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롬은 자유를 소극적 자유(~로부터의 자유, `free from~`)와 적극적 자유(~을 향한 자유, `free to`), 두 종류로 나누었다. 소극적 자유는 어떤 속박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는 것으로 중세 이후 서구 사회에서 개인이 획득한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자유가 이런 소극적 자유에 해당한다.
그러나 인간은 소극적 자유를 얻음으로써 고독과 무력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런 모든 것을 극복하고 적극적 자유를 획득할 때에야 비로소 참된 의미의 자유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적극적 자유는 개인이 자신의 노력을 통해 새로운 유대 관계를 찾아낼 때에만 누릴 수 있는 자유이다. 적극적 자유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곧 참된 자아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종교 개혁 이후 근대로 들어오면서 인간은 자연의 속박,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소극적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이것은 한편으로 개인에게 고독과 불안의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인간이 왜 고독을 두려워하는가’에 대해 프롬은 ‘인간은 본래 남과 협력을 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 이며, 또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판단을 통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데 있다고 했다.
인간은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이며 모든 경제 활동의 목적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었다. 자본가건 노동자건 인간은 모두 자본의 노예가 되어, 자본을 축적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현대에 와서 인간 관계가 ‘인간적’인 관계가 아니라, ‘기계적’ 또는 ‘소외적’ 관계가 되면서 사람들은 한층 더한 고독과 무력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 무서운 고독감을 극복하는 방법은 오로지 모든 사람들과 자발적으로 하나로 뭉치고 서로 사랑함으로써 새로운 유대감을 키워 가는 것뿐이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자유를 포기하고 어떤 강한 힘에 종속됨으로써 안도감을 느끼려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고독과 무력감에 떠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적극적인 자유로 나아가는 것이며, 또 다른 길은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자유를 포기하는 경우, 즉 소극적 자유에서 적극적 자유로 나아갈 수 없는 경우에 인간은 참을 수 없는 고독과 무력감의 상태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려 한다.
이와 같은 도피는 대체로 권위주의적 성격(지배-복종의 관계를 맺으려는 성격)과 자동 기계화(주체적생각없이 유행이나 습득정보에 따라 수동적으로 소비생활을 하는 대중)의 측면으로 나타난다. 권위주의적 성격의 경우, 독일인들이 히틀러로 대표되는 나치즘에 복종한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경우 1차적 속박에서 벗어난 개인이 고독을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2차적 속박을 구하는 것이다. 독일인들이 히틀러의 권위에 복종하여 그 희생이 되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신보다 열등한 사람(유태인)을 멸시하고 학대하며 욕구 불만과 열등감을 해소하려는 심리가 여기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왕따` 현상에서도 중립적이었던 학생은 주체적 생각이 없으므로 왕따인 학생을 괴롭힘으로써 보다 권력있는 일반대중에 속하고자 한다.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의 경우도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가 유행을 선도하며 남과는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유행이라는 이름의 집단행동양식에 동참함으로써 심리적 편안함을 얻으려는 욕구의 발현일 뿐이다. 같은 예로 특정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에게 열광적으로 되는 사람들의 심리도 비슷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자동 기계화의 상태로 나아갈 경우는 자아를 상실한 개인이 그 상실로 인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남들의 기대에 따라 자동 인형처럼 행동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어 행동함으로써 그들과 동질감을 느끼게 되고, 거기서 안정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안정감을 잃지 않으려 더욱더 남의 기대에 순응하게 되며 혹시라도 그들을 비판하는 적이 나타날 경우 분연히 `단결`하여 적개심을 드러냄으로써 더더욱 안정감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적(主敵)`이 있는 사회는 안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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