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31일 금요일

좌파는 모르고, 우파는 알았던 것

197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스리마일섬 원전에서 사고가 났다. 핵연료봉이 녹아 내리고 방사성 물질이 유출돼 주민 10만 명이 대피해야 했다. 86년 구(舊) 소련에서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사고 전까지 스리마일은 최악의 원전사고였다. 원자력의 안전 신화가 무너졌다. 그런데 그런 재앙이 일어난 지 불과 며칠 뒤에 더 많은 원전을 지어달라고 요구한다면 제 정신일까.

 이 책 (원제 Pity the Billionaire·억만장자를 동정하라)에서 토머스 프랭크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바로 그와 같은 일이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미국 저명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그의 문제의식이다. 세계경제를 침체로 몰아넣은 금융위기는 자유시장이라는 이상을 우리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으며, 이에 대처하는 공화당의 무능력과 도덕적 가식을 폭로했음에도 2009년 초부터 붐을 타기 시작한 미국의 보수주의 운동은 상황을 역전시켰다.

 2010년 공화당은 미국 의회 선거 역사상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고, 정부로부터 규제받지 않는 자유시장이 곧 자유의 본질이라는 주장이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저자가 보기엔 이것이 1929년의 경제공황과 현 경제위기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나는 지금의 경기불황 이전까지, 불경기의 희생양이 된 대다수가 신고전주의적 경제학에 박수를 치거나 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업적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난 적대감을 드러내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1929년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진 대공황기에는 사정이 달랐다. 이 ‘어려운 시절’에 먼저 사고의 전환이 일어났다. 자유방임주의 대신에 정부의 적자지출이라는 케인스 경제학이 받아들여졌다. 현대 산업자본주의의 탐욕적 개인주의에 반대해 공동체와 나눔의 삶을 모색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에 대한 반대 여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36년 미국자유연맹의장은 라디오연설에서 “뉴딜은 미국에 전체주의 정부를 만들려는 시도”라고 공박했다. 하지만 대중은 이들 보수주의자들을 조롱하면서 루스벨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당시 민주당은 하원의 4분의 3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것이 프랭크가 소환하는 1930년대식 포퓰리즘의 기억이다.

 뉴욕 증권시장의 대폭락이 있은 지 79년 만에 들이닥친 2008년의 금융위기는 얼핏 1929년의 ‘시즌2’처럼 보였다. 제너럴 모터스·크라이슬러가 파산을 선언했고, 리먼브라더스·인디맥·베어스턴스 등이 사라졌다. 기업만이 아니다. 퇴직금은 날아갔으며 동료들은 직장에서 쫓겨났고 제조업 공장은 작동을 멈췄다. 대출담보금은 집값을 훨씬 웃돌았고 중산층은 폭삭 내려앉았다. 재앙이 닥치기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골드만삭스는 직원들에게 165억 달러가량을 보너스로 나눠주며 사치와 방종을 부추겼다.

 신자유주의 혹은 ‘자유방임주의의 황금시대’에 정부의 규제완화를 틈타 현란한 파생금융상품을 만들어낸 트레이더들은 승승장구했고 전용기를 쇼핑하러 다녔다. 대신에 시간당 급여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삶은 점점 더 팍팍해졌다. 그러다가 터진 금융위기였기에 경제부실과 실패의 책임을 물었어야 했다. 그것이 ‘금융질서’이자 최소한의 경제정의였을 것이다.

 하지만 금융시장이 공황상태에 빠지기 시작하자 긴급 구제금융이 이뤄졌고 ‘금융산업계의 망나니들’은 살아남았다. “정부는 월가 지배자들의 손아귀에 있다”는 게 구제금융이 던진 메시지였다.

 대중들은 분노했으나 시간이 흐르자 월가의 탐욕과 도덕적 해이는 잊혀졌다. 대중이 분노가 향한 곳은 월가에서 워싱턴으로 바뀌었고, 자유시장이 아니라 정부와 세금이 도마에 올랐다. 정부의 적자지출과 구제금융에 대한 분노는 “실패한 자들은 실패하도록 내버려 두라”는 구호로 모아졌다.

 그리고 놀라운 바꿔치기가 일어났다. 분노의 표적이 긴급구제를 받은 은행들에서 ‘헤픈 이웃’들로, 곧 담보대출을 받고는 결국 길거리에 나앉아버린 방종한 사람들로 바뀐 것이다.

 이렇듯 분노의 방향을 돌리는 데 일조한 인물이 폭스뉴스의 진행자였던 글렌 벡이다. 그는 경기침체와 불황이 자유주의자들의 기회주의적 음모라는 시나리오를 전파했다. 오바마 정부의 의료보험 개혁안에 대해서도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그것은 미국을 끝장내는 것입니다”라며 종말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부추겼다.

 또 이러한 종말과 ‘사회주의자 오바마’로부터 미국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자유시장이라는 신이라고 반복적으로 주장했다. 자유시장이야말로 지고의 가치이고 민주주의보다 더 민주적이라는 소위 ‘시장 포퓰리즘’은 한낱 CEO들의 믿음이었지만 이제는 수백 만의 믿음이 됐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믿음을 기치로 내건 티파티 운동이 ‘좌파 따라하기’의 모양새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퇴직 국제정치학 교수인 안젤로 코데빌라는 미국사회에 ‘지배계급’과 ‘국민계급’, 두 계급이 존재한다고 여긴다.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마르크스주의 사관의 뒤집힌 재림이라고 할까.

 지은이는 민주당의 실패가 이러한 ‘부흥 우파’의 득세를 가능하게 했다고 본다. 2008년 위기와 재난에 대해서 그들은 납득할 만한 설명을 분노한 국민에게 해주지 않았다. 그 틈새를 파고든 것이 우파 이상주의자와 기회주의자였다.

 2008년 금융위기를 분석하고 현 경제위기에 대한 진단과 전망을 제시한 책은 그간에 무수히 출간됐다. 이 책도 그런 범주에 포함될 수 있지만 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증세에 반대하는지를 분석한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에 이어 ‘대중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우파는 그것을 읽었고, 진보를 자처하는 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을 읽지 못했다.

 그 결과 실패한 우파가 승자가 된 나라가 미국만은 아닐 것이기에 저자의 분석을 한국적 상황에 그대로 대입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지만, 이 책의 용도는 그 이상이다. 좌파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가장 선한 자들은 모든 신념을 잃고, 반면 가장 악한 자들은 격정에 차 있다’라는 영국 시인 예이츠의 시구를 빌려 우파 포퓰리즘의 득세를 설명한 적이 있다.

 탈정치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적 무기력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 격정에 찬 우파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파야말로 오늘날 유일한 ‘정치세력’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그런 연유를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뭔가 달라지기 위해선 무엇보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일독의 가치가 충분하다.


- 중앙일보 이현우

강운함(强運艦) 유키카제(雪風)


유기카제


"구레의 유키카제와 사세보의 시구레는 반드시 살아 돌아온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 해군들 사이에서 떠돌던 소문이다. 아니,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다. 비록 사세보를 모항으로 했던 시구레 호는 1945년 말레이 반도 근처에서 잠수함의 어뢰공격으로 격침 되었지만 유키카제는 끝까지 살아남는다. 종전 후에도 오랜기간 생명력을 이어나간다. 유키카제는 어떤 존재였을까? 2,000톤급의 작은 구축함이 시대를 뛰어넘어 회자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1. 1940년 1월 21일 사세보(佐世保) 해군공창에서 카게로급 구축함의 제8번함으로 탄생

2. 1942년 2월 27일 수라바야 해전에서 다른 구축함들과 공동으로 미 순양함 2척, 구축함 1척 격침. 이후 자바 해협에서 연합군 잠수함 소탕작전 시 잠수함 1척 격침

3. 1942년 6월 4일 태평양 전쟁의 판세를 뒤집은 미드웨이 해전에 참전. 일본의 주력항모와 함대가 궤멸적인 타격을 입음. 유키카제는 무사 귀환

4. 1942년 8월 24일 동부솔로몬 해전에서 항공모함 쇼카쿠와 즈이카쿠 호위. 이미 전세는 기울고 있었다.

5. 1942년 10월 25일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항공모함 즈이카쿠 호위

6. 1942년 11월 과달카날 해전! 본격적인 함포전에서도 살아남고, 다른 함들과 공동으로 중순양함 2척 구축함 4척 격침(이때 어뢰 발사를 위해 미군 함포 사거리 안으로 들어갔음에도 살아남았음)

7. 1943년 2월 과달카날 철수작전에 참가 3번의 철수작전에 모두 투입. 생존확률이 지극히 낮았던 과달카날 철수작전에 3번 모두 투입되어 무사히 살아남음.

8. 1943년 3월 2일 비스마르크 해전, 미국, 호주 공군의 공습으로 구축함 4척, 수송선 8척이 격침되는 상황에서도 표류하던 일본군 1개 대대병력을 구출한 다음 퇴각

9. 1943년 7월 13일 콜롬방가로 해전. 기함 진쓰의 호위 임무를 맡았는데, 미군 함대의 공격으로 진쓰 격침.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대 지휘권을 인수 받아 반격. 미군 함대를 퇴각시킴

10. 1944년 6월 19일 필리핀(마리아나 해전)…이때는 정말 ‘운빨’의 최고봉. 필리핀 해전 때문에 추진기가 고장남. 원래 임무였던 항공모함 호위 대신 유조선단 호위로 임무가 바뀌게 됐고, 8척의 유조선을 호위해 도쿄로 돌아가게 된다(가다가 잠수함에 의해 1척이 격침됐지만, 이 정도면 선방 중에 선방). 그러나 애초에 같이 있었던 함대들은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에 의해 괴멸.

11. 1944년 10월 23일 레이테만 해전. 이때 세계 최대 전함인 야마토급의 2번함 무사시를 호위. 미 제3함대의 대규모 공습에 무사시 격침. 옆에 있던 유키카제 살아남아서 전함 나가토를 호위해 구레항으로 퇴각. 함대는 거의 전멸

12. 1944년 11월 29일 야마토 급의 3번함으로 건조된 항모 시나노 호위. 항공모함 부족으로 고민하던 일본해군이 전함을 급히 항공모함으로 설계 변경해 만들어진 항공모함으로 당시 7만 2천 톤의 배수량을 자랑했다. 그러나 미 해군의 잠수함 아처피쉬의 어뢰 6발을 맞고 격침. 유키카제는 생환

13. 1945년 4월 7일 유명한 오키나와 해전. 이미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미 해군 제58 기동부대 소속의 10척의 항공모함. 9척의 전함, 500대의 미해군 함재기와 항전. 계란으로 바위깨기. 야마토 격침, 호위 구축함 5척 모두 격침. 유키카제는 단독 생환. 당시 미해군 함재기가 발사한 로켓탄에 피격되었으나, 식량창고에 맞았고, 그나마도 불발탄. 사망자 없음(당시 유키카제는 야마토에서 1.5km 거리에 있었다고).

14. 이후 구레항 공습을 피해 동료 함정들과 함께 동해로 대피 하던 중 미군 함재기의 공습을 받음. 이상하게도 유키카제는 한발도 피격되지 않음. 돌아오는 길에 기뢰를 건드리나 기뢰가 불발. 유키카제의 뒤를 따라오던 히스카리가 그 기뢰를 건드리자 폭발.

15. 종전 후까지 유키카제는 생존, 전후에 라바울, 사이공, 방콕, 타이완을 왕복하며 귀환병 15,000명 수송

16. 1947년 7월 6일 일본을 떠나 중국 상하이로. 전쟁배상금 명목으로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로 소유권 이전됨. 함명을 단양(丹陽 : 붉은태양)으로 개명. 국민당 정부의 기함으로 사용. 대만 철수 작전에서 맹활약.

17. 오랜기간이 지난 1966년 태풍에 의해 좌초. 대파됨(함 이름에 바람이 들어갔는데, 바람 때문에 침몰하다니 아이러니). 1970년 고철로 해체. 대만은 닻과 타륜을 일본으로 보냄. 현재 일본 박물관에 전시 중.


유키카제는 태평양 전쟁 내내 12만 8천 마일을 달렸다(지구를 5.15번 돌 수 있는 거리다). 그 동안 260명의 승조원 중 단 2명의 전사자만 기록됐다. 당시 유키카제는 일본 함대 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운함이었다. 이렇게 되자 유키카제의 승조원들은 자신의 가족 이름에 유키(雪)라는 글자를 넣게 된다.

유키카제는 단순히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던 걸까? 그건 아니다. 당시 유키카제의 분위기는 여타 다른 함대의 분위기와는 많이 달랐다. 훈련 하나만은 똑 부러지게 하는 건 기본이었지만, 그 나머지가 문제였다. 이들은 함 내에서 아무렇지 않게 마작을 하고, 상급자와 하급자가 아무 거리낌 없이 반말을 하고, 술판을 벌이는, 말 그대로 당나라 부대라면 바로 그곳이었다. 덕분에 해군 지휘부에 단단히 찍힌 상황이었지만, 그런 자유로운 분위기는 함의 전통(?)으로 이어진다.

엄청난 전과 덕분인지 최신 장비들(레이더, 소나)을 우선적으로 장비하게 해 준다. 결정적으로 유키카제가 다른 함들과 다른 점은 '살겠다는 의지'다. 다른 전함이 옥쇄와 자살돌격을 말할 때 '꼭 살아서 귀환한다.'를 함의 구호로 외칠 정도로 생존에 대한 남다른 집착(?)을 보여준다.

야마토 만큼은 아니지만, 유키카제는 나름 여러 매체에 그 이름을 팔며 끈끈한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드라마성이나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본다면, 덮어놓고 돌격하고 싸우는 야마토 보다는 유키카제의 스토리가 훨씬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그렇기에 아직까지 회자되고, 차용되고, 활용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 ㅍㅍㅅㅅ

혁신에는 혁신이 없다.

모두가 이야기하는 혁신의 순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1916년 8월, 솜므 평원, 지난 2년간, 양군은 머리를 쥐어짜 가면서 상대방 참호 진지를 뚫는 방법을 고민했다. 영국군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신무기를 투입했다. 신무기의 아이디어는 당시로는 제정신으로는 하기 힘든 생각이었다. ‘커다란 군용 트랙터에 강철 장갑을 씌워서 만든 이동식 기관총 진지로 독일군 진지를 공격하자.’ 영국군은 독일 스파이가 이 신무기를 알아챌까 봐, 보안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신무기에 포장을 두르고, 가짜 물품표를 붙여 놓기까지 했던 것이다: 물품표 ‘물탱크(tank)’. 이후 근 100년 간 지상전의 왕자로 자리잡은 전차(tank)의 탄생이다.

언젠가부터 ‘혁신(innovation)’이라는 말은 우리 삶에서 가장 익숙한 단어가 되어버렸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혁신이란 ‘기존의 방식이나 상태를 확연히 다른 것으로 바꾸어 새로이 한 것’으로 정의된다. 우리는 활판 인쇄술부터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삶을 바꿔 놓은 수많은 혁신들을 마주하고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혁신이라는 이름의 성배를 찾아 헤매인다.

‘혁신’이 태어난 순간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지식의 값싼 보급을 가능케 한 명실공히 인류 최고의 발명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아래에서 보다시피 이 책은 별로 혁신적이지가 않다. 오늘날의 책보다는 필경사가 일일이 베껴 화려한 장식을 입힌 중세의 수서본을 더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양피지 대신 종이를 썼다는 것 그리고 직접 베끼지만 않았다는 것을 제외하면 중세의 흔한 수서본과 동일하다. 가격 역시 수서본 만큼이나 비쌌다.

구텐베르크 성서.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성서는 현재 모두 48권이 남아 있으며, 사진의 것은 복제품이다. 비록 양피지 대신 종이를 쓰긴 했지만, 채색사가 장식을 할 수 있도록 여백이 많았으며 문단 첫 글자 역시 매우 화려하게 디자인됐다.

세계최초의 철제 다리를 보자. 철은 나무나 돌보다 더 먼거리를 연결하고 무게도 가벼워 교통에 혁신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 혁신적 철체 다리의 시조는 1781년, 영국 슈롭셔에 세워진 아이언 브리지다. 그런데, 이 아이언 브리지는 그리 혁신적이지가 못하다. 크지도 않은데 380톤이나 나가고, 기존의 목조 다리와 완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만든 탓에 재료 빼면 다른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너무 무거운데다 철의 품질이 조악해 끊임없이 구조안전 논란에 시달렸다.

최초의 철제 다리. 영국 슈롭셔

이런 사례들은 너무 많아서, 오히려 안 그런 케이스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러니까, 혁신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정작 혁신의 순간에 ‘혁신’은 없는 셈이다. 뭔가 이상하다.

흔히 ‘혁신’은 ‘개선’ 혹은 ‘개량’의 반대 개념으로 생각한다. 전자는 기존의 것에서 완전히 단절된 급격한 변화로 생각되는 반면 후자는 기존의 연장선상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작은 변화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둘의 관계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우선 ‘혁신’이 종래에 없던 뛰어난 생각의 산물이라는 생각 자체가 미신이다. 흔히 혁신은 이미 있던 아이디어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다. 구텐베르크 시대에 이미 ‘유성 잉크로 글자를 찍어낸다.’는 아이디어는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필경 작업을 할 때 문단 첫 글자를 일일이 그리는 건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에, 유리로 만든 스탬프를 사용해서 찍어 냈다.

압착기 또한 아주 흔한 물건이었다 – 와인을 만들 때 사용되는 도구였으니까. 인쇄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활자일 텐데 구텐베르크의 가업은 화폐 주조였음을 감안하면 역시 흔한 물건이다. 철제 다리 같은 경우는 훨씬 더 명확하다 – 천 년 전부터 존재한 목조 다리 건축물에 사용되는 부품들만 철로 만드는 것이다.
혁신은 문제투성이다. 하지만 혁신의 순간을 진정으로 위대하게 만드는 것 또한 바로 이 문제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개선 방향과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이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최초의 철제 다리는 실패작이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의 물건이었다. 무게가 엄청나다 보니 얼마 안 돼 다리에 금이 가는 등 문제가 속출했다. 하지만 시행착오의 과정에서 철이라는 재료 특성에 주목했고, 이를 활용하는 전혀 다른 방식의 건축 방식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금 보는 수십km짜리 현수교는 이러한 개선의 결과물이다.

인쇄술도 마찬가지였다. 구텐베르크 이전 시대에 책이란 필경사가 양피지 위에 하나 하나 베껴서 만든 귀중품이었다. 구텐베르크 역시 인쇄술을 필경 작업의 연장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이 비싼 물건을 한꺼번에 만들면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인쇄 작업이 반복되면서, 질적으로 전혀 다른 문제가 제기되었다. 인쇄된 책은 베낀 책과는 달리  ‘제품’이었던 것이다. 조판을 보존하면 얼마든지 새로 책을 찍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활자는 점점 더 많이 제작되었다. 활자의 가격은 계속해서 내려간 반면 품질은 향상되었으니, 더 많은 책들이 인쇄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더 많은 책이 인쇄되어 나오고 경쟁이 계속되면서 책값이 저렴해지자, 사람들은 더 이상 책이 사치품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구텐베르크의 작품에서 보이는 화려한 장식을 위한 여백과 가죽 장정이 필요 없어진 것이다. 이제 책은 종이로 표지를 만들었고 여백도 줄어들었다. 이전보다 글자가 더 작고 빽빽해지면서 출판사들은 가독성이 좋은 서체를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기나긴 개선의 과정에서 인쇄술은 ‘필경 작업의 연장’을 넘어서서 인류사를 바꿔놓은 진정한 ‘혁신’이 됐다.

이렇게 놓고 보면, ‘혁신’이라 불리는 사건들과 ‘개선’이라 불리는 사건들의 관계가 보인다. 혁신의 순간에는 정작 혁신적인 무언가가 별로 없다. 다만 이 사건은 기존에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점과 가능성을 드러냄으로써 개선 작업의 방향을 제시하며 우리의 삶에 혁신을 가져온다. 뒤집어 생각하면, 개선작업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문제 많던 초기버전을 혁신적인 사건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둘은 서로 완전히 모순되지만 실제로는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관계다.

다시 전차 이야기로 돌아가자. 앞서 이야기했듯이, 독일은 전차의 탄생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했고 그냥 영국의 발명품을 지켜만 봤다. 오히려 적국의 쓸데없는 발명품을 못쓸 물건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독일 축구 대표팀을 왜 ‘전차군단’ 이라고 부르는가? 전차를 진정한 혁신으로 만든 것이 바로 독일이었으며 히틀러였기 때문이다.

처음 전장에 데뷔한 전차는 우스꽝스러운 물건이었다. 뒤뚱뒤뚱 느리게 움직이는 주제에 툭하면 고장이 나서 퍼졌다. 참호에라도 빠지면 정말 처치곤란이었다. 독일군도 곧 연합군의 전차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전차는 전쟁 승리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1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전차를 제작한 독일 육군 역시 이 ‘철갑 입힌 트랙터’가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알았다.

초기의 전차는 차량을 움직이는 운전수와 기관총을 사격하는 전차장 두 사람이 조종했는데, 전차장이 전장 상황도 살피고 이동 지휘도 해야 했기 때문에 너무 할 일이 많았다. 강철 상자 안에 들어앉은 전차장의 시야가 심각하게 제한되는 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독일 육군은 쇳덩어리를 잘 개량한다면 전쟁의 기존 컨셉을 바꿀 수 있는 물건으로 봤다. 독일 국방군이 전차를 가지고 스페인 내전(1936~1939)에 참전하게 되자 문제점이 보고되었고 개선되었다. 얇은 장갑을 두껍게 만들고 기동력 향상, 현가장치 부착, 회전식 포탑, 해치, 시야확보를 위한 전차장 잠망경 등등의 개량이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것은 전차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바꾼 것이었다: ‘전차는 기관총이나 박격포 같은 물건과는 전혀 다르다. 따라서 보병 부대와 함께 운용해서는 안 된다.’ ‘전차만으로 이루어진 기갑부대를 편성하여 적 방어선을 돌파해야 한다.’ ‘기갑부대의 원활한 작전 수행을 위해 모든 전차에 무전기를 달고, 조작을 전담하는 무전수를 배치한다.’ 끊임없는 개선과 발전 사이에서 전쟁기술의 혁신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전차가 등장했을 때, 독일 고위 장성들의 평은 그리 좋지 않았다. “재미있는 장난감이지만, 군사적 가치는 별로 없다.” “이런 물건으로는 전쟁에 이길 수 없다.” 하지만 독일군이 기갑부대를 앞세워 마지노선을 돌파하여 프랑스를 점령하자 (1940), 이런 소리는 쑥 들어갔다. 전차가 ‘혁신’이 된 과정은, 이렇게 기나긴 개선과 문제 해결의 과정이었다.

내 지인들 중에는 초기벤처사업을 하시는 분들이 많고, 그만큼 ‘혁신’에도 관심이 많다. 대학원에 있는 내게도 혁신적인 서비스를 만들 아이디어가 있다며 이런저런 제안을 보내오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어느 천재의 기발한 창의력으로 혁신이 일어난다는 걸 믿지 않는다. 다만 ‘문제점을 발견하고 명확한 형태로 정의하는 일’ 그리고 ‘반복적인 시도와 시행착오를 통한 개선’ 의 중요성을 믿을 뿐이다. 나는 내 주위의 창업자들과 개발자들 또한 이 문제들에 더 많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였으면 좋겠다.

- ㅍㅍㅅㅅ

Ding-Dong! The Witch Is Dead! (2013.5)

들어가기 전에

"여자들이 총리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설마 남자들이 지금까지 한 것보다 못하겠어요?" (애니 카트라이트)
"언젠가는 그 말을 후회하는 날이 올 거에요." (샘 타일러)

- 영국 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Life on Mars)』 에서

지난 4월 8일,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알츠하이머 투병 끝에 숨을 거두었다. 향년 87세의 나이였다.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보수당에서도 최초의 여성 당수였고, 11년 209일 간 총리직에 재임한, 20세기 최장수 총리이기도 했다. 전세계의 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이 모두 그녀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집권하자마자 겪은 포클랜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냈으며, 강력한 지도력과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영국병’을 치료해 영국 경제를 되살렸다는 것이 대처에 대해 흔히 알려진 평가다.

그렇다면 영국 본토에서는 어땠을까? 추모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녀의 정적이라 할 노동당도 일단 공식적으로는 조의를 표했으나, 스코틀랜드, 북잉글랜드, 런던, 아일랜드 등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을 축하하러 거리로 몰려나왔다. 생전 그녀의 정적들 외에도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대처의 죽음을 축하했고, 죽은 그녀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대처가 사망한 날,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대처와 관련된 모든 기사의 덧글창을 닫아야만 했다. 대처를 저주하는 엄청난 양의 댓글 때문이었다. 항의와 욕설에 대처에 대해 우호적인 기사를 쓴 기자의 이메일까지 숨겨야 했다. 온 사방에서 1939년의 뮤지컬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온 노래, 「딩동, 마녀가 죽었다(Ding dong, the witch is dead)」가 흘러나왔다.

페이스북에서 대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페이스북으로 이 노래에 대한 조직적인 음원 및 음반 구매 운동을 펼친 결과, 이 노래는 영국 아이튠스 차트 1위에 올랐고, 주간 UK차트에서는 2위에 올랐다. 영국 오피셜 차트 컴퍼니가 집계하는 UK차트는 미국 빌보드 차트와 함께 세계 양대 팝 차트로 꼽힌다. 오피셜 차트 컴퍼니에 의하면, 4월 기준으로 “딩동! 마녀가 죽었다”는 5만 2605장(!)이 판매되는 기염을 토했다. BBC는 고민 끝에 매주 인기곡을 소개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이 노래를 단 5초만 틀기로 결정했다. 고인에 대한 예의와 언론 자유 사이에서의 타협이었다.

대처 총리의 장례식을 나흘 앞둔 4월 13일,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는 수백명의 시위대가 예의 그 노래, “딩동! 마녀가 죽었다”를 부르며 반 대처 시위를 벌였다. 샴페인이 터졌고, 광장에는 매부리코를 하고 손가방을 든 대처모형이 세워졌다. 사람들은 모형을 향해 “매기! 매기! 매기! 죽었어! 죽었어! 죽었어!”를 외쳤다. 한 경찰관은 개인 트위터에 ‘대처가 고통스럽게 죽었으면 좋겠다’는 글을 올렸다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일부 단체가 장례식 운구행렬 때 일제히 등을 돌리는 평화시위를 추진 중이라고 보도했다. 반 대처 세력인 ‘매기(마거릿)로부터의 해방 파티’의 페이스북에는 3,000여명이 이 시위에 동참할 의사를 밝혔다. 작년 영국의 한 사이트에선 대처가 사망할 경우, 장례식을 민영화하자는 청원이 올라오자 3만여 명이 서명하는 일도 있었다.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대처를 추모하며 우리 모두가 대처의 정책을 지지하는 대처주의자라고 발언했으나, 무려 연정 파트너(!)인 자유민주당의 닉 클레그 부총리는 자신은 대처주의자가 아니라며 정면으로 반박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사실 대처가 죽은지 한달이 한참 지났는데도 이런 글을 쓰는지 의아해하는 독자 분들도 많을 것이다. 이 글을 쓸 생각을 처음 한 것은 5월 4일인데, 그 날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스타워즈 팬들 사이에서는 스타워즈 데이로 알려진 날이지만, 사실 그것은 마거릿 대처의 총리 취임에서 유래된 것이다. 1979년 5월 4일에 대처가 총선에 승리해 영국의 첫 여성 총리가 되자 보수당이 런던 이브닝 뉴스지에 언어 유희로 “5월 4일이 당신과 함께하길, 매기 (May the fourth be with you, Maggie)”라는 축전을 실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뭐 안타깝게도(?) 대처는 스타워즈 데이보다 한달 더 일찍 세상을 떴지만.

세계에서 애도 받았으나 정작 영국인 사이에서는 푸대접을 받은 마거릿 대처. 대처를 위인이라고 배웠던 한국 사람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일이다. 한니발에 맞서 조국 로마를 구하고도 고발당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일화가 떠오를 수도 있겠다. 대처에 대한 영국의 배은망덕을 논하기 전에, 그녀가 스키피오처럼 영국을 위기에서 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글쎄.



대처의 집권 배경

“정부 지출을 통해 불황을 벗어난다는 대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에 그것이 먹혔던 것은) 경제에 인플레이션이라는 주사약을 점점 더 많이 투약했기 때문이었다.”

- 1976년 10월, 제임스 캘러헌 총리의 노동당 전당대회 연설 중

마거릿 대처의 과오를 논하기 전에, 그녀의 집권 배경을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마거릿 대처 집권 배경과 그 맥락은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국제적, 국내적, 그리고 사상적 배경이 그것이다.

먼저 국제적 배경을 보도록 하자. 1970년대, 국제적으로 케인즈주의적 정치경제체제는 재정과 통화정책을 잘못 관리한데서 비롯된 충격들에 직면해 해체되었다. 통설과 달리 실업률과 물가가 동반 상승하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다. 결국 고정환율의 브레턴우즈 체제는 1971년 붕괴했다.

3년 후에는 에너지 비용이 네 배로 뛰었다. 과잉 수요를 가격과 임금 통제로 막아보려는 시도들은 노조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시카고학파의 기수 밀턴 프리드먼은 케인스 혁명 자체를 이 파국의 주된 요인으로 지목했다. ‘자연’ 균형 혹은 ‘자연’ 실업률 개념이 다시 부활했다. 화폐수량설의 부활, 시장에 대한 신뢰, 그리고 80년대의 탈규제적 ‘공급 측’ 정책을 위한 무대가 마련되었다.

국내적으로도 70년대의 영국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세계적인 불황 탓도 있었으나, 모든 정부들이 당적을 불문하고 성공적인 경제 전략을 수립하고 실천하는데 계속 실패했다. 70년대 말이 되면 이른바 ‘통제 불능 상태’에 관해 매우 근심스런 논쟁이 오가게 되었다. 정치가 경제 정책만이 아니라 일터, 심지어 거리에서도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인식이 널리 공유되었다. 분명 당대의 영국 노조는 영국 경제의 폭풍의 핵에 가까웠다. 이들이 망상에 가까운 극단주의 혹은 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노동당은 당의 자금원인 산별 노조의 지도자들을 제어하지 못했고, 보수당은 노동 계급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1970년에서 1974년까지 집권한 보수당의 에드워드 히스(Edward Heath) 내각은 비효율적 탄광의 폐쇄를 제안하고, 노조의 쟁의 개시 권한을 법적으로 제한하려 했으나, 연이은 파업이 정부를 좌절시켰고, 선거에서도 패하게 했다.

흥미롭게도, 현재 신자유주의로 불리는 일련의 경제 정책들 – 세금 감면, 자유 기업, 산업과 서비스의 민영화 등 – 이 영국에서 처음 출현한 시기는 1976년에서 1979년까지 재임한 제임스 캘러헌(James Callaghan)의 노동당 정부 때였다. 76년 경제위기로 인해, 캘러헌 내각은 IMF의 구제금융 조건에 따라 기존의 정책과 합의를 바꿔나갔다. 어느 정도의 실업은 이제 불가피해졌고, 보호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허용해 사회 비용과 노동 비용을 줄여나갔으며, 경제적 고초와 더딘 성장이란 대가에도 인플레를 축소하고 정부 지출을 통제하려 했다. 1977년 8월, 영국의 실업자는 160만명을 돌파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노동당이 공공 지출을 크게 줄인 탓이었다.

결국 이듬해, 1978년에서 1979년 사이의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에 주요 노조들이 일련의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청소부부터 간호사까지의 정부 고용인들을 포괄했던 공익사업 노조의 파업으로 쓰레기는 수거되지 않았고, 사망자도 매장되지 못하고 내버려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1979년의 총선에서, 캘러헌 내각은 ‘불만의 겨울’의 후폭풍과 다른 정치적 실책들로 인해 패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동당은 자신들이 경제적 관례에서 급격하게 이탈하는 급진 정책을 시행하지 않음으로서(실제로는 시행했지만) 사회적 위기를 조장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 수 밖에 없었으나, 보수당은 영국에는 바로 그러한 과격 처방이 필요하다 주장한 여인의 정력적인 지도력으로 당당하게 정권을 차지했다. 마거릿 대처의 등장이었다.

1974년의 에드워드 히스 내각의 몰락은 두 가지 산물을 남겼는데, 최초의 여성 보수당수인 마거릿 대처가 탄생했고, 그녀를 뒷받침할 보수당 내 신우파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당 내에서 제일 먼저 케인스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정책의 청산, 자유시장경제를 주창한 이론가 키스 조지프(Keith Joseph)를 중심으로 하여 보수당 내에 정책연구센터가 세워졌고, 이는 신보수주의의 싱크탱크로서 활동했다.

정책연구센터의 소장은 앨프리드 셔먼(Alfred Sherman)이었는데, 원래는 스페인 내전에서 싸운 좌파였지만, 훗날 보수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로 전향한 인물이었다. 그는 과거 공산주의자로서 배운 좌파의 극단주의와 원칙적 접근법을 보수주의 우파에 적용하는데 주력했다. (…) 당시 대처는 정책연구센터의 부소장이었다.

기존 보수당의 구우파는 가부장적 온정주의와 합의를 중시하며 혼합경제를 유지하려 했지만, 신우파는 급진적이며 경제적 자유주의를 추종했다. 이들의 뿌리는 대처의 부상을 준비했다 하여 ‘세례 요한’으로 불리게 된 이녹 파월(Enoch Powell)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문제는, 68년 파월은 ‘피에 물든 티베르 강’이라는 유명한 연설에서 예전 식민지로부터 유입되는 유색 이민들을 경계하라는 극우적인 발언을 날렸고, 그로 인해 에드워드 히스의 그림자 내각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 (……)

그러나 그의 생각은 키스 조지프에 의해 계승되어 보수당 신우파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이들 ‘세례 요한’들이 대처리즘의 출현을 예고했지만, 극단주의적인 면모로 대처리즘의 파국 또한 어느 정도 예고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을 느꼈지. 하지만 보수당이 내 말을 듣지 않았어.”


아이스크림의 시대 – 거시경제적인 측면에서

“해마다 계속되는 투쟁/세상은 맛좋은 아이스크림 같다는데/나는 거의 얼어 죽어가네/적개심이라 불리는 도시에서”

- 더 잼(The Jam)의 노래 「적개심이라 불리는 도시(Town Called Malice)」에서

대처 시절 영국의 경제적 성과가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는 것에는 대체로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비효율적 기업의 정리와 경쟁의 증대, 노조의 침묵 덕에 사업 생산성과 이윤이 가파르게 증가했다. 국고는 국유 자산 매각 수입금으로 다시 채워졌다. 1980년대 중반은 번영기처럼 보였다. 80년에 22%에 이르던 인플레이션은 1986년에는 5%로 급감했다. 노동생산성은 급격히 향상되었다. 중공업은 전반적으로 쇠퇴했으나, 금융업과 첨단산업의 성장으로 전체 규모로는 경제성장률 2.5%~3%를 기록했다. 위에서 인용한 노래 가사대로, 세상은 맛좋고 달콤한 아이스크림 같이 보였다. 실업자 수가 300만을 넘은 채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옥의 티로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폴 크루그먼의 역작, 『경제학의 향연(원제 : 부질없는 번영)』을 보자. 70년대 내내 영국 뿐 아니라 전세계를 괴롭힌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할 정통 해답은, 경기 침체를 수반하는 고통 속에서 인플레이션을 쥐어짜내 버리는 것이었다.

앞에서 케인스주의의 몰락과 밀턴 프리드먼의 부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프리드먼이 제창한 통화주의(Monestariasm)는 정부가 경제의 전체수요를 관리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케인스와 동조했으나, 조세와 지출 조정을 통해 전체수요를 관리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해롭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케인스와 달랐다. 통화 공급을 물가 안정 및 장기 경제 성장에 일치하는 비율로 일정하게 늘리는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프리드먼은 민간 경제는 본질적으로 안정성을 가지기 때문에, 이러한 유형의 통화 준칙이 정해지면 경기 순환은 훨씬 다루기 쉬워질 것이라 논했다.

하지만 이는 대체로 논파되었으며,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도 통화주의에 한결같이 회의적이었다. 그럼에도 연방준비제도는 1979년~81년에 통화주의적 처방을 자신 있게 내놓았는데, 그것은 통화주의의 수사법이, 그들의 실제 정책에 따르는 가혹함을 위장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목표는 총통화이지 사람들을 일터에서 내모는 것이 아니므로 일자리가 있는 사람들은 임금 요구를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똑같은 수사법이 영국에서도 똑같은 정책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었다. 문제는 영국의 경우 통화 정책을 정하는 사람들이 그 수사법을 진짜로 믿었다는 것이다. (!)

마거릿 대처는 밀턴 프리드먼을 진정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다. 대처는 전통적인 고위 공직자 집단보다는 소수의 친구와 조언자 집단, 즉 앞서 말한 신우파에 더 크게 의존했다. 이들 신우파의 통화주의에 대한 취향은, 현실의 사태가 정책 상의 변화를 필요로 하는 순간 바로 벗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편하지 않았다. 사태가 프리드먼 식의 통화주의 정책을 포기하도록 강요할 때조차, 이들은 경제를 적극적으로 운영하려고 하지 않고, 어떻게든 통화 정책을 밀고 나갈 방안만을 모색했다. 앞에서 살펴본 영국 신우파의 사상과 그 배경을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파국적이었다. 대처 집권 이후 거의 7년 간, 영국의 통화 정책은 프리드먼의 노선을 충실하게 준수하였다. 영국의 중앙은행인 잉글랜드 은행(Bank of England)이 그리하였다. 잉글랜드 은행은 산출물이나 실업 및 인플레이션 등의 부문에서 도달할 목표를 발표하지 않았고, 총통화량 M3의 공급 목표만을 발표했을 뿐이었다. 보수주의의 거시경제이론이 옳다면, 이 결정은 안정적인 성장과 물가 안정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어야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79년부터 83년까지, 영국 경제는 무시무시한 경기 침체에 빠져들었다. 불황은 예상 이상으로 심해서 잉글랜드 은행은 스스로 설정한 M3 목표를 깨고 통화를 확대 공급하는 정책을 임의로 시행해야 할 정도였다. 처음에 대처는 화폐 정책이 분명 실패하고 있는데도 동요하지 않았다. 80년 10월에 방침을 되돌리고 정책을 전환하라고 요청하는 보수당에게 대처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렇게 원한다면 당신이 돌아가라, 나는 전환에 찬성하지 않는다.”


“……”
대처의 말처럼, 잉글랜드 은행 또한 기존의 M3 목표를 고수하려 했지만, 실물경제가 변덕스럽게 하강세를 반복함에 따라, 영국의 통화 당국은 목표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압력을 계속 받게 되었다. 결국 86년 잉글랜드 은행은 통화 목표 발표를 완전히 포기했다.

“내가 언제 통화주의 고수한다고 말이나 했습니까?(…)” 했지만 미국에서는 통화주의가 실제로 시행된 적도 없고, 연준은 겉으로나마 통화주의를 표방하는데 무성의했으나, 영국에서는 진정한 통화주의자들이 정성을 다해 통화주의 원리에 의해 경제를 운용했고, 완전히 실패했다.

물론 인플레이션은 잡았다. 실업률의 엄청난 상승이라는 대가를 치른 결과였지만. 영국의 실업률은 1960년대에는 평균 3% 미만이었고, 제임스 캘러헌을 실각시키고 대처의 집권을 가져온 실업률도 5.4% 정도였다. 그로부터 8년 후에는 10%를 넘어서고 있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영국도 1982년 이후 성장이 회복되었으나, 미국과는 달리 영국의 성장은 실업률을 거의 떨어트리지 못했다.

83년을 기점으로 실업률이 안정되었으나, 87년에 이르러서도 실업률은 여전히 10% 이상이었다. 대처의 실험 8년 동안 영국 보수주의는 실업률의 상승을 사실상 방치했다. 철강, 석탄, 섬유, 조선 등 비효율적인 (그리고 국가의 보조를 받던) 산업에서 일하다 실직한 많은 사람들은 결코 다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게 되었다. 일생동안 모든 것을 국가에 의존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들의 고용주들이 몇몇 경우 이익을 내는 사기업을 만들기도 했지만, 이는 사적 소유가 일으킨 기적이라기보단 대처 정권이 노동 비용을 덜어주었기 때문이었다. 필요없는 노동자들의 비용을 국가가 보조하는 실업으로 ‘사회화’했던 것이다.

물론 유럽의 주요국들 중 생산성이 가장 떨어지던 영국이, 81년에서 87년 동안, 2.8%라는 인상적인 생산성 성장률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생산성의 고도성장은 지속되지 않았고, 지속되었다고 해도 그 효과는 반복되는 경기 순환에 묻혀버렸을 것이다. 80년대의 영국이 상대적으로 어느 정도의 생산성 향상을 거두기는 했지만, 그것이 대처의 공인지 저절로 일어나는 일의 하나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여하간 생산성은 향상되었다.

생산성 향상에도 불구하고 높은 실업률은 대처 정부의 뼈아픈 약점이었다. 뭐 대처주의자들의 말로는 당시의 실업은 영국병을 고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하고, 마거릿 대처도 자신을 엄격한 간호사로 칭했지만, 말로는 뭘 못하겠는가. 어쨌건 87년이 되자 영국의 실업률은 급속히 떨어졌다. 대처의 집권 당시보다는 여전히 높았지만, 2년 만에 실업률은 정점이었던 86년의 절반 이하, 한자리 수로 떨어졌다. 보수당원들은 이와 같은 호황이야말로 보수당 정책의 성공을 최종적으로 입증한다며 희희낙락했다.


“…그러나 이 호황이 계속되는 일은 없었다. 87~89년에 모든 힘을 쏟아낸 영국 경제는 이어지는 해에서는 거짓말처럼 고실업에 시달렸다.” 스포일러
그리고 다음 2년 만에, 실업률은 다시 두 자리 수로 돌아섰다. 물론 80년대 후반의 고용 확대가 경제적 건실성의 신호는 아니라는 단서는 이미 몇 가지 있었다. 수요의 급격한 증가는 86년 가처분 소득의 4%에서 88년 제로까지 떨어진 민간 저축의 파탄에 기인했다. 수요의 증가는 급속한 고용 확대로 전환되었는데, 이는 80년대 중반까지 급성장하던 생산성이 갑작스럽게 끝났기 때문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실업률의 하락이 곧바로 인플레이션의 상승에 반영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잉글랜드 은행은 수동적인 태도를 취해, 경제를 죄려고 하기 보다는 인플레이션이 수반된 호황 국면을 방관하고 있었다. 대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정책이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믿고 싶어했고, 실업률 하락을 두고 경제가 위험한 과열 상태라는 증거로 보는 의견보다는 보수주의 미덕에 대한 보상이 다시 나타났다고 보는 의견 쪽에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정책 담당자들은 잡은 줄 알았던 인플레이션이 다시 두 자리로 치솟을 때까지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그 시점에서 정책 담당자들은 갑자기 브레이크를 꽉 밟았고, 이자율은 80년대 초 이래 최고 수준으로 뛰었다. 호황은 극심한 불황으로 반전되었고, 실업률은 다시 두 자리 숫자로 되돌아갔다. 인플레이션은 가까스로 진정되었으나, 2년 간의 짧았던 호황은 고통스러운 불황으로 변했다. 여기에 인두세 폭동까지 겹치면서, 1990년 마거릿 대처는 존 메이저에게 총리 자리를 넘기고 물러나야 했다.



민영화의 문제

마거릿 대처가 막 집권했을 때, 영국 정부는 미국의 경우 민간이 소유하는 기간 산업 부문을 직접 운영하고 있었다. 전화, 가스, 전력 등 가장 중요한 공공 사업부터 호텔이나 국영 광산까지 다양한 사업이 있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경제학자들은 모두 영국 정부가 호텔 같은 민간 기업의 활동과 사업을 운영할 이유가 없다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중요한 국영 기업들의 경우는 자연 독점이 발생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사정이 달랐다. 어떤 특정 도시의 소비자를 위해 경쟁하는 다수의 전력 회사나 가스 회사 같은 것은 없다.

그런데 80년대 영국에서는 자연 독점이 민영화된다면 어떻게 운영될지에 대한 일체의 검토 없이, 통신 부문을 필두로 그 다음에는 가스가, 그 다음에는 전력과 수력이 차례로 민영화 되었다. 대처 정부는 사적 소유가 독점의 조건 하에서도 그 생산력의 마법을 발휘하리라 믿는 듯 했다. 1984년에서 91년 사이에 민영화된 전세계 자산 가치의 3분의 1이 영국 한 나라의 매각분이었다. 정보통신 부문이 시작이었다.

정부는 금융 시장이 정부가 요구한 주식 가격보다 25% 이상을 부른 반응에 기뻐했지만, 투자자들이 브리티시 텔레콤(British Telecom, BT)에 달려든 이유는 별 것 아니었다. 기업이 독점적 지위를 가지면 가격을 올리고 서비스의 질을 떨어트려도 되기 때문이다. 87년에 이르러 BT의 사업 수행에 대한 일반의 불만이 크게 고조되어 정부는 하는 수 없이 BT의 가격과 서비스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다. 다음 차례는 가스였다. BT보다는 불만이 덜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브리티시 가스(British Gas)가 소비자들에게 엄청난 바가지를 씌우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전력 민영화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전력 민영화로 인해, 영국의 일반 소비자는 대규모 발전 업체로부터 전력을 사오는 지역 업체에서 다시 전기를 사다 쓰는 셈이 되었다. 본래 각지의 송전 회사들은 잠재 경쟁력 증대를 위해 자사의 전력 생산 능력을 키우는 것이 자유로웠다. 그런데 송전 회사들로서는 민영화 이후 고도로 집중된 공급 업체의 압력으로부터 보호받을 것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민영화가 이뤄지자마자 자체적인 발전 능력 확대 사업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93년 초 이미 발표된 투자 계획만으로도 95년까지 70%의 초과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 예상되었다.

이 부작용은 영국 석탄 산업의 최종적 붕괴로 나타났다. 석탄으로 가동되는 발전소는 건설비는 비싸지만 운영비가 대단히 저렴한 반면, 가스 발전소는 정반대였다. 하지만 대신 가스터빈은 신속하게 설치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송전 회사들은 각개약진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 가스 발전소 건설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전력 생산 회사로부터 구매가 줄어들면서 석탄 수요는 수직으로 떨어졌다. 92년 가을 영국 정부는 남은 탄광을 반 이상 폐광하고 광부 인력의 70%를 해고하기로 결정했다. 민영화 정책의 실패를 석탄 산업과 그 종사자들이 책임져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대처 사임 5년 후, 존 메이저 총리는 철도 운송의 민영화까지 밀어붙이는데 성공했다. 이런 매각이 이뤄진 주된 까닭은 사실 존 메이저 총리가 ‘무언가를 민영화했다’는 평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것은 전부 대처가 팔아치웠고, 민영화는 보수당만의 고유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철도 민영화 과정에서의 부적절한 절차와 위법, 그리고 비극적인 열차 충돌 사고 등은 2년 후 보수당 정권에 패배를 안겼고, 민영화를 종식시켰다.


- ㅍㅍㅅㅅ

소장 및 대장관련 질환에 대해서

소장은 음식물을 각 성분으로 쪼개고 흡수하는 소화가 진행된다. 소장과 뇌는 외적인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데 뇌는 정신적인 영역에서 인식을 처리하고 소장은 물질로 된 요소를 분해한다.

소장부위에서의 장애는 분석을 너무 많이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소장장애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대부분 분석과 비판을 지나치게 하는 경향이 있으며 모든 일에 트집을 잡는다. 소장은 또한 생계에 대한 불안을 보여주는 지표다. 소장에서 음식물이 완전하게 소화되는데 완전한 재활용을 강조하는 것 이면에는 생계에 대한 불안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소장문제로 인한 대표적인 증상중 하나는 설사다. 설사에서 우리는 불안과 관련된 문제점들에 대한 암시를 얻는다. 불안을 느끼면 비물질적 인상들을 꼼꼼히 살펴볼 여유가 없어진다. 이것을 소화하지 못한채 그냥 흘려버리게 된다. 걸러질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물질적 요소들이 마음껏 빠져나갈 수 있는 한적한 화장실로 물러나 많은 수분을 잃어버린다.

불안을 치료하는 법은 놓아주고, 넓혀주고, 유연해지고, 허용해주는 것이다. 설사의 치료법은 엄청난 양의 액체를 공급하는 것인데 이로써 환자는 불안을 경험하는 자신의 경계를 넓히는데 필요한 유연성을 상징적으로 얻게 된다.

즉, 설사는 급성이던 만성이던 상관없이 우리가 항상 불안해하며 너무 집착하려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그리고 놓아주고 버려두는 법을 가르쳐준다.

대장은 본격적인 소화가 끝나고 수분만 흡수된다. 이부위의 흔한 장애는 변비다. 변비는 내어주고 싶어하지 않는 욕망, 붙들고 있기를 원하는 욕망의 표현이며 인색함에서 오는 일련의 문제와 상통한다. 이시대 많은 사람들이 변비에 시달리는 이유는 우리가 물질적인 것에 너무 심하게 매달리고 이로부터 벗어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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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르그 달케

삶의 가치 추구

종종 내가 생각하는 이야기를 떠들면 사람들로부터 "그런 생각을 하면 허무한 생각이 들지 않는냐"는 질문 혹은 공격을 받는 경우가 많다.

내 생각에 따르면 인류의 문명은 환상으로 시작되고 성립되어 있으며 이성에 대한 탐닉,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국가와 민조에의 충성 등등 어중이 떠중이 모든 것이 유전자나 진화과정, 혹은 사회 통제 시스템 속에서 비롯되는 망상이요 모두가 환상이어서 내 이야기를 듣다보면 세상이 헛된 것으로 느껴지게 되어 `이 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왜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히는 모양이다. 그런후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왜 사나? 곧바로 죽어버리면 될 것을?"

나에게 이 질문은 뜻밖이 것이었다. 이런 질문이 나오는 전제로는 인간이 살고 있는 것은 그것을 위해 살기에 값하는 어떤 가치를 위해서이며, 그런 가치가 없다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편이 낫다는 사고방식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나는 이런 사고방식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단순히 위험의 차원을 넘어서 남에게 지극한 피해를 줄 수 있는 극단적인 사고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인간이 그것을 위해 살기에 값하는 가치 같은 것은 있지도 않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앞에 질문한 사람의 사고방식을 따라서 되받아친다면 인류가 이 지구위에 존재하는 그 자체가 도대체 값어치 없는 일인 것이다. 있다고? 누가 인류에게 그런 가치를 주었는가? 하나님인가? 부처님인가?

만일에 인류에게 그 같은 값어치가 있다면 고양이에게는 없는가? 구더기에게는 없는가? 만약 인류만 있고 고양이나 구더기에게는 없다면 그 차이의 근거는 있는가? 반대로 있다면 인류, 고양이, 구더기에 공통되는 가치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가치 정도의 차이를 두어서 인류의 가치가 구더기의 가치보다 높다는 투의 높낮이가 있는가? 있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요컨데 가치라는 것도 내가 말한다면, 인간의 제멋대로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했다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핵심은 인간이 왜 살기 위해 가치라는 것을 갖고 싶어하는가에 있다. 그러한 가치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오류의 시작인 것이다.

"개짐승은 살기위한 값어치를 찾지 않고 그저 살고 있을 뿐인데, 인간은 그저 살고있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 자기 존재의 의미를 묻고 그 가치를 찾는다. 따라서 인간은 개짐승보다는 우월하다."라고 주장하는 이를 의외로 많이 볼 수 있는데, 내가 한마디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건방지고 공허한 우쭐거림의 소치로 인간이 개짐승과 달리 살아가기 위한 가치를 찾음은 그 자연적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따라서 삶에 공허함을 느끼게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환상에 매달리려하는 것이다.

곧, 살기위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허망함을 견딜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못해 바둥거리는 가련한 몸부림의 결과이며 현실을 외면하는 비겁한 행동으로서, 인간이 개짐승보다 우월한 이유가 되기는 커녕 반대로 열등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 게으름뱅이의 정신분석

이타주의는 유전학적으로 이기주의이다.

이타주의는 아마도 우리들의 감정 가운데 가장 복잡한 것일 것이다. 이타주의는 하나의 본능이며, 신체적 특징이 진화해 온 것과 같이 진화했다고 다윈은 믿었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19세기에는 그러한 본능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 내지 못했다.

…약 1세기 후에 영국의 천재적 생물학자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이 다윈의 이와 같은 의문을 해결했다. 그는 이타주의 내지 인간의 모든 감정은 과거에 자연 선택된 결과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는 그것을 ‘포괄적응도(inclusive fitness)'라고 부르고, 각 개인은 그런 유전 특성을 자신의 친족과 공유하고 있는 사실을 논증했다.…

형제 자매는 유전자의 반을 공유하므로, 이타주의자인 남자가 동포들의 안전과 자신의 생명을 바꿔 희생했을 경우, 살아남은 자들중 최소 두 사람이 죽은 이타주의자의 형제라면, 그 형제에게서 아이가 생겨나면 죽은 남자의 유전자는 이어져 간다. 마찬가지로 어떤 여자가 희생하여 여덟 명의 젊은 사촌을 구하면, 유전학적으로 볼 때 그녀 자신의 성품은 100퍼센트 이어지게 된다.(사촌과는 유전자의 25%를 공유하므로)

해밀턴보다 몇 년 앞서서, 20세기의 위대한 유전학자 홀데인(J.B.S.Haldane)은 두 사람의 형제 혹은 여덟 명의 사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을 버려도 좋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어느 쪽을 위해서 죽든 그가 가진 유전 특성의 모두가 존속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국가나 인류를 위해서 못죽을 이유가 없다. 따라서 헤밀턴의 설명에 의하면, 이타주의는 사실상 전혀 이타주의가 아니다. 이타주의는 유전학적으로는 이기주의이다.(성의계약,136)

인간은 동물과 차별되는 뭔가가 있는가?

왜 우리 인간은 다른 종과 다른 것일까? 아니면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일까? 인간의 일상활동을 모두 모아 보면 인간의 특징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행동 가운데 놀라울 정도로 많은 부분은 영장류들에게도 가능하다. 우리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독특한 어떤 행동이 있을까? 시대를 통틀어 모든 인간에게 나타나지만 다른 동물에게서는 볼 수 없는 행동말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에픽테투스, 아우구스틴, 아퀴나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파스칼, 로크, 라이프니츠, 루소, 칸트, 그리고 헤겔은 하나같이 `인간은 본질에서 다른 (모든)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견해`의 지지자였다.

루소를 제외한 모든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질적인 특징은 `이성, 지성, 사고, 또는 오성`이라고 주장했다.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인간의 특징은 육체에 존재하는 물질과 에너지로 이루어지지 않은 무엇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무엇`에 대한 과학적인 증거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았으며 다양한 종의 동물행태학조차도 공부하지 않은 이들이 말하는 내용의 신빙성마저도 의심스럽다.

몇몇 서양 철학자들, 에이비드 흄만이나 다윈은 인간과 다른 종 간의 차이란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는 주장을 폈다. 수많은 현대철학자들에 따르면 인간과 인간이 아닌 동물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1)과거와 미래에 대한 진술에 해당하는 문장을 만들 수 없으며,
(2)먼 미래에 쓸 도구를 제작할 수 없고,
(3)오랜 역사적 전통을 이루는 누적된 문화유산이 없을 뿐 아니라,
(4)지각을 통해 파악되는 현재상황에 뿌리를 두지 않는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

고금의 손꼽히는 숱한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동물에 대한 무지속에서 자신감과 자만감에 가득차 보급시킨 이 명백한 오류를 보면, 우리 인간에 대한 중요한 무엇인가를 시사하는 점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인간의 분명한 특징을 찾으려는 최초의 시도 가운데 하나는 플라톤의 것이다. 그는 인간을 털 없는 양족(兩足) 동물이라고 했다.

아담 스미스는 `교역한다든가 교환하는 성향은...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것으로 다른 동물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또, 16세기의 마틴 루터와 레오 13세는 사유재산이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주요한 차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침팬지는 교환을 아주 좋아하고 대부분의 포유류는 자기소유의 암컷무리(하렘)을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한 말은 때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러나 침팬지와 보노보, 사회성을 가진 곤충들은 인간보다도 훨씬 잘 조직되어 있으며 권력과 암투, 전쟁, 정치를 행한다.(이전글 호모 폴리티쿠스 참조)

`용기는 인간 특유의 자질이다.` 이 말은 타키투스가 로마 귀족 클라우디우스 시빌리스의 말을 기록해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어미새는 새끼를 지키기 위해 날개가 부러진 척 하며, 어미물소는 새끼를 보호하려 맹수에 대항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중에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정의가 있다. 그러나 침팬지도 유추와 추리를 통해 추론을 할 수 있고, 대화가 가능하다. (이전글 호모 폴리티쿠스 참조)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지배한다는 점에서 이성이 없는 생물과도 다르다.` 이것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에서 쓴 교의이다. 그러나 인간이 언제나 이드(id)를 통제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이는 인간의 동물적 본성이다.

한때 동물행동에 대한 유력한 전문가였던 야콥 폰 웩퀼조차 `특정한 목표를 가진 행동은 다른 동물에서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러나 침팬지는 적에게 던지기 위해 돌을 모은다. 다람쥐는 나중에 먹기위해 도토리를 땅에 묻는다.

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는 우리를 특징짓는 것은 기억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원생동물조차도 미로학습을 시킬 수 있으며 코끼리는 과거 경험에 따라 물을 찾고 루트를 따라 이동하며 과거 자신을 해하려했던 인간을 기억해 복수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여러가지 섹스습관을 가지고 인간을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침팬지도 입을 맞추고, 보노보 침팬지는 스왑,오럴,애널 등 인간이 상상가능한 모든 섹스를 한다. (이전글 호모 폴리티쿠스 참조)

1928년 영장류에 대해 쓴 한 과학자는 `강간은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라는 것은 정말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강간은 오랑우탄과 스텀프테일 원숭이의 경우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폭력적인 성적 억압은 비비원숭이와 침팬지의 경우에는 흔한 일이다. 무엇보다 강간하지 않는 사람이나 여자는 인간이 아니란말인가?

섹스전에 전희(前戱)를 하고 그 지속시간이 길다는 사실을 인간의 특징을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학습된 행동이다. 학습은 모든 동물종에 공통적인 특징이다.

남성은 사냥과 싸움, 여자는 채집과 양육을 담당하는 성에 따른 분업을 고유한 인간의 특성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침팬지도 그런 분업을 한다.

유년기, 태어나서 청년기에 이르는 시기가 길다고 하지만 코끼리만큼 길지 않으며, 성숙에 이르는 시기는 침팬지의 경우보다 조금 더 길 뿐이다.

인간의 놀이적 특징을 `호모 루덴스`라 한다. 그러나 놀이는 포유류 전반의 속성이다.

개인위생이 인간의 특징이라고 로마 철학자 에픽테투스가 말했다. 그러나 고양이만 봐도 이것은 틀렸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는 어떻게 할 건가?

인간은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한다. 플라톤의 『법률』에 등장하는 아테네의 방랑자가 인간은 어는 동물보다도 웃는 경향이 강하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침팬지도 웃고 울 줄 알며, 사실 웃는다는 것은 코끼리가 코로 물건을 잡을 수 있다처럼 신체적 특정근육의 발달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인간만이 죽음의 고통을 갖고 있다는 생각도 잘못됐다. 감정생활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대뇌 변연계는 포유류 전체에 발달되어 있어 모든 동물은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를 가지고 있다.

살인, 식인풍습, 영아살해, 텃새, 동족상잔 그리고 전면전, 게릴라전도 인간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토시사다 니시다는 `아이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벌을 주는 행위는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독특한 것을 보인다`라고 했다. 그러나 영장류에게 새끼들에게 강제력을 행사하거나 벌을 주는 행위가 발견된다.

일부일처제도 긴팔원숭이, 늑대, 기러기, 많은 조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세기의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는 스스로를 하나의 종으로 인식하는 것이 인간의 특징이라고 했다. 그러나 많은 동물들의 경우 쉽게 자신의 종과 다른 종을 구별할 줄 안다.

계급 구분에 능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포유류는 계급제 무리를 만들고 있으며 오히려 인간보다 심한 경우가 많다.


문화가 인간을 정의할 수 있는 지표가 될 수 있을까? 문화와 관련해 (1)근친상간의 범위를 정하고 그것을 금지하는 것, (2)친척들을 분류하고 각각의 부류를 구별하는 것, (3)신성하게 여기는 안식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과 같은 세가지가 동물들과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나 침팬지와 고릴라 등 다른 영장류에게도 정도의 차이일뿐 이러한 특성은 있다.

앙리 베르그송은 `삶에 대한 충동`을 인간의 특성이라고 했다. 그러나 침팬지도 약초를 복용할줄 알고 마다가스카 안경원숭이가 독소치유를 위해 숯을 먹는 등 학습에 의해 건강에 신경을 쓸줄 안다.

성적 억압이 인간 문화의 최초 출발점이었다고 상상하는 일부 학자들이 있다. 특히 젊은 남녀들이 성적 욕구를 아무런 제한 없이 표현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사회의 틀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열대지방의 문화에서는 성적인 억압이 느슨하고, 빅토리아 왕조 시기의 성에 대한 태도를 보면, 분명 인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원숭이와 유인원 사회에는 성의 기준이 느슨하긴 해도 그들 나름의 금지사항이 있다.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영장류 사회에서는 용인될 수 있는 관습에 한계를 두고 있다. 성적인 억압과 그와 관련된 수치심으로 인간을 특징지을 수는 없다.

미술, 춤, 음악 등의 문화생활도 다른 영장류도 가능하다.

서양에서는 의식과 자기인식을 널리 인간의 본질로 여겨 왔다.(반면 동양에서는 자아인식이 없는 상태를 신의 은총을 받은 완전한 상태라고 생각 했다.) 의식의 기원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불가사의라고 생각되어 왔다.

아니면 비슷한 말이지만 잉태의 순간에 다른 동물의 경우와는 달리 인간에게 비물질적인 영혼이 들어간 결과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의식이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초자연적인 힘을 끌어들여야 할만큼 불가사의한 현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의식의 본질이 나와 다른 모든 사람들, 즉 유기체의 내부와 외부를 명확하게 구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미 살펴보았듯이 대부분의 동물이 (미생물조차도) 그런 정도의 의식과 인식은 가지고 있다.

건강한 신체의 모든 세포는 자신과 다른 것을 구별할 수 있다. 어린아이의 경우 거울상이 흉내를 잘 내는 어떤 다른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대략 2년이 걸린다고 한다.

거울상이 무엇인지 깨닫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일부 유인원의 경우도 어린아이와 비슷하다.

몽테뉴는 `성실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세상에서 인간만큼 믿을 수 없는 동물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침팬지도 거짓말을 하며, 동물들의 사회적 관계에 있어 기만, 자기기만 등의 문제는 생물학의 새로운 주제가 되고 있다.

유명한 19세기의 언어학자인 막스 뮐러는 `언어야말로 우리에게는 루비콘 강이다. 감히 이 강을 건너려 드는 동물은 없다.`고 했다. 헉슬리도 인간이 언어를 가지고 있음을 들어 `인간이 동물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물질과 구조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인간성의 고귀함에 대한 외경심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고 했다. 데카르트도 언어가 인간과 동물의 진정한 차이라고 했다.

그러나 침팬지와 보노보도 단어와 기호의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고릴리는 훈련을 통해 수화로 200여개의 어휘를 구사하고, 특히 고래의 경우 거의 인간과 같은 수준의 대화를 한다는 가설이 제기되고 있다.

인간의 뇌만이 좌우기능이 분화되어 있다는 독단적인 생각이 있다. 언어를 배운 침팬지의 경우에도 뇌의 좌우기능이 분화되어 있는 게 발견됐다.
상대적인 차이가 아니라 절대적인 차이라고 계속 고집을 부린다 해도 우리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우리 인간에게 독특한 어떤 특징도 발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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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조상의 그림자,401p-434p)

화(火,분노)의 메커니즘(Dooms-day-machine 이론)

1964년 큐브릭 감독의 명작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에 보면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핵공격을 받으면 방사능을 감지해서 자동으로 전 지구를 파멸시킬 수 있는 최후의 무기를 발사하는, 인간의 감정을 배제한 논리메커니즘을 구축했다. 소위 Dooms-day-machine이다. 영화에서 둠스데이머신은 결국 지구를 파멸시키지만 만약 현실에 이 기계가 존재하고 미국이 그 사실을 안다면 미국은 감히 소련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만약 둠스데이머신의 단추를 인간이 수동으로 눌러야 보복공격이 된다면 어떨까? 비록 모스크바에 미국의 핵이 떨어졌지만 이 때문에 공산당 서기장은 복수의 즐거움 외에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도 주지 못하는, 오히려 악마로 비난받을 전 인류를 파멸시킬 폭탄을 가동시키겠는가?

아이러니하지만 이러한 공포스러운 핵전략의 모순들은 당사자들의 이해가 충돌하는 모든 갈등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 가령, 공중납치범의 경우 승객들중 누구라도 저항을 하면 비행기를 폭파시키겠다고 협박하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부딪히면 폭발하는 폭탄을 가슴에 두르고 있는 것이 승객들을 통제하는데 훨씬 효과적이다. 그린피스 시위자들은 핵발전소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건설용 기차가 가는 철로에 드러눕는다. 합리적 기관사라면 기차를 세워야한다. 이에 대한 건설사의 대응수단으로 적절한 것은? 열차운행을 자동화하는 것이다.

자만심,사랑,분노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제력을 잃는다. 이들은 명백히 비합리적인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할 것처럼 보이고 이성의 호소에 귀막는다. 즉, 광분한 사람은 작동이 시작된 둠스데이머신과 같다. 광기라해도 그 속에는 조리가 있다. 이성과 사고를 포기하는 것은 우리 사회 관계에서 발생하는 거래,약속,협박에서 효과적 전술이다.

이 이론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죽음으로 몰고간 낭만적 사랑같은 아름다운 스토리를 거꾸로 뒤집은 것이다. 열정,분노,흥분은 동물 조상이 물려준 흔적도, 창조성의 원천도, 지성의 적도 아니다. 지성과 이성은 열정을 통제하기 위해 설계된 기능이 아니다. 오히려 지성의 제안, 약속, 협박이 허세, 배신일 수 있다는 의심을 막기 위해 열정을 보증서로 사용하는 것이다. 열정과 이성사이에 놓인 방화벽은 뇌 구조의 불가피한 부분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프로그래밍된 것이다. 열정은 이성으로 통제불가능할때에만 믿을만한 보증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가 말했던 둠스데이머신은 소련이 미국에 비밀로 유지하면 아무런 효과가 없다. 이 말은 왜 우리의 감정이 표정으로 다양하게 표현되는지에 대한 이유도 말해준다. 홍조,상기된얼굴,떨림,전율,눈물 등은 가짜로 조작하기 매우 어려우며 사용되는 근육도 다르다. 이 때문에 전문배우들은 메소드 기법(자신의 경험을 연기에 투영하는 것)을 사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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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639p

자유의지.. 존재하나?

자유의지란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기계와 차별화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왜 기계는 마음대로 다뤄도 되지만 인간은 그래서는 안 되는가? 이는 바로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는 스스로의 존엄성을 갖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가치관이 세워져 있기 때문에 자유의지에 대한 바람과 절규는 실로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실제 인간과 동물이 소유하고 있는 자유의지는 정해진 규칙대로 뉴런들이 움직여서 만들어진 결과이다. 기계적으로 작동함에도 불구하고 겉보기에 예측불가능하고 복잡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뉴런의 회로 자체가 결정론적 예측불가능한 성질을 같는 기계이기 때문이다. 또한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극이 같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언제나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지 않는다. 예측불능성이 뇌회로에서 사고와 행동의 예측불능성을 만들어 내어 그 사람이 규칙에 지배받지 않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자유의지의 원천은 사실상 결정론적 기계에서 만들어지는 카오스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양자역학은 이러한 결정론적 가치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돌파구로 인식되어 왔다. 하이델 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로 이것이 자유의지의 원천이라는 생각은 언뜻 보기에 대단히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에 뇌의 메커니즘과 생명현상에 대한 바탕에 깔린 기본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어왔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인간이 보이는 정도의 예측불능성과 자유로운 행동들은 뉴런의 상호작용이 만드는 예측불능성에 의해서 충분히 만들어지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카오스가 뇌와 관련하여 관심을 끄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완벽히 결정론적이지만 예측이 불가능한 것이 생명현상과 일치한다. 우주상에 완벽한 우연으로 만들어지는 난수(random number)가 존재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완벽히 우연적으로 혹은 완벽하게 어떠한 규칙도 따르지 않는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는 제한된 레벨 위에서의 자유의지와 같은 것이다. 일단 뉴런레벨로 오면 정해진 그 규칙을 따르는 것뿐이다.

이러한 자유의지를 만들어내는 뉴런의 연결구조를 정확히 알아낸다면 이를 전자뉴런을 갖는 기계회로에 그대로 적용시켜 기계스스로 인간과 동일한 수준의 자유의지를 갖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 기계는 사람과 비슷하게 예측불능한 다양한 행동을 하게 되고 기술이 정교하게 발달하게 된다면 사람과 구별이 불가능할 정도의 수준까지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 기계는 아마도 자신의 의지대로 생각하고 사고하는 것이 이미 결정된대로 작동된 결과일 뿐인가 아니가 하는 자유의지에 관한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기계에게 인간과 같은 권리를 줘야하는가? 미래에 등장할 자유의지 회로를 소유한 기계에게 어떠한 권리를 줘야 할 것인가는 과학소설과 영화등에서 이미 많이 다뤄온 문제이다. 그들에게 과거의 생물학적 인간과 동일한 권리를 줘야만 한다고 판단해야할 근거가 없는 것과 동시에 그 반대의 근거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반응한다면 그 기계는 논리적으로 이미 사람이다. 또한 사회적인 권리란 그 존재에 대한 과학적 사실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중요성과 비중에서 온다. 만일 그들이 스스로 자기복제하며 자손을 퍼뜨리고 스스로를 보호할 물리적 힘까지 가지고 있다면 그들의 권리는 누가 주지 않아도 스스로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동물이나 기계와는 다른 존엄성을 소유한 인간으로서의 위치를 지키기 위한 헛된 몸부림은 과거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옮겨 갈 때나, 창조론이 만연한 때에 진화론이 새로 등장한 시기와 매우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처음에는 사회적인 압박으로 대외적으로 거론되지 못하다가 차차 많은 과학적인 증거가 뒷받침되면서 널리 퍼져 나가고 세월이 흘러 과학적인 사실로 자리잡게 되고 사회적으로도 널리 인정된다. 현재 생명을 기계의 일종으로 보는 관점은 이미 첫 번째 단계를 지나 두 번째 단계에 진입한 상태이다. 분자생물학과 유전공학에서 많은 과학적인 증거가 쌓여가고 있고, 인공생명 분야가 탄생하면서 생명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관점은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초기 단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널리 인식되는 데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과거 지동설이나 진화론이 거쳤던 시간보다는 더 짧은 시간 내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수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미래의 이브(L'Eve future)

`If our Gods and hopes are nothing but scientific phenomena then let us admit it must be said that our love is scientific as well`
(우리들의 신도, 희망도 단순히 과학적인 존재라고 한다면 우리들의 사랑 역시 과학적인 존재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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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에 드 릴라당(Villiers de l'Isle Adam, 1838~1889) 1886년  `미래의 이브`

이 소설은 로봇 SF소설의 선구적 작품으로 이후 SF 소설 및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소설에서 Edison이란 귀족 과학자가 Ewald경을 위해 안드로이드 안드로이드(남성형 인조인간을 뜻하며 여성형 인조인간은 가이노이드이다)를 만들어주는데 그 가이노이드의 이름을 하다리(Hadaly)라고 짓는다. 와세다대학에서 만든 인조인간에도 하다리란 이름이 붙여져 있다. Hadaly는 고대 페르시아어로 이상(理想,ideal)을 의미한다.

영원한 여성의 탐구를 주축으로 하는 그 몽상(夢想)과 풍자 속에서, 작자의 인간혐오 철학의 집대성을 볼 수 있는 작품

자유의지와 결정론(determinism)

[인간의 자유의지의 존재를 역설하며 결코 미래는 결정되어있지않다고 생각하는 종교론적, 혹은 낭만주의적 견해에 대한 반박]

처음 불확정성의 원리가 공표됐을 때 많은 종교학자나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던 일부 철학자들은 뉴턴과 라플라스에 의해 손상된 자신들의 세계관을 복구할 좋은 도구를 얻은 듯 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틀렸다. 왜냐하면......

1. 불확정성 원리는 인과율을 부정하지 않는다. 불확정성 원리는 확률론적인 것이며, 이것은 제한된 가능성을 의미한다. 즉,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 가능성의 한계 안에서 확률적인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불확정하다는 것이다. 결코 무제한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2. 보다 중요하게, 불확정성 원리는 자유의지와는 관련이 없다. 불확정성 원리는 결정론적인 원리이며 미시세계 어디에든지 적용된다. 하지만 플랑크 단위의 움직임은 일상적인 자연현상과 같은 거시세계에서는 경험하기 어렵고 소립자처럼 작은 규모에서만 의미가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불확정성 원리도 역시 결정론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인과율도 깨지지 않는다. 다만 과거의 엄격한 결정론 대신에 약간 유연한 확률적 결정론이 적용된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보다 면밀하게, 자유의지나 환경결정론 등은 분자생물학이나 철학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인 것이다.

돌고래도 이름짓고 이름 부른다 - 연합뉴스

청백돌고래는 각자 고유의 이름이 있어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며 심지어 제3의 돌고래 이름을 섞어가며 대화를 나누기까지 한다는 연구가 발표됐다.

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돌고래들이 내는 높은 휘파람이 이들의 이름일 것으로 추측해 왔지만 미국립과학원회보(PNAS) 최신호에 실린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이들의 이름은 대부분의 다른 동물들처럼 각자의 음성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주파수를 갖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의 휘파람을 녹음한 뒤 음성 요소를 제거하고 주파수만 남겨 들려 주어도 돌고래들은 이름들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위-오-위-오-위-오-위"라는 휘파람 소리가 사람에게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들릴지 몰라도 이는 돌고래가 자기를 소개하는 방식이다.

영국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의 빈센트 재닉 박사 등 연구진은 플로리다주 새러소타 베이에서 암컷 각 7마리씩의 청백돌고래를 임시 포획해 각자의 이름 부르는 소리를 녹음한 뒤 여기서 디지털 방식으로 음조나 음성적 특색을 제거한 뒤 다른 돌고래들의 디지털 처리 휘파람들과 섞어 수중 스피커를 통해 들려 주었다.

그러자 14마리 중 9마리는 가까운 친척의 이름과 비슷한 소리가 들릴 때면 스피커 가까이로 자주 다가와 관심을 표시했다. 재닉 박사는 청백돌고래들이 유년기에 자신의 이름을 선택해 이를 평생 사용한다면서 "이들은 주변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고유 휘파람을 결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돌고래들은 독창적인 이름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주변에서 나는 여러 휘파람의 일부를 따서 자기 이름을 삼기도 한다"고 말했다.

어린 돌고래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기 이름을 짓든 자기 이름을 가까운 친척의 이름과 헷갈리지 않도록 한다. 시야가 제한된 물 속에서 돌고래들은 자기 이름을 부름으로써 친척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고 때로 길을 잃었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도 도움을 바라며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닉 박사는 "돌고래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 지는 모르지만 이들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수다스러운 동물일 것"이라며 이들의 레퍼토리는 수백 가지는 될 것이라고 말했다.

원숭이도 사람 뺨치는 속물근성 (뉴스스크랩)

(서울=연합뉴스)

원숭이와 사람의 행동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성을 보인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원숭이도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은 속물적 행동을 한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고 abc뉴스 인터넷 판이 보도했다.

미국 듀크대학 신경생물학자들은 자폐증 연구의 일환으로 특정 사회적 환경에서 원숭이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다시 말해 두뇌가 사회적 인식에 어떻게 대처하는 지를 관찰해 왔다.

연구 초기에 이들은 원숭이들도 같은 방 안에 있는 다른 원숭이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 지에 상당한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파티장에 모인 사람들 중 한 명이 방금 새로 들어서는 사람을 바라보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일제히 그 쪽으로 쏠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연구진은 정밀한 시간측정 장치를 사용해 원숭이들의 이런 반응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거의 순식간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른 원숭이가 오른 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미지를 보여주면 원숭이들은 즉시 오른 쪽을 본다는 것이다.

이런 기초연구를 바탕으로 연구진은 원숭이들이 자기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원숭이의 사진을 본다거나 원숭이 포르노를 살짝 본다든지 하는 다양한 혜택을 바라고 자기 몫의 과일주스를 기꺼이 포기한다는 사실을 관찰했다.

그러나 원숭이들은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원숭이의 이미지를 보기 위해서는 주스 한 방울도 내놓지 않으며 오히려 이들을 보는 대가로 보상을 바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에게 주스를 주면 약자를 쳐다 봐 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에 따라 "다른 이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 같은 비자발적인 반응처럼 보이는 행동이 사회적 지위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지"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다. 연구진은 원숭이들에게 다양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무리 안의 원숭이들이 왼쪽, 혹은 오른 쪽을 보고 있는 사진을 보여 주고 이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데 걸리는 시간을 측정했다.

그 결과 높은 서열의 원숭이들은 사진 속의 원숭이들이 어느 방향을 보는 지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신경을 쓰는 원숭이들도 상대가 낮은 서열일 경우 같은 방향을 보는데 걸리는 시간이 2배나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생물학 최신호에 실린 이 연구 보고서는 원숭이들의 이런 반응 중 일부는 '보는 대로 한다'는 원숭이의 타고난 특성이지만 지위의 고하가 유발하는 반응의 차이는 반사적인 것과 자발적인 것이 합쳐져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사회적 지위가 반응을 부분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또한 사회적 지위에도 생물학적 요인이 작용할지 모른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지위가 높은 원숭이들에게는 남성 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 많아 이것이 '사회적 경계심'을 억누르기 때문에 반응에 더 긴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반면 지위가 낮은 원숭이들은 테스토스테론이 적으며 다른 원숭이들의 시선에 쉽게 주의가 분산된다. 주의 분산은 자폐증의 주요 증상이다.

이런 연구 결과는 우습게 보일 지 모르지만 질병 치료에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특정 증상에 사회적 요인이 있다는 것은 치료에 새로운 길이 열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도시 까마귀의 호두까기 방법

일전에 창의적 도구를 만드는 테즈메니아 까마귀에 대해서 쓴 글이 있었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까마귀의 학습효과에 대한 비디오가 공개되었다.(아래링크 참조)

http://controller.tvpot.media.daum.net/mflvPlayer.swf?vid=se8cjn5x_4I$

동영상에는 세마리의 다른 까마귀가 나온다. 첫번째는 호두를 공중에서 바닥에 떨어뜨려 깨먹으려는 까마귀인데, 이런 행동은 독수리와 같은 다른 야생조류에서도 관찰된 바 있다.

두번째 까마귀는 아스팔트에 떨어뜨려 차바퀴에 깔려 깨지도록 하는 방법을 익혔지만, 자동차와 보행자 등의 위험으로 인해 호두를 먹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세번째 까마귀는 건널목 위에 호두를 떨어뜨려 놓고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렸다가 차가 오지 않는 틈을 타서 호두를 먹는다.

도시는 까마귀가 새로 겪고 있는 환경이고, 이런 행동은 본능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할 수 없는 행동들이다. 여러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고 생각하고 추론하는 능력없이 이정도의 행동양식을 습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영리한 까마귀의 행동은 새들도 상당수준의 사고능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양한 행동의 도시 까마귀들을 관찰한 결과이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학습시켰을 가능성은 적다. 서양에서도 까치나 까마귀는 창문을 열고 들어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능이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어배열

캠릿브지 대학의 연결구과에 따르면, 한 단어 안에서 글자가 어떤 순서로 배되열어 있는가 하것는은 중하요지 않고, 첫째번와 마지막 글자가 올바른 위치에 있것는이 중하요다고 한다. 나머지 글들자은 완전히 엉진창망의 순서로 되어 있지을라도 당신은 아무 문없제이 이것을 읽을 수 있다. 왜하냐면 인간의 두뇌는 모든 글자를 하나 하나 읽것는이 아니라 단어 하나를 전체로 인하식기 때이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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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 원숭이에서 사랑의 원숭이로

동물행동학자들이 영장류 사회에서 화해와 평화의 모습을 발견한 것은 흔히 피그미 침팬지로도 불리는 보노보에 대한 연구가 1980년대부터 활발해지면서부터이다. 보노보는 침팬지와 더불어 지구상에서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지만 전쟁을 좋아하는 침팬지와는 달리 평화와 사랑을 즐긴다. 또한 침팬지가 남성 중심 사회를 이루는 데 반해 보노보는 여성 중심 사회를 이뤄 산다.

235종의 영장류 가운데 남녀가 서로 마주 보고 성 행위를 하는 것도 인간과 보노보뿐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인간은 마주 보고 하는 성 행위를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는 특징으로 여겨왔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침팬지나 말, 개처럼 하는 후방위를 죄악으로 여겨왔다.

보노보가 사람처럼 마주 보고 성 행위를 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독일 뮌헨동물원의 두 연구자였다. 동물이 마주 보고 성 행위를 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1954년 이 사실을 논문으로 쓰면서도 비전문가는 볼 수 없게 라틴어로 발표했고 보노보의 존재는 그 후 잊혀졌다.

보노보가 침팬지의 아종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1929년이지만, 보노보에 대한 본격적 연구는 1980년대 들어 시작된다. 동물학자들이 아프리카 열대우림에 숨어 살며 몹시 수줍음을 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보노보 집단 옆에서 살면서 하나 둘씩 이들의 생활 모습이 공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에모리 대학 심리학과 프란스 드 발 교수는 미국 최대의 동물원인 샌디에이고동물원에서 보노보를 연구해 1997년에 ‘보노보: 잊혀진 원숭이’란 책을 출판했다. 지난 1982년에 ‘원숭이 정치학’을 통해 침팬지와 인간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남성 중심적 파워 정치학을 그렸던 침팬지 연구가 드 발 교수는 “보노보가 좀더 일찍 알려졌다면, 인간의 진화를 재구성하는 데 남성, 전쟁, 사냥, 도구, 파워 정치보다 남녀의 동등한 성 관계, 가족의 기원에 초점을 맞췄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인간이 침팬지류와의 공통의 조상에서 먼저 갈라져 나와 서로 다른 진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 600만 년 전의 일이다. 그 뒤 침팬지류는 다시 침팬지와 보노보 즉 피그미 침팬지로 갈라졌다. 현재 보노보는 자이르 강변 열대우림에서 1만 마리 이하가 생존하고 있다. 학자들은 보노보가 인간이나 침팬지보다 덜 진화해 이들 3종의 공통 조상의 원형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보노보의 세계는 여성이 중심이고, 섹스를 통해 공격성을 스스로 통제한다. 또 독재자가 아닌 평등주의자이다. 보노보의 사회 생활은 섹스를 빼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미국의 성 해방론자들 그리고 동성애자들이 ‘보노보 웨이’(bonobo way)를 외치며 보노보처럼 자유분방하고 평화적으로 살자는 주장을 할 정도다.

보노보는 남녀는 물론 남-남, 여-여, 어른-청소년 등 어떤 조합으로도 섹스를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한다. 하지만 새끼는 아주 드물게 5∼6년에 한 마리씩만 낳는다. 사람의 특징인 섹스와 생식의 분리가 보노보에게서도 나타난다. 번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섹스는 인간과 보노보만의 두드러진 행동 특징이다. 만일 섹스의 목적이 오로지 번식이라면 왜 사람들은 적게 낳고 더 많은 섹스를 즐기려 하는 것일까?

보노보는 아주 쉽게 성적으로 흥분한다. 먹이를 가져다주면 수컷은 성기가 선다. 음식이 오기도 전에 보노보들은 서로 상대방을 섹스에 초대한다. 수컷은 암컷을 암컷은 수컷이나 암컷을 초대한다. 또 사슴을 잡았거나 익은 무화과가 많은 숲을 발견해도 이들은 5∼10분 동안 섹스를 하고 난 뒤 음식을 먹는다. 음식을 둘러싼 쟁탈전을 피하기 위해 섹스를 통해 먼저 돈독한 분위기를 만들고 사이좋게 나누어 먹는 것이다.

또한 다른 어떤 유인원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보노보의 가장 전형적인 섹스 패턴은 어른 암컷 간의 생식기 문지르기이다. 이때 이들은 오르가슴을 느끼는 것처럼 소리를 지른다. 수컷은 서로 등을 돌려 엉덩이를 붙이고 음낭을 문지른다. 특히 레즈비언 섹스는 암컷의 사회 생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보노보나 침팬지의 암컷은 어른이 되면 다른 그룹으로 이주해 새끼를 낳고 동화돼 산다. 암컷의 이주는 근친교배에 의한 열성 유전을 막고, 다양한 유전자가 서로 섞여 그 종이 생존해 나가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보통 다른 집단으로 이주한 암컷 보노보는 나이 든 암컷을 한 마리 골라 성기 문지르기를 하면서 좋은 관계를 맺어 나간다.

상대가 답례를 하면 좋은 관계가 형성되고, 젊은 암컷은 그 집단의 일원으로 동화된다. 동성애가 이주자의 사회 진입을 순조롭게 하는 수단인 것이다. 그리고 새끼를 낳으면 그 젊은 암컷의 지위는 더 확고해지게 된다.

암컷 보노보는 수컷이 음식을 갖고 있으면 접근해서 섹스를 한다. 그리고는 섹스 중 음식을 달라고 높은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 빼앗아간다. 보노보 수컷은 암컷이 먼저 음식을 먹도록 양보한다.

보노보 사회의 결속력은 암컷 사이의 결합에서 온다. 암컷들은 어떤 수컷이 특정 암컷을 괴롭히면 뭉쳐서 수컷을 쫓아낸다. 반면 수컷은 암컷에 집단적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없다. 집단 내에서 어린 수컷의 지위도 보통 자기 엄마의 지위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수컷은 평생 엄마와 아주 가깝게 지낸다.

반면 일반 침팬지 사회에서는 사냥을 통해 사회적 결속력이 형성되고, 영토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수컷이 중심이 된다. 또한 보노보 암컷은 사람처럼 언제나 섹스가 가능하다. 따라서 제한된 시간 즉 발정기에 암컷을 차지하려고 수컷 간에 치열하게 벌어지는 내부 경쟁이 보노보 사회에는 거의 없다.

프란스 드 발 박사는 “보노보 사회의 섹스는 호색이나 에로틱으로 해석되기 쉽지만, 나는 일상적인 애정 표현과 같은 일종의 사교적 행위라고 표현하고 싶다”고 본다. 실제 보노보의 성 행위는 빈번하지만 성기 삽입 시간이 13초에 불과해 사람의 기준에 비하면 매우 짧다.

섹스와 번식의 분리는 긴밀한 남녀 관계와 사회의 기초인 가족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문제는 누가 이를 주도했느냐는 점이다. 흔히 여성은 섹스에 수동적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여성은 수동적이라기보다 조심스러울 뿐이다. 여성이 조심스러운 것은 10개월의 임신과 출산 뒤 보육 등 섹스 이후의 엄청난 투자 시간을 감안할 때 상대방이 능력이 있고, 이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인가를 가리기 때문이다.

침팬지보다 인간과 더 닮은 점이 많은 보노보는 여성이 적극적으로 섹스 능력을 진화시킴으로써 미숙아로 태어난 자녀를 돌보는 데 수컷의 참여를 유도해 냈고, 결국은 이것이 핵가족 형성과 질 높은 자녀 교육, 나아가서는 일부일처제에 기반을 둔 인간의 문명이 탄생하게 됐다는 이론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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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호 `발견의 즐거움`

계산주의마음이론의 반박(중국어 방)

인간의 마음이 정교한 연산장치라는 계산주의 마음이론에 대한 감성적인 반발심은 이를 비판하는 많은 이론을 낳았다. `존 설`같은 학자는 인간의 상식에 호소하는 `중국어 방(Chinese Room)`이라는 사고실험을 고안했다.


중국어를 전혀모르는 사람이 방안에 있다. 그는 문틈으로 들어오는 종이에 적힌 중국어에 어떻게 대답해야하는지 나온 두꺼운 책을 가지고 있다. 이제 중국어 원어민이 문 밖에서 종이에 중국어를 써서 방안으로 밀어넣으면 방안의 사람은 책을 보고 적절한 대답을 적어 다시 문틈으로 내보낸다. 설사 방밖의 중국인이 방안의 사람이 중국인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방안 사람의 대답이 능숙하더라도 방안의 사람은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것이잖은가?

중국어방은 엄청난 논란을 가져왔다. 수많은 논문과 인터넷 포럼이 이를 다루었다. 설의 전술은 끊임없이 상식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보시오! 지금 그 남자가 중국어를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거요?!?! 집이치우시오 그는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한다구요! 평생 미국에서 살았다니깐!"

그러나 지동설, 생명자연발생설, 진화론 등 과학의 역사는 상식이 지배하는 소박한 직관에 전혀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이 사고실험 역시 우리의 직관을 믿음으로써 빠른 연산도 이해가 아니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고 있따. 만약 설이 중국어 대답 매뉴얼을 끊임없이 업데이트하고 그 매뉴얼을 수십분의 1초만에 수행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가 중국어를 이해한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설은 단지 이해라는 단어와 관련된 사실들을 길게 나열하고 있는 것이다. 설의 사고실험은 이와 정반대의 사고실험으로 반전시키면 공정하게 반박된다.

처음부터 기계로 태어나 살아가는 생명체의 탐사선이 지구에 도착해서 인간을 관찰했다.

부하:그들은 고기(肉,flesh)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사령관:뭐? 그게 말이되는가? 우리가 탐지한 무선신호도 그들이 만들었다고?
부하:그들은 무선파를 이용해 정보를 전달하지만 그 신호는 그들이 만든 기계에서 나는 것입니다. 바로 고기가 기계를 만든 것입니다.
사령관:무슨 당치않는 소리를?!? 어떻게 고기가 기계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고통이나 행복을 느끼는 고깃덩어리의 존재를 믿으라는 소리인가?!? 뇌(기계로된)도 없는데?!
부하:아, 뇌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 뇌가 고깃덩어리였지요.
사령관:그럼 생각은 어디로 하나?
부하:뇌로합니다. 그 고기로요. 의식이 있는 고기, 사랑을 하는 고기, 꿈을 꾸는 고기입니다. 이 모든 것을 고기로 합니다. 이제 이해가 좀 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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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591p,

집에서 놀기

현대인의 여가란 대개 근무 시간 이후에 행해져야 하기 때문에, 자기가 선택한 시간에 누리기가 힘들다. 또한 사전에 준비한 계획들은 막상 큰 만족을 주지 못하며, 오히려 계획하지 않은 우연한 순간 속에서 최고의 즐거움을 만끽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집안에서 보내는 무위의 시간을 통해 사회적, 정신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무조건 나가고 보자’는 식의 외출 문화를 정면으로 공격한다는 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

게으름꾼들은 야외 활동을 부추기는 이 울적하고 요란한 메시지들을 훑어보고는 이렇게 결정한다. 저지르지 말고 그냥 있자. 밖에 나가지 말자. 움직이지 말자. 즉 집에 머물러 그냥 존재하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인테리어의 진정한 목적이란 자기 집을 꾸미는 일에 열중하도록 만드는 게 아니라, 바깥세상으로부터 벗어난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데 있다. 게으름꾼들이 자신의 내면세계에 집중함으로써, 바깥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과도 같은 원리다. 편안한 거처를 만들고 싶다면 그 공간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만들라. 온갖 최신 유행으로 가득 채운 겉만 번지르르한 전시용 공간은, 타인으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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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be idle

피부발진(여드름)에 대해서

피부발진이란 어떤 것이 경계를 뚫고 밖으로 나오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사춘기의 여드름`을 예로 들면 쉽게 실감할 수 있다. 사춘기에는 인간 내면에 있는 성적 욕구가 터져나오지만, 동시에 그것이 요구하는 사항들이 두려워서 억제된다. 그 외에도 사춘기는 갈등 상황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겉으로는 평온하게 보이는 상황에서 무의식의 심연으로부터 새로운 요구가 갑자기 분출되며, 그것은 한 인간의 의식과 생활속에서 억지로 활동할 공간을 찾아내려한다. 그러나 밀려드는 새로운 것은 친숙하지 않기 때문에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 제거하려고 하며, 그 이전의 친숙한 상태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일어나고 있는 어떤 일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갈등의 한가운데에 놓인다. 이 새로운 것의 매력과 그것에 대한 불안은 거의 똑같은 힘으로 작용한다. 모든 갈등들은 이 모델에 따라 진행되며 다만 준제만 달라질 뿐이다. 사춘기의 주제는 성적 욕구, 사랑, 배우자가 된다. 반대극의 타자를 향한 동경이 늘어난다. 그들은 자신에게 없는 것과 접촉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감히 용기를 내지 못한다. 성적 공상들이 생겨나지만, 그들은 그것을 부끄러워한다. 이러한 갈등이 염증으로 변해서 피부에 나타난다는 사실은 분명 납득이 간다. 왜냐하면 피부는 타자를 만나기 위해서 극복해야만하는 자아의 경계임과 동시에 타자를 만지고 쓰다듬을 수 있는 접촉기관이기 때문이다.

이 뜨거운 주제때문에 사춘기 소년들의 피부는 염증을 일으킨다. 염증은 내면의 어떤 것이 지금까지의 경계를 무너뜨리기를 원하며 내면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뿐아니라 새로운 것이 뚫고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노력, 새롭게 일꺠워진 충동에 대한 불안도 보여준다. 여드름을 통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보호한다. 왜냐하면 여드름은 남들과 쉽게 만나지 못하게 만들며, 성적 욕망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악순환이 생겨난다. 인식되지 못한 성적 욕망은 여드름의 모습으로 피부에 나타난다. 그리고 여드름은 섹스를 방해한다. 유혹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억제되면 그것은 피부를 자극하는 것으로 변한다. 섹스와 여드름이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는 그것이 나타나는 부위에 명확히 드러난다.

여드름은 오직 얼굴에만 나타나며, 소녀들에게는 어깨와 가슴의 노출부위에도 나타난다.(때로는 등에도 난다) 나머지 피부 부분에는 여드름이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적 욕구에 대한 부끄러움이 여드름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많은 의시들이 여드름 치료를 위해 피임약을 처방해서 좋은 성과를 본다. 이 효과의 상징적인 배경은 명확하다. 피임약은 몸속에서 임신을 한 것처럼 믿게 만들며, 또한 동시에 `그 일`이 이미 벌어졌다고 믿게 만든다. 여드름은 이제 더 이상 저지할 것이 없기 때문에 사라진다.

일광욕을 하면 여드름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반면에 몸을 감추면 감출수록 여드름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다. 제 2의 피부로서 옷은 거리를 두고 손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강조하는 반면, 옷을 벗는 것만으로도 이미 자신을 열어놓는 것의 첫 단계가 된다. 간절히 바라면서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타인의 체온을 햇빛은 위험하지 않은 방식으로 대신 경험하도록 해준다. 결국 성적 욕망을 인식하는 것이 여드름을 치료하는 최상의 수단이다.

사춘기의 여드름에 관한 설명은 대체적으로 거의 모든 피부발진에도 통용된다. 발진은 억제된 것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억압의 경계를 뚫고 나오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발진을 통해 지금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어떤 것이 나타난다. 이것은 어떠면 홍역, 성홍열, 홍진과 같은 거의 모든 소아질별이 왜 피부를 통해 드러나는지에 대한 이유도 설명해줄 것이다.

소아질별이 나타날 때마다 아이들의 생활에서 새로운 것이 발현되며, 그 때문에 모든 소아질병은 진전단계가 혹독하다. 피부발진이 심할 수록 소아병의 경과는 더욱 급속하게 진행된다. 뚫고 나오는 것이 성공한 것이다. 아기들에게 나타나는 영아습진은 자녀를 충분히 접촉하지 않았거나 정서적으로 등한시할 경우에 나타난다. 영아습진은 이 보이지 않는 장벅을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고립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다. 주부습진은 엄마들이 자녀를 마음속으로 혐오하는 이유를 인과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자주 이용된다. 대부분 스스로 깨끗한 피부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특별히 `우아한` 엄마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자주 발생하는 피부병들 중의 하나는 `건선`이라고도 불리는 마른 버짐이다 이것은 경계가 뚜렷하고, 원반 내지 평면 모양을 보이며, 은백색의 비늘로 덮여있다. 비부의 자연적 각질이 마른버짐에서는 도를 넘어선 것이다. 마른 버짐은 동물의 갑각조직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는 피부의 자연적인 보호기능이 갑각으로 둘러싸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마른버짐이 있는 사람들은 모든 방향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그들은 어떤 것도 받아들이거나 내보내려 하지 않는다. 이 심리적인 거부와 고립의 경과를 라이히는 `성격갑각`이라고 불렀다. 모든 종류의 방어 이면에는 `상처를 입게되는 것`에 대한 불안이 숨겨져 있다. 어떤 사람의 방어가 더 심하고 갑각이 더 두꺼울수록, 내면의 민감성과 상처에 대한 불안은 더욱 더 크다.

우리가 어떤 갑각류의 껍질을 벗기면, 무방비 상태의 연약하고 상하기 쉬운 모습을 대하게 된다. 어떤 것도 자신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가장 예민한 사람들이다. "거친 껍질 속에는 대부분 말랑말랑한 알맹이가 들어있다."는 격언도 이러한 경험을 의미한다. 그러나 상처받기 쉬운 영혼을 갑각을 사용해서 보호하려는 노력은 비극적 운명을 지니고 있다. 비록 갑각이 상하고 다치지 않도록 보호해주기는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사랑과 온정마저도 `막아버린다`. 사랑은 자산을 열어놓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방어를 취약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갑각은 영혼을 생기의 흐름으로부터 차단하며 갑갑하게 만든다. 그리고 불안은 더욱 더 늘어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진다. 인간은 귾임없이 두려워하고 방어하기만 할 것이아니라, 영혼이 상처를 입는 것을 그냥 버려두어야만 한다. 그래야 영혼이 그것때문에 파멸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된다. 경이로운 것을 경험할 수 있기 위해서는 상처받기 쉬워져야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조처는 오직 운명이나 심리치료와 같은 외부의 압박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상처받기 쉬운 민감함과 갑각을 두르는 것의 연관성을 상세하게 설명한 이유는 마른 버짐이 신체의 영역에서 이 연관성을 인상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마른 버짐은 피부의 생살을 드러나게 하고, 갈라지고 상처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피부는 감염될 위험이 높아진다. 우리는 여기서 극과 극이 어떻게 서로 맞닿아 있는지 알게된다. 그리고 갈라터진 부위와 갑각이 동경과 불안 사이의 갈등을 얼마나 명확하게 꺠닫게 해주는지도 알게된다. 마른버짐은 팔꿈치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잦다. 팔꿈치를 이용하여 우리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다. 팔꿈치로 몸을 받친다. 바로 이 부위에서 조직 경화증이 쉽게 갈라처지는 부분이 나타난다. 마른버짐의 경우에 멀리하고 격리하는 것이 절정에 달했기 때문에, 마른버짐은 그 환자를 신체적으로 다시 `개방되고 상처입기 쉽게`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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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癌)에 대해서

한 인간은 인류의 일부이며, 한 인간은 각 기관들로 이루어져 있고 각 기관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이 위계조직은 국가사회와 비슷하다. 모든 복합적인 조직들(인류, 국가, 세계기구)는 모든 각 부분들이 공동의 이념에 순응하고 도움이 되는 것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대부분의 조직체는 몇몇 소수의 구성원이 탈퇴하거나 반역한다해도 잘 극복해나갈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심해지면 전체의 생존기반이 위험해진다.

오로지 국가적 입장에서 볼 때는 이들 반락세력들은 악하다. 그러나 기존질서에 항거하는 사람들은 이와는 다른 논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또한 마찬가지로 합리적이다. 입장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국가는 복종을 원하고, 집단들은 자신의 견해를 실현할 자유를 원한다. 양측의 희생없이 동시에 목적을 실현시키기는 쉽지않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암이라는 사안을 다른 영역을 통해 설병하려는 것이다. 위의 이야기를 잘 이해해야 암을 고찰하는 지금까지의 편협한 시각을 넓혀줄 수 있다. 암은 다른 병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독극물과 같이 외부에서 들어온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일어난다. 점점 더 많은 기존의 세포들이 태도를 바꾸고 꾸준히 확대작업을 일으킨다.

왜 기존의 세포는 몸전체에 헌신했던 기존의 태도를 바꾸는 것일까? 그 동기는 쉽게 공감할 수 있다. 다세포 동물인 인간의 충직한 일원이었던 암세포는 단지 이 다세포 동물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정해진 활동만 수행하면 되었다. 하지만 언젠가 세포 자신의 독자적인 발전을 위한 토대를 잃었다. 세포는 단세포 시절 만끽하던 자유를 잃었으며 언젠가는 사멸할 운명이되었다. 그가 독자적으로 꿈을 이루기 위해 단세포 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그리 이해못할 일이 아니다. 순간 이 세포는 지금까지 공동으로 지내던 집단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가차없이 자신의 자유를 추구하기 시작한다.

이 계획은 일단은 성공적이나 그 폐혜는 아주 오랜 기간이 지난후에 나타난다. 암세포의 행동은 인간이 숙주로서 살아있어야만 성공적이다. 죽음은 암의 발전에 있어서도 종말이다. 이 둘은 모두 생존하고 싶어하고 그를 위해서 둘중의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울 각오가 되어있다. 인간은 자신이 할 수 있는한 계속 반복해서 암세포를 수술로 제거하고 방사선을 쪼이고 항암제를 복용한다. 그런데 이것은 마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과 비슷하지 않은가? 아니 어쩌면 내가 국가에 반역할 수도 혹은 반역자를 처단하는 일을 하고는 있지 않은가?

여기에 암에 걸리는 데 대한 해답이 들어있다. 오늘날 그토록 열심히 암을 퇴치하려고 함에도 별 성과가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심지어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의 수명이 치료를 받지 않은 환자보다 더 짧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암은 이시대와 우리의 집단적인 세계상의 표현이다. 즉 우리는 스스로 내면에서 암이라고 인식하는 것만 암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 자기자신의 이해관계를 무자비하게 확장하고 실현하고자하는 욕망을 경계해야한다. 바로 그것이 암이다.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그리고 개인의 활동에서 인간은 자신의 목표와 이익을 확장하려고 노력하며(암발생) 도처에 이해관계의 거점을 확보하고(암전이), 오직 자기자신의 생각과 목표만 관철시키려고 노력한다.(암성장) 이때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자기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이용한다.(기생)

편두통에 대해서

긴장으로 인한 두통은 편두통에도 통용되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긴장으로 인한 두통환자가 자신의 머리를 몸에서 분리하려고 한다면 편두통 환자는 신체의 문제를 머릿속으로 옮겨놓고 그것을 머릿속에서 인식하려고 한다.

이 문제는 다름아닌 성욕이다. 편두통은 머리속으로 밀려들어간 성욕이다. 머리의 기능이 성기의 기능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렇게 기능이 바귀는 것은 엉뚱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생식기 부위와 머리는 유사한 연관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인간의 몸이 외부로 통하는 구멍들을 모두 담고 있는 신체부위들이다. 이 구멍들은 섹스를 할 때 포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항간에서는 이전부터 여성의 입을 질, 남성의 코를 남근과 연관시키고 있으며, 이 대응되는 것들 중의 하나에서 다른 하나를 유추하려고 했다.

오럴 섹스에서도 성기와 머리의 관계 그리고 그것들을 서로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은 명확하다. 머리가 성기의 대용으로 얼마나 자주 사용되는 지는 얼굴이 빨개지는 것에서 명확히 볼 수 있다. 성적으로 수치스러운 상황에서 피는 머리 쪽으로 몰려들고 얼굴을 붉게 만든다.

편두통 환자들은 여자들인 경우가 더 많으며 성생활에 문제가 있다. 편두통 발작은 머리속에서 일어나는 오르가즘이다. 진행과정은 동일하며 다만 장소가 윗부분에 있을 뿐이다. 성기에 피가 몰리다가 긴장이 이완단계로 바뀌듯이 편두통도 피가 머리로 몰려가서 압박감이 생기고 긴장이 풀린다. 마치 오르가즘 이후의 현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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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르그 달케,

사고(accident)에 대해서

얼핏 외부에서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늘 있다. 우리는 이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하며 우연성에 기댄다. 정말 그럴까?

감기를 걸리면 우리는 바이러스를 원인으로 여긴다. 자동차 사고에서는 음주운전자를 원인으로 생각한다. 흔히들 `몸에서` 질병의 원인을 찾아앤느 것과 같이 우리는 `외부에서` 사고의 원인을 찾아내는데 익숙하다.

그러나 사고가 일어나는 동기가 무의식적인 것이라는 인식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다. 프로이트는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에서 실언, 망각, 건망증과 같은 과오들 외에, 사고도 무의식이 의도한 결과로 설명한 적이 있다. 그때부터 심신상관 연구는 통계학적인 면에서도 소위 `사고를 일으키는 인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이것은 자신들의 갈등을 사고의 형태로 처리하는 경향이 있는 특이한 인격체를 말한다.

1926년에 이미 독일의 심리학자  K. 마르베는 `사고와 경영손실의 현장 심리학`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관찰결과를 발표했다. 사고를 당한 사람은 한번도 사고를 당한적이 없는 사람보다 또 다른 사고를 당할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이다.

1950년에 발행된 심신상관 의학의 기본적인 토대가 되는 알렉산더의 저서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미국 코네티컷 주의 한 대기업이 자사 트럭 사고에 대한 한 조사에서 6년간에 걸쳐 사고에 연루된 모든 운전자들 중에 전체의 3.9%밖에 되지 않는 작은 집안에게서 전체 사고의 36.4%가 일어났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회사는 사고에 대한 조치로서 각 운전자들의 사고이력을 조사해서 그중 가장 사고를 많이 당한 사람을 다른 부서로 발령했다. 이를 통해 사고빈도를 처음 수치의 20%수준으로 낮출 수 있었다. 이 조사결과의 놀라운 결과는 타부서로 발령받은 다사고 운전자들은 운전업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고일으키는 습관을 새로운 일자리에서도 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고에는 어떤 의도적인 요인이 포함되어있으며 다만 인식되지 않을 뿐이다. 대부분 사고의 동기는 무의식적이다.`

한인간의 인생에서 사고가 빈발하면 이는 그가 자신의 문제점을 의식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사고를 통해 강제교정하려했다는 사실을 나타낼 수 있다.

추월사고나 과속은 성급한 마음을, 보행자를 치었다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간과하는지를, 졸음운전이나 음주운전은 평소에도 정신을 차려야할 것이다.

The Future Of success... Prolog

우리들 대부분이 25년전 우리 부모세대보다 더 많은 돈을 벌면서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 이제 더 잘살게 되었으니 일 이외의 것에 더 많은 관심을 쏟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과거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에 매달려 있으며 일이 아닌 삶을 위해 쓰이는 시간과 에너지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

왜 이래야만 할까?  돈을 더 많이 벌어 더 잘살게 되었는데 왜 개인적인 삶은 더 빈곤해지는 것일까? 물질적으로 벌어들인 것을 일 이외의 삶을 더 윤택하게 하는 쪽으로 더 많이 투자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는 경제공황이 극에달했던 1930년 희망적인 예언을 했다.

"앞으로 100년후 영국은 경제적으로 여덟배는 더 잘살게 될 것이며 따라서 원하는 사람은 1주일에 15시간만 일하면 될 것이다. 물질적인 욕구도 완벽하게 충족되기 떄문에 돈을 좋아하는 것이 사회적인 지탄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

2030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훨씬 더 풍요로워질 것이라는 예측은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일하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예측은 틀릴 가능성이 높다.

물론 모든 사람이 25년전과 비교해 훨씬 더 잘산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아무 변화가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어쩔수 없이 과거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있다. 묘하게도 부자가 되면 될수록 더 오랜 시간 일을 하며, 또 일을 하지 않을 때조차도 잠시도 일에 대한 생각에서 해방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필사적으로 일에 매달리면 더 잘살게 될 수도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잘살게 되면 더 필사적인 모습을 띠게되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일과 삶의 나머지 부분이 균형을 이룬 삶을 진정으로 원하고 있으나 현실속의 이들은 정반대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왜일까?

현재 부상하는 신경제는 전례없을 정도의 많은 기회를 소비자에게 제공한다. 인류역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기회가 찾아온 적은 없었다. 이모든 것의 원동력은 기술발전이었고 그 발전 속도는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빨라지고 있다. 기술의 발달은 판매자의 경쟁을 격화시키고 기업은 살아남기위한 비용절감, 부가가치의 창조, 신제품 개발 등의 면에서 대폭적인 개선책을 꾸준히 마련해야한다.

경제적으로 이러한 것이 우리에게 큰 득이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과연 우리 삶의 나머지 부분에도 같은 의미를 지닐까?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변함없는 관계, 한결같은 모습, 그리고 안정된 상태에 크게 좌우되는 삶의 나머지 부분에 심각한 문제를 안겨주고 있다. 어떤 음모자가 꾸민일이 아니다. 구매자로서, 그리고 판매자로서 우리는 스스로가 삶에 더욱더 필시적인 모습을 띠게되는 것이다.

남보다 더 부자가 되느냐 아니면 상대적으로 더 가난해지느냐, 주거여건이 더 나은 곳에서 사느냐 아니냐, 내 자식이 좋은 성적을 받아왔냐 아니냐 등의 이해관계가 점점 커지면서 우리는 승자의 대열에 속하고 자식들에게도 안전하게 그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다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그러고 싶어할까?' --- 이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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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uture Of success... Prolog

삶과 지성에 대하여

-모든 신전은 마땅히 참배자들에게 개방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 신전이라는 게 뭡니까? 예배하는 곳이자, 인간의 마음이 생객해 내었고 인간의 손이 돌로 새긴 이미지인 신의 상징이 있는 곳입니다. 그 돌, 그 상은 신이 아니지요? 그렇지요? 그건 상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징이란 햇빛 아래 선 우리들의 그림자 같은 것이고요. 그림자는 우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신전 안에 있는 이 상, 이 상징은 신이 아닙니다. 진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신전에 들어가든 안 들어가든 그게 뭐 대수로운 일입니까? 뭣 때문에 그런 일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합니까?

진리는 마른 나뭇잎 아래 있을 수 있습니다. 길 옆의 돌에도 깃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석양을 되비추는 수면에, 구름에 짐을 지고 가는 여인의 미소에도 깃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도처에 실체가 있는데 무엇하러 신전에 들어갑니까? 대체로 보아 신전에는 신이나 진리가 '없습니다'. 신전은 인간이 두려움에 못 이겨서 만든 것일 따름입니다. 신전은 안전을 도모하자는 욕심, 종파와 계급 간의 분열을 그 바탕으로 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사는 인류입니다. 신을 찾기 위해서라면 신전은 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전은 인류를 분열시키니까요. 기독교의 교회, 최고의 모스크, 힌두교의 사원. 이 모든 신전이 인류를 분열시킵니다. 따라서 신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이런 곳에서 볼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든 신전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질문은 정치적인 문제에 해당합니다. 현실성이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환경과 싸우고 있는데도 우리의 삶에 평화가 있을 수 있는 것인지요?

크리슈나무르티 : 환경이란, 원래 싸워야 할 상대가 아니던가요? 환경이란, 허물어뜨려야 할 대상이 아니던가요? 부모님의 믿음, 여러분의 사회적 배경, 여러분의 관습, 여러분의 먹는 음식의 종류, 종교, 사제, 부자와 가난한 사람 등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과 사물들,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환경입니다. 그렇다면 의문을 제기하고 저항함으로써 마땅히 이 환경을 허물어뜨려야 하지 않겠어요? 환경에 저항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고만 있으면 평화롭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의 평화입니다. 반면에 이 환경의 틀을 부수려 몸부림치고, 무엇이 참인지 스스로 찾아 내려고 애를 써 보십시오. 여러분은 괴어 있는 평화가 아닌, 말하자면 죽음의 평화와는 전혀 다른 평화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환경과의 싸움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싸워야 합니다. 따라서 평화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을 환경을 이해하고 환경과 싸우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평화가 옵니다. 그러나 환경을 수용하면서 평화를 찾는다면 여러분의 의식은 잠들고 맙니다. 그것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시절부터 저항에 길들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저항하지 않으면 썩을 뿐입니다.


-진짜 삶이란 무엇이죠?

크리슈나무리티 : 참 삶이란 무엇이냐, 조그만 소년이 내게 이 질문을 했습니다. 놀고, 맛있는 걸 먹고, 달리고, 뛰고, 밀고, 이것이 소년에게는 진짜 삶일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우리는 삶을 진짜와 가짜로 나누고 있습니다. 전존재를 던져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진짜 삶이라고 일컫을 수 있겠지요. 따라서 내적 갈등도 없고, 하고 싶어 하는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의 다툼도 없는 삶입니다. 이때 삶은 완벽한 통합 과정에 듭니다. 이 과정의 삶은 무척이나 즐겁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도 의존하지 않을 때, 완전한 내적 초월 상태에 들었을 때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할 수 있을 가능성은 이럴 때만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총체적인 자기 혁명 상태에 든다면 정원을 손질하든, 국무총리가 되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때 여러분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든 다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독창성이라는 아주 엄청난 감정은 바로 이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싸웁니까?

크리슈나무르티 : 사내아이들은 왜 싸웁니까? 여러분은 이따금 동생과도 싸우고, 여기 있는 친구들과도 싸우지요? 왜요? 여러분은 장난감을 놓고 싸웁니다. 다른 아이가 공을 빼앗아 갔다고 해서 혹은 책을 가지고 갔다 해서 여러분은 싸움질합니다. 어른들도 똑같은 이유로 싸웁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아이들의 장난감이 어른의 경우에는 지위, 부, 권력이 되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은 권력을 원한다, 나 역시 원한다, 그러면 우리는 싸웁니다. 국가 간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전쟁이란 이렇게 단순한 것인데도 철학자, 정치가, 종교인들은 괜히 복잡하게 말합니다. 이것 보세요.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갖추고도 (삶의 넉넉함, 실존의 아름다움, 투쟁, 정신적 고통, 웃음, 눈물을 이해하고도) 마음을 단순하게 쓴다는 것은 대단한 기술이 없으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법을 알 때 비로소 여러분은 마음을 단순하게 쓸 수 있습니다.


-몸이 죽은 뒤에도 영혼은 살아 있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 정말 알고 싶습니까? 어떻게 알아 낼 생각입니까? 영혼에 대한 샹카라나 부처나 예수의 말씀을 읽어서요? 여러분이 섬기는 지도자나 성자의 말씀을 들어서요? 그 사람들 모두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잖아요? 이런 걸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말하자면 당신의 마음은 의문을 제기할 입장에 놓여 있습니까?

먼저, 육체의 사후에도 살아 있을, 그 영혼이라는 게 있는지 없는지 한번 따져 보아야겠군요. 영혼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아니면, 단지 영혼이라는 게 종교의 사제, 특정 서적, 문화 환경으로부터 영혼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를 받아들였습니까?

'영혼'이라는 말은 단지 물질적 실존 너머 존재하는 것이란 뜻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육체, 성격, 성향, 덕성 같은 것은 아시다시피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초월해서 영혼이라는 게 있다 이거죠. 그런 상태가 정말 존재한다면 이것은 정말 영적인 것,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 영적인 것이 죽음을 초월해서 존재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게 질문의 한 부분입니다.
이 질문의 다른 한 부분은, 죽음이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사후에도 존재하는 게 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짜 중요한 질문은 살아 있으면서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느냐는 거지요. 누가, 사후의 삶이 있다거니 없다거니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당신은 여전히 모릅니다. 하지만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죽어 본 다음에 아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건강하고 힘차게 살면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역시 교육이 해야 할 일의 일부분입니다.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수학, 역사, 지리에 능통해지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이 죽음이라는 엄청난 것을 이해할 능력도 기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해하되, 육체적으로 죽은 다음에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에, 웃고 나무에 오르고 배를 젓고 헤엄치고 할 수 있는 동안에 이해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죽음이란 미지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동안에 이 미지의 것들을 아는 일입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삶과 지성에 대하여」중

법륜스님 주례사

오늘 두 분이 좋은 마음으로 이렇게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는데, 이 마음이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 앉아 계신 분들 결혼식장에서 약속한 것 다 지키고 살고 계십니까?

이렇게 지금 이 자리에서는 검은머리가 하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거나,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서로 돕고 살겠는가 물으면, "예" 하며 약속을 해놓고는 3일을 못 넘기고 3개월, 3년을 못 넘기고 남편 때문에 못살겠다, 아내 때문에 못살겠다 이렇게 해서 마음으로 갈등을 일으키고 다투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결혼하기를 원해 놓고는 살면서 “아이고 괜히 결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하는 게 나았을걸“ 후회하는 마음을 냅니다. 그럼 안 살면 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약속을 해놓고 안 살수도 없고 이래 어영부영하다가 아이가 생기니까 또 아이 때문에 못하고, 이렇게 하면서 나중에는 서로 원수가 되어 가지고, 아내가 남편을 “아이고 웬수야” 합니다.

이렇게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고생 고생하다가 나이 들면서 겨우 포기하고 살만하다 싶은데, 이제 또 자식이 애를 먹입니다. 자식이 사춘기 지나면서 어긋나고 온갖 애를 먹여 가지고, 죽을 때까지 자식 때문에 고생하며 삽니다. 이것이 인생사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결혼할 때는 다 부러운데, 한참 인생을 살다보면 여기 이 스님이 부러워, “아이고 저 스님 팔자도 좋다” 이렇게 됩니다. 이것이 거꾸로 된 것 아닙니까? 스님이 되는 것이 좋으면 처음부터 되지, 왜 결혼해 살면서 스님을 부러워합니까?  이렇게 인생이 괴로움 속에 돌고 도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제가 그 이유를 말할 테니, 두 분은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처럼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로 이렇게 좋아서 결혼하는데 이 결혼할 때 마음이 어떠냐? 선도 많이 보고 사귀기도 하면서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이것저것 따져보는데, 그 따져보는 그 근본 심보는 덕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돈은 얼마나 있나, 학벌은 어떻나, 지위는 어떻나, 성질은 어떻나, 건강은 어떻나, 이렇게 다 따져 가지고 이리저리 고르는 이유는 덕 좀 볼까 하는 마음입니다. 손해볼 마음이 눈꼽 만큼도 없습니다. 그래서 덕볼 수 있는 것을 고르고 고릅니다. 이렇게 골랐다는 것은 덕보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 아내는 남편에게 덕보고자 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덕보겠다는 이 마음이, 살다가 보면 다툼의 원인이 됩니다.

아내는 30%주고 70% 덕보자고 하고, 남편도 자기가 한 30%주고 70% 덕보려고 하니, 둘이 같이 살면서 70%를 받으려고 하는 데 , 실제로는 30%밖에 못 받으니까 살다보면 결혼을 괜히 했나 속았나 하는 생각을 십중팔구는 하게 됩니다. 속은 것은 아닌가, 손해봤다는 생각이 드니까 괜히 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덕보려는 마음이 없으면 어떨까? 좀 적으면 어떨까요? “아이고 내가 저분을 좀 도와줘야지, 저분 건강이 안 좋으니까 내가 평생 보살펴 줘야겠다. 저분 경제가 어려우니 내가 뒷바라지 해줘야겠다, 아이고, 저분 성격이 저렇게 괄괄하니까 내가 껴안아서 편안하게 해줘야겠다.” 이렇게 베풀어줘야겠다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면, 길가는 사람 아무하고 결혼해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덕보겠다는 생각으로 고르면, 백 명 중에 고르고 또 고르고 해도, 막상 고르고 보면 제일 엉뚱한 걸 고른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옛날 조선시대에는 얼굴도 안보고 결혼해도 잘 살았습니다.
시집가면 죽었다 생각하거든. 죽었다 생각하고 시집을 가보니 그래도 살만하니까 웃고 사는데, 요새는 시집가고 장가가면 좋은 일이 생길까 기대하고 가보지만 가봐도 별 볼 일이 없으니까, 괜히 결혼했나 후회가 됩니다. 결혼식하고 며칠 안 돼서부터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하기 전부터 후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 신랑신부 혼수 구하러 다니다가 의견차이가 생겨서 벌써 다투게 됩니다. 안 했으면 하지만 날짜 잡아놔서 그냥 하는 사람들도 제가 많이 봅니다.

오늘 이 자리의 두 사람이 여기 청년 정토회에서 만나서 부처님법문 듣고 했으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부터는 덕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내가 아내에게, 내가 남편에게 무얼 해줄 수 있을까, 내가 그래도 저분하고 살면서 저분이 나하고 살면서 그래도 좀 덕봤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줘야 않느냐, 이렇게만 생각을 하면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심보를 잘못 가져놓고 자꾸 사주팔자를 보려고 합니다. 궁합본다고 바뀌는 게 아닙니다. 바깥 궁합 속 궁합 다보고 삼 년을 동거하고 살아봐도 이 심보가 안 바뀌면 사흘 살고 못삽니다. 그러니 이 하객들은 다 실패한 사람들이니까 괜히 둘이 잘살면 심보를 부립니다. 남편에게 “왜 괜히 바보같이 마누라에게 쥐어 사나, 이렇게 할 것 뭐 있나”하고, 아내에게는 “니가 왜 그렇게 남편에게 죽어 사나, 니가 얼굴 이 못났나 왜 그렇게 죽어 사노” 이렇게 옆에서 살살 부추기며, 결혼할 땐 박수를 치지만 내일부터는 싸움을 붙입니다.

이런 말은 절대 들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실패한 사람들이 괜히 심술을 놓는 것입니다. 남이 뭐라고 해도 나는 남편에게 덕되는 일 좀 해야 되겠다. 남이 뭐라 그러던, 어머니가 뭐라 그러던 아버지가 뭐라 그러던, 누가 뭐라 그러던 나는 아내에게 도움이 되는 남편이 되어야겠다 이렇게 지금 이 순간 마음을 딱 굳혀야 합니다.

괜히 애까지 낳아놓고 나중에 이혼한다고 소란 피우지 말고 지금 생각을 딱 굳혀야지, 그렇게 하시겠어요? 덕 봐야 돼요? 손해 봐야돼요? “손해보는 것이 이익이다” 이것을 확실하게 가져야 합니다. 오늘 두분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반성 좀 해야합니다.

이렇게 두 분의 마음이 딱 합해지면, 어떻게 되느냐, 아내의 오장육부가 편안해집니다. 이 오장육부가 편해지면 어떻게 되느냐, 임신해서 아이를 갖게 될 때 영가들도 죽을 때 초조 불안해 죽은 귀신도 있고, 편안하게 도 닦다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편안한 데는 편안한 게 인연을 맺어오고, 초조 불안하면 초조 불안한 것이 딱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것을 잉태라고 합니다. 태교가 아니고, 잉태할 때 여자가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잉태를 하면 선신을 잉태하고, 심보가 안 좋을 때 잉태를 하면 악신을 잉태합니다. 처음에 씨를 잘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결혼해 가지고 덕보려고 했는데 손해를 보니까, 심사가 뒤틀려 있는 상태에서 같이 자다보니 애가 생깁니다. 기도하고 정성 다해서 애가 생기는 것이 아니고, 그냥 둘이 좋아 가지고 더부덕덥덥 하다보니까 애가 생겨버립니다. 그러니 이게 처음부터 태교가 잘못됩니다. 이렇게 잉태해 가지고는 성인 낳기는 틀린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밥 먹고 짜증내고 신경질 내면, 나중에 위를 해부해보면 소화가 안되고 그냥 있습니다. 이 자궁이라는 것은 어머니의 오장육부하고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짜증을 내면 오장육부가 긴장이 되어있습니다. 안에 있는 아이가 늘 긴장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선천적으로 신장질환이 생기든지 아이가 불안한 마음을 갖습니다. 엄마가 편안한 마음을 갖고 있고 원기가 늘 따뜻하게 돌고, 아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 아이는 나중에 태어나도 선천적으로 도인처럼 편안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어떻든, 세상이 어떻든 애를 가진 이는 편안해야 합니다. 편안하려면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내가 편안한 것은 누구의 영향을 받느냐 바로 남편의 영향을 받습니다. 남편이 애는 좋은 애를 낳고 싶으면서 아내를 걱정시키면 좋은 아이를 낳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애를 가졌다고 하면 집에 일찍 들어오고, 나쁜 것은 안 보여주고, 늘 아껴주고 사랑해줘서 거들어 줘야합니다. 시어머니들도 손자는 좋은 것을 보고 싶은데, 며느리를 볶으면 손자가 나쁜 애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며느리가 편안하도록 해줘야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본인이 편안한 것이 제일 좋고, 주위에서도 이렇게 해줘야합니다.

이렇게 정신이 중요하고, 두 번째는 음식을 가려먹어야 합니다. 육식을 조금하고 채식을 많이 하고, 술 담배를 멀리하고 이렇게 해야 애가 좋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아이를 낳은 후에 아무것도 모른다고 둘이서 서로 싸운다면 안됩니다. 한국에서 태어나면 한국말 배우고, 미국에서 태어나면 미국말 배우고, 일본에서는 일본말 배우고, 원숭이 무리에서 자라면 원숭이 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어릴 때 부모가 하는 것을 그대로 본받아서 아이의 심성이 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조그만 하다고 모를거라고 애를 옆에 두고 둘이서 짜증내고 다투면, 사진 찍듯이 그대로 아기 심성이 결정이 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술 주정하고 그러면 아이가 나는 크면 절대로 그렇게 안 할거야 하지만 크면 술 주정합니다. 다투는 집에서 태어나면 자기는 크면 절대로 다투지 않겠다고 하지만 크면 다투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로 모방해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이를 낳으려면 직장을 다니지 말아요. 아니면 3년은 직장을 그만두어요. 아니면 아이를 업고 직장에 나가든지. 이렇게 해서 아이를 우선적으로 해야합니다.

아이를 우선적으로 하려면 아이를 낳고, 안 그러려면 안 낳아야 합니다. 안 그러면 아이가 복 덩어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인생을 망치는 고생덩어리가 됩니다. 애 때문에 평생 고생하고 살게됩니다. 3년까지만 하면 과외 안 시켜도 괜찮고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제 말 잘 들으십시오. 이렇게 안 하려면 낳지를 말고 낳으려면 반드시 이렇게 하십시오. 그래야 나도 좋고 자식도 좋고 세상도 좋습니다. 잘못 애 낳아서 키워놓으면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반드시 이것을 첫째 명심하십시오. 가정에서 이것이 첫째입니다.


두 번째,
제가 신도 분들 많이 만나보면, 애 때문에 시골 살면서 남편 떼어놓고 애 데리고 서울로 이사가는 사람, 애 데리고 미국에 가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절대 안됩니다. 두 부부는 아이가 세 살 때까지만 애를 우선적으로 하고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남편은 아내, 아내는 남편을 우선으로 해야합니다. 아이는 늘 이차적으로 생각하십시오. 대학에 떨어지든지 뭘 하든지 신경 쓰지 마십시오. 누가 제일 중요하냐, 아내요 남편이 첫째입니다. 남편이 다른 곳으로 전근가면 무조건 따라 가십시요. 돈도 필요 없습니다. 학교 몇 번 옮겨도 됩니다.

이렇게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중심으로 놓고 세상을 살면 아이들은 전학을 열 번 가도 아무 문제없이 잘삽니다. 그런데 애를 중심으로 놓고 오냐오냐하면서 자꾸 부부가 헤어지고 갈라지면, 애는 아무리 잘해줘도 망칩니다. 여기도 그렇게 사는 사람 있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정신차리십시오. 제 얘기를 선물로 받아 가십시오. 이렇게 해야 가정이 중심이 서고 가정이 화목해집니다. 이렇게 먼저 내가 좋고 가정이 화목한 것을 하면서 내가 사는 세상에도 기여를 해야합니다. 우리만 잘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늘 내 자식만 귀엽게 생각말고, 이웃집 아이도 귀엽게 생각하고, 내 부모만 좋게 생각하지 말고 이웃집 노인도 좋게 생각하고, 이런 마음을 내면 어떠냐, 내가 성인이 되고 자식이 좋은 것을 본받습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불효하고 자식에게 정성을 쏟으면 반드시 자식이 어긋나고 불효합니다. 그런데 늘 자식보다는 부모를, 첫째가 남편이고 아내고, 두 번째는 부모가 돼야 자식의 교육이 똑바로 됩니다. 애를 매를 들고 가르칠 필요 없이, 내가 늘 부모를 먼저 생각하면 자식이 저절로 됩니다. 그러니까 애를 키우다 나중에 저게 누굴 닮아 그러나 하면 안됩니다. 누굴 닮겠습니까?. 둘을 닮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나쁜 인연을 지어서 나쁜 과보를 받아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반드시 인연을 잘 지어서 처음에 조금만 노력하면 나중에 평생 편안하게 살수 있습니다. 두 부부는 서로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려고 해야합니다. 자식을 낳으려면 잉태 할 때와 뱃속에 있을 때, 세살 때까지가 중요하니 마음이 편안해야 하고 부부가 화합해야 합니다. 주로 결혼해서 틈이 생길 때 애가 생기고, 저 남자와 못살겠다 할 때, 아이를 키우기 때문에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부모에게 저항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가 중학교까지 잘 다니다가 고등학교 가더니 그렇다, 친구 잘못 사귀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그러니 이미 아이가 그렇게 되었거든 지금 엎드려서 참회를 하여야 고쳐집니다. 지금 이 부부는 안 낳았으니까 반드시 그렇게 낳아야 합니다.


세 번째,

남편을 아내를 서로 우선시 하고 자식을 우선시 하지 않습니다. 첫째가 남편이나 아내를 우선시하고 둘째가 부모를 우선시하지, 남편이나 아내보다도 부모를 우선시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옛날 이야기입니다. 일단 아내와 남편을 우선시 할 것, 두번째 부모를 우선시 할 것, 세번째 자식을 우선시 할 것, 이렇게 우선 순위를 두어야 집안이 편안해집니다. 그러고 나서 사회의 여러 가지도 함께 기여를 하셔야 합니다. 이러면 돈이 없어도 재미가 있고, 비가 세는 집에 살아도 재미가 있고, 나물 먹고 물 마셔도 인생이 즐거워집니다. 즐겁자고 사는 거지 괴롭자고 사는 것이 아니니까, 두 부부는 이것을 중심에 놓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남편이 밖에 가서 사업을 해도 사업이 잘되고, 뭐든지 잘됩니다.

그런데 돈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권력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자기 개인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자기 생각 고집해서 살면 결혼 안 하느니보다 못합니다. 그러니 지금 좋은 이 마음 죽을 때까지 내생에까지 가려면 반드시 이것을 지켜야 합니다. 이렇게 살면 따로 머리 깎고 스님이 되어 살지 않아도, 해탈하고 열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대승보살의 길입니다. 제가 부주 대신 이렇게 말로 부주를 하니까 두 분이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정자 병정

우리가 알고 있는 정자의 모양은 매끈하고 날렵한 훌륭한 세포로서 머리와 몸체, 그리고 늘씬한 꼬리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긴 정자는 정상적인 사정액 전체에서 절반을 약간 웃돌 뿐이다. 정자 부대는 상식과는 달리 혼성체에 가깝다. 어떤 정자는 머리가 크고 어떤 것은 작다. 핀처럼 뾰족한 머리를 가진 녀석도 있고 머리가 시가, 배, 아령 모양인 것, 불규칙적인 것도 있으며 진짜 괴물처럼 머리가 둘, 혹은 셋이 달린 녀석도 많다.

머리뿐이 아니다. 꼬리가 짧고 용수철처럼 비비 꼬인 정자를 비롯해 꼬리가 두세개, 네개가 달린 녀석도 있다. 몸뚱이가 오른쪽으로 구부러진 꼽추같은 녀석이 있는가 하면 베낭을 멘 것처럼 세포 물질 포대를 짊어진 녀석도 있다. 평균적으로 부대원의 60%만이 우리가 익히 아는 날쌘돌이들이다. 나머지는 앞서말한 돌연변이들이다.
돌연변이는 당연히 수정능력이 없거나 문제가 있어서 도태된다. 하지만 정자전쟁에서 이들 모두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여성의 자궁경부 점액에 기거하는 정자는 돌연변이 정자로서 `방패막이`다. 이들은 다른 남자의 정자가 자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다. 이상하고 기괴하게 생길수록 자궁경부를 막는데 효과적이다. 하지만 이들이 다가 아니다.
날씬하고 정성적으로 생긴 녀석중에 `정자잡이`들이 있다. 이녀석들은 다른 남자의 정자를 찾아 파괴하려고 떠돌아다니고 있다. 이들은 다른 정자와 마주칠때마다 상대의 머리 표면에 성분을 시험한다. 만약 그 물질이 자신의 머리와 같은 것이면 자기편임을 인지하고 다른 녀석을 찾기위한 추적을 계속한다. 나팔관에도 이러한 녀석은 있다. 이들을 `난자잡이`라고 한다. 이들도 정자잡이와 비슷하게 매끈한 모양새인데 다만 머리가 조금 더 크다.

정자전쟁의 진행양상은 이렇다. 양측정자중의 한마리가 상대의 정자와 처음 맞닥뜨리는 순간 전쟁경보가 내려진다. 모든 정자의 움직임이 일순간 빠르게 변하며 정자들은 서로서로 박치기를 통해 전쟁을 수행한다. 머리에 끝부분에는 치명적인 세포분해물질이 있다. 원래는 난자의 벽을 뚫기 위해 있는 이 물질이 상대방 남자의 정자를 죽이는데도 쓰인다. 정자잡이 한마리의 모자 속에는 적진의 정자 다수를 죽일 만한 독이 들어있어 필사적으로 적군에게 독침을 놓는다.

그렇다면 왜 실제 수정능력을 가진 녀석들은 적으면서 이토록 많은 수의 불필요한(?) 정자들이 바글바글하단 말인가?

- 정자전쟁 77p

피임과 영아살해

현대의 문명인들은 가족계획과 피임을 현대의 발명품으로 여긴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보다 확률을 높이고 정교하게 발달되었기는 했지만 계획적인 피임조차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양한 문화권의 여성들은 수세기에 걸쳐서 특정한 식물의 잎이나 과일, 혹은 악어의 대변 등을 이용해서 피임을 해왔다. 이러한 피임법은 동물도 사용한다. 침팬지는 적절한 시기에 피임 물질이 들어있는 식물의 잎을 씹는다. 여성 및 암컷은 수백만년전부터 가족계획과 피임을 해왔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포유류에게 열악한 환경과 번식 기피 사이에 자연스런 중개자 역할을 하는 것은 스트레스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적대적으로 느끼지만 다른 해석도 있다. 즉, 이 스트레스 반응이 적절치 못한 시기에 무엇인가 불리한 일을 하지 못하도록 도와주는 친구라는 것이다. 스트레스는 피임에 특히 효과적인 도구다. 여성의 고귀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

이 역설의 핵심은 여성이 종족보존 전략에 성공하기 위해서 굳이 가능한 한 많은 자녀를, 가능한한 짧은 시기에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영장류가 한번에 하나만의 자식을 낳는 것은 여러자식을 부양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운 일인지를 알려준다.

여성과 아버지가 건강한 상태라는 가정하에 수정된 난자의 40%는 착상에 실패해서 죽어버리고 40%는 착상후 12일 이전에 죽는다. 5%정도는 임신 3개월 전에 유산된다. 즉, 완벽한 타이밍으로 수정을 했다고 하더라도 수정해서 아기로 태어날 확률은 15%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에 스트레스가 가미되면 그 확률은 훨씬 줄어들게 된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도 일종의 사후 피임, 즉, 영아살해 본능이 어머니에게는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임신되었을 때의 적절하다고 판단되었던 환경이 출산의 시기가 가까워짐에 따라 급격히 변할 수 있다. 이미 출산이 가까워진 아이를 유산시키는 것은 쉽지 않을 뿐더러 산모에게 큰 피해가 간다.

여성의 임신 마지막 3개월기간은 이러한 환경 - 즉, 양육에 적합한 환경인지 - 을 테스트하는 단계다. 이를 소위 nest-building이라고 부른다. 환경의 주된 고려대상은 남편, 가정, 주위환경 등이다. 당신이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당연히 경험했겠지만 임신 7~10개월사이에 산모는 각종 걱정, 우울, 짜증을 많이 내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어느 한가지라도 문제가 생기면 여성은 병적 우울증에 빠지게 되며 이후에 아기를 거부하거나 학대, 심지어 죽이는 사태도 종종 벌어진다.

산후 우울증 증상으로 인한 신생아의 유기, 학대, 살해 충동은 매우 억제하기 어려운 것으로 학계에 알려져있다. 출산 직후의 이러한 여성의 행동에 정상참작을 해주는 조항을 법문에 명시한 국가도 많다. 이러한 행위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토끼, 게르빌루스 쥐, 햄스터, 생쥐 등을 애완용으로 키워봤다면 어미들이 새끼를 낳은 직후 매우 예민해져서 새끼의 일부를 죽이거나 잡아먹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경험해봤을 것이다.

영아살해는 병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정신병이 아니다. 이는 당시 상황에서 새끼를 기를 수 없다는 어미의 잠재의식적 판단을 반영한다.
재미있는 것은 남성도 임신에 적절치 않은 환경으로 인한 스트레스 기간에 임신 확률을 대거 감소시키는 정자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 정자전쟁 335p

부정에 대한 가정 폭력

의붓 아버지와 의붓 어머니 부정에 대한 가정 폭력과 살해

원숭이의 경우 무리의 대장(알파 메일)이 쫓겨나면 새로이 무리를 접수한 대장 원숭이는 전 수컷의 새끼들을 죽이거나 가혹하게 대한다. 가끔은 정반대로 암컷의 새끼 돌보는 일을 돕기도 하는데 이는 이타적 행위가 아니라 암컷으로부터 짝짓기 기회를 얻어내기 위한 속임수다. 새로운 우두머리가 새끼를 얻게되면 역시나 이전 새끼들을 죽이거나 가혹하게 대한다.

이것은 인간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원숭이보다 훨씬 심하다. 가정 폭력의 주요 동기는 부정과 의심이다. 배우자 살해 사건의 절반 이상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여타 동물, 특히 조류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수컷이 암컷의 부정에 포악하게 대응하지 않았고 그저 상대 수컷을 거칠게 쫒아보내는 정도이다. 원숭이와 유인원은 인간과 조금 비슷하지만 배우자에게 행사하는 폭력은 인간에 비할 것이 못될 정도로 미약하다.

왜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더 폭력적인가는 확실히 밝혀진 것이 없다. 배우자 폭행은 배우자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배우자의 가족으로부터 물리적인 보복을 받을 수 있어서 종족 보존 계획에 손실만 끼칠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배우자(암컷)가 부정을 했다는 것을 알았거나 의심할 때 인간을 비롯한 대부분의 동물(조류, 영장류, 설치류 등) 수컷들은 곧바로 암컷과 섹스해서 바로 사정한다는 것이다. 아내의 부정을 알아차린 남편이 거칠게 아내를 강간하는 사건이 부부강간 케이스에 수없이 보고되고 있다. 이러한 신속한 재사정은 정자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전략이다. 조금이라도 속도가 늦으면 다른 수컷의 아이를 키울 위험이 높아진다. 쥐와 원숭이, 그리고 인간이 다른 쌍들의 성교 장면을 보고 성적으로 흥분하는 이유는 이때문이다. 사람이 포르노에 탐닉하는 것도 정자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형성된 습성중의 하나다.

- 정자전쟁 91

지친 사람들과 charmer

사람들의 완고함은 삶에 지친 우리를 더욱 더 절망케 만든다. 그들이 우리말을 경청하거나 논리적으로 설득당한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일순간이며 표면적인 가식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오해와 무시를 불평하지 마라. 기본적으로 우리는 모두 나르시스트이다. 유혹자의 입장에서 그들을 받아들여라.
그렇다고 사람들의 마음을 힘들게 연구할 필요는 없다. 그저 기분을 맞춰주고, 취향에 적응하고, 뭐라하건 같이 놀아주면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경계심을 풀게되고 자기와 다른 습관을 접하더라도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이것을 거울 이미지 최면이라고 한다.

당신이 남성이라면 여성적인 면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필요할 때 남성적인 면을 보여주면 여성들이 큰 매력을 느끼게 된다.
이 전략을 쓰기 전에 한가지 주의할 것이 있다. 너무나 똑같은 거울이미지는 노예와 같은 인상을 주고 실제로 의존성을 증대시킨다. 즉, 단순히 공감해주는 이면에는 강한 자의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세상은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관시을 기울여주기를 갈망한다. 그러한 자기중심적인 태도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더 서로에게 담을 쌓고 자신을 방어하며 살아간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차머(charmer)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차머는 자신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신비감을 증폭시키는 한편 자신의 한계를 위장한다. 또한 차머는 상대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상대에게 편안한 감정을 느끼게 함으로써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든다. 이런 이유로 차머와 어울리면 유쾌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
차머는 입만 열만 불평하고 자기주장을 좋아하는(혹은 그러고 싶지만 마음속에만 담아두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안다. 차머는 조용히 다가오는 따사로운 감정. 애로틱 하지 않아도 일체가 된 것 같은 분위기를 느낀다.
대표적인 차머의 역할로 게이샤를 들 수 있다. 물론 게이샤는 매력적이고 관능적인 특성을 가지고는 있다. 그러나 게이샤의 진정한 매력은 육체적 매력에 있다기보다는 마치 있는 듯 없는 듯 옆에서 온 정성을 다해 손님을 섬기는 태도에 있다.

결국 차머와 시간을 보내다보면 점점 마음이 끌리고 나중에는 전적으로 그에게 의지하게 된다. 이것이 차머가 가진 매력이다.

아름다운 육체의 매력은 관능적이지만 영원할 수 없다. 나보다 젊고 아름다운 사람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또한 마음씨 없이 육체적 매력만 있다면 쉬 싫증이 날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존중해 줄 수 있는 상대를 원한다. 그러므로 차머가 되려면 상대가 스스로를 스타라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을 배워야한다. 직접적인 성적 유혹보다는 대화로 상대를 높여주고 간접적인 방법으로는 성적 매력을 발산하면서 상대를 유혹해야 한다.


- 유혹의 기술 221p

- 유혹의 기술 445p

자위의 과학

남성의 자위행위 빈도는 나이 및 다른 경로를 통한 사정 빈도에 좌우된다. 평균적으로 남자의 총 사정 빈도는 그가 생산하는 정자의 수량을 반영한다. 이는 남자마다 다르며 고환의 크기, 나이에 영향을 받는다. 30세 남자는 하루에 3억마리의 정자를 생산하고 1주일에 3~4회 사정한다. 이 남자가 1주일에 3회 혹은 그이상의 섹스를 한다면 그는 자위행위를 거의 하지 않는다. 만약 그보다 적은 회수의 섹스를 한다면 비례해서 자위 회수도 늘어날 것이다.

자위는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개의 습관중 하나는 사람의 무릎 주면을 앞발로 다정하게 안고 자신의 성기를 이 당황한 사람의 다리에 문지르는 것이다. 자극 방식이 각기 다르기는 하지만 들쥐, 생쥐, 다람쥐, 고슴도치, 돼지, 사슴, 고래, 코끼리, 원숭이 등 다양하고 광범위한 종들도 자위를 한다.

자위행위가 정교하고 전략적으로 행해지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이는 수컷이 다음번의 사정을 준비하는 수단이다. 앞으로 벌어질 상황이 어떠한지 예측하여 자위행위를 함으로써 앞으로의 여성에게 사정할 정자의 나이와 수를 조절한다.

남자의 몸은 자위행위와 섹스를 구별할 줄 안다. 각각의 사정물질은 동일하지 않다. 정자의 수명은 매우 짧은데 생산된지 얼마 되지 않은 정자를 많이 여성의 질에 사정할 수록 수태에 유리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래전에 생산된 정자를 스스로 자위를 통해 내보내야할 필요성이 있다.

- 정자전쟁 115p

길가매쉬의 서사시와 매춘

‘사냥꾼’과 ‘창녀’는 인류의 직업 중 최초의 직업중 하나로 기록돼 있다. 기원전 2000년경 만들어져 기원전 14세기 바빌로니아의 사제 신-레케-우닌니가 편집했다는 인류 최고(最古)의 서사시인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인류 최초의 문명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이 고대 설형문자로 쓰여진 수메르 문학작품은 최초의 도시문명의 모습과 함께 다양한 사회상을 살필 수 있는 힌트들을 남기고 있다.


특히 인류사 초기부터 존재했던 직업의 종류를 찾을 수 있는데,우선 지배자인 왕(정치인)과 제사 관련 업무를 보던 사람들(종교인),막강한 군사력으로 백성들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했던 군인에 대한 언급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인과 종교인, 군인 보다 더 눈길을 끄는 초창기 직업으로는 사냥꾼, 그리고 ‘거리의 여인(신전을 일터로 하고 있으니 범 종교인이라고 할 수도 있긴 하다.)’을 꼽을 수 있을 듯 하다.

무엇보다 사냥꾼은 비문명화된 자연인과 문명의 경계를 오가는 첨병으로, 창녀는 야성을 지닌 자연인들을 순화하고, 거세해 문명화로 편입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류가 남긴 최고령 작품속에 각인돼 있다. 모두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직업이 아닌, 문명화의 승리의 첨병역할을 하는 큰 역할을 지닌 직업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인공 길가메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생긴 인류 최초의 도시 우룩의 지배자로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묘사된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3분의2가 신이고,3분의 1이 인간인 존재였다. 키가 3m에 이르고 엄청남 힘을 지닌 길가메시는 하늘아래 당할자가 없었기에 모든것이 제 맘대로였고, 막무가내였다. 길가메시는 한마디로“방자함이 밤낮으로 끝이 없고, 군인의 딸이건 대신의 아내이건 가리지 않고 빼앗아 자기의 색욕을 만족시켰다”라고 표현된다.

이에 신들은 백성들의 탄원을 받아들여 길가메시에 대항할만한 반인반수(半人半獸) 라이벌 엔키두를 만들어 내게 된다. 이 자연인 엔키두는 “영양떼와 같이 언덕에서 풀을 뜯어먹고 짐승들과 함께 물 웅덩이 속에 숨어 지냈다”라고 설명된다. 그는 짐승들과 즐겨 물장난을 하는 자연과 동화된 존재였다.

하지만 이런 엔키두를 본 사냥꾼들은 혼비백산 할 수 밖에 없어 버렸다.엔키두는 동물을 잡으려 파놓은 모든 구덩이들을 메워버리고 덫도 부숴 동물들을 풀어주었기 때문이다.자연에 대한 문명의 잠식을 막고,모든 것을 자연상태로 되돌려 버린 것이 엔키두였던 것이다.

공포에 질린 사냥꾼들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도망가기에 바빴다.동물들과 함께 언덕을 돌아다니며 풀을 뜯어먹는 엔키두에 대해 사냥꾼들은 “그의 힘을 당해낼 자가 없을 것이다.하늘에서 내려온 신인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결국 이같은 상황을 타개하고 나선것은 공포에 질린 사냥꾼의 아버지였다.사냥꾼의 아버지는 사냥꾼에게,“아들아 우룩에 가면 길가메시라는 자가 있다.아직까지 그를 누른 자가 없지.그는 하늘의 별처럼 강하단다.길가메시를 만나 그 야만인에 대해 얘기해주려무나”라고 ‘문명의 본국’에 응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이와 함께 자연인 엔키두의 괴력을 없애는(자연상태에서 길들이기 시작하는,자연의 힘을 거세하는)방법도 제시하게 된다.바로 그것은 엔키두에게 창녀를 만나게 하는 것이었다.“그리고 그(길가메시)에게 사랑의 신전에서 일하는 창녀 한명만 보내 달라고 부탁하여라.그녀를 데려다가 여자의 힘으로 그를 꺽어보자.그녀를 발가벗겨 세워두면 그가 그녀를 보는 순간 끌어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동물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결국 사냥꾼은 우룩을 향해 길을 떠났고 길가메시를 만나 자초지종을 고하자 길가메시는 “사냥꾼이여,쾌락의 아이 창녀를 데리고 돌아가라. 그녀가 우물가에서 옷을 벗고 있으면 그자가 그녀를 본순간 그녀를 끌어안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동물들이 그를 꺼려할 것이다”라고 응답하게 된다.

이어 다시 사냥의 최전선으로 돌아온 사냥꾼은 같이온 창녀에게 속삭인다. “저기 그가 내려오고 있다. 여인이여 지금이 때다. 가슴을 내놓고 부끄러워하지 마라. 주저하지 말고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라. 그대의 알몸을 그에게 보여 그로 하여금 너를 소유하게 하라. 그가 가까이 오면 스스로 옷을 벗고 그와 함께 누워라. 그로 하여금 그대에게 사랑을 고배하게 만들어 숲의 동물들이 그를 꺼리도록 하라”

이어『길가메시 서사시』가 전하는 에로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그녀는 아무 부끄러움 없이 그를 맞아들였다. 그의 타는듯한 열정을 받아들였다. 그녀 위에서 머뭇거리는 그에게 그녀는 여인의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여섯 낮과 일곱밤을 그들은 함께 누워있었다.”
창녀를 만난동안 엔키두는 숲속을 잊고 있었지만 곧 싫증을 느껴 자연으로 돌아갔지만 이제 동물들은 그를 보자마자 뛰어 도망갔다. “그도 같이 뛰려 했으나 몸이 마치 끈으로 묶인것 같았고, 뛰려는 순간 무릎을 삐고 말았다. 그의 날램도 사라져버렸다”고 서사시는 표현한다.

결국 엔키두는 창녀가 이끄는 길을 따라 우륵으로 가서 “내가 제일 강하다.나는 옛질서를 바꾸려 이곳에 왔노라”라고 외치며 길가메시에 도전장을 내밀게 된다.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황소처럼 콧김을 내뿜으며 서로 엉켰고,문들이 박살나고 벽들이 흔들렸다. 길가메시가 땅속에 다리를 박은채 무릎을 꿇었고, 이어 엔기두도 쓰러졌다. 그 순간 난폭한 성질이 사라졌다. 둘은 서로 끌어안았고 우정이 싹트기 시작했다.(이 장면은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풍월주를 뽑는 비제에서 유신랑과 알천랑의 대결 묘사와 놀랄만큼 유사하다.) 이어 두 사람(몬스터)은 백향나무 숲을 지키는 산지기 신 후와와를 살해하고, 우룩의 여신이며 전쟁과 사랑의 여신인 이시타르를 모욕 주며 하늘의 황소를 살해하는 모험을 이어가게 된다.

결국 자연인 엔키두의 이같은 문명화 과정은 ‘문명의 상징’ 창녀를 통해 이뤄지게 되고, 문명화와 함께 순수의 상실과 타락이라는 수천년된 오래된 스토리의 원형을 만들어내게 된다. 자연인과 문명인의 투쟁이라는 도식적 분석은 결국 문명인의 승리와 도시화라는 결과로 이어지면서...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가 끝없는 ‘우즈의 연인’을 창출해 내면서 염문설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국내에선 유명 스타가수의 ‘10대 성매수 의혹’이 불거지는 일이 발생했다. 이같은 섹스 스캔들을 잇따라 접하면서 문득 인류 최초의 기록문헌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직업중에 매춘업이 있다는 점이 떠올랐다. 자연인 엔키두가 위대한 자연의 힘을 상실한게 창녀탓이라면 오늘날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인물들이 급속히 추락하는 이유도 성과 관련한 추문이라는 점은 적잖은 공통점이 있는 듯 하다. 4000년전 성매매는 문명의 상징으로 묘사됐다. 비록 4000년전과 변하지 않은 인간 공통의 모습도 있겠지만 문명의 상징마저 창녀에서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닐 터이다. 오늘날 문명의 상징으론 무엇이 있을까. 또 오늘날의 상징은 고대의 창녀보다 얼마나 더 인간적이고 떳떳한 상징일까.

누레오치바(젖은 낙엽)

대기업 사장으로 명예로운 은퇴를 한 A씨, 너무나도 열심히 일해왔던 그는 은퇴하던 날 아내와 가족생각이 났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것은 헌신적으로 뒷바라지를 했던 아내 덕분이다. 그에게도 아내가 있었던 것이다. 이토록 당연한 생각이 이렇게 늦게 떠오르다니 그는 결심했다. `이제부터는 아내를 위해 살리라~!` 은퇴 후, 그는 매일같이 아내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고자 애썼다. 쇼핑, 레스토랑에서 식사, 해외 여행, 주말에는 아내를 따라 교회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다. 서서히 아내의 존재가 즐겁고 감사해지기 시작했다. 절말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자신에게 아내밖에 없음을 피부로 느끼게 됐다. 아내도 즐거워하는 듯 했다. 그렇게 3개월째 되던 날, 아침 식탁에서 아내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 했다.
"당신,,, 이제 제발 좀 혼자 나가 놀 수 없어?"

다들 꿈꾼다, 열심히 일해 은퇴하면 행복한 가정에서 다복한 노후를 즐길 수 있으리라, 천만의 말씀! 어느날 갑자기 `행복해지자!`고 외친다고 행복해지지 않는다. 몸만 함께 살았찌 평생토록 함께 기쁨을 느껴본 적이 없는 부부가 어찌 갑자기 `함께`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제 이혼은 철없는 젊은 부부의 문제가 아니다. 황혼이혼이 대세(?)다 살만큼 다 살고 이혼한다는 이야기다.

황혼이혼이 심각한 일본에서는 2005년과 2006년, 갑자기 이혼율이 급격히 하락했다. 이 문제로 골치 아팠던 정책 담당자들은 각종 대책이 이제야 성과를 거뒀다고 기뻐했지만 착각이었다. 2007년 4월 이후 황혼 이혼율이 폭증했는데 이는 새롭게 시행되기 시작한 `연금분할제도(이혼할 경우 남편 연금의 반을 아내가 가져갈 수 있는 여권 신장 제도)`때문이었다. 이 제도가 시행될때까지 여자들이 이혼을 꾹 참았던 것이다.

남편 옷만 만져도 두드러기가 돋고, 남편이 집 안에 있으면 소화가 안된다는 `은퇴남편 증후군retired husband syndrom`이라는 신종 병리학 용어가 만들어진 일본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일본 여성의 60%가 이 증후군에 시달린다고 한다. 은퇴를 앞둔 일본의 중년 남성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들은 `전국헌신적남편협회`같은 단체를 만들어 가능한 한 아내 곁에서 오래 버틸 전략을 짜고 있다. 이들은 아침마다 외친다. "아내에게 이길 수 없다. 이기지 않는다. 이기고 싶지 않다." 이런 일본 남편들을 아내들은 `누레오치바(젖은낙엽)`라고 부른다. 아무리 쓸어도 쓸리지 않는 `젖은 낙엽`처럼 바닥에 납짝 업드려 살겠다는 이야기다.

- 김정운 교수

성격형성

성격은 최소 다섯가지 측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사교적인가 비사교적인가(외향성-내향성), 고민하는가 침착하고 자족하는가(신경증
적-안정성), 예의바르고 남을 신뢰하는가 무례하고 의심이 많은가(친화적-적대적), 신중한가 경솔한가(성실성-목표불명), 대담한가
순응적인가(개방성-비개방성)가 그것이다. 이런 특성들은 유적적일까?

수십년간에 걸친 쌍둥이에 대한 조사에서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연구결과 (당연히도) 성격의 상당부분(50%)은 유전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나머지 50%는 부모와 가정에서 비롯되는가? 놀랍게도 아니다!! 부모와 가정은 5%만의 성격차이점만을 설명했다. 그렇다면 성격의 나머지 45%는 무엇이 결정하는가? 아무도 모른다.
자궁속에서의 영양섭취, 어린시절의 질병, 어린시절의 기억 등 어떤 것도 성격의 나머지 45%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했다.

다만 가능성을 밝혀주는 연구는 있다. 주디스 해리스는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아이들이 부모가 아니라 또래집단에 의해 사회화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를 수집했다. 아이는 유아기 집단속에서 전략을 짠다. 아이는 또래집단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생각해내야하고 그 전략에 우선순위를 두어야한다. 이러한 전략의 과정속에서 성격이 형성된다는 설이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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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692p,

맏이의 심리

첫째로 태어난 아이에게는 유리한 점이 있다. 오래 생존해왔으므로 앞으로도 생존가능성이 크고 동생보다 크고,강하고,똑똑할 것이다. 첫째는 새로 태어난 동생을 그동안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강탈자로 본다. 첫째는 보통 보수주의자이며 리더적 역할을 맡는다.

둘째로 태어난 아이는 이 까다로운 아첨꾼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둘째는 첫째와는 정반대의 전략을 연마한다. 이들은 유화와 협조에 의존한다. 그리고 현재 기득권이라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변화를 잘 수용한다. 이들은 융통성이 있다. 첫째가 이룬 재능과 같은 분야에 둘째가 뛰어드는 것은 경쟁력이 없다. 부모가 어쩔수 없이 우량주를 골라야할 때는 첫째를 선택할 것이므로 둘째는 부모가 다양한 포트폴리오의 분산투자가 가능한 메리트를 느낄 수 있는 재주를 연마할 수 밖에 없다.

심리학자 설로웨이는 오랜 연구를 통해 첫째아이들이 보다 보수적이고, 부모와 동일시하고, 더 성실하고, 성취지향적이고, 진지하고, 체계적이고, 더 사귀기 어렵고, 덜 친화적이고, 덜 태평하고, 더 신경증적이고, 더 외향적이라고 주장했다. 설로웨이는 토머스 쿤이 주장한 급진적 과학혁명, 정치적 혁명을 이끌었던 사람들의 자료를 분석했다. 각각의 사건에서 나중에 태어난 사람들이 혁명을 더 지지했고, 맏이는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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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702p,

동물과 다른 것들의 기원

세계어디서나 인간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투쟁에 무익한 것처럼 보이는 활동들에 엄청난 시간을 허비한다. 사람들은 농담을 하고, 예술활동을 하고, 제사를 지내고, 절이나 교회에 가고, 철학을 공부하고, 우주의 원리를 궁금해하고, 삶의 의미를 되뇌이고, 초자연적 믿음에 심취한다. 왜 우리는 이런 하찮고 무익한 것들을 추구하고 그 속에서 숭고함을 느끼는가?

이 물음은 속물처럼 들리고 부도덕하게 들리기조차한다. 그러나 호모사피엔스의 생물학적 특성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다. 모든 대학에는 예술과 종교를 가르치는 교수들이 포진해있지만 수많은 학자와 수만장의 논문들도 `왜 인간은 예술을 추구하는가`라는 질문에 거의 어떠한 답도 제시하지 못한다. 예술의 기능이 두터운 베일에 싸여있는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예술은 미적심리를 반영할 뿐 아니라 `지위심리`를 반영한다. 베블런과 쿠엔틴 벨은 `취미와 유행에 대한 분석`이라는 논문에
서 소비, 여가, 예술활동을 통한 엘리트의 광고물이 하층계급에 의해 모방되는 엘리트계층은 모방하기 어려운 새 광고물을 찾아나선다는 이론을 제기했다. 예술의 후원자들은 높은 계층에 속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며 명성높은 예술가의 작품이 대중적인 곳에 전시되면
조롱섞인 비평이 나온다. 예술의 가치는 미학과 무관하다. 그것이 아무리 뛰어난 걸작이라도 모조품이면 무가치해지는 이유다. 이는 예술을 모독하기 위함이 아니다. 나는 우리가 인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외계인 생물학자의 사심없는 눈으로 예술의 심리를 보기를 원한다.

둘째, 예술은 생물학적 의미에서 적응적이지 않다. 그러나 마음은 우리에게 즐거운 감정을 부여함으로써 환경 적응도의 증가를 기록한다. 이로인해 생물학적으로 무의미한 과제(즉, 예술, 종교 등)에 도전하는 마음이 탄생한다. 쾌락 신경중추를 자극하는 전극을 연결한 쥐가 섹스나 음식을 마다하고 전극에 연결된 단추를 누르는 행동, 인간이 마약에 심취하는 행동, 포르노 등은 이러한 종류의 극단적인 예이다.

셋째, 비적응적 문제해결을 위해 종교나 예술이 탄생했을 가능성이다. 우리의 마음과 뇌는 생존이나 적응을 위해서 탁월한 발달을 이루었지만 세상에는 그 외의 다른 문제들이 있다. 우주의 기원은 무엇인가, 존재의 본질은 무엇인가,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일이 생기는가, 영혼은 죽음 이후 어떻게 되는가와 같은 문제들이다. 종교와 철학 등은 어떤 면에서 마음의 도구들이 애초에 설계목적에서 벗어나는 문제들에 적용된 결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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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848p

근친상간의 터부(남매)

19세기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웨스터마크는 유년에 한사람과 가깝게 지내면서 성장하는 뇌는 그 사람을 `형제`의 범주에 넣는다고 추측했다. 이는 혈통을 나누지 않는 부모와 자식간에서 성립한다. 일단 그렇게 분류되면 성적 욕구는 사라지게된다.

이스라엘의 키부츠 공동체는 20세기 초에 핵가족을 무너뜨리기로 결정한 유토피아 설계자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들은 태어난 직후 합숙소로 옮겨져 청소년기가 끝날 때까지 유모와 교사 밑에서 성장했다. 이 아이들이 성적으로 성숙해졌을 때 아이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서로간에 결혼이나 섹스를 하지 않았다.

중국이나 한국의 일부지역에서는 어린 신부를 데려오는 민며느리 제도가 있었는데 부모는 민며느리제가 장래 부부가 될 아이들에게 남매간의 심리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렇게 결혼한 부부는 서로를 무덤덤하게 느꼈으며 결혼생활이 불행했고,불성실하고, 자식이 적었다. 이와는 역으로 근친상간을 범한 사람들은 함께 자란 경험이 거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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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708p,

Identity

에릭슨(Homberger Efikson)은 열심히 자아 정체성(Identity)의 확립이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데, 이 정체성이라는 것은 마치 땅에 집을 짓듯이 인격속에 하나의 실체적 존재처럼 구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이거나 다른사람이 아닌 `나`라는 사실의 근거는 내 안에는 없다. 내가 나임을 지탱하는 것은 내가 속하는 사회의 집단환상이며 내가 나임은 나의 성질,생각,신분,지위,능력,성격 등이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인정해 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같은 뒷받침이 무너지면, 곧 나의 정체성은 무너진다. 정상적인 성인으로서의 인격은, 그 집단망상, 즉, 그 개인적 환상의 일부분이 집단화되어 간신히 지탱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얇은 핀에 박혀 바람에 흔들리는 게시물 전단지 처럼 그 본질은 위태롭기 짝이 없다. 우리는 자신의 초자아와 자아, 그리고 정체성, 또는 셀프 이미지가 우리가 속하는 모임의 집단환상에 의한 지탱을 잃으면 단박에 정신분열병자가 될 것이다.

따라서 어느 개인이 속하는 집단의 멤버들이 일치단결해서 그 개인을 정신분열병자로 만들어 버리려고 하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분열되는 그의 인격은 이중구조가 될 것이다. 집단에 받아들여지기 위하여 강제되기를 감수한 환상과, 집단화 과정에서 좌절을 거듭하는 개인적 한상의 이중구조에 시달리게 된다. 이윽고 그는 강요된 집단환상을 버리고 그 사적환상을 분출시키게된다. 정신병이라는 형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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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 뱅이의 정신분석 2...p19

환상아(幻想我)의 투영 - 1

우리가 가진, 되고자 하고 찬미코자 하는 나르시즘적 이상, 소위 이것을 우리는 환상아(幻想我)라고 부른다. 그러나 현실은 많은 제약때문에 현실아(現實我)라는 적응적 대상을 만든다. 이는 인간 갈등의 근본적 원인으로 충돌한다.

환상아는 쉽게 타자와 혼동된다. 타인을 환상아와 동일시하고 대상에 나르시즘을 투영하는 것이다. 베아트리체를 사랑하는 단테, 로테에 대한 베르테르의 연애와 같은 헌신적, 동경적 형태의 연애는 이 범주에 든다.

대상자가 환상아와 동일시되면 내부에서 대립하던 환상아와 현실아중 환상아가 대상으로 투영되면서, 가까이하기 어렵도록 거룩한 존재로 이상화된 애인과, 그(녀)에로의 사랑을 동경하면서도 사랑받기에는 너무도 무가치한 자신을 대비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녀)는 유일무이하며, 지고지순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그 가치는 무한하며 그(녀)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아깝지 않다. 이로써 파생되는 사랑은 일체의 현실적 고려를 초월한 무조건적인,무한의 애정이다. (물론 환상의 차원에서)

그러나 내적 갈등의 해결법으로써 종종 이용되는 이 같은 종류의 연애는, 지극히 위태로운 면도날 위의 균형이며 여리고 무너지기 쉽다. 애인이 떠나가 버려도, 너무 가까이 다가와도, 이런 연애는 파탄나고 만다. 애인(환상아)에게 거부받은 현실아는 절망과 열등감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반대로 애인이 접근해와도 현실차원의 동일시는 불가능해지고 그(녀)의 환상이 깨지며 자신의 현실아와 현실적으로 마찰하면서 갈등이 폭발한다.

흔히 있는 일이지만 부모가 자식에게 환상아를 투영하는 경우 자식은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자식은 부모의 환상아에 어떻게든 부합하기 위해 무리한 노력을 강요당한다. 그 결과로 자기소외가 일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신경증, 쇄약증, 편집증적 증세가 나타나 부적응자가 되거나 범죄행태를 보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면 어떤 추상적 존재에 환상아를 투영하는 것이 좋다. 알라, 예수, 토속신앙의 신들은 매우 좋은 발명품이다. 어떤 주의, 체제, 이상이어도 좋다. 이데올로기의 역사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환상아의 집단적 투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앞서 연애의 경우에서처럼 실현되는 것이어서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환상아와 동일시된 이념에 나르시도가 전면적으로 집중되어 있으며 현실아의 소멸, 즉 자신의 죽음-은 아무런 공포의 대상도 아니다. 만세일계를 외치며 군함에 돌진하는 카마가제 특공대는 지극한 명예를 느낄 것이고, 그리스도교의 순교자는 환희로 몸을 떨며 십자가에 못박힐 것이 듯이 그 신봉자들에 미치는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르시시즘의 투영대상은 이념이나 인물뿐만 아니라 사업, 학문, 예술적 업적, 모험 등도 포함된다. 본디 철인3종 경기라던가, 마라톤, 히말라야 대등정, 공부나 예술을 통한 입신 등 일상의 범주를 넘는 성과에서 환상아의 실현을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다. 미디어 시대에 맞추어 TV나 인터넷에서 환상아의 대표선수인 온갖 수퍼맨과 원더우먼이 등장하며 현실원칙을 대변하는 악인(현실아)을 징벌하고 있는 이야기가 수십년간 실증낼 줄도 모르고 되풀이되는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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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 뱅이의 정신분석1..38p

환상아(幻想我)의 투영 - 2

남성의 경우 페니스는 나르시시즘(환상아)의 중요한 거점이다. 여차하면 죽죽 커져서 적을 쓰러트리는 손오공의 여의봉이나, 비벼대
면 온갖 소원이 이루어지는 알라딘의 램프는 분명한 페니스 심벌인데, 이는 성기와 나르시시즘적 전능감의 관련성을 나타낸다.

성불능자의 괴로움이란, 성적 쾌감을 얻지 못하는 불만에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이 상처를 이은 굴욕의 괴로움이다. 또 어떤 난봉꾼이 여색 사냥을 위해 설레발치며 돌아다니는 현상은, 그의 성욕이 남달리 세서가 아니요, 상처입은 나르시즘을 회복하려는 발버둥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페니스를 한번 멋지게 휘둘러대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사내녀석들의 미진한 꿈이요. 그래서인지 모든 무기는 페니스를 닮아있다.

예술은 순수한 나르시즘의 세계다. 그 영역에서 나르시즘은 공공연히 표현을 허락받고 심지어 고상하게 보이기조차 한다. 반대로 연애나 이데올로기의 경우 나르시즘의 투영을 애써 숨겨야한다. "난 당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당신에게 투영된 저의 환상아를 사랑하고 있어요"라고 얘기하는 바보는 없다. 이데올로기도 어디까지나 현실을 해석하고 변혁하는데 이바지하는 것으로 나르시즘이 포장되어있다.

예술이라는 어른의 유원지는 표현의 도피처이자 국립공원 내의 사냥 허용구역이다. 인간만이 예술이 가능한 것도 환상아와 현실아의
분열이 있기 때문이며 정신분열의 고통속에 살았던 예술가들이 작품이 추앙받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정신병자란 두말할 필요없이 현실의 세계에 끼어들어온 개인적 환상아의 희생양이다. 그들의 과대망상이야말로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환상아의 가장 순수하고 정직한 모습이다. 우리가 그것을 조소하고 하찮게 여기는 것은 우리는 불가능한 환상아의 현실로의 발현을 그는 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발생하는 공포감과 부러움을 애써 외면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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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 뱅이의 정신분석1..42p

Self-Image = 1/욕망

`착한여자 신드롬`이 한때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여자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정말로 자신은 사는 것이 착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퍽이나 많다고 생각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가리켜 `나는 이러저러한 성질`이라느니 `이런 성격`이니 하는 일정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자신이 착하다는 것도 이 같은 셀프 이미지의 한 예다. 그런데 보다 깊이 생각해보면 이 셀프 이미지라는 것은 그 개인의 객관적 성질이라기 보다는, 실은 타인에 대한 자신의 기대 요구의 반영이다. 다시말해, 셀프이미지에서 판명되는 것은 그가 어떤 인간인가가 아니라 그가 딴 사람들에게 어떤 것을 기대 또는 요구하고 있는가 하는 일로서, 셀프 이미지는 그 기대 내지 요구를 정당화할 근거로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착한 사람`에 대한 여러가지 성질은 차지하로서라도 자신이 착하다고 `자임`하는 사람이 실제로 착한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큰 문제가 있다. 실제로 착한 사람과 착한 사람이라고 자임하는 사람, 이 양자는 전혀 별개의 인간이다. 오히려 자신이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욕심이 많으며, 사리,사욕,사심으로 기울어 버리기 쉬운 인간이다.

먼저, 그가 어째서 자기는 착하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던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 그런 판단은

- 그가 약삭빠르고 정치적인 사람들과 장단을 잘 맞추고,
- 남에게 잘 부탁할 줄 알고, 부탁받으면 거절도 잘 하며,
- 약삭빠르게 처신하고, 남을 잘 속이고,

등등을 하였다면 그 또한 보다 잘 살 수 있을 것이었지만, 자기는 그러지를 못하기 떄문에 언제나 손해만 보고 있다는 것이 암암리에 전제로 되어있다.

우리들 개인이 `나는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깨달을 때, 그것은 그가 그 일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욕망이 없다면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문제자체로 부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자신이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란 약삭빠르게 처신해서 잘 살고 싶은 욕망이 남보다 강한 인물이다. 그런 욕망의 강함 때문에 그는 착하게 살면서 보게 되는 손해가 마음에 걸려 자신의 분함을 진정시킬 설명을 찾게 되고 `착한여자 신드롬`같은 용어들은 이들에게 좋은 변명거리를 제공해준다.

본디 어떤 사람에 대한 평판(착하다. 순진하다. 호탕하다. 짠돌이다. 너그럽다 등등)은 그의 실제적인 본질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성격의 판단에는 일반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변사람들 태반에게서 `엄청게 인색한 노랑이`라는 혹평을 받는 당사자는 자신을 `너무 돈을 시원스레 써서 언제나 손해만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매우 많은데 이는 그가 한층 극단적인 인색함을 상정하고 그것을 일반 기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노랑이의 관찰자도 마찬가지다. 어느 누가 어느정도 인색한가의 판단은 그 사람에 대한 관찰자의 요구로도 좌우되기 때문이다. 바꿔말해 본심이 욕심꾸러기일수록 남을 인색하다고 판단하고, 악하고 약삭빠른 사람일수록 자신을 착하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강하다.

자신이 아들이나 딸을 위해 얼마나 고생하는지 제 자식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어하는 엄마, 아빠를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들은 애를 낳지 않거나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들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애를 낳아봐야 어른이 된다거나 부모 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들의 심리상태를 고찰하보면 자식으로 인한 고생이나 희생에 대해 손해본 느낌이 한켠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으며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에 대한 비난의 말은 고생을 보상시켜줄 합리화된 변명거리를 찾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백한 사실이거니와 자식을 희생해서 이기적으로 사용하고 싶은 욕망이 강한 어버이일수록, 자기는 자식을 위해서 몸바쳐 희생했다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편과 불화로 항상 싸우는 아내가 툭하면 딸아이에게 말하기를 "몇번이나 이혼하려했지만 널 봐서 참았단다."라고 푸념한다. 종종 딸이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너를 위해 일평생 참아온 어미 말을 거역하니?"하고 성을 낸다. 그녀는 적대적이며 불안정한 부부관계가 지금까지 얼마나 딸아아이게 상처를 주었는지는 생각지도 못하고 도리어 딸아이에게 생색을 내고 있는 것이다.

"이내 몸은 님을 위해 헌신했건만 배반당하고, 그래도 사람이 그리워 남을 믿다가 배반당하곤 하지요"라는 넋두리를 하는 이가 있다. 당사자는 인간세상의 박정스러움과 에고이즘을 한탄하지만 앞서 어버이의 예와 마찬가지로 에고이스트는 그 자신이다. 그는 남에게 `은인`의 입지에 서서 그들을 이용하고 지배하고픈 욕망이 지나치게 강한 것이다. `남이 그리워서`라는 말은 남을 이용해먹고픈 욕망을 변명거리로 대체시킨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든 여러 사례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욕망을 정당화할 필요가 있을 때 그를 위해 만들어지는 셀프이미지는 그와 역비례관계에 있다. 즉,

- 약삭빠르게 살아서 단물을 빨아먹고 싶은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자신은 착하다는 셀프이미지를,
- 자식을 이기적으로 이용해먹고 싶은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이 자식에게 희생적인 부모라는 셀프이미지를,
- 인색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는 너무 돈을 헤프게 쓴다는 셀프이미지를,
- 사악한 공격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은 정의의 편이라는 셀프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오만할수록 자신은 겸허하다고 하고, 겸허한 자는 자신을 오만하다고 생각한다. 피해의식이 강할수록 무서운 가해자가 된다. 남의 감정에 몰이해하고 무감각할수록 자신이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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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뱅이의 정신분석 265p

자녀교육에 대하여

우리나라 어머니의 자식교육에 대환 관심은 광적인 것이어서 시중에는 이에 대한 책이 넘쳐난다. 이런 책들을 보면 정형화된 자식교육하기에 대해 나와있는데 의심할 여지없이 대부분의 내용은 파블로프의 개로 대변되는 자극-반응 기제의 행동주의 심리학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았다. 즉, `상벌`에 의한 조건부여와 `강화`라는 개념이다.

허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정녕 부모가 상벌과 강화로써 자식교육을 하여 부모가 원하는 상으로서의 자식의 객체화(客體化)는 가능한가?

예컨데 어느 육아잡지에서 "자연을 사랑하고 꽃을 사랑하는 어린이로 키우기 위해, 아이들이 꽃을 꺾거나 했을 때`꽃이 가엾지 않니? 꽃도 꺾이면 아프단다.`라고 꾸짖어야한다."는 기사가 있다면 그 글대로 하여 꽃을 사랑하는 마음씨 고운아이로 자랄 줄 믿고 있는 어머니들이 있다.

천만에 무슨소리를, 어린이를 바보취급하는 것도 어지간해야지, 어린이에게 `꽃을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고 심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마음속 깊이 꽃을 사랑하는 어머니뿐이다. 속으로 전혀 꽃을 사랑하는 않는 어머니의 경우, 아이가 꽃을 학대할 때 꾸짖는다고 해도 아이는 표면적으로만 엄마가 보는 앞에서만 꽃을 꺾지 않을 뿐, 자신의 주체적 자각으로 엄마가 실은 별로 슬프거나 성난게 아님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진실로 꽃을 사랑하는 어머니라면 육아잡지의 지시하는 말을 쓰지 않아도 아들딸은 그렇게 키워질 것이다.

요컨대, 부모는 자신의 감성,인격,기량,덕성 등의 정도 이상으로 자녀를 가르치고 변화시킬 수 없다. 만약에 부모가 앞서말한 스스로의 정도는 내버려둔 채 올바른 자녀 교육법을 배워서 아이를 바꾸려들면 자녀를 겉다르고 속다른 표리부동의 인간으로만들어 도리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부모가 자녀를 인격적으로 수준높은 인간으로 키우고 싶거든 먼저 부모 자신이 인격을 높이는 길 이외에는 아무리 허우적 거려봐야 소용이 없는 것이다.

왜 인간은 자식을 키우는가?

동물의 번식은 유전자적 강제이고 태어난 새끼에 대한 보살핌 역시 일종의 프로그램이라고 볼 수 있다. 프롤락틴(prolactin)을 뇌하수체에 주입받은 처녀쥐는 새끼쥐에 육아행동이 나타나는데, 많은 실험의 결과, 동물의 육아행동은 본능의 결과로써 나타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인간의 경우 이러한 본능이 상당부분 파괴되었다고 생각되는데, 자식에 대한 엄청난 자원투자와 뇌용량의 발달은 인과율적으로 무엇이 선인지 후인지 알기어려우나 양육본능 파괴와 일정부분 관련이 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자식을 낳지 않거나, 죽이거나, 버리거나, 입양보내거나, 팔아버리는 행동은 하등의 인간성에 반하는 행동이 아니라, 동물로서는 할 수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동이다.

만약 인류가 육아본능에 의지하여 자식을 키웠다면 멸망해버릴 위험에 직면했을 것으로 생각되며, 육아행동을 근거짓는 어떤 인위적 관념을 만들지 않고서는 부족, 국가, 사회, 민족의 존속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요컨데, 육아라는 본질적으로 무리한 억지 부담을 부모에게 납득시키기 위한 사상이 육아사상이 된 것이다. 육아형식의 가장 일반적 형식은, 모성애를 신성시하고 남성의 경제력에 중점을 두는 방식으로 남성을 지배자로 하는 가족형태(가부장제)가 성립되었다.

동물에 비해 인간 암컷과 수컷이 육아에 희생하는 자원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데, 이때문에 인류 암컷의 자활능력은 크게 제한되었으며 성(性)이 상품화되었고 그 상품을 취득하기 위해 남성의 본능이 이용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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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뱅이의 정신분석 64p

인간의 공격성에 대하여

사회는 인간의 공격성에 대해 연구하고 걱정하며, 성선설인지, 성악설인지를 들먹이고, 이것이 본능이냐 아니냐 논의하는 등, 이를 어떻게든 알아내고 억압해보려고 무던 애를 쓰는 것 같은데, 기실 솔직한 심정을 말하라고 하면 공격성 자체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가령, 인간의 공격성이 본능이라고 하더라도, 늑대사회가 위계질서 있는 고도의 사회를 구성하듯 국가조차도 필요없는 고도의 조직화된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정작 문제는 다른데 있다.

밀그람의 `아이히만 실험`이 증명하듯, 위험한 것은 인간의 공격성 자체라기보다는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며 감수성의 결여이다. 적국의 도시를 융단폭격하는 폭격기 조종사가 모두 잔인한 사디스트는 아니다. 그는 명령에 복종해서 원자폭탄을 떨어트려 몇십만 명이나 되는 무고한 시민을 죽일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미워도 눈앞의 인간을 몽둥이로 때려죽이거나 전기톱으로 토막내 죽이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실제 피해량은 앞의 경우가 몇십만배나 크지만, 현대에 무서운 것은 잔인한 사디스트보다도 오히려 소심하고 직무에 충실한 유능한 관리였던 아이히만 같은, 권위의 명령에 무비판적으로 복종하는 얌전한 인간인 것이다.

잔인성의 경향이란, 참혹한 연쇄살인범과 보통의 시민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 둘의 유일한 차이는, 흉악범이 남달리 강한 잔인한 충동을 지녔다기 보다는 오히려 상대방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한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인간의 잔인성에 대한 행위는 본능적인 잔인성의 문제를 파고 들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잔인성을 정당화하는 사상(국가권력의 명령에 대한 복종, 종교적 신념에 대한 악의 토벌이라는 맹신 등등)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의 문제이다.

인간을 평화적이라고, 선하다고, 믿는다해서 인간이 평화적이고 선해지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반대로, 잔인한 자일수록 자신의 잔인성을 직시하기 두려워하여 그것에서 눈을 돌리고, 인간을 선하다고 믿고 싶어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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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뱅이의 정신분석 132p

이타적 응징자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인류역사의 수많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그 결론은 각자의 생각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애덤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인간의 이기심과 시장의 관계에 대해 말했으나 또다른 저서인 `도덕감정론`에서 인간행태에 대해 좀 더 중도적인 시각을 가지면서 인간본성에는 이기적인 면과 이타적인 면이 공존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1980년대 이후, 철학적 문제였던 인간의 본성은 하나의 과학적인 문제로 부상했다. 긴티스와 그의 동료들은 최근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인간본성에 대한 양분법적인 기존 시각이 너무 단순하다고 비판하면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인간의 본성은 이타적이지도 이기적이지도 않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조건부 협력자`이자 `이타적인 응징자`라고 할 수 있다. 긴티스는 인간의 이러한 행태를 `강한 상호주의`라고 하며 "타인과 협력하고자 하는 성향과 협력의 규범을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개인의 희생을 치르더라도) 응징하려는 성향"이라고 정의했다.

`최후통첩게임`이나 `죄수의 딜레마`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행태도 이와 같다. 사람들은 이성이 지배하는 황금률을 따르고자 하지만 약간의 변칙을 가한다. 남이 자기에게 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남에게도 하라는 것(조건부 협력)도 만약 남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개인적인 희생을 치르더라도 응징하겠다는 의미다.(이타적 응징)

사람은 어떤 사람을 신뢰할 만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은지, 누구에게 신세를 지고 있고 누구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고도의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상호주의에 바탕을 둔 인간 행태는 전 문명권은 물론 원시인류나 오지의 수렵,채집 부족에게서도 나타나는 보편적인 행동양식이다. 또한 다른 영장류에게서도 비슷한 성향이 관찰되며, 생물학적인 뇌분비 호르몬도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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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기원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

한때 우리가 동물과 다른 인간의 특징을 쉽게 정의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인간은 학습을 하고 동물은 본능에 따라서만 산다는 식이다. 인간은 도구를 쓰고 의식, 문화, 자아를 가지고 있으나 동물들은 그렇지 않다는 따위다. 그러나 점점 이러한 차이점들은 흐릿해지거나 종류의 차이가 아닌 정도의 차이로 보였다. 달팽이도 학습을 한다. 피리새는 도구를 사용한다. 까마귀는 더 나아가 도구를 직접 제작한다. 돌고래는 언어를 사용한다. 개들도 의식이 있다. 오랑우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알아보며 강간도 행한다. 침팬지는 전쟁을 하며 고도의 정치를 한다. 일본원숭이는 문화적 기술을 후대에 전수한다. 코끼리는 다른 코끼리의 죽음을 애도한다.

동물이 각각의 과업을 인간만큼 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한때 동물들보다 딱히 나을 것이 없었는데도 점점 더 우수해지도록 압력을 받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어떠 인본주의자는 이러한 말을 궤변이라 치부하며 냉소할 것이다. 그는 오로지 인간만이 도구를 쓰고 만들 수 있다. 인간만이 어휘뿐 아니라 문법을 사용할 수 있다. 오로지 이간만이 감정을 느낄 뿐 아니라 공감할 수 있다. 라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말은 괴상하게도 내게는 변명처럼 들린다. 내게는 인문과학에 젖어있는 인간의 본능적 오만에 전혀 신빙성이 없어보이는데, 그 이유는 인문과학의 요새 중 많은 것들이 이미 동물 챔피언들에게 함락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의식에 대한 논쟁들은 대부분 의식이 인간에게 유일한 선험적 특성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나 개를 키워본 사람은 누구라도 알듯이 개도 꿈을 꾸며, 감정을 느끼고, 사람 개개인을 알아본다. 그러한 것들을 저절로 일어나는 무의식적인 행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이 시점에서 인본주의자가 마지막으로 후퇴하는 보루는 `학습`이다. 나도 한 때 학습은 인간만의 우수한 특징이라는데 동의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대학의 리다 코스미데스 교수의 `적응된 마음`이라는 책을 읽고나서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리다 교수는 본능과 학습이 서로 다른 것이어서 본능에 의존해 온 동물은 학습에 의존하지 않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기존의 통념을 완전히 깼다. 리다 교수에 따르면 그 통념은 한마디로 거짓이다. 학습은 적응성이란 뜻이고 본능은 준비성이란 뜻이다. 아이는 언어를 무서운 속도로 배우고 날아오는 공을 피하기도 하지만 이는 따로 배운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공유하는(준비된) 가정 없이 어떻게 배울(적응성을 지닐)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적응성과 준비성이 정반대라는 종전의 관념은 명백하게 틀렸다. 100년전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사람은 본능보다 학습능력을 더 많이 가진게 아닌 둘다 똑같이 많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가 비웃음을 샀다. 그러나 사실은 그의 말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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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 리들리 `붉은 여왕`

유혹자의 사랑관

사랑을 이루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사랑이나 로맨스를 대단히 성스럽고 마술적이고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편견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이나 로맨스가 운명처럼 저절로 다가와서 소위 느낌이 바로 생겨 이루어지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러한 `인연`적 사고방식은 얼핏 생각하기에 참으로 낭만적이고 신비롭게 보일수는 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가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나 게으르기 때문에 비롯된 생각이다.

사람을 유혹하려면 상대방이 얼마나 중요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노력을 경주해야한다. 사랑과 로맨스를 우연에 맡기는 것은 재난을 가져오는 지름길이자 역설적으로 우리가 그런 일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카사노바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는 사랑과 로맨스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기술을 습득했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마술적으로 이루어지는 운명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만들어지는 인과론적 결과이다. 유혹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의 심리를 이해하고 그에 적합한 전략을 세운다면 마법의 주문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는 힘을 갖게된다. 유혹자는 사랑을 신성한 것이 아니라 싸워서 쟁취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유혹자는 자기도취에 빠지지 않는다. 자기도취에 빠진다는 것은 자신이 불안하다는 증거이다. 불안한 심리를 가진 자는 결코 유혹자가 될 수 없다. 유혹자는 안정된 심리상태에서 자신 밖의 세상에 몰두함으로써 쾌활한 정신상태를 갖게하며,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매력을 느끼게된다.

유혹자는 안정된 정서상태를 가지고 있기때문에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의 사람은 대개 편견에 사로잡혀서 선입견으로 사람을 대한다. 그러나 유혹자는 상대방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공감하기때문에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기 더욱 쉽다.

우리는 한때 모두 유혹자였다. 어린아이였을 때, 사람들은 나에게 귀엽다고 했으며 나로 인하여 웃음과 희망을 느꼈다. 그러나 자라남에 따라 즐거움을 잃어버린 채 삶과 일, 가족에 대한 책임과 의무에 짓눌려 산다. 유혹자는 사람들이 즐거움과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이나 연인, 친구에게서 충분한 즐거움을 얻지 못하고 스스로는 더욱 즐거움을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사람들 속에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뛰어들어서 로맨스와 모험을 제공하는 유혹자를 사람들은 결코 거부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유혹자는 모든 도덕적 판단에서 자유로운 태도로 삶에 접근한다. 그에게 삶은 게임, 유희, 연극의 무대일 뿐이다. 유혹자가 악하다고 비난하는 도덕주의자들은 그가 가진 유혹의 힘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질투를 가지고 있다. 유혹자는 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비난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 유혹의 기술 14p

공정한 보상 - 최후통첩게임

당신과 어떤 사람(A)이 나란히 앉아있다. 한 부자가 다가와서 A에게 100만달러를 주고 당신과 나눠가지라고 했다. 당신은 A가 나눠준 돈을 받거나 거절해야 하는데 거절하면 부자는 모든 돈을 도로 가져가 버린다. 자, 그렇다면 당신은 A가 얼마를 줘야 받아들이겠는가?

이것은 행동경제학에서 널리 알려진 `최후통첩게임(Ultimatum game)`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전통 경제학이 가정하는 합리적 인간이라면 A가 1달러를 주더라도 둘다 무일푼인 것 보다는 낫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 당신 마음속에 치밀어오르는 울화가 증명하듯 너무 적은 액수는 어떤 문화권의 사람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간만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영장류 학자 세라 브로스넌과 프란스 드발의 연구에 따르면 꼬리감기원숭이는 불공정한 거래에 큰 불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브로스넌은 원숭이들이 화강암 돌멩이를 가지고오면 음식(오이)을 받을 수 있다고 훈련시켰다. 원숭이의 95%정도가 돌을 오이로 교환해서 거래에 응했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규칙을 바꾸어 한 원숭이에게만 돌멩이 거래시에 더 맛있는 포도를 주자 질서가 깨지기 시작했다. 불공평한 상황에서 원숭이들은 종종 오이를 먹지 않았다. 40%의 원숭이는 교환을 아예 중단해버렸다.

과학자들은 한 술 더 떠서 어떤 한 원숭이에게 아무 대가없이 포도를 주자 상황이 더 나빠졌다. 어떤 원숭이들은 돌멩이를 던져버렸고 80%의 원숭이가 거래를 포기했다. 원숭이들은 돌멩이와 오이를 바꾸는 유리한 거래를 자진해서 포기했다. 이것은 단지 동료의 불로소득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인간이던 동물이던 공통적으로 보상이 `공정한` 것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할 수 있다. 동료 원숭이가 포도를 얻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원숭이들은 오이와의 교환을 만족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두 평등하게 갖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최후통첩게임에서 일종의 테스트를 통해 보다 능력있는 사람이 돈의 배분을 결정한다고 했을 때 그의 제안을 거절할 확률은 그 이전에 비해서 훨씬 크게 줄어들었다.

- 대중의 지혜 144p

인간의 모호한 특성

20세기 중엽, 인간이 동물적인 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모든 이야기는 이단시 되었고 반대로 동물의 마음을 거론하는 것 또한 금기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1960년 한 젊은 여성에 의해 완전히 변했다. 그녀는 탕가니카 호수 근처에서 침팬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후에 그녀는 이렇게 썼다.

"나는 얼마나 순진했던가. 나는 대학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동물은 성격을 가져서도 안되고, 생각해서도 안되며 감정이나 고통을 느껴서도 안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런 걸 몰랐기 때문에 나는 내가 본 것을 기록할 때 금지된 모든 용어와 개념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내가 곰비에서 관찰했던 그 놀라운 일들을 마음껏 묘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곰비의 침팬지들과 함께 했던 제인 구달의 삶은 갈등과 개성으로 가득찬 멜로 드라마처럼 읽혀진다. 그녀의 글에서는 야망과 질투와 사기와 애정이 느껴진다. 또 개성이 구별되고 동기가 감지되고 공감이 솟구친다.

"에버레드는 점차 자신감을 되찾았다. 분명 어느정도는 피간이 항상 자기 형제와 같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파벤은 여전히 험프리와 친했고, 피간은 영리하게도 그 강력한 수컷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게다가 두 형제가 함께 있을 때에도 파벤은 매번 피간을 도와주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한참 후에나 깨달았지만 구달의 의인화는 인간이라는 특별한 존재의 가슴에 대못을 막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인원이 원시적인 자동기계가 아니라 인간만큼이나 복잡하고 정교한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지능적인 존재임이 밝혀졌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물러가고 유사성이 관심의 초점으로 부상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만이 생식보다는 쾌락을 위해 섹스를 하는 동물이라고 했지만 침팬지의 사촌인 보노보는 인간이 가능한 모든 섹스를 즐거움을 위해서 행한다.

`호모 하빌리스`는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인간의 특징임을 말한다. 그러나 제인 구달의 스승인 리키는 제인의 관찰결과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도구를 재정의하거나, 인간을 재정의하거나, 침팬지를 인간으로 받아들여야 할거 같다."

또한 우리는 인간만이 문화(경험을 통해 학습한 습관을 모방으로 세대간 전달하는 능력)를 가졌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서아프리카에 사는 침팬지는 여러세대에 걸처 어린 침팬지에게 돌에 견과류를 놓고 돌로 쳐서 깨뜨리는 법을 가르치고 전수한다. 또한 사냥 전통, 부르는 신호방법, 사회 체계가 집단마다 완전히 다른 범고래는 어떠한가?

우리는 인간만이 집단전쟁을 하고 동료를 죽이는 동물이라 추정했다. 그러나 곰비의 침팬지들은 1974년 그 추정을 말끔히 정리했다.
우리는 인간이 유일하게 언어를 지녔다고 믿었다. 그러나 원숭이에게는 다양한 포식자와 새의 종류를 가리키는 어휘가 있다. 아직 동물이 문법과 구문론을 습득할 수 있다는 증거는 없지만 돌고래에 대해서는 명확한 판단이 유보된 상태다.
몇몇 과학자들은 침팬지에겐 `마음의 이론` 즉 , 다른 침팬지의 생각에 근거해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침팬지는 자주 속임수를 쓴다.

- 본성과 양육 32p

암시를 통한 유혹

암시는 심리에 영향을 미친다는 면에서는 비슷하지만 지시나 명령과는 달리 듣는 사람이 완전히 무장해제 당해 그 출처를 따져보지도 않고 그것이 마치 자신 스스로의 결정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인간은 습관에 의해 돌처럼 굳어진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고 전혀 바꾸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암시의 기술이 훨씬 효과적이다. 암시의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평범한 말이나 우연한 만남을 가장해 뭔가 힌트를 주면된다.


생제르맹 백작은 18세기의 실론인물로 유명한 사기꾼이었다. 그는 암시의 달인이었는데 그의 대화술의 핵심은 모호함이었다. 우선 넌지시 내던진 몇마디 말로 활기찬 대화를 이끌어냈고 사람들이 스스로 궁금해서 질문하도록 만들었다.

나폴레옹도 비슷한 방법을 썼다. 그는 러시아와 혼인관계를 맺기 위해 사교모임에서 러시아 황제에게 아내 조세핀이 불임이라는 암시를 던지고는 곧바로 화제를 바꾸는 방법을 썼다. 또 헤어지기 직전 자식이 없어서 허전하다는 이야기를 흘렸다. 몇주가 지나자 황제는 신하들에게 프랑스와의 혼인동맹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암시의 타이밍도 매우 중요하다. 상대방이 지금 무슨일이 벌어지는지 잘 모르는 순간이 기회다. 가령 긴장이 풀려있거나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거나 숨을 들이쉬기 직전, 잠자기 직전 등이 좋다.

프랑스의 유명한 매춘부 니농 드 랑클로가 말했듯이 유혹을 할 때 상대에게 직접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금물이다. 다시말해 행동이나 태도를 통해 상대가 느낄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 유혹의 기술 328p