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3일 목요일

불안을 일으키는 역사적 변화 이야기

고대시대, 사람들은 계급에 의해 명확히 나뉘었다. 서양계급사회(기타 세계도 마찬가지지만) 주요한 세계급 – 성직자, 귀족, 농민 – 은 매우 확고했으며 나면서부터 결정된 것이다. 농민은 낮은 위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도덕적 의미는 없었다. 오히려 농민계급은 생산계급으로서 사회유지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귀족들도 이를 알고 있었다. 성서에도 나타난다. 예수는 목수의 아들이며 부자는 성서에서 부정적으로 다뤄졌다.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개념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1723년 봄, 런던의 의사 버나드 맨드빌은 소책자 ‘벌의 우화<The Fable of the Bee>’에서 부자들이야말로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의 생존을 돕는 쓸모있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그의 책의 부제가 말해주듯이 “사적인 악덕, 공적인 유익”으로 요약된다. 24년되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돈이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님을 인정했으나 동시에 돈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에 매우 감사한다. 이런 욕망과 능력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보다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이런 이야기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다지 기분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도덕성까지 해치는 것은 아니어서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켜주었다. 그런데… 시간이 더 지나가자 지위에 도덕적 의미까지 부여되었다.

계급제 사회에서 평등한 사회로 이행하면서 세습으로 유지되었던 기존의 무능력했던 왕, 귀족, 장군 등의 높은 지위자들은 퇴출되고 공정한 경쟁에 의해 능력있는 사람들이 높은 지위를 얻게 되었다. 교육은 평등하게 이루어졌고 능력주의가 자리잡았으며 불평등을 조장하는 것들은 제도적으로, 혹은 자연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능력과 세속적 지위사이에 신뢰할 만한 관련이 있다는 믿음이 늘어나면서 돈에도 새로운 도덕적 가치가 부여되었다.

록펠러는 부끄러움 없이 주님이 자신을 부자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스코틀랜드의 의사 새뮤얼 스마일즈는 ‘자조<Self-help>’에서 궁핍한 젊은이들에게 높은 목표를 세우고, 공부하고, 절약하라고 권했으며 젊은이에 대한 지원정책을 비난했다. 심지어 엄청난 기부금을 냈던 앤드류 카네기조차도 그의 ‘자서전<Autobiography>’(1920)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선행위에 쓰는 1000달러 가운데 950달러는 차라리 바다에 버리는 게 낫다. 자선으로 먹여살리는 주정뱅이 부랑자 또는 게으름뱅이 하나하나가 이웃을 부도덕하게 감염시킨다. 감정은 적을수록 좋다. 자선행위로는 개인이든 인류든 나아질수가 없다. 진정으로 귀한 사람은 결코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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