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4일 금요일

美통화경제 역사

미국 식민정부의 대표인 벤저민 프랭클린은 1757년 영국으로 건너가 영란은행 고위 간부로부터 식민지에서 사용하는 지폐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주 간단하다. 그 돈은 식민지 유가증권이라고 하는데 생산자가 만든 물건이 소비자에게 도달하는 경제의 기본요건을 원활히하고 산업과 상업에 필요한 만큼을 적당히 발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직접 지폐를 발행해 인플레이션을 조절하고 정부와 국민은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게된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한 말이었지만 영란은행을 중심으로 한 환전꾼들은 큰 경각심을 갖게되었다. 이들은 식민지 화폐를 `엉터리 돈(fiat money)`라며 애써 무시했지만 이 돈은 미국내에서 상품거래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했고 미국민을 단결시키는 중요한 촉매제가 되었다. 정부가 화폐 발행권을 갖게되면 환전꾼들은 자신들의 지준제도를 이용한 가상 화폐를 발행해 얻는 막대한 이익이 사라져 버리게 된다. 그 결과 1764년 영국의회는 식민지에서의 자체적인 화폐 발행을 금지하는 `화폐법(currency act)`를 통과시킨다. 아울러 식민지가 영국에 내는 세금도 금이나 은 등의 실물로 지불토록 했다. 이는 금본위 제도로의 강제전환을 의미했다. 영국의 조치에 프랭클린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영국 정부가 미국의 식민지 유가증권을 금지하지 않았다면 세금같은 것은 기꺼이 낼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화폐법때문에 미국의 경기가 급속히 위축되었고 실업률이 치솟으면서 국민의 원성을 샀다. 조지 3세와 국제 금융가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이 결국 미국 독립전쟁의 주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1775년 4월 19일 메수추세츠 주의 렉싱턴에서 미국과 영국군이 처음 무력충돌을 감행했을 때 이미 미국에는 금이 바닥난 상태였다. 미국은 독립을 선언하고 이전 식민지 유가증권을 재발행해 전쟁용 자금을 생산(?)했다. 물론 극심한 인플레 현상은 피할 수 없었다. 전쟁 발발당시 1천2백만 달러에 불과했던 통화량이 종전무렵에는 5억달러에 육박했다.

현대에 와서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예를 들어 금의 뒷받침 없는 정부의 무분별한 화폐 발행이 가져오는 재앙(인플레이션)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독립전쟁 이전의 평화시기의 지폐가 얼마나 훌륭한 역할을 해왔는지에 대해서는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


미국의 독립전쟁이후 미 전역의 대표자들은 필라델피아의 독립기념관에서 독립문제에 대해 토의했다. 전후의 화폐 시스템은 중요한 사안이었는데 그 결과 1781년 Robert Morris라는 사람(군수물자로 거부가 됨)을 주인으로 하는 개인 소유의 중앙은행 창설을 허락하게 된다.

모리스는 영란은행을 그대로 모방하여 북미은행(The Bank of North America)을 창설한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이후 과도한 종이돈의 발행으로 미국의 화폐가치가 점점 떨어지자 이를 깨달은 의회는 1785년 모리스의 은행허가권 연장을 중지한다. 그러나 모리스의 제자격인 알렉산더 해밀턴이 6년후 재무장관에 임명되고 금본위제의 중요성과 독립전쟁이후 인플레의 위험성을 주창하면서 북미은행은 이름만 바꾼 새로운 중앙은행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드디어 1790년 미국 의회는 20년간의 차터권을 개인은행에 위임하게 되고 새롭개 탄생한 개인소유 중앙은행이 '미국 제1은행(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이다. 자본금은 1천만달러(개인 8백만, 정부 2백만)였으며 실제 은행의 막후 소유주는 로스차일드 가문이었다. 미국 제1은행은 인플레를 막아야한다고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로부터 5년간 정부에 820만달러를 대출했고 같은기간 미국은 72%의 인플레이션에 시달려야했다.

1811년 미국 정부는 미국 제1은행의 차터권을 연장시키는 안을 의회의 상정시켰다. 미국사회내에서는 이에 대해 격렬한 농쟁이 일어났다. 언론이 국제 금융가를 공공연히 비난하고 나섰으며 펜실베니아 주와 버지니아주는 은행의 사유화를 중단하라고 의회에 압력을 넣었다. 궁지에 몰린 나탄 로스차일드는 미국이 차터권을 연장해주지 않을 경우 가공할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할 정도였다. 이 법안은 결국 부결되었는데 5개월도 되지 않아 영국은 미국을 침략하면서 1812년 전쟁을 일으킨다. 영국은 당시 나폴레옹과 전쟁중이어서 열세를 만회하고 못하고 1814년 패하고 만다.

1816년 미국의회는 20년의 차터권을 가진 '미국 제2은행(The Second Bnak of the United States)'을 만드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모든 시스템은 미국 제1은행과 동일했다. 1832년 은행들은 다시 20년의 차터 기간을 연장하는 법은을 통과시키려 했고 상하원 모두 통과한다. 그러나 당시 잭슨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해 환전꾼들의 야욕을 꺾는다. 재선에 성공한 잭슨은 중앙은행의 모든 돈을 몰수하려고 했고 미국 제2은행의 대표였던 니콜라스 비들은 의회를 조종해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특히 그는 인위적으로 통화량을 줄이고 대출을 축소시켜 경제공황을 일으킨다.

공황의 책임이 잭슨의 중앙은행 통화몰수라는 비난이 가해졌지만 잭슨 대통령은 뚝심있게 일을 추진해 1835년 1월 빚없는 정부를 만드는 한편 정부 국채를 없애고 직접 화폐를 발행하게 된다. 그 뒤 사유 중앙은행은 77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등장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22일 후 잭슨은 리처드 로렌스라는 사람에게 저격을 당했지만 살아남는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미국이 전쟁과 같은 극한 상황이 아니면 중앙은행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비충당을 위해 미국이 자신들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이후에 정부는 마음대로 움직이기 쉽다. 당시 미국같은 강대국에 상대할 나라가 없었으므로 미국을 분열시키고 적당한 명분으로 노예문제를 이용했다.

링컨은 노예제도를 없앨 의사가 없음을 수도없이 천명하였다. 노예제도란 막후의 권력자들이 미국을 분열시키기 위한 명분으로 내세운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북전쟁의 진정한 이유는 북부가 유럽의 값싼 수입물품에 관세를 부과함에 따라 유럽에서 이에 대한 보복으로 목화수입을 중단해 남부경제가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남부는 수입관세로 물가가 상승한 반면 목화판로가 막혀 경기침체가 지속되자 남북 갈등이 고조되었다.

1861년 4월 12일(링컨 취임후 1달)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북단의 섬터 요새에서 남군이 첫 총격을 가함으로써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유럽의 환전꾼들은 링컨이 곧 전비마련을 위해 돈을 빌리러 올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링컨은 그린백(Green Back)이라는 지폐를 찍어내면서 유럽의 금융가들과 가공할만한 화폐전쟁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환전꾼 입장에서는 전쟁국에 돈을 빌려주어 막대한 이자를 챙기는 것이 주목적인데 링컨은 이러한 계획에 재를 뿌려버린 것이다. 게다가 링컨은 그린백이 초래할 수 있는 재정 건전성 저하를 보충하기 위해 소득세 제도를 소개하기에 이른다. 즉, 필요할 때 정부가 돈을 찍어내고 나중에 여유있을 때 원금만 갚는다는 원칙을 세운 것이다. 이러한 그린백은 남북전쟁의 전비를 잘 충당했으며 최근인 1994년까지 사용되기에 이른다.

남북기간중 링컨은 영국과 프랑스가 남부를 돕는 것을 막기 위해 남부 해안을 봉쇄한다. 그러나 당시 북부에는 변변한 해군력이 없었으므로 마땅한 방법을 찾던 차에 러시아의 강력한 해군력에 의존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링컨은 1861년 러시아의 농노해방선언에 맞먹는 미국의 노예해방선언을 공포하고 러시아 인민과 여론의 동조를 구했다. 이로써 단순히 남북전쟁의 도의적 명분으로 작용했던 노예문제는 실질적인 해방을 맞게된다. 1863년 9월 러시아 알렉산드로 2세는 러시아 해군을 샌프란시스코 항에 주둔시키고 같은해 10월에는 해군을 뉴욕과 볼티모어에도 파견한다.

남북전쟁이후 링컨이 암살되고 뒤를 이은 존슨대통령은 링컨의 남부 유화정책을 이어받는다. 그는 남부정부를 회유하면서 한가지 조건을 내거는데 `전쟁으로 인한 모든 채무를 거절할 것` 이었다. 전쟁당시 전비마련을 위해 남부는 유럽의 은행가들로부터 막대한 부채를 지게되었는데 이 조항때문에 유럽의 은행가들은 천문학적인 손실을 보게된다.

전쟁빚은 남부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당시 링컨은 러시아 해군을 끌어들이기 위해 러시아에 720만달러의 당시로서는 엄청난 액수를 지불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런 돈을 내줄 권한이 존슨에게는 없었으므로 대신 알래스카를 러시아로부터 구입하기로 한다.

결과적으로 링컨의 그린백은 빚없는 정부권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고 인플레이션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기에 이른다. 미국의 화폐제도는 1875년 금태환법령의 제정으로 변화를 맞게된다. 이는 그린백이란 지폐를 금으로 바꾸어주는 법안으로서 1879년 1월1일부터 그린백을 금으로 바꿔주었다. 그후 1971년 8월 15일 닉슨 대통령이 이를 중지시킬때까지 그 법령은 계속 시행되었다.

은행가들은 그린백 시스템과 미서부 지역에서 발견된 대규모 은광때문에 큰 타격을 입고 자신들 소유의 중앙은행을 설립해 통화시스템을 차지하기 위해 절치부심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불안정한 경제시스템상의 공황을 인위적으로 유발시켜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대중이 인식하게 하기로 한다.

3년후인 1876년경에는 실업률이 30%이상으로 치솟으면서 미국이 큰 불황에 시달리게 되자 국민들은 링컨의 그린백을 부활시키던지 은화주조를 허용할 것을 요구했다. 이후 불황의 책임에 대한 면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은행들의 대출긴축 정책으로 1866년 18억 달러이던 미국의 통화량은 1886년 4억달러로 급격히 감소했으며 동일기간 미국은 엄청난 침체기를 겪어야했다. 1872년 영란은행의 사주를 받은 어니스트 쉐이드라는 사람이 미국에서 로비를 벌이면서 1873년 미국의회는 `코이니잭` 법령을 통과시킨다. 이는 미국이 은화를 폐지하는 법령으로서 이후 미국은 금을 유일한 화폐로 인정하게 되고 통화량 급감으로 경제는 크게 후퇴하게 된 것이다.

원인이 밝혀졌는데도 정치적 문제로 불황해결의 문제는 금융자본가들이 국회와 언론을 장악하고 있어서 해결 진도가 지지부진했다. 결국 1878년 2월 28일 의회가 `셔먼법`을 통과시켜 한정된 범위에서 은화주조를 허용하면서부터 경제가 조금씩 회복하기 시작했다.
미국 제 2은행이 문을 닫은 이후 각 주 정부의 인가를 받은 은행들이 미국 돈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당시 돈은 금본위 화폐여서 부채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돈은 정부의 요청에 따라 지방은행들이 정부권 화폐를 발행했고 정부는 소정액의 금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은 은행은 정부의 대리자에 불과했다. 그런 환경속에서 남부의 은행들은 북부의 은행에서 서서히 돈을 뽑아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남북전쟁이 발발할 무렵인 1861년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했을 당시에는 국가 재정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엽 세계 금융무대에서 지도자격으로 활약하고 있던 인물을 JP모건이다. 그는 MA로스차일드의 대리인이었던 조지 피바디와 동업했던 J모건의 아들이었다. JP모건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일하면서 1869년 런던에서 로스차일드와 합의하여 NM로스차일드의 미국 지사인 노던 증권을 설립하기도 했다. MA로스차일드는 JP모건이 데뷔하기 전에 야콥 시프라는 사람을 미국에 모내 금융계를 장악했다. JP모건은 야콥 시프의 하수인격이었는데 JP모건의 80%이상의 재산을 소유했다.

1902년에 와벅 형제라는 또다른 MA로스차일드의 시종들이 출현한다. 맏아들 맥스 와벅, 둘째 폴 와벅, 셋째 펠릭스 와벅이 그들이다. 이들 3형제는 국제금융을 지배하면서 히틀러에게 자금을 공급해 경제 부흥을 일으키고 전쟁비용을 대주었을 뿐 아니라 미국 FRB를 설립하는데도 주요 멤버로 활약한다.


1902년 테오도어 루즈벨트는 셔먼독점금지법을 제정하여 JP모건의 경제독점을 막기위해 노력했지만 그다지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1907년에 재선되었는데 이때 JP모건과 MA로스차일드는 미국에 중앙은행을 재설립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JP모건은 유럽을 다녀온 후 뉴욕에 있는 니커보커 은행이 위태롭다는 소문을 퍼트리기 시작한다. 당시 지준금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뱅크런이 일어날경우 은행은 쉽게 위기에 처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리하여 1907년 공황이 시작되었다.

JP모건은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면서 위기에 빠진 은행들을 구제하며 구세주로 등극한다. 나아가 언론,학계,재계,경제가 인사를 동원해 시중의 일반은행들이 너무 불안하니 반드시 중앙은행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 공황을 통해 은행들이 소수의 몇몇 대주주에게 넘어가면서 금융산업이 보다 소수에게 집중되고 드디어 금융권의 막후 세력자들은 1910년 11월 22일 제킬아일랜드의 헌트 클럽 회동에서 연방준비은행 법의 설립에 대한 초안을 마련하게 된다. 이 초안은 나중에 `올드리치 안` 그리고 결국 `글라스 오웬 안` 으로 의회에 상정되게 되고 결국 1913년 12월 23일 통과되게 되어 드디어 Fed가 탄생하게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경제성장이 지속되면서 전세계의 금이 미국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1920년초 연방준비은행 총재인 스트롱은 영란은행 총재 노먼과 자주만났다.

연준은 1914~1919년까지 계속해서 돈을 찍어내면서 통화량을 거의 2배로 만들었고 대출을 장려했다. 특히 당시 농민들이 대규모로 돈을 빌렸고 농민들은 빌린돈으로 토지를 매입했다.

1920년 5월 16일 연준은은 각 은행들에게 대규모의 여신축소 지시를 내린다. 경제는 즉시 침체로 접어들었고 돈을 갚을 수 없었던 농민들은 토지를 대규모로 차압당한다. 당시 연준은에 협조하지 않았던 은행들이 5400개나 도산했다.

1920년 공황이후 연준은 통화량을 다시 늘리기 시작한다. 1929년까지 10년간 미국경제는 초호황을 이어갔다. 특히 주식시장이 호황을 이루었는데 빚을 내서 투자하는 마진거래가 성행했고 은행들은 고객들의 돈을 주식같은 고위험 자산군에 투자하면서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의 대형 은행들은 융자해준 모든 콜 대출을 24시간내에 회수하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주식시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마진거래를 일삼던 투자가들은 대출을 갚기 위해 이유를 불문하고 주식을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특히 공황으로 인한 뱅크런이 일어나면서 은행들은 예금 지급을 위해 보유하고 있던 주식을 더욱 공격적으로 매도하기 시작했고 지급이 어려워지자 파산을 길을 걸었다. 결국 미국에서만 16000개의 은행이 파산하고 기업의 2/3가 도산한다.
경제공황이후 연준은은 오히려 1929~1933년간 통화량을 1/3로 수축시키면서 대공황을 더욱 극심하게 만들었다.

1932년 대통령선거에서 후버가 낙선하고 F.루즈벨트가 당선된다. 1933년 루즈벨트는 경제위기를 빌미로 전국민의 금을 온스당 22.7센트라는 싼값으로 모두 몰수하는 법안을 만든다. 그리고 1935년 포트낙스로의 금 몰수가 거의 완료되었을 때 금가격을 온스당 35달러로 올린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포트 낙스에는 7억 온스의 금이 보관되어있었는데 이는 당시 전세계 금 보유량의 70%에 육박하는 수치였다. 이후 이곳의 금 보유량은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명령으로 재고조사를 한 번 했을 뿐 재무부의 거부권 행사로 그 이후로 단 한차례도 보유량 조사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

미 재무부는 현재 보유 금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즉, 포트 낙스의 금은 그대로 있지만 그 소유가 미 재무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 금들은 여러해에 걸쳐 유럽의 금융가들에게 온스당 35달러에 매각되었다. 1980년 firestone이라는 회사가 여러개의 유령회사로 계좌를 만들어 금을 매수한뒤 스위스 비밀금고에 예치해뒀다가 들통났던 스캔들이 있었는데 이와 비슷한 시스템으로 금이 미국 밖으로 반출(물리적이 아닌 소유권의 반출)되었다.

1971년 8월 15일 닉슨은 금태환을 거부하고 금 교환 제도를 폐지하여 달러와 금과의 상호 교환을 못하도록 했다. 1934년 루즈벨트에 의해 금보유가 금지당한 이후 37년만에 미국민들은 다시 금을 소유하고 거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기회를 이용해 국제 금융가들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70년대 인플레이션이 기승을 부리고 국제 투자가들이 금을 매수하기 시작하자 금가격은 9년후인 1980년에 온스당 880달러에 거래되었다 이는 법정 가격의 25배에 이르는 것이었다. 1971년 이전에 연준으로부터 35달러에 금을 꾸준히 매수했던 국제 금융가들은 엄청난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1981년 레이건 행정부때 금 위원회가 만들어져 포트낙스의 금이 재무부 소유가 아니라 연방준비은행, 정확히 말하면 연준은에 속한 회원 은행(국제 금융가들)들의 소유라는 것이 밝혀졌다.

- 그림자 정부 (경제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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