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3일 목요일

우리는 원시인보다 나은가?

애덤스미스는 ‘국부론<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Wealth of Nature>’(1776)에서 근대사회가 이루어낸, 경외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생산성과 원시적인 사냥과 채집사회의 형편없는 자원을 비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원시사회는 극심한 궁핍에 시달렸다. 기아와 가난한 자는 짐승의 밥이 되곤 했지만 혁신적인 생산성으로 근대의 모든 구성원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그는 가난한 노동자라해도 근면하게 일하기만하면 과거의 어떤 야만인도 얻을 수 없었던 많은 물자를 손에넣고 편리한 생활을 즐길 수 있다고 했다. 하물며 250여전이 지난 지금에서야 두말할 게 있겠는가?

그러나 스미스보다 22년전 장-자크 루소는 날카롭기 기묘하지만 섬뜩할 정도로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야만인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인간 불평론 기원론<Discour surl’origune et les fondements de l’inegalite parmi le bommes>’(1754)에서 다들 야만인과 근대의 노동자중 노동자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과전 정말일까 하고 물었다.

루소의 주장은 부에 대한 명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사회는 첫번째 방법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이루었지만, 욕망에 줄기차게 부채질을 하여 자신이 가장 뛰어난 성취의 한 부분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부유하다고 느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와 같다고 여겼지만 우리보다 더 큰 부자가 된 사람과 실제로나 감정적으로나 거리를 두면 된다.

발전한 사회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전보다 높아진 소득을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를 더 부유하게 해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볼 때 우리를 더 궁핍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무제한의 기대를 갖게 하여 우리가 워하는 것과 얻을 수 있는 것, 우리의 현재의 모습과 달라졌을 수도 있는 모습 사이에 늘 간격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루소는 머리 위에 지붕이 있고, 배를 채울 과일 몇알과 견과가 있고, 저녁에 투박한 악기를 연주하거나 낚시용 배를 만들 수만 있다면 부족함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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