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3일 목요일

철학 상담소

만물이 소생하는 봄은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자살율이 가장 높은 절기이자, 신경정신과 관련 약물이 가장 많이 소비되는 기간이기도 하다. 찬란한 햇살이 오히려 우울을 불러오는 셈이다. 이 통계수치는 우리로 하여금 빛이 밝으면 그만큼 그림자도 짙다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연상케 한다. 철학은 본래 인생의 아이러니를 풀고자 하는 욕구에서 출발한 학문이다.

‘우울한 현대인을 위한 철학 카운슬링’을 자처하는 《철학상담소》의 저자 루 매리노프 박사는, 철학이 일상의 문제와 삶의 아이러니를 해결하는 데 유용한 도구로 쓰였던 그 고전적 뿌리로 돌아가고자 한다(고대에는 철학이 ‘영혼의 의술’이라 불리기도 했다). 더 나아가 저자는 철학이 우리 인생의 구명보트가 될 수 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상황을 철학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태풍의 눈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당신 주위에서 아무리 많은 일들이 소용돌이치더라도, 당신 자신은 고요하고 담담하다.”


어느 누구도 당신을 모욕할 수 없다!
우리에게 생소한 ‘철학 카운슬링’이라는 개념은 그러나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미 일상화되어 쓰이고 있다. 모든 학문분과를 실용화하는 데 발 빠른 미국에서는 특히나 전문가와의 ‘상담’이라는 행위가 세금 내고 휴가 가는 일처럼 평범한 일상사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중이다.

독일의 철학자 게르트 아헨바흐에 의해 1982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철학 카운슬링은, 인간의 모든 문제와 행동에 ‘정신적 질병’이라는 딱지 붙이기를 좋아하는 정신과 상담과 달리, 도덕적 딜레마, 직업적 갈등, 가치와 목적의 혼란, 대인관계와 정체성의 혼돈, 돌연한 상실감 등을 정상적인 인간의 일상사로 간주한다. 즉 철학을 사용자(user)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는 점에서, 철학 카운슬링은 학문인 동시에 기술이기도 하다. 따라서 《철학상담소》 역시 읽는 관점에 따라 인문서인 동시에 실용서일 수도 있는 열린 텍스트이다.

그렇다고 이 책 속에 꼭 철학자들만 언급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파울로 코엘료 등 분야를 초월하여 위대한 인물들의 지혜가 총동원되고 있다. 그리고 이 철학적 지혜와 통찰들은 구체적인 일상의 딜레마들에 해결책 또는 비상구를 제시한다.

저자는 우선 제대로 ‘구분’할 줄만 알아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 문젯거리들이 훨씬 줄어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많은 사람들이 ‘모욕’과 ‘피해’, ‘질병’과 ‘불편함’, ‘통증’과 ‘괴로움’의 차이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서 화를 자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질병’은 약물치료가 해결책이지만 ‘불편함’의 해결책은 다름아닌 생활철학이다. 또한 ‘질병’에 수반되는 것이 ‘통증’이라면 ‘불편함’에 수반되는 것은 ‘괴로움’이다. 이러한 구분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상 관점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실천도 어렵고 결과도 확연히 차이난다.

특히나 현대인들이 겪는 많은 문제들은 모욕과 피해를 혼동하여 비롯된경우가 허다하다(108쪽-121쪽 참조). 그러나 그 둘은 엄연히 다르다. 피해가 일방통행이라면 모욕은 양방향 통행이다. 엘리너 루스벨트의 말처럼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당신을 모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나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자신밖에 없다”고 믿는다.

이는 괴로움도 마찬가지이다. 괴로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공범자가 되어야 한다. 통증은 우리의 의사에 반해서 가해지지만, 괴로움은 우리의 암묵적 동의 없이는 가해지기 힘들다. 즉 괴로움은 온전히 ‘우리의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것이 기쁜 소식이라고 말한다. 괴로움이 우리의 소유물이라면 버리면 그만 아닌가!

괴로움의 원인 또는 치유책이 외부환경에 있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소유’와 ‘비소유’라는 두 숙달된 선수들이 네트 너머로 번갈아 쳐 넘기는 테니스 공과 같은 신세를 모면할 수 없다. 우리가 허락하는 한, 그들은 평생 동안 우리를 공처럼 갖고 놀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가 모욕을 회피하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인용한 지휘자 카라얀의 사례와(121쪽 참조) 미국 코미디언 재키 메이슨과 프랭크 시나트라 사이의 일화는(128쪽 참조)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아내의 외도와 사르트르의 관계는?
무엇보다 이 책의 가치는 풍부한 상담사례들에 있다. 그중에서 ‘이성과 열정’에 관해 이야기하는 제3장에 등장하는 배리 이야기는 매우 인상적이다(84쪽-100쪽 참조). 20년간의 평온한 결혼생활 끝에 아내가 자신의 절친한 친구와 한 침대에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 설상가상으로 직장에서도 해고당한 배리는 인생 최대의 위기 앞에서 철학 카운슬러를 찾아간다. 그리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처방받는다. 저자는 상처뿐인 사건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해석하려는 배리의 의지력을 보고 “자기 자신의 잘못에도 책임을 지라”는 요지의 사르트르 철학을 과감하게 처방했노라 말한다. 사르트르의 주장은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당신이 벼락을 맞았다면 당신은 분명 대기의 방전에 대해 책임이 없다. 그러나 천둥이 치는 날씨에 골프를 치다가 그렇게 됐다면 당신에게 아무 책임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전적으로 불운만을 탓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생활에 영향을 미친 사건에 대해 우리가 어느 정도로 책임이 있는가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너무 많은 책임을 인정한다면 ‘유아론자’가 된다. 즉 세상에는 나 하나뿐이므로 모든 것이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너무 적은 책임밖에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피해자학’이라는 유해한 학설의 신봉자가 된다. 여기서 실존주의 철학은 불교심리학과도 조우한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열 개의 상이한 마음 상태를 의미하는 불교용어 십계(十界)는 배리의 위기와 극복을 절묘하게 설명하는 토대가 된다(99쪽-100쪽 참조).

본문 구성은 모두 이런 식이다. 배리의 경우처럼 구체적인 상담 사례를 들고, 그에 따른 철학 처방을 내리면서 부연설명을 들려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괴로움과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제5장에는 9․11 테러로 남편을 잃은 미가엘라의 고통과 보트 사고로 열일곱 살 된 아들을 잃은 제임스의 슬픔이 사례로 등장한다. 또한 ‘사랑과 증오’를 다루는 제6장에는 아들의 동성애를 인정할 수 없어 괴로워하는 짐과 마그달레나 부부의 이야기가 소개되며, ‘물질과 영혼’에 대해 말하는 제10장에서는 천재적 바이올리니스트 이자크 펄먼의 감동 실화가(344쪽 참조) 등장한다. ‘변화와 지속’을 논하는 11장에는 폐암 판정을 받고 절망에 빠진 보험회사 부회장의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저자가 책 전체를 통해 강조하는 것은 ‘현재’와 ‘자기중심’의 중요성이다. 모든 심리상담가들이 치료의 기본 전제로 삼는 동시에 핵심적으로 강조하는 사항이 바로 “현재에 충실하라”는 명제다. 철학 카운슬링의 지도적 원리 또한 “미래를 염두에 두고 가능한 한 현재 시점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또한 단순한 기억이나 남들의 평가가 아닌 우리의 가장 깊은 인간적 본질을 중심점 삼아, 그 어떤 모욕적인 상황에도침해당하지 않는 자기만의 내적 공간을 사수하라고 충고한다.

이는 소설 <한니발>에서 살인마 렉터 박사가 고통스런 상황에 처했을 때 도피하는 머릿속의 가상 공간, 기억의 궁전을 떠올리게 한다. 그곳은 렉터만이 알고, 렉터만이 컨트롤하는 절대 공간이다. 저자는 우리들에게도 그런 자기중심을 마련할 것을 권한다.


이 책은 단순히 철학의 역사나 유명 철학자들에 대한 소개, 철학사조의 요약이 아니다. 그런 종류의 책들은 이미 서점에 차고 넘친다. 물론 《철학상담소》말미에 부록으로 첨가되어 있는 철학자와 그들의 대표 사상, 대표 저작에 관한 상세한 소개는 단순히 지식을 늘리는 데에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철학 카운슬링’이라는 참신한 소재를 이용해, 일상 속에서 비타민제나 아스피린처럼 가까이 두고 상비약으로 쓸 수 있는 철학을 모색하는 이 책은, 마음이 힘들 때마다 열어볼 수 있도록 가까운 곳에 꽂아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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