동물과 기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켜 인간만의 가치를 미화시키는 것이 이 과정에서 꼭 필요하다. 자유의지, 미적 감각, 창조력, 사랑과 같은 감정 등이 인간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동원된다. 그리고 그것들이 위협받게 되면 침팬지나 까마귀의 도구사용이나 붉은 사슴의 민주주의가 알려졌을 때 인류가 충격에 빠졌듯이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게 된다. 그때 우리의 뇌는 방어적으로 그것을 거부하기 위한 회로가 작동된다. 삭막함이 느껴지고 허무하거나 불쾌한 기분이 바로 그것이다.
생명이 정교한 기계의 일종이라는 관점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은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삭막하지 않은가?’라는 것이다. 그렇다. 자존심에 상처가 가고 우월감이 무너진다. 그 느낌은 뇌에서 만들어진 생존을 위한 안전장치가 잘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자연, 우주, 진리자체에는 삭막함이나 기쁨과 감정적 요소가 없다. 진실이야말로 가장 괴로운 것이다. 진화적으로 진실에 대한 깨달음은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안전장치는 비단 본능적 감정뿐 아니라 사회 문화적으로도 마련되어있다. 기독교나 윤리종교, 사회통제적 종교들은 하나같이 생명존중의 사항을 설파하고 있으며 이는 특정 철학적 사상에 대한 거부감과도 연관된다. 대표적인 것은 유물론에 대한 사상적인 거부 반응이다. 정치, 종교, 윤리적 이데올로기가 자연과학의 목을 죄고 왜곡시키려는 힘을 행사하는 것은 과거 지동설이나 진화론이 등장했던 때를 거쳤음에도 현재에도 유지되고 있으며 미래에도 없어지지 않을 문화적인 안전장치이다.
생명, 인간이란 무엇인가?
진리는 간단할 수 있다. 다만 우리의 뇌에는 진리를 쉽게 깨닫지 못하도록 하는 안전장치가 작동하고 있어서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