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장녀로 살아가는 것은 장남으로 사는 것과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 한국에서 장남이 갖는 집엔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감은 가족 구성원들이 그의 가부장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상받는다. 이에반해 장녀들이 짊어지는 책임과 임무는 티도 안날 자잘한 일들이 많고 이를 보상받을 일도 막연하다. 꼭 장녀가 아니더라도 딸이 부모, 특히 아버지에 대해 갖는 애정과 모성애적 책임감은 `孝`라는 이름으로 삶을 억누르고 평생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아들이 어머니에 대해 효도를 하는 것은 어머니의 고마워하는 마음과 같은 상호작용이 동반된다. 이와달리 딸이 아버지를 섬기고 모시는 행동은 일방적인 딸만의 봉사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장녀 콤플렉스는 매우 뿌리가 깊다. 우리사회에서 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인 심청을 보자. 아들이 아니라 딸이고, 심청이 자기 몸을 바쳐 효도를 하는 대상은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다. 우리 사회에서 딸의 효도가 장녀콤플렉스로 표현되는 것의 근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심청전 말고 딸과 아버지 사이를 다루고 있는 또 다른 전래동화가 있다. 심청전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은혜갚은 두꺼비`이다. 지역과 판본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이런 내용을 가지고 있다.
옛날 지네장터에서 몇십리 밖 어느 마을에 장님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순이라는 소녀가 있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다. 어느날 웬 두꺼비 한 마리가 수채에서 나오므로 순이가 밥찌꺼기 등을 주자 매일 찾아와 둘은 곧 친해졌다. 그 무렵 마을에는 큰 지네가 나타나 사람들을 해치는 사건일 일어났고 마을 사람들은 처녀를 제물로 바치기로 결정, 다른 마을에서 처녀를 사오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순이가 고민끝에 자기몸을 팔아 아버지를 편하게 해드리기로 결심하고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 결심을 밝혔다. 그날 밤 순이는 당잡에 들어가 지네의 제물로 남겨진다. 그런데 그날 두꺼비가 찾아와 순이를 구하기 위해 밤세 지네와 싸웠다. 다음날 아침 사람들이 찾아와보니 죽은 줄 알았던 순이는 살아있고, 커다란 지네가 죽어있었다. 그 옆에는 두꺼비 한마리가 입에서 푸른 독기를 뿜고 있었다. 순이는 그 후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모시고 잘 살았다.
심청전에 비해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우리나라 곳곳에서 이와 비슷한 지네와 두꺼비, 소녀의 이야기가 여러 형태로 변형되어 전해진다. 두편 모두 딸은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친다. 아들이 위기에 빠진 아버지를 구해주는 `슬기로운 아이 이야기`나 `여우 누이`의 경우 아들은 특별히 자기 몸을 희생하거나 아버지를 위해 위험한 곳에 뛰어들지는 않는다. 그런데 아버지를 구하는 딸들은 공통적으로 자기몸을 던지는 자기희생적 행동을 한다. 아것은 아버지가 위기에 빠져있는 걸 직접 구하는 것이 아닌 눈을 뜨게 한다거나 보다 편하게 지내게 해드리기 위한 돈, 즉 생명을 구하는 문제가 아니라 삶의 질을 좀더 윤택하기 위해 딸은 생명을 담보로 내놓는다. 심청은 젖을 뗀 다음부터 장님인 아버지를 대신해서 동냥을 다녔고, 순이는 어릴때부터 살림을 도맡아했다. 두 딸에게 아버지는 아주 중요한 존재이며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나 자신의 안위나 행복은 뒷전으로 던져놓아야한다고 여긴다.
만약 심청이네 집에 심청이 남동생(아들)이 하나더 있었다면 이야기는 심청의 희생으로 남동생이 벼슬길에 오른다는 내용이 추가됐을지도 모른다. 우리사회에서 장녀의 삶은 바로 이렇다. 어른이 된 다음에 어머니와는 싸우고 말다춤을 하지만 점점 더 친구같은 사이가 되어간다. 반면 노쇠해가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항상챙겨드리고, 보살펴 주어야한다는 딸의 책임감이 점차강해진다. 심청과 순이에게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다. 우리 전통문화가 그랬기에 전래동화에서 두 딸이 공희 아버지에게 자심의 몸을 바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것으로 그 콤플렉스는 증폭된다. 지극한 효의 이면에는 무의식적인 공격성이 이런 자기희생의 암묵적 강요에 대한 반발작용으로 잠재되어있다.
현대사회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은연중에 혹은 표면적으로, 맏딸 자신의 책임감, 무비판적인 순종 등으로 나타난다. 맏딸은 맏이면서 딸이라는 이유로 아들인 장남만큼 대우를 받지 못한 채 부모나 동생들을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하는 생활이 기대된다. 인정받는 맏딸로서 잘해야 된다는 의무감과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 느끼는 이유모를 자책감, 동생(특히 남자동생)에 대비해 한살이라도 더 먹었으니까 여자니까 참아야한다는 억압, 한국사회에서 장녀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갈등적 상황이다. 한 집안의 맏이와 딸의 두 가지 역할을 해야 하므로 자유롭게 자아를 성취하며 살기 힘들다.
진정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맏딸은 분별해야 한다. '맏딸이니까 해야 하는 것'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판단이 설 때, 설령 희생과 불이익이 다른다 해도 자아는 안정될 것이고 자주적인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맏이니까 동생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고, 책임감도 강해야 하고, 양보해야 하고, 맏딸로서의 의무감을 느끼는 등의 맏딸의 허상을 깨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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