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4일 금요일

인플레이션은 진정 절대악인가?

1차대전후 독일이나 80~90년대 아르헨티나 등에서 벌어졌던 극심한 물가 상승의 파괴적 성격을 인정하는 것과 물가상승률이 낮을수록 좋다고 주장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논리적 비약이 있다. 브라질과 한국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순조로운 경제성장을 위해 물가 상승률이 반드시 스탠리 피셔를 비롯한 대부분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원하는 1~3%범위 이내여야 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많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조차 10% 이하의 물가 상승률은 경제 성장에 역효과를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세계은행의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역임한 마이클 브루노와 윌리엄 이스터리는 물가 상승률이 40%이하인 경우 물가 상승률과 경제 성장률 간에는 어떠한 체계적인 상관관계도 없다는 것을 제시한 바 있다. 이들은 심지어 어떤 시기에는 물가상승률이 20% 이하인 경우이면 물가 상승률이 높아질수록 경제 성장률도 높아졌다고까지 주장한다.

다시말해 물가 상승도 물가상승 다름이다. 극심한 물가 상승은 해롭지만 적당한 물가 상승은 반드시 해로운 것은 아니며, 심지어 급속한 성장 및 고용 창출과 양립가능할 수도 있다. 역동적인 경제에서는 어느 정도의 물가 상승은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다. 경제가 변화하면 물가가 변하는 법이니,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새로운 경제활동이 많은 경제에서는 물가가 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듯 적당한 물가상승이 해롭지 않다면 신자유주의자들은 왜 그렇게 물가 상승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신자유주의자들은 적당한 것이든 아니든 모든 물가 상승은 나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1979~1987) 로널드 레이건 시절 연방준비제도 의장 폴 볼커가 말했듯, 물가 상승은 고정된 수입을 가진 사람들, 특히 전체 인구 중에서 가장 취약한 집단인 노동자와 연금 수급자에게 더 불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반쪽짜리 진실일 뿐이다. 낮은 물가 상승률은 노동자들이 이미 벌어놓은 것을 더 잘 지켜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이런 결과를 가져오는데 필요한 정책(가령 금리인상 등)은 노동자들이 미래에 벌 수 있는 기회를 박탈시킬 수 있다. 왜인가? 인플레이션을 낮은 수준, 그것도 대단히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엄격한 금융/재정 정책은 경제활동의 수준을 저하시킬 수 있으며, 이는 결국 노동 수요의 감축, 실업증대, 임금감소의 결과를 낳게된다. 따라서 엄격한 물가 통제는 노동자에게는 양날의 칼이다. 반면 엄격한 물가 통제로 이득받는 자는 노동시장 외부에 존재하는 연금 수급자와 이자 생활자들이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리고 인플레이션이 억제되면 이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 부의 가치는 더 잘 보존되고 이는 결국 부의 양극화를 더 심화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1994년 백인정권으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남아공의 새로운 아크리카 민족회의 ANC 정부는 IMF 스타일의 거시경제 정책을 추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이 좌파적, 혁명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우려로 투자자들이 급속히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위함이었다. 신정부는 물가안정을 위해 이자율을 높게 책정하고 결과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 남아공의 이자율은 최고조에 달해 실질기준 10~12%에 달했다. 이때문에 같은 기간 물가 상승률은 6.3%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성장과 일자리에 대한 큰 희생을 치른 대가였따. 남아공의 비금융 회사의 평균 영업이익율이 6%미만이었음을 고려할 때 실질 이자율이 10~12%인 상황에서 투자를 하겠다고 대출 받는 회사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GDP대비 20~25%에 달했던 투자율이 15%로 떨어진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비금융 회사들은 약 3~7%의 이윤율을 가진다. 따라서 실질 이자율이 이 수준을 넘으면 잠재적인 투자자들로서는 제조업에 투자하느니 은행에 돈을 저축하거나 채권을 사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다. 게다가 기업경영의 여러 어려움(노동, 소비자 고발, 제품 불량, 법률 등)을 고려한다면 투자여부를 결정하는 기준 이윤율은 이보다 훨씬 더 낮을 수 있다. 특히 개도국들의 회사들은 내적으로 축적된 자본이 거의 없으므로 대출 문턱을 높이면 투자를 많이 할 수 없다. 결국 투자는 줄어들고 그에 따라 저성장과 일자리 부족이 초래된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조언을 따라 낮은 물가 상승률을 추구했던 브라질, 남아공 등 수많은 개도국들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

그러나 정작 나쁜 사마리아인인 부자나라들은 자기들 나라에서는 소득과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통화정책을 느슨하게 펼쳤다. 2차 대전후 성장 붐이 절정에 달했을 때, 부자나라들의 실질 이자율은 하나같이 매우 낮았으며 심지어는 (-)은 경우도 있었다. 오늘날 부자나라들이 높은 투자와 급속한 성장을 이뤄냈던 자본주의의 황금기(1950~1973) 후반에 해당하는 1960년에서 1973년 사이에 이들 나라의 평균 실질 이자율은 독을 2.6%, 프랑스 1.8%, 미국 1.5%, 스웨덴 1.4%, 스위스 -1.0%에 불과했다.

통화정책을 엄격하게 유지하는 비용을 고려한다면, 중앙은행에 물가 상승률 통제라는 유일한 목적을 부과하고 독립성을 부여하는 것은 개발도상국들이 결코 해서는 안될 일이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개발도상국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통화주의자들의 거시경제 정책을 제도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도국의 경우 중앙은행의 독립성 강화가 고성장과 저실업 같은 다른 바람직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은 물론, 물가 상승률도 낮추지 못한다는 것을 고려할 때 더욱더 그렇다.

- 나쁜 사마리아인들 2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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