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사람들의 입에서는 대뜸 '몽상가'란 말이 나왔다"로 시작하는 '서장'에서는 앨리스가 관계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혀 있는, 그래서 일상의 어디선가 자신의 '반쪽'을 만날 것이라는 기대를 잃지 않는 사람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영어에서는 이런 사람을 "hopelessly romantic"이라는 말로도 표현한다. 저자는 바로 이런 낭만적인 앨리스의 연애과 관련한 움직임, 행동 등을 "romantic movement"라는 말로 유머러스하게 담아낸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에릭이나 필립이 아니라 단연 여성 앨리스다.
이것은 전작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가 주인공(남자) '나'의 독백식으로 서술되는 것과 대비된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가 좀더 철학적으로 치우친 것이 남자 '나'의 서술 때문이라면, 이 작품은 여자 앨리스 때문인지 무거운 철학보다는 다양한 인문학의 측면이 좀더 가볍고 실용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 소설의 부제가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인 점 역시 앨리스와 연결되어 있다. 앨리스는 '실재의 본질'을 남자의 사랑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보바리 부인과 닮았다.
앨리스는 실재에 대한 보바리 부인의 판단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그녀 역시 인간의 가능성은 두 사람의 친밀함에서 절정을 이룬다고 믿었다. 그녀는 문명의 승리[계란 삶는 기계, 마천루, 자가 임신 진단 시약]를 초월해서, 오직 사랑할 때에만 자신이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선언할 수도 있었다.
섹스와 쇼핑을 소재로 삼은 최초의 소설로 알려진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1856)에서 보바리 부인은 간통(섹스)과 과소비(쇼핑)에 의해 몰락하는데, 그 중심에는 사실 '채워지지 않는 것에 대한 갈망'이 자리잡고 있다. 이 갈망을 채울 수 있는 본질이 '남자의 사랑'일 수 있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상대 이성이 갈망을 완전히 채울 수 있는 경우란 없다. 사랑에 대한 갈망이 결핍에 대한 불안과 상통하고, 그 불안에 대한 대체물로 섹스와 쇼핑은 유용하다. 어디선가 자신의 반쪽이 나타나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것이라는 갈망에 사로잡힌 '낭만적인' 앨리스가 섹스, 쇼핑, [패션]잡지에 몰두하는 것은, 그래서 보바리 부인과 겹친다. 쇼핑과 잡지읽기는 없던 욕망도 만들어내는 대표적 행위다.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대체물 획득으로서의 쇼핑과 잡지는 '충족'의 끝을 알지 못한다. 자신에 대한 확고한 정체성이 결핍된 이들이 쇼핑에 쉽게 빠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보바리 부인과 같은, 앨리스의 근본 문제였다.
앨리스가 이런 글[패션잡지]을 좋아하는 것은 그녀의 심리구조에 우연히 나타난 일면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체성에 대한 깊은 의문이 반영된 일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확신하지 못했고, 자연히 외부에서 실마리를 찾으려 했다. 카디건을 사려고 한 것은 혼란스러운 자신을 기왕에 존재하는 스타일에 맞추려 한 시도였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제공하는 상에 자기 자신을 맞추려 했다. 그것은 고상하고 돈이 많이 드는 흉내내기였고, 잠재적으로 무한한 특성을 몇 가지 핵심 사조로 축소하는 일이었다. 그러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형태에 안주할 수 있었으니까.
쇼핑 뿐 아니라 사랑(섹스) 역시 앨리스에게는 같은 결핍의 발로였다. "앨리스는 자신의 모자란 점을 채우고자 사랑했고, 그녀가 갈망했지만 부족했던 자질을 상대에게서 추구했다." 8세때부터 24세(현재)까지의 앨리스의 '빈자리'와 '남자를 통한 해결책'을 정리한 '발전하는 연애 퍼즐'이라는 표는 그런 앨리스의 결핍/충족의 역사를 재밌게 보여준다. 가령 '13-16세'때 앨리스의 '섹스와 키스에 대해 배우고 싶은 욕망. 실제로 키스나 섹스를 하는 것은 두려워함'이라는 빈자리 항목에 대한 남자를 통한 해결책은 '여드름 투성이 십대 소년들을 줄줄이 만남. 그들은 은밀히 앨리스를 더듬다가, 열정적이지만 철자법이 틀린 연애편지를 보냈다.' 20-23세 때 '지적으로 뛰어난 아버지 같은 남자를 찾'으려는 앨리스의 남자를 통한 해결책은 '수염을 기른 생물학 교수.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 강의하고, 오르가즘의 와중에 화석 이름을 읊어댔다'로 정리된다. 현재(24세) 앨리스의 결핍은 '고달픈 런던 생활에서 불안정함을 에움해줄, 자신감 넘치고 잘 나가는 미남 애인'이었고 그 해결책은 '에릭'이었다. 그 에릭과의 뜨거운 사랑과 몇번의 갈등을 통해 그 결핍에서 벗어난, 혹은 성장한, 앨리스가 "에릭이 줄 수 있는 것이 더는 매력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25세가 된 그녀에게는 이제 다른 빈 곳이 생겼고, 따라서 다른 남자가 필요하다.
이렇게 설명하는 방식이 앨리스를 정신병자로 보거나 천박하게 보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결핍과 충족의 사이클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소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앨리스가 이 모든 결핍과 충족의 사이클을 온 몸을 다해 살아낸다면, 에릭은 그렇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관계'가 중요하고 '사랑'이 삶의 본질인 앨리스/보바리가 이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반면, 에릭에게는 '관계', '돈', '성공', '경쟁' 등등이 모두 다 중요하다. 즉 에릭은 자신의 결핍을 충족할 다양한 통로를 가지고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 훨씬 성숙한 것처럼 보이지만, 적어도 관계의 측면에서 볼 때는 앨리스에 비해 훨씬 소극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그래서 사랑의 끝에 이르러서도 결정적으로 얻는 게 별로 없다. 에릭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청년이면서도 어떨 때보면 다 큰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데 반해, 쇼핑이나 좋아하고 에릭 때문에 속썩이며 우는 앨리스는 아직 미성숙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런 적극적 관계맺기를 통해 엄청난 내적 성장을 해낸다. 관계중심적 인간형(대부분, 여성)의 승리였다.
정치, 사회, 경제 모든 영역에서 큰 소리치며 군림하는 '남자-어른'들이 가끔씩, 아니 자주 멍청하고 단순한 어린이처럼 보이는 것을 상기하라. 다시 말하면, 작가 보통은 앨리스의 '낭만주의 운동'(the romantic movement)의 결핍-충족 사이클을 비판하는 듯 하면서 결국은 관계와 관계를 통한 성장에 있어서는 그녀가 남자보다 한결 낫다고 말하고 있다. 섹스와 쇼핑에 탐닉하는 주인공 보바리는 오해와 사회적 비난에 직면하지만, 오늘날 섹스와 쇼핑에 적극적인 여자들(앨리스)은 가장 성공한 여자들이고, 자신의 결핍을 직시하면서 끊임없이 그 빈자리를 채우려는 여자들이 된다. 보바리 부인은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하지만, 앨리스는 새로운 애인 필립과의 키스로 다른 연애를 시작한다. 같은 결핍-충족 사이클을 돌았던 보바리 부인이 죽음을 맞았던 데 비해, 앨리스는 삶을 맞는다. 이렇게 보바리/앨리스는 시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간다. 이 소설을 '『보바리 부인』 다시 쓰기'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이 지점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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