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에서 행해진 매춘과 매춘부들의 실상, 이에 대한 교회와 세속 권력의 개입과 규제의 양상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하였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이해를 돕기 위하여 역사적인 관점에서의 매춘의 의의와 성격을 규명하고, 중세 이전과 이후 시기인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와 르네상스 이후 시대의 매춘과 창녀의 양상을 간단히 살펴본다.
1. 매춘 - 결혼제도와 이중규범의 산물
매춘하면 떠오르는 부정적인 관념들은, 역사적으로 일부일처제 즉 결혼제도가 정착한 이후부터 생겨난 것이다. 일부일처제 하에서는 부부 관계란 당사자들의 주관적 애정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인습에 의한 객관적인 의무이다. 또한 일부일처제 하에서는 여성의 성이 상품화되기 때문에 결혼 당사자(혹은 여성만)의 순결이 중요시되고, 이러한 순결을 해칠 수 있는 모든 관계, 즉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은 모든 혼외 관계를 죄악시되었다. 이러한 혼외 관계에는 혼전 성교, 간통, 강간 등과 함께, 매춘 역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혼외 관계와 순결에 대한 관점은 대단히 이중적이었다. 즉, 남성은 결혼 전, 혹은 후에도 배우자로부터 찾을 수 없는 애정과 욕망을 다른 이로부터 찾고 그것을 향유하는 것이 광범위하게 허용되었다. 반면 여성은 사실상 순결을 지켜 상품성을 유지하는 대가로 아버지 혹은 남편 등의 남성들로부터 보호를 받는 입장이었고,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순결을 잃었을 경우 대개 남성들로부터 버림받게 되었다. 여성은 자립활동이 거의 불가능하므로 이로 인해 생계 수단을 잃은 여성들은 결국 도시로 흘러들어가 창녀가 되는 수밖에 없었고, 남성들 역시 일부일처제 하에서 쓸데없는 마찰을 피하기 위해 유곽을 드나드는 쪽을 택했다. 매춘은 결혼제도와 순결에 대한 이중규범이 낳은 산물인 것이다.
화폐경제와 도시의 발전에 힘입은 '도시귀족'들은 종종 이와 같은 매춘파티를 즐겼다.
2. 매춘의 도시적이고 계급적인 성격
매춘은 도시적 성격을 띤다. 농촌은 인구가 적고 사람들이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에, 매춘이 행해지기는 힘들었다. 반면 도시는 인구가 많고 익명성이 보장되므로 순결을 잃거나 미혼모가 된 가난한 여성들에게 좋은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또한 도시는 대학생, 도제, 직인 등의 미혼 남성들뿐만 아니라, 상인, 순례자, 군인 등 창녀들의 주 고객들이 많다.
또한 매춘을 둘러싼 갈등은 그것이 계급적인 성격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도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대학생, 도제, 직인 등은 수련을 마칠 때까지는 결혼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서기, 하인, 날품팔이 등의 하류 계층에 속하는 이들은 결혼 비용을 모을 때까지 결혼을 미루어야 했다. 반면 도시에 거주하는 이들 중 결혼하여 아내를 둘 수 있는 이들은 관리, 대상인, 주인장인 등 소수에 불과하였다. 이처럼 부와 권력뿐만 아니라 성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마저 독점한 이들에 대한 계급적인 반감은 종종 이들의 아내와 딸, 하녀 등을 집단 강간하는 범죄로 표출되었다. 따라서 위정자들은 미혼 남성들이 성욕을 배출할 수 있는 손쉽고도 안전한 해결책을 찾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고급 매춘부를 헤타이라 라고 한다
3. 고대 그리스-로마의 매춘과 창녀
다른 시기와 마찬가지로 로마 시대에도 매춘은 떳떳하지 못한 직업으로, 창녀는 하류 계층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여성의 순결은 가문의 소중한 재산으로서 아버지나 남편 등의 남성 친족들에 의해 보호받았고, 여성들은 철저하게 딸, 아내, 그리고 어머니의 지위에 만족할 것이 강요되었다. 반면 남성들은 결혼 여부와는 관계없이 마음껏 쾌락을 누리는 것이 허용되었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매춘은 적어도 종교적인 죄악으로 간주되지는 않았고, 도시의 성장 역시 두드러졌기에, 어느 도시에서나 창녀들과 이들을 찾는 남성 고객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특히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성들이 권력자의 정부가 되어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을 포함한 창녀들의 일상사는 수많은 문학 작품들의 좋은 소재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기독교 등장 이전의 이러한 자유로워 보이는 분위기의 이면에서는, 육체관계를 죄악시하는 철학 혹은 종교적인 전통이 이미 싹트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오르페우스 교, 플라톤 학파, 피타고라스 학파 등은 모두 육체는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라고 인식하였고, 영혼의 해방과 참된 행복을 위한 육체의 순결과 절제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로마 시대의 스토아 학파, 신 플라톤 학파, 신 피타고라스 학파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유대교적 전통과 결합하면서, 매춘뿐만 아니라 성과 관련된 모든 문제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교리를 확정지었던 것이다.
폼페이 매음굴
4. 매춘과 창녀에 대한 기독교의 관점과 대처 방식
그리스 철학의 전통을 따른 초기 기독교의 사도와 교부들은 순결의 중요성과 욕정에 빠지는 위험성을 사람들에게 널리 설파했다. 성 바울은 남녀 관계에 있어서 순결을 최상의 지위에 두고 결혼은 단지 욕정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한 차선책 정도로 간주하였고, 묵시록의 저자인 요한 역시 예수에게 선택되는 14만 4천 명의 동정남의 무리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성 아타나시우스, 테르툴리아누스와 같은 초기 기독교의 대표적인 교부들 역시 순결을 찬양하고 그것을 지킬 것을 강조하는 일에 열심이었으니, 조만간 기독교 사회 내에서 매춘은 설 자리를 잃어버릴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나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매춘과 창녀를 바라보는 기독교의 시선은 그렇게 단선적이고 일방적이지는 않았다. 그것은 유럽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던 순결에 대한 이중규범으로부터 기독교 역시 결코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이러한 측면은 중세 기독교의 성 관념을 사실상 규정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는 아이를 만들기 위한 부부간의 성교를 제외한 모든 성행위는 그 자체로 죄악이라고 단정하였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남성들의 성욕은 끝이 없고 여성은 남성을 끊임없이 유혹하기에, 만약 적절한 배출구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세상은 온통 동성애, 수간, 간통, 강간 등의 더 큰 악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었다. 따라서 창녀는 그녀의 직업을 버리지 않는 한 교회로부터 추방되어야 마땅하지만, 매춘 그 자체는 사회의 성적 안정을 위한 필요악으로 간주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매춘부를 '불완전한 세계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사회의 필요악' 이라고 규정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이중적인 관념은 이후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대에까지 이어지게 되고, ‘매춘은 오물을 배출하기 위한 궁정의 하수구’와 같다는 식의 관점으로 인하여 매춘과 창녀에 대한 교회의 대처 방식 역시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한편으로 교회는 매춘을 죄악으로 규정하고 창녀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고자 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창녀 출신의 여러 성녀들을 본받아 참회하고 회개할 것을 창녀들에게 촉구하였다. 그리하여 회개한 창녀들을 위한 수녀원이 각지에 세워졌고, 창녀와 결혼하여 그녀를 구제한 이는 죄가 경감될 것이라는 점을 널리 선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또한 교회는 도시 내의 일정 구역으로 유곽을 제한하고 창녀들에게 특정한 복장을 강요하여 정숙한 여성과 창녀를 구분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자칫 불의의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도 했다.
5. 매춘 문제에 대한 세속 권력의 개입 - 추방에서 공창 제도로
로마 제국의 멸망을 전후하여 유럽 각지로 이주한 게르만 민족들이 세운 국가에서는, 매춘 문제에 대한 개입이 그다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물론 게르만 사회에서는 여성의 순결이 가문의 재산으로 여겨졌기에 이를 훼손하는 자는 엄벌에 처해졌고,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창녀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존재였기에 또한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중세 초기의 게르만 사회는 본질적으로 농업 사회였기에 유곽과 매춘 행위 등이 중요한 사회 문제로서 대두되지는 않았고, 남성들 역시 광범위하게 인정된 일부다처제 하에서 여러 명의 부인과 첩을 거느리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샤를마뉴와 그의 아들 루이 1세 등의 몇몇 국왕들이 매춘을 근절하고자 시도하기도 하였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고, 이 문제는 주로 교회법학자들의 소관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양상은 11~12세기부터 점차 변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농업 생산성이 높아지고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도시가 부활하였고, 이것은 도시 내의 매춘 문제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국왕의 권력이 강해지기 시작하면서 점차 교회와 세속 문제 모두에 개입을 시도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국왕과 시 당국은 정치·경제·사회적인 이유에서, 혹은 종교적인 열정에서 매춘과 창녀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세속 권력의 개입 양상은 시대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났다.
①추방
가장 손쉬운 방법은 창녀와 포주, 뚜쟁이 등 매춘에 종사하는 이들을 나라와 도시 밖으로 추방하는 것이었다. 잉글랜드의 헨리 2세와 에드워드 1세, 프랑스의 루이 9세,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 카스티야의 알폰소 9세 등의 국왕들이 12~13세기에 걸쳐 창녀를 추방하라는 명령을 반복하여 내렸고, 많은 도시의 시장들 역시 독자적으로 유곽 폐쇄와 창녀 추방에 나섰다. 하지만 이러한 단순한 추방령으로는 매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고, 오히려 도시의 성문과 성벽 주위에 유곽이 난립하는 역효과까지 낳았던 것이다.
②홍등가 설정
그리하여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중반에 걸쳐, 단순히 창녀를 도시 밖으로 몰아내기보다는 도심 혹은 교외의 특정 구역을 홍등가로 설정하여, 창녀들이 그 곳에서만 영업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창녀들은 홍등가 안으로 사실상 격리되고 외출할 때에는 특정한 복장을 하도록 강요받는 등, 마치 나병환자나 전염병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다.
③시영 공창의 설치
이제 마지막 단계는 홍등가의 유곽을 시 당국이 인수하여 직접 공창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당초 매춘을 근절하고자 했던 세속 권력이 이 시기에 와서 오히려 앞장서서 공창을 설치하였고, 또한 이러한 공창 설치가 1350~1450년대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어 왔다. 그 중 이 시기에 흑사병이 창궐하여 인구가 급감하였기에, 인구 증가를 위하여 남성들이 동성애에 빠지지 않고 이성과의 성교의 쾌락에 눈뜰 수 있도록 세속 권력이 앞장서서 매춘을 권장하였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하지만 그 외에도 시 당국뿐만 아니라 도시의 교회와 세속의 유력자들도 매춘 통제를 명분으로 하여 재정 수입을 올리기 위해 공창 운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Lais Corinthiaca의 초상화(Kurtisane), gemalt von Hans Holbein, 1526,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고급 배춘부 lais를 모티브 삼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창 운영의 1차적인 목적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당시 공창에 소속된 창녀들을 관할하는 ‘창녀들의 왕’, 즉 풍기 단속관의 서약 내용과, 시 당국에 대한 유곽의 포주들의 서약 내용을 비교해 보면 그 목적을 짐작해 볼 수 있게 된다. 즉, 풍기 단속관은 창녀들을 특정한 구역에서만 살게 하고 이를 감시하며, 성병에 걸린 창녀들을 즉각 도시에서 추방하고, 유곽에서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범법 행위를 단속하는 것을 주 임무로 하였다. 또한 포주들은 시에서 요구하는 일정한 수 이상의 건강한 창녀들을 항상 준비해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공창 제도를 도입한 목적은 창녀들에 대한 격리와 규제를 강화하고, 도시 내에 거주하는 미혼 남성들의 성욕을 해소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면서, 동시에 유곽에서 흔히 발생하는 범법 행위를 단속하는 것에 있었다고 하겠다.
또한 공창 제도를 도입한 배경에는, 창녀들을 세속 권력의 직접 관할 하에 두어 사회도덕과 공공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증거로 시 당국은 창녀들을 공창에 소속시키고 매춘을 행하도록 허가한 반면, 공창에 소속되지 않은 채 사적으로 매춘을 행하는 창녀들을 철저히 적벌하여 엄벌에 처하였다. 공창의 설치 지역과 영업 일시에도 제한을 두었으며, 또한 시 당국은 가능한 한 외지 출신의 여성들을 공창의 창녀로 충원하여 그 지역 여성들의 순결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말하자면 시 당국이 앞장서서 공창을 설치한 것은 그 시대의 도덕성이 해이해진 것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춘을 일정한 수준에서 제한하고 유곽에서의 범법 행위를 단속함으로써 사회도덕과 공공질서를 엄격히 하고자 했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6. 매춘과 창녀에 대한 규제의 양상
①매춘의 장소와 일시의 제한
국왕과 시 당국은 왕국, 혹은 도시의 안팎에서 유곽이 무분별하게 퍼져 나가지 못하도록, 종종 왕국과 도시로부터 창녀들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반복하여 내렸다. 이후 홍등가가 설정되고 이것이 공창 제도로 굳어진 뒤에도, 인가된 유곽은 도시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구역에 한하여 설치되었고, 창녀들이 이 곳을 벗어나 사적으로 매춘을 행할 경우 엄벌로 다스려졌다. 창녀들은 유곽에서 영업만 할 수 있었고 그 곳에 거주할 수는 없었다. 또한 영업 일시에도 제한이 가해졌는데, 기독교 축일과 주일, 성 금요일 등에는 영업이 금지되었고, 영업 시간 역시 지역에 따라 일출에서 일몰까지, 혹은 밤 11시까지 등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며, 종종 매춘을 제한하려는 목적에서 야간에 통금이 실시되기도 하였다.
②창녀의 복장 규정
창녀들을 일반인들로부터 구분지어 규제하기 위해 가장 흔하게 쓰인 수단이, 바로 창녀들에게 특정한 복장을 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유대인의 원형 배지와 나병환자의 딸랑이에 해당하는 이러한 복장은 지역마다 차이가 있어서, 다양한 색깔의 매듭 끈, 스카프, 망토, 모자, 두건 등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복장 규정은 한편으로는 창녀들에게 수치심을 자극하여 매춘을 그만 두도록 촉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숙한 여성과 창녀를 구별할 수 있도록 하여 정숙한 여성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외에도 시 당국은 창녀들이 상류 여성들의 특권이라 할 수 있는 고급 옷감이나 비싼 장신구 등을 착용하는 것을 금지하기도 하였고, 반대로 경망스럽고 외설적이라고 여겨지는 옷을 창녀들만의 복장으로 규정하여 일반 여성들이 감히 그런 옷을 입을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는 등 풍기 단속의 목적에 창녀들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③창녀의 법적 지위 제한
중세 교회는 교회법상에서의 창녀의 지위를 제한하는 것으로 매춘을 근절하고자 시도하기도 하였다. 창녀의 사회적 지위는 거의 인정받지 못하였고, 사실상 교회는 창녀의 시민권을 박탈하려고까지 하였다. 창녀는 법정에 출두하여 타인을 고발하거나 혹은 자기 자신을 변호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또한 재산의 상속권도 인정받지 못하였고, 강간의 피해자 요건도 성립시키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비록 매춘으로 얻은 수입은 본인이 소유할 수 있었고 그에 대한 법적 권리도 인정받았지만, 손님에게 대가를 지불하도록 강요할 수단을 가지지는 못하였다.
도시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매춘없소, 따지고보면 여관과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7. 규제의 유명무실화와 매춘의 확산
이처럼 교회와 세속 권력은 다양한 규제를 통하여 도시 내의 미혼 남성들의 성욕을 해소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준에서 매춘 행위를 제한하고, 또한 창녀들의 죄의식과 수치심을 끊임없이 자극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하고도 복잡한 규제가 실제로 철저하게 시행되고 준수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유곽은 그 규모가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지는 않았고, 창녀들 역시 지정된 구역 밖에서도 매춘을 일삼는 것이 다반사였다. 창녀들에 대한 복장 규정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오히려 창녀들만 입도록 하였던 경망스럽고 외설적인 복장이 일반 여성들에게 널리 유행하게 되는 역효과까지 낳았다. 창녀의 법적 지위 역시 향상되어서, 창녀들 역시 세속 법의 적용 대상으로서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중세의 국가와 도시의 행정 능력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과 함께, 흑사병 창궐 이후 엄격한 도덕주의와 더불어 삶과 쾌락을 찬양하는 새로운 풍조가 유행하였다는 사실을 반영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 바로 15세기의 르네상스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대외 무역과 신항로 개척 등으로 도시의 부가 크게 증가하였고, 육로와 해로를 통해 도시를 찾아드는 상인, 순례자, 군인들의 수 역시 급증하였다. 이와 함께 농민층의 경제적 분화로 인하여 토지를 잃은 수많은 빈농들이 발생하였고, 이러한 가난한 농촌 여성들은 줄지어 도시로 몰려들어 매춘에 종사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부활한 고대 그리스-로마적인 전통에 의해 로맨스, 즉 연애 감정이 다시금 예술 작품의 주된 소재가 되면서,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고급 창부를 동경하는 관념이 재등장하게 되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창녀들의 고달픈 현실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지만, 매춘은 그 황금기를 맞아 도시의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교회와 세속 권력 역시 매춘을 근절하기보다는 그것을 필요악으로 인정하고 이용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중세의 매독환자
8. 매춘의 쇠퇴 - 종교 개혁과 매독
하지만 이처럼 승승장구하고 있던 매춘은 16세기에 들어서면서 거센 도전을 받게 되고, 차차 예전의 영광을 잃어갔다. 이러한 도전은 한편으로는 도덕적인 측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보다 실질적인 측면에서 왔다. 비록 매춘이 사회 안정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존재라는 점이 인식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매춘은 떳떳하지 못한 직업이요 창녀는 돈만 밝히는 나태하고 부정한 여성이라는 관념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러한 비판적인 관념은 흑사병이 창궐한 이후 중세 사람들의 종교적 감수성이 높아지면서 등장한 엄격한 도덕주의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주의의 결정판이자 논리적 귀결이 바로 종교 개혁이었다. 루터, 칼뱅 등의 종교 개혁가들은 부부간의 적극적인 성생활은 인정한 반면 혼전 성교, 간통, 매춘 등의 일체의 혼외 관계를 죄악시하였고, 시 당국으로 하여금 도시 내의 유곽을 폐쇄할 것을 설파하고 나섰다. 그리고 신교의 이러한 주장은 반동 종교 개혁을 거친 구교에 의해 더욱 엄격한 형태로 받아들여졌고, 이로 인해 매춘과 창녀에 대한 교회와 세속 권력의 암묵적인 동의는 깨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보다 실질적인 측면을 살펴보자면, 16세기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가는 시기는 유럽 경제의 암흑기에 해당되었다.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등 르네상스를 주도하였던 국가들이 대부분 경제적 혼란에 빠지고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하락하면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쾌락보다는 금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신대륙 발견을 전후한 15세기 말에 처음 발병하여 16세기 내내 전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던 매독이 성교에 의해 전염된다는 사실이 어렴풋이 인식되면서, 창녀는 곧 전염병이요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라는 관념이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았다. 이 때부터 유곽은 대대적으로 폐쇄되었고, 창녀들은 격리 수용되거나 추방당했으며, 창녀들에 대한 처벌 규정 역시 매우 강화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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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매춘은 일부일처제가 일반화된 사회에서, 경제력을 쥔 남성들이 마음껏 쾌락을 누릴 수 있는 손쉬운 수단으로서 등장한 것이었다. 비록 기독교가 순결을 중시하고 매춘 등의 모든 혼외관계를 죄악시하였다 하더라도, 매춘은 남성들의 성욕 해소를 통한 사회의 안정에 꼭 필요하다는 이중규범에서 끝내 자유롭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창녀들은 꼭 필요하면서도 동시에 천한 존재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고, 교회와 세속 권력은 모두 다양한 규제와 차별을 통하여 매춘을 일정한 수준으로 억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매춘은 날로 번성하기만 하였고, 결국 종교 개혁이 이루어지고 매독의 위험성이 널리 알려진 16세기에 와서야 매춘은 대대적인 탄압을 받아 보다 은밀한 곳에 숨어서 그 명맥을 이어갈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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